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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기도 (단9:1-19)

본문

지난 두 주일에는 기도에 대하여 생각했었습니다. 전전 주일에는, 주님이 자기 일을 하시면서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마음을 주셔서 자기의 일을 하도록 요청하는 것이 기도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바꾸어 하면 기도는 주님이 자기 백성에게 자기의 일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힘이 모자라서 자기 백성을 참여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 있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는 방편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백성으로 하여금 주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서 그것을 바라보고 살도록 하는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과연 성경에서 기도가 이런 것이었던가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구약과 신약에서 기도의 사례를 몇 개 실례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성경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은 제가 말씀 드렸던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예증들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먼저 창18장을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여기는 아브라함이 기도하는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부패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계획을 밝히셨습니다. 이 계획을 들은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지 않도록 요청을 합니다. 의인 50인에서 45인, 40인, 30인, 20인, 10인까지 내려가면서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10인까지 아브라함이 말했지만 사실은 거기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건져내기는 했지만 그것도 롯의 의로움 때문에 건져낸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기도한 것 때문에 롯을 건져 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는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의인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 롯을 비롯하여 의인이 상당수 거기에 있지 않겠는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물론 아브라함이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적어도 자기 조카 롯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의로운 사람을 악인과 함께 죽인다면 어찌 공의롭게 행한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하면서 의인을 살려 주시도록 하나님께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인은 하나도 없지만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시고 롯을 구원해 내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런 요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에게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를 만들려고 택하였다는 것을 말씀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의와 공도를 지키는 나라를 만드시려고 하는 분이 의인을 죽여서 의와 공도에 위배되는 일을 행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질문한 것입니다. 악한 사람들이야 죽이는 것이 마땅하지만 의로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하신 분이 의로운 사람까지 죽인다면 그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신임할 수 없는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기도가 하나님의 약속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의와 공도를 행하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이루실 하나님이 의인을 죽인다면 친히 그 나라의 성격과 배치되는 일을 하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지 않는 심판은 하나님의 약속과 맞지 않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하나님께 항의하였던 것입니다(창18:25).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시고 그 뜻을 가지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항의성 질문도 하면서 요구하고 대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계획을 알리셨고 아브라함은 그 계획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 계획에 비추어서 하나님의 일을 논의했던 것입니다. 이런 일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약속을 더욱 분명하게 인식하게 하셨고 또 그것을 신뢰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모세의 기도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세의 기도는 출애굽기 32장에 나옵니다. 이것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십계명을 위시한 여러 가지 가르침을 받는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모세가 산에서 한 동안 내려오지 않자 산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금송아지를 우상이라고 생각했기보다는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때에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완악함을 아시고 아예 초기에 그들을 진멸하고 모세를 통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큰 나라를 이루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예 안될 사람들은 초기에 포기하시고 모세를 통해서 새롭게 시작하실 의도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에 모세는 기도했습니다.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 없애버린다면 하나님이 애굽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인도하여 내었다는 소리를 애굽 사람들에게서 듣게 되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에게 약속한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하나님이 허락한 온 땅을 주어 기업이 되게 하겠다고 하셨는데 범죄했다고 비리시고 죽이시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입니다. 모세의 이 기도에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시고 말씀하셨던 화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지 아니하셨다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좀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심판하려고 하신 것이 잘못 생각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까 하나님이 모세보다 생각이 짧고 자비롭지도 않다는 말씀입니까 모세의 자손이라고 범죄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을 다 생각해 볼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에 이스라엘을 다 없애고 새로 시작하려고 생각하셨던 것은 옳은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믿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나중에 광야에서 다 죽음을 당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불신앙하는 사람들은 시간이 조금 늦었다 뿐이지 결국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애초에 없애겠다고 한 것이 결코 잘못 판단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판단은 옳은 판단이었습니다. 옳은 판단이라고 한다면 그대로 실행하시지 왜 모세의 기도를 듣고 심판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이유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애굽인들의 조롱과 언약을 상기하면서 기도했을 때 자기의 옳은 뜻을 돌이킨 것은 모세에게 언약의 중요성을 이해시키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모세가 든 이유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애굽에서 조롱 받는 것이야 좀 받으면 됩니다. 애굽을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조롱한다고 답답할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언약을 들어서 구했지만 그것도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언약을 안 지킨다는 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자손들을 통해서 큰 나라를 이루어도 역시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성취됩니다. 그러니 마땅한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이 양보한 것 같이 하신 것은 모세가 옳기 때문이 아니라 언약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모세가 언약을 들어서 기도하니 그것에 응답함으로써 언약이 그만큼 소중하며 하나님 자신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모세에게 인식시키기 위하여 이렇게 하신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모세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이 일시적으로 양보하신 셈입니다. 여기서도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그 속에서 요구하고 들으시는 것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그 속에서 하나님이 언약의 소중성을 가르치는 일을 하시는 장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도 기도 속에서 이러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또 받아야 합니다. 말씀만이 신자의 생명이 아니라 기도 역시 신자의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그 속에서 주님에 대하여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에 대하여 배울 수 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말씀과 기도는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하나이면서 좀 다른 양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 번째는 한나의 기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한나는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에 성전에 올라가서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통곡은 단순히 대를 이을 아들이 없음 때문에 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에 약속된 왕이 없다는 것 때문에 슬퍼하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이 무법천지가 된 것은 약속한 왕이 없어서 그런 줄 알고 그 왕을 기다렸습니다. 아무도 약속된 왕을 기다리지 않는 상황에서 그녀 혼자서 그 왕을 기다리며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아들을 주시자 그 아들은 왕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실 징조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 즉 '하나님이 들으셨다'고 했던 것입니다. 단순히 아들을 주셨다는 것이 아니라 왕을 주실 것에 대한 들으심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이름을 붙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 왕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살 것을 내다보았던 것입니다. 어디서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결과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성령님으로 그러한 깨달음을 한나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생각지도 않았던 기도를 그녀 혼자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바라고 기도하였던 것은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를 기다리며 메시아 왕을 기다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인지 알게 하셨고 또 그것을 바라보고 기도하게 하셨고 그것에 자신이 참여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셨습니다. 구약부분에서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다니엘의 기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은 이방 나라 바벨론에서도 예루살렘을 택하신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것은 약속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70년을 채우고 나면 이스라엘이 포로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여러 나라들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나라가 올 것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은 결국 이 나라를 바라보면서 기도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름을 두셨고 또 그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으로 옛부터 말씀해 왔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기도들은 약속이라는 줄거리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기도는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구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다 응답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요 또 그 나라를 이루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기도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이 오심으로 응답을 받은 셈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처음에 제가 제시했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자기의 계획을 알리시고 자기 마음을 주셔서 자기 백성에게 주셔서 그 속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도에 대하여 응답은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사람의 눈으로 직접 보든지 보지 아니하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그 약속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하늘 생명이 그에게 와 있다는 증거요 땅의 생명이 끝이 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현상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묻는 것은 여러분도 이런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주신 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입니까 그것을 향해서 소원을 가지고 구하고 있습니까 이러한 소원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기도로 표출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구함이 있고 질문이 있고 여러분의 생각을 제시함도 있습니까 여러분의 요구에 궁극적인 응답이 이미 십자가에서 주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현재에 참여하고 있다면 미래에도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면 미래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나라의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고 있는 사람입니까 어제 저는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서울 쪽에 있는 사람들인데 성경 공부하겠다고 모였는데 강사에 대하여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미제가"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이지 후에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미국에서 박사학위 따온 사람인가"라고 묻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미국에서 왔습니까
그런데 주의 말씀을 찾지 않고 왜 미제를 찾습니까 얼마나 진리에 대하여 모욕적인 태도입니까 진리가 주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에 대한 최소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말하러 온 사람에게 '미제가'라는 반응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이 진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식의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관심은 인간적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박사학위를 가졌느냐는 말을 그렇게도 모욕적인 말로 주고 받고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주님을 정말로 알았다면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그렇게 비인격적이고 모욕적인 말로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데 있지 않고 세상적인 것으로 꽉 있습니다. 그러고도 목사인 양 믿는 양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사람들입니까 여러분들도 본성상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고 또 지금도 그런 성벽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죄성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주님의 나라에 대한 관심이 여러분 속에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사람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주님이 죄인인 여러분 속에 일하시고 계신다는 것과 여러분이 그 나라에 참여한 사람이라는 것이 거짓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여러분을 그 나라에 참여하여 소원을 가지고 살게 하는 사람입니까 주님이 기도로써 여러분을 주님의 뜻에 참여하게 하고 있는 사람입니까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묻고 싶은 질문입니다. 모두가 이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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