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군을 부르라 (암5:16-17)
본문
1. 최근 어느 신문 '시론'에 다음과 같은 공감대를 갖게 하는 글을 읽 게 되었습니다. '경제가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새삼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된 소나 무가 있습니다. 이름은 "모래시계 소나무".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 역 플 랫폼에 서 있는 네 그루의 소나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수령도 20년 정도 밖에 안됐고 보통사람의 키보다 약간 큰 소나무입니다. SBS의 인기드라 마 "모래시계"의 주인공인 혜린(고현정)의 배경장면에 잠깐동안 등장하면 서 볼거리의 하나가 됐습니다. 이 "모래시계 소나무"는 관광객들이 붙인 이름을 정동진역에서 그대로 썼다는 것입니다. 세찬 바람에 시달려 젊은 나이에 허리가 굽어져 있는 소나무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애처로움을 느끼게 한다고 합니다. 계절이 바뀌는 요즘 정동진역은 안팎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지난 일요일(15 일)에도 6천여명의 관광객이 밀어닥쳐 낮 한때는 역구내가 통제불능 상태에 놓이기도 했다고 그날 근무자 김용욱씨가 전했습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엔 "모래시계 소나무"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거나 멀리서 그 소나무를 망연히 바라보는 관광객들이 있습니다. 대개가 30대 또는 그 후반이상의 세대들입니다. 물론 대학을 갓 졸업한 듯한 20대도 없지 않 습니다. 얼핏 보아 직장이 불안하거나 실직 등 어려운 이 시대의 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도 듭니다. 버팀목도 없이 맞바람에 시 달리는 "모래시계 소나무"를 자신이 겪는 고통처럼 생각하거나, 허리가 굽어진 그 소나무를 자신의 현재 모습으로 상상하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대다수의 국민은 지금 국제통화기금(경제위기)사태라는 예기치 못했던 큰 재앙에 빠져 있습니다. 자연에서 부는 그 어떤 태풍보다 강력하고 파괴 적인 바람입니다. 피해범위도 전국적이고 모든 산업,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실직자는 물론 노숙자, 방랑자등이 무수하게 늘고 있습니다. 거처만 확실하다면 가족이 헤어진 가정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아내 또는 자녀들의 무작정 가출 등으로 파괴돼 가는 가정이 나날이 늘어나는 실정입니다. 이제 시작단계인 대기업들의 대량해고,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때 우리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바람 은 잠재워야 한다. 지난 정권이 일으킨 세계화 바람이 온 국민을 착각과 환상 속에 빠져들게 하고 한국경제가 경제위기병원의 응급수술대에 올려지도 록 만들지 않았는가. 모두 무지개를 탄 하늘사람들처럼 만들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의 주변엔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국제적 돌풍의 가능성이 산재 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중국은 위안貨(화)를 평가절하하지 않겠다 고 발표했지만 그것도 항구적인 정책으로 보아선 안될 형편입니다. 중국 이 자국의 경제상황변동에 따라 언제 환율을 조정, 거센 황색환풍(黃色換 風)을 일으키게 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의 불안한 정국상황과 경제위기도 우리에겐 불안감을 갖게 하는 변수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남아의 태풍으로 둔갑, 한국경제를 강타하지 않을까 걱정스 럽기 짝이 없습니다. 외환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지금 국내외에서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칠 경우 한국경제는 쉽게 재기하기가 어 려운 상태에 놓일 가능성이 너무나 큰 것입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소위 "북풍" 문제도 장기화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다.
"모래시계 소나무"는 원래 해풍으로부터 기차승객을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고 합니다. 크게 굽어진 국가경제의 허리를 조속히 펴도록 하기 위해, 또 경제위기사 태라는 모진 바람에 시달림을 받는 국민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모래시계 소나무" 같은 바람막이 나무를 이 땅에 더 많이 심어야 할 것입니다.' "모래 시계"의 여대생 주인공은 당시 군부독재의 불의에 항거해보지만 기득권세력에 여지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독재 세력에 밀려 바다가 보이는 강원도 시골역 플랫폼으로 잠시 현실을 도피해봅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 세찬 바닷 바람이 불어오고 그 곁에 해풍에 늘 상 시달려 허리가 굽어진 한 그루 소나무는 마치 그 여대생 주인공과 학 생 저항세력의 애처러운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 "모래시계 소나무"를 힘없는 민초 서민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듯 합니다.
2. 경제위기시대에 들어 계속 증가해온 생계형 범죄가 이제는 점차 강력범 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한일은행 권총강도범은 오토바이 점을 운영하다 2억 여 원의 빚에 쪼들린 끝에 범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범인은 전쟁기념관에 외벽을 타고 잠입해 전시된 권총을 훔치고, 부족한 부품을 시내에서 구입한 뒤 괌(GUAM)까지 날아가 사격장에서 실탄을 구해오기까지 했습니다. 범인이 진술한 범행동기가 사실이라면 이처럼 주도면밀하기 그지없는 계획은 역설적으로 생계난과 생계형 범죄의 실상 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생계형 범죄가 이제는 이처럼 강 력범화할 뿐만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는 점이고, 반면 이 강도에 대항하여 '죽기 살기로' 이단옆차기로 대응하여 돈을 지키고자 하는 세태가 더욱 더 우리를 서글프게 합니다. 지난해 말 실직해 보름째 집에서 소일하고 있는 강 아무개씨는 최근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의 방학 숙제 그림일기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집안 방에서 아빠가 모로 누워 비디오를 보는 모습을 그려놓고, 일기에는경제위기가 아빠를 회사에 못나가게 했다. 이 제 우리 식구는 어떻게살아야 할지 죽고만 싶다라고 써놓았던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집단 우울증에 빠진 상황에서 더욱 심각한 증상으로 발 전한 쪽은 아무래도 경제위기 체제 이후 파산 상태에 처한 개인들입니다. 이 들 가운데는 자기의 증상을 치유할 겨를도 없이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올해 들어 빚에 쪼들린 영세상인주부중소기업인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하루에도 213건씩 신문 지면에 오르고 있습니다. 경제위기 증후군이 국민들에게 자살하고 싶은 유혹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실 제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제위기형 자살'이 급증,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지난 2개월 동안 접수된 자살 사건이 12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3배나 증가했다고 밝 혔습니다.
한강 투신자살 건수도 지난 2개월간 13건으로 과거 월평균보 다 5배 가량 증가했습니다. 선량한 사람이 우발적으로 사고를 저지르는 경우도 잦아졌습니다. 밀린 임금문제로 다투다 사장에게 흉기를 휘두른 20대 공원, 집에 먹을 식량이 없어 가게에서 봉지쌀을 훔친 40대 가장, 빚독촉에 시달리자 신생아를 유괴한 임산부 등등. 이런 종류의 사건은 피의자들이 절박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이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생계가 막연한 사람들에게는 법과 윤리, 도덕 과 체면이 소용 없습니다. 이 날리통에 '피라미드식 판매'사기범들이 날 뛰는 바람에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실업 자가 1만명씩 생겨나 지금은 150만에서 20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4인가 족으로 계산하면 600만명에서 800만명이 실직으로인해 배고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금의 사태를 625이후 최대의 국난 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서울역 남대문쪽 지하도에서 국밥 한 그릇으 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5백 여 명의 실업자 및 행려병자들과 서울역 대 합실에서 노숙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6.25 전쟁참화를 연상케 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돌아갈 가정이 있고 부양해야 할 처자식이 있는 한 집안의 가장들입니다. 그럼에도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며 무료급식에 허기를 달래고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것 입니다. 어떤 실직자는 따분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 지하철 순환선을 타 고 하루에 열 바퀴를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 모두는 한 집안의 든든한 가장이요, 자랑스러운 아버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집을 나와 정처없이 떠도는 부랑자(浮浪者)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런 대량 실직사태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은 가정이라는 '둥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전에는 밖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지 친 몸과 마음을 누일 가정이라는 안식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슬 플 때나 기쁠 때나' 고락을 함께 하던 그 둥지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친 경제위기한파는 우리 경제뿐만 아니라 마침내 우리 가정의 밑뿌리까지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국제통화기금(경제위기)시 대를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이러한 슬픈 행렬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집에도 떳떳히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심정이나 돌아오지 않는 가장을 기다리는 가족의 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착한 이들을 누가 거리로 내몰았습니까 하루속히 이들이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당연히 정부와 정치권 및 기업의 몫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통분담에도 이들이 마땅히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너무 비정하고 무책임하 기까지 합니다. 정치권은 이런 서민들의 절박한 처지는 망각한 채 오로 지 출세와 당리당략에만 정신이 팔려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고스톱'으 로 시간을 죽이고, 판사와 변호사는 돈에 팔려 서민들의 화급한 민사재 판을 2년에서 5년씩이나 끌어가고, 검사들은 가재도 게 편이라고 이들 '돈판사' '돈 변호사'에 대해 그 많은 돈을 푼돈이라며 기소유예 처분하 며, 누구말대로 '권력의 초보운전자들'은 난폭운전을 즐기고 있고, 기업인 들은 뼈를 깎는 자구노력은 외면한 채 근로자들의 목을 치는 일에만 신 바람이 나 있습니다.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은 이 나라의 각계 각 층의 '지도층인사들'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한파로 고통을 당해 몸과 마음 이 병들어가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입니다. 게다가 병원까지 발 벗고 나서 환자들을 슬프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11일 서 울지검 특별수사부는 서울의 13개 대형 종합병원들이 환자들을 상대로 진료비를 이중으로 청구하는 등 부조리를 저질렀다고 발표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1996년 한해 동안 26만여건(명)을 '사기쳐서'챙긴 진 료비는 무려 1백58억3천만원. 그러나 실제 병원들이 챙긴 부정한 진료비는 그 이상이리라 추정됩니다. 특히 사람의 생명을 구제한다는 병원이 여러 가지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환자들로부터 부당한 진료비를 받아냈 다는 부도덕성은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검찰 수사대상이 되었던 13개 종합병원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병원 에서 환자를 상대로 공공연하게 부당 진료비를 받고있으며, 현재로서는 그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서 몸이 아프면 싫어도 별 수 없이 찾아가야 하는 곳이 병원입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은 병원에서 의 료진의 도움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고 정신적인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우리 나라 병원들은 환자들에게 만족할 만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고, 불친절하며, 환자를 진료하는 실력도 부족 할 뿐더러 오히려 환자들로부터 비싼 진료비를 받아내고 있습니다. 한술 더 떠 환자에게 진료비 사기까지 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 병원 들의 현주소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 져서 온 몸에 멍들어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거의 완벽하게 건조되었는데도 단 한가지 결함 때문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결함 투성이의 대한민국호는 침몰해 가고 있는데, 소위 지도층은 배의 부품을 뜯어 가지려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예언자 아모스 눈에 비친 이스라엘 왕국은 비관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질서가 바로 잡혀 국가가 번영하고 민족역사가 자랑스럽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무도 망국으로 치달 리는 역사의 내리막을 붙잡아 올려 구원시킬 수 없음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살고 있었던 그 시대상황, 다시말해 나라의 정치현실, 국민의 생활의욕의 감퇴, 국민도덕의 부패, 방향감각의 상실, 국가 안보 의 불가항력적인 위기 등 비관적 현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모스는 성 격적으로 쾌활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역사를 비관적으로 만 보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주권자, 부유층 유 지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종교적인 권위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며 사 회정의와 인권선언과 부정부패에 대한 규탄을 과감하게 한 것을 보아 그는 국가 사회의 어두운 면만을 보고 눈물만을 흘리고 있을 소극적이고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모스는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울 줄 아는 눈물의 소유자였고, 슬픈 일에 애통하고 잘못된 일에 통탄하고 모순된 일에 의분을 느끼고 무너져 가는 사직의 운명과 함께 통곡할 줄 아는 진정한 선지자였습니다. 아모스는 오늘 본문(5:16-17)에서 통곡해야 할 이유로 "하나님 이 그 역사 한 가운데로 지나가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통곡해야 할 때가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 마 예수께서 지금 이 나라를 보신다해도 우리 모두가 거리 거리로 나가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일 것입니다. 통곡할 눈물마 저 없거든 울음군을 불러서라도 울부짖어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북왕국수도 사마리아 여인들에게만이 아니 라 모든 백성 에게 "통곡하라"고 권고합니다. 나라가 더 이상 황폐케 되 지않도록, 과거 예레미야 당시 패망하여 황폐했던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애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 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 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아모스의 통곡 권고는 이스라엘 나라가 이러한 비통한 운명으로 바꾸 어지지 않도록 나라의 부정 부패에 대하여, 집권자에게 밟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인권에 대하여, 부유층의 경제적 착취에 대하여, 망국으로 몰아가는 국민윤리의 타락에 대하여, 권력에 아부하는 종교인에 대하여, 역사의식이나 가치관도 없이 향락과 이기심에 도취한 사람들에 대하여, 특히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를 절대화시키고 있는 권력 자에 대하여 통곡할 줄 아는 백성이 되라고 아모스는 권고합니다. 사실 이 나라를 이 모양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저는 서슴없 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믿으면서 소위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나라 를 망쳐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치며 애곡하며 울음군을 불러서라 도 통곡해야 할 사람은 바로 이 땅에 기독교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심 판의 칼을 들고 이 나라 역사에 개입하시기 전에 베옷입고 거리 거리마 다 나가 주저하지말고 통곡하며 회개해야 할 사람은 이 땅에 지도층 기독교인들입니다. "(암5: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 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암5: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사실 한 개인이 통곡할 일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한 민족국가가 통곡 해야 할 운명에 놓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전환점을 예상할 수 있는 대사건입니다. 아모스가 긴박하게 요청하는 통곡은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을 내다본 슬픔에서 나온 것입니다. 외적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나라 자체 내에서 볼 수 있는 각계 지도층의 타락과 부정부 그리고 국민의 윤리적 타락 때문에 생길 내면적인 붕괴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이러 한 망할 징조를 말하며 경고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통곡은 아모스 자신의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서 되어진 것입니다. 아모스가 말하는 통곡은 국가운명의 비운을 슬퍼하여 "오호라! 오호라! 통곡하지만, 예레미야의 경우는 그 슬픔의 도가 지나 눈물이 나오지 않 고 통곡도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렘22:1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 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한 나라가 망했는데도 통곡하는 백성이 없다면 이 얼마나 처참한 현실 입니까 '오호라' 이 말은 "슬픔을 못 이겨 몸을 뒤흔드는 것"을 뜻합니다. 이 '통곡'의 행동은 큰 울음소리와 자기 가슴을 치는 행동을 동반합니다. 때로는 이 슬픔이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옷을 찢으며," 또한 " 금식하는 행동도 따른다"(렘 4:8; 삼하 3:31; 삼하 1:12). 지금은 나라 민족 을 위하여 굵은 베옷을 몸에 두르고 옷을 찢으며 금식하며 통곡해야 하는 긴박한 때입니다. 슬픔의 도가 지나쳐 눈물마저 사라졌거든 울음군이 라도 불러서 울지 않으면 안될 시기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통곡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모든 "광장"과 "거리"로 나가 통곡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망국의 비탄과 곡 성이 들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무너지고 황폐해질 위기에 빠진 나라 민족의 운명을 위하여 도시에서는 넓은 광장과 거리마다 곡성이 들 리고, 농촌에는 들에 일하러 나간 "장정들'까지도 집으로 불러와서 통곡 하게 하고, 가족들끼리만의 통곡으로는 그 슬픔을 다 표할 수 없어서 직 업적인 "울음군"을 불러다가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들에 나간 농부를 불 러 와서 통곡을 하게 한다는 것은 생업을 포기한 비극적인 상황을 암시 해 주기도 합니다. 또는 들에 나간 농부를 불러온다는 이 상황이 비극적 이라 함은 적군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집에 남아 있던 식구들은 졸지에 다 참변을 당해 죽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위하여 통곡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들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참변을 면한 사람들을 불러와서 통곡해야 할 일 임을 말한다고 상상합니다.
비극적인 국가 운명이 광장과 거리가 있는 도시만이 아니라, 포도원과 농부가 있는 농촌에까지 미치는 전 국가적, 전 민족적 비통한 불행이 임박했기 때 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의 종말을 눈 앞에 보고 역시 이러한 직업적인 울음군을 불러와서 슬픔과 탄식을 해야 할 역사의 비극이 이스 라엘 백성의 죄 때문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렘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렘9:18)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렘9:19) 이는 시온 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 게 수욕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 었음이로다 함이로다." 이 노래도 아모스의 노래와 같이 자기 나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내다보 면서 이젠 구원받을 길이 없고 "멸망!"그 한 길로만 치닫고 있는 것을 단 순한 예언자의 직감에 의한 감상이나, 정치, 경제, 교육 등 문화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의 결과에서 나온 노래가 아니고 역시 아모스의 노래와 같 이 여호와의 심판을 선언한 노래입니다. 한 나라의 주권이 백성의 이익 과 그 봉사의 정신을 가지지 못하고 권력의 연장과 거기에 이권과 명예 와 향락과 생명을 걸고 아부하고 있는 정부관리, 경제인, 문화인, 종교인 들이 있는 이상 도시나 농촌이나 마찬가지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가는 농촌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미1: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 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미1: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 이니라 (미1:10)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지어다 베들레아 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 (미1:11)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미1:12)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미1:13)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 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미 1:14)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 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미1:15)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 라 (미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여하튼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우리 형편은 초 상집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울음군을 불러서라 도 울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때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은 이 상징적인 의미로써 자기 조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 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시80:5)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시80:6)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시80: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 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시80:9)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 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시80: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시80:11) 그 가지가 바다까 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 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시80:13)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시80: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시80: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시 80:16)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이 시편은 대표적인 민족 탄식시입니다. 여기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한 "포도원"으로 비유하여 하나님 자신이 심고 가꾸신 포도원이 야수들에 의하여 짓밟히고 그 아름다운 과실이 도적당하고 짓밟히게 된 것을 탄식 하고 있습니다. 이 포도원은 본래 보잘것 없는 한 작은 포도원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심었다고 한 대로 이 민족의 역사는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 게 시작한 이 나라는 중동 아시아 세계를 장악할만큼 장하고 자랑스럽게 자랐습니다.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인근 작은 민족국가들의 조공을 받을 만치 주권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포도원은 이제 들짐 승들에게 짓밟히는 패망의 포도원이 되었습니다. 그 패망이 포도 종자가 잘못 선택된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예언자 이사야는 그의 유명한 "포 도원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 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 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 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이사야도 자기 나라의 죄와 불의를 보고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의 징 계를 받아 그 아름다워야 할 포도원이 들포도밭이 되어버린 것을 탄식하 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중심한 예언자로서 수도 집권층, 지도 층, 부유층에서 볼 수 있었던 온갖 불의와 부정에 침묵을 지킬 수 없어 서 이 "포도원 노래"를 환희의 노래라기보다 슬픈 애가로 지어 불렀습니다. 아모스 역시 그의 통탄하는 원인을 포도나무 자체나 그 땅 때문이 아니라 이 포도원을 가꾸어야 할 책임자인 지도자와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았다고 폭로합니다. 이 한반도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 좋은 포 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거늘 어찌 슬픈 애가를 부르지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불모지 같은 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 나무를 심었으나 거둬들인 것은 먹을 수 없는 들포도나 빈 껍데기뿐인데 어찌 패망의 포도원이라 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의 철퇴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80:5)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 게 하셨나이다." 지금은 나라 민족을 위해 "눈물" 양식을 먹으며 "다량의 눈물"을 마셔 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라."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 사 한복판으로 지나가심으로 생겨질 비극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 란 말은 "인간의 내면성" 또는 "영혼의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심부를 통과한다는 뜻은, 그 역사의 중심에 대하여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간섭하신다는 사상은 지극히 구약적이며 사실 출애굽기 12장 1절에 하나님이 애굽의 역사에 간섭하심으로 큰 재난이 임했습니다. "(출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 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 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출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 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출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 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역사에 간섭하셔서 애굽 한 가운데로 지나가심으로 한 나라에 비극적이고 비통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대면을 한다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책임성을 감당 해야 할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얼마나 진실히 자기의 사회적인 책 임을 감당했는가를 물어, 어디에 하나님의 질서가 거부되었으며, 짓밟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입니다. 각계 각층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제대 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병들 고 갇히며 눌린 사람들에 대한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임이 제대로 수행 되고 있는지를 심문하는 일입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위기를 직시하고 사회정의를 외쳤다는 것은 나라의 비극적 운명을 바라는 마음 에서가 아니라 그 망해야 할 최후의 순간에서라도 나라의 운명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의 호소를 들어 주었습니까 아무 도 그의 호소를 듣고 울지 않았습니다. 울음군도 부르지 아니했습니다. 아모스의 마음은 그래서 더 안타까웠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를 이렇 게 비유하여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눅7:31).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눅7: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 민족과 자신의 삶 한 가운데 지나가시는" 심판의 때에 슬피 울며 이를 갈지 말고 지금 울음군을 불러서라도 울 수 있는 비통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라를 거덜나게 하는데 한 몫 을 한 계층이 소위 '높은 데 있는' 지도층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높은 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족속들이 지도층 기독교인들이었 습니다. 그러면서도 경제난국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베옷으로 갈아입고 길 바닥에 나 앉아 통곡하기는커녕 기득권보호에 급급한 탐욕에 찌든 추악 한 작태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포도원'을 망쳐놓은 자들은 '높은 데 있는' 지도층 인사들인데도 그 고통과 아픔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낮 은 데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뿐입니다. 예수께서 이 시대에 우리 들에게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눅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 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시대를 놓고 애통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위를 보면 눈물이 아니라 울분밖에 쏟아질 것이 없을지라도 아래를 보면 눈물이 절로 날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의 고통과 아픔을 바라보고 애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의 위에 있는 지도층 인사 들이여, 눈물이 아깝거든 아래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나라 민족을 위해 울음군이라도 불러다 울 수 있는 티끌만한 양심이라고 보여주 기 바랍니다.
대다수의 국민은 지금 국제통화기금(경제위기)사태라는 예기치 못했던 큰 재앙에 빠져 있습니다. 자연에서 부는 그 어떤 태풍보다 강력하고 파괴 적인 바람입니다. 피해범위도 전국적이고 모든 산업,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실직자는 물론 노숙자, 방랑자등이 무수하게 늘고 있습니다. 거처만 확실하다면 가족이 헤어진 가정은 그래도 나은 편입니다. 아내 또는 자녀들의 무작정 가출 등으로 파괴돼 가는 가정이 나날이 늘어나는 실정입니다. 이제 시작단계인 대기업들의 대량해고, 구조조정이 본격화할 때 우리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하게 될지 예상할 수 없습니다. 바람 은 잠재워야 한다. 지난 정권이 일으킨 세계화 바람이 온 국민을 착각과 환상 속에 빠져들게 하고 한국경제가 경제위기병원의 응급수술대에 올려지도 록 만들지 않았는가. 모두 무지개를 탄 하늘사람들처럼 만들지 않았던가. 지금 우리의 주변엔 언제 불어닥칠지 모를 국제적 돌풍의 가능성이 산재 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중국은 위안貨(화)를 평가절하하지 않겠다 고 발표했지만 그것도 항구적인 정책으로 보아선 안될 형편입니다. 중국 이 자국의 경제상황변동에 따라 언제 환율을 조정, 거센 황색환풍(黃色換 風)을 일으키게 될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의 불안한 정국상황과 경제위기도 우리에겐 불안감을 갖게 하는 변수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동남아의 태풍으로 둔갑, 한국경제를 강타하지 않을까 걱정스 럽기 짝이 없습니다. 외환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지금 국내외에서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칠 경우 한국경제는 쉽게 재기하기가 어 려운 상태에 놓일 가능성이 너무나 큰 것입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볼 때 소위 "북풍" 문제도 장기화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다.
"모래시계 소나무"는 원래 해풍으로부터 기차승객을 보호하기 위해 심었다고 합니다. 크게 굽어진 국가경제의 허리를 조속히 펴도록 하기 위해, 또 경제위기사 태라는 모진 바람에 시달림을 받는 국민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모래시계 소나무" 같은 바람막이 나무를 이 땅에 더 많이 심어야 할 것입니다.' "모래 시계"의 여대생 주인공은 당시 군부독재의 불의에 항거해보지만 기득권세력에 여지없이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독재 세력에 밀려 바다가 보이는 강원도 시골역 플랫폼으로 잠시 현실을 도피해봅니다. 그녀가 서 있는 곳에 세찬 바닷 바람이 불어오고 그 곁에 해풍에 늘 상 시달려 허리가 굽어진 한 그루 소나무는 마치 그 여대생 주인공과 학 생 저항세력의 애처러운 모습을 상징하는 듯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그 "모래시계 소나무"를 힘없는 민초 서민들이 사랑하고 아끼는 듯 합니다.
2. 경제위기시대에 들어 계속 증가해온 생계형 범죄가 이제는 점차 강력범 화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번 한일은행 권총강도범은 오토바이 점을 운영하다 2억 여 원의 빚에 쪼들린 끝에 범행을 결심했다고 합니다. 범인은 전쟁기념관에 외벽을 타고 잠입해 전시된 권총을 훔치고, 부족한 부품을 시내에서 구입한 뒤 괌(GUAM)까지 날아가 사격장에서 실탄을 구해오기까지 했습니다. 범인이 진술한 범행동기가 사실이라면 이처럼 주도면밀하기 그지없는 계획은 역설적으로 생계난과 생계형 범죄의 실상 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생계형 범죄가 이제는 이처럼 강 력범화할 뿐만 아니라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는 점이고, 반면 이 강도에 대항하여 '죽기 살기로' 이단옆차기로 대응하여 돈을 지키고자 하는 세태가 더욱 더 우리를 서글프게 합니다. 지난해 말 실직해 보름째 집에서 소일하고 있는 강 아무개씨는 최근 초등학교 3학년짜리 아들의 방학 숙제 그림일기장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집안 방에서 아빠가 모로 누워 비디오를 보는 모습을 그려놓고, 일기에는경제위기가 아빠를 회사에 못나가게 했다. 이 제 우리 식구는 어떻게살아야 할지 죽고만 싶다라고 써놓았던 것입니다. 사회 전체가 집단 우울증에 빠진 상황에서 더욱 심각한 증상으로 발 전한 쪽은 아무래도 경제위기 체제 이후 파산 상태에 처한 개인들입니다. 이 들 가운데는 자기의 증상을 치유할 겨를도 없이 자살을 택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올해 들어 빚에 쪼들린 영세상인주부중소기업인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하루에도 213건씩 신문 지면에 오르고 있습니다. 경제위기 증후군이 국민들에게 자살하고 싶은 유혹을 키워주고 있습니다. 실 제로 생활고를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제위기형 자살'이 급증,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서울 강남경찰서는 지난 2개월 동안 접수된 자살 사건이 12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무려 3배나 증가했다고 밝 혔습니다.
한강 투신자살 건수도 지난 2개월간 13건으로 과거 월평균보 다 5배 가량 증가했습니다. 선량한 사람이 우발적으로 사고를 저지르는 경우도 잦아졌습니다. 밀린 임금문제로 다투다 사장에게 흉기를 휘두른 20대 공원, 집에 먹을 식량이 없어 가게에서 봉지쌀을 훔친 40대 가장, 빚독촉에 시달리자 신생아를 유괴한 임산부 등등. 이런 종류의 사건은 피의자들이 절박한 상태에서 저지른 범죄이기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생계가 막연한 사람들에게는 법과 윤리, 도덕 과 체면이 소용 없습니다. 이 날리통에 '피라미드식 판매'사기범들이 날 뛰는 바람에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들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하루에 실업 자가 1만명씩 생겨나 지금은 150만에서 20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4인가 족으로 계산하면 600만명에서 800만명이 실직으로인해 배고픔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금의 사태를 625이후 최대의 국난 이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서울역 남대문쪽 지하도에서 국밥 한 그릇으 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5백 여 명의 실업자 및 행려병자들과 서울역 대 합실에서 노숙하고 있는 수많은 사람의 모습이 6.25 전쟁참화를 연상케 해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돌아갈 가정이 있고 부양해야 할 처자식이 있는 한 집안의 가장들입니다. 그럼에도 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거리를 배회하며 무료급식에 허기를 달래고 대합실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는 것 입니다. 어떤 실직자는 따분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 지하철 순환선을 타 고 하루에 열 바퀴를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들 모두는 한 집안의 든든한 가장이요, 자랑스러운 아버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집을 나와 정처없이 떠도는 부랑자(浮浪者)로 전락한 것입니다. 이런 대량 실직사태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은 가정이라는 '둥지'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전에는 밖에서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지 친 몸과 마음을 누일 가정이라는 안식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젠 '슬 플 때나 기쁠 때나' 고락을 함께 하던 그 둥지마저 무너지고 있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친 경제위기한파는 우리 경제뿐만 아니라 마침내 우리 가정의 밑뿌리까지 뒤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국제통화기금(경제위기)시 대를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이러한 슬픈 행렬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입니다. 집에도 떳떳히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심정이나 돌아오지 않는 가장을 기다리는 가족의 마음이 어떠하리라는 것을 그 누가 알겠는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열심히 일한 죄밖에 없는 착한 이들을 누가 거리로 내몰았습니까 하루속히 이들이 따뜻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 일은 당연히 정부와 정치권 및 기업의 몫이 아닐 수 없습니다. 고통분담에도 이들이 마땅히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은 너무 비정하고 무책임하 기까지 합니다. 정치권은 이런 서민들의 절박한 처지는 망각한 채 오로 지 출세와 당리당략에만 정신이 팔려 '신성한 국회의사당'에서 '고스톱'으 로 시간을 죽이고, 판사와 변호사는 돈에 팔려 서민들의 화급한 민사재 판을 2년에서 5년씩이나 끌어가고, 검사들은 가재도 게 편이라고 이들 '돈판사' '돈 변호사'에 대해 그 많은 돈을 푼돈이라며 기소유예 처분하 며, 누구말대로 '권력의 초보운전자들'은 난폭운전을 즐기고 있고, 기업인 들은 뼈를 깎는 자구노력은 외면한 채 근로자들의 목을 치는 일에만 신 바람이 나 있습니다.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것은 이 나라의 각계 각 층의 '지도층인사들'임에도 불구하고 경제위기한파로 고통을 당해 몸과 마음 이 병들어가는 것은 힘없는 백성들뿐입니다. 게다가 병원까지 발 벗고 나서 환자들을 슬프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난해 12월11일 서 울지검 특별수사부는 서울의 13개 대형 종합병원들이 환자들을 상대로 진료비를 이중으로 청구하는 등 부조리를 저질렀다고 발표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1996년 한해 동안 26만여건(명)을 '사기쳐서'챙긴 진 료비는 무려 1백58억3천만원. 그러나 실제 병원들이 챙긴 부정한 진료비는 그 이상이리라 추정됩니다. 특히 사람의 생명을 구제한다는 병원이 여러 가지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환자들로부터 부당한 진료비를 받아냈 다는 부도덕성은 국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검찰 수사대상이 되었던 13개 종합병원뿐 아니라 전국의 모든 병원 에서 환자를 상대로 공공연하게 부당 진료비를 받고있으며, 현재로서는 그 해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병이 나서 몸이 아프면 싫어도 별 수 없이 찾아가야 하는 곳이 병원입니다. 환자와 그 가족들은 병원에서 의 료진의 도움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고치고 정신적인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우리 나라 병원들은 환자들에게 만족할 만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고, 불친절하며, 환자를 진료하는 실력도 부족 할 뿐더러 오히려 환자들로부터 비싼 진료비를 받아내고 있습니다. 한술 더 떠 환자에게 진료비 사기까지 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나라 병원 들의 현주소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은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 져서 온 몸에 멍들어 쓰러져 가고 있습니다. 타이타닉호는 거의 완벽하게 건조되었는데도 단 한가지 결함 때문에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결함 투성이의 대한민국호는 침몰해 가고 있는데, 소위 지도층은 배의 부품을 뜯어 가지려고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 형국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예언자 아모스 눈에 비친 이스라엘 왕국은 비관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라의 질서가 바로 잡혀 국가가 번영하고 민족역사가 자랑스럽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아무도 망국으로 치달 리는 역사의 내리막을 붙잡아 올려 구원시킬 수 없음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가 살고 있었던 그 시대상황, 다시말해 나라의 정치현실, 국민의 생활의욕의 감퇴, 국민도덕의 부패, 방향감각의 상실, 국가 안보 의 불가항력적인 위기 등 비관적 현실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모스는 성 격적으로 쾌활하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사람이어서 역사를 비관적으로 만 보는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나라의 주권자, 부유층 유 지들과 지도자들, 그리고 종교적인 권위에 대하여 정면으로 도전하며 사 회정의와 인권선언과 부정부패에 대한 규탄을 과감하게 한 것을 보아 그는 국가 사회의 어두운 면만을 보고 눈물만을 흘리고 있을 소극적이고 감상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모스는 시대의 아픔을 가슴에 안고 울 줄 아는 눈물의 소유자였고, 슬픈 일에 애통하고 잘못된 일에 통탄하고 모순된 일에 의분을 느끼고 무너져 가는 사직의 운명과 함께 통곡할 줄 아는 진정한 선지자였습니다. 아모스는 오늘 본문(5:16-17)에서 통곡해야 할 이유로 "하나님 이 그 역사 한 가운데로 지나가신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통곡해야 할 때가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 마 예수께서 지금 이 나라를 보신다해도 우리 모두가 거리 거리로 나가 재를 뒤집어쓰고 통곡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일 것입니다. 통곡할 눈물마 저 없거든 울음군을 불러서라도 울부짖어야만 하는 긴박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 북왕국수도 사마리아 여인들에게만이 아니 라 모든 백성 에게 "통곡하라"고 권고합니다. 나라가 더 이상 황폐케 되 지않도록, 과거 예레미야 당시 패망하여 황폐했던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애2:11)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끓으며 내 간이 땅에 쏟아 졌으니 이는 처녀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 읍 길거리에 혼미함이로다." 아모스의 통곡 권고는 이스라엘 나라가 이러한 비통한 운명으로 바꾸 어지지 않도록 나라의 부정 부패에 대하여, 집권자에게 밟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의 인권에 대하여, 부유층의 경제적 착취에 대하여, 망국으로 몰아가는 국민윤리의 타락에 대하여, 권력에 아부하는 종교인에 대하여, 역사의식이나 가치관도 없이 향락과 이기심에 도취한 사람들에 대하여, 특히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줄 모르고 자기를 절대화시키고 있는 권력 자에 대하여 통곡할 줄 아는 백성이 되라고 아모스는 권고합니다. 사실 이 나라를 이 모양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저는 서슴없 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믿으면서 소위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나라 를 망쳐놓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슴을 치며 애곡하며 울음군을 불러서라 도 통곡해야 할 사람은 바로 이 땅에 기독교인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심 판의 칼을 들고 이 나라 역사에 개입하시기 전에 베옷입고 거리 거리마 다 나가 주저하지말고 통곡하며 회개해야 할 사람은 이 땅에 지도층 기독교인들입니다. "(암5: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 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암5: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사실 한 개인이 통곡할 일도 있어서는 안 되지만, 한 민족국가가 통곡 해야 할 운명에 놓였다는 사실은 역사의 전환점을 예상할 수 있는 대사건입니다. 아모스가 긴박하게 요청하는 통곡은 이스라엘 나라의 멸망을 내다본 슬픔에서 나온 것입니다. 외적의 침입 때문이 아니라 나라 자체 내에서 볼 수 있는 각계 지도층의 타락과 부정부 그리고 국민의 윤리적 타락 때문에 생길 내면적인 붕괴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이러 한 망할 징조를 말하며 경고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통곡은 아모스 자신의 권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서 되어진 것입니다. 아모스가 말하는 통곡은 국가운명의 비운을 슬퍼하여 "오호라! 오호라! 통곡하지만, 예레미야의 경우는 그 슬픔의 도가 지나 눈물이 나오지 않 고 통곡도 할 수 없음을 말합니다. "(렘22:18)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하노라 무리가 그를 위하여 슬프다 내 형제여 슬프다 내 자매여 하며 통곡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를 위하여 슬프다 주여 슬프 다 그 영광이여 하며 통곡하지도 아니할 것이라" 한 나라가 망했는데도 통곡하는 백성이 없다면 이 얼마나 처참한 현실 입니까 '오호라' 이 말은 "슬픔을 못 이겨 몸을 뒤흔드는 것"을 뜻합니다. 이 '통곡'의 행동은 큰 울음소리와 자기 가슴을 치는 행동을 동반합니다. 때로는 이 슬픔이 "굵은 베를 몸에 두르고", "옷을 찢으며," 또한 " 금식하는 행동도 따른다"(렘 4:8; 삼하 3:31; 삼하 1:12). 지금은 나라 민족 을 위하여 굵은 베옷을 몸에 두르고 옷을 찢으며 금식하며 통곡해야 하는 긴박한 때입니다. 슬픔의 도가 지나쳐 눈물마저 사라졌거든 울음군이 라도 불러서 울지 않으면 안될 시기입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통곡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모든 "광장"과 "거리"로 나가 통곡하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망국의 비탄과 곡 성이 들리게 하라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무너지고 황폐해질 위기에 빠진 나라 민족의 운명을 위하여 도시에서는 넓은 광장과 거리마다 곡성이 들 리고, 농촌에는 들에 일하러 나간 "장정들'까지도 집으로 불러와서 통곡 하게 하고, 가족들끼리만의 통곡으로는 그 슬픔을 다 표할 수 없어서 직 업적인 "울음군"을 불러다가 통곡하라는 것입니다. 들에 나간 농부를 불 러 와서 통곡을 하게 한다는 것은 생업을 포기한 비극적인 상황을 암시 해 주기도 합니다. 또는 들에 나간 농부를 불러온다는 이 상황이 비극적 이라 함은 적군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집에 남아 있던 식구들은 졸지에 다 참변을 당해 죽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을 위하여 통곡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들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참변을 면한 사람들을 불러와서 통곡해야 할 일 임을 말한다고 상상합니다.
비극적인 국가 운명이 광장과 거리가 있는 도시만이 아니라, 포도원과 농부가 있는 농촌에까지 미치는 전 국가적, 전 민족적 비통한 불행이 임박했기 때 문입니다. 예레미야는 남왕국 유다의 종말을 눈 앞에 보고 역시 이러한 직업적인 울음군을 불러와서 슬픔과 탄식을 해야 할 역사의 비극이 이스 라엘 백성의 죄 때문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렘9:17)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잘 생각하고 곡하는 부녀를 불러오며 또 보내어 지혜로운 부녀를 불러오되 (렘9:18) 그들로 빨리 와서 우리를 위하여 애곡하게 하여 우리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게 하며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렘9:19) 이는 시온 에서 호곡하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우리가 크 게 수욕을 당하였구나 우리가 그 땅을 떠난 것은 그들이 우리 주택을 헐 었음이로다 함이로다." 이 노래도 아모스의 노래와 같이 자기 나라의 비극적인 운명을 내다보 면서 이젠 구원받을 길이 없고 "멸망!"그 한 길로만 치닫고 있는 것을 단 순한 예언자의 직감에 의한 감상이나, 정치, 경제, 교육 등 문화에 대한 과학적인 비판의 결과에서 나온 노래가 아니고 역시 아모스의 노래와 같 이 여호와의 심판을 선언한 노래입니다. 한 나라의 주권이 백성의 이익 과 그 봉사의 정신을 가지지 못하고 권력의 연장과 거기에 이권과 명예 와 향락과 생명을 걸고 아부하고 있는 정부관리, 경제인, 문화인, 종교인 들이 있는 이상 도시나 농촌이나 마찬가지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가는 농촌에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미1: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 개같이 애곡하고 타조같이 애통하리니 (미1:9) 이는 그 상처는 고칠 수 없고 그것이 유다까지도 이르고 내 백성의 성문 곧 예루살렘에도 미쳤음 이니라 (미1:10) 가드에 고하지 말며 도무지 호곡하지 말지어다 베들레아 브라에서 티끌에 굴지어다 (미1:11) 사빌 거민아 너는 벗은 몸에 수치를 무릅쓰고 나갈지어다 사아난 거민은 나오지 못하고 벧에셀이 애곡하여 너희로 의지할 곳이 없게 하리라 (미1:12) 마롯 거민이 근심 중에 복을 바라니 이는 재앙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예루살렘 성문에 임함이니라 (미1:13) 라기스 거민아 너는 준마에 병거를 메울지어다 라기스는 딸 시 온의 죄의 근본이니 이는 이스라엘의 허물이 네게서 보였음이니라 (미 1:14) 이러므로 너는 가드모레셋에 작별하는 예물을 줄지어다 악십의 집 들이 이스라엘 열왕을 속이리라 (미1:15) 마레사 거민아 내가 장차 너를 얻을 자로 네게 임하게 하리니 이스라엘의 영광이 아둘람까지 이를 것이 라 (미1:16) 너는 네 기뻐하는 자식으로 인하여 네 머리털을 깎아 대머리 같게 할지어다 네 머리로 크게 무여지게 하기를 독수리 같게 할지어다 이는 그들이 사로잡혀 너를 떠났음이니라." 여하튼 아모스 당시의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우리 형편은 초 상집과 같은 비극적인 상황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울음군을 불러서라 도 울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박한 때입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포도원'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80편은 이 상징적인 의미로써 자기 조국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 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 (시80:5)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시80:6) 우리로 우리 이웃에게 다툼거리가 되게 하시니 우리 원수들이 서로 웃나이다 (시80:7) 만군의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시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 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시80:9) 주께서 그 앞서 준비하셨으 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편만하며 (시80:10)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시80:11) 그 가지가 바다까 지 뻗고 넝쿨이 강까지 미쳤거늘 (시80:12)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헐 으사 길에 지나는 모든 자로 따게 하셨나이까 (시80:13) 수풀의 돼지가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시80:14)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 (시80:15) 주의 오른손으로 심으신 줄기요 주를 위하여 힘있게 하신 가지니이다 (시 80:16) 그것이 소화되고 작벌을 당하며 주의 면책을 인하여 망하오니." 이 시편은 대표적인 민족 탄식시입니다. 여기는 분명히 이스라엘을 한 "포도원"으로 비유하여 하나님 자신이 심고 가꾸신 포도원이 야수들에 의하여 짓밟히고 그 아름다운 과실이 도적당하고 짓밟히게 된 것을 탄식 하고 있습니다. 이 포도원은 본래 보잘것 없는 한 작은 포도원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를 가져다 심었다고 한 대로 이 민족의 역사는 출애굽 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렇 게 시작한 이 나라는 중동 아시아 세계를 장악할만큼 장하고 자랑스럽게 자랐습니다.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인근 작은 민족국가들의 조공을 받을 만치 주권을 행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포도원은 이제 들짐 승들에게 짓밟히는 패망의 포도원이 되었습니다. 그 패망이 포도 종자가 잘못 선택된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예언자 이사야는 그의 유명한 "포 도원 노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5:1)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 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사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 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 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이사야도 자기 나라의 죄와 불의를 보고 견딜 수 없어서 하나님의 징 계를 받아 그 아름다워야 할 포도원이 들포도밭이 되어버린 것을 탄식하 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을 중심한 예언자로서 수도 집권층, 지도 층, 부유층에서 볼 수 있었던 온갖 불의와 부정에 침묵을 지킬 수 없어 서 이 "포도원 노래"를 환희의 노래라기보다 슬픈 애가로 지어 불렀습니다. 아모스 역시 그의 통탄하는 원인을 포도나무 자체나 그 땅 때문이 아니라 이 포도원을 가꾸어야 할 책임자인 지도자와 백성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았다고 폭로합니다. 이 한반도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 좋은 포 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거늘 어찌 슬픈 애가를 부르지 아니 할 수 있겠습니까 불모지 같은 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 나무를 심었으나 거둬들인 것은 먹을 수 없는 들포도나 빈 껍데기뿐인데 어찌 패망의 포도원이라 하지 아니 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의 철퇴를 맞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시80:5)
주께서 저희를 눈물 양식으로 먹이시며 다량의 눈물을 마시 게 하셨나이다." 지금은 나라 민족을 위해 "눈물" 양식을 먹으며 "다량의 눈물"을 마셔 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입니다. 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이라."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역 사 한복판으로 지나가심으로 생겨질 비극이라는 뜻입니다. "너희 가운데" 란 말은 "인간의 내면성" 또는 "영혼의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중심부를 통과한다는 뜻은, 그 역사의 중심에 대하여 하나님이 간섭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간섭하신다는 사상은 지극히 구약적이며 사실 출애굽기 12장 1절에 하나님이 애굽의 역사에 간섭하심으로 큰 재난이 임했습니다. "(출12:12)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 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 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출12:29)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 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출12:30)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 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하나님께서 역사에 간섭하셔서 애굽 한 가운데로 지나가심으로 한 나라에 비극적이고 비통한 사건이 일어났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임하신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대면을 한다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책임성을 감당 해야 할 자로서 다른 사람에 대하여 얼마나 진실히 자기의 사회적인 책 임을 감당했는가를 물어, 어디에 하나님의 질서가 거부되었으며, 짓밟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입니다. 각계 각층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제대 로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밝히는 일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 병들 고 갇히며 눌린 사람들에 대한 가진 자들의 사회적 책임이 제대로 수행 되고 있는지를 심문하는 일입니다.
아모스가 이스라엘의 정치적 위기를 직시하고 사회정의를 외쳤다는 것은 나라의 비극적 운명을 바라는 마음 에서가 아니라 그 망해야 할 최후의 순간에서라도 나라의 운명을 구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그의 호소를 들어 주었습니까 아무 도 그의 호소를 듣고 울지 않았습니다. 울음군도 부르지 아니했습니다. 아모스의 마음은 그래서 더 안타까웠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를 이렇 게 비유하여 안타까움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눅7:31).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눅7:32)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 민족과 자신의 삶 한 가운데 지나가시는" 심판의 때에 슬피 울며 이를 갈지 말고 지금 울음군을 불러서라도 울 수 있는 비통한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나라를 거덜나게 하는데 한 몫 을 한 계층이 소위 '높은 데 있는' 지도층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높은 데' 있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족속들이 지도층 기독교인들이었 습니다. 그러면서도 경제난국에 대한 책임을 지고 베옷으로 갈아입고 길 바닥에 나 앉아 통곡하기는커녕 기득권보호에 급급한 탐욕에 찌든 추악 한 작태를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포도원'을 망쳐놓은 자들은 '높은 데 있는' 지도층 인사들인데도 그 고통과 아픔을 당해야 하는 사람들은 '낮 은 데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민초들뿐입니다. 예수께서 이 시대에 우리 들에게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눅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 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시대를 놓고 애통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입니다. 위를 보면 눈물이 아니라 울분밖에 쏟아질 것이 없을지라도 아래를 보면 눈물이 절로 날 것입니다. 아래에 있는 힘없고 가난한 민초들의 고통과 아픔을 바라보고 애통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의 위에 있는 지도층 인사 들이여, 눈물이 아깝거든 아래 있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과 나라 민족을 위해 울음군이라도 불러다 울 수 있는 티끌만한 양심이라고 보여주 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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