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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를 하수같이 (암5:1-27)

본문

1. 아모스 제 5장은 아모스의 제 3설교입니다. 우리는 이 설교에서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또는 "너희는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라" 등등의 간곡한 선지자와 권면 을 듣는 동시에 거듭 거듭 "화 있일진저 !"(5:18, 6;
1)라고 탄식하며 슬퍼 한 선지자의 애타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모스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이스라엘의 장래를 생각하여 탄식도 하고 슬퍼하는 뜻 깊은 사상가요 지 혜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 민족을 위해 그를 부를 때 그는 모든 것 을 버리고 순종했습니다. 그는 남방 유다 출신이지만 북쪽 이스라엘의 동 포를 위하여 사마리아로, 또는 벧엘로 가서 자리를 옮겨 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2. 아모스 당시는 국가의 부강과 더불어 사치가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 들의 호화로움 중에 타락해가는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암6: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상부층의 타락과 더불어 빈부의 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불의와 부정과 착취는 날로 심해져갔습니다. "(암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암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 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이는 당시 도덕적 타락이 어느 정도였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지 적하는 이스라엘의 큰 죄악은 안일과 사치, 계급적인 빈부의 격차에 따른 학대와 천대, 그리고 도덕적 타락과 부패 등이었습니다. 아모스는 이러한 타락의 근원이 무엇보다 종교적 신앙적 타락에서 비롯되었음을 탄식하며 슬퍼했습니다. 다음은 최근 '기독교 사상'지에 게재된 것으로 한국 교회 에 일어나고 있는 참담해져 가는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세계선교사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쉽지 않은 급속한 부 흥을 이루었다. 세계 10대 교회 가운데서 여섯 개가 한국에 있다는 사실 만으로, 이를 뒷받침해 주고도 남는다.
이제 한국이야말로 21세기 세계선 교의 축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한국교회가 1990년대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감쪽같이, 때로는 공공연하게 성직세습을 자랑하는 예식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한국 교회의 앞날을 참담하게 만드는 징 후들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안에서마저 정실(情實)이 판을 친다면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꼴이 된다. 북한의 김일성 부자에게나 있을 법한 못 된 일인 줄 알았는데, 거룩하고 은혜로운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벌 어지고 있다니, 부끄럽고 두렵기조차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초대교회는 인물이 절대 빈곤하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그들이 성직의 세습제도를 인정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중세기에나 있던 이런 악습이 지금과 같은 광명천지에서 벌어진다는 것은 도저히 용 납되기 곤혹스런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세속정치에서도 세습은 용인되지 않고 있다. 이익을 목적으로 조직된 기업에서도, 세습 제도는 자랑스런 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기업의 사회적 기여라는 차원에서, 소유주는 대국적 입장에서 전문 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맡기고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 이런 일이 자행된다는 것은 현대 판 사두개주의의 재판이 될 위험이 너무 크다. 한국교회가 전폭적으로 추 앙하던 빌리 그래함 전도관, 적극적 사고 방식의 로버트 슐러 목사, 그들 도 결국 자식들에게 세습시켰다 하여, 미국의 지각 있는 신앙인들을 실망 시켰다. 교회는 결단코 이익집단이 될 수 없다.하나님 나라의 선교에 몸을 바치는 교회가 혈통에 얽매인다는 것은 성서적으로 옳지 않은 일이다. 설사 적합한 인물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렵다. 그리스도 예수의 공로(업적)만이 찬양 받을 뿐, 어떤 성직자의 업적도 찬양 받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성 모 독적 행위가 될 뿐이다. 어떤 성직자의 업적도 결단코 기득권이 될 수 없다. 다만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조직된 그리스도의 몸일 뿐이다. "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사는 것은 내가 아 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이것이 성직자 의 삶이다. 이토록 거룩한 동기에서 시작된 성직자들이 은퇴할 즈음에는 그토록 믿을 만한 사람이 없어서 혈육에 의지한다면 너무나 낭패스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성직 세습의 피폐는 역사가 주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교회 안에서 성직세습이 문제된 것은 11세기 초엽 프랑스 교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 려져 있다. 귀족 가문에서 감독직을 독점하다 보니, 어린 소년을 감독으 로 세운 일도 있었고, 심지어 평신도가 어느 날 갑자기 성직 중의 성직인 '감독'으로 옹립되기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세기 교회의 쇠퇴를 가속화시킨 원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고위 성직의 세습 제도였다. 서방교회의 경우 15세기의 교황 이노센트 8세가 자기 형의 사생아를 추기경으 로 임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프렌치아의 세도가인 메디치의 압력을 받아 열세 살 된 메디치의 아들에게 수도원장직을 맡겼다 칼릭스투스 3세는 조카인 보르기아의 사생아에게 주교직을 맡겼다. 이 아이는 후일 아버지 보르기아가 알렉산더 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었을 때엔 추기경의 자 리에 오르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이 중세기 교회의 큰 흉터요, 교회 쇠퇴의 원인이라고 보아 이 일을 '보르기아난'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중세기의 사례들은 성직의 세습화는 성직매매와 상관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성직매매의 경우는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이해 관계가 그 원인이 되어 있고, 성직 세습의 경우는 성직자들의 기득권이 그 원인 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교권의 도덕성이 훼손된 처지에서 그 위엄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이미 교황의 위신은 뿌리째 흔들릴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흔히 종교 개혁의 원인을 속죄권 매매에 있다고 믿고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속죄권 매매보다 훨씬 앞서, 구조적 으로 썩기 시작한 것이 성직의 세습제와 매매 행위에 있었음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교회의 세습 문제가 그대로 방치된다면, 머지않아서 한국 개 신교회에서도 성직자의 독신 제도가 논의될 명분이 충분해질 것이다. 성 직 매매와 성직의 세습화가 극심해지자, 12세기의 로마교회는 제2차 라테 란(Lateran)회의(1139년)에서 성직자의 독신 제도를 채택, 선포했다. 이와 같은 법이 제정되기까지 성직매매로 엄청난 부를 취득하고, 성직 세습으 로 교회의 권위를 독점하는 일들이 교회 발전에 치명적인 타격이 되고 있음을 안 교황 펠라기우스(Pelagius
I세, 556-561년)는, 성직자는 결흔하 였을지라도 자기 자손들에게 교회의 재산을 상속시키지 못하도록 법을 만들기도 하였다. 또 베네딕트 8세(1018년)는 재삼 성직자는 자손들에게 교회 재산을 상속시킬 수 없도록 조치하였다. 교회에서 성직의 세습은 교회재산의 상속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한 제도다.성직매매나 성직 세습 같은 봉건 시대의 작태가 용인된다는 것은 성직을 이익의 수 단으로 삼는 '현대판 사두개파'의 재현이다. 길키(L. Gilkey; 시카고대학) 교수는 성직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교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전제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는 교회를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하고 설명하였다. 성 례전적인 교회, 말씀의 교회, 그리고 성령님의 교회가 그것이다. 그 어느 부 분도 교회는 인간적인 관습에 좌우되지 않게 되어 있다. 성례전적인 교회 란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과의 만남을 뜻하고, 말씀의 교회란, 진리의 교 육과 선포를 뜻하고, 성령님의 교회란 어떤 인간적인 조건도 용납될 수 없 음을 뜻한다.
그런데 이런 교회를 섬기는 청지기로서의 성직자가 그리스도의 교회를 자신의 자리로 여긴다면 너무나 위험하고 당돌한 사고가 아 닐 수 없다.그래서 아울렌 감독(스웨덴의 신학자)은 "교회는 그 목사 만큼의 교회가 된다."고 말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이 교회가 정실(情實) 에 좌우되어서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외형적으로 모양새를 유지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 성령님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이미지(Image)는 구겨지고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교회의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께서 다스리시고, 은혜로 지키시도록 맡겨야 한다. 혼란의 극소화라는 명분으로 성직의 세습이 정당화된다면,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손에서 떠난 교회임을 드러낸 것이다. 영원히 사는 분은 그리스도이실 뿐, 그리스도의 손에서 떠난 교회 치고 영원히 흥한 교회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맡겨진 교회만이 다시 부활하고, 부흥하는 것이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 그러나 그것들에게 하나님 의 기운이 들어가자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한 민족을 형성하였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운과 바람이 일기를 기원해야지, 성직의 세습으로 명맥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3. 나라의 번영과 더불어 부유해진 한국교회가 먼저 하나님의 구하시는 공의와 정의에 바로 서지 못하고 성직세습이나 성직매매, 정실 등으로 기울어진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습니다. 본문 19절과 20절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절망적인 심판의 날을 보여 줍니다. 그 날은 마 치 사자를 피하다가 곰을 만나고, 또 용케 곰을 피하여 집에 들어가서 손 을 벽에 대었다가 뱀에게 물림 같다고 했습니다. 사자, 곰, 뱀은 그 심판 이 어떻게 두려운 것이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잘 보여 줍니다. 본래 수 리아 지방의 곰은 사자보다도 더 무섭고 잔인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다 니엘서에도 보면 장차 나타날 공포의 대상이 되는 네게 원수들의 환상을 보여 줄 때 사자보다 더 무서운 것이 곰으로 나타났고 곰 보다 더 무서 운 것이 표범이요 마지막 제일 강한 열 뿔가진 짐승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단 7:3-8).
그런데 본문에는 곰 다음에 뱀을 말했습니다. 사자와 곰 은 피할 수 있으나 뱀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왜, 사자와 곰을 피하여 집 에까지 간 자는 안심했습니다. 마음 놓고 손을 벽에 기댈 수 있었습니다. 그때 독사에게 물렸습니다. 피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여호와의 날은 이같이 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죄인들에게 있어서 그날은 결코 빛남이 아니요 어두움의 날입니다. 구원과 생명이 아니요 멸망과 죽 음의 날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공의와 진리편에 사시므로 심판의 날에 피할 바위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4.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보다 교회의 예배와 찬양을 받으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21-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구하는 것은 번제나 화목제의 제물이 아니요 오직 공법이요 정의임을 가르치며, 여호와를 찾고 선을 구하는(4,6,14) 믿음임을 보여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 생활에 있어서 외형적이요, 의식적인 제사보다도 더 가치있는 것은 공법과 정의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이요 진실이란 것 을 처음으로 밝히고 나선 선지자는 아모스와 호세아입니다(호 6:6). 그러나 이스라엘은 마침내 불행하게도 그들을 듣지 아니하므로 가나안에서 쫓겨 날 것을 예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번제나 소제나 살진 희생의 화목 제라도 흠향은 물론이요 돌아보지도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모스와 같은 시대의 선지자인 이사야와 미가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같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 고 분향은 우상을 찬양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이사야는 말했습니다.(사 65:3).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서 권고하시며 '돌아보시는 것'은 '공의를 행 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미 6:8) 라고 했고, 또 이사야는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 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을 내가 돌아보리라고 했습니다.(사 66:22) 이같이 아모스 선지도 종교적인 예식이나 제사와 성회의 의미를 부정하는듯 보 이나 그것은 아닙니다. 선지자는 오직 윤리적인 책임과 하나님의 법에 근 거한 도덕적인 의식과 양심을 떠난 삶을 문제로 삼고 그것을 정죄한 것 입니다. 하나님의 공법과 정의를 무시하면서도 점잖은듯 모든 제사에 참 석하여 경건을 자랑하는 그런 가식과 이중성을 슬퍼하는 것이 선지자의 마음이었습니다. 계속하여 "노래도 비파소리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네 노 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고 하신 말씀은 또 '네 노래 소리는 내 게 무거운 짐이 되어 있은즉 그것을 내게서 옮기라'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에 많은 희생의 제물과 더불어 찬양대 의 노래와 여러 악기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제 '내게 무거운 짐이요, 괴로운 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네 노래 소리 란 말은 아름다운 음악을 말함이 아니라 떠드는 소리, 외치는 고함'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성 없는 예배의 노래 소리는 그같이 듣 기 괴로운 굉음'이었다는 말씀일 것입니다. 월삭과 안식일과 절기에 그들 이 모여 와서 드리는 예배를 가리켜, 같은 시대의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서도 하신 말씀이, "내 마음이 너회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 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사 1:14)고 하신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잠언의 말씀에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 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고 하실 말씀대로 어찌 들 음이 없고 순종이 없는 그들의 기도만이 가증하겠는가. 그들의 노래 역시 하나님을 곤비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그 들의 제물이나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구하시는 것은 공법 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이 땅에 흘리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정의와 공의를 저버리게 될 때 기독교는 버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1096년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은 그와같은 사 실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십자군 전쟁처럼 성스러운 이름에 가장 세속적 인 욕망이 결합된 전쟁은 없으며, 신의 이름을 빌어 약탈과 살인 , 만행 이 판을 친 전쟁이 없을 것이다. 전쟁의 발단은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 렘은 유대인, 기독교인, 이슬람인 공통의 성지였다. 유대인에게는 다윗의 우물이 있는 어머니 도시요, 기독교도에겐 예수가 죽어 부활한 곳, 이슬 람 교도에겐 마호메트가 머무른 곳이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을 지배 하고 있던 이슬람인들은 기독교인의 성지 순례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데 셀주크 투르크 족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부터 기독교인의 성지순례는 금지되었다. 셀주크 투르크 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일어난 민족으로서 열렬한 이슬람 교도가 되어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협을 느낀 동로 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교황 우르반 2세에게 원조를 요청했다. 우르반 2세는 이것이 비잔틴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 라고 생각했다. 1095년 11월 우르반 2세는 클레르몽에서 회의를 개최, 성 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파병을 제창했다. 웅변술이 뛰어났던 그는 성지 예 루살렘을 잃은 기독교도들의 비참한 생활과 투르크 족의 위협을 설명 하 고, 이슬람의 승리는 기독교 세계의 불명예라고 열변을 토했다. 이 전쟁 은 성전이며, 전사자는 모두 천국에 가서 그 보상을 받을 거라고 역설했다. 그뿐 아니라, 동방엔 금은보화가 깔려 있고 아리따운 이슬람 여인들 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며 제후들의 욕심을 부채질 했다. 교황의 웅변에 감격한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하나님이 이를 원하신다!" 1096년 제1회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향해 떠났다.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점 령하고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었다. 이 무렵 (마라의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출신의 기사 보에몽이 이끄는 십자군 부대는 마라 성에 도착 하여 목숨이 아까운 자는 궁전 안으로 피난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런 다음 성안으로 진격, 닥치는 대로 약탈과 살륙을 자행 했다. 사라센인 이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죽였으므로 성안은 시체로 뒤덮여 산을 이 를 지경이었다, 게다가 궁전에 피난하고 있던 사람들까지 공격해서 소유 물을 빼앗고 살아남은 자는 노예로 팔아 버리고 말았다. 마라에 머문 지 1개월, 식량이 떨어지자 사라센 인을 죽여 톱으로 배를 갈라보기도 했다. 사라센 인들이 금은보화를 삼켜 뱃속에 간직한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그 들은 또한 죽은 사라센 인의 고기를 요리해 먹기도 했다. 십자군의 약탈 과 만행은 비단 마라에서만이 아니었다. 어쨌든 이들은 남하를 계속 1099 년 6월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예루살렘 전투는 6주일간 계속되었다. 여기서도 십자군은 적군은 물론 주민들까지 무차별로 죽이는 잔학성 을 보였다. 십자군에 종군했던 남프랑스 출신 성직자의 기록을 보자. "거기엔 너무도 처참한 광경이 벌어져 있었다. 큰 거리와 광장엔 사람 의 머리며 팔다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십자군은 시체를 아랑곳하 지 않고 전진했다. 신전과 벽들은 물론 기사가 잡은 말고 삐까지 피로 붉 게 물들었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성지순례를 방해했던 자들로 더럽혀졌던 이곳이 그들의 피로 씻겨져야 한다는 신의 심판은 정당할 뿐 아니라 찬 양되어야 한다." 그들에게 십자군의 대량학살은 신의 심판이요 영광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성지탈환에 성공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왕국을 세우고 개선했다. 그러나 곧 다시 이슬람에게 예루살렘을 빼앗겼고, 교황은 연달아 십자군을 파견했다. 십자군 원정은총 8차에 걸쳐 일어났는데 그중 성지탈환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한 것은 제1차 원정 때 뿐이었다. 나머지는 어처구니 없는 탈선행위로 일관했고, 심지어는 엉뚱하게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 탄티노플을 공격, 라틴 제국을 세운 일도 있었다. 1212년의 제5차 십자군, 이른바 소년 십자군은 상인들과 결탁한 선주의 농간으로 이집트 알렉산 드리아로 끌려가 사라센 인에게 노예로 팔렸다. 사라센 인들은 700명에 달하는 이 소년들을 다치지 않고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200년에 걸친 십 자군 전쟁은 실패로 끝이 났다. 그 결과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와 교황을 절대적인 존재로 믿지 않게 되었다. 전쟁에 참가했던 영주와 기사들은 영 지를 돌보지 않은 탓에 수입이 줄고, 참가비용을 조달하느라 가산을 탕진 하여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기독교는 몰락되어가고 말 았다.' 교회나 교회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며 오히려 "공법을 인진 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진다."(본문 7절)면 기독교는 몰락하고 말 것 입니다. 사회를 향하여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외치기 전에 교회가 먼저 공의롭고 정의로워야 합니다.
6. 정의가 땅에 떨어진 이 때에 자신과 더불어 나라 민족이 사는 길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본문 5절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벧엘을 찾지 말 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라 했습니다. 이미 말했거니와 벧엘과 길갈은 그들 이 잊을 수 없는 곳이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그들은 생각했 을 것입니다. 그것은 벌써 잘못이었습니다. 그 제단들은 혼합 종교 (Syncretism)로 깊이 물들은 것들이었습니다. 바알의 이름과 여호와의 이름을 같이 부르는 그것들이야 말로 벌써 '우상의 집'(벧 아웬)이요, '하나님의 집'(벧엘)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거기서 하나님을 찾는다것은 하나님을 잃는 것이요, 참 하나님을 반역하는 음행이었습니다. 소위 성소'를 찾는다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것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 과 뜻과 성품이 하나님을 사모하여 찾는 것이 아니라면 양떼와 소떼를 끌고 간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호 5:6). 이사야 선지를 통하여 주신 말씀과 같이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스스로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에 가증한 것을 기뻐하는 자"들의 제물은 비록 "소를 잡아 드리는 것 이라도 살인함과 같고 어린 양으로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다"(사 66:2,
3)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한 자들을 하나님께서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벧엘을 찾 고 길갈을 향하여 가는 많은 무리들은 벌써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것을 버린 자들이었고 스스로 악행을 취한 자들이었습니다. 벧엘과 길갈의 제 단이 그들을 살릴 수는 없었습니다. 브엘세바로도 가지 말라 했습니다. 여기 '가지 말라'는 히브리 말은 국경을 '넘어가지 말라'는 말입니다. 브 엘세바는 헤브론에서 30마일, 예루살렘에서는 50마일이 넘는 남쪽에 위치 해 있습니다. 통일왕국시대에 있어서도 이스라엘의 전판도를 말할 때는 종종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 란 말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브엘 세바는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국경을 넘어서도 가장 먼 곳 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일찌기 족장들, 아브라함과 이 삭과 야곱이 제단을 쌓던 곳이요, 큰 은혜를 받은 곳이었습니다. 말하자 면 하나님께서 친히 저들에게 나타나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북쪽 여로보암 1세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찾아가는 것을 막았으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엘세바는 많은 순례자들이 때를 따라 찾아나선 곳이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브엘세바도 후일에 우상을 섬기는 곳이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거기에 여호와를 섬기는 제단이 있다 할 지라도 그것은 벌써 혼합종교(Syncretism)의 성격을 떤 것이었음은 틀림 없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 사람의 입으로 여호와의 이름도 부르고 바알의 이름도 불렀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깊이 섬기면서도 여호와의 이름을 버린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여호와를 섬 긴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알도 섬기고 여호와도 섬기는 혼잡된 신앙 (Syncretism)은 비록 여호와를 섬겨도 그것은 그대로 우상을 섬기는 것이 었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빛과소금'월간지에 "대선 뒤에 무당이 있다."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 은 기사를 보면 개탄할 수 밖에 없는 이 나라 지도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무속, 역술, 풍수 등 이른바 무속에 종사하는 인구 가 70만 명에 달한다. 이들에게 특히 연초나 입시철, 선거철은 특수 대목 을 이루는 기간이다. 97 대선을 앞두고도 난립하는 후보군에 대한 '천기' 누설로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벌써부터 사회적 혼란과 폐단을 낳고 있다. 대통령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뜻이 있는 사람이 된다 고 믿는 한국인의 심성과 전통적인 사상이 더욱 더 무속인을 찾게 하는 것 같다. 전국토의 1퍼센트가 분묘 면적으로 점령당하여 좁아지는 땅 덩 어리를 염려하는 마당에 대통령 후보로 나설 사람들은 경선이 있기 전부터 거의 다 조상의 묘를 옮긴 상태다. 이 또한 굵직한 인물들은 땅 기운 을 받고 나온다는 우리나라의 미신적 관습에 기인한 것인데, 이에 맞추어 대선주자들이 묘를 옮긴다는 것은 이들이 이러한 미신을 앞장서서 따르 고, 조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정치, 무속 신뢰도 매우 높아 96년 4 월 총선 당시에도 후보자와 그 가족, 측근들의 발길이 점집에 줄을 이었 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액수의 복채가 점쟁이들에게 갔을 것이다. 복채는 이 나라의 경제를 무질서하게 할 만큼 그 규모가 엄청나다. 점상(占 床)의 경우 최상류는 부르는 게 값이고, 점쟁이들이 굿판을 벌일 경우에 도 수천만원에서 수억원까지 복채가 들어간다고 한다. 그러니 당선 후에는 본전을 뽑기 위해서라도 부정에 가담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선거를 앞둔 무속인의 준동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사람들이 미신에 빠져 있다는 사실 뿐 아니라 앞으로 이들이 정치를 하는 동안 국 가 경제가 불의하게 운영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지관이나 풍수들 은 오만스럽게도 이름 난 사람 가운데 내 신세 지지 않은 사람은 없다 고 교태를 부리고 있다. 결국 최고 권력자들과 재벌들이 미신에 앞장 서고 조장하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87년 대선 당시 불상 3만 개를 만들 어 집집마다 세우면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미신 때문에 노태우 전 대통령 이 10원짜리 동전 앞면에 새겨진 불국사 다보탑 상에 새로 불상을 추가 했다는 소문은 크리스천들에게 큰 분노를 일으켰었다. 한국은행이 나서서 불상이 아니라 사자상이라고 해명을 했으나 설득력은 없었다. 이것이 사 실이라면 노 전 대통령은 자기의 영달을 위해 한 나라를 미신적 풍조에 빠뜨린 무서운 과오를 범한 것이다. 이처럼 대권주자나 국회의원을 비롯 재벌 등 이 나라의 역량있는 사람들까지 무당 앞에 쭈그리고 앉아 굽실 거리고 있으니 이 나라는 '점술천국'이 돼버리고 말았다. 정부는 이러한 혹세무민하는 무당들을 관리할 능력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특히 요사 이 전화 정보서비스가 발달하여 700정보서비스가 서울에만 작년말까지 130여 개가 되며 전국적으로 600여개 이상의 전화 점집이 개설되었다. 이 제는 청소년들에게까지 점이 퍼져나가 안방에 앉아자유자재로 점을 치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무속 및 역술인 단체의 위상도 크게 높 아져 대한승공경신연합회, 한국역리학회, 한국역술인협회, 전통민속예술시 보사, 한국무속총연합회 등 협회를 구성하여 조직적으로 움직일 뿐 아니 라 이들 무속인들이 사회에서 큰 위력을 가진 자들로 취급받고 있다. 크 리스천의 각성과 항의운동 필요 이러한 무속인들의 준동에 대한 대안으 로 먼저 기독교인들의 각성이 필요하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은 모두 악령이며 악령에 사로 잡힌 자의 예언과 점궤는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흑암의 흐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너는 무당을 살려 두지 말지어다."(출 22:18)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은 오늘 날에도 계속되는 것으로 이를 어기고 사주, 관상, 역학, 풍수지리 그리고 무당들을 가까이 하면 저주가 있을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기독교 문화를 형성해 가야 한다. 문화의 탈을 쓰고 부지불식간에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 스며드는 무속을 물리칠 수 있는 기독교 문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또한 무속행위 저지를 위한 서명날인, 신문과 텔레비전 등에 게재되는 미 신적인 기사나 무속적인 광고에 대한 항의전화 등 적극적이고 지속적인 크리스천 시민 운동이 이루어져야 한다. 미아리 일대를 무속관광 특구로 삼으려는 성북구청의 계획이 기독교인들의 항의로 좌절된 사건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나라를 비과학적, 반역사적, 반창조적인 운명론에 묶어 두려는 악마의 쇠사슬을 파해버리고 이 나라를 구해낼 책임이 우리 크리 스천들에게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무당과 우상형태의 신앙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성소에 나왔다고 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벧 엘, 브엘세바, 길갈 모두가 하나님의 제단이 있는 곳이었으나 하나님 여호와와 무당, 우상을 겸하여 숭배하는 혼합종교, 더러운 귀신의 처소로 변질된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형태로는 제아무리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호5:6) 저희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 지 못할 것은 이미 저희에게서 떠나셨음이라." 본문에서 아모스는 "나를 찾으라, 그리고 살라!"(Seek me, and live)라는 간단한 두 마디로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과 산다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아닌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거기에 생명이 있고 삶이 있습니다(시 69:32). 하나님 자신이 곧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 의 선물임에 틀림 없으나 이 둘은 서로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참으로 살게 하여 주신다는 믿음이 없는 거기에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을 찾는 다는 말은 갈급한 마음으로 하나님 자신을 찾는다는 말이요 그의 주시는 어떤 은혜나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얻게 될 때 거기에 생명이 있고 기쁨과 위로가 있고 능력과 소망이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라. 그 안에 모든 충만함이 있습니다. 시편에, "하나님을 찾는 너회들아 너회 마음을 소생케 할지어다."(시 66:32)하신 말씀과 같 이 하나님을 찾는 거기에 우리 마음의 변화도 있고 소생함도 있습니다. 계속해서 본절은(14절)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선은 곧 하나님 자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4절에서 "너희는 나를 찾으라."라는 말과 ''선을 구하라."말은 본 문에서의 "선을 사랑하라."말과 결국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신앙으로 사는 삶이 곧 선이요 불신앙은 곧 악이라는 이러한 사상은 아모스 선지 가 가르쳐 주는 '윤리관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선을 구하고, 찾고 사랑할 때 그 길과는 무엇인가
1) 너희가 살고(4, 6절)
2)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고(14절)
3) 요셉의 남은 자를 긍흘히 여기시리라(15절) 고 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특별히 너회가 '살고'란 말은 개인의 육신의 생명만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의 정치적 생명도 말한다. 오히려 본문은 이스라엘 국가의 정치적 존립을 더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이 아닌 세상의 역사를 볼 지라도 한 문명의 몰락과 한 나라의 멸망은 사회적인 불의와 부정과 도 덕적인 부패가 그 가장 큰 원인이 되었었음을 우리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윤리적인 타락과 사회의 구조적인 악은 그 나라와 사회의 종말을 비참하게 만들고야 맙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함은 물론이다. 그리고 본문 에는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했다. 이스라엘의 죄악 은 너무도 관영하여 용서 받을 길 없고 이제는 멸망이 정해져 있으나 그 들이 돌이키면 그래도 소망이 있다는 선지자의 희망을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 여기의 '혹시'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 중에서도 혹시 긍 휼히 여김을 받아 구원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7. "(암5: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이 시대에,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 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이 사회에서 입다물고 살아야 지혜로운 것일 가 본문 13절의 지혜자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며, 왜 그들은 잠잠함해야 하는가 타의에서인가 자의에서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자'란 생각 이 깊고 분별력 이 있는 사람'(The prudent, The intelligent)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잠잠한가 타의에서인가, 자의에서인가 여기에 지혜자가 참 교사요 참 선지자 같은 사람을 말한다면 그 어떠한 희생을 감당하면서라도 외칠 때는 외쳐야 할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 자신이 그랬 고 또 하나님께서도 그런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겔 33:1-6). 악한 세상 이야 듣든지 말든지 선지자는 크게 외쳐 경고해야 할 것은 경고해야 합니다. 잠잠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는 그것과 다르다. 진실한 교사들의 입을 쳐서 다물게 하고 그들의 자유를 빼앗은 폭력적인 악한 시대를 말합니다. 의인들이 곤욕을 당하며 괴로움을 겪어야 하는 때를 말 합니다. 그들이 도수장으로 끌려가든 어린 양 같이 털 깎는 자 앞에서 잠 잠해야 하는 그런 때를 의미한 것일 것이다(사 53:7,눅 22:67, 68). 만 일 또 그령지 않다면 잠언의 교훈과 같이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그러므로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잠 9:7, 8)하신 그대로 악인들에게는 더 이상 책망이 필요없기 때문일까 예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회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도리어 너회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6)고 하신 말씀이 있거니와 이 제 그 악한 시대는 경고가 더 이상 필요없고 오직 심판만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그 어떠한 경우이건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악인이 일어나면 백성이 탄식하며 사람이 숨느니라."(잠 28:12, 29:
2)하신 그대로의 현 상이 나타나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의로운 자의 입을 침묵케 한 시대가 잘 될 수없고 악인이 득세하며 외치는때 치고 망하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악화(惡貨)는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이 영 적으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의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며 참고 기다리며 잠잠해야 한다면 그러한 시대란 얼마나 괴로운 악한 시대 일까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니 자신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분이시다.
경상대 아침성경공부에서 간음한 여인 사건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비 겁한 자들이 예수를 옭아 넣기 위해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돌로 치리까" 그들은 예수가 모세의 법과 카이저의 법 사이에 빠진 딜레마에 빠지기를 바랬습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예수는 그의 신적인 지 혜로 이 딜레마를 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딜레마를 해결했지만 하나님의 공의는 아직 해결한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성경공부를 인도하던 목사가 어느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치 아니한다 하였으니, 율법 의 의는 어디로 갔습니까" 교수가 대답하였습니다. "돌로 치지 못하게 한 자가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성경공부 에 참석하였던 모두는 그 말에 동감하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러한 우리 모두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 리셨습니다. 그리고 대신 우리에게는 "그래, 내가 너희들의 모든 죄값을 다 치를 것이다. 그러니 너는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라면 이 시대는 나와 더불어 벌써 심판받고 돌에 맞 아 죽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와 우리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 의 공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충족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관영한 가정과 교회, 나라 민족이 하나님의 공의에서 구원받 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진실과 공의가 땅에 떨어진 교회가 누구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충족시켜 이 시대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 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여호와를 찾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오직 공 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리는 성도의 생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 하는 자는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진실과 정의, 공평과 공의편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 시대에 내리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 형벌의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의 요구하시는 공의대로 사는 길 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팍으로 진실과 정의, 공의가 사라지고 있는 이 시대에 십자가의 보혈과 능력이 충만하시 므로 자신과 나라 민족을 구하는 성도 여러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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