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암5:24)
본문
[암]는 유다의 예루살렘에서 16km 떨어진 유다의 드고아 출신의 선지자이다. 그 이름의 뜻은 ‘무거운 짐지는 사람’ 이란 뜻이며 이스라엘의 12소선지자 중 한 사람이다. 그는 드고아 계곡에서 양을치며 소규모의 농업을 하는 사람으로 가난한 농부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암]에게 소명을 주셨다. 그후 북쪽 이스라엘의 수도인 벧엘로 이주하여 예언사역을 감당했는데 우상의 도시인 벧엘에서 심한 반발에 부딪치자 유다로 다시 돌아와서 [아모스]를 기록하였다. 당시 국가적 배경은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는 시대로서 군사적인 위험이 없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들의 경제적 번영이 사회적 부패 현상을 초래하였는데 이러한 부패현상으로 인해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던 바알숭배를 섬기게 것이다. 당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있었으며 음란과 부패가 만연하였고 그들 자신이 하나님께로 부터 선택을 받은 선민이기 때문에 어떠한 재앙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배하였으며, 마음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이기주의, 탐욕, 부도덕, 그리고 가난한 사람에 대한 압제가 심각하여 어떠한 공의도 실현되지 않는 상태였던 것이다. 이럴때 [암]는 하나님의 공의가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공법이 물같이 = 물은 어디든지 스며들어간다. 조그마한 틈만 있으면 들어가는데 하나님의 공법이 마치 물과 같은 작용을 하게하여 타락하고 부패한 사회의 구석 구석 밀어들게하여 공의를 회복하라는 뜻이다. 정의가 하수같이 = 더럽혀진 시냇가에 세찬 물결이 지나감으로 깨끗케 되듯이 더럽혀진 이 세대를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를 통하여 깨끗게 하라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민족이 영육간에 극도로 부패한 시대로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또다시 실현되어야할 때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영적질서와 기강이 바로서야 하며 / 나아가서 사회의 질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서야 하며 / 더 나아가 국가와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자복하여 영적 질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 운동은 우리의 힘으로만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비로서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이루어지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하나요
첫째, 파괴되어진 이스라엘의 이상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있어야할 모습과 현재의 상황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는 모습이었다.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은
1)거룩한 모습을 지닌 백성이되기를 원하셨다.(출19:6,신28:9) 출19: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신28:9-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되며, 죄에서 구별된 생활을 하는 거룩하고도 성별된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휼륭한 이상만 있었을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삶이었다. 실생활은 이상에 전혀 미치지 못했으며, 그렇게 살려고도 노력하지도 않는 삶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이방인과 이방의 삶에 거침없이 관련시켰으며, 종종 탐욕과 불의로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가증스러운 제사와 파럼치한 행동들이 오히려 이방인을 능가하였다.
2)다른 나라로부터 정복되지 않는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다.(신1:30,31) 신1:30,31-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행로 중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정복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안으신다고 하셨다. 정복되지 아니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자주 정복이 되었다. 두번이나 포로로 잡혀갔으며, 쉽게 파괴되는 백성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3)번영하며 부요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이 분깃으로 받은 가나안 땅은 고대 근동에 있어서 지상의 동산이었다. 최고의 농업적 요건과 상업적 위치가 특이하게 결합되어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근면하고 성실하며 말씀대로 살기만 한다면 민족은 평화로우며, 번영하며, 지상의 천국을 이룰 수 있는 땅이었지만(사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의 초기생활 때 가나안을 정탐해보니 그들은 장정이며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하다 했고, 포도한송이를 메는데 두 장정이 붙들어야 할 정도로 풍요한 곳이었다.) 그 비옥한 땅이 황폐하게 되었으며, 깜부기가 식물을 말라죽게 하였으며, 황량한 들판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오용할 때는 죄악으로 인해 그 소유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4)행복한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다.(신33:29) 신33:29-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번성하며 순결한 사람은 행복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상 속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험은 불행했다. 비참하기가 극심했으며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고서 그발강가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후회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지자는 미리 다가올 모습을 바라보며 장송곡을 부르며 슬퍼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부패했으며, 죄악이 마치 물결치듯 타락한 이세대에서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선지자와 같이 슬퍼하며 [애가3:40,41과 같이-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라고 애통하며 외쳐야할 것이다.(따라 읽을 것)
둘째, 회복되어져야할 영적실체는 무엇일까요
1)형식적인 예배에서 신령과 진정한 예배로 회복이 되어져야 한다.(암5:21) 당시의 예배는 형식과 의문만 남아있어 타락하였다. 21절을 보면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예배의 진정성이 없어지고 참 정신 속에 비진실성이 차지하고 있고 경건생활 속에 의식을 준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절기를 지켰다 / 예배를 드렸다 / 찬송도하고 / 기도도하고 말씀도 듣고 / 각종 헌금도 드리면서 그 시간을 끝까지 참여를 했다.로서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형식적인 예배가 엄숙하고 경건스러워보일 때가 있으며 볼 수록 휼륭해지게 보일 수가 있다. 예배의 풍성과 그 외향이 사람들에게 우와하게 보이며 아름답게도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예배는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떠났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진실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형식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요 통회하는 마음인 것이다. (177장(1)-성령님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맘 충만하게 합소서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할맘 충만하게 하소서.
2)말씀의 기근에서 말씀의 풍요로 회복이 되어져야 한다.(암8:11) 암8:11-‘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에게 기근이 인함은 양식과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의 기갈이라고 했다. 날마다 예배드리며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이 왜 말씀에 기갈하다고 했나요 오늘날 처럼 말씀의 풍부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왜 기갈증에 걸려있나요 강단에서,방송,테이프,설교집 등을 통하여 얼마든지 말씀과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왜 기갈하고 있나요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6:9-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였다. 왜 깨닫지 못할까요 마음이 둔하고 영안이 어두우며 영적 귀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24시간 설교를 듣는다 할찌라도 기갈증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3)무너진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암9:11-15) 암9:11-15-찾아 읽을 것. 가나안 땅에 거하던 선민들이 사사시대로 부터 사울왕에게 까지 여러 시대를 거쳐오면서 빼앗겼던 성지를 다윗이 회복을 시켰다. 그러나 다윗 이후시대를 지나오면서 또 다시 빼앗겨 성지가 무너지고 일으킬 수 없는 지경에 있게 되었다 할찌라도 다시 옛적과 같이 회복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포로에서 해방되어 다시 성읍을 건축하고 과실을 먹게 되기를 원하심. 그래서 우리는 무너진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내 마음의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 교회의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이 사회에 무너진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이 민족의 무너진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도록 열심히 회복해야 한다.
셋째,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되도록해야 한다. 파괴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우리의 영적실체를 회복한 다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수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듯이’ 성도가 사회의 전반에 걸쳐서 공의가 흐르는 영적수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자연스럽게 시행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무질서한 농지를 현대화로 정리하듯이 옛시대와 옛습관으로 무질서해진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리하여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 모습으로 단장되는 사회로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구석 구석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 까지 때로는 세찬 물결 같이 때로는 세미한 물결 같이 이리 저리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 부패하고 타락한 부분들을 성도가 가는 곳곳마다 정의가 바로서고 공의가 바로서야 하는 것이다. 이 사명을 우리는 받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책임을 부여 받았다.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일을 이방인에게나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선민들에게 맡기셨다. 그것은 곧 빛과 소금의 역활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의 손은 심판의 손이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홍수같이 밀려들어온다고 생각해보라 부패타락된 모든 부분들을 물이지나가면서 모든 것을 쓸어버리듯이 우리에게 손을 대신다고 한다면 끔찍한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우리의 영적실체를 회복하여 공의가 정의가 바로서는 사회,민족,국가가 되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자.(끝)
첫째, 파괴되어진 이스라엘의 이상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있어야할 모습과 현재의 상황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는 모습이었다. 원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은
1)거룩한 모습을 지닌 백성이되기를 원하셨다.(출19:6,신28:9) 출19: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신28:9-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상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이 되며, 죄에서 구별된 생활을 하는 거룩하고도 성별된 백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의 휼륭한 이상만 있었을 뿐, 그 이상 아무 것도 아닌 삶이었다. 실생활은 이상에 전혀 미치지 못했으며, 그렇게 살려고도 노력하지도 않는 삶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이방인과 이방의 삶에 거침없이 관련시켰으며, 종종 탐욕과 불의로 가난한 자를 압제하고 가증스러운 제사와 파럼치한 행동들이 오히려 이방인을 능가하였다.
2)다른 나라로부터 정복되지 않는 백성으로 살기를 원하셨다.(신1:30,31) 신1:30,31-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행로 중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정복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안으신다고 하셨다. 정복되지 아니하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자주 정복이 되었다. 두번이나 포로로 잡혀갔으며, 쉽게 파괴되는 백성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3)번영하며 부요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다. 이스라엘이 분깃으로 받은 가나안 땅은 고대 근동에 있어서 지상의 동산이었다. 최고의 농업적 요건과 상업적 위치가 특이하게 결합되어 있는 좋은 환경이었다. 근면하고 성실하며 말씀대로 살기만 한다면 민족은 평화로우며, 번영하며, 지상의 천국을 이룰 수 있는 땅이었지만(사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의 초기생활 때 가나안을 정탐해보니 그들은 장정이며 우리는 메뚜기에 불과하다 했고, 포도한송이를 메는데 두 장정이 붙들어야 할 정도로 풍요한 곳이었다.) 그 비옥한 땅이 황폐하게 되었으며, 깜부기가 식물을 말라죽게 하였으며, 황량한 들판이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오용할 때는 죄악으로 인해 그 소유가 오래가지 못하는 것이다.
4)행복한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다.(신33:29) 신33:29-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번성하며 순결한 사람은 행복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상 속에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들의 경험은 불행했다. 비참하기가 극심했으며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은 바벨론 사람들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고서 그발강가에서 조국을 그리워하며 후회하고 눈물을 흘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선지자는 미리 다가올 모습을 바라보며 장송곡을 부르며 슬퍼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부패했으며, 죄악이 마치 물결치듯 타락한 이세대에서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선지자와 같이 슬퍼하며 [애가3:40,41과 같이-우리가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라고 애통하며 외쳐야할 것이다.(따라 읽을 것)
둘째, 회복되어져야할 영적실체는 무엇일까요
1)형식적인 예배에서 신령과 진정한 예배로 회복이 되어져야 한다.(암5:21) 당시의 예배는 형식과 의문만 남아있어 타락하였다. 21절을 보면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예배의 진정성이 없어지고 참 정신 속에 비진실성이 차지하고 있고 경건생활 속에 의식을 준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절기를 지켰다 / 예배를 드렸다 / 찬송도하고 / 기도도하고 말씀도 듣고 / 각종 헌금도 드리면서 그 시간을 끝까지 참여를 했다.로서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로는 형식적인 예배가 엄숙하고 경건스러워보일 때가 있으며 볼 수록 휼륭해지게 보일 수가 있다. 예배의 풍성과 그 외향이 사람들에게 우와하게 보이며 아름답게도 보일 수가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예배는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떠났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진실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형식적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이며, 오직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요 통회하는 마음인 것이다. (177장(1)-성령님이여 강림하사 나를 감화하시고 애통하며 회개할맘 충만하게 합소서 예수여 비-오니 나-의 기-도들-으사 애통하며 회개할맘 충만하게 하소서.
2)말씀의 기근에서 말씀의 풍요로 회복이 되어져야 한다.(암8:11) 암8:11-‘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우리에게 기근이 인함은 양식과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씀의 기갈이라고 했다. 날마다 예배드리며 말씀을 듣는 유대인들이 왜 말씀에 기갈하다고 했나요 오늘날 처럼 말씀의 풍부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왜 기갈증에 걸려있나요 강단에서,방송,테이프,설교집 등을 통하여 얼마든지 말씀과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이 왜 기갈하고 있나요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6:9-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였다. 왜 깨닫지 못할까요 마음이 둔하고 영안이 어두우며 영적 귀가 막혀 있기 때문이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면 24시간 설교를 듣는다 할찌라도 기갈증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3)무너진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암9:11-15) 암9:11-15-찾아 읽을 것. 가나안 땅에 거하던 선민들이 사사시대로 부터 사울왕에게 까지 여러 시대를 거쳐오면서 빼앗겼던 성지를 다윗이 회복을 시켰다. 그러나 다윗 이후시대를 지나오면서 또 다시 빼앗겨 성지가 무너지고 일으킬 수 없는 지경에 있게 되었다 할찌라도 다시 옛적과 같이 회복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포로에서 해방되어 다시 성읍을 건축하고 과실을 먹게 되기를 원하심. 그래서 우리는 무너진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내 마음의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우리 교회의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이 사회에 무너진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이 민족의 무너진 성지를 회복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 지도록 열심히 회복해야 한다.
셋째,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되도록해야 한다. 파괴된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우리의 영적실체를 회복한 다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물이 수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흐르듯이’ 성도가 사회의 전반에 걸쳐서 공의가 흐르는 영적수로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자연스럽게 시행되는 사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무질서한 농지를 현대화로 정리하듯이 옛시대와 옛습관으로 무질서해진 세상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정리하여 과감히 벗어버리고 새 모습으로 단장되는 사회로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구석 구석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 까지 때로는 세찬 물결 같이 때로는 세미한 물결 같이 이리 저리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 부패하고 타락한 부분들을 성도가 가는 곳곳마다 정의가 바로서고 공의가 바로서야 하는 것이다. 이 사명을 우리는 받았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책임을 부여 받았다.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세우는 일을 이방인에게나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신 것이 아니라 선민들에게 맡기셨다. 그것은 곧 빛과 소금의 역활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의 손은 심판의 손이다. 만약 하나님의 심판이 홍수같이 밀려들어온다고 생각해보라 부패타락된 모든 부분들을 물이지나가면서 모든 것을 쓸어버리듯이 우리에게 손을 대신다고 한다면 끔찍한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우리의 영적실체를 회복하여 공의가 정의가 바로서는 사회,민족,국가가 되도록 힘쓰는 성도가 되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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