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가 아니라 여기다 (암5:1-6)
본문
2차 대전때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아라비아에서 사막에서 살고 있는 베드윈 족을 모아 전쟁을 하여 영국에 큰 승리를 안겨다 준이가 바로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장군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수 로렌스 장군은 베드윈 족중에서 공로가 특별하게 큰 10명을 영국으로 초대하여 구라파 여행을 시켜 주었습니다. 마지막 날 밤은 파리에서 지내게 되었습니다. 내일 아침 호텔 로비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습니다. 다음날 아침 약속시간이 훨씬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며 방마다 확인하러 들어 가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수도꼭지를 빼느라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무슨 영문인지를 물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구라파를 돌면서 굉장한 건물, 박물관, 놀라운 경치들을 신비하게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가장 우리에게 신기한 것은 이 수도꼭지입니다. 장군님도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사막에서는 가장 귀한 것은 물입니다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물이 나오니 이것 몇 개만 가지고 가면 사막에서 물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안 빠져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렌스 장군은 기가 막혀서 말했습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예요.
수도꼭지는 파이프와 연결되어 있고 파이프는 수도관과 연결되어 있고, 수도관은 저수지와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오늘날 돈만 있으면, 건가안 있으면, 명예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돌아 갑니다. 지금부터
2,800년 전 아모스 시대에 이스라엘은 온통 죄악으로 가득차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방면은 물론 종교계까지 온통 타락되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암7: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암7: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암7: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암7: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이 때 아모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민족이 가는 길은 파멸이며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명한 제사장까지도 정치가에게 아부하면서 짝짜궁이 되어 아모스의 예언을 무시하는 것을 보면서 슬픈 노래를 지은 것이 바로 아모스입니다. 그래서 1절에 아모스의 애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암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 소련은 미국과 세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세계 최대 강국이 되었고 소련은 가난한 나라로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련은 교회를 공산당 사무실로 개조하였습니다. 예배 처소를 병원으로 바꾸었습니다. 목사를 죽였습니다.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성경을 불태우고 기독교를 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성경을 닫으니 하나님은 소련을 닫으셨습니다. 소련이 하나님을 떠나니 하나님은 소련을 떠나셨습니다. 소련이 교회를 없ㅇ니까 하나님은 소련을 없애버리셨습니다. 이제 소련의 뜻있는 이들은 소련이 망한 이유를 알아 차렸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외치고 있습니다. “군목제도를 한국으로부터 받아 들이자. 성경을 알자. 하나님을 섬기자”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온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면 세 가지 비극이 올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1.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하는 비극입니다.
2. 넘어져도 일으킬 자가 없는 비극입니다. “(암5: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
3. 10분의 9가 전쟁터에서 죽는 비극입니다. “(암5: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 이런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아모스는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암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 하나님께서는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가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라고 아모스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라고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 도시로 가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일까요
1. 벧엘을 찾지 말라. 어려운 시국에는 벧엘을 찾으면 안 됩니다. 벧엘을 찾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하면 야곱을 생각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축복의 생활을 시작한 곳입니다.(창 28:10-22) 벧엘에서 받은 축복으로 야곱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은 축복일까요 아니면 달라일까요 벧엘부다 더 필요한 것은 엘벧엘입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벧엘이란 이름은 야곱이 도망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다는 고백을 하고 나서 벧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고 돌아 와서 “엘벧엘”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엘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벧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엘벧엘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옷을 걸치고 있는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선물 포장지보다 중요한 것은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선물입니다. 벧엘의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려운 시국일수록 벧엘의 축복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말했습니다. (암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2. 길갈로 들어 가지 말라. 어려운 시국에는 길갈로 들어가지 말라고 아모스가 말했습니다. 이말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원하면 춘향이를 생각합니다. 거제도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생각합니다. 지금은 하이도 하면 김 대중 대통령을 연상합니다. 선산하면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하면 여호수아를 연상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넌 후 12돌을 쌓고 기념비를 세운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수4:20)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수4:2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수4:22)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수4: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수4: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길갈하면 승리의 도시를 의미합니다. 여러운 시국일수록 승리, 즉 이기고 지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만 찾으라는 것이 아모스의 외침입니다. 너무 이기려고만 하는 것은 신앙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드리는 것이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이길 사람은 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질 사람은 이겨야만 합니다. 아버지와 초등학교 아들이 씨름하면 누가 이깁니까 아들이 이깁니다. 아버지는 지는 것이 아니라 져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져줄 여유가 있지만 아들은 져줄 여유가 없습니다. 이번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네델란드에 졌다고 차범근 감독을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시합도중에 경질하고 누가 어떻게 할까봐 차범근 집을 수백명의 전경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기자는 평소에 전혀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부모가 성적표를 받아 오니까 못 했다가 때리는 격이라며 꼬집었습니다. 좀 지면 어떻습니까 져야 이기는 나라도 있지 않습니까 축구 시합은 이기기 위하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졌어도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길갈이 아닙니다. 축구에 이겼다고 경제위기로 쓰러져 있는 국민 사기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길갈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3.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브엘세바라는 뜻은 7개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막지대에 7개의 우물이 있다는 말은 편안과 부요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에셀이라는 나무를 심고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시국이 어려울수록 편안한 것을 추구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뛰는 것보다 걷는 것이 편안합니다. 서있는 것보다은 앉아 있는 것이, 앉아있는 것보다는 누워 있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누워있는 것보다 자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그러나 편안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생스러워도 보람있게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백인들이 심하게 흑인들을 핍박할 때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흑인들만 모이는 교회 “성 시온 교회”에서 고난주간 성찬식을 거행하고난 후 흑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들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준 것처럼 발을 닦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때 대법원장으로 내정된 백인 판사 올리버가 이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종으로 일하고 있는 하녀에게 다가가서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는 여종 앞에서 무릎을 꿇었ㅅ브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 하여 시커먼 발을 닦았습니다. 순간 예배당안은 숙연하여졌습니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올리버 판사는 하녀의 발을 다 닦아 준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분은 우리 집 여종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내 아들 딸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내 자식들의 발을 닦아 준 고마운 분입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그는 정부로부터 대법원장으로 내정되었던 것이 취소되었고 판사직까지 박탈당하였습니다. 시온 교회 흑인 목사님이 위로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을 때 올리버는 말했습니다. “판사직도, 대법둰장직도 무덤에 갈 때에는 먼지가 아닙니까 그런 먼지같은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브엘세바의 삶보다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찾는 일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암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벧엘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길갈로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여호와를 찾으면 살 것이라고 아모스는 줄기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까
1.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당하든지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로렌 컨닝햄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허공에 떠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귀가 나타나서 진기톱으로 나무 둥지를 베어 버렸습니다. 한 가닥 의지하던 나무가 쓰러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려 주실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바른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은과 금은 없어도 예수 이름만 있다고 외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소득의 90%를 하나님께 바치며 하나님의 일을 한 투루센트에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물질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큰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2.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힘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 그렇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는 벧엘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길갈로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여호와를 찾으면 살 것입니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시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그런데 가장 우리에게 신기한 것은 이 수도꼭지입니다. 장군님도 아시는 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사막에서는 가장 귀한 것은 물입니다 수도꼭지를 틀기만 하면 물이 나오니 이것 몇 개만 가지고 가면 사막에서 물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안 빠져서 이렇게 고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렌스 장군은 기가 막혀서 말했습니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니예요.
수도꼭지는 파이프와 연결되어 있고 파이프는 수도관과 연결되어 있고, 수도관은 저수지와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오늘날 돈만 있으면, 건가안 있으면, 명예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줄 알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돌아 갑니다. 지금부터
2,800년 전 아모스 시대에 이스라엘은 온통 죄악으로 가득차있었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방면은 물론 종교계까지 온통 타락되어 어디에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모르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암7: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암7: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암7: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암7: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이 때 아모스는 여호와 하나님을 떠난 민족이 가는 길은 파멸이며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유명한 제사장까지도 정치가에게 아부하면서 짝짜궁이 되어 아모스의 예언을 무시하는 것을 보면서 슬픈 노래를 지은 것이 바로 아모스입니다. 그래서 1절에 아모스의 애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암5:1)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애가로 지은 이 말을 들으라 ” 소련은 미국과 세계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미국은 세계 최대 강국이 되었고 소련은 가난한 나라로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소련은 교회를 공산당 사무실로 개조하였습니다. 예배 처소를 병원으로 바꾸었습니다. 목사를 죽였습니다. 성도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성경을 불태우고 기독교를 말살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련이 성경을 닫으니 하나님은 소련을 닫으셨습니다. 소련이 하나님을 떠나니 하나님은 소련을 떠나셨습니다. 소련이 교회를 없ㅇ니까 하나님은 소련을 없애버리셨습니다. 이제 소련의 뜻있는 이들은 소련이 망한 이유를 알아 차렸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외치고 있습니다. “군목제도를 한국으로부터 받아 들이자. 성경을 알자. 하나님을 섬기자” 그래서 열심히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고 있습니다. 아모스는 온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면 세 가지 비극이 올 것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1. 다시는 일어나지 못 하는 비극입니다.
2. 넘어져도 일으킬 자가 없는 비극입니다. “(암5: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 ”
3. 10분의 9가 전쟁터에서 죽는 비극입니다. “(암5:3)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중에서 천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백명만 남고 백명이 나가던 성읍에는 열명만 남으리라 하셨느니라 ” 이런 비극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아모스는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암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 하나님께서는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가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라고 아모스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라고 제시하여 주고 있습니다. 도대체 세 도시로 가지 말고 하나님을 찾으라는 말씀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일까요
1. 벧엘을 찾지 말라. 어려운 시국에는 벧엘을 찾으면 안 됩니다. 벧엘을 찾지 말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벧엘하면 야곱을 생각합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축복의 생활을 시작한 곳입니다.(창 28:10-22) 벧엘에서 받은 축복으로 야곱은 거부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은 축복일까요 아니면 달라일까요 벧엘부다 더 필요한 것은 엘벧엘입니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벧엘이란 이름은 야곱이 도망가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 하였다는 고백을 하고 나서 벧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받고 돌아 와서 “엘벧엘”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엘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벧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엘벧엘이라고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옷을 걸치고 있는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선물 포장지보다 중요한 것은 포장지 속에 들어 있는 선물입니다. 벧엘의 축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 축복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어려운 시국일수록 벧엘의 축복보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아모스는 말했습니다. (암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암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 “(시121: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121:2)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2. 길갈로 들어 가지 말라. 어려운 시국에는 길갈로 들어가지 말라고 아모스가 말했습니다. 이말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원하면 춘향이를 생각합니다. 거제도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을 생각합니다. 지금은 하이도 하면 김 대중 대통령을 연상합니다. 선산하면 박정희 대통령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하면 여호수아를 연상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넌 후 12돌을 쌓고 기념비를 세운 곳이 바로 길갈입니다. “(수4:20) 여호수아가 그 요단에서 가져온 열 두 돌을 길갈에 세우고 (수4:21)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일러 가로되 후일에 너희 자손이 그 아비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수4:22) 너희는 자손에게 알게 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음이라 (수4:23)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요단 물을 너희 앞에 마르게 하사 너희로 건너게 하신 것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 앞에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로 건너게 하심과 같았나니 (수4:24) 이는 땅의 모든 백성으로 여호와의 손이 능하심을 알게 하며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영원토록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길갈하면 승리의 도시를 의미합니다. 여러운 시국일수록 승리, 즉 이기고 지는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하나님만 찾으라는 것이 아모스의 외침입니다. 너무 이기려고만 하는 것은 신앙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조용히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드리는 것이 신앙적인 자세입니다. 이길 사람은 져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질 사람은 이겨야만 합니다. 아버지와 초등학교 아들이 씨름하면 누가 이깁니까 아들이 이깁니다. 아버지는 지는 것이 아니라 져주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져줄 여유가 있지만 아들은 져줄 여유가 없습니다. 이번 프랑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선수들이 네델란드에 졌다고 차범근 감독을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시합도중에 경질하고 누가 어떻게 할까봐 차범근 집을 수백명의 전경들이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기자는 평소에 전혀 자녀 교육에 관심을 가지지 않던 부모가 성적표를 받아 오니까 못 했다가 때리는 격이라며 꼬집었습니다. 좀 지면 어떻습니까 져야 이기는 나라도 있지 않습니까 축구 시합은 이기기 위하여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본은 졌어도 박수를 받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가 필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승리가 아닙니다. 길갈이 아닙니다. 축구에 이겼다고 경제위기로 쓰러져 있는 국민 사기가 살아나는 것은 아닙니다. 길갈로 가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하고 의지하여야 합니다. 신앙생활 잘하는 것입니다.
3.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브엘세바라는 뜻은 7개의 우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막지대에 7개의 우물이 있다는 말은 편안과 부요의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에셀이라는 나무를 심고 편안하게 살았습니다. 시국이 어려울수록 편안한 것을 추구하지만 이럴 때 일수록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뛰는 것보다 걷는 것이 편안합니다. 서있는 것보다은 앉아 있는 것이, 앉아있는 것보다는 누워 있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누워있는 것보다 자는 것이 더 편안합니다. 그러나 편안한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고생스러워도 보람있게 사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을 위하여 열심히 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백인들이 심하게 흑인들을 핍박할 때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생긴 이야기입니다. 흑인들만 모이는 교회 “성 시온 교회”에서 고난주간 성찬식을 거행하고난 후 흑인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들이 제일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닦아 준 것처럼 발을 닦아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 때 대법원장으로 내정된 백인 판사 올리버가 이 예배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집에서 종으로 일하고 있는 하녀에게 다가가서 발을 닦아 주었습니다. 그는 여종 앞에서 무릎을 꿇었ㅅ브니다. 그리고 정성을 다 하여 시커먼 발을 닦았습니다. 순간 예배당안은 숙연하여졌습니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올리버 판사는 하녀의 발을 다 닦아 준 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분은 우리 집 여종으로서 오랜 세월동안 내 아들 딸을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내 자식들의 발을 닦아 준 고마운 분입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그는 정부로부터 대법원장으로 내정되었던 것이 취소되었고 판사직까지 박탈당하였습니다. 시온 교회 흑인 목사님이 위로하러 그 집을 방문하였을 때 올리버는 말했습니다. “판사직도, 대법둰장직도 무덤에 갈 때에는 먼지가 아닙니까 그런 먼지같은 것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브엘세바의 삶보다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찾는 일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암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 벧엘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길갈로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여호와를 찾으면 살 것이라고 아모스는 줄기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까
1.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어디에서 어떻게 당하든지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로렌 컨닝햄은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나무가지 끝에 매달려 허공에 떠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귀가 나타나서 진기톱으로 나무 둥지를 베어 버렸습니다. 한 가닥 의지하던 나무가 쓰러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살려 주실 것을 믿는 것이 바로 바른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하여야 합니다. 은과 금은 없어도 예수 이름만 있다고 외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하여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소득의 90%를 하나님께 바치며 하나님의 일을 한 투루센트에게 하나님께서는 엄청난 물질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큰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2.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힘차게 외치고 있습니다. “(사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 그렇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시국에는 벧엘을 찾지 말아야 합니다. 길갈로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여호와를 찾으면 살 것입니다. 거기가 아니라 여기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시는 성도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