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단11:21-45)
본문
다니엘 11:25-45절은 좀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선 전체적으로 조명해 보고 나서 각 절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부연하겠습니다. 본문은 주전 6세기 후반에 주께서 연로한 다니엘 선지자에게 주셨던 환상의 연속입니다. 다니엘은 초자연적으로 천사들에 의해 강건해졌기 때문에 노구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환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메대와 바사 제국의 패권이 그리이스로 넘어가고, 그리이스 제국은 네 나라로 분열되었다가 주로 두 왕국 사이의 권력 투쟁의 장으로 화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11장 20절까지는 애굽에 기반을 둔 프톨레미 남왕국과 시리아에 기반을 둔 셀류커스 북왕국 사이의 관계를 자세히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본 환상에 대한 공부는 이미 성경의 진정성(眞正性)에 대한 우리의 확신을 더욱 깊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의 본문도 우리에게 동일한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본 항목을 다루는 우리의 공부 방법은 앞 장의 경우와 비슷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역사적 세목들에 쏠리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가장 평이하게 해당 기간을 설명할 것입니다. 이 작업을 위해 우리는 각 사건들과 관련된 개별적인 구절들을 언급하고 다시 한번 예언의 정확성을 짚어보게 될 것입니다. 본문들도 사건 발생 이전에 쓰여진 역사들입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21절:우리는 앞 장에서 안티오쿠스 대제(Antiochus the Great)의 왕위가 셀류커스 필로파토르에게 넘어갔지만 그는 집정 초기에 의문의 변사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북왕국의 다음 후계자는 또한 사람의 안티오쿠스로 불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에피파네스’ (Epiphanes, 탁월한)라고 불렀지만 너무도 성격이 괴팍해서 사람들은 그를 ‘에피마네스’ (Epimanes, 미치광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는 실제로 간교하고, 능력이 있고, 잔인하며, 어리석고, 탐욕적이며 부도덕하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격렬한 열정 가였습니다. “나라 영광을 그에게 주지 아니할 것이나” 그는 원래 왕위를 이어받을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왕족의 품위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략과 부드러운 말솜씨로 왕위를 차지한 비열한 인간이었습니다. 22절:북왕국의 새 왕은 곧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전쟁을 하여 대승을 거두고 자기와 ‘동맹한 왕’인 가까운 맹방도 쳐부수었습니다. 23절:그의 다음 정책은 이집트와 거짓 동맹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인들의 환심을 사기 시작하면서 비록 ‘적은 백성’을 거느렸지만 최강의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24절: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일약 부강한 왕국의 주인이 되어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의 왕국은 또한 방탕하고 부도덕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막대한 권력과 물질을 손에 넣었지만 이집트의 ‘산성’들을 장악할 야심은 아직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25-26절:그는 다시 이집트 원정 계획을 세우고 출정하였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군부 내의 반란으로 인해서 안티오쿠스를 격퇴시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셀류커스 군대들이 이집트 군사들의 시체 위를 밟고 진군할 때, “많은 자가 엎드러져 죽으리라”는 본문의 예언을 누가 상기했겠습니까 27절:양국의 왕들은 한 식탁에 앉았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다니엘에게 이 사건을 두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습니다. “이 두 왕이 서로 해하고자 하여 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니….”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필로메토르와 권력을 나눌 것처럼 말하였고 필로메토르는 그의 말을 믿는 척하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속이고 속는 듯이 처신했지만 아직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양국 사이의 전쟁은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27절 끝의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28-29절:안티오쿠스는 많은 약탈 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불경하였고 적수가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는 주전 168년 또한 차례의 이집트 원정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였습니다. 과연 안티오쿠스는 이번 원정에서 그 전번만큼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30절:안티오쿠스는 ‘깃딤의 배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깃딤의 포피리우스 라이나스가 이끈 로마 함대를 가리킵니다. 라이나스는 안티오쿠스의 진격 소식을 듣고 즉시 이집트 해안으로 출항하였습니다. 한편 안티오쿠스는 로마 함대의 도착으로 이집트 침공이 어려워지자 포기하고 귀국하는 길에 그 분풀이를 팔레스틴 퍼부었습니다. 그는 이미 유대교의 신앙을 내던진 변절한 유대인들과 숙의한 후에 예루살렘 공격을 꾀하였습니다. 31절:그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아녀자들을 포로로 잡고 성전을 감시하는 요새를 장악하였습니다. 그 다음 그는 유대교의 흔적까지 지워버리고 그 대신 헬라의 사상과 문화를 강제로 주입시키는 조직적인 정책을 시도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의 야만적 행위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의 악행 중에서 가장 커다란 만행은 성전의 번제단을 치우고 거기에다 이교의 제단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32절:안티오쿠스는 감언이설로 배교한 유대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자기 계획의 앞잡이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절개 없는 유대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 나라에는 아직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한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경건한 많은 무명의 성도들은 안티오쿠스가 강요하는 이교의 의식을 반대하고 용감하게 맞서 투쟁하였습니다. 그들은 고문과 순교를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안티오쿠스를 배격하는 저항 운동이 신속히 조직되었으며, 박해의 시기는 남은 자들의 영적 힘을 과시하는 빛나는 믿음의 단련 기간이 되었습니다. 33절:영적 안목이 있던 자들은 백성들에게 비밀리에 성경을 가르치며, 기도회를 인도하고, 메시아 소망이 깨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적 지도자들은 항상 추적을 당하고 칼날과 화형과 투옥과 약탈을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길고 혹독한 박해는 참된 믿음과 신앙의 진면목을 밝혀주는 기간이었습니다. 34절:마침내 경건한 남은 자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즈음에 마카베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유다 마카베오는 보복이 두려워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하였으며, 많은 위선자들이 그와 신실한 성도들 사이에 끼여 있었습니다. 35절:핍박의 시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을 넘어지게도 했지만 단련을 받고 믿음이 정화되는 귀한 체험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핍박자의 손을 멈추게 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결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본 항목에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등장과 활동을 상술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2세기의 사건들이 주전 6세기에 예언되었다는 점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다니엘 11장에 상세히 묘사된 사건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비교적 근대에 와서야 일반 역사가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이미 사건이 발생되기 여러 세기 전에 예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의 내용이 초자연적인 신령한 기원을 가졌다는 사실은 우리를 계속 고무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통제자시며 비록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사는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배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교훈들은 이미 배웠어도 자칫 잊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성경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석의 원리 지금까지 우리는 11:35절까지 공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36절부터 본문에는 좀 이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즉 본문에는 계속해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한 서술을 하는 듯하면서도 전혀 그에게 적용시킬 수 없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35절까지의 본문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상세한 부분까지 매번 놀랄 만큼 적중력을 지니고 예언된 대로 성취되었습니다. 36절 이후의 본문도 주제에는 변동이 없어 보입니다.
본문은 악독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화제의 주인공으로 삼고 서술해 나가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적힌 제목들은 도무지 안티오쿠스에게 맞지 않으며 맞을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환상의 연속인 12장의 서도를 보면 본문의 내용이 세상 끝날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1 거기에는 부활과 영생 및 영구한 수치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니엘 선지자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보지만 그를 통해서 장차 오게 될 그와 동일한 어떤 인물을 투시하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미래의 어떤 인물의 예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니엘 7정에서 나왔던 ‘작은 뿔’도 같은 원리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뿔’은 세상 끝날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전처럼 괴롭힐 어떤 악한 인물이었습니다. 8장에서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작은 뿔’로 기술되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책에서 두 명의 상이한 개체가 똑같은 표현으로 두 장에서 연이어 서술된 셈입니다. 한 사람은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앞으로 나타날 자입니다. 그렇지만 이 두 인물은 같은 용어로 표현되었습니다. 실은 두 명의 개체들이지만 내용상 동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적그리스도들이 그에 앞서 출현하였음을 압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려고 시도한 여러 인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앞잡이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앞잡이들 중 하나가 무대에 나타나면 그가 적그리스도의 앞잡이에 해당하는 인물인지 혹은 적그리스도 자신인지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앞잡이인지 실제 장본인인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경건한 성도들의 눈에는 개별적인 적그리스도들 속에서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이 양편들이 모두 하나로 비췹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미래를 응시할 때에 두 명의 상이한 개인들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인물을 발견하고 그의 예언의 말씀을 양쪽 인물에 연관시켰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이 원리를 미래의 인물들에게 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건들에도 적용시켰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역사를 보면 두 겹의 사건들이 상이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이중적 사건의 차이를 암시하면서도 마치 그것들이 하나인 양 예언합니다. 우리가 예언의 이것은 측면을 파악하지 못하면 예언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퍽 제한을 받게 됩니다. 다니엘 11장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이중적 차원의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다니엘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장차 오게 될 한 인물의 예표로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안티오쿠스가 예표 하는 인물은 ‘불법의 사람’(살후2:3)이었습니다. 36절부터 다니엘이 언급하는 인물은 안티오쿠스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주안점을 두고 말하는 인물은 적그리스도임이 확실합니다. 본문에서 열거된 안티오쿠스에게 전혀 적용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불법의 사람 26:본 절은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행할 한 왕에 대한 서술입니다. 이 왕은 세력을 잡은 후에 계속 권세가 높아져서 모든 신들을 업신여기고 큰소리를 칠 것입니다.
그런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자신이 신적인 존재인 양 행세했지만, 사실은 평생토록 일종의 종교적 의식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는 신들의 신이신 하나님을 거슬려 말하기도 했었지만 모든 종교를 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본 절에 해당하는 인물은 안티오쿠스가 아니고 데살로니가후서 2:3절에서 명시된 ‘불법의 사람’입니다. (살후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 일단 본 장이 언급하는 대상 인물이 주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국한되지 않고 그가 예표 하는 다른 한 인물이라는 점을 포착하면 본문의 각 구절들의 의미를 훨씬 잘 살릴 수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들은 문자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해석이 증거하듯이 문자적인 언어에 너무 제한 받지 말아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종말적인 사건들을 거론할 때, 그들에게 알려진 언어들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는 예언적인 사건들을 표출시키기에는 퍽 미흡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사용된 문자에는 단순한 어휘들이 지닌 의미들보다 더 넓고 깊은 차원의 의미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37절:본 절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 절의 주인공은 모든 신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그는 자기 조상들이 귀하게 여긴 것들까지도 짓밟는, 무정하며 경건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38-39절:이 사람이 섬기는 유일한 신은 ‘세력의 신’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이 신을 섬기고 그 도움으로 적들을 쳐부수며 자기 편을 드는 자들을 물질과 명예로 보상해 줄 것입니다.
40절:때가 이르면 두 적수들이 서로 직접 맞서게 될 것입니다. ‘북방 왕’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의미하고, ‘남방 왕’은 프톨레미 왕조를 의미합니다. 이 때는 적그리스도가 영토 확장에 몰두할 전쟁의 시기입니다. 41절:그는 반대파들을 모두 꺾었습니다. 그의 진노를 피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과 원수가 된 자들 뿐입니다. 본 절은 모압국을 언급하기 때문에 안티오쿠스와는 무관합니다. 모압은 안티오쿠스 당시에 존재했던 나라가 아니었으며 오늘날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본 절은 비록 문자 적인 형태를 갖춘 언어를 사용하였더라도 문자적인 해석을 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에돔, 모압, 암몬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한 오랜 원수들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교훈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상 구약 예언의 많은 부분들이 영적 해석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본 절에서 언급된 나라들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에 그의 악행을 면할 수 있는 자들로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해 온 자들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42-44절:그의 노여움을 피할 곳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세계를 정복하며 전세계적인 복종을 강요할 것입니다. 그를 대적하는 반란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반란 기미가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그가 나가서 무자비하게 진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45절:드디어 그는 성스럽고 거룩한 곳에 자신의 보좌를 세울 것입니다. (살후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21-45절까지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관한 환상입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종말적인 무서운 한 인물의 환상과 겹쳐 있습니다. 본 장이 주로 다루는 주인공은 이 마지막 때의 인물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본 장은 위로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깨어 있는 삶 지금까지 본서에 제시된 다니엘서에 대한 해석을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함께 동의할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비추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더 한층 깨어 있어야 한다는 데에도 이의가 없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배도 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2:3)이 나타나기 전에는 마지막 날이 올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세계가 ‘기독교화’ 될 것이라는 예언적 견해를 전파합니다. 그들은 각국의 정부와 단체와 공장 및 학교가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게 될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황금시대가 도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낙관주의자들은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악인들은 점점 더 날뛰게 될 것이며(딤후3:13) 마침내 이 세상이 겪어보지 못한 최악의 한 인물이 출현할 것입니다. 이 인물이 출현하면 인류 역사상에 나타났었던 ‘작은 뿔들’은 그의 앞잡이들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의 인물은 과거의 어떤 악인들보다도 더욱 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의 박해는 전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 기독교 교회는 전례가 없는 어려운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박하고 깊이가 없는 예배나 신앙 생활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앞으로 교회는 무서운 박해를 받으며 수많은 순교자를 낼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에 투철하지 못하고 진지한 성도의 삶을 살지 않으면 마지막 때를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본 장의 교훈을 잘 명심한다면 교회가 큰 어려움을 당할 때에 훨씬 잘 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서에서 거듭 제시된 진리는 하늘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습니다. 27절, 29절, 35절은 모두 ‘작정된 기한’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36절은 “그 작정된 일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역사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역사의 고삐를 손에 쥐고 계신 분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통제력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의 예고가 있게 된 것입니다. 45절 끝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통어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반드시 출현한다는 것과 또한 그의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본 장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아무리 박해가 심해도 우리가 하나님과 갖는 교제는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가장 어두운 때에 성도들은 더욱 강건한 믿음 생활을 하였습니다 (단11: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잔혹한 압제자들은 일체의 공공 예배와 모든 기독교 모임들을 금지시킬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성경책과 기독교 서적들을 압수할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활동을 불법화시키고 우리의 모든 종교적 자유를 앗아가며 무거운 벌책을 가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도무지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고 철저한 박해를 계속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정신을 굴절시킬 수 있는 현대 의약까지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즐거움을 온전히 앗아갈 수는 없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날뛸 수 있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은 자들이 항상 잔존케 됩니다. 최악의 시기에도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자는 있을 것입니다. 핍박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궁극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더 넓게 확산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초목들은 온실 속에서가 아닌, 바람과 우박과 눈과 뜨거운 열기 속에서 번창합니다. 본 장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위로의 교훈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악이 끝내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가 세력을 잡았을 때에는 모두 진정한 믿음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에는 팔레스틴이 지상에서 참된 신자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안티오쿠스가 무제한적인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그의 유대교 박멸 정책은 반드시 성공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쓸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안티오쿠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페르시아를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서 유대의 마카베오가와 상대하기 위해 리시아스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 들에게 정보가 들어가서 그의 야심은 좌절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페르시아를 침입하고 보화를 약탈하여 바벨론 정복의 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을 가졌었는데 일이 어긋나버린 셈이었습니다. 바벨론으로 가는 중에 그는 본국으로부터 그의 장군이 마카베오가에 의해 패전을 당하고 여호와의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에 다시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전쟁에서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고, 그를 암살시키거나 정치적으로 매장시킬 수도 없는 강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마카베오가의 승전 소식을 듣고는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그는 공포와 실의에 빠져 사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치시자 그는 곧 거꾸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든 적그리스도들도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마지막 적그리스도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적그리스도는 아무리 세력이 크고 오만하여도 주님의 능력으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살후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계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계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21절:우리는 앞 장에서 안티오쿠스 대제(Antiochus the Great)의 왕위가 셀류커스 필로파토르에게 넘어갔지만 그는 집정 초기에 의문의 변사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북왕국의 다음 후계자는 또한 사람의 안티오쿠스로 불리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에피파네스’ (Epiphanes, 탁월한)라고 불렀지만 너무도 성격이 괴팍해서 사람들은 그를 ‘에피마네스’ (Epimanes, 미치광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는 실제로 간교하고, 능력이 있고, 잔인하며, 어리석고, 탐욕적이며 부도덕하였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격렬한 열정 가였습니다. “나라 영광을 그에게 주지 아니할 것이나” 그는 원래 왕위를 이어받을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왕족의 품위가 없었습니다. 그는 모략과 부드러운 말솜씨로 왕위를 차지한 비열한 인간이었습니다. 22절:북왕국의 새 왕은 곧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전쟁을 하여 대승을 거두고 자기와 ‘동맹한 왕’인 가까운 맹방도 쳐부수었습니다. 23절:그의 다음 정책은 이집트와 거짓 동맹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집트인들의 환심을 사기 시작하면서 비록 ‘적은 백성’을 거느렸지만 최강의 세력으로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24절: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일약 부강한 왕국의 주인이 되어 자기가 원하는 자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의 왕국은 또한 방탕하고 부도덕한 곳이었습니다. 그는 막대한 권력과 물질을 손에 넣었지만 이집트의 ‘산성’들을 장악할 야심은 아직도 버리지 않았습니다. 25-26절:그는 다시 이집트 원정 계획을 세우고 출정하였습니다. 이집트인들은 군부 내의 반란으로 인해서 안티오쿠스를 격퇴시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 사상자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셀류커스 군대들이 이집트 군사들의 시체 위를 밟고 진군할 때, “많은 자가 엎드러져 죽으리라”는 본문의 예언을 누가 상기했겠습니까 27절:양국의 왕들은 한 식탁에 앉았습니다. 우리 주께서는 다니엘에게 이 사건을 두고 다음과 같이 예언하셨습니다. “이 두 왕이 서로 해하고자 하여 한 밥상에 앉았을 때에 거짓말을 할 것이라.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니….” 이 말씀은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필로메토르와 권력을 나눌 것처럼 말하였고 필로메토르는 그의 말을 믿는 척하였습니다! 이들은 서로 속이고 속는 듯이 처신했지만 아직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이르지 않았으므로 양국 사이의 전쟁은 종결되지 않았습니다. 27절 끝의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28-29절:안티오쿠스는 많은 약탈 물을 가지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는 불경하였고 적수가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는 주전 168년 또한 차례의 이집트 원정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이번이 그 전번만 못”하였습니다. 과연 안티오쿠스는 이번 원정에서 그 전번만큼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30절:안티오쿠스는 ‘깃딤의 배들’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깃딤의 포피리우스 라이나스가 이끈 로마 함대를 가리킵니다. 라이나스는 안티오쿠스의 진격 소식을 듣고 즉시 이집트 해안으로 출항하였습니다. 한편 안티오쿠스는 로마 함대의 도착으로 이집트 침공이 어려워지자 포기하고 귀국하는 길에 그 분풀이를 팔레스틴 퍼부었습니다. 그는 이미 유대교의 신앙을 내던진 변절한 유대인들과 숙의한 후에 예루살렘 공격을 꾀하였습니다. 31절:그는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아녀자들을 포로로 잡고 성전을 감시하는 요새를 장악하였습니다. 그 다음 그는 유대교의 흔적까지 지워버리고 그 대신 헬라의 사상과 문화를 강제로 주입시키는 조직적인 정책을 시도하였습니다. 안티오쿠스의 야만적 행위는 끝이 없었습니다. 그의 악행 중에서 가장 커다란 만행은 성전의 번제단을 치우고 거기에다 이교의 제단을 세운 것이었습니다. 32절:안티오쿠스는 감언이설로 배교한 유대인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자기 계획의 앞잡이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절개 없는 유대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 나라에는 아직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경건한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경건한 많은 무명의 성도들은 안티오쿠스가 강요하는 이교의 의식을 반대하고 용감하게 맞서 투쟁하였습니다. 그들은 고문과 순교를 당하면서도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안티오쿠스를 배격하는 저항 운동이 신속히 조직되었으며, 박해의 시기는 남은 자들의 영적 힘을 과시하는 빛나는 믿음의 단련 기간이 되었습니다. 33절:영적 안목이 있던 자들은 백성들에게 비밀리에 성경을 가르치며, 기도회를 인도하고, 메시아 소망이 깨지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영적 지도자들은 항상 추적을 당하고 칼날과 화형과 투옥과 약탈을 당했으나 굽히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길고 혹독한 박해는 참된 믿음과 신앙의 진면목을 밝혀주는 기간이었습니다. 34절:마침내 경건한 남은 자들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즈음에 마카베오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유다 마카베오는 보복이 두려워 하나님의 남은 자들을 적극적으로 돕지 못하였으며, 많은 위선자들이 그와 신실한 성도들 사이에 끼여 있었습니다. 35절:핍박의 시기는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자들을 넘어지게도 했지만 단련을 받고 믿음이 정화되는 귀한 체험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핍박자의 손을 멈추게 하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결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본 항목에서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등장과 활동을 상술하였습니다. 다시 한번 우리는 2세기의 사건들이 주전 6세기에 예언되었다는 점에 경탄을 금치 못합니다. 다니엘 11장에 상세히 묘사된 사건들 가운데 상당 부분이 비교적 근대에 와서야 일반 역사가들에게 알려졌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에는 이미 사건이 발생되기 여러 세기 전에 예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의 내용이 초자연적인 신령한 기원을 가졌다는 사실은 우리를 계속 고무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통제자시며 비록 그분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세상사는 예언의 말씀을 그대로 성취시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배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교훈들은 이미 배웠어도 자칫 잊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성경의 말씀이 진실되다는 사실을 항상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해석의 원리 지금까지 우리는 11:35절까지 공부해 왔습니다.
그런데 36절부터 본문에는 좀 이상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즉 본문에는 계속해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대한 서술을 하는 듯하면서도 전혀 그에게 적용시킬 수 없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35절까지의 본문은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습니다. 상세한 부분까지 매번 놀랄 만큼 적중력을 지니고 예언된 대로 성취되었습니다. 36절 이후의 본문도 주제에는 변동이 없어 보입니다.
본문은 악독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화제의 주인공으로 삼고 서술해 나가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적힌 제목들은 도무지 안티오쿠스에게 맞지 않으며 맞을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같은 환상의 연속인 12장의 서도를 보면 본문의 내용이 세상 끝날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1 거기에는 부활과 영생 및 영구한 수치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다니엘 선지자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보지만 그를 통해서 장차 오게 될 그와 동일한 어떤 인물을 투시하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미래의 어떤 인물의 예표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다니엘 7정에서 나왔던 ‘작은 뿔’도 같은 원리로 이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은 뿔’은 세상 끝날에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전처럼 괴롭힐 어떤 악한 인물이었습니다. 8장에서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작은 뿔’로 기술되어 나옵니다. 그러니까 동일한 책에서 두 명의 상이한 개체가 똑같은 표현으로 두 장에서 연이어 서술된 셈입니다. 한 사람은 세상에서 살다가 죽은 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앞으로 나타날 자입니다. 그렇지만 이 두 인물은 같은 용어로 표현되었습니다. 실은 두 명의 개체들이지만 내용상 동일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에 적그리스도들이 그에 앞서 출현하였음을 압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려고 시도한 여러 인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앞잡이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앞잡이들 중 하나가 무대에 나타나면 그가 적그리스도의 앞잡이에 해당하는 인물인지 혹은 적그리스도 자신인지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앞잡이인지 실제 장본인인지를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경건한 성도들의 눈에는 개별적인 적그리스도들 속에서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실상 그들에게는 이 양편들이 모두 하나로 비췹니다!
다니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미래를 응시할 때에 두 명의 상이한 개인들 속에서 하나의 공통된 인물을 발견하고 그의 예언의 말씀을 양쪽 인물에 연관시켰습니다. 많은 선지자들은 이 원리를 미래의 인물들에게 뿐만 아니라 미래의 사건들에도 적용시켰습니다. 그 이후에 일어난 역사를 보면 두 겹의 사건들이 상이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 이중적 사건의 차이를 암시하면서도 마치 그것들이 하나인 양 예언합니다. 우리가 예언의 이것은 측면을 파악하지 못하면 예언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 퍽 제한을 받게 됩니다. 다니엘 11장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이중적 차원의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주께서는 다니엘이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장차 오게 될 한 인물의 예표로 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안티오쿠스가 예표 하는 인물은 ‘불법의 사람’(살후2:3)이었습니다. 36절부터 다니엘이 언급하는 인물은 안티오쿠스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주안점을 두고 말하는 인물은 적그리스도임이 확실합니다. 본문에서 열거된 안티오쿠스에게 전혀 적용시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으로 들어가 봅시다. 불법의 사람 26:본 절은 자기 마음대로 권력을 행할 한 왕에 대한 서술입니다. 이 왕은 세력을 잡은 후에 계속 권세가 높아져서 모든 신들을 업신여기고 큰소리를 칠 것입니다.
그런데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자신이 신적인 존재인 양 행세했지만, 사실은 평생토록 일종의 종교적 의식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그는 신들의 신이신 하나님을 거슬려 말하기도 했었지만 모든 종교를 대적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본 절에 해당하는 인물은 안티오쿠스가 아니고 데살로니가후서 2:3절에서 명시된 ‘불법의 사람’입니다. (살후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 일단 본 장이 언급하는 대상 인물이 주로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국한되지 않고 그가 예표 하는 다른 한 인물이라는 점을 포착하면 본문의 각 구절들의 의미를 훨씬 잘 살릴 수 있습니다. 구약의 많은 예언들은 문자적인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해석이 증거하듯이 문자적인 언어에 너무 제한 받지 말아야 합니다. 선지자들은 종말적인 사건들을 거론할 때, 그들에게 알려진 언어들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언어는 예언적인 사건들을 표출시키기에는 퍽 미흡하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사용된 문자에는 단순한 어휘들이 지닌 의미들보다 더 넓고 깊은 차원의 의미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37절:본 절을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본 절의 주인공은 모든 신을 무시하는 자입니다. 그는 자기 조상들이 귀하게 여긴 것들까지도 짓밟는, 무정하며 경건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사람입니다.
38-39절:이 사람이 섬기는 유일한 신은 ‘세력의 신’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바쳐 이 신을 섬기고 그 도움으로 적들을 쳐부수며 자기 편을 드는 자들을 물질과 명예로 보상해 줄 것입니다.
40절:때가 이르면 두 적수들이 서로 직접 맞서게 될 것입니다. ‘북방 왕’은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의미하고, ‘남방 왕’은 프톨레미 왕조를 의미합니다. 이 때는 적그리스도가 영토 확장에 몰두할 전쟁의 시기입니다. 41절:그는 반대파들을 모두 꺾었습니다. 그의 진노를 피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과 원수가 된 자들 뿐입니다. 본 절은 모압국을 언급하기 때문에 안티오쿠스와는 무관합니다. 모압은 안티오쿠스 당시에 존재했던 나라가 아니었으며 오늘날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본 절은 비록 문자 적인 형태를 갖춘 언어를 사용하였더라도 문자적인 해석을 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에돔, 모압, 암몬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한 오랜 원수들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교훈을 영적인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상 구약 예언의 많은 부분들이 영적 해석을 요구합니다. 따라서 본 절에서 언급된 나라들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에 그의 악행을 면할 수 있는 자들로서 오래 전부터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적해 온 자들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42-44절:그의 노여움을 피할 곳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는 세계를 정복하며 전세계적인 복종을 강요할 것입니다. 그를 대적하는 반란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반란 기미가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면 그가 나가서 무자비하게 진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45절:드디어 그는 성스럽고 거룩한 곳에 자신의 보좌를 세울 것입니다. (살후2: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21-45절까지는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관한 환상입니다. 그러나 이 환상은 종말적인 무서운 한 인물의 환상과 겹쳐 있습니다. 본 장이 주로 다루는 주인공은 이 마지막 때의 인물입니다. 다행스럽게도 본 장은 위로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의 끝이 이르리니 도와 줄 자가 없으리라” 깨어 있는 삶 지금까지 본서에 제시된 다니엘서에 대한 해석을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함께 동의할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라는 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비추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더 한층 깨어 있어야 한다는 데에도 이의가 없을 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먼저 배도 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살후2:3)이 나타나기 전에는 마지막 날이 올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 어떤 이들은 전세계가 ‘기독교화’ 될 것이라는 예언적 견해를 전파합니다. 그들은 각국의 정부와 단체와 공장 및 학교가 기독교의 영향 아래 있게 될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 그들은 황금시대가 도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낙관주의자들은 크게 실망할 것입니다. 악인들은 점점 더 날뛰게 될 것이며(딤후3:13) 마침내 이 세상이 겪어보지 못한 최악의 한 인물이 출현할 것입니다. 이 인물이 출현하면 인류 역사상에 나타났었던 ‘작은 뿔들’은 그의 앞잡이들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때의 인물은 과거의 어떤 악인들보다도 더욱 악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의 박해는 전례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진지하게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 기독교 교회는 전례가 없는 어려운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박하고 깊이가 없는 예배나 신앙 생활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앞으로 교회는 무서운 박해를 받으며 수많은 순교자를 낼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에 투철하지 못하고 진지한 성도의 삶을 살지 않으면 마지막 때를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본 장의 교훈을 잘 명심한다면 교회가 큰 어려움을 당할 때에 훨씬 잘 무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니엘서에서 거듭 제시된 진리는 하늘 아버지의 허락이 없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역사는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 있습니다. 27절, 29절, 35절은 모두 ‘작정된 기한’이 있다고 말해줍니다.
36절은 “그 작정된 일이 반드시 이룰 것임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역사가 제멋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역사의 고삐를 손에 쥐고 계신 분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분은 하나님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통제력을 지닌 분입니다.
그러므로 본 장의 예고가 있게 된 것입니다. 45절 끝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역사를 통어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반드시 출현한다는 것과 또한 그의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본 장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아무리 박해가 심해도 우리가 하나님과 갖는 교제는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2절을 보십시오 가장 어두운 때에 성도들은 더욱 강건한 믿음 생활을 하였습니다 (단11: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 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잔혹한 압제자들은 일체의 공공 예배와 모든 기독교 모임들을 금지시킬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성경책과 기독교 서적들을 압수할 것입니다. 그들은 기독교 활동을 불법화시키고 우리의 모든 종교적 자유를 앗아가며 무거운 벌책을 가할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도무지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들고 철저한 박해를 계속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과 갖는 교제를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정신을 굴절시킬 수 있는 현대 의약까지도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즐거움을 온전히 앗아갈 수는 없음이 입증되었습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날뛸 수 있어도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은 자들이 항상 잔존케 됩니다. 최악의 시기에도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자는 있을 것입니다. 핍박이 할 수 있는 역할은 궁극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더 넓게 확산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초목들은 온실 속에서가 아닌, 바람과 우박과 눈과 뜨거운 열기 속에서 번창합니다. 본 장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위로의 교훈들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악이 끝내 승리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를 다시 생각해 봅시다. 그가 세력을 잡았을 때에는 모두 진정한 믿음에 종지부가 찍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당시에는 팔레스틴이 지상에서 참된 신자들을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안티오쿠스가 무제한적인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그의 유대교 박멸 정책은 반드시 성공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쓸어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럼 안티오쿠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는 페르시아를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서 유대의 마카베오가와 상대하기 위해 리시아스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 들에게 정보가 들어가서 그의 야심은 좌절되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페르시아를 침입하고 보화를 약탈하여 바벨론 정복의 자금으로 사용할 계획을 가졌었는데 일이 어긋나버린 셈이었습니다. 바벨론으로 가는 중에 그는 본국으로부터 그의 장군이 마카베오가에 의해 패전을 당하고 여호와의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에 다시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티오쿠스는 전쟁에서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고, 그를 암살시키거나 정치적으로 매장시킬 수도 없는 강력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마카베오가의 승전 소식을 듣고는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그는 공포와 실의에 빠져 사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치시자 그는 곧 거꾸러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든 적그리스도들도 같은 운명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마지막 적그리스도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 적그리스도는 아무리 세력이 크고 오만하여도 주님의 능력으로 허물어질 것입니다. (살후2: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계19:5)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계19:6)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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