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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왕 (삼하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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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시대는 건강에 관심이 많은 시대입니다. 하도 무서운 병들이 많으니까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 염려가 많고 걱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건강에 대한 비결들도 참 많습니다. 건강에 좋다는 약도 많고 몸에 좋다는 건강식도 많습니다. 그런 것들이 나오면 사람들은 무조건 비싸게 돈을 주고 사다 먹는데 알고 보면 별로 효과도 없습니다. 건강에 가장 좋은 약은 “즐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좋습니다. 즐기라는 말은 유흥적으로 즐기라는 말이 아니고 삶을 즐기고 삶을 향유하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가면 행복하고 건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살면 휴식이 따로 필요없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생활 그 자체가 쉼이고 즐거움이고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기쁨이 없이 살아갑니다. 즐거움도 없습니다.
악에 받쳐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직장에 불만이 많고 하는 일에 만족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런 마음에 좋다는 약을 먹으면 무슨 소용이 있고 값비싼 건강식을 먹으면 또 무슨 효과가 나타나겠습니까 어느 청소부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어디에 출근하십니까” 그랬더니 그 청소부가 “청에 근무한다”고 대답하더랍니다. 청이 어디인지 몰라서 다시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시청에 근무한다”고 했답니다. 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듣고 웃을는지 몰라도 얼마나 당당합니까 그분은 참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행복을 말하고 보람을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삶에 무슨 윤기가 있고 힘이 있고 자신감이 있겠습니까 주부들이 하루종일 부엌에서 일하다가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내 인생도 참 따분하구나. 허구한 날 부엌에서 밥이나 짓고 사니 참 한심해.” 주부들이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일손을 놓게 됩니다. 왜 이렇게 생각을 합니까 주부가 부엌에서 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 일들입니까 주부들은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저녁은 무슨 반찬을 만들까 무슨 반찬을 만들어야 우리 가족이 맛있게 먹을 수 있을까” 골똘히 생각해서 맛있게 음식을 만드어 놓고 온가족이 식탁에 모여 앉아 밥을 먹을 때 그곳이 천국 아닙니까 그보다 더 좋은 행복과 기쁨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즐기는 생활입니다. 천국은 그렇게 만들어지고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런 생활 속에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고 인생의 맛이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도 즐겨야 합니다. 신앙도 즐겨야 발전하고 더 깊이 들어가게 되고 깊은 곳에서 주어지는 신앙의 맛을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신앙을 즐기는 사람들이 얼마 없습니다. 제 친구 목사님 한 분은 목회하는 일을 그렇게 짜증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종종 만나면 “ 이 짓 안하면 굶어 죽나” 하고 말합니다. 그 생활이 얼마나 지겹겠습니까 그것은 불행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마음으로 목회를 합니까 그렇게 되면 정신 건강도 나빠지고 생활 건강도 나빠지고 영적 건강도 망가집니다. 목회도 즐겨야 할 수 있습니다. 목회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새벽예배인데 그것도 지겨우면 못합니다. 그 일까지도 즐겨야 합니다. 새벽에 문을 열고 나오면 다가오는 그 시원한 바람, 얼마나 상쾌합니까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나홀로 깨어 여호와 하나님께 나아가 맨 먼저 하나님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하루를 시작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짜릿합니까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가 보십시오. 그 기분, 그 행복감, 그런 기분을 어디서 느낄 수 있습니까 삶은 즐겨야 합니다. 등산을 가는 사람은 산을 즐깁니다. 산을 오를 때도 좋지만 정상에 올라가 먼 앞을 내다보고 시원한 공기를 마실 때의 기쁨은 산을 오른 사람만이 느끼는 쾌감입니다. 그 느낌 때문에 사람들은 산을 오릅니다. 그리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은 밥을 물고 늘어지는 고기를 낚아 올릴 때의 그 기분 때문에 물에 드리운 낚시의 추를 한두 시간씩 한눈 팔지 않고 주의깊게 바라보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모두 그런 순간의 짜릿한 즐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신앙도 즐기고 향유하고 느끼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신앙을 그렇게 철저하게 즐기며 살아간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신앙을 즐기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두 가지를 철두철미하게 즐겼습니다.
1. 성전 생활입니다. 다윗은 성전 생활을 그렇게 즐겼습니다. 그의 신앙고백서라고 하는 시편을 주의깊게 바라보십시오. 온통 성전 생활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전에서의 기도와 간구와 탄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안식일에는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아들에게 쫓겨서 피신을 합니다. 그때 다윗이 가장 애석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들에게 쫓겨났다는 사실이 아니고 안식일이 되었는데도 성전에 가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심정을 시편 42편에서 구구절절이 호소했습니다. 시편 42편의 표제를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 있지만 한편에서는 그 시가 다윗의 시라고도 합니다. 그 시가 다윗의 시라면 다윗은 이 시에서 안식일에 성전에 가지 못함을 애절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이 얼마나 사모하는 마음입니까 여러분, 목마를 때의 갈증이 얼마나 견디기 어렵습니까 그 마음이 주님을 찾는 갈급함과 같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얼마나 애절하게 토로하고 있습니까 전에는 안식일에 성전 생활의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가고 싶으나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 갈증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람이 이렇게 사모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고 행복이고 기쁨입니다. 날이 바뀌었는데도 별로 기대감 없이 그날 그날을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생활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겠습니까 다윗은 평생 소원이 성전을 지어서 하나님께 봉헌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최대의 꿈이었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재임시 열심히 성전 지을 준비를 했습니다. 금을
2,5톤 트럭으로 79대분을 준비했습니다. 은은 300대분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레바논의 백향목을 준비했습니다. 그렇게 준비를 해놓고 성전을 지으려 하니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지 않으십니다. “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으니 그 피묻은 손으로 나의 집을 지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애석한 일입니까 그래서 다윗은 아들에게 유언을 합니다. “내가 짓지 못한 성전을 네가 지어 하나님께 봉헌하라(대하 22:8)” 그래서 솔로몬이 그 일을 완성합니다. 이 인생이 얼마나 분명하고 이 신앙이 얼마나 일편단심입니까 사람이 세상을 이렇게 살면 축복입니다. 행복합니다. 그 인생에 기쁨이 있습니다. 여러분, 주일이 되어도 교회에 가는 일이 재미가 없습니까 그래도 좀 여유 있을 때 열심히 다니십시오.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조금 있으면 교회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할 때가 올 것입니다. 주일에 1시간 더 잠을 못자서 억울한 분이 있습니까 그래도 조금만 더 참고 열심히 다니십시오. 곧 싫도록 잠잘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 병상에서 주일만 되면 교회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두 해가 아니고 여러 해 동안 교회에 못 가는 때가 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번만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때가 오기 전에 열심히 다니십시오. 다윗은 성전 생활을 즐겼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행복합니다. 즐겁습니다. 그리고 그 삶에 기쁨이 있습니다. 오늘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모두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가장 건강하고 행복하고 기쁜 일은 자신이 하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삶은 즐겨야 합니다.
2. 하나님 중심의 인생입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신앙이 참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아들이 모두 여덟이었는데 그 아들들을 신앙으로 잘 길렀습니다. 그 여덟 아들 가운데 하나가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 아들 중 막내인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보실 때 “마음에 합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신앙 안에서 잘 자랐으면 하나님의 마음에 그토록 합당했겠습니까 그래서 자녀들의 신앙교육은 먼저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성장은 가능하면 가정에서 가부장적으로 엄격하게 할수록 좋습니다. 가정신앙이 느슨하면 아이들 신앙도 그 부모를 따라서 느슨해집니다. 이것 빼고, 저것 빼고, 현대식으로, 간단하게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형식만 남습니다. 그 신앙이 오죽하겠습니까 미국의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뭔가 분석을 해보았더니 10가지 원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7가지가 가정에서 부모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다는 데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부모들이 주일을 지키지 않고 여행을 가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신앙의 중심이 서질 않습니다.
둘째는 부모들이 예배드릴 때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지루해서 자꾸만 시계를 들여다보는 태도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볼 때 그 모습이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집에서 아이들이 듣는 데서 교회에 대해 불평하고 목사 흉을 보는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부모들의 아주 좋지 않은 모습입니다.
넷째는 십일조 바치는 데 인색한 모습이고 다섯째는 예배 시간을 안 지키는 일이고 여섯째는 어려운 일이 생겨야만 겨우 기도하는 부모들을 보면서 회의를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행동은 없고 말만하는 태도라고 합니다. 이런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부모들의 이중적 태도입니다. 이것이 오늘 청소년들이 신앙에 회의를 느끼게 하는 핵심 부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멀리하는 것입니다. 그런 토양에서 어떻게 아이들의 신앙이 반듯하게 자라겠습니까 신앙은 가정에서 50% 성장하고, 50%는 교회에서 성장한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이새는 아들들에게 완곡하게 신앙 훈련을 시켰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을 방문해 보니까 여덟 아들 모두가 훌륭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여덟 아들 가운데서 특별히 다윗을 택해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후 이 다윗이 얼마나 자신만만하게 살아갑니까 불레셋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장에 가게 됩니다. 다윗이 전장에 나가 있는 형들에게 옷과 음식을 가지고 심부름을 가서 보니까 모두들 골리앗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다윗이 당장 달려나가 골리앗 앞에 서서 말합니다. “너는 창과 칼을 가지고 싸우지만 나는 만군의 하나님 이름으로 싸우겠다.” 그리고 골리앗에게 겁없이 덤벼들지 않습니까 그 용기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바로 아버지의 모습에서 배운 것입니다. 다윗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그런 용기를 배웠고 보았고 교훈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동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를 그렇게 기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싸울 때 이 언약궤를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7,80년 동안 이 언약궤가 기럇 여아림이라는 곳에 버려져 있었는데도 누구 하나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되어 4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면서도 이 언약궤를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왕이 되자 자신은 다윗성에서 편안히 살고 있고 하나님의 궤는 적지의 변방에 버려져 있는 것이 도무지 마음이 편치가 않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보내서 그 궤를 옮겨 오기로 했습니다. 무려 7,80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궤가 다윗성에 가까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다윗은 마중을 나갑니다. 그리고 너무나 기뻐서 그 행렬 앞에서 춤을 추었다고 했습니다.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왕이 백성들 보는 앞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찬송할 때 박수 좀 치자 해도 채면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박수도 못 치는 사람이 많은데 왕이 백성들 앞에서 옷이 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기뻐서 춤을 추었다고 했으니 이 다윗이 얼마나 천진스럽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입니까 그때 왕비였던 미갈이 그 모습을 보고 속으로 비웃습니다.
16절을 보면 “심중에 업신여겼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집에 들어오자 미갈은 20절에서 “왕이 탕자같이 몸을 드러내고 춤을 추느냐”하고 핀잔을 줍니다. 그 말은 한 나라의 왕이 체통 없이 어린아이처럼 백성들 앞에서 가볍게 행동하느냐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다윗이 부끄러워한 것이 아니고 22절을 보면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더 천하게 보일지라도 너 같은 계집종에게는 높임을 받의리라.” 하고 말합니다.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는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문제가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고 나서 미갈이라는 여인은 심판을 받습니다.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23절)”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뛰놀 수 이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자존심도 체면도 체통도 다 버리고 그렇게 마냥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인생이 즐거울 것입니다. 오늘 사람들은 이 같은 즐거움이 없습니다. 매일 짜증만 내고 불화하고 살아가니 어떤 곳에서 기쁨이 주어지고 만족이 주어지겠습니까 이것이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러분, 오늘 누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것은 오늘의 생활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신앙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생활의 즐거움이 가장 좋은 보약이고 건강식이고 그것이 행복의 약이고 축복의 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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