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을 팔지 말라 (암2:6-8)
본문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 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 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암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 럽히며 (암2: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 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1. 미국의 유명한 잡지인 '라이프, Life'지의 사진 기자가 영국에서 본 이야 기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 기자는 지하철 대합실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자리에 노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면서 소꿉동무처럼 정답게 앉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비스켓을 주문하고 아내는 차 한 잔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들의 차림새는 퍽 누추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개의 치 않고 조용히 마주앉아 서로의 손을 잡고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 었습니다. 마침내 주문한 비스켓과 차가 나왔습니다. 남편은 비스켓을 천천히 먹기 시작하였고 아내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 고 나서 남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잡지사 기자는 그 다음의 신기한 장면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비스켓을 반쯤 먹고나서 틀니를 뽑아 깨끗이 닦아 아내에게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그 틀니를 자연스레 입에 넣고는 비스켓을 천천 히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아내의 모 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잡지사의 기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코가 찡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이토 록 아름다운 모습의 사랑이 있는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 서로를 아껴주고 기다려 주고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 이런 사랑을 지닌 사람들은 경제적 가난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시대와 연령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노인 부부에게 주위의 사물과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체면 따위는 더더욱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참된 사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외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 습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 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사랑을 나누는 행 사가 다양하게 각계 각층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감리교 한 원로목사 가 이끄는 '사랑 나누기'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정리해고로 실직당한 사람들에 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6개월 동안 약 50만원에서 60만원 정도를 매월 지급 하자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실직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실직당한 사람을 위 해 자신의 봉급에서 1구좌에 1만원씩을 도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모 방송국에서 벌이는 행사로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로 연예인들이 소개하는 전국 어린이 병환자 중에서 치료비나 수술비가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이나, 소년 소녀 가장들을 위해 ARS 전화 한 통화 에 1천원씩을 기부받아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사랑으로 함께 나누는 운동인데 매주 1억이 넘는 후원금이 답지되고 있습니다. 최근 모 일간지에 기독교에 대 한 자성을 촉구하는 어느 목사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제 한국 교회가 품속에 있는 물고기와 보리떡을 내놓아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2. 예언자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의 고난과 슬픔, 그리고 억울함과 멸시당함의 고독을 가장 잘 대변하며 경제정의 실천을 부르짖은 사람은 아모스입니다. 아 모스가 전하는 당시 사회상은 사회의 풍요로운 물질적인 삶과 사치와 허영의 삶을 누리던 부자와 권력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서로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경제 정의가 상실된 그 배후에는 부자와 권력자 의 소망과 횡포와 탐욕과 소비성이 깔려 있습니다. 아모스의 눈에 비친 빈자는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참상이 그대로 나타 나 있습니다. 아모스는 가난한 자의 값이 신 한 켤레 값밖에 되지 못한 실정 (8:6), 빈자가 억울한 대접을 받고 있는 실정(4:1), 궁핍한 자가 압제를 당하고 있는 실정, 뇌물 정치 아래서 빈자의 정당성이 묵살당하는 실정(5:12), 궁핍한 자를 통째로 삼켜 완전히 망하게 만들고 마는 실정(8:4)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돈으로 산다는 것은 곧 인신매매의 죄악입니다. "신 한 켤레로 판다."는 것은 실지 매매된 금액이라기보다 최하의 값 또는 공짜, 아무 대가를 지 불하지 않고 소유하는 착취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를 두고 부한 자들의 탐 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낸다."는 말은 가난한 자가 망하여 불행해져서 머리에 티끌을 쓰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 원 하는 부자의 잔학성을 말합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일반 대중과 저소득의 사람, 서민층, 막벌이꾼과 가난한 사람들의 죄악을 공격함이 거의 없습니다. 항상 그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 각계 각층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지도 자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라를 망치는 것은 일반 가난한 대중이 아니라 이 대중을 이끌고 가는 지도자 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모스를 읽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의 예언의 대상 이 누구냐함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 나라의 질병은 "가난한자", "의인", " 궁핍한 자", "겸손한 자"들에 대한 인격적 대우도, 윤리적 관심이나 도덕적 책임 의식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 사회의 한 어두운 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네 종류의 사람, "가난한 자, 의인, 궁핍한 자, 겸손한 자 "가 각각 딴 사람이라고 보기보다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는 일반 대 중을 네 가지 명칭으로 각각 다르게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대체로 의인이 가 난하고 궁핍하고 또 겸손하여 자기가 차지해야 할 권리를 찾지 못하고 친대와 멸시를 받고 그들의 빼앗긴 인권과 자유 때문에 항상 수난을 당하고 사는 사람 들입니다. "의인", "궁핍한 자", "가난한 자", "겸손한 자" 등 이스라엘 사회에서 천대와 수난을 받고 있는 이 네 종류의 사람은 많은 시펀에서도 서로 나란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 매우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사회에 서, "가난한 자"는 의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궁핍하게 살아가야 하고 또 대우를 못 받는 천덕꾸러기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겸손한 자"는 겸양의 덕을 보여주는 겸손이 아니고, 이는 권력자와 악한 부유층의 독점의식 과 그 욕심의 결과로써 무엇을 갖고파 하나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어 인격적으 로 천대를 받아 억울한 죄인인양 고난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겸손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자기를 중시하고 모든 것을 가지려는 사람 때문에 대접이나 물질의 부스러기도 차지하지 못한 사회 말단에 처한 찌꺼 기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고난의 인간을 말합니다. 대접 못 받고 소외당한 사람 입니다. 그야말로 괴롬에서 나고 죽은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썩어 문드러지는 고기덩어리가 되는 것보다는 한번 찌르고 그 생명 이 다해버리는 장미의 가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라의 수치 와 허물을 무작정 덮어두는 자는 그러한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자보다 결코 선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기의 악이 드러날까 염려해서 그 죄악을 고발하는 사람을 핍박하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그를 죽이는 일을 고발하는 사람을 핍박하 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그를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은 더 악한 사람입니다. 아 모스 예언자는 자기 동족인 북이스라엘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릇된 국민들과 지도자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른 방향으로 돌 려보려고 외친 사람입니다. 이로인해 그는 핍박을 받았지만 생명을 걸고 바른 말을 외치는 사명을 다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비록 양을 치며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라 민족의 현실을 바라볼 때 쉽 게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위기 상황임을 깨닫고 답답하지만 급박한 심정으 로 외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외치는 이스라엘의 병폐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암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 끌을 탐내는" 것이었습니다.
3. 샌프란시스코에 호화로운 방들이 즐비하고, 이곳에 잠시라도 머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캘리포니아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건축 양식의 페어몬트 호텔이 있습니다. 이 페어몬트 호텔은 마치 하나의 커다 란 경계석처럼 현대와 미래 사이에 서 있고, 미국과 태평양 사이에 서 있습니다. 호텔 바로 앞쪽 비탈에는 수십만 명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고, 그 아래쪽으 로는 컴퓨터 혁명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실리콘 밸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1906년 캘리포니아 대지진 때 엄청난 돈을 번 사람들, 세계대전 때 맹활약을 했던 미국의 장성들, 유엔의 창설자들, 대기업의 사장들, 그리고 20세기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이 호텔로 몰려들어 호화로운 축제의 밤을 즐기곤 했습니다. 1995년 9월 말, 바로 이 역사적인 호텔 에서 세계적인 엘리트 중의 한 사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수많은 사람들 속 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대략 5백여 명의 정치가, 경제 인, 학자들을 세계 각국으로부터 불러들여 축배를 들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마 지막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고르바초프가 이름붙인 것처럼 이 모임 은 "세계적인 브레인 집단"으로서 21세기를 맞는 지구촌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문명"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세계적 지도자인 조지 부시, 조지 술츠, 마거릿 대처 등도 나와 세계적 언론 재벌인 CNN방송사의 설립자 테드 터너나 동남아 무역귀족 워싱 턴 시싶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3일 간에 걸쳐 진지한 토론을 벌이게 되는데, 여기에는 물론 컴퓨터나 세계적인 금융계의 지도자들, 경제인들, 스탠포 드나 하버드, 옥스포드대학의 경제학 교수들이 소그룹으로 참석하였습니다. 이 페어몬트 호텔에 모여 국제회의를 열고 있는 이 세계적인 실용주의자들은 인류 의 미래를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20 대 80의 사회'라는 말과 '티티테 인먼트tittytainment'라는 말입니다.
'20 대 80의 사회'라는 말은, 다가오는 21 세기에는 노동 가능한 인구 중에서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역귀족 출신 워싱턴 시싶은, "더 이상의 노동력은 필요 없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 다섯 중 하나면 모든 상품을 생산하고 값어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20%의 사람 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돈벌이나 소비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간혹 112% 정도의 다른 사람들은 운 좋게 상속을 받아 이 대열에 추가로 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 중에서 80%는 놀아야만 하는가 '노동의 종말'을 쓴 미국의 저술 가 제레미 리프킨은 "확실히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아래쪽에 있는 80%의 사람들은 엄청난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선 시스템의 경영자 게이지는 이제 앞으 로 문제는 "밥을 먹을 수 있느냐, 아니면 먹히느냐"의 문제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어서 이 열띤 토론회는 '노동의 미래'와 관련해 실업문제로 넘어갑니다. 이와 관련해 참석자들 모두는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샌프 란시스코 해변에서 행복을 느끼며 인생을 즐기기 보다는 실업자 상태로 생존경 쟁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한마디로, 페어몬트 호텔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질서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탄탄한 중산층도 없고, 아 무도 저항할 세력이 없는 부유한 나라' 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히려 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티티테인먼트'가 판을 치게 될 것인데, 이 말은 원래 즈비그뉴 브 레진스키가 만든 말입니다. 그는 원래 폴란드 출신으로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 에서 안보담당 보좌관을 역임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지역전략 문제를 연구하 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티티테인먼트'는 즐기는 것을 뜻하는 '엔터테인먼트 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미국 속어 '티쯔tits'를 합친 말입니다. 다시 말해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 한 사람들을 기분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경영자들은 이 토론회에서 20%의 잘 사는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먹여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펼쳤습니다. 기업이 이들을 부담하기에는 범 지구적인 경쟁이 너무나 치열하기 때문에, 실업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보살펴야 한다는데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동의합니다. 이들은 차라리 자원봉 사를 할 수 있는 종교단체나 이웃을 돌보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 스포츠 교실, 또는 여러 시민단체 등에서 뜻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 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치를 평가하여 보상을 해주야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 여 수백만의 실업자들한테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로이 교수는 말합니다. 사실상 이미 선진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의 보수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거리 청소를 하거나 가정 부 노릇을 하여 생계를 겨우 이어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더 많이 그러 할 것이라고 대기업 경영자들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80년대부터 유럽에 널리 퍼졌던 '3분의 2사회'가 아니라 '20대 80의 사회'또는 '5분의 1사회', 사회복지와 사회적 지위가 1대 4의 비율로 배분되어야만 하는 그런 사회가 오 고 있는 것이다. 이 '20대 80의 사회'에서는 사회로부터 배척된 80%의 사람들 이 약간의 오락물과 먹거리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아야만 한다. 이 모두가 지나 친 과장일까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는 20%의 부자나 권력자가 지배하는 세계 경제 구도 속에 그들이 멸시 천대하며 던져주는 부스러기 먹거리로 80%가 만 족해 하며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20%의 경쟁력있는 지배계층이 80%의 피지배 계층에 대한 비인간화 작업이 바로 세계화라는 허구의 이데올로기입니다.
4. 본문은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을 통틀어 지칭하는 80%의 "의인"을 인간 이하의 물질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이스라엘 지배자들, 부자, 권력자 등 사회 고위층의 죄에 대한 고발의 내용입니다. 여기 비인간화의 일이 얼마나 무 서운 질병인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을 받고 의인을 판다."고 함은 "의인"이 가진 정신적인 가치와 그들의 윤리와 신앙을 화폐 가치 이하로 취급하는 물질 주의에 사로잡힌 당시의 지배계층의 죄악에 대한 고발입니다. 여기 "의인을 은으로 판다"는 것은 의로운 사람의 말을 금력으로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정의가 금전으로 매매당한다는 사실은 부정과 부패의 현상입니다. 정 의를 은으로 팔아먹는 의인이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금전에 매수 될 사람이라면 그는 절대로 "의인"이란 칭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에 나타난 근본 뜻은 한 나라의 사법 질서와 그 권리 행사가 금전으로 좌우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죄를 지은 사람도 그의 금전으로 무죄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아무 죄가 없는 사람도 그가 뇌물을 요로에 적당히 바치지 못 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는 것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소위 유전무죄(有錢無 罪), 無錢有罪)를 말합니다. 살인 청부업이란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의인이 금 품으로 매수된 하수인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조그만 사고 가 금품으로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사회는 병든 나라의 징조입니다. 사직당국이 은으로 좌우되어 의인과 죄인이 구별지어졌다는 아모스의 고발은 결코 옛날 얘 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사회이기 때문에 "가 난한 자가 신 한 켤레로 매매 된다."는 그 다음 구절은 쉽게 이해됩니다. "궁핍 한 자"가 그 가난함 때문에 신 한 켤레 값으로 인격이 좌우되어 버리는 사회도 병든 나라의 사회적 질환입니다.
인간의 가치의 저하를 죄악으로 보여주는 현 상입니다. 노예 제도란 인간을 물질과 같은 소유물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노예 제도가 용납되어 있는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구조 사회 속에서는 인간이 신 한 켤레 값으로 팔리고 있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인간의 값이 정치라는 거대 한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취급받고 있음을, 자살할 자유라도 가진 자본주의 사 회의 인간대접보다 더 악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법권이 완전히 행정부의 지배를 받아 사법권의 독자성 보다 그 시녀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가치의 절하는 사법권의 부당성 때문만이 아니고, 무엇을 가진 부 유층의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경우를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낸다." 여기 문제는 부자의 탐욕적인 삶입니다. 극도의 개인주의입니다. 여기 "머리 위 티끌'은 무가치성의 의미도 되지만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비극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의 기회로 삼는다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또한 '탐내다"라는 말이 " 가난한자의 머리를 땅바닥에 내려쳐 상하게 하는자"라고 읽혀지기도 합니다. 이 것은 이사야 3장 15절에 "가난한 자의 얼굴을 맷돌질한다"는 말과 서로 통한다 고 볼 수 있습니다. 부자의 횡포의 극치를 표현했거나, 부자가 가난한 자의 비 극을 이용한다거나 또는 부자의 잔인성을 표현했거나, 뉘앙스나 강조에 차이는 있어도 다같이 부유층이 자기 물질로 다른 형제를 인간으로 대접해 주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는 같습니다. 사람의 값을 티끌과 같게 만드는 일이나 가난하고 약한 자의 비극을 자기의 탐심의 기회로 삼고 또 그 물질 때문에 보여 주는 잔 인성이 모두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비인간화의 문제입니다. 여기 지배하는 세력은 물질(경제)과 이데올로기(세 계화)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물질을 지배해야만 합니다. 인간이 물질에 좌우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데올로기를 지배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과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음은 곧 그 나라가 병들어 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합니다. 이 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이 다 만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값이 최고로 높여지는 공의가 무너지면,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고 맙니다. 기독교 사상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나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이와같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만물을 다스리라는 소위 문화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문화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물질을 다스리고 그에 필요한 이데올로기까지도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물질이나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 엄성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21세기는 지구촌 전체에서 일할 수 있는 인구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20대 80의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가 지금 세계 곳곳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계화 지구촌'의 모습은 곳곳에서 벌써부터 그 전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독일의 실업자는 6백만명을 상회했습니다. 이는 48년 서독 건국이래 가장 많은 실업자수입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 안에 제조업에서만 1백5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화는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일자리를 급격하게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낸다는 세계화 지상론자들 외침은 설득력을 잃은지 오래됐다는 주장입니다. 또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로 양분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은 심각한 빈곤 속 에서 허덕이고 있고 13억명은 하루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세계적 갑부 358명의 재산을 전부 합치면 25억명의 재산과 맞먹습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최근 선정한 미국 400대 부자 랭킹에 따르면 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재산가(빌리어네어)는 지난해 135명에서 올해 170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00대 부자에 오른 화제의 인물로는 또 최근 동남아 통 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투자가 조지 소로스(27위), 90 년대 들어 미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한 텍사스의 거 부 로스(33위) 등이 있습니다. 400대 부자들은 백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는 가운데 흑인으로는 여성 방송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유일하게 349위에 기록 됐다. 반면 아시아와 남미 계통의 재산가는 400위 안에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400대 부자 중에서 27, 33위가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고 한다면, 이미 "20대 80의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하루를 연명하는 13억명의 지구촌 사람들이 있는가하 면 일주일에 무려 4억달러를 벌어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13,14세에 몸을 팔아 연명해가는 아이들, 거리에 버려져 구걸하며 겨우 겨우 살아가는 아 이들이 무려 1억명이 된다고 합니다.
선진 강대국들이 끌고가는 세계화는 "20 대 80의 사회"라는 가난과 질병으로 억눌려 고통받는 사람들만 늘려가는 허구 에 불과합니다. 세계화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살인적인 생존경쟁 속에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허구일뿐입니다.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양분하는 인류의 덫일 뿐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만들고,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로 만들며,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만들며, 다수의 패배자들을 승리자로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 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의 복음화입니다. 복음화만이 비인간화되어가는 병 폐된 사회와 국가를 고칠 수 있습니다. 복음화는 인간화 운동입니다. 6. 오늘의 역사가 안고 있는 빈부의 문제, 그로 인한 비인간화의 문제는 단순 한 고민거리만이 아니라 일종의 위기의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갈브레이드 교수는 그의 책 '풍요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왜 빈곤한가어째서 일부의 사람들이 풍요한 사회의 혜택에서 제외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등의 성구들은 기독교가 근본적으 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 인류가 안고 있는 기난한 자의 문제는 교회가 안아야 할 가장 긴요한 문제입니다. 교회는 오늘날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고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 말 가능성마저 있는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를 해소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록 가난 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그 존엄성을 방치해서는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 때문에 고생을 하지만 저 세상 "하늘 나라"에서는 "눈물도 슬픔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교회의 메시지로 내세운다 면 이는 아편과 같은 종교를 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탐 욕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공평하게 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무엇을 더 소유했 다고 해서 가지지 못한 사람을 천대하거나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의로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이란 것은 가진 자가 많은 사회 속에서 다만 무엇을 남보다 못가졌다는 것 때문에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인간이 누려야 할 만족과 행복의 감정보다는 억울함과 부족함과 불만으 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출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 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출22:26) 네가 만 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출22:27)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 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난한 자는 있기 마련인데 이들이 당장에 필요한 삶을 위하여 가진 자들에게서 빚을 얻어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벌 옷을 전당포에 잡히고 생활비를 마련해야할만큼 궁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 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난한 자들의 권리나 소유가 침해를 당하거나 약 탈을 당하게 될 때 가난하다고 해서 법률적으로 부당하게 처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출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출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출23: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출23:6) 너는 가난한 자 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출23:10) 너는 육 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출 23:11) 제 칠 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땅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성구에 나타난 하나님 사상은 가난한 자를 천대하거나 억울하게 하지 말고 그 들의 생존에 필요한 먹고 입는 문제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신15: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 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신15: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신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 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웠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 라 (신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 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 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가난한 자에게 인색하지 말고 아량을 베풀되 그 쓸 것을 넉넉히 주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 난한 자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결코 가난한 사람 자신의 절약과 검소에서 물러갈 것이 아닙니다. 또는 빈자가 그의 기도의 힘으로 갑자 기 부자방망이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을 이 땅에서 물리 치는 길은 가진 자들이 자기 소유권을 포기하고 일부 또는 전부를 가난한 사람 들의 요구를 채워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 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교훈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가진 부는 자기들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 물질을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쓰도록 하나님은 용납 하지 아니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빈자들에 대하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자기 것이라고 움켜쥐기만 하지 말고 반드시 그 손을 펴서 이웃 가난한 자를 넉넉하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 를 짓는 것입니다. 빈자를 돕지않는 것은 벌써 "악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행동이 전에 벌써 마음으로 죄를 범한 것이 된다는 것 입니다. 빈자를 계속해서 너그럽고 넉넉하게 후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 을 듣는 길이요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24: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신24: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 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이 성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을 파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존재이 며 이들 노동자는 나그네로 떠돌아 다니는 외국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품삯은 해가 진 다음까지 미루지 말고 당일 계산하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동자들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막벌이 생활 을 하기 때문에 품삯을 받는 일을 최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품삯을 미루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만 약 노동법이 사용자측, 즉 강자의 법이 되어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법에 호소할 길도 막혀 비인간화의 비극이 생긴다면 하나님께 호소된다면 그 죄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잠언서를 보면 사회학적인 이유에서 불가피하게 가난하게 되고 약자가 되고 천대받는 사람이 되어버린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잠언서를 보면, 이 "가 난한 자"는 항상 부자와 권력자의 압제와 핍박과 착취 때문에 만들어진 가난한 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학대하는 사람 때문에 가난한 자가 생겼다는 말입니다(잠 14:31).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가난해진다."(잠 22:16) "가난한 자 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경우"는 폭우같다(잠 28:4),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악 한 관리는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다."(잠 28,15)는 구절은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가난해져서 천민이 되고 약자가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권력자의 학대와 압제가 결국 가난한 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잠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 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22:16) 이를 얻으려 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잠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잠28: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그러므로 강자가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지 않거나, 가진 자가 못가진 자의 궁 핍을 담당하지 않는 것은 그 주어진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 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긍휼없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만이 주어질 것입니다. 교회가 이 시대에 벌여야 할 성령님 운동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음 전도운동 입니다. 성령님 운동을 통해 교세나 확장하거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곳은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에 있는 가난한 자, 병들고 소외된 자, 갇히고 눌린 자들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땅 한 평 남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기독교 공원묘지 하나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저금 통장 하나 가 지지 않으셨습니다. 살아계셨을 때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은 죽으실 때 벌거벗은 몸이셨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인류를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가시 관을 써야 할 때입니다. 십자가를 걸머지고 나라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에 성령님을 부어주신 목적은 시대의 아픔 과 고통을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눅4:18) 주의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 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의인을 팔아먹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피값을 주고서라 도 그 의인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평강교회가 이 시 대의 아픔과 고통의 짐을 함께 지는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1. 미국의 유명한 잡지인 '라이프, Life'지의 사진 기자가 영국에서 본 이야 기입니다. 어느 날 아침 그 기자는 지하철 대합실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자리에 노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면서 소꿉동무처럼 정답게 앉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비스켓을 주문하고 아내는 차 한 잔을 주문하였습니다. 그들의 차림새는 퍽 누추하였습니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개의 치 않고 조용히 마주앉아 서로의 손을 잡고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 었습니다. 마침내 주문한 비스켓과 차가 나왔습니다. 남편은 비스켓을 천천히 먹기 시작하였고 아내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 고 나서 남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잡지사 기자는 그 다음의 신기한 장면에 눈을 크게 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이 비스켓을 반쯤 먹고나서 틀니를 뽑아 깨끗이 닦아 아내에게 건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그 틀니를 자연스레 입에 넣고는 비스켓을 천천 히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아내의 모 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잡지사의 기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코가 찡하는 느낌을 가졌습니다. 이토 록 아름다운 모습의 사랑이 있는가 싶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랑, 서로를 아껴주고 기다려 주고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려는 마음, 이런 사랑을 지닌 사람들은 경제적 가난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시대와 연령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노인 부부에게 주위의 사물과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체면 따위는 더더욱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참된 사랑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결코 외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 습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 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고통을 함께 나누며 사랑을 나누는 행 사가 다양하게 각계 각층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에 감리교 한 원로목사 가 이끄는 '사랑 나누기'라는 행사가 있습니다. 정리해고로 실직당한 사람들에 게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6개월 동안 약 50만원에서 60만원 정도를 매월 지급 하자는 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실직당하지 않은 사람들이 실직당한 사람을 위 해 자신의 봉급에서 1구좌에 1만원씩을 도와 그 고통을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또 하나 모 방송국에서 벌이는 행사로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로 연예인들이 소개하는 전국 어린이 병환자 중에서 치료비나 수술비가 없어서 죽어가고 있는 어린이나, 소년 소녀 가장들을 위해 ARS 전화 한 통화 에 1천원씩을 기부받아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사랑으로 함께 나누는 운동인데 매주 1억이 넘는 후원금이 답지되고 있습니다. 최근 모 일간지에 기독교에 대 한 자성을 촉구하는 어느 목사의 글이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 "이제 한국 교회가 품속에 있는 물고기와 보리떡을 내놓아야 할 때"라는 것입니다.
2. 예언자들 중에서 가난한 사람의 고난과 슬픔, 그리고 억울함과 멸시당함의 고독을 가장 잘 대변하며 경제정의 실천을 부르짖은 사람은 아모스입니다. 아 모스가 전하는 당시 사회상은 사회의 풍요로운 물질적인 삶과 사치와 허영의 삶을 누리던 부자와 권력자들이 가난한 자들과 서로 어떤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경제 정의가 상실된 그 배후에는 부자와 권력자 의 소망과 횡포와 탐욕과 소비성이 깔려 있습니다. 아모스의 눈에 비친 빈자는 가진 자들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참상이 그대로 나타 나 있습니다. 아모스는 가난한 자의 값이 신 한 켤레 값밖에 되지 못한 실정 (8:6), 빈자가 억울한 대접을 받고 있는 실정(4:1), 궁핍한 자가 압제를 당하고 있는 실정, 뇌물 정치 아래서 빈자의 정당성이 묵살당하는 실정(5:12), 궁핍한 자를 통째로 삼켜 완전히 망하게 만들고 마는 실정(8:4)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돈으로 산다는 것은 곧 인신매매의 죄악입니다. "신 한 켤레로 판다."는 것은 실지 매매된 금액이라기보다 최하의 값 또는 공짜, 아무 대가를 지 불하지 않고 소유하는 착취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이를 두고 부한 자들의 탐 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낸다."는 말은 가난한 자가 망하여 불행해져서 머리에 티끌을 쓰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 원 하는 부자의 잔학성을 말합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일반 대중과 저소득의 사람, 서민층, 막벌이꾼과 가난한 사람들의 죄악을 공격함이 거의 없습니다. 항상 그 나라를 다스리고 사회 각계 각층에서 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지도 자들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결국 나라를 망치는 것은 일반 가난한 대중이 아니라 이 대중을 이끌고 가는 지도자 편에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모스를 읽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의 예언의 대상 이 누구냐함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 나라의 질병은 "가난한자", "의인", " 궁핍한 자", "겸손한 자"들에 대한 인격적 대우도, 윤리적 관심이나 도덕적 책임 의식이 전혀 없는 이스라엘 사회의 한 어두운 면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이 네 종류의 사람, "가난한 자, 의인, 궁핍한 자, 겸손한 자 "가 각각 딴 사람이라고 보기보다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천대받고 있는 일반 대 중을 네 가지 명칭으로 각각 다르게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대체로 의인이 가 난하고 궁핍하고 또 겸손하여 자기가 차지해야 할 권리를 찾지 못하고 친대와 멸시를 받고 그들의 빼앗긴 인권과 자유 때문에 항상 수난을 당하고 사는 사람 들입니다. "의인", "궁핍한 자", "가난한 자", "겸손한 자" 등 이스라엘 사회에서 천대와 수난을 받고 있는 이 네 종류의 사람은 많은 시펀에서도 서로 나란히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학적으로 매우 의미를 가집니다. 이스라엘 사회에 서, "가난한 자"는 의롭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궁핍하게 살아가야 하고 또 대우를 못 받는 천덕꾸러기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 "겸손한 자"는 겸양의 덕을 보여주는 겸손이 아니고, 이는 권력자와 악한 부유층의 독점의식 과 그 욕심의 결과로써 무엇을 갖고파 하나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어 인격적으 로 천대를 받아 억울한 죄인인양 고난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겸손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자기를 중시하고 모든 것을 가지려는 사람 때문에 대접이나 물질의 부스러기도 차지하지 못한 사회 말단에 처한 찌꺼 기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고난의 인간을 말합니다. 대접 못 받고 소외당한 사람 입니다. 그야말로 괴롬에서 나고 죽은 사람입니다. 예언자는 썩어 문드러지는 고기덩어리가 되는 것보다는 한번 찌르고 그 생명 이 다해버리는 장미의 가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나라의 수치 와 허물을 무작정 덮어두는 자는 그러한 수치스러운 일을 하는 자보다 결코 선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기의 악이 드러날까 염려해서 그 죄악을 고발하는 사람을 핍박하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그를 죽이는 일을 고발하는 사람을 핍박하 여 말을 못하게 하거나 그를 죽이는 일을 하는 사람은 더 악한 사람입니다. 아 모스 예언자는 자기 동족인 북이스라엘의 종말을 바라보면서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릇된 국민들과 지도자들의 생각과 행동을 바른 방향으로 돌 려보려고 외친 사람입니다. 이로인해 그는 핍박을 받았지만 생명을 걸고 바른 말을 외치는 사명을 다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모스 예언자는 비록 양을 치며 뽕나무를 재배하는 농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라 민족의 현실을 바라볼 때 쉽 게 치유될 수 없는 치명적인 위기 상황임을 깨닫고 답답하지만 급박한 심정으 로 외치고 있습니다. 아모스가 외치는 이스라엘의 병폐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암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 끌을 탐내는" 것이었습니다.
3. 샌프란시스코에 호화로운 방들이 즐비하고, 이곳에 잠시라도 머물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캘리포니아에서 최고를 자랑하는 건축 양식의 페어몬트 호텔이 있습니다. 이 페어몬트 호텔은 마치 하나의 커다 란 경계석처럼 현대와 미래 사이에 서 있고, 미국과 태평양 사이에 서 있습니다. 호텔 바로 앞쪽 비탈에는 수십만 명의 중국인들이 살고 있고, 그 아래쪽으 로는 컴퓨터 혁명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실리콘 밸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1906년 캘리포니아 대지진 때 엄청난 돈을 번 사람들, 세계대전 때 맹활약을 했던 미국의 장성들, 유엔의 창설자들, 대기업의 사장들, 그리고 20세기의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하나같이 그들의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이 호텔로 몰려들어 호화로운 축제의 밤을 즐기곤 했습니다. 1995년 9월 말, 바로 이 역사적인 호텔 에서 세계적인 엘리트 중의 한 사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수많은 사람들 속 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대략 5백여 명의 정치가, 경제 인, 학자들을 세계 각국으로부터 불러들여 축배를 들고 있었습니다. 소련의 마 지막 대통령이자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고르바초프가 이름붙인 것처럼 이 모임 은 "세계적인 브레인 집단"으로서 21세기를 맞는 지구촌이 지향해야 할 "새로운 문명"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세계적 지도자인 조지 부시, 조지 술츠, 마거릿 대처 등도 나와 세계적 언론 재벌인 CNN방송사의 설립자 테드 터너나 동남아 무역귀족 워싱 턴 시싶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3일 간에 걸쳐 진지한 토론을 벌이게 되는데, 여기에는 물론 컴퓨터나 세계적인 금융계의 지도자들, 경제인들, 스탠포 드나 하버드, 옥스포드대학의 경제학 교수들이 소그룹으로 참석하였습니다. 이 페어몬트 호텔에 모여 국제회의를 열고 있는 이 세계적인 실용주의자들은 인류 의 미래를 한마디로 표현합니다. 그것은 '20 대 80의 사회'라는 말과 '티티테 인먼트tittytainment'라는 말입니다.
'20 대 80의 사회'라는 말은, 다가오는 21 세기에는 노동 가능한 인구 중에서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 데 별 문제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역귀족 출신 워싱턴 시싶은, "더 이상의 노동력은 필요 없다."라고 잘라 말합니다.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들 다섯 중 하나면 모든 상품을 생산하고 값어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20%의 사람 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돈벌이나 소비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간혹 112% 정도의 다른 사람들은 운 좋게 상속을 받아 이 대열에 추가로 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가 일을 하고 싶은 사람들 중에서 80%는 놀아야만 하는가 '노동의 종말'을 쓴 미국의 저술 가 제레미 리프킨은 "확실히 그렇다."라고 말합니다. "아래쪽에 있는 80%의 사람들은 엄청난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선 시스템의 경영자 게이지는 이제 앞으 로 문제는 "밥을 먹을 수 있느냐, 아니면 먹히느냐"의 문제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어서 이 열띤 토론회는 '노동의 미래'와 관련해 실업문제로 넘어갑니다. 이와 관련해 참석자들 모두는 앞으로 전세계적으로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샌프 란시스코 해변에서 행복을 느끼며 인생을 즐기기 보다는 실업자 상태로 생존경 쟁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한마디로, 페어몬트 호텔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사회질서의 밑그림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탄탄한 중산층도 없고, 아 무도 저항할 세력이 없는 부유한 나라' 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히려 이 새로운 사회에서는 '티티테인먼트'가 판을 치게 될 것인데, 이 말은 원래 즈비그뉴 브 레진스키가 만든 말입니다. 그는 원래 폴란드 출신으로 미국 지미 카터 행정부 에서 안보담당 보좌관을 역임했습니다. 그 뒤로 그는 지역전략 문제를 연구하 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티티테인먼트'는 즐기는 것을 뜻하는 '엔터테인먼트 entertainment'와 엄마 젖을 뜻하는 미국 속어 '티쯔tits'를 합친 말입니다. 다시 말해 기막힌 오락물과 적당한 먹거리의 절묘한 결합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좌절 한 사람들을 기분나쁘지 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의 경영자들은 이 토론회에서 20%의 잘 사는 사람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먹여 살릴 수 있을지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펼쳤습니다. 기업이 이들을 부담하기에는 범 지구적인 경쟁이 너무나 치열하기 때문에, 실업자들에 대해서는 다른 누군가가 보살펴야 한다는데에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동의합니다. 이들은 차라리 자원봉 사를 할 수 있는 종교단체나 이웃을 돌보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 스포츠 교실, 또는 여러 시민단체 등에서 뜻 있는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활동 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가치를 평가하여 보상을 해주야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 여 수백만의 실업자들한테도 자존심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라고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로이 교수는 말합니다. 사실상 이미 선진국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의 보수도 받지 않는 상태에서 거리 청소를 하거나 가정 부 노릇을 하여 생계를 겨우 이어나가고 있으며, 앞으로는 더욱 더 많이 그러 할 것이라고 대기업 경영자들은 예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80년대부터 유럽에 널리 퍼졌던 '3분의 2사회'가 아니라 '20대 80의 사회'또는 '5분의 1사회', 사회복지와 사회적 지위가 1대 4의 비율로 배분되어야만 하는 그런 사회가 오 고 있는 것이다. 이 '20대 80의 사회'에서는 사회로부터 배척된 80%의 사람들 이 약간의 오락물과 먹거리에 만족하며 조용히 살아야만 한다. 이 모두가 지나 친 과장일까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는 20%의 부자나 권력자가 지배하는 세계 경제 구도 속에 그들이 멸시 천대하며 던져주는 부스러기 먹거리로 80%가 만 족해 하며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20%의 경쟁력있는 지배계층이 80%의 피지배 계층에 대한 비인간화 작업이 바로 세계화라는 허구의 이데올로기입니다.
4. 본문은 가난한 사람, 겸손한 사람을 통틀어 지칭하는 80%의 "의인"을 인간 이하의 물질과 동등하게 취급하고 있는 이스라엘 지배자들, 부자, 권력자 등 사회 고위층의 죄에 대한 고발의 내용입니다. 여기 비인간화의 일이 얼마나 무 서운 질병인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은을 받고 의인을 판다."고 함은 "의인"이 가진 정신적인 가치와 그들의 윤리와 신앙을 화폐 가치 이하로 취급하는 물질 주의에 사로잡힌 당시의 지배계층의 죄악에 대한 고발입니다. 여기 "의인을 은으로 판다"는 것은 의로운 사람의 말을 금력으로 막아버리는 것입니다. 정의가 금전으로 매매당한다는 사실은 부정과 부패의 현상입니다. 정 의를 은으로 팔아먹는 의인이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금전에 매수 될 사람이라면 그는 절대로 "의인"이란 칭호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 에 나타난 근본 뜻은 한 나라의 사법 질서와 그 권리 행사가 금전으로 좌우되는 경우를 말합니다. 결과적으로는 죄를 지은 사람도 그의 금전으로 무죄가 될 수 있고, 반대로 아무 죄가 없는 사람도 그가 뇌물을 요로에 적당히 바치지 못 했기 때문에 유죄 판결을 받는 것 같은 경우를 말합니다. 소위 유전무죄(有錢無 罪), 無錢有罪)를 말합니다. 살인 청부업이란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의인이 금 품으로 매수된 하수인에 의하여 억울하게 죽은 경우도 있습니다. 조그만 사고 가 금품으로 시시비비가 가려지는 사회는 병든 나라의 징조입니다. 사직당국이 은으로 좌우되어 의인과 죄인이 구별지어졌다는 아모스의 고발은 결코 옛날 얘 기만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합니다. 이러한 사회이기 때문에 "가 난한 자가 신 한 켤레로 매매 된다."는 그 다음 구절은 쉽게 이해됩니다. "궁핍 한 자"가 그 가난함 때문에 신 한 켤레 값으로 인격이 좌우되어 버리는 사회도 병든 나라의 사회적 질환입니다.
인간의 가치의 저하를 죄악으로 보여주는 현 상입니다. 노예 제도란 인간을 물질과 같은 소유물로 보는 것인데, 이것은 노예 제도가 용납되어 있는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근대 자본주의 구조 사회 속에서는 인간이 신 한 켤레 값으로 팔리고 있음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인간의 값이 정치라는 거대 한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취급받고 있음을, 자살할 자유라도 가진 자본주의 사 회의 인간대접보다 더 악랄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법권이 완전히 행정부의 지배를 받아 사법권의 독자성 보다 그 시녀로 전락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인간가치의 절하는 사법권의 부당성 때문만이 아니고, 무엇을 가진 부 유층의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경우를 아모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낸다." 여기 문제는 부자의 탐욕적인 삶입니다. 극도의 개인주의입니다. 여기 "머리 위 티끌'은 무가치성의 의미도 되지만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비극을 이용하여 자기 욕심의 기회로 삼는다는 뜻으로도 해석됩니다. 또한 '탐내다"라는 말이 " 가난한자의 머리를 땅바닥에 내려쳐 상하게 하는자"라고 읽혀지기도 합니다. 이 것은 이사야 3장 15절에 "가난한 자의 얼굴을 맷돌질한다"는 말과 서로 통한다 고 볼 수 있습니다. 부자의 횡포의 극치를 표현했거나, 부자가 가난한 자의 비 극을 이용한다거나 또는 부자의 잔인성을 표현했거나, 뉘앙스나 강조에 차이는 있어도 다같이 부유층이 자기 물질로 다른 형제를 인간으로 대접해 주지 않는 것을 말하는데는 같습니다. 사람의 값을 티끌과 같게 만드는 일이나 가난하고 약한 자의 비극을 자기의 탐심의 기회로 삼고 또 그 물질 때문에 보여 주는 잔 인성이 모두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공산주의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비인간화의 문제입니다. 여기 지배하는 세력은 물질(경제)과 이데올로기(세 계화)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물질을 지배해야만 합니다. 인간이 물질에 좌우될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데올로기를 지배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질과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음은 곧 그 나라가 병들어 있다는 증거로 보아야 합니다. 이 병이 치유될 수 있는 길이 다 만 한 가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값이 최고로 높여지는 공의가 무너지면, 이 병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되고 맙니다. 기독교 사상은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누구나 존엄성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입니다. 이와같은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 만물을 다스리라는 소위 문화명령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문화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물질을 다스리고 그에 필요한 이데올로기까지도 지배해야 하는 것입니다. 거꾸로 물질이나 이데올로기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존 엄성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습니다.
5. 21세기는 지구촌 전체에서 일할 수 있는 인구 20%만 있어도 세계경제를 유지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는 20대 80의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가 지금 세계 곳곳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세계화 지구촌'의 모습은 곳곳에서 벌써부터 그 전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독일의 실업자는 6백만명을 상회했습니다. 이는 48년 서독 건국이래 가장 많은 실업자수입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10년 안에 제조업에서만 1백5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세계화는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일자리를 급격하게 소멸시키고 있습니다. 세계화가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낸다는 세계화 지상론자들 외침은 설득력을 잃은지 오래됐다는 주장입니다. 또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로 양분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세계 인구의 4분의 1은 심각한 빈곤 속 에서 허덕이고 있고 13억명은 하루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 세계적 갑부 358명의 재산을 전부 합치면 25억명의 재산과 맞먹습니다.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최근 선정한 미국 400대 부자 랭킹에 따르면 10억달러 이상을 보유한 재산가(빌리어네어)는 지난해 135명에서 올해 170명으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400대 부자에 오른 화제의 인물로는 또 최근 동남아 통 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는 투자가 조지 소로스(27위), 90 년대 들어 미 대통령 선거에 연거푸 두 번이나 도전했다가 실패한 텍사스의 거 부 로스(33위) 등이 있습니다. 400대 부자들은 백인들의 독무대가 되고 있는 가운데 흑인으로는 여성 방송진행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유일하게 349위에 기록 됐다. 반면 아시아와 남미 계통의 재산가는 400위 안에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400대 부자 중에서 27, 33위가 동남아 통화위기를 배후 조정했다고 한다면, 이미 "20대 80의 사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달러 미만의 생활비로 하루를 연명하는 13억명의 지구촌 사람들이 있는가하 면 일주일에 무려 4억달러를 벌어들인 사람이 있습니다. 전 세계에는 13,14세에 몸을 팔아 연명해가는 아이들, 거리에 버려져 구걸하며 겨우 겨우 살아가는 아 이들이 무려 1억명이 된다고 합니다.
선진 강대국들이 끌고가는 세계화는 "20 대 80의 사회"라는 가난과 질병으로 억눌려 고통받는 사람들만 늘려가는 허구 에 불과합니다. 세계화는 지구촌 사람들에게 복음이 될 수 없습니다. 세계화는 살인적인 생존경쟁 속에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허구일뿐입니다. 세계화는 세계를 소수의 승리자와 다수의 패배자로 양분하는 인류의 덫일 뿐입니다. 그러나 약한 자를 강한 자로 만들고, 가난한 자를 부유한 자로 만들며, 어리석은 자를 지혜롭게 만들며, 다수의 패배자들을 승리자로 만드는 길이 있습니다. 그 것은 세계화가 아니라 세계의 복음화입니다. 복음화만이 비인간화되어가는 병 폐된 사회와 국가를 고칠 수 있습니다. 복음화는 인간화 운동입니다. 6. 오늘의 역사가 안고 있는 빈부의 문제, 그로 인한 비인간화의 문제는 단순 한 고민거리만이 아니라 일종의 위기의식을 갖게 하고 있습니다. 갈브레이드 교수는 그의 책 '풍요한 사회'에서 "사람들은 왜 빈곤한가어째서 일부의 사람들이 풍요한 사회의 혜택에서 제외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가난한 사람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다. 등의 성구들은 기독교가 근본적으 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 세계 인류가 안고 있는 기난한 자의 문제는 교회가 안아야 할 가장 긴요한 문제입니다. 교회는 오늘날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고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 말 가능성마저 있는 가난한 자에 대한 문제를 해소할 의무가 있습니다. 비록 가난 한 자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그 존엄성을 방치해서는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가난 때문에 고생을 하지만 저 세상 "하늘 나라"에서는 "눈물도 슬픔도 죽음도 없다."는 것을 교회의 메시지로 내세운다 면 이는 아편과 같은 종교를 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탐 욕의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자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공평하게 살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에 어느 한 사람이 무엇을 더 소유했 다고 해서 가지지 못한 사람을 천대하거나 무시하고 괴롭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의로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이란 것은 가진 자가 많은 사회 속에서 다만 무엇을 남보다 못가졌다는 것 때문에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인간이 누려야 할 만족과 행복의 감정보다는 억울함과 부족함과 불만으 로 살아가는 상태를 말합니다. "(출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 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출22:26) 네가 만 일 이웃의 옷을 전당 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 보내라 (출22:27)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 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한 자임이니라."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가난한 자는 있기 마련인데 이들이 당장에 필요한 삶을 위하여 가진 자들에게서 빚을 얻어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벌 옷을 전당포에 잡히고 생활비를 마련해야할만큼 궁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 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들 가난한 자들의 권리나 소유가 침해를 당하거나 약 탈을 당하게 될 때 가난하다고 해서 법률적으로 부당하게 처리되어서는 안됩니다. "(출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출23:4)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만나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 (출23:5) 네가 만일 너를 미워하는 자의 나귀가 짐을 싣고 엎드러짐을 보거든 삼가 버려 두지 말고 그를 도와 그 짐을 부리울지니라 (출23:6) 너는 가난한 자 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출23:10) 너는 육 년 동안은 너의 땅에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고 (출 23:11) 제 칠 년에는 갈지 말고 묵여 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로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너의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 땅을 가지지 못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성구에 나타난 하나님 사상은 가난한 자를 천대하거나 억울하게 하지 말고 그 들의 생존에 필요한 먹고 입는 문제에 대하여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신15: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 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신15:8)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신15:9) 삼가 너는 마음에 악념을 품지 말라 곧 이 르기를 제 칠년 면제년이 가까웠다 하고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 라 (신15:10) 너는 반드시 그에게 구제할 것이요 구제할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범사와 네 손으로 하는 바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 니하겠는 고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 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가난한 자에게 인색하지 말고 아량을 베풀되 그 쓸 것을 넉넉히 주라는 것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 난한 자 역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결코 가난한 사람 자신의 절약과 검소에서 물러갈 것이 아닙니다. 또는 빈자가 그의 기도의 힘으로 갑자 기 부자방망이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도 아닙니다. 가난을 이 땅에서 물리 치는 길은 가진 자들이 자기 소유권을 포기하고 일부 또는 전부를 가난한 사람 들의 요구를 채워줌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 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교훈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이 가진 부는 자기들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그 물질을 자기와 자기 가족만을 위하여 쓰도록 하나님은 용납 하지 아니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자들은 빈자들에 대하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고 자기 것이라고 움켜쥐기만 하지 말고 반드시 그 손을 펴서 이웃 가난한 자를 넉넉하게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 를 짓는 것입니다. 빈자를 돕지않는 것은 벌써 "악한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돕지 않는 행동이 전에 벌써 마음으로 죄를 범한 것이 된다는 것 입니다. 빈자를 계속해서 너그럽고 넉넉하게 후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말씀 을 듣는 길이요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신24:14) 곤궁하고 빈한한 품꾼은 너의 형제든지 네 땅 성문 안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를 학대하지 말며 (신24:15) 그 품삯을 당일에 주고 해진 후까지 끌 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면 죄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이 성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노동을 파는 사람들은 가난하고 궁핍한 존재이 며 이들 노동자는 나그네로 떠돌아 다니는 외국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품삯은 해가 진 다음까지 미루지 말고 당일 계산하 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노동자들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막벌이 생활 을 하기 때문에 품삯을 받는 일을 최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품삯을 미루는 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만 약 노동법이 사용자측, 즉 강자의 법이 되어 품삯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법에 호소할 길도 막혀 비인간화의 비극이 생긴다면 하나님께 호소된다면 그 죄가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잠언서를 보면 사회학적인 이유에서 불가피하게 가난하게 되고 약자가 되고 천대받는 사람이 되어버린 상황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잠언서를 보면, 이 "가 난한 자"는 항상 부자와 권력자의 압제와 핍박과 착취 때문에 만들어진 가난한 자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학대하는 사람 때문에 가난한 자가 생겼다는 말입니다(잠 14:31).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는 가난해진다."(잠 22:16) "가난한 자 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경우"는 폭우같다(잠 28:4),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악 한 관리는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다."(잠 28,15)는 구절은 가난한 사람이 어떻게 가난해져서 천민이 되고 약자가 되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부자와 권력자의 학대와 압제가 결국 가난한 자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잠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 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22:16) 이를 얻으려 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잠 28:4)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잠28:15)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그러므로 강자가 약자의 약점을 담당하지 않거나, 가진 자가 못가진 자의 궁 핍을 담당하지 않는 것은 그 주어진 책임을 다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 한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긍휼없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만이 주어질 것입니다. 교회가 이 시대에 벌여야 할 성령님 운동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복음 전도운동 입니다. 성령님 운동을 통해 교세나 확장하거나 권위를 나타내고자 한다면 그것은 이미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지향해야 할 곳은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저 낮은 곳에 있는 가난한 자, 병들고 소외된 자, 갇히고 눌린 자들이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땅 한 평 남기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기독교 공원묘지 하나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저금 통장 하나 가 지지 않으셨습니다. 살아계셨을 때 머리 둘 곳도 없으셨던 예수님은 죽으실 때 벌거벗은 몸이셨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는 인류를 위해 벌거벗은 몸으로 가시 관을 써야 할 때입니다. 십자가를 걸머지고 나라 백성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에 성령님을 부어주신 목적은 시대의 아픔 과 고통을 함께 지라는 것입니다. "(눅4:18) 주의 성령님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 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4: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의인을 팔아먹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이 시대에 교회는 피값을 주고서라 도 그 의인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평강교회가 이 시 대의 아픔과 고통의 짐을 함께 지는 교회로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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