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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의 말씀을 들으라 (암3:1-8)

본문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범죄를 경고하기 위해서 아모스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주변 국가들의 죄악과 그들에 대한 필연적인 하나님의 징벌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비슷한 상황을 찾는다면 설교를 듣는 우리의 태도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설교를 듣을 때는 어떤 말씀이든지 자기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야하는데, “이 말씀은 꼭 아무개 집사가 들어야하는데. 오늘 왔는지 모르겠어” 하면서 자신과는 상관이 없이 듣는 태도입니다. 그러다가 “아니야, 이 말씀은 나를 위한 것이었어”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경고하시기 위해서 주변국가의 죄악부터 알게 하시고 그 죄악을 인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한다면 이스라엘아, 너는 어떻게 해야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알면서 범하는 죄와 모르고 짓는 죄는 그 결과가 다릅니다. 시편147:19-20말씀은 (시147:19)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시147:20)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악과 그 하나님의 진노를 말씀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들었어야했습니다.
하나님은 거듭 경고하셨습니다. (암3: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를 쳐서 이르시는 이 말씀을 들으라-이 말씀은 이스라엘을 치는 말씀입니다. 교인들은 강단에서 설교자가 치는 설교를 하는 것을 듣기 싫어합니다. 그저 위로하고 평강과 축복을 말하면 좋아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무리에게 복과 은혜를 내리시겠다면 그것을 선포해야하겠지만, 그 무리에 죄악이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는 때에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듣기 싫은 소리는 않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선지자라고 할 것입니다. 병원에 복통이 있어서 치료하러 갔는데, 속에 중병에 대해서는 발견하고도 말하지 않고, 진통제 주면서 괞찮다고 편히 쉬면 낫는다고 한다면 일시적으로는 얼마나 듣기가 좋습니까 그러나 그 의사를 우리가 좋은 의사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치실 때에 할 수 없이 칠 수밖에 없음을 교인들은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설교는 설교자의 어떤 잘못된 개인 감정으로 강단에서 치는 것이 되면 안됩니다. 그 무리의 죄악을 말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은 실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면 오히려 복이 되기 때문에 하는 소망과 축복의 말씀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를 쳐서 이르는 말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무릇 사랑하는 자녀를 하나님께서 징계하십니다. “이 말씀은 너희를 위로하는 말이 아니다. 너희에게 이미 권면했고, 그러나 너희들이 즐겨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너희에게 심판을 경고하는 말을 하는 것이니 듣지 않으면 이제 징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이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냥 박살을 내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도 왜 오히려 이스라엘이 돌아오기를 하나님께서 안타까와서 사정하듯이 할 수밖에 없습니까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아니라면 쉽게 포기할 수 있지만, 이스라엘은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부모가 거역하는 자녀라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여 징계해서라도 돌이키는 것 같이 이스라엘을 차마 버릴 수 없어서 하나님께서 오히려 사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여 내시기 위해 큰 대가를 내셨기 때문에 그들을 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응하시는 것은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들이기 때문에 사랑하심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2절 말씀에 (암3:2) 내가 땅의 모든 족속 중에 너희만 알았나니
그러므로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했습니다. 땅의 모든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만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구원하시고, 불러서 자녀를 삼으셨기 때문에, 내가 너희만 알기 때문에, 내가 너희를 쳐서 이르는 이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의 모든 죄악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러하십니다. 먼저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베푸시면서 좋은 말씀으로 권면하십니다. 그러나 듣지 않을 때에는 징계하실 것을 경고하시고, 그래도 안들으면, 징계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징계 받기 전에 경고의 말씀을 듣고서 죄를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과 마귀에 종된 데서 구원하시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오직 땅위에 많은 인류가 있지만, 우리들만을 아시고, 우리들을 자녀 삼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므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징계하여도 듣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서 이제 오히려 돌아올 것을 두려워하시면서 우리를 포기하십니다. 이는 구원을 포기하신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은 여기서 절단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당한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경고의 음성을 들을 때에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돌아오라는 말씀과 함께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니,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감사히 여기면서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듣지 않는 자들에게 대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노를 가지시고 보응하실 것인가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징계하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게 하시려고 몇가지 질문을 하십니다.
첫째,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느냐 (3: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동행할 수 없는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결혼상대자가 계약을 위반하면 어떻게 그 결혼이 존속하겠느냐 두 사람이 동업을 할 때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위반하면 어떻게 같이 사업을 하겠느냐 두 사람이 길을 함께 가도 마음이 맞아야 동행이 되는데 이스라엘에게 내가 복과 은혜를 약속했거든 그 약속을 던져버린 배약한 이스라엘에게 내가 함께 할 수가 없지 않겠느냐는 하나님의 슬퍼하시고, 탄식하시는 말슴입니다.
둘째, 사자가 움킨 것이 없고야 어찌 수풀에서 부르짖겠으며 젊은 사자가 잡은 것이 없고야 어찌 굴에서 소리를 내겠느냐(3:4) 사자는 먹을 것이 바로 앞에 있을 때에, 또 먹이가 빠져 나갈 기회를 다 놓쳤을 때에 포효하기 시작합니다. 너무 빨리 포효하면 그의 먹이가 경계할 것이지만, 사자는 인내심이 강합니다. 먹이가 바로 먹혀질 그 상황에서 포효하여 그 먹이로 그 소리에 질려서 오금을 못 뛰도록 해서 먹이를 잡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멸망시킬 대상이 없다면 부르짖겠느냐” 이 징계를 받고도 하나님의 뜻을 찾아 돌이키지 않는 자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모든 어려움들이 그냥 일어나는 우연의 것으로 생각지 말라. 사자가 울 때에는 움킨 것이 있고, 잡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기로 작정된 자는 울부짖는 사자 앞에서 그 약한 짐승이 피할 수 없는 것 같이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하는 말씀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설마, 설마, 아직까지야.”하지만, 하나님의 징계에는 요행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수 하시지 않습니다. 이 징벌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창애를 땅에 베풀지 아니하고야 새가 어찌 거기 치이겠으며 아무잡힌 것이 없고야 창애가 어찌 땅에서 뛰겠느냐 (3:5) 새를 잡는 그물을 놓은 자가 있기에 새가 거기에 치이는 것 아니냐 또 올무가 뛰는 것은 무엇인가 잡힌 것이 있는 것 아닌가. 이스라엘의 재앙은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것이니, 어찌 이유가 없겠느냐, 회개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징계를 받으면서도 우리들은 우연으로 돌리려합니다. 끝까지 우리의 죄에 대하여 합리화시키고 그래서 끝내 회개치 않아서 다 망하기 까지 해 버립니다. “내가 이번에 실패한 것이 내가 실수 한 것이지, 누가 돕지 않아서 그런 것이지, 환경이 그래서 그렇지 설마 하나님께서 징계하셔서일까 아니야, 하나님이 살아 계실려고”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것을 인정하기를 싫어합니다. 산에 새를 잡기 위한 창애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 현실들은 다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입니다. 창애가 뛰는 것은 어리석은 새가 창애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이같이 심판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고, 형벌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넷째, 성읍에서 나팔을 불게 되고야 백성이 어찌 두려워하지 아니하겠으며 여호와의 시키심이 아니고야 재앙이 어찌 성읍에 임하겠느냐-재앙은 우연히 오는 법이 없으니 선지자가 파숫군이 나팔을 불어야하고, 나팔로 불어서 재앙을 예고할 때에 백성은 두려워해야합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의 나팔 소리를 들어도 두려워함도 없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이방들이 다 나팔소리가 나면 전쟁인 줄 알고 공포에 질려 꼼짝 못하고 두려워하는데, 이스라엘은 떨지 않고, 한 바탕 웃고, 포도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전쟁만큼도 두려워않고, 하나님의 사람들의 경고를 들으나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 결과가 다 진멸하고 나서야 알 것이라는 것입니다. 암3:7에는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므로 오늘 우리에게 이런 시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르호보암 2세 때에 너무 좋은 한 때를 지냈습니다. 이 이스라엘의 태평성대가 가져온 신앙의 무기력함, 방종의 상태는 오늘 우리나라와 우리나라 교회에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죄악이 하늘에 까지 관영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실 수밖에 없는 지경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이방사람들에게 있는 죄악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타락과 부패 때문에, 우리 성도들의 잘못된 신앙생활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아십니다. 오늘 우리를 치시는 말씀을 우리가 즐겨 들읍시다. 우리 죄악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내어서 이렇게 하나님께서 징계하시지만, 결코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암3:8)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자가 부르짖으면 두려워하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므로 하나님의 부르짖는 말씀을 들을 때에 두려워함을 가져야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주 여호와의 말씀을 받은 예언자는 다 전해야합니다. 듣기 싫어도 죄악과 심판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가야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합니다. 우리의 죄악을 낱낱이 찾아서 회개합시다.
첫째, 우리들에게 있는 우상들을 다 제하여 버립시다.
둘째, 우리들의 외식된 신앙생활과 타성에 젖은 예배 행위를 회개합시다.
셋째, 우리들의 세속적 기복주의 신앙을 회개합시다.
넷째, 우리들의 물질을 숭배하는 유물주의를 회개합시다. 다섯째, 우리들에게 있는 허영과 사치 낭비, 쾌락주의를 회개합시다. 여섯째, 우리들의 하나님 일에 대한 불충한 안일주의를 회개합시다. 일곱째, 우리들의 음란과 방탕의 죄악된 언행심사를 회개합시다. 여덟째, 우리들이 형제사랑하지 않은 죄를 회개합시다. 아홉째, 우리들이 하나님 말씀을 멸시한 죄를 회개합시다. 열째, 우리들이 이 모든 일을 두고 기도하지 않은 죄를 회개합시다.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에 돌아서면 진노의 역사는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계속 패역하면 이사야서 말씀에 있는 것 같이 우리들이 정수리로부터 발끝까지 맞고 상하고 터진 것 뿐이고, 더 맞을 것 뿐입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돌아서면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입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우리 편이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불가능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어느 누가 우리를 도와준다고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결코 복이 되지는 않습니다. 살고 죽는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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