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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시는 종교인들의 삶 (암4:1-5:6)

본문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이라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겠습니다.” 라고 기도도 하고 주장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에는 우리는 그 뜻을 그대로 수납할 수 없다고 있는 하나님의 뜻과 정말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종종 달리 나타나기 때문이며 성경에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상식과 생각으로는 거의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진리로 알려져 있는 성육신 사건은 아무리 보아도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노출시켜 주고 보여준 거임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은 쉽게 용납하거나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게서 아들을 죽이시고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이 놀라운 진리를 인간들은 거부하고 부인하는 불행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뜻으로 헤일 수 없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특히 종교인으로서 우리는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고 나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에는 “나는 너를 알지 못하고 나는 네 믿음을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다”고 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설 때마다 두려운 심정으로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아모스 선자를 통하여 4장과 5장에서는 하나님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인간이 즐기고 인간이 좋게 보는 그 부분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미워하시고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지금 드고아의 목동으로서 선지자도 아니요 선지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요 선지자의 훈련도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불을 토해내듯 토해내면서 “보아라 너희에게 예배가 없지도 아니하고 너희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법도가 모자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는 감사가 없고 진정한 복종이 없고 참된 충성이 없으니 너희가 드리는 모든 예배 형식이나 예배의 모든 것들이,심지어는 모든 제물까지도 가증스러운 것이고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다” 고 무섭게 책망하십니다.
1.무서운 비유 “사마리아 산에 거하는 바산 암소들이 이 말을 들으라 너희는 가난한 자를 학대하며 궁핍한 자를 압제하며 가장에게 이르기를 술을 가져다가 우리로 마시게 하라 하는도다”(4:1) 참으로 무서운 비유로 그 백성들을 질책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너희는 바산의 암소들과 같이 제 몸만 살지우는 자가 아니였더냐, 너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자기의 쾌락과 자기의 열락을 찾았으며 제 몸을 살찌우는 바산의 암소들과 같은 자들이 아니냐, 너희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아니했더냐, 너희는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했더냐, 보이게 압제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자들이 네 앞에 서는 것을 부끄러하게 하지 아니했더냐” 그 결과 그들은 심판을 당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 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4:2) ‘갈고리’는 추수할 때에 곡식을 긁어모으는 도구를 말합니다. 낚시는 어부가 가지고 있는 연장입니다. 이것은 다 심판을 의미합니다. 고기가 물을 떠난다는 것은 죽음을 말합니다. ‘너희를 사람낚는 어부가 되게 한다’는 말씀은 생명을 구원하기 보다는 오히려 심판을 말하는 것이요 마지막 판단을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므로 마지막 때에 세상 불신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심판감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본절의 말씀은 “바산의 암소들아 너희 몸에 살만 찌우고 있는 너희에게는 때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나라 말에 어린아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철이 없다는 말은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 때가 어떤 때인줄 알지 못하는 사람,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는 철없는 사람입니다. “그 때가 임할 때는 갈고리로 긁어모을 것이요 낚시로 또 너희를 그리하리겠다”무서운 말씀입니다.
1).벧엘에서 범죄하라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4:4상) 아모스 선지자는 벧엘, 길갈, 브엘세바 이 세 곳을 매우 중요한 곳으로 생각을 하면서 우리에게 비유하여 교훈의 말씀을 주십니다. 1장에 보먄 아모스는 잔인한 수리아를 저주하고 그 수리아 백성들의 비인간적인 행동을 지적하는 장면이 나타나 있습니다. 불레셋의 신들이나 에돔과 모압의 종교행사를 여기서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신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 행위에 대하여 건딜 수 없는 마음으로 지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아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을 향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하나님 편에 있다고 하는,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하는 그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보암때에 이스라엘의 종교는 남쪽으로는 벧엘로부터 시작하여 북쪽으로는 단지방까지 산당을 지어놓고 산당 예배행위를 여기 저기서 행했던 것입니다(왕상12:28-30). 아모스 선지자는 이 4장에서 사당예배에 대해서 공격을 하는데 특별히 이 세 지역 벧엘과 길갈과 브엘세바에 대해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벧엘은 아모스가 예언을 시작한 곳입니다. 이들은 제각기 자기의 예배 형식이 있었고 예배 의식이 있었고 역사적인 배경이 있는 도시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부르기는 했지만 각기 하나님을 대적했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노를 불러 일으켰다는 말씀입니다. 벧엘은 창세기에 나타나는 야곱의 이야기와 함께 기억합니다. 형 에서의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멀리 도망을 가던 야곱이 벧엘지역에와서 잠시 쉬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다가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계시를 보게된 때에 단을 쌓으며 하나님 앞에 서원하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하신다면 내가 하나님게 영광을 돌리며 제사를 드리겠노라” 고 서원의 기도를 드린 곳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땅위에서 가장 거룩한 자리이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그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벧엘은 누추한 벧엘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매년 8개월째 되는 달 15일에 국가적인 경축일로 정하고 금송아지 앞에 제사를 지내던 그곳이 바로 벧엘이며 우상 숭배의 본산지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의 종교적인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종교적인 의식과 규례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익서을 가리켜 아모스 선지자는 바로 죄악이라고 했으며 그것이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벧엘에서 여호와의 나는 불, 심판의 불을 끌 자가 없으니 너희는 벧엘로 가지 말고 머무르지도 말라 타락한 우상을 따라가는 너희를, 하나님을 빙자하여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 골르반 하는 자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살찌우는 더러운 종교인들이여 너희는 그들을 따라가지 말고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산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잘못된 종교, 불의한 신앙, 그리고 잘못 걸어간 신앙적 습관, 우리는 따라가지도 말고 그것을 좋아하지도 말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서 하나님의 법대로 우리의 여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애가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2).길갈에서 죄를 더 지어라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4:4)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입성하던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서 길갈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홍해를 건넌 것처럼 요단강도 하나님이 건너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민된 모습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기로 작성을 했던 곳이 바로 길갈이었습니다. 이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가운데서 출생한 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하기로 결정을 하고 유월절을 맞이해서 하나님 앞에 출애굽을 하던 그때를 감사하는 특별 제사를 지내던 그 장소가 길갈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길갈에 머무는 동안에 하늘로부터 아침마다 떨어지는 만나는 중지가 되었고 가나안의 곡식과 열매를 먹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수5:1-12). 길갈은 약속의 땅을 이미 얻었다고 하는 상징도시였으므로 그곳에서는 가나안의 열매와 가나안의 곡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만나가 떨어져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약속의 땅 길갈, 하나님 앞에서 복을 마음껏 받았던 길갈에 들어가 죄를 더 지으라 하셨고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증하셨던 길갈,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떠난 길갈, 하나님 없는 길갈은 실상이 없는 허수아비와도 같은 종교의 껍질만 남은 모습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름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놀라운 은혜를 받았고 너무나 엄청난 약속의 백성이 되었지만 하나님 떠나시고 하나님 없이 아무리 제주를 부리고 이름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선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미 나의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예배당을 아무리 잘 지어 놓아도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아니하시면 오히려 화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향하여 그의 집을 향하여 기대하는 바가 있었는데 오히려 불꺼진 화로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배성노릇을 못할 때에 세상이 우리를 향하여 침을 벧게 되고 오히려 낙심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브엘세바로 돌아가지 말라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5:5중)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배신에 초점을 맞추다가 브엘세바를 언급하면서 죄악이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 유다에도 파져 나갔다고 책망합니다. 이스알엘의 죄가 유다에도 퍼져 나간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브엘세바에 까지 여행을 하며 거기에서 허황된 종교를 퍼뜨리고 잘못된 신앙을 보여줌으로 인하여 그들까지 망하게 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브엘세바는 유다에 있는 세번째 종교도시로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위대한 세 족장들과 연관이 있는 장소입니다. 아브라함과 맹세를 하던 곳이 바로 이곳이요 아비멜렉과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인정한 곳이기도 합니다. 브엘세바는 복받은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은 이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창26:23). 이삭의 아들 야곱이 애굽으로 가던 도중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을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창46:3). 그러나 아모스 5장 1절에서 5절을 읽게 되며 마치 장례식에서 조사를 읽는 기분이 듭니다. ‘다 망하고 마하였도다’ 여기 죽음을 말하는 2절에서는 일어날수 없게된 엎드러져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어리로다”(5: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려졌는데 다시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망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렇게 위대한 소망을 가졌으며 하나님이 영원토록 동행해 주시겠다고 하던 그 이스라엘이 다른 곳이 아닌 약속을 받은 브엘세바에 와서 저주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 벧엘이 실패의 자리가 되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던 약속의 땅 길갈과 브엘세바는 허무한 도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은 넘어지고난 다음에 일어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공허한 종교신앙을 미워하신다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죽은 신앙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하는데 그 신앙이 죽은 신앙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느데 행위의 열매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우리에게 적용이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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