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찾아야 할 사람들 (암4:4-6,5:4-6)
본문
오늘 아모스 선지자는 매우 강렬한 어조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경고의 성격을 띤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 심판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으나 그들의 신앙과 마음은 빈배와 같은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심판을 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종교의 형식과 외적인 의무에만 치중했지 실제로 소유해야 할 영적인 것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형식적인 예배를 즐겼으며, 하나님과 관계없는 감각적인 것이었고, 뜨거움도 기쁨도 없었습니다. 찬양은 하나의 음악과 예술로 변하여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귀를 즐겁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설교는 하나의 연설이요, 웅변이요, 신학의 강연으로 변해 갔으며, 성도는 경건의 모습이 없는 점잖은 태도를 취하였으나 위선과 가식적인 행위였으며, 예배하는 그 시간은 체면 때문에 앉아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어도 자기의 생각들에 맞지 않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하며,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의문점을 갖기도 하였습니다. 아모스는 이 시대를 살면서 그들의 신앙은 하나님께서는 가장 미워하시고 용납할 수 없는 행위들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선지자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도 아니요 선지자의 훈련도 받지 못했으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뜨거운 선지자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드고아에 사는 목자였으나 주의 신이 임할 때 그는 마음에 불붙은 선지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에서 불을 토해 내듯 외치면서 “보아라 너희에게 예배가 없지도 아니하고 너희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어떤 법도가 모자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희에게는 감사가 없고 진정한 복종이 없고 참된 충성이 없으니 너희가 드리는 모든 예배 형식이나 예배의 모든 것들이, 심지어는 모든 제물까지도 가증스러운 것이고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이다”고 무섭게 책망합니다. 그러면
1.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까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출19:6,신28:9)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여기에 '거룩함'이란 세속적이거나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함으로 맹세하셨다는 것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는 보증이요 말씀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므로 백성들도 신실하며 성별된 삶을 살 것을 권고하셨던 것입니다. 악의 세력에게 정복당하지 않는 순결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5:2) “처녀 이스라엘”이란 뜻의 의미는 순결한 이스라엘, 정결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의 풍습과 세속화된 문화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므로 영적으로 정결한 생활을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점령당하지 않는 백성, 이방 신으로부터 점령당하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선민들이 나가야 할 자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방 나라에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을 살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으나, 말씀을 의지하지 아니할 때에 결국 정복당하는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순결해야 할 백성들이 그 지은 죄로 인해 더렵혀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므로 번영된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신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차지한 땅은 지상 최고의 동산이었습니다. 최고의 농업적인 요건과 상업적인 요건을 모두 갖추었으며 특이한 환경과 기후들로 인해 곡식들이 풍성하게 맺는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땅을 주시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될 것을 명하셨으며, 그들이 번성하며, 번영하며, 풍성한 복을 누리는 백성과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훌륭한 이상이요 원리일 뿐이었지 자신들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실생활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뜻에 접근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창조주를 창조주로 인정치 아니하는 그들은 오히려 이방인들의 행위들보다 더 능가하는 죄악들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시고 무섭게 그 백성들을 질책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자기의 쾌락과 자기의 연락을 찾았으며 제 몸을 살찌우는 바산의 암소들과 같은 자들이 아니냐, 너희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아니했더냐, 너희는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했더냐, 보이게 압제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자들이 네 앞에서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지 아니했더냐” 또 말씀하시기를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4:2) 여기에 갈고리와 낚시를 말하는데, “갈고리”는 추수할 때에 곡식을 긁어모으는 도구를 말합니다. “낚시”는 어부가 가지고 있는 연장입니다. 이것은 다 심판을 의미합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마치 갈고리로 곡식을 끌어 모으듯이, 초망으로 고기를 잡아내듯이 모두 심판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 불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선민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 “때가 임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때’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나라 말에 어린아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철이 없다는 말은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 형편을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때가 때인 줄 모르는 사람, 이 때가 어떤 때인 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스도인 이면서도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는 철없는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바로 서 있지 못하여 영적인 것인지 세상적인 것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사단의 생각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에게는 “그 때가 임할 때에 마치 갈고리로 긁어모으듯이 모을 것이요, 또 낚시로 낚아채듯이 너희를 그리하겠다”는 무서운 경고였습니다.
3. 여호와를 찾아야 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1).벧엘에서 범죄 하는 사람들입니다.(“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4:4) 벧엘이란 곳은 어떤 곳일까요 벧엘의 원래의 이름은 “루스”입니다. 믿음의 족장인 야곱을 통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창28:10-22에 보면 야곱은 형 에서로 부터 장자 명분을 빼앗고 또 아버지께서 주시는 축복까지 모두 받아 형에게 죽기 전에 외삼촌 집을 향하여 멀리 도망가다가 “루스”라는 지역에 와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여기서 하나님 앞에 기도 하다가 잠들었습니다. 꿈속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였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안심을 하고 힘을 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누웠던 자리에 돌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서원 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하신다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주 하나님만 섬기며 예배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고 서원의 기도를 드린 곳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벧엘은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임재 하심을 느껴야 합니다. 야곱이 고백한 것과 같이 우리의 고백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가 활동하고 서 있는 이 땅을, 그리고 내 마음속을 거룩한 하나님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는 왜 벧엘에 가지 말라고 하였을까요 여로보암 때에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이 남북 분단의 경계를 정해 놓고 따로 독립된 국가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하나요 성전이 하나인지라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자주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여로보암 왕은 남쪽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가지 못하도록 벧엘에 산당을 지어 놓고 여기 저기서 예배 행위를 행했던 것입니다(왕상12:28-30). 성도 여러분! 나라와 민족은 달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같은 민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어야 할 신앙을 자기의 생각에 맞지 않거나 자기에게 손해가 온다고 해서 분열시키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며 믿는 사람이 취해야 할 방법이 아닙니다. 개개 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교단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세계와 우주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볼모로 잡아 지금 하나님께 반역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욕심으로 나타난 영향은 선민들 전체가 타락하는 엄청난 영적 손실과 재앙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여로보암과 같은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변질된 예배와 의식은 하나님을 부르기만 했지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으며,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벧엘은 이제 하나님이 계시는 영광스러운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없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을 향하여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편에 있으며,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변질되고 가증스러운 그들의 모습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과거를 생각해 봅니다. 오래 전 옛날에 야곱이라는 조상이 있었는데, 그분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고 나서 돌 단을 쌓고 예배하며 서원 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하신다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들 모두가 또 나의 자손 대대로 주 하나님만 섬기며 예배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고 서원의 기도를 하면서 자기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영원히 주 하나님께 예배하며 십일조를 드리며 감사 헌금을 드리면서,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또 후손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후손들은 그렇게 순종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하나님의 집인 벧엘은 이제 우상 숭배의 본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할 이스라엘이 이방 신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선민들이 여기서 거처를 정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스라엘이 지금은 산당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사는 하나의 종교 행사였습니다. 그들이 종교적인 의식과 규례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아모스 선지자는 바로 죄악이라고 했으며 그것이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벧엘에서 여호와의 나는 불, 심판의 불을 끌 자가 없으니 너희는 벧엘로 가지 말고 머무르지도 말라.하나님을 빙자하여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오히려 자기를 살찌우는 더러운 종교인들이여 너희는 그들을 따라가지 말고 너희는 나를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잘못된 종교, 불의한 신앙, 그리고 잘못된 신앙적 습관들을 우리는 따라가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직 말씀에 바로 서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길갈 에서 죄를 더 하는 사람들입니다.(“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4:4. 수4:-5:-) 길갈은 어떤 곳일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으며, 약속의 땅으로 입성할 때에 잠시 머물며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준비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광야에서 살아오면서 흐트러졌던 자신의 모습을 고치고 선민으로서의 모습과 위치를 말씀 앞에서 재확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돌 단을 쌓고 기념비를 세웠던 곳이 길갈입니다. 이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행하지 못한 할례를 행하였으며, 유월절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특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길갈은 광야 40년을 방황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얻게 되어 우리가 거하게 되었도다”는 것을 상징하는 기념 도시였습니다. 약속의 땅인 길갈,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충만히 받았던 길갈, 하나님께서 약속을 보증하셨던 이 길갈이 아모스 선지자 시대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았으나 이제는 쓸모 없는 길갈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길갈, 하나님 없는 길갈, 웅장한 도시를 이루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큰 도시가 되었으나 실상이 없이 서 있는 허수아비와 같이 되었습니다. 벼를 다벤 후의 논에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는 실로 초라하고 허무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 예배와 형식은 웅장한 음악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하여도 종교의 껍질만 남아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허무한 곳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도 받았습니다. 직분도 받았습니다. 봉사도 합니다. 성도와 친교도 합니다.
그리고 좋고 웅장한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임재 하시지 않는 교회라면,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교회라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헌물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 한국 교회의 건물이 크고 웅장하여, 사람은 많아도 만약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교회가 되어 버린다면 폭발적으로 부흥하며 성장하는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이름만 가지고서 성전의 웅장함만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찬미의 제사는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나님이 임재 하시지 않는 기도는 아무리 간절하고 길게 호소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없이 그냥 이름만 가지고 사는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았고 엄청난 축복과 함께 약속의 백성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고 내 속에 하나님이 없이 이름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해서 그 하나님은 이미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인본주의로 변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미치는 곳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향하여 그의 집을 향하여 기대하는 바가 있는데, 그 기대가 무너지고 마음은 마치 불꺼진 창이 되고 식어 버린 화로처럼 되어 버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심령에 성령님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뜨거움이 넘쳐서 나가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더 나아가 우리 한국 교회가 성령님에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이 뜨거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강단에 뜨거운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나, 기관마다, 가정과 개인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아모스 선자자와 같이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불붙는 심령을 지체할 수 없어서 나가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찬2562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하신 주님 선한 일꾼 찾으시나 대답 할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3) 브엘세바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5:5) 브엘세바는 어떤 곳일까요 브엘세바는 남쪽 유다에 있는 세 번째 종교 도시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위대한 세 족장들과 연관 있는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곳이 브엘세바입니다.(창21:31) 아비멜렉과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브엘세바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한 곳입니다.(창21:32)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곳입니다.(창21:33) 이삭은 이 브엘세바에서 자손이 번창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창26:23). 이삭의 아들 야곱이 애굽으로 가던 도중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을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창46:3). 이처럼 하나님이 임재하신 브엘세바, 브엘세바에 사는 선민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정결한 양심으로 살면서 오직 믿음을 지켜 오게 한 거룩한 땅 브엘세바, 브엘세바는 분명히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해 경고하면서 브엘세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이 북쪽 이스라엘에서 남쪽 유다에까지 퍼져 나갔는데, 특히 브엘세바에 까지 죄로 물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쪽 유다의 브엘세바까지 여행을 하면서 그곳에도 허황된 종교를 퍼뜨리고 잘못된 신앙을 보여줌으로 깨끗하고 정결한 땅 브엘세바까지 망하게 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북쪽의 더러운 심령이 남쪽의 유대인들까지 더럽게 전염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게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렇게 위대한 소망을 가졌으며, 하나님이 영원토록 동행해 주시겠다고 하던 그 이스라엘이 다른 곳이 아닌 약속을 받은 브엘세바에까지 와서 저주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인 벧엘은 실패의 자리가 되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던 약속의 땅 길갈과 브엘세바는 허무한 도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은 넘어지고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선민이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라면 이와 같은 죄악의 물결이 밀려온다고 하여도 말씀에 바로 서서 전염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까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출19:6,신28:9)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여기에 '거룩함'이란 세속적이거나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된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함으로 맹세하셨다는 것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으신다는 보증이요 말씀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말씀에 신실하시므로 백성들도 신실하며 성별된 삶을 살 것을 권고하셨던 것입니다. 악의 세력에게 정복당하지 않는 순결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5:2) “처녀 이스라엘”이란 뜻의 의미는 순결한 이스라엘, 정결한 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의 풍습과 세속화된 문화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나가므로 영적으로 정결한 생활을 하기를 원하였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점령당하지 않는 백성, 이방 신으로부터 점령당하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선민들이 나가야 할 자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그때까지만 해도 이방 나라에 한 번도 정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삶을 살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으나, 말씀을 의지하지 아니할 때에 결국 정복당하는 백성이 되어 버렸습니다. 순결해야 할 백성들이 그 지은 죄로 인해 더렵혀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므로 번영된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신4:40)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차지한 땅은 지상 최고의 동산이었습니다. 최고의 농업적인 요건과 상업적인 요건을 모두 갖추었으며 특이한 환경과 기후들로 인해 곡식들이 풍성하게 맺는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땅을 주시면서 말씀에 순종하는 백성들이 될 것을 명하셨으며, 그들이 번성하며, 번영하며, 풍성한 복을 누리는 백성과 민족이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2.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의 훌륭한 이상이요 원리일 뿐이었지 자신들의 삶과는 관계가 없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의 실생활이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으며, 하나님의 뜻에 접근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창조주를 창조주로 인정치 아니하는 그들은 오히려 이방인들의 행위들보다 더 능가하는 죄악들을 범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시고 무섭게 그 백성들을 질책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너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자기의 쾌락과 자기의 연락을 찾았으며 제 몸을 살찌우는 바산의 암소들과 같은 자들이 아니냐, 너희는 가난한 자를 멸시하지 아니했더냐, 너희는 궁핍한 자를 압제하지 아니했더냐, 보이게 압제하지는 않았지만 가난한 자들이 네 앞에서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하지 아니했더냐” 또 말씀하시기를 “주 여호와께서 자기의 거룩함을 가리켜 맹세하시되 때가 너희에게 임할지라 사람이 갈고리로 너희를 끌어가며 낚시로 너희의 남은 자들을 그리하리라”(4:2) 여기에 갈고리와 낚시를 말하는데, “갈고리”는 추수할 때에 곡식을 긁어모으는 도구를 말합니다. “낚시”는 어부가 가지고 있는 연장입니다. 이것은 다 심판을 의미합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마치 갈고리로 곡식을 끌어 모으듯이, 초망으로 고기를 잡아내듯이 모두 심판을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 불신자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의 선민들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또 “때가 임한다”고 하였는데, 여기에 ‘때’라고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나라 말에 어린아이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을 가리켜 철이 없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철이 없다는 말은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 형편을 분간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때가 때인 줄 모르는 사람, 이 때가 어떤 때인 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스도인 이면서도 하나님의 때를 알지 못하는 철없는 신앙 생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영적으로 바로 서 있지 못하여 영적인 것인지 세상적인 것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사단의 생각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에게는 “그 때가 임할 때에 마치 갈고리로 긁어모으듯이 모을 것이요, 또 낚시로 낚아채듯이 너희를 그리하겠다”는 무서운 경고였습니다.
3. 여호와를 찾아야 할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1).벧엘에서 범죄 하는 사람들입니다.(“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4:4) 벧엘이란 곳은 어떤 곳일까요 벧엘의 원래의 이름은 “루스”입니다. 믿음의 족장인 야곱을 통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창28:10-22에 보면 야곱은 형 에서로 부터 장자 명분을 빼앗고 또 아버지께서 주시는 축복까지 모두 받아 형에게 죽기 전에 외삼촌 집을 향하여 멀리 도망가다가 “루스”라는 지역에 와서 잠시 쉬게 되었는데, 여기서 하나님 앞에 기도 하다가 잠들었습니다. 꿈속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였고, 또 하나님께로부터 계시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안심을 하고 힘을 내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기가 누웠던 자리에 돌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서원 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하신다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주 하나님만 섬기며 예배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고 서원의 기도를 드린 곳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곳이며 하나님의 집입니다. 벧엘은 성도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만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야곱과 같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임재 하심을 느껴야 합니다. 야곱이 고백한 것과 같이 우리의 고백도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가 활동하고 서 있는 이 땅을, 그리고 내 마음속을 거룩한 하나님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는 왜 벧엘에 가지 말라고 하였을까요 여로보암 때에 남북으로 갈라진 이스라엘이 남북 분단의 경계를 정해 놓고 따로 독립된 국가를 이루어 왔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하나요 성전이 하나인지라 북쪽에 있는 사람들이 남쪽에 있는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서 자주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여로보암 왕은 남쪽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가지 못하도록 벧엘에 산당을 지어 놓고 여기 저기서 예배 행위를 행했던 것입니다(왕상12:28-30). 성도 여러분! 나라와 민족은 달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더구나 같은 민족이면서도 하나가 되어야 할 신앙을 자기의 생각에 맞지 않거나 자기에게 손해가 온다고 해서 분열시키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며 믿는 사람이 취해야 할 방법이 아닙니다. 개개 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가정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교단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하며, 세계와 우주가 하나님 말씀 앞에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들을 볼모로 잡아 지금 하나님께 반역의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욕심으로 나타난 영향은 선민들 전체가 타락하는 엄청난 영적 손실과 재앙을 불러옵니다. 우리는 여로보암과 같은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로 인해 나타나는 변질된 예배와 의식은 하나님을 부르기만 했지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아니했으며, 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벧엘은 이제 하나님이 계시는 영광스러운 곳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없는 곳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아모스 선지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을 향하여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편에 있으며,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변질되고 가증스러운 그들의 모습을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모스는 과거를 생각해 봅니다. 오래 전 옛날에 야곱이라는 조상이 있었는데, 그분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다가 하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고 나서 돌 단을 쌓고 예배하며 서원 하기를 “하나님께서 나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게만 하신다면 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제사를 드리겠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나의 가족들 모두가 또 나의 자손 대대로 주 하나님만 섬기며 예배하겠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고 서원의 기도를 하면서 자기뿐만 아니라 자손 대대로 영원히 주 하나님께 예배하며 십일조를 드리며 감사 헌금을 드리면서,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고 했습니다. 또 후손들에게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후손들은 그렇게 순종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하나님의 집인 벧엘은 이제 우상 숭배의 본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며 하나님과 동행하여야 할 이스라엘이 이방 신과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선민들이 여기서 거처를 정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이스라엘이 지금은 산당에서 금송아지를 섬기며 하나님을 반역하는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행사는 하나의 종교 행사였습니다. 그들이 종교적인 의식과 규례를 갖추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아모스 선지자는 바로 죄악이라고 했으며 그것이 바로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라고 경고한 것입니다. “벧엘에서 여호와의 나는 불, 심판의 불을 끌 자가 없으니 너희는 벧엘로 가지 말고 머무르지도 말라.하나님을 빙자하여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하면서.오히려 자기를 살찌우는 더러운 종교인들이여 너희는 그들을 따라가지 말고 너희는 나를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잘못된 종교, 불의한 신앙, 그리고 잘못된 신앙적 습관들을 우리는 따라가지도 말고 좋아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오직 말씀에 바로 서며,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생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길갈 에서 죄를 더 하는 사람들입니다.(“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4:4. 수4:-5:-) 길갈은 어떤 곳일까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로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으며, 약속의 땅으로 입성할 때에 잠시 머물며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준비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광야에서 살아오면서 흐트러졌던 자신의 모습을 고치고 선민으로서의 모습과 위치를 말씀 앞에서 재확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는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돌 단을 쌓고 기념비를 세웠던 곳이 길갈입니다. 이 길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동안 행하지 못한 할례를 행하였으며, 유월절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특별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길갈은 광야 40년을 방황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땅을 얻게 되어 우리가 거하게 되었도다”는 것을 상징하는 기념 도시였습니다. 약속의 땅인 길갈,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충만히 받았던 길갈, 하나님께서 약속을 보증하셨던 이 길갈이 아모스 선지자 시대에 어떠한 일들이 벌어졌습니까 과거에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받았으나 이제는 쓸모 없는 길갈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떠나신 길갈, 하나님 없는 길갈, 웅장한 도시를 이루며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큰 도시가 되었으나 실상이 없이 서 있는 허수아비와 같이 되었습니다. 벼를 다벤 후의 논에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는 실로 초라하고 허무하게 보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는 예배와 형식은 웅장한 음악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하여도 종교의 껍질만 남아 있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허무한 곳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며 세례도 받았습니다. 직분도 받았습니다. 봉사도 합니다. 성도와 친교도 합니다.
그리고 좋고 웅장한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임재 하시지 않는 교회라면,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교회라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헌물들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우리 한국 교회의 건물이 크고 웅장하여, 사람은 많아도 만약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교회가 되어 버린다면 폭발적으로 부흥하며 성장하는 제2의 예루살렘이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이름만 가지고서 성전의 웅장함만 가지고서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교회는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찬미의 제사는 무슨 소용이 있으며, 하나님이 임재 하시지 않는 기도는 아무리 간절하고 길게 호소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없이 그냥 이름만 가지고 사는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았고 엄청난 축복과 함께 약속의 백성이 되었지만 하나님이 나를 떠나시고 내 속에 하나님이 없이 이름만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해서 그 하나님은 이미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고, 인본주의로 변해 버린다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화가 미치는 곳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향하여 그의 집을 향하여 기대하는 바가 있는데, 그 기대가 무너지고 마음은 마치 불꺼진 창이 되고 식어 버린 화로처럼 되어 버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심령에 성령님의 불을 붙여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같은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뜨거움이 넘쳐서 나가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더 나아가 우리 한국 교회가 성령님에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의 종들이 뜨거움에 사로잡혀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강단에 뜨거운 메시지가 선포되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나, 기관마다, 가정과 개인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아모스 선자자와 같이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불붙는 심령을 지체할 수 없어서 나가 외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찬2562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두워진 세상 중에 외치는 자 많건마는 생명수는 말랐어라 죄를 대속하신 주님 선한 일꾼 찾으시나 대답 할이 어디 있나 믿는 자여 어이할꼬)
3) 브엘세바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5:5) 브엘세바는 어떤 곳일까요 브엘세바는 남쪽 유다에 있는 세 번째 종교 도시로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위대한 세 족장들과 연관 있는 장소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은 곳이 브엘세바입니다.(창21:31) 아비멜렉과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브엘세바는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한 곳입니다.(창21:32) 아브라함이 브엘세바에서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던 곳입니다.(창21:33) 이삭은 이 브엘세바에서 자손이 번창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습니다(창26:23). 이삭의 아들 야곱이 애굽으로 가던 도중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약속을 받은 곳이기도 합니다(창46:3). 이처럼 하나님이 임재하신 브엘세바, 브엘세바에 사는 선민들과 함께 하신 하나님,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고 정결한 양심으로 살면서 오직 믿음을 지켜 오게 한 거룩한 땅 브엘세바, 브엘세바는 분명히 축복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모스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배신에 대해 경고하면서 브엘세바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악이 북쪽 이스라엘에서 남쪽 유다에까지 퍼져 나갔는데, 특히 브엘세바에 까지 죄로 물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쪽 유다의 브엘세바까지 여행을 하면서 그곳에도 허황된 종교를 퍼뜨리고 잘못된 신앙을 보여줌으로 깨끗하고 정결한 땅 브엘세바까지 망하게 하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북쪽의 더러운 심령이 남쪽의 유대인들까지 더럽게 전염시켜 버렸습니다. 그렇게나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그렇게 위대한 소망을 가졌으며, 하나님이 영원토록 동행해 주시겠다고 하던 그 이스라엘이 다른 곳이 아닌 약속을 받은 브엘세바에까지 와서 저주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집인 벧엘은 실패의 자리가 되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고 하시던 약속의 땅 길갈과 브엘세바는 허무한 도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처녀 이스라엘은 넘어지고 다시 회복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선민이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성도라면 이와 같은 죄악의 물결이 밀려온다고 하여도 말씀에 바로 서서 전염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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