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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죽음 (삼하12:15-23)

본문

우리가 지난 주에 말씀을 통해서 범죄의 결과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지난 주 말씀을 통해서 범죄의 결과가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리고 범죄의 결과가 어떤가를 상고하였습니다. 범죄의 결과로 우리 인생에 찾아왔던 것이,
첫째는 아픔과 고통과 근심과 걱정이라는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인생이 범죄를 할 때마다 그 범죄는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는 것 같고 유익을 주는 것 같지만, 범죄를 저지르고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인생에 찾아오는 것은 괴로움과 고통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둘째, 범죄함으로써, 불순종함으로써 유익을 얻을 줄로 생각하지만, 불순종하면서 얻은 것들은 오래가지 못하고 다 잃어버린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돈을 버는 것,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면서 출세하는 것은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 되고 말며, 또한 내가 그것들을 빼앗기고 만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마지막으로 범죄의 결과의 가장 비극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교통의 단절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범죄하고 나면 주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마음에 깊이 그것이 세겨지지를 않습니다. 기도를 하려고 무릎을 꿇어도 기도가 되지를 않습니다. 범죄의 결과의 가장 비극적인 것은 하나님 앞에 찬양이 나오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범죄의 결과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입니다. 그로 인해 원통과 슬픔이 나의 마음을 짓누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범죄의 결과를 당하는 다윗의 모습을 봤습니다. 일년 동안 회개하지 않던 그가 얼마나 뼈가 아픈 고통을 당했는지를 시편 11편에서 다시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해서 한 여자를 취해서 얻은 아이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봅니다. 그가 범죄했던 일년 동안 당하는 환란과 기근보다도 오히려 더 비참했던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다윗의 모습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지난 주에 말씀 드렸던 것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범죄하고 불순종하는 것이 순간적으로 유익이 되는 것 같고 순간적으로는 기쁨이 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비극으로 끝을 낸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회개함으로 하나님과의 사이에 막혔던 담을 허물고 하나님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지난 주에 잠깐 살펴봤습니다.
오늘은 본문 가운데 한 구절을 살펴보려 합니다. 18절 말씀에 보면,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구절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한번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레만에 그 아이가 죽으니라.” 다윗이 범죄한 결과로 난 이 아이,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난 이 아이는 이름도 없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이름을 지을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출생한 지 이레만에 그는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태어난 지 이레만에 죽었는지, 아니면 아픈 시점부터 이레만에 죽었는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태어나자 마자 하나님이 치셔서 아파서 그렇게 된 것 같지는 않아요. 그러나 일단 출생하고 나단 선지자가 나타나고 그 다음 다윗이 회개하고, 그런 시간들이 있고난 다음에, 나단이 회개를 촉구하고 돌아간 다음에, 나단이 선포하고난 다음에, 선지자가 막 뒤돌아선 순간에 하나님이 치셨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에, 어떻든 이 아이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짧으면 칠일 길면 보름 정도일 것입니다. 이름도 없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볼 때 이 아이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죄 때문에 죽은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아이는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누가 죽어야 될 죄였습니까 다윗이 죽어야 될 죄였는데 이 아이가 죽었습니다. 이 아이가 죄의 씨는 아닙니다. 뭐하고 같으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면서 돈을 번다 합시다. 돈이 나쁜 것입니까 불순종한 자체가 나쁜 겁니까 돈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이니까 돈도 주신 겁니다. 돈도 물질이 아닙니까 그게 나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물질 축복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축복 중의 하나가 물질 축복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은 악한 게 아니에요. 뭐가 악한 겁니까 그 물질 때문에 불순종한 마음이 악한 거지요. 그래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하셨잖아요 오늘 중요한 것은 누구 때문에가 아니라, 나 때문에 내 심령상태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거라고 생각됩니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아이 자체가 죄의 결과가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보면 억울하게 죽은 겁니다. 그렇죠 이 아이는 죄를 짓지 않았어요. 원죄야 있지만 여기서 사건을 통해서 보면 실질적으로 죽을만한 죄는 다윗이 지은 죄 아닙니까
그런데 이 아이가 죽었습니다. 우리가 이 아이의 죽음을 통해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 아이는 인생으로 태어나서 칠일만에 혹 보름만에 죽었는데, 그럴 때에 이 아이의 인생은 무슨 가치가 있는가 말입니다. 이 아이는 정말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의 모습의 가치를 가지고 살다가 죽었는가 이 년 전에 제가 마음 아픈 일을 한번 당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다가 서울로 이사가신 두 부부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 집
둘째 아들의 백일인가 돌인가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갔어요. 토요일이었는데 가서 예배를 드리고 왔어요. 주일 날 아침에 전화가 왔어요. 그 남자 집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토요일 날 가서 뵙지 못했거든요. “목사님, 접니다.” 그러기에, “아, 어제 가서 못 뵈었는데, 축하합니다.” 그랬더니 목소리가 심각해져서는, “목사님, 우리 큰 애가 죽었습니다.” 그러잖겠어요 깜짝 놀라서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더니, 잔치 한다고 거실에 있던 소파를 베란다에 내 놨는데 이 아이가 베란다에 내 놓은 그 소파에서 깡충깡충 뛰어 놀다가 베란다 방충망 쪽으로 넘어지면서 떨어져 죽었다는 겁니다. 고층 아파트에서 떨어져 죽었어요. 동생 잔칫날 이 아이는 죽었어요. 그 부모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제가 가서 함께 기도드리고 예배 드리는데, 그 부인 집사님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해요. “목사님, 저는 왜 이 아이를 하나님이 불러갔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아요. 이 아이를 왜 동생 잔칫날 불러가셔야 되는지 저는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그렇게 천진난만하고 그렇게 활발하고 그렇게 신앙생활 열심히 한 아이를 하나님은 왜 데려 가시는지 전 이해가 안 돼요.”
저도 할 말이 없었어요. 발인하는 날입니다. 발인하는 날인데, 화장터로 가는 날인데 그 집사님은 몸져 누웠습니다. 일어나지를 못합니다. 누워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 아이가 왜 죽어야 합니까 죄가 있으면 제가 있지, 왜 이 아이가 죽어야 합니까” 이 아이가 도대체 왜 죽어야만 하는가 그때 제가 이런 말씀을 들려 줬어요. “우리에게 하나님은 화초를 주셨습니다. 화단에 화초가 있는데 어떤 화초는 심은 지 한달만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씨를 맺습니다. 어떤 화초는 심은 지 3개월이 지나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씨를 맺는 화초가 있고, 어느 것은 1년이 지나야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화초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 아이가 인생의 삶을 다하지 못하고 죽은 것 같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이 아이는 열매를 맺었기에 자기 인생의 삶을 다했기에 하나님께서 부르신 게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심각한 것은, 우리가 60년, 70년, 80년 살아가면서도 아직도 하나님 앞에서 열매 맺지 못하고 산다면, 그러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 부끄러운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야기를 들려 줬습니다. 오늘 이 아이의 삶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은 다시 한번 인생의 진리를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 됩니다. 우리는 말합니다. “이 아이가 더 살 텐데, 아깝게도 벌써 죽었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인생의 삶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연 뭐라고 말씀하시겠는가 여러분은 30년, 40년, 50년, 60년을 살았습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삶을 가치 있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목적 대로 삶을 지혜로 감당하고 우리 인생에 열매를 맺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면서 저주하신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 나무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에 들어가시다 시장하셔서 무화과 나무를 발견하고 그 앞으로 가신 뒤 열매를 따려고 했을 때, 그 무화과 나무의 잎파리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저주를 하니까 그대로 말라버렸습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신앙을 저주하심을 그 사건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여러 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 여러 가지 비유 가운데 가장 유명한 비유 하나가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그 이야기 다 아시죠 어느 마을에 부자가 있습니다. 이 부자는 많은 재물이 있습니다. 그 마을의 고관입니다. 그 마을에 형제가 많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9절에 보면 이 부자는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또 형제들과 아주 행복하게 삽니다. 날마다 대접을 받고 좋은 데 앉습니다. 고관이고 부자입니다. 건강해요. 날마다 잔치를 베풀고 있어요.
그런데 그 집 대문간에 거지 나사로가 살고 있습니다. 이 나사로라고 하는 사람은 거지입니다. 형제도 없습니다. 친척도 없습니다. 부모도 없습니다. 몸에는 헌데를 앓으며 기왓장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습니다. 개들이 핥습니다. 그저 부자집에서 떨어진 찌꺼기나 겨우 먹고 목숨을 부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거지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그저 거적때기 하나 걸치고 있는 것을 둘둘 말아서 갖다가 매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 날 이 거지 나사로는 죽자 누구의 품에 안겼다고 그랬습니까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랬습니다. 부자도 얼마 있지 않아 죽었습니다. 온 동네가 떠들석하게 장례를 치릅니다. 고관들이 와서 조문을 합니다. 그의 장례는 화려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 어디에 가 있습니까 지옥에 가 있지요. 그의 시신이 지상에서 난리를 펴고 있는 그 시간에 그 영혼은 지옥불에 들어가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가 이 사건을 보며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이레만에 죽은 이 아이가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다윗이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고, 하나님의 뜻을 분간해야 하는 다윗이 이 사건을 통해서 바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이 아이를 치심으로 인해 다윗은 자신을 채찍질 하고 하나님 앞에 가서 무릎을 꿇는 삶을 회복하게 됩니다. 이 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다윗이라는 한 인간, 한 나라의 왕, 하나님의 종 다윗은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 받습니다. 저는 이 아이가 이레 동안 고통을 다하고 죽었지만 그 어떠한 사람보다 큰 일을, 큰 사명을 감당하고 하나님 앞에 간 영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한 영혼을 구하는 것도 큰 일인데, 한 국가를 다스리는 왕을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일을 감당했다는 것은, 이것은 참으로 큰 사명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아이를 불쌍하게 죽었고 이레 밖에 살지 못하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처럼 보지만, 이 아이야말로 하나님 앞에 참으로 귀한 사명을 감당한 사람인 것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잘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참으로 큰 복입니다.
그런데 부자는 그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는 반면, 거지는 ‘나사로’라고 분명히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 부자의 이름은 평가할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거지의 이름 나사로는 가치가 있다고 보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진정한 평가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부자가 존경을 받고 대접을 받습니다. 출세를 해야 하고 권세를 잡아야 사람들이 무릎을 꿇습니다. 세상에서 판단할 때 거지 나사로는 실패했으며, 그 인생은 불쌍하고 보잘 것 없고, 또 그는 무시 당할만한 사람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존귀한 자였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요. 그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는 이 기록은 그가 참으로 존귀한 자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요. 비록 그는 세상 가운데서 출세하지 못했고, 세상이 보면 그는 부자가 아니고, 또 병들었던 사람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무시를 당하고 어린아이나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존귀하게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부자는 출세를 했고, 부자이며, 건강하고 친구도 많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이름조차 거명되지 못할 정도로 그 존재가 가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평가하는 것 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인생에 점수를 매긴다면 부자는 몇 점을 매길 수 있겠습니까 거의 만점 인생입니다. 그렇죠 세상적으로 보면 건강하지요, 자식들 많지요, 형제들 많지요, 고관이지요, 뭐 만점 짜리이지요.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몇 점입니까 병들었어요, 개가 와서 헌데를 핥고, 몸은 기왓장으로 긁고 있어요. 형제도 없고, 친척도 없습니다. 낮에는 문에 떨어진 찌꺼기나 주어 먹고 생명을 연장 시키고 있습니다. 인생에 점수를 매기면 몇 점일까요 몇 점 되겠어요 사람은 생명 그 자체로 존귀한 것 아닙니까 그러니 나사로도 한 50점은 받는다고 봅시다. 이건 그래도 생명의 존귀함을 깨달은 성도이니까, 줄 수 있는 점수이지요. 단돈 몇 만원에 사람을 죽이는 그런 사람에게는 웃기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보십시오. 그 두 사람이 죽고 나서는 점수가 어떻게 바뀝니까 그 부자는 즐거운 순간도 한 순간으로 끝납니다. 죽고 나서는 지옥불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합니다.
거기는 점수를 줄 수 있는 요소가 하나도 없는 곳이에요.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몇 점 짜리로 바뀌어 있을까요 거기서는 99점도 없어요. 거기는 완전 무결합니다. 백점 만점입니다. 죽고난 다음에는 그 점수가 완전히 바뀌지요. 누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인생에 점수를 어떻게 매기고 있습니까 여러분, 자꾸만 재산적인 것 가치적인 것만 따지지 마십시오. 그것처럼 미련한 인생은 없어요. 사도 바울은 고백하기를 내가 전에 자랑하던 것을 이제는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습니다. 건강, 명예, 모든 것은 다 썩어져 가고 있다고 했어요. 오늘 우리가 인생을 평가할 때에 그 기준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그러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저와 여러분,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언젠가는 다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갔을 때, 그때의 점수가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주님께서 달란트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 내용을 여러분은 다 알고 있습니다. 종이 3명 있습니다. 주인이 길을 떠나며 그 종들에게 돈을 주되, 한 명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그 다음 종에게는 두 달란트, 그리고 마지막 한 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기고 떠납니다. 이 종들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열심히 일합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다섯 달란트 가지고 열심히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 가지고 또 열심히 일해서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아이고, 우리 주인이 어떤 주인인데, 이것 가지고 장사하다 망하면, 본전도 못하면,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내가 얼마나 혼날지 몰라.” 하고 생각하고는 이 한 달란트를 항아리에 잘 넣어서 땅 속에 깊이 묻어 두었다가 주인이 돌아올 때 이 종은 그것을 꺼내어 그대로 한 달란트 갖다 드리며 하는 말이,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님이 나에게 맡기고 간 한 달란트 그대로 여기 있습니다.” 두 달란트 받은 종은 무어라 말합니까 “주인님이 주신 두 달란트 가지고 두 달란트 남겨서 모두 네 달란트가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다섯 달란트 받은 종도 똑같이 “다섯 달란트를 가지고 다섯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열 달란트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럴 때 주인이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고 나무랍니다. 그때 주인이 뭐라고 말합니까 “그럴 바에는 내가 그 돈을 네게 맡기지 않고 차라리 이자를 놓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 그 달란트 비유는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재능,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들, 그런 것들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히브리서 6장 7절에 보면,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의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와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은사를 귀하게 여기고, 또한 그것으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축복이 있지만,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엉겅퀴와 가시를 내며는 저주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인생을 평가하는 기준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오래 사는 것이 복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사명 감당하지 못하고 오래 살다 가면 하나님 앞에 죄만 더 짓고 가는 거에요. 하나님 앞에 설 때, 심판대 앞에 설 때, 이 땅에서 십년을 살았건 백년을 살았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인생이 어떻게 살았느냐, 무엇을 위해서 살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니냔 말이에요. 성경에 보면 장수는 축복이라고 그랬습니까, 저주라 그랬습니까 축복이라고 그랬습니다. 장수하는 건 축복이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장수가 축복이다 하면서 꼭 붙는 말이 있어요. 그냥 무조건 장수한다 그러질 않습니다. 그렇죠 장수라는 말과 함께 무엇이 따릅니까 평강. 평강이 따릅니다. 평안한 마음이 따른단 말입니다. 병들어 가지고 날마다 고통 가운데 20년 30년 더 살면, 그것이 축복입니까, 저주입니까 그것은 축복이 아닙니다. 기준이 바로 서야지요. 오늘 우리는 부자를 세상적으로는 출세했고 부자고 건강하고, 그래서 그를 성공했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비록 거지처럼 살다 가더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가면, 그 인생은 성공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건강과 재능과 물질, 이것들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살다가 가는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서 그 분에게 이익을 남겨 드리는가에 따라서 인생의 축복과 저주가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태복음 25장 31절에 보면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오는데, 거기 나타나는 사람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무슨 이갸기를 하느냐 하면,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주를 섬기며 살았습니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을 양과 염소로 나눠 놓습니다. 그리고는 염소들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한 자들아” 그럽니다. 주님께서 그 양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내가 굶주릴 때, 내가 목마를 때, 내가 옥에 갇혔을 때, 내가 병들었을 때, 너희가 나를 돌봤다.” 그랬습니다. 그러자 소수의 양무리가 “언제 제가 주님을 그렇게 대한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께 그렇게 해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주변에 있는 적은 소자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다.” 여러분 보세요. 그 판단 기준이 다르죠 오늘 우리는 누구의 이름으로 삶을 삽니까 주님이 마태복음에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사람마다 집을 짓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집을 짓죠. 그러나 집을 잘 지었는지 못 지었는지는 심판 날 주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돼지 삼 형제 이야기 아시죠 돼지 삼 형제가 집을 짓죠. 큰형은 뭐라고 말하면서 집을 짓습니까 그렇게 힘들여서 집을 지을 필요가 있느냐 하고 짚으로 짓고,
둘째는 나무로, 그리고 세째는 벽돌로 집을 짓습니다. 어느 것으로 집을 짓는 것이 가장 어렵습니까 벽돌로 짓는 것이 어렵죠. 형들이 동생에게 뭐라고 합니까 “이 미련한 돼지야, 그렇게 힘들게 고생해서 집을 지을 필요가 뭐 있느냐 인생을 그렇게 어렵게 살지 말아라. 인생은 그렇게 사는 게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그런데 어느날 늑대가 와요. 돼지들을 다 잡아 먹으러 오자, 큰형은 집에 숨지만, 늑대가 입김으로 불어버리자 짚으로 만든 집은 무너져버립니다. 큰형은
둘째네로 도망을 가지만 늑대에게 또 당하고, 그래서 세째네로 피신을 합니다. 세째네의 벽돌집으로 숨은 돼지 형제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 교회에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렇게 단순한 것을 잊고 살아요. 하나님 말씀 대로 직장생활 하고 하나님 말씀 대로 살려면 사실 어렵고 망하기도 해요.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인생 너 혼자 사냐 너 혼자 독불장군이냐 너 혼자 뭐 그렇게 올바르게 살고, 의롭게 한다고 세상이 알아주냐 통하냐 너만 망할 뿐이다.” 아니에요. 비록 망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여러분을 칭찬하실 겁니다. “착하고 충성된 자들아, 네가 잘하였다.” 그러실 거에요. “사랑하는 자들아, 네가 세상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정말 수고가 많았다.” 그 날을 바라보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한 번은 죽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인생은 다 마지막 날 그 심판대 앞에 가서 서면, 우리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까지도 그 앞에서 감추지 못하고 다 드러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나 다 은밀하게 지은 죄까지 다 드러납니다. 오늘 이 아이는 이레만에 죽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 아이는 불쌍합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기의 사명을 다하고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은 사명을 다하고 죽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았나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명을 잘 감당하고 사는가 아니면 자기 딴엔 열심히 인정 받으며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한 점도 받을 수 없는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생각해봐야 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지의 판단은 세상의 판단과는 기준이 다릅니다. 여러분은 어느 기준에 인생의 촛점을 맞추시겠습니까 오직 주님이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될 겁니다. 예수도 33세에 그의 인생을 끝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복음 전도 사역을 하면서 제일 먼저 순교를 당했습니다. 세례 요한도 30대 초반에 죽었습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인생을 짧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모세는 120세까지 살 동안 눈이 쇠하지 않고 끝까지 주의 일을 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런 사도도 있고 이런 사도도 있습니다. 80세까지 살면서 사명 감당하지 못하고 가면 그 인생은 빈약한 인생이 되고, 짧은 생을 살다 가도 사명을 감당하고 갔다면 그 인생은 풍성한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아이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삶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가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인생을 정리하여야 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인정 받는 삶,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겠다는 것을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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