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배하는 다윗 (삼하12:20-25)
본문
지난 주에는 밧세바와 다윗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죽은 그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 그리고 또한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될 때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될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다윗의 모습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며, 또한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시려는 일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다윗은 선지자를 통해서 자기의 죄를 지적 받습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죄의 결과로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가 죽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한 그 아이가 죽을 것만을 말하지 않고, “네가 칼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너의 잡안에는 칼이 계속 나타날 것이고, 네가 남의 아내를 간음했기 때문에 너의 부인들도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겁탈을 당할 것이다.”라고 엄청난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거기에 반항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합니다. 자기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눈물로 회개를 합니다. 시편에 보면 그가 자기의 침상을 눈물로 적셨다고 고백을 합니다. 이렇게 회개하는 다윗을 향해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언을 하시기를 “너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나단 선지자가 돌아가고난 후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아이가 죽게 됩니다. 고통을 당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보고 다윗은 하나님 앞에 간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식을 했다고 기록했고 자기 방에 들어가 밤새도록 땅에 엎드려서 기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와도 만나지도 않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처절할 정도입니다. 금식을 하면서 밤새도록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그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때 하나님께서 채찍질 하실 때 사랑의 권면을 하실 때,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 다윗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방법을 동원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심약하여 졌을 때 의사를 동원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앓는 것은 자기의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 의학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어느 때는 사람을 동원하여, 어느 때는 물질을 동원하여, 또 어느 때는 주위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곤고하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요, 또한 그것이 바른 정답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은 슬픔을 당합니다. 그 슬픔은 자기의 죄악의 결과임을 그는 깨닫고 있습니다. 그에게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의 결과로 그 슬픔과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좌절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해 채찍을 드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악과 채찍은 우리가 좌절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 때문에 그 결과가 온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죄는 다시 회복시킬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야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미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미 아이를 낳았습니다. 어느 것 하나 돌이킬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빼앗았다면 돈을 갚아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지금 다윗이 범한 죄는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 없는 죄입니다.
그리고 그 돌이킬 수 없는 죄 때문에 이 재앙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럴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기 쉽습니까 자포자기에 빠지기가 쉽지요.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반응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가 이제 고백을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은혜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그 앞에 나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 가면서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죄악의 문제를 안고 있을 때, 우리는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헛된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죄악의 문제를 가지고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 가지고 나갈 죄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죄악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죄만은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수가 없다. 이 죄만은 내가 용서 받을 수 없겠다. 도저히 용납될 수가 없겠다.” 그러나 다윗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입니다. 왕인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충신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정적이라서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아내를 빼앗기 위해서 죽였습니다. 그것은 용서 받을래야 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인간적으로 봐서 말입니다. 가장 파렴치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죄악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실을 오늘 다윗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는 못 가지고 나올 죄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지 아니하시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범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죄악도 이미 그 분이 다 감당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그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며 나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슬픔과 고통이 찾아올 때, 그때는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기를 원하시는 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초청장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고통이 없으면 기도하질 않습니다 . 누구를 막론하고 다 그래요. 고통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아요. 급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고통이 없으면, 급하지 않으면, 기도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에서 고백하기를 “고통으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와 법도를 깨달았나이다”라고 합니다.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슬픔이 닥쳐 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고통이 찾아올 때에 그 고통과 슬픔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께선 우리에게 목적이 있으십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참 미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쩔수 없는 인간의 한계라고도 고백을 합니다. 어려울 때 기도를 열심히 하잖아요 답답하고 괴로울 땐 기도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조금씩 성장해 가게 되면, 그때 보면 전부 다 옛날의 모습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한 면을 주의하십시오.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랬어요.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결론이 아닙니다. 지금이 성장해 가는 과정의 단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겐 계속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제는 됐다.”라고 생각하다가는 큰일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지경에까지 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전에도 하나님을 잘 찾았습니까, 못 찾았습니까 예, 잘 찾았지요. 하나님을 믿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편하기만 바래요. 왕으로 앉아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나라의 기강을 잡았습니다. 남북으로 나뉜 이스라엘이 이제 다윗왕에 의해 하나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세력이 다 없어졌습니다. 주변 국가들도 다 점령을 했고, 이제 마지막 한 나라도 곧 점령하기 일보 직전까지 왔습니다. 이젠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능히 점령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반이 완전히 다져졌습니다. 다윗의 실패는 바로 거기서 찾아오지 않습니까 전쟁터에 있어야 할 다윗이 전쟁터에 있지 아니 하고, 기도해야 할 때에 기도하지 않는 다윗. 편안해 지고 싶어 기도하지 않은 때에, 그때 사탄의 역사가 찾아오지 않습니까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궁궐에서 늦잠 자고 있다가 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고 간음을 합니다. 여러분, 지금 보는 본문에 나타난 이 고통이 다윗이 꼭 당해야만 할 고통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고통이 꼭 당해야만 할 고통이냐 이 말입니다. 이 고통은 당할수록 좋은 고통입니까 안 당할수록 좋은 고통입니까 지금 다윗은 고통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까, 찾지 않습니까 찾지요. 그러니까 우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야! 이런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냐” 아니에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고, 그렇다고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느냐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착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다윗이 지금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지만, 그 앞에 보면 일정 세월 동안 기도생활을 하였습니까, 못 하였습니까 못 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노력한다는 것은 사실은 퇴보이지요. 밧세바와의 관계라는 이 과정은 없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입니다. 없었으면 차라리 나았어요.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왕이면 죄악이 없고 죄인이란 고통을 안 당하고 그 고통 때문에 다시한번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인지라 이렇게 다윗처럼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 인간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할 수도 있고, 그와 같은 실패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갔을지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무릎을 꿇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서 이 자리에는 안 가시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한 가지 더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고하는 이 기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생명이 그 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이 그 분에 의해서 주관되고 있고, 그 분에 의해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오늘 다윗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이 아이가 사경을 헤매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에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우리가 새벽부터 늦게까지 열심히 뛰며 수고함으로 얻는 그 떡이 헛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삶은 그 분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시편 118편에서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그렇고,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정의 자녀들도 여러분들이 잘해서 훌륭한 자녀가 배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실 때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시편 기자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하겠다.” 반드시 여호와를 의지하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가면서 자꾸만 착각을 합니다. 누가 이 자리에 나서주면 성공할 수가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전문가가, 어떠한 사업가가 나를 도와주면 내가 풀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잘하면 훌륭한 자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을 하십시오. 이 인생의 모든 주권이 사람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 쓰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이 죽음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있습니까 오늘도 그러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함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에게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에게 의지하십시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방패를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잡은 사람, 재력을 가진 사람을 의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추구하고 얻어본들 오늘 밤에 하나님이 내 영혼을 불러 가신다면 다 무엇이 되겠느냐 말입니다. 오늘도 그런 마음이 있어야 돼요. 무엇인가를 추구하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아니 됩니다. 내가 잊어버린다고 하나님이 안 계십니까 그 분이 어떤 분이시냐 말입니다 그 분이 치시매 건강도 하루 아침에 없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 분은 오늘도 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십니다. 세상에는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이 치시매 의사들도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는 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제 주변에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본인은 아픈데 병원에 가면 병명이 없어요. 발견이 되질 않아요. 하나님이 치시면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조그만 흙덩이에 지나질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건강과 우리의 재능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그 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분 앞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에서도 가정생활에서도 곤고함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힘이 드시지요. 그러나 그때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다.” 다윗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권을 인정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이 아이가 죽고난 다음에 다윗의 모습은 가볍게 털어버리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털고 일어나서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경배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바르게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자기의 바람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결정에 따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의 소원은 이 아이가 사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일 주일 동안 금식하며 엎드려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그 분이 결정하시는 대로 된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 반대의 결과 앞에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이 본문 말씀은 우리가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인정해야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그 분 앞에 감사하십시오. 그 분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에요. 그 분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유태길 집사님,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죠 옆에 계시는 분이 유 집사님보다도 유 집사님을 더 사랑해요 안 그렇죠 이게 정답이에요. 사람은요,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해요. 엄밀하게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내 옆의 사람.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아마 상대적일 겁니다. 우리 다솜이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고 딴 남자를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겠어요 상대적인 거에요. 사람은 자기 위주로 사랑을 한다구요. 그렇죠 내가 먼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을 때 사랑하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는데 무조건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니까 사랑하는 거에요. 자기가 싫은데도 사랑하는 사람 봤어요 김 집사님, 싫은데 결혼했어요 뭔가 이 남자는 딴 남자보다 낫다 하니까 사랑하지요. 그렇죠 우리 냉정하게 이야기해 보자구요. 인간의 사랑은 그런 거에요.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제일 사랑하는 거에요.
그런데 유 집사님, 유 집사님은 부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날 사랑하니까 부인을 위해서 일을 하죠
그런데 부인을 위해서 일을 할 때 한계가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막 죽기까지 일을 할 순 없죠 그러나 주님은 유 집사님을 위해서 죽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랑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성숙해 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하는 대로 내가 따라와 주질 않습니다. 그럴 때에는 내 자신이 미워지기도 하지요. 이렇게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그 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이사야서에서 고백한 것 같이 우리는 토기장이의 작품에 지나질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들어 놓은 그릇에 지나질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 들어 깨뜨려버려도 우리는 아야 소리도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참 겁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런 하나님 같으면 나 안 믿습니다.” 별 소릴 다하지만, 우리는 토기장이 앞에 놓인 하나의 그릇에 지나질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들고 나서 마음에 안 들어 깨뜨려버리면 깨지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밖에 안 되는 거에요. 이 가운데 “나는 강합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 있으면 나와 봐요.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하고 정면으로 부딪쳤는데도 끄떡없는 분 있어요 인생은 별 것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혈압만 조금 조정해 주셔도 “어어” 하고 가는 거에요. 누구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해야 돼요. 그 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돼요. 그러나 그 분은 아름다운 분입니다. 그 분은 주권이 있다고 폭력적으로 위압적으로 우리에게 행사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의 주권은 사랑의 주권입니다. 우리에게 그 분이 주권을 행사하시되 사랑으로 행사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그 분 앞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시는 그 분 앞에, 나는 생각지도 않은 것을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게 주시기 위하여 내 생각과는 다르게 문제를 해결하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원망은 맙시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셔야 되는 거에요. “아버지 생각이 내 생각보다 낫지. 아버지께서 내 생각보다 더 좋게 해 주실 거야. 지금은 내가 철이 없어 잘 모르지만 좀 지나고 나면 아버지 생각이 이해되겠지.” 우리의 자세는 이래야 되질 않습니까 다윗이 아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 앞에 경배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내 생각보다 나으며, 또한 그 아이가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하고 내게 더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 가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맡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그 분 앞에 아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의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그 분은 오늘도 우리를 세우고 계십니다. 세상의 부모가 우리를 더 위하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악한 부모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면 돌을 줄 자가 없고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자가 없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 보냐.” 오늘도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또한 그 주권을 폭력적으로 위압적으로 우리에게 행사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그 분 앞에 겸손히 경배할 수 있는 은혜가, 또한 마음에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만에 하나라도 여러분 마음 속에 불평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일에 순종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생각과 다른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 분 앞에 감사합시다. 그 분이 결단코 우리에게 나쁜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좋은 것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으로 우리는 그 주권을 인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짓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진노하실 때에 다윗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슬픔과 고통이 찾아올 때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 분 앞에 우리의 문제를 맡깁시다. 그 분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 분의 주권 앞에 먼저 순종하십시오. 그러나 그 분의 주권은 사랑의 주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소원과 상관 없이 내 생각과 상관 없이 결과가 나왔을 때에도 우리는 그 분의 주권을 높입시다. 유익을 주시기 위하여 이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시면서 감사하며 그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을 때 그 뜻이 내 생각과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와도 만나지도 않고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습은 어떻게 보면 처절할 정도입니다. 금식을 하면서 밤새도록 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그 자세를 흩뜨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때 하나님께서 채찍질 하실 때 사랑의 권면을 하실 때, 우리가 어떤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오늘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때 다윗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방법을 동원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심약하여 졌을 때 의사를 동원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아이가 앓는 것은 자기의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 의학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죄악의 자리에서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서, 어느 때는 사람을 동원하여, 어느 때는 물질을 동원하여, 또 어느 때는 주위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곤고하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우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때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요, 또한 그것이 바른 정답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윗은 슬픔을 당합니다. 그 슬픔은 자기의 죄악의 결과임을 그는 깨닫고 있습니다. 그에게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는 자기의 죄악의 결과로 그 슬픔과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서 좌절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기 위해 채찍을 드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죄악과 채찍은 우리가 좌절해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죄 때문에 그 결과가 온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죄는 다시 회복시킬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이미 우리야를 죽여 버렸습니다. 이미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이미 아이를 낳았습니다. 어느 것 하나 돌이킬 수 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습니다. 돈을 빼앗았다면 돈을 갚아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이지만 지금 다윗이 범한 죄는 돌이킬래야 돌이킬 수 없는 죄입니다.
그리고 그 돌이킬 수 없는 죄 때문에 이 재앙이 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말씀이지요. 그럴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갖기 쉽습니까 자포자기에 빠지기가 쉽지요. 포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있습니까 나는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반응이 나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그가 이제 고백을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시면 은혜를 베풀어 주시리라는 것을 기대하면서 그 앞에 나아갑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 가면서 인간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어떤 죄악의 문제를 안고 있을 때, 우리는 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헛된 노력을 할 것이 아니라, 그 죄악의 문제를 가지고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 앞에 가지고 나갈 죄들이 있습니까 우리는 죄악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죄만은 주님 앞에 가지고 나아갈 수가 없다. 이 죄만은 내가 용서 받을 수 없겠다. 도저히 용납될 수가 없겠다.” 그러나 다윗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 용납될 수 없는 죄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한 나라의 왕입니다. 왕인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는 충신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정적이라서 죽인 것이 아니라 그 아내를 빼앗기 위해서 죽였습니다. 그것은 용서 받을래야 받을 수 없는 죄악입니다.
인간적으로 봐서 말입니다. 가장 파렴치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죄악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서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사실을 오늘 다윗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여러분, 주님 앞에는 못 가지고 나올 죄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용서하지 아니하시는 죄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범할 수 있는 그 어떠한 죄악도 이미 그 분이 다 감당하셨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 그의 은혜와 긍휼을 바라며 나가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그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슬픔과 고통이 찾아올 때, 그때는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기도를 하기를 원하시는 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의 초청장을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고통이 없으면 기도하질 않습니다 . 누구를 막론하고 다 그래요. 고통이 없으면 기도하지 않아요. 급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한번 말씀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고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고통이 없으면, 급하지 않으면, 기도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십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에서 고백하기를 “고통으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와 법도를 깨달았나이다”라고 합니다.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하나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고통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슬픔이 닥쳐 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고통이 찾아올 때에 그 고통과 슬픔을 우리에게 보내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분께선 우리에게 목적이 있으십니다. 저는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가 참 미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쩔수 없는 인간의 한계라고도 고백을 합니다. 어려울 때 기도를 열심히 하잖아요 답답하고 괴로울 땐 기도를 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조금씩 성장해 가게 되면, 그때 보면 전부 다 옛날의 모습을 잃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한 면을 주의하십시오.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그랬어요. 그리고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결론이 아닙니다. 지금이 성장해 가는 과정의 단계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겐 계속적인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계속해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제는 됐다.”라고 생각하다가는 큰일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지경에까지 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 전에도 하나님을 잘 찾았습니까, 못 찾았습니까 예, 잘 찾았지요. 하나님을 믿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편하기만 바래요. 왕으로 앉아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나라의 기강을 잡았습니다. 남북으로 나뉜 이스라엘이 이제 다윗왕에 의해 하나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대적하는 세력이 다 없어졌습니다. 주변 국가들도 다 점령을 했고, 이제 마지막 한 나라도 곧 점령하기 일보 직전까지 왔습니다. 이젠 자기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능히 점령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반이 완전히 다져졌습니다. 다윗의 실패는 바로 거기서 찾아오지 않습니까 전쟁터에 있어야 할 다윗이 전쟁터에 있지 아니 하고, 기도해야 할 때에 기도하지 않는 다윗. 편안해 지고 싶어 기도하지 않은 때에, 그때 사탄의 역사가 찾아오지 않습니까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궁궐에서 늦잠 자고 있다가 한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고 간음을 합니다. 여러분, 지금 보는 본문에 나타난 이 고통이 다윗이 꼭 당해야만 할 고통이겠습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고통이 꼭 당해야만 할 고통이냐 이 말입니다. 이 고통은 당할수록 좋은 고통입니까 안 당할수록 좋은 고통입니까 지금 다윗은 고통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을 찾습니까, 찾지 않습니까 찾지요. 그러니까 우린 이런 생각을 합니다. “야! 이런일을 통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냐” 아니에요.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합니까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있다고, 그렇다고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느냐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착각을 하시면 안 됩니다. 다윗이 지금 다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게 되지만, 그 앞에 보면 일정 세월 동안 기도생활을 하였습니까, 못 하였습니까 못 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노력한다는 것은 사실은 퇴보이지요. 밧세바와의 관계라는 이 과정은 없었더라면 차라리 좋았을 것입니다. 없었으면 차라리 나았어요.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이왕이면 죄악이 없고 죄인이란 고통을 안 당하고 그 고통 때문에 다시한번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인지라 이렇게 다윗처럼 실패할 수가 있습니다. 정말 우리 인간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죄를 범할 수도 있고, 그와 같은 실패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갔을지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와 같은 고통을 당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이 무릎을 꿇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용서하시고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에 앞서서 이 자리에는 안 가시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 본문을 통해서 한 가지 더 기억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고하는 이 기도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오늘도 저와 여러분의 생명이 그 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삶이 그 분에 의해서 주관되고 있고, 그 분에 의해서 역사되고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까 오늘 다윗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이 아이가 사경을 헤매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주권자임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시편 127편에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우리가 새벽부터 늦게까지 열심히 뛰며 수고함으로 얻는 그 떡이 헛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삶은 그 분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것이 능력입니다. 시편 118편에서는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직장에서도 그렇고, 여러분의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가정의 자녀들도 여러분들이 잘해서 훌륭한 자녀가 배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편이 되어 주실 때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서 시편 기자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내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하겠다.” 반드시 여호와를 의지하겠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가면서 자꾸만 착각을 합니다. 누가 이 자리에 나서주면 성공할 수가 있으리라 생각을 합니다. 전문가가, 어떠한 사업가가 나를 도와주면 내가 풀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잘하면 훌륭한 자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을 하십시오. 이 인생의 모든 주권이 사람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 쓰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이 죽음에 대한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있습니까 오늘도 그러한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함을 믿습니까
그렇다면 그 분에게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에게 의지하십시오.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방패를 의지하는 것보다 낫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의 권력을 잡은 사람, 재력을 가진 사람을 의뢰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더 낫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이 믿어집니까 우리가 아무리 무엇을 추구하고 얻어본들 오늘 밤에 하나님이 내 영혼을 불러 가신다면 다 무엇이 되겠느냐 말입니다. 오늘도 그런 마음이 있어야 돼요. 무엇인가를 추구하다가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아니 됩니다. 내가 잊어버린다고 하나님이 안 계십니까 그 분이 어떤 분이시냐 말입니다 그 분이 치시매 건강도 하루 아침에 없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 분은 오늘도 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십니다. 세상에는 우리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하나님이 치시매 의사들도 원인을 발견하지 못하는 병이 생긴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제 주변에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본인은 아픈데 병원에 가면 병명이 없어요. 발견이 되질 않아요. 하나님이 치시면 아무 것도 아닌 겁니다. 조그만 흙덩이에 지나질 않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건강과 우리의 재능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그 분이 바로 나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인식하여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분 앞에 서야 합니다. 여러분의 직장생활에서도 가정생활에서도 곤고함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힘이 드시지요. 그러나 그때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내 편이시다.” 다윗은 주권자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권을 인정하는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이 아이가 죽고난 다음에 다윗의 모습은 가볍게 털어버리는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아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털고 일어나서는 하나님 앞에 나가서 경배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바르게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자기의 바람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결정에 따르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바른 모습인 것입니다. 자기의 소원은 이 아이가 사는 것이었지요. 그러니까 일 주일 동안 금식하며 엎드려서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도를 들어주시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아이는 죽었습니다. 그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그 분이 결정하시는 대로 된다는 사실을 그는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정 반대의 결과 앞에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이 본문 말씀은 우리가 삶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을 어떻게 인정해야 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십시오. 그 분 앞에 감사하십시오. 그 분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에요. 그 분은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유태길 집사님,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이죠 옆에 계시는 분이 유 집사님보다도 유 집사님을 더 사랑해요 안 그렇죠 이게 정답이에요. 사람은요, 자기 자신을 제일 사랑해요. 엄밀하게 한번 이야기해 봅시다. 내 옆의 사람. 내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아마 상대적일 겁니다. 우리 다솜이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고 딴 남자를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겠어요 상대적인 거에요. 사람은 자기 위주로 사랑을 한다구요. 그렇죠 내가 먼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을 때 사랑하지, 사랑할 만한 가치가 없는데 무조건 사랑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니까 사랑하는 거에요. 자기가 싫은데도 사랑하는 사람 봤어요 김 집사님, 싫은데 결혼했어요 뭔가 이 남자는 딴 남자보다 낫다 하니까 사랑하지요. 그렇죠 우리 냉정하게 이야기해 보자구요. 인간의 사랑은 그런 거에요. 그래서 사람은 자기를 제일 사랑하는 거에요.
그런데 유 집사님, 유 집사님은 부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 날 사랑하니까 부인을 위해서 일을 하죠
그런데 부인을 위해서 일을 할 때 한계가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막 죽기까지 일을 할 순 없죠 그러나 주님은 유 집사님을 위해서 죽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남을 사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남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랑은 변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사랑에는 한계가 있어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성숙해 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하는 대로 내가 따라와 주질 않습니다. 그럴 때에는 내 자신이 미워지기도 하지요. 이렇게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시는 분이기에, 그 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이지요. 이사야서에서 고백한 것 같이 우리는 토기장이의 작품에 지나질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들어 놓은 그릇에 지나질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마음에 안 들어 깨뜨려버려도 우리는 아야 소리도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참 겁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럴 수 있습니까 그런 하나님 같으면 나 안 믿습니다.” 별 소릴 다하지만, 우리는 토기장이 앞에 놓인 하나의 그릇에 지나질 않습니다. 토기장이가 만들고 나서 마음에 안 들어 깨뜨려버리면 깨지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밖에 안 되는 거에요. 이 가운데 “나는 강합니다.”라고 생각하시는 분 있으면 나와 봐요.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하고 정면으로 부딪쳤는데도 끄떡없는 분 있어요 인생은 별 것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혈압만 조금 조정해 주셔도 “어어” 하고 가는 거에요. 누구라도 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해야 돼요. 그 분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돼요. 그러나 그 분은 아름다운 분입니다. 그 분은 주권이 있다고 폭력적으로 위압적으로 우리에게 행사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 분의 주권은 사랑의 주권입니다. 우리에게 그 분이 주권을 행사하시되 사랑으로 행사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은 우리에게 값없이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우리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그 분 앞에, 나보다 나를 더 잘 이해하시는 그 분 앞에, 나는 생각지도 않은 것을 더 주시기를 원하시는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게 주시기 위하여 내 생각과는 다르게 문제를 해결하시기도 합니다. 그럴 때에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고 원망은 맙시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셔야 되는 거에요. “아버지 생각이 내 생각보다 낫지. 아버지께서 내 생각보다 더 좋게 해 주실 거야. 지금은 내가 철이 없어 잘 모르지만 좀 지나고 나면 아버지 생각이 이해되겠지.” 우리의 자세는 이래야 되질 않습니까 다윗이 아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 앞에 경배합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내 생각보다 나으며, 또한 그 아이가 살아 있는 것보다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 합당하고 내게 더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이 살아 가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있을 때, 그 문제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맡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는 그 분 앞에 아뢸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의뢰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그 분은 오늘도 우리를 세우고 계십니다. 세상의 부모가 우리를 더 위하느냐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세상의 악한 부모라도 자식이 떡을 달라면 돌을 줄 자가 없고 생선을 달라면 뱀을 줄 자가 없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일까 보냐.” 오늘도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또한 그 주권을 폭력적으로 위압적으로 우리에게 행사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사랑의 주권을 행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그 분 앞에 겸손히 경배할 수 있는 은혜가, 또한 마음에 감사함으로 순종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만에 하나라도 여러분 마음 속에 불평이 없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일에 순종하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오늘도 그 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생각과 다른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 분 앞에 감사합시다. 그 분이 결단코 우리에게 나쁜 것은 주시지 않습니다. 좋은 것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 앞으로 우리는 그 주권을 인정하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짓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진노하실 때에 다윗은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슬픔과 고통이 찾아올 때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 분 앞에 우리의 문제를 맡깁시다. 그 분이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계심을 우리는 기억해야 됩니다. 그 분의 주권 앞에 먼저 순종하십시오. 그러나 그 분의 주권은 사랑의 주권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내 소원과 상관 없이 내 생각과 상관 없이 결과가 나왔을 때에도 우리는 그 분의 주권을 높입시다. 유익을 주시기 위하여 이길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시면서 감사하며 그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타났을 때 그 뜻이 내 생각과 다르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분 앞에 무릎을 꿇읍시다. 그것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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