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을 택하신 하나님 (삼하12:24-25)
본문
오늘은 지난 주에 이어서 이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치셨습니다. 끝내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난 아이를 치셔서 그 아이는 난 지 이레만에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그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고, 또 하나님에게 죄를 범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느냐에 대해서 뼈져리게 깨닫게 됩니다. 죄의 결과로 어둠이 찾아왔었고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이제 그가 하나님 앞에 담대히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고통과 상처에서 다시 회복되는 모습을 오늘 보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 사죄의 선물을 받은 다윗은 밧세바와 다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사이에서 난 아들이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많은 부인도 있었고 또 많은 아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불륜의 관계로 시작되고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밧세바를 통해서 난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물려받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만드셨는가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를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여디디야’라고 하나님께서 선언을 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 생각할 때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이 말씀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범죄한다 해도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사용하시는 하나님, 다시 말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우리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형제를 용서하곤 하지요. 그러나 사람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지간에 용서한다 해도 사람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는, 용서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용서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범죄 자체와 또한 나한테 잘못한 것으로 인한 아픔은 잊지 않고 기억을 하는 것이 인간의 용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온전한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한다고,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지만 그 아픔과 그 사람이 나한테 했던 잘못은 계속 기억을 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내가 그를 용서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용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어떤 용서냐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히 도말하는 용서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 죄악을 기억하지 않겠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너희 죄악을 내게서 멀리 보내고 기억하지 않겠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악을 도말했다고 하셨습니다. 도말했다는 말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버렸다 그 말이에요.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용서는 완전히 기억하지도 아니하고 완전히 없애버리는 용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밧세바라고 하는 여인과 다윗과의 관계는 불륜의 관계이지요. 그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이 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뿌리며 그 죄악을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이 과거에 이런 불륜의 관계였다는 것을 기억지 아니하시고 평상시와 똑같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고 합시다. 예를 들어서 목사인 제가 죄를 범죄했다고 합시다. 죄를 범한 다음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죄과를 공개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모두 다 용납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항상 내면적으로는 “나는 죄를 진 사람인데, 이런 심보가 있는 사람인데, 이런 과거가 있는 사람인데…” 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요. 동시에 여러분들도 “우리 목사님은 그 전에 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인데, 또 그런 실수가 생길지 모르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또 조금 문제가 발생하면, “역시 어쩔 수가 없구만. 우리 목사님은 원래 그런 분이야.”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 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인간이에요.
그런데 우리 주님의 용서는 한번 했다 선언하시면 기억하시질 않습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어떤 행위를 했던지간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른 사람과 똑같게 대해 주시고 그 불륜의 관계에서 난 아들도, 회개하기 전엔 쳐서 죽였지만, 그가 회개하고난 다음에 다시 얻은 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라고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더라 그 말입니다. 오늘 주님은 다시 말씀하시길 “사람은 외모로 취하지만 나는 외모를 보지 않는다. 나는 중심을 본다.” 그러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봅니다. 그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상처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마음 속을 보십니다. 그 마음 속이 깨끗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그 마음을 주님께선 기쁘게 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창기와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 시대에 매국노라 손가락질 받고 나라를 팔아먹었던 매국노였던 세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창녀의 친구가 되었다고 해서, 뭐 무조건 창녀들이 예수님의 친구라는 건 아니에요. 마음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주님을 사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창녀이고 그들이 비록 세리라 할지라도, 주님께선 그들을 찾아 주셨고 만나 주셨고 그들에게 사죄의 기쁨을 선물하셨습니다. 여러분, 삭개오를 아시지요 세리인 삭게오, 그는 부자였습니다. 왜 부자가 된 줄 아십니까 나라의 공록을 훔쳐 먹고 부자가 된 것입니다. 옛날로 말하면, 일제시대로 말하면 친일분자,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가지고 부자가 되었던 사람과 같은 겁니다. 삭개오가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는 주님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가 지나가면 손가락질을 합니다. 흉을 봅니다. 저 배신자, 매국노, 돈 밖에 모르는 수전노, 나쁜 놈, 천하에 쓸모 없는 놈, 별소릴 다해가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돌아섭니다. 그 마음 속에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돈 가지고 마음 대로 하겠다고, 돈 구하기 위해서는, 돈벌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안 가렸지만, 돈 모아 놓고 보니 그의 마음엔 공허함이 찾아왔어요. 그가 예수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 예수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어떻게 했지요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에겐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이에요. 완전히 따돌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길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가 지나갈 때 그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밑으로 지나가길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그 밑을 지나갔습니다. 삭개오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다가 말고 발을 멈추셨습니다. 고개 들어서 나무를 쳐다보면서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삭개오는 아마 기겁을 했을 겁니다. 자기의 이름을 아시는 예수, 한번도 만난 적도 꿈에도 본 적이 없는데, 지나가시면서 그 자리에 서셨고 쳐다보면서 “삭개오야, 내가 오늘 밤 너의 집에 유숙하리라.” 그러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비록 죄인이고 그들이 세상적으로 버림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오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예수는 우리의 외모를 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던지간에 그것은 불문에 붙이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범죄를 했고 어떠한 잘못을 했던지간에 그것이 주님 앞에 나오는 데 거침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그랬습니다. 사람을 택할 때, 다윗을 택할 때에도 외모를 취하지 않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로마서 2장 11절, 에베소서 1장 9절, 골로새서 3장 15절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은 바로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 너희가 나를 배반하고 과거에 나에게 무관심했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너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탕자가 아버지 앞에 돌아올 때,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이 아버지의 간섭이 싫다고 집을 나가서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린 것을 다 잊어 버리고 그 아들을 얼싸 안고 눈물로 맞이합니다. 오늘도 이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오늘 이 말씀과 동시에 기억하셔야 될 것은, 범죄한 자라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도 어떤 성도가 실패했을 때, 어떤 성도가 범죄했을 때 피차 용납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집사 끼리도, 목사와 성도들 간에도 범죄했을 때 피차 용납을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목사가 범죄했다, 장로가 범죄했다, 어떤 집사가 죄지었다 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감싸주고 덮어주고 그 형제를 권면해주고 격려해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눈총하고 비판하고 책망하고 그래서 그가 교회에서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버리지는 않습니까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도 이 자리에 와서는 마음 편해 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죄인을 찾고 계시는데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범죄한 밧세바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을 낳게 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내가 비록 하나님 앞에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여러분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실 적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거룩하고 보배로운 일꾼들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과거가 있으면, 전과가 있으면 세상에서는 제대로 대접 받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전과가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것이 결코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과거에 창녀였었다 할지라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일꾼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전에 오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는 강남 현대 아파트에 사는 일본인 현지처들이 몇 명 나오고 있었어요. 그냥 은혜 받기 위해서 나왔는데,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은혜를 받게 됐어요. 여러분, 교회 와서 졸더라도 와서 졸아야지 집에서 졸면 안 돼요. 집에서 졸면 은혜를 받을 수가 없어요. 주무시더라도 여기 와서 주무시면, 그저 주무시더라도 한 마디가 귀에 들어가도 들어가거든요. 그래야 은혜가 있거든요. 괜찮아요. 집에 있으면 뭘 합니까 텔레비전이나 보며 구벅꾸벅 졸다가 푹 쓰러져 주무시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그래도, 그냥 주무시라 해도 양심이 조금 걸려서, 그냥 발도 꼬집어 보고 허벅지도 꼬집어 보고 혓바닥도 깨물어 보고 몸도 비틀어 보고 그러면서 그냥 귀에 한마디씩 들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여인들이 아예 그룹으로 그 교회에 왔어요. 뭐 다섯 명인가 왔다고 그랬는데, 왔다 갔다 하더니 은혜를 받게 됐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깨닫게 됐어요. “아, 이것은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죄악이구나. 그것을 그들이 깨닫고 회개를 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그네들의 삶을 정리를 했습니다. 그들이 삶을 정리하기는 굉장히 어려웠다고 해요. 왜 그러냐
첫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요. 하루 아침에 자기들의 모든 수입을 딱 끊어 버리거든요. 굉장히 어려웠데요. 여러분들이 직장생활을 그만두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의를 위해서, 주님 말씀 대로 살기 위해서 ….간단하면서도 어렵지요. 고민도 하지요. 뭐 고민도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고민하던 이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 하고 회개하고 사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단언을 내리니까 하나님은 축복을 해요. 강도사님이 그들의 과거를 압니다. 아는데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새로운 삶을 사니까, “내가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하고는 결혼을 했어요. 두 사람이 사모가 됐어요. 여러분,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여러분이 자녀들을 키우다가 애들이 뭐 이렇게 싸 놓으면 그것을 치우다가 손에 묻을 수 있지요. 여자 집사님들, 손에 묻을 수 있어요, 없어요 애들 싸 놓은 것 닦아주다 보면 묻을 때가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달려가서 씻지요 씻고 나서 저녁에 음식을 만들어요, 안 만들어요 나물을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하지요 남자 집사님들, 애들 닦아주다 묻은 손 한번 씻고 그 다음에 그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해서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서 상에다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맛있게 드십니까, 아니면 안 드십니까 그것 맛있게 드십니까 여러분, 틀린 말입니까 따라서 하시길 바랍니다. 씻으면 뭐에요 아, 씻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아, 씻어 버리고서도 “이 손이 똥 묻었던 손인데, 이거 뭐 묻었던 손인데” 그러면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그거요, 비정상적이고, 병신이 하는 짓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도 마찬가지란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김을 받았는데, 그 다음에는 다시 기억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그거 붙잡고 “주님, 한 10년 전에 저 사람에게 죄를 졌는데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 전 잘못하였습니다. 여러번 죄를 지어서요, 저는 어딜 가도 되는 일이 없는 놈이에요.”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제발 좀 그러지 마세요. 오늘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을 낳고, 그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라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깊이 들려지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주시는 사랑은 범죄한 자라도 잊으시고 사용하시는 그러한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밧세바란 여인이 사용됐고 다말이란 여인이 사용됐고 기생 라합이 사용을 받았고 이방 여자인 롯이 사용을 받았던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도 주님께선 저와 여러분이 주님 앞에 온전히 회개하고 돌아섰을 때 저와 여러분을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보배로운 존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디디야’라고 주님께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선 그를 용서하시고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적극적인 사랑. 아마 저와 여러분 같으면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만약 제가 어떤 여자하고, 우리 다솜이 엄마 제껴 놓고, 어떤 그런 짓을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애를 하나 낳았어요. 그리고 그 애를 데려왔다고 합시다. 그 애는 누가 됐어요 목사님 아들이 됐지요 목사님 아들이 됐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 애를 볼 때마다 뭘 생각 하겠어요 “우리 임금님 귀 당나귀 귀”라는 말 같이,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생각이 나요. “우리 목사님 간음을 했어.” 그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물어보나 마나 뻔한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르다 그 말이에요. 그 분의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일방적인 사랑이요, 적극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 적극적인 사랑이 없었으면 우린 벌써 이미 발로 차였을 거에요. “야, 너 같은 것 필요없다. 내가 너한테 주는 은혜와 축복을 다른 사람한테 줬으면 아마 그는 나에게 너의 백 배는 더 감사했을 것이고 충성했을 게다.” 아마 그러셨을 것 같아요. 뺀질뺀질해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도 뺀질뺀질 “한번 생각을 해 봐야지요.” 저 같으면 그냥 딱 “얘라!”그래 버리겠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래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면 아예 얘기를 하지 않아요. 그 주님의 사랑 생각하면 내가 화가 나 죽겠어요. “하나님, 참는 것 적당히 하시고, 좀 어느 땐 따끔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말이 나오려다 말아요. 그 말은 내가 안 해요. 왜 했다간 따끔하게 성도가 맞아서 아프면 나만 손해이니까.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선 오늘도 우리에게 참으십니다. 참으로 성도라는 사람도 서로 비난하고 사람들을 책망하지만 주님은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면서 교훈을 주시는데, 어떤 교훈을 주시는가 하면,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값없이 준다. 조건 없이 준다.” 그랬습니다. 내가 이 만큼 했기 때문에 그 만큼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에베소서 2장 4절에 보면 “큰 사랑을 인하여”라 되어 있습니다. 왜 값없이 주신다고요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큰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임하시기 때문에, 너무나 그 사랑이 크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고 불순종하고 뺀들뺀들해도 다 참으시고 사랑을 주시는 겁니다. 만약 그 사랑이 쪼그만한 것 같으면 감당을 못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사랑은 너무나 큰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번 들이받고 한번 손가락질 하고 그래도 그 사랑은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 깨달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에게 오래 참으시고 일방적인 사랑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보면 “후히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실 때, 은혜를 주실 때 어떻게 주시느냐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신다고 했어요. 로마서 5장 16-18절에 보면 “넘치도록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을 많은 사람에게 넘치도록 베푸신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6장 8절에서는 은혜와 권능을 충만하게 주신다고 했으며, 시편 23편 5절에도 내 잔이 넘치도록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보면 그 은혜를 다양하게 주신다고 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을 낳으시고, 또 솔로몬을 사랑한다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과거를 묻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 언제든지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회개할 적에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과거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키는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용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넘치도록 아낌없이 조건없이 풍성하게 충만하게 값없이 주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밧세바에게 임했고 그 아들 솔로몬에게 임했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하나님에게 용서를 구하고 그 사죄의 선물을 받은 다윗은 밧세바와 다시 화목한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그 사이에서 난 아들이 우리가 잘 아는 솔로몬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습니다만,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많은 부인도 있었고 또 많은 아들도 있었지만 이렇게 불륜의 관계로 시작되고 심판의 대상이 되었던 밧세바를 통해서 난 아들이 이스라엘의 왕권을 물려받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만드셨는가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를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여디디야’라고 하나님께서 선언을 하고 계시는데, 이것은 우리 인간의 머리로 생각할 때에는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이 말씀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사랑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가 함께 말씀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범죄한다 해도 용서하시고 우리를 다시 사용하시는 하나님, 다시 말하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용서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은 우리 사람들에게도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형제를 용서하곤 하지요. 그러나 사람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지간에 용서한다 해도 사람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는, 용서한다고 이야기를 하고 용서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 범죄 자체와 또한 나한테 잘못한 것으로 인한 아픔은 잊지 않고 기억을 하는 것이 인간의 용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용서한다 하면서도 온전한 용서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용서한다고, 말로는 용서한다고 하지만 그 아픔과 그 사람이 나한테 했던 잘못은 계속 기억을 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내가 그를 용서해 주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용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는 어떤 용서냐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히 도말하는 용서라고 말씀했습니다. “내가 너희 죄악을 기억하지 않겠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너희 죄악을 내게서 멀리 보내고 기억하지 않겠다.” 그리고 로마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악을 도말했다고 하셨습니다. 도말했다는 말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불태워서 없애버렸다 그 말이에요. 오늘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용서는 완전히 기억하지도 아니하고 완전히 없애버리는 용서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생각할 때는 밧세바라고 하는 여인과 다윗과의 관계는 불륜의 관계이지요. 그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하나님이 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뿌리며 그 죄악을 회개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이 과거에 이런 불륜의 관계였다는 것을 기억지 아니하시고 평상시와 똑같게 사랑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고 합시다. 예를 들어서 목사인 제가 죄를 범죄했다고 합시다. 죄를 범한 다음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이제는 다시는 그러지 않겠노라고 죄과를 공개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모두 다 용납을 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항상 내면적으로는 “나는 죄를 진 사람인데, 이런 심보가 있는 사람인데, 이런 과거가 있는 사람인데…” 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살아요. 동시에 여러분들도 “우리 목사님은 그 전에 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인데, 또 그런 실수가 생길지 모르지.” 하는 생각을 가질 수 있고, 또 조금 문제가 발생하면, “역시 어쩔 수가 없구만. 우리 목사님은 원래 그런 분이야.” 하는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 하시겠습니까 그것이 우리 인간이에요.
그런데 우리 주님의 용서는 한번 했다 선언하시면 기억하시질 않습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어떤 행위를 했던지간에 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이켰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른 사람과 똑같게 대해 주시고 그 불륜의 관계에서 난 아들도, 회개하기 전엔 쳐서 죽였지만, 그가 회개하고난 다음에 다시 얻은 아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라”라고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더라 그 말입니다. 오늘 주님은 다시 말씀하시길 “사람은 외모로 취하지만 나는 외모를 보지 않는다. 나는 중심을 본다.” 그러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외모를 봅니다. 그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상처를 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마음 속을 보십니다. 그 마음 속이 깨끗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켰을 때 그 마음을 주님께선 기쁘게 보십니다. 그래서 그 분은 창기와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 시대에 매국노라 손가락질 받고 나라를 팔아먹었던 매국노였던 세리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창녀의 친구가 되었다고 해서, 뭐 무조건 창녀들이 예수님의 친구라는 건 아니에요. 마음 속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주님을 사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창녀이고 그들이 비록 세리라 할지라도, 주님께선 그들을 찾아 주셨고 만나 주셨고 그들에게 사죄의 기쁨을 선물하셨습니다. 여러분, 삭개오를 아시지요 세리인 삭게오, 그는 부자였습니다. 왜 부자가 된 줄 아십니까 나라의 공록을 훔쳐 먹고 부자가 된 것입니다. 옛날로 말하면, 일제시대로 말하면 친일분자,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가지고 부자가 되었던 사람과 같은 겁니다. 삭개오가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는 주님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들은 삭개오가 지나가면 손가락질을 합니다. 흉을 봅니다. 저 배신자, 매국노, 돈 밖에 모르는 수전노, 나쁜 놈, 천하에 쓸모 없는 놈, 별소릴 다해가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돌아섭니다. 그 마음 속에는 공허함이 있습니다. 돈 가지고 마음 대로 하겠다고, 돈 구하기 위해서는, 돈벌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안 가렸지만, 돈 모아 놓고 보니 그의 마음엔 공허함이 찾아왔어요. 그가 예수가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키가 작았던 삭개오. 예수 만나기 위해서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어떻게 했지요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에겐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이에요. 완전히 따돌림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는 길가에 있는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예수가 지나갈 때 그 예수님의 얼굴을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어서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밑으로 지나가길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이 그 밑을 지나갔습니다. 삭개오는 그 예수님의 모습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다가 말고 발을 멈추셨습니다. 고개 들어서 나무를 쳐다보면서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삭개오는 아마 기겁을 했을 겁니다. 자기의 이름을 아시는 예수, 한번도 만난 적도 꿈에도 본 적이 없는데, 지나가시면서 그 자리에 서셨고 쳐다보면서 “삭개오야, 내가 오늘 밤 너의 집에 유숙하리라.” 그러시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만나기를 사모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비록 죄인이고 그들이 세상적으로 버림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오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예수는 우리의 외모를 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떠한 삶을 살았던지간에 그것은 불문에 붙이십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생각을 했고 어떤 범죄를 했고 어떠한 잘못을 했던지간에 그것이 주님 앞에 나오는 데 거침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그랬습니다. 사람을 택할 때, 다윗을 택할 때에도 외모를 취하지 않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로마서 2장 11절, 에베소서 1장 9절, 골로새서 3장 15절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주시고자 하신 것은 바로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 “내가 너를 이렇게 사랑한다. 너희가 나를 배반하고 과거에 나에게 무관심했다 할지라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너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탕자가 아버지 앞에 돌아올 때,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이 아버지의 간섭이 싫다고 집을 나가서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린 것을 다 잊어 버리고 그 아들을 얼싸 안고 눈물로 맞이합니다. 오늘도 이 아버지와 같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오늘 이 말씀과 동시에 기억하셔야 될 것은, 범죄한 자라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도 어떤 성도가 실패했을 때, 어떤 성도가 범죄했을 때 피차 용납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집사 끼리도, 목사와 성도들 간에도 범죄했을 때 피차 용납을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목사가 범죄했다, 장로가 범죄했다, 어떤 집사가 죄지었다 할 때, 우리는 그것을 감싸주고 덮어주고 그 형제를 권면해주고 격려해주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것을 눈총하고 비판하고 책망하고 그래서 그가 교회에서 더 이상 발을 붙일 수 없어 교회를 떠날 수 밖에 없게 만들어 버리지는 않습니까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이 세상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사람도 이 자리에 와서는 마음 편해 하는 장소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죄인을 찾고 계시는데 우리는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범죄한 밧세바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왕을 낳게 하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길 바랍니다. 우리가 형제의 죄를 용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내가 비록 하나님 앞에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여러분들이 눈물로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실 적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죄를 용서하시고 여러분들을 하나님의 거룩하고 보배로운 일꾼들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과거가 있으면, 전과가 있으면 세상에서는 제대로 대접 받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전과가 문제될 게 없습니다. 그것이 결코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과거에 창녀였었다 할지라도 막달라 마리아처럼 그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일꾼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전에 오 목사님께서 목회하시던 교회에는 강남 현대 아파트에 사는 일본인 현지처들이 몇 명 나오고 있었어요. 그냥 은혜 받기 위해서 나왔는데,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은혜를 받게 됐어요. 여러분, 교회 와서 졸더라도 와서 졸아야지 집에서 졸면 안 돼요. 집에서 졸면 은혜를 받을 수가 없어요. 주무시더라도 여기 와서 주무시면, 그저 주무시더라도 한 마디가 귀에 들어가도 들어가거든요. 그래야 은혜가 있거든요. 괜찮아요. 집에 있으면 뭘 합니까 텔레비전이나 보며 구벅꾸벅 졸다가 푹 쓰러져 주무시는 것이지요. 여기서는 그래도, 그냥 주무시라 해도 양심이 조금 걸려서, 그냥 발도 꼬집어 보고 허벅지도 꼬집어 보고 혓바닥도 깨물어 보고 몸도 비틀어 보고 그러면서 그냥 귀에 한마디씩 들어가는 거에요. 그래서 이 여인들이 아예 그룹으로 그 교회에 왔어요. 뭐 다섯 명인가 왔다고 그랬는데, 왔다 갔다 하더니 은혜를 받게 됐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깨닫게 됐어요. “아, 이것은 정상적인 생활이 아니구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죄악이구나. 그것을 그들이 깨닫고 회개를 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그네들의 삶을 정리를 했습니다. 그들이 삶을 정리하기는 굉장히 어려웠다고 해요. 왜 그러냐
첫째는 경제적으로 어려웠지요. 하루 아침에 자기들의 모든 수입을 딱 끊어 버리거든요. 굉장히 어려웠데요. 여러분들이 직장생활을 그만두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니까요. 그러나 의를 위해서, 주님 말씀 대로 살기 위해서 ….간단하면서도 어렵지요. 고민도 하지요. 뭐 고민도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고민하던 이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구나 하고 회개하고 사표를 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 삶을 삽니다.
그런데 이들이 그렇게 단언을 내리니까 하나님은 축복을 해요. 강도사님이 그들의 과거를 압니다. 아는데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켜서 새로운 삶을 사니까, “내가 당신과 결혼하겠습니다.” 하고는 결혼을 했어요. 두 사람이 사모가 됐어요. 여러분, 그것이 뭐가 문제가 됩니까 여러분이 자녀들을 키우다가 애들이 뭐 이렇게 싸 놓으면 그것을 치우다가 손에 묻을 수 있지요. 여자 집사님들, 손에 묻을 수 있어요, 없어요 애들 싸 놓은 것 닦아주다 보면 묻을 때가 있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달려가서 씻지요 씻고 나서 저녁에 음식을 만들어요, 안 만들어요 나물을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하지요 남자 집사님들, 애들 닦아주다 묻은 손 한번 씻고 그 다음에 그 손으로 주물럭주물럭 해서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서 상에다 올려놓습니다. 그러면 맛있게 드십니까, 아니면 안 드십니까 그것 맛있게 드십니까 여러분, 틀린 말입니까 따라서 하시길 바랍니다. 씻으면 뭐에요 아, 씻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아, 씻어 버리고서도 “이 손이 똥 묻었던 손인데, 이거 뭐 묻었던 손인데” 그러면 먹을 수 있어요, 없어요 그거요, 비정상적이고, 병신이 하는 짓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도 마찬가지란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이 씻김을 받았는데, 그 다음에는 다시 기억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그거 붙잡고 “주님, 한 10년 전에 저 사람에게 죄를 졌는데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 전 잘못하였습니다. 여러번 죄를 지어서요, 저는 어딜 가도 되는 일이 없는 놈이에요.” 그러고 있으면 어떡하느냐 말입니다. 제발 좀 그러지 마세요. 오늘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을 낳고, 그 솔로몬에게 여디디야라고, 너는 내가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깊이 들려지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주시는 사랑은 범죄한 자라도 잊으시고 사용하시는 그러한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밧세바란 여인이 사용됐고 다말이란 여인이 사용됐고 기생 라합이 사용을 받았고 이방 여자인 롯이 사용을 받았던 사실을 여러분들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도 주님께선 저와 여러분이 주님 앞에 온전히 회개하고 돌아섰을 때 저와 여러분을 구별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보배로운 존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여디디야’라고 주님께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선 그를 용서하시고 사용하실 뿐만 아니라, “내가 그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적극적인 사랑. 아마 저와 여러분 같으면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만약 제가 어떤 여자하고, 우리 다솜이 엄마 제껴 놓고, 어떤 그런 짓을 했다고 합시다. 그래서 애를 하나 낳았어요. 그리고 그 애를 데려왔다고 합시다. 그 애는 누가 됐어요 목사님 아들이 됐지요 목사님 아들이 됐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그 애를 볼 때마다 뭘 생각 하겠어요 “우리 임금님 귀 당나귀 귀”라는 말 같이,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생각이 나요. “우리 목사님 간음을 했어.” 그 생각을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물어보나 마나 뻔한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는 다르다 그 말이에요. 그 분의 사랑은 무슨 사랑이냐 일방적인 사랑이요, 적극적인 사랑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으로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이 적극적인 사랑이 없었으면 우린 벌써 이미 발로 차였을 거에요. “야, 너 같은 것 필요없다. 내가 너한테 주는 은혜와 축복을 다른 사람한테 줬으면 아마 그는 나에게 너의 백 배는 더 감사했을 것이고 충성했을 게다.” 아마 그러셨을 것 같아요. 뺀질뺀질해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해도 뺀질뺀질 “한번 생각을 해 봐야지요.” 저 같으면 그냥 딱 “얘라!”그래 버리겠어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래도 반성의 기미가 보이면 아예 얘기를 하지 않아요. 그 주님의 사랑 생각하면 내가 화가 나 죽겠어요. “하나님, 참는 것 적당히 하시고, 좀 어느 땐 따끔하게 해 주십시오.” 하는 말이 나오려다 말아요. 그 말은 내가 안 해요. 왜 했다간 따끔하게 성도가 맞아서 아프면 나만 손해이니까.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주님께선 오늘도 우리에게 참으십니다. 참으로 성도라는 사람도 서로 비난하고 사람들을 책망하지만 주님은 그래도 사랑하십니다. 그러면서 교훈을 주시는데, 어떤 교훈을 주시는가 하면, 에베소서 2장에 보면, “값없이 준다. 조건 없이 준다.” 그랬습니다. 내가 이 만큼 했기 때문에 그 만큼 주는 하나님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에베소서 2장 4절에 보면 “큰 사랑을 인하여”라 되어 있습니다. 왜 값없이 주신다고요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큰 사랑을 가지고 우리에게 임하시기 때문에, 너무나 그 사랑이 크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고 불순종하고 뺀들뺀들해도 다 참으시고 사랑을 주시는 겁니다. 만약 그 사랑이 쪼그만한 것 같으면 감당을 못해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베푸시는 사랑은 너무나 큰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한번 들이받고 한번 손가락질 하고 그래도 그 사랑은 줄어들지를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 깨달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우리에게 오래 참으시고 일방적인 사랑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5절에 보면 “후히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주실 때, 은혜를 주실 때 어떻게 주시느냐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신다고 했어요. 로마서 5장 16-18절에 보면 “넘치도록 주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랑을 많은 사람에게 넘치도록 베푸신다는 겁니다. 사도행전 6장 8절에서는 은혜와 권능을 충만하게 주신다고 했으며, 시편 23편 5절에도 내 잔이 넘치도록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절에 보면 그 은혜를 다양하게 주신다고 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밧세바를 통해서 솔로몬을 낳으시고, 또 솔로몬을 사랑한다고 선언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바로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과거를 묻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 언제든지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회개할 적에 하나님께서는 과거를 묻지 아니하시고 과거를 생각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회개하고 돌이키는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사용하시는 주님이심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넘치도록 아낌없이 조건없이 풍성하게 충만하게 값없이 주시는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밧세바에게 임했고 그 아들 솔로몬에게 임했었던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풍성하게 임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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