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의 머리털 (삼하14:25-33)
본문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말씀 가운데 우리가 특별히 함께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압살롬의 모습입니다. 25절에 보면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과 같이 그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저는 발바닥에서 정수리 머리끝까지 흠이 없는 완벽한 모습의 매력적인 사람이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15장으로 넘어가서 보면 그가 반란을 일으킬 때에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5장 6절에 보면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의 모습은 정말 준수했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매력적인 사람이 또한 백성들의 마음까지도 빼앗을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절대권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방 모든 부족들로부터 구원했고 나라를 확장했던,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들 가운데 하나인 다윗왕조차도 그에게 쫓겨서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국민들의 마음이 완전히 압살롬에게 다 향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이 보더라도 차기 이스라엘의 왕은 압살롬이라고 단정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인간적으로는 완벽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 가운데 특별히 좀 관심있게 봐야 할 구절은 26절인 것 같아요. 26절에 보면 “그 머리털이 무거웠으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 달아본즉 200세겔이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기록하자면 이 세상에 둘 곳이 없을 정도여서 꼭 필요한 말씀만 성경에 써 두었다고 그러는데, 여기 보면, 압살롬의 머리털이 무겁다, 그 머리털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하는 이런 말들이 기록되어 있단 말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여러분, 이것이 왜 기록된 것 같습니까 압살롬, 그러면 매력적인 사나이!
그런데 그 매력 포인트가 어디냐 바로 머리에 있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는지, 그 해답이 뒤에 가면 나와요. 여러분들, 사무엘하 18장을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압살롬이 구테타를 일으켜서 성공을 합니다마는, 그러나 나중에 전세가 바뀌고 역적이 되어 도망을 가는 장면이 1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9절부터 한번 봅시다.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까 “압살롬이 다윗의 심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곳을 지나갈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 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렸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가니라” 여러분 그 압살롬이 마지막 죽게되는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죽게 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도망치다가, 노새를 타고 열심히 도망가다가, 머리가 어디에 걸려버립니까 나무가지에 걸려버려요. 번성한 나무가지에 걸려버리니까, 타고 있던 노새는 그냥 지나가 버리고 공중에 그냥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머리가 매달려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때에 요압이 와서 찔러서 죽여버려요. 여러분, 압살롬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왜 그렇게 앞에서 기록을 하고 있는가 하면요, 그것이 뒤에 가서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 압살롬이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매력 포인트가 머리에 있었다, 머리카락에 있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대강 감이 잡히시죠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그랬어요. 그 다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기 배를 신으로 삼는다 그랬어요.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기 배를 신으로 삼는다, 즉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는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학문적으로는 인본주의라고 표현합니다. 인본주의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보는 사상이지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사람, 바로 나 자신,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우월한 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시되고 내가 존중되는 그와 같은 사상이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더 심화된다고 그랬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압살롬의 모습이야말로 인본주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매력과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재능과 자기의 경험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오늘 현대인들의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압살롬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와 같은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여러 명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벨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는 인본주의의 최고봉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미쳐서 들판에서 짐승과 함께 풀을 뜯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고, 그 다음에 회복되고난 다음에 다시 구테타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이번에 후세인도 그것을 생각했지요. 바로 느브갓네살왕, 자기가 느브갓네살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로니아 대제국의 수도, 지금 이라크에서, 유브라데스 강에서 바벨론 제국이 발흥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패권을 잡는 느브갓네살왕이 바로 자기라고 착각을 했던 사람이 후세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셔야 될 것은 그것이 바로 후세인의 이야기도 아니고 느브갓네살왕의 이야기도 아니고 압살롬의 이야기만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과 서 있는 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이와 같은 인본주의의 모습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 있는가를 한번 조명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은 칭찬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으로 칭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준수한 미모와 그의 인격적인 매너와 통치술로 인해 그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그 위대한 다윗왕으로부터 자기에게로 향할 만큼 대인관계에 있어서 매력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담대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단력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형도 죽일 수 있었고 “내가 책임질테니 죽여라고” 말할 정도로 결단력도 있었습니다. 요즈음 현대인의 모습으로 보면 세상적으로 출세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현대를 살아가면서 저 같이 내성적인 사람은 출세 못해요. 그냥 말 한마디 하려다가도,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어떤 마음을 가질까 섭섭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되지.” 그러고 또 할 말도 참고 그냥 내 주장을 하려다가도 그저 그만두고 그러면, 요즈음 그렇게 살았다가는 출세는 다 틀린 거지요 그러면 오늘 압살롬의 모습이 왜 이렇게 기록되었는가를 통해서 오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나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그의 가장 매력 포인트였던 머리카락 때문에 죽습니다. 왜 그것을 기록하고 있을까 그냥 아름다웠다 하고 그 다음 장에 가서 죽었다 하면 끝나는 것 아닐까요 요압이 죽였다 하면 끝나는데, 유별나게 그걸 강조해요. 성경 어느 구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까 그것도 좋은 사람도 아니고 성경에 나쁜 사람으로 기록되는 압살롬이 머리카락이 참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것이 걸려서 죽었다, 하는 이런 구절이 성경 어디에 또 있습니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습니까 오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삶, 그것이 본인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번 성경을 찾아볼까요 오늘 많은 사람들은 지혜와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사실 그렇습니다. 못 배우면 성공 못합니다. 그래서 배워라, 배워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전도서를 한번 찾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전도서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이었던 솔로몬이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와 지식을 가장 많이 가졌던 솔로몬왕의 고백입니다. 전도서 1장 16절에서 18절을 함께 봉독해 보겠습니다.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죄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나의 마음이 지식과 지혜를 많이 만나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노라,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솔로몬왕이 이런 고백을 해요. “내 마음가운데 말하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다. 예루살렘에 나보다 전에 있던 어떤 지혜로운 왕보다도 내가 많은 지혜를 받았다. 그러나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여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했다.” 이게 재미난 표현입니다. 솔로몬왕이 보편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박학다식했어요. 학자들에 의하면 천문학 생물학 미생물학까지도 아주 박학했다고 그래요. 이런 솔로몬이 지혜를 더 탐구하다 보니까, 무엇까지 탐구를 해요 미친게 뭐냐, 그 다음 미련한 것이 뭐냐, 그런 것까지 알고자 했다 그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여러분, 보십시오.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다 보면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끝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끝이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다고 했습니까 헛되다고 했습니다. 지식을 탐구한다는 것이 헛되다는 말이 아니고, 솔로몬이 뒤에 가서 보충설명을 합니다마는,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헛된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 말이에요. 그것이 진정한 마음의 기쁨을 주지 못하더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식을 더하려고 했더니 번뇌가 많고, 지식을 더하니 근심이 더하더라. 그래서 연구하고 연구하다 보면요, 그것 연구하다가, 그것 염려 가운데 인생 살아가는 거에요. 인생의 진정한 낙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는 것도 미련한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솔로몬이 궁극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많은 지식을 가져 봤지만 하나님 앞에 서 보니까 그 지식이 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고백이지요.
제가 잘 아는 집사님이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어요. 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치고 지금 부산에서 교수로 있는데, 제가 그 집사님 만나면 그래요. “이 집사 알긴 뭘 알어 뭐 많이 알어 박사라고 그래 기껏 안다는 것이 현미경이나 통해서야 겨우 보이는 것 그것 아는 것 밖에 더 있어 그래 가지고 박사야” 나이가 같은 또래니, 친구 같이 그래요. 그렇잖아요 그 양반이 뭐 연구했는가 하면, 다시마의 세포를 추출해서 배양해 가지고 어떻게 품종을 개량하는 그런 연구를 했어요. 그게 더 발견되면 사람 염색체를 뽑아서 사람을 만들고 어떻게 한다고 그래서, “꿈 같은 소리 그만해. 그렇게 되기 전에 예수님 오시니까.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마.” 그랬어요. 걱정을 하더라구요. “목사님 이 추세로 몇 년만 지나면요 사람이 사람을 대량생산할 때가 옵니다.” 공장에서 그냥 대량생산한데요. 지금 식물 염색체 뽑아서 어떻게 대량생산하듯이 아주 우수한 사람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거에요. 앞으로 몇 년만 있으면 그렇게 된데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꿈 같은 소리 하지마. 가능한 이야기이지마는 그렇게 되기 전에 주님 오셔. 걱정하지 마.”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한 지가 벌써 10년이 지났어요.
그런데 아직도 없어요, 대량생산이. 전 그분한테 이야기해요, “알긴 뭘 알어. 기껏 안다는 것이 현미경 들여다 보고 보이는 다시마 세포 하나 아는 것 밖에 없잖아” 인간의 지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 구조 가운데 무엇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최고로 치지 않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최고로 생각해서 과학과 성경이 안 맞다고들 합니다. 따라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과학에 안 맞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성경을 아직 못 따라온 것이다.” 알겠습니까 과학은 계속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발전적으로 변하지요 성경은 계속 발전적으로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어떤 것이 진리입니까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식, 지식 하지 마십시오. 그 지식을 가지고, 지혜를 가지고, 세상의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함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너무나 교만해서 보잘것없는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질하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오늘 이것이 이방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의 이야기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지식을 숭배합니까 여러분들의 경험을 숭배합니까 여러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아는 게 뭐에요 죄송합니다.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말이에요. 욥기를 보십시오. 욥 앞에 나타난 하나님이 뭐라고 말을 합니까 “욥아, 악어의 꼬리가 왜 힘이 센지 너 아느냐” 하나님이 욥에게 물었어요. 욥이 자꾸만 “하나님 나는 의로운데 나는 죄진 게 없는데 왜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내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번하였습니다.” 하며 마구원망을 하니까,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욥아, 악어의 꼬리가 왜 센지 아느냐” “몰라요.” “그러면 가만히 있어라.” 가장 쉬운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것.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뭐 그렇게 말이 많으냐 그 말이에요. 좀 잠잠하라 그 말이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자랑하고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교만합니까 세상의 짧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얼마나 대적하고 삽니까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 지식 때문에 망한다는 소식이 들릴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지식을 의지하는 것 뿐만 아니라, 부요를 의지합니다. 물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전도서 2장을 계속 보십시오. 전도서 2장 4절부터 11절까지 크게 한번 읽어봅시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세우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 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이 고백하기를 자기는 많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안 해본 것이 없다고 그랬어요. 사업도 크게 해봤고, 별장도 가져봤고, 목장도 가져봤고, 과수원도 가져봤고, 또 그 다음에 많은 종들을 두어봤고, 그 다음에는 많은 여자를 거느려봤다 그랬어요. 그것 때문에 솔로몬왕은 망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번성함과 그 많이 가져본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다 헛된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계속 5장을 넘어가 보세요.
전도서 5장 10절, 11절, 12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이 있다고 했어요, 없다고 했어요 풍부를 사랑하는 소득으로 만족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다, 그랬어요. 재산을 모으면 뭐도 더해져요 얻어먹는 자가 더 많아진다, 이거에요. 여러분, 가난하게 살때는요 친척도 여러분 찾아오지 않지요.
그런데 좀 산다 그러면 한번도 찾아오지 않던 사돈의 팔촌까지 다 찾아와서 손을 벌려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소유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을 주느냐 그러시는 겁니다. 재산을 많이 쌓으면 유익이 하나 있는데, 무슨 유익이지요 내 눈으로 보는 유익, 그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내가 보는 유익이라면, 어디 가면 돼요 그냥 보는 것으로 유익을 얻는다면 어딜 가면 돼요 은행 가면 되잖아요 은행 가서 가만히 보고 있다 오세요. 보는 유익 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미련한 인생인 우리는 집 한칸 더 마련해 보려고, 이것 저것 더 해보려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고,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것이 고작 그냥 그런 삶을 살라고 여러분들을 구원하셨겠어요 한번 생각을 해봐야지요. 그것이 자랑거리가 됩니까 여러분 눈으로 보는 것 외에는 유익이 없다 그랬어요. 전도서 2장으로 다시 넘어가 보겠습니다. 2장 20절부터 23절까지 한 목소리로 한번 읽어볼까요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러분, 보십시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좋은 모습입니다. 성도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돼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엿세 동안 열심히 일해야 된다고 했으니까, 힘써 일하셔야 돼요.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그것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이에요. 뭐라 그랬습니까 “해 아래에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이 실망케 되었도다.” 어떤 사람은 그의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이 누구에게로 돌아갔어요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돌아간다 했어요. 내가 실컷 재주를 써서 수고해서 얻은 것이 누구한테 갔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한테 갔다고 했어요. 인생은 내 마음 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서 시편 128편에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그랬어요. 복 가운데 하나가 뭐냐 내가 수고한 만큼 얻어서 먹는 것도 하나의 축복입니다. 그것도 큰 축복이에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일까지 빼먹어가며 실컷 일하였지만, 남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22절에 보니까,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냐 했더니, 인생에서 근심하며 수고한 것이 슬픔 뿐이다 그랬어요.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러분, 열심히 살아 가지고 무언가 얻으려는 사람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죽으라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하나님 없이 무엇을 얻어보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이 얻는 이익이 뭐라구요 수고한 이익이 뭐라구요 “근심하며 수고하는 슬픔 뿐이라.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이 헛되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자요, 내일 일 때문에. 아, 그것 어떻게 처리할까 그 사람 만나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것 어떻게 고비를 넘길까 인생 헛살지 마십시오. 그것이 헛수고라 했습니다. 6장을 한번 넘어가 보십시다. 6장 7절부터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사람의 힘이 수고해 봤자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는다. 여러분들 잘되면 잘되는 만큼 주변으로부터 시기를 받습니다. 모함을 받습니다. 그러면 잘못되라는 이야기인가 그게 아니지요. 수고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말라 그 말이에요.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지 못하고 진정한 낙을 주지 못합니다. 전도서 2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16절.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여러분,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세상의 부기와 명예는 별 것 아니라는 말이에요. 아무리 미련하게 살았든, 지혜롭게 살고 유명하게 살았든 간에 죽으면 그 이름이 잊혀지는 겁니다. 잊혀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출세해서 이름 남기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복을 받으면 돼요.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서 받는 복으로 세상에서 출세를 얻고, 사업의 성공을 얻고, 그 받는 복으로 여러분의 영광을 얻을 때 그것은 지속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나라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러한 것들을 얻어보았자, 그것은 결과적으로 잠시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는 거에요. 노력과 수고, 영광과 부요함, 지식과 지혜, 이러한 것들이 모두 다 헛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결론적으로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오늘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주님께서는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서 21절까지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깨끗한 그릇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어떤 집에 금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도 있다. 그러나 주인이 어떤 그릇을 쓰느냐 깨끗한 그릇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느니라.” 거기 보면 인생을 그릇으로 비유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금그릇 같은 사람이 있어요. 세상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금그릇처럼 참 존귀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은그릇 같고 어떤 사람은 질그릇 같고 어떤 사람은 나무그릇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그릇을 쓰시느냐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 쓰는 것이 아니라, 금그릇이라도 깨끗하면 쓰시는 거고, 질그릇이라도 깨끗하면 쓰신다 그랬어요. 오늘 인생의 성공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면서 성공적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인생이 어디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실 때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실 때, 그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쓰느냐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그랬어요. 준비된 사람.
고린도 후서 4장 7절에 보면 우리를 비교하시면서, 우리는 질그릇 같은 인생이라고 말씀하면서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았다 그랬어요. 오늘 저와 여러분은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마는 이 안에 누가 오셨어요 누가 오셨어요 학개서에 기록된 대로 말세에 보배가 임하신다 했는데, 만국에 보배가 임하신다고 했는데, 만국의 보배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오늘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만국의 보배이신 누가 와 있어요 주님이 와 계신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 인생의 참다운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질그릇에 있습니까, 그 안에 담겨진 보물에 있습니까 보물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 관심을 보여야 합니까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그 안에 담긴 보물에다 관심을 두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미련하게도 내 안에 임하신 보배로우신 주님에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질그릇 같은 깨어지기 쉽고 가치 없는 내 자신에 관심을 집중한단 말이에요. 누차 말씀 드립니다만 질그릇을 아무리 빛내고 광내봤자 소용없어요. 그것 땅하고 떨어뜨리면 깨져버려요. 여러분 인생에다가 여러분 삶에다가 아무리 치장을 해 보십시오. 명예로 치장해 보시고 학벌로 치장해 보시고 또 물질로 치장해 보세요.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요즈음에는 별일도 다 있어요. 금가루가 든 화장픔으로 치장을 해요. 돈도 쓸 데가 없지, 하나에 몇 만원 짜리 쓰구 발라봤자 늙으면 보기 흉해지는데, 치장을 한들 뭐합니까 여러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한 벌에 오십만원 육십만원 짜리 옷 걸쳐봤자 그것 때문에 뭐 얼마나 아름다워집니까 그것으로 여러분의 인격이 아름다워집니까 그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아름답게 살이 찝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백하기를 “내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지만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랬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정말 이 본문을 통해서 받아야 할 교훈이 뭡니까 오늘 우리가 지식과 지혜와 명예와 부귀와 명성과 수고함으로 무엇을 얻어서 나를 돋보이려고 하는, 성공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나 있지 않은지요 오늘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속사람 아닙니까 우리 안에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데, 그분이 어떻게든 영광스럽게 나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아무리 치장해 보십시오. 오늘 밤에라도 여러분의 영혼을 주님께서 부르시면 그 그릇은 깨어져 버리고 끝나는 겁니다. 박사면 뭐할 것이고, 재벌이면 뭐할 것입니까 오늘 밤 주님이 그 영혼 불러가면 끝인데. 우리 교회에는 재벌도 없으니까 통하지도 않는 이야기이지만, 재벌만 돈돈돈 하는 게 아니라 재벌 아닌 사람도 돈돈돈 하니까 그렇죠. 오늘 우리가 질그릇임을 깨닫습니까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가장 아름다운 삶이고 행복한 삶인가,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주님 앞에서 가장 복된 삶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치장하는 데 급급하지 맙시다. 오늘 내 안에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치장하십시오. 그 분을 돋보이게 하십시오. 그 분이 여러분의 지도자가 되게 하십시오. 내 마음에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진정으로 나의 삶의 주인이 되도록 모셔야만 합니다. 그 분을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여러분, 날마다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뭡니까 “아, 누구는 좋겠다, 빽이 좋아서.” 강성교회 온 사람 중에 빽 있는 사람 있어요 한번 손들어 봐요. 솔직히 말해 요즈음 빽 있으면 이 동네 삽니까 벌써 저쪽 동네 갔지. 우리는 빽 없어요. 그러나 빽 없다고 한탄하지 마세요. 여러분, 왜 인생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습니까 왜 압살롬처럼 자기 아름다움과 자기 재능과 자기 능력과 자기 방법 가지고 살다가 망할 삶을 삽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우리 인생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서시겠습니까 오늘 여러분 안에 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분 안에 여러분의 삶이 새롭게 조명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모십시오. 그 분을 여러분 앞에 내세우십시오. 그리하면 어떤 삶이 주어집니까 여러분, 시편 127편을 찾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시편 121편부터 먼저 봅시다.
시편 121편 한 목소리로 봉독합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127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러분, 우리 모두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 안에서 열심히 사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인본주의 사상에 물들어 내 지혜와 지식과 지능과 내 경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리석은 삶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시편 128편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시온에서 복을 주신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면 주의 전에 모여서 예배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범사에 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시간이 없으니까, 한 구절만 더 찾아보고 마치겠습니다. 잠언 21장을 찾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오늘 말씀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무엇을 예비했습니까 마병을 예비했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여호와께 달렸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면서 사업장과 직장에서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준비도 하셔야 되고 최선을 다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그 성패는 누구에게 달렸습니까 여호와께 달렸습니다. 시편 127편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이 끝나고 맙니다. 여호와께서 지켜 주시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수고와 지킴이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잠언 16장 1절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여러분, 마음의 계획을 여러분이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시고 안 이루시고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거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우리 자신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수고를 의지하며 살지 않기를 다시 한번 부탁 드리며, 동시에 우리 안에 와 계신 그 분을 앞세우고 그 분을 경외함으로써 그 분이 더하시는 축복 그 분이 인도하시는 축복 그 분이 책임지시는 축복을 여러분의 삶에서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번 한 주일 동안도 여러분이 주님을 앞세우심으로써 진정한 승리를 맛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15장 6절에 보면 “무릇 이스라엘 무리 중에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에게 압살롬의 행함이 이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도적질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의 모습은 정말 준수했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와 같은 매력적인 사람이 또한 백성들의 마음까지도 빼앗을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절대권력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방 모든 부족들로부터 구원했고 나라를 확장했던,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들 가운데 하나인 다윗왕조차도 그에게 쫓겨서 도망을 칠 수 밖에 없을 정도로 국민들의 마음이 완전히 압살롬에게 다 향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압이 보더라도 차기 이스라엘의 왕은 압살롬이라고 단정할 수 밖에 없을 만큼 인간적으로는 완벽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본문 가운데 특별히 좀 관심있게 봐야 할 구절은 26절인 것 같아요. 26절에 보면 “그 머리털이 무거웠으므로 연말마다 깎았으며 그 머리털을 깎을 때 달아본즉 200세겔이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기록하자면 이 세상에 둘 곳이 없을 정도여서 꼭 필요한 말씀만 성경에 써 두었다고 그러는데, 여기 보면, 압살롬의 머리털이 무겁다, 그 머리털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하는 이런 말들이 기록되어 있단 말입니다. 좀 이상하지 않아요 여러분, 이것이 왜 기록된 것 같습니까 압살롬, 그러면 매력적인 사나이!
그런데 그 매력 포인트가 어디냐 바로 머리에 있었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는지, 그 해답이 뒤에 가면 나와요. 여러분들, 사무엘하 18장을 살펴봐 주시기 바랍니다. 압살롬이 구테타를 일으켜서 성공을 합니다마는, 그러나 나중에 전세가 바뀌고 역적이 되어 도망을 가는 장면이 18장에 기록되어 있는데요, 9절부터 한번 봅시다.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까 “압살롬이 다윗의 심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곳을 지나갈 때에 압살롬의 머리털이 그 상수리 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렸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 나가니라” 여러분 그 압살롬이 마지막 죽게되는 원인이 어디 있습니까 죽게 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도망치다가, 노새를 타고 열심히 도망가다가, 머리가 어디에 걸려버립니까 나무가지에 걸려버려요. 번성한 나무가지에 걸려버리니까, 타고 있던 노새는 그냥 지나가 버리고 공중에 그냥 대롱대롱 매달려 있습니다. 머리가 매달려 헤어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때에 요압이 와서 찔러서 죽여버려요. 여러분, 압살롬의 머리카락에 대해서 왜 그렇게 앞에서 기록을 하고 있는가 하면요, 그것이 뒤에 가서 그의 죽음의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본문에 압살롬이 매력적인 사람이다, 그리고 그 매력 포인트가 머리에 있었다, 머리카락에 있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무엇인지 대강 감이 잡히시죠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내용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 그랬어요. 그 다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기 배를 신으로 삼는다 그랬어요.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자기 배를 신으로 삼는다, 즉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삼는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학문적으로는 인본주의라고 표현합니다. 인본주의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중요하게 보는 사상이지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존재가 사람, 바로 나 자신, 그래서 하나님보다 더 우월한 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시되고 내가 존중되는 그와 같은 사상이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더 심화된다고 그랬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압살롬의 모습이야말로 인본주의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의 매력과 자기의 능력과 자기의 재능과 자기의 경험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고자 하는 오늘 현대인들의 모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압살롬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와 같은 인본주의에 빠져 있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여러 명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바벨론의 왕이었던 느부갓네살입니다. 그는 인본주의의 최고봉의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종말은 미쳐서 들판에서 짐승과 함께 풀을 뜯는 비참한 지경에 빠졌고, 그 다음에 회복되고난 다음에 다시 구테타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도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이번에 후세인도 그것을 생각했지요. 바로 느브갓네살왕, 자기가 느브갓네살이라고 했습니다. 바벨로니아 대제국의 수도, 지금 이라크에서, 유브라데스 강에서 바벨론 제국이 발흥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패권을 잡는 느브갓네살왕이 바로 자기라고 착각을 했던 사람이 후세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기억하셔야 될 것은 그것이 바로 후세인의 이야기도 아니고 느브갓네살왕의 이야기도 아니고 압살롬의 이야기만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여러분과 서 있는 저, 우리 모두의 삶에서 이와 같은 인본주의의 모습들이 얼마나 많이 나타나고 있는가를 한번 조명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스라엘 가운데 압살롬은 칭찬을 받던 사람이었습니다. 무엇으로 칭찬을 받은 사람이었습니까 준수한 미모와 그의 인격적인 매너와 통치술로 인해 그는 칭찬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그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그 위대한 다윗왕으로부터 자기에게로 향할 만큼 대인관계에 있어서 매력적인 장점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담대함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단력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형도 죽일 수 있었고 “내가 책임질테니 죽여라고” 말할 정도로 결단력도 있었습니다. 요즈음 현대인의 모습으로 보면 세상적으로 출세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현대를 살아가면서 저 같이 내성적인 사람은 출세 못해요. 그냥 말 한마디 하려다가도, “내가 이렇게 말하면 상대방이 어떤 마음을 가질까 섭섭한 마음을 가지면 안 되지.” 그러고 또 할 말도 참고 그냥 내 주장을 하려다가도 그저 그만두고 그러면, 요즈음 그렇게 살았다가는 출세는 다 틀린 거지요 그러면 오늘 압살롬의 모습이 왜 이렇게 기록되었는가를 통해서 오늘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씀하려 하시나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자기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압살롬은 그의 가장 매력 포인트였던 머리카락 때문에 죽습니다. 왜 그것을 기록하고 있을까 그냥 아름다웠다 하고 그 다음 장에 가서 죽었다 하면 끝나는 것 아닐까요 요압이 죽였다 하면 끝나는데, 유별나게 그걸 강조해요. 성경 어느 구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까 그것도 좋은 사람도 아니고 성경에 나쁜 사람으로 기록되는 압살롬이 머리카락이 참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것이 걸려서 죽었다, 하는 이런 구절이 성경 어디에 또 있습니까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습니까 오늘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사는 삶, 그것이 본인 스스로를 멸망시키는 근거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번 성경을 찾아볼까요 오늘 많은 사람들은 지혜와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사실 그렇습니다. 못 배우면 성공 못합니다. 그래서 배워라, 배워라, 공부해라, 공부해라, 강조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는가 전도서를 한번 찾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전도서는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인류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왕이었던 솔로몬이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와 지식을 가장 많이 가졌던 솔로몬왕의 고백입니다. 전도서 1장 16절에서 18절을 함께 봉독해 보겠습니다. “내가 마음 가운데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큰 죄를 많이 얻었으므로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자보다 낫다 하였나니 곧 나의 마음이 지식과 지혜를 많이 만나보았음이로다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며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하여 마음을 썼으나 이것도 바람을 잡으려는 것인 줄을 깨달았노라, 지혜가 많으면 번뇌도 많으니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이게 무슨 말입니까 솔로몬왕이 이런 고백을 해요. “내 마음가운데 말하기를 내가 큰 지혜를 많이 얻었다. 예루살렘에 나보다 전에 있던 어떤 지혜로운 왕보다도 내가 많은 지혜를 받았다. 그러나 내가 다시 지혜를 알고자 하여 미친 것과 미련한 것을 알고자 했다.” 이게 재미난 표현입니다. 솔로몬왕이 보편적인 지식에 대해서는 박학다식했어요. 학자들에 의하면 천문학 생물학 미생물학까지도 아주 박학했다고 그래요. 이런 솔로몬이 지혜를 더 탐구하다 보니까, 무엇까지 탐구를 해요 미친게 뭐냐, 그 다음 미련한 것이 뭐냐, 그런 것까지 알고자 했다 그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요. 여러분, 보십시오.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다 보면 끝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끝이 없습니다. 죽을 때까지 끝이 없어요.
그런데 그것이 어떻다고 했습니까 헛되다고 했습니다. 지식을 탐구한다는 것이 헛되다는 말이 아니고, 솔로몬이 뒤에 가서 보충설명을 합니다마는, 지식을 탐구하는 것이 헛된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아니었다 그 말이에요. 그것이 진정한 마음의 기쁨을 주지 못하더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식을 더하려고 했더니 번뇌가 많고, 지식을 더하니 근심이 더하더라. 그래서 연구하고 연구하다 보면요, 그것 연구하다가, 그것 염려 가운데 인생 살아가는 거에요. 인생의 진정한 낙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혜와 지식을 의지하는 것도 미련한 것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솔로몬이 궁극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많은 지식을 가져 봤지만 하나님 앞에 서 보니까 그 지식이 다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고백이지요.
제가 잘 아는 집사님이 서울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어요. 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치고 지금 부산에서 교수로 있는데, 제가 그 집사님 만나면 그래요. “이 집사 알긴 뭘 알어 뭐 많이 알어 박사라고 그래 기껏 안다는 것이 현미경이나 통해서야 겨우 보이는 것 그것 아는 것 밖에 더 있어 그래 가지고 박사야” 나이가 같은 또래니, 친구 같이 그래요. 그렇잖아요 그 양반이 뭐 연구했는가 하면, 다시마의 세포를 추출해서 배양해 가지고 어떻게 품종을 개량하는 그런 연구를 했어요. 그게 더 발견되면 사람 염색체를 뽑아서 사람을 만들고 어떻게 한다고 그래서, “꿈 같은 소리 그만해. 그렇게 되기 전에 예수님 오시니까. 그런 것 가지고 고민하지마.” 그랬어요. 걱정을 하더라구요. “목사님 이 추세로 몇 년만 지나면요 사람이 사람을 대량생산할 때가 옵니다.” 공장에서 그냥 대량생산한데요. 지금 식물 염색체 뽑아서 어떻게 대량생산하듯이 아주 우수한 사람을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거에요. 앞으로 몇 년만 있으면 그렇게 된데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 “꿈 같은 소리 하지마. 가능한 이야기이지마는 그렇게 되기 전에 주님 오셔. 걱정하지 마.”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한 지가 벌써 10년이 지났어요.
그런데 아직도 없어요, 대량생산이. 전 그분한테 이야기해요, “알긴 뭘 알어. 기껏 안다는 것이 현미경 들여다 보고 보이는 다시마 세포 하나 아는 것 밖에 없잖아” 인간의 지식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나약한 것인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의식 구조 가운데 무엇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최고로 치지 않습니까 인간의 지혜와 지식을 최고로 생각해서 과학과 성경이 안 맞다고들 합니다. 따라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과학에 안 맞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성경을 아직 못 따라온 것이다.” 알겠습니까 과학은 계속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발전적으로 변하지요 성경은 계속 발전적으로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어떤 것이 진리입니까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지식, 지식 하지 마십시오. 그 지식을 가지고, 지혜를 가지고, 세상의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변함 없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 앞에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너무나 교만해서 보잘것없는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울질하며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오늘 이것이 이방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의 이야기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지식을 숭배합니까 여러분들의 경험을 숭배합니까 여러분의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불신앙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아는 게 뭐에요 죄송합니다.
여러분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그렇다는 말이에요. 욥기를 보십시오. 욥 앞에 나타난 하나님이 뭐라고 말을 합니까 “욥아, 악어의 꼬리가 왜 힘이 센지 너 아느냐” 하나님이 욥에게 물었어요. 욥이 자꾸만 “하나님 나는 의로운데 나는 죄진 게 없는데 왜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합니까 내가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번하였습니다.” 하며 마구원망을 하니까,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 “욥아, 악어의 꼬리가 왜 센지 아느냐” “몰라요.” “그러면 가만히 있어라.” 가장 쉬운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것. 하나님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 말이에요.
그런데 뭐 그렇게 말이 많으냐 그 말이에요. 좀 잠잠하라 그 말이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자랑하고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교만합니까 세상의 짧은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 앞에서 얼마나 대적하고 삽니까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무시하고 살고 있습니까 그 지식 때문에 망한다는 소식이 들릴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지식을 의지하는 것 뿐만 아니라, 부요를 의지합니다. 물질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전도서 2장을 계속 보십시오. 전도서 2장 4절부터 11절까지 크게 한번 읽어봅시다. “나의 사업을 크게 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여 집들을 지으며 포도원을 세우며 여러 동산과 과원을 만들고 그 가운데 각종 과목을 심었으며 수목을 기르는 삼림에 물주기 위하여 못을 팠으며 노비는 사기도 하였고 집에서 나게도 하였으며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소와 양떼의 소유를 많게 하였으며 은금과 왕들의 보배와 여러 도의 보배를 쌓고 또 노래하는 남녀와 인생들의 기뻐하는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노라 내가 이 같이 창성하여 나보다 먼저 예루살렘에 있던 모든 자보다 지나고 내 지혜도 내게 여전하여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솔로몬이 고백하기를 자기는 많은 기쁨을 얻기 위해서 안 해본 것이 없다고 그랬어요. 사업도 크게 해봤고, 별장도 가져봤고, 목장도 가져봤고, 과수원도 가져봤고, 또 그 다음에 많은 종들을 두어봤고, 그 다음에는 많은 여자를 거느려봤다 그랬어요. 그것 때문에 솔로몬왕은 망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는 그 모든 번성함과 그 많이 가져본 것들이 결과적으로는 다 헛된 것임을 절실히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진정한 즐거움을 주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계속 5장을 넘어가 보세요.
전도서 5장 10절, 11절, 12절까지 한 목소리로 읽어봅시다.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재산이 더하면 먹는 자도 더하나니 그 소유주가 눈으로 보는 외에 무엇이 유익하랴 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배부름으로 자지 못하느니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이 있다고 했어요, 없다고 했어요 풍부를 사랑하는 소득으로 만족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다, 그랬어요. 재산을 모으면 뭐도 더해져요 얻어먹는 자가 더 많아진다, 이거에요. 여러분, 가난하게 살때는요 친척도 여러분 찾아오지 않지요.
그런데 좀 산다 그러면 한번도 찾아오지 않던 사돈의 팔촌까지 다 찾아와서 손을 벌려요.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 소유가 눈으로 보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을 주느냐 그러시는 겁니다. 재산을 많이 쌓으면 유익이 하나 있는데, 무슨 유익이지요 내 눈으로 보는 유익, 그것 밖에 없다는 겁니다. 내가 보는 유익이라면, 어디 가면 돼요 그냥 보는 것으로 유익을 얻는다면 어딜 가면 돼요 은행 가면 되잖아요 은행 가서 가만히 보고 있다 오세요. 보는 유익 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런데 미련한 인생인 우리는 집 한칸 더 마련해 보려고, 이것 저것 더 해보려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인생의 아름다운 모습을 다 잊어버리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까지 여러분들을 사랑하셨고, 여러분들을 구원하신 것이 고작 그냥 그런 삶을 살라고 여러분들을 구원하셨겠어요 한번 생각을 해봐야지요. 그것이 자랑거리가 됩니까 여러분 눈으로 보는 것 외에는 유익이 없다 그랬어요. 전도서 2장으로 다시 넘어가 보겠습니다. 2장 20절부터 23절까지 한 목소리로 한번 읽어볼까요 “이러므로 내가 해 아래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으로 실망케 하였도다 어떤 사람은 그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을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업으로 끼치리니 이것도 헛된 것이라 큰 해로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 뿐이라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러분, 보십시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은 좋은 모습입니다. 성도는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객이 전도되어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 돼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엿세 동안 열심히 일해야 된다고 했으니까, 힘써 일하셔야 돼요. 그러나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고, 그것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 말이에요. 뭐라 그랬습니까 “해 아래에서 수고한 모든 수고에 대하여 도리어 마음이 실망케 되었도다.” 어떤 사람은 그의 지혜와 지식과 재주를 써서 수고하였어도 그 얻은 것이 누구에게로 돌아갔어요 수고하지 아니한 자에게 돌아간다 했어요. 내가 실컷 재주를 써서 수고해서 얻은 것이 누구한테 갔다고 했어요 다른 사람한테 갔다고 했어요. 인생은 내 마음 대로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그래서 시편 128편에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그랬어요. 복 가운데 하나가 뭐냐 내가 수고한 만큼 얻어서 먹는 것도 하나의 축복입니다. 그것도 큰 축복이에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주일까지 빼먹어가며 실컷 일하였지만, 남는 것이 뭐라고 했습니까 22절에 보니까, 사람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으로 소득이 무엇이냐 했더니, 인생에서 근심하며 수고한 것이 슬픔 뿐이다 그랬어요.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도 헛되도다.” 여러분, 열심히 살아 가지고 무언가 얻으려는 사람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죽으라고 열심히 사는 사람들, 하나님 없이 무엇을 얻어보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이 얻는 이익이 뭐라구요 수고한 이익이 뭐라구요 “근심하며 수고하는 슬픔 뿐이라. 밤에도 쉬지 못하니 이것이 헛되다.” 밤에 잠도 제대로 못자요, 내일 일 때문에. 아, 그것 어떻게 처리할까 그 사람 만나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그것 어떻게 고비를 넘길까 인생 헛살지 마십시오. 그것이 헛수고라 했습니다. 6장을 한번 넘어가 보십시다. 6장 7절부터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사람의 수고는 다 그 입을 위함이나 그 식욕은 차지 아니하느니라 지혜자가 우매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뇨 인생 앞에서 행할 줄을 아는 가난한 자는 무엇이 유익한고 눈으로 보는 것이 심령의 공상보다 나으나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사람의 힘이 수고해 봤자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하여 이웃에게 시기를 받는다. 여러분들 잘되면 잘되는 만큼 주변으로부터 시기를 받습니다. 모함을 받습니다. 그러면 잘못되라는 이야기인가 그게 아니지요. 수고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무슨 이야기인지 아시죠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말라 그 말이에요.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지 못하고 진정한 낙을 주지 못합니다. 전도서 2장을 다시 한번 봅시다. 16절. “지혜자나 우매자나 영원토록 기억함을 얻지 못하나니 후일에는 다 잊어버린지 오랠 것임이라 오호라 지혜자의 죽음이 우매자의 죽음과 일반이로다.” 여러분,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세상의 부기와 명예는 별 것 아니라는 말이에요. 아무리 미련하게 살았든, 지혜롭게 살고 유명하게 살았든 간에 죽으면 그 이름이 잊혀지는 겁니다. 잊혀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세상에서 출세해서 이름 남기려고 애쓰지 마세요. 그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사는 복을 받으면 돼요. 하나님을 섬기고 살면서 받는 복으로 세상에서 출세를 얻고, 사업의 성공을 얻고, 그 받는 복으로 여러분의 영광을 얻을 때 그것은 지속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나라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그러한 것들을 얻어보았자, 그것은 결과적으로 잠시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말씀하고 있는 거에요. 노력과 수고, 영광과 부요함, 지식과 지혜, 이러한 것들이 모두 다 헛됨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결론적으로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그러면 오늘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주님께서는 디모데후서 2장 20절에서 21절까지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깨끗한 그릇에 대해 말씀하셨어요. “어떤 집에 금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도 있다. 그러나 주인이 어떤 그릇을 쓰느냐 깨끗한 그릇이 주인이 쓰기에 합당하느니라.” 거기 보면 인생을 그릇으로 비유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은 금그릇 같은 사람이 있어요. 세상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금그릇처럼 참 존귀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은그릇 같고 어떤 사람은 질그릇 같고 어떤 사람은 나무그릇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떤 그릇을 쓰시느냐 세상에서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 쓰는 것이 아니라, 금그릇이라도 깨끗하면 쓰시는 거고, 질그릇이라도 깨끗하면 쓰신다 그랬어요. 오늘 인생의 성공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면서 성공적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살 수 있는 인생이 어디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힘을 받고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실 때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실 때, 그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만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하나님이 쓰느냐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 그랬어요. 준비된 사람.
고린도 후서 4장 7절에 보면 우리를 비교하시면서, 우리는 질그릇 같은 인생이라고 말씀하면서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았다 그랬어요. 오늘 저와 여러분은 질그릇 같은 존재이지마는 이 안에 누가 오셨어요 누가 오셨어요 학개서에 기록된 대로 말세에 보배가 임하신다 했는데, 만국에 보배가 임하신다고 했는데, 만국의 보배가 누구입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오늘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만국의 보배이신 누가 와 있어요 주님이 와 계신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 인생의 참다운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 질그릇에 있습니까, 그 안에 담겨진 보물에 있습니까 보물에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디에 관심을 보여야 합니까 물어보나 마나입니다. 그 안에 담긴 보물에다 관심을 두어야지요.
그런데 우리는 미련하게도 내 안에 임하신 보배로우신 주님에게 관심을 두기보다는 질그릇 같은 깨어지기 쉽고 가치 없는 내 자신에 관심을 집중한단 말이에요. 누차 말씀 드립니다만 질그릇을 아무리 빛내고 광내봤자 소용없어요. 그것 땅하고 떨어뜨리면 깨져버려요. 여러분 인생에다가 여러분 삶에다가 아무리 치장을 해 보십시오. 명예로 치장해 보시고 학벌로 치장해 보시고 또 물질로 치장해 보세요. 그게 무슨 소용 있습니까 요즈음에는 별일도 다 있어요. 금가루가 든 화장픔으로 치장을 해요. 돈도 쓸 데가 없지, 하나에 몇 만원 짜리 쓰구 발라봤자 늙으면 보기 흉해지는데, 치장을 한들 뭐합니까 여러분,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한 벌에 오십만원 육십만원 짜리 옷 걸쳐봤자 그것 때문에 뭐 얼마나 아름다워집니까 그것으로 여러분의 인격이 아름다워집니까 그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아름답게 살이 찝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고백하기를 “내 겉사람은 날로 후패하지만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랬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정말 이 본문을 통해서 받아야 할 교훈이 뭡니까 오늘 우리가 지식과 지혜와 명예와 부귀와 명성과 수고함으로 무엇을 얻어서 나를 돋보이려고 하는, 성공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고나 있지 않은지요 오늘 정말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의 속사람 아닙니까 우리 안에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데, 그분이 어떻게든 영광스럽게 나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노력해야 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인생을 아무리 치장해 보십시오. 오늘 밤에라도 여러분의 영혼을 주님께서 부르시면 그 그릇은 깨어져 버리고 끝나는 겁니다. 박사면 뭐할 것이고, 재벌이면 뭐할 것입니까 오늘 밤 주님이 그 영혼 불러가면 끝인데. 우리 교회에는 재벌도 없으니까 통하지도 않는 이야기이지만, 재벌만 돈돈돈 하는 게 아니라 재벌 아닌 사람도 돈돈돈 하니까 그렇죠. 오늘 우리가 질그릇임을 깨닫습니까 오늘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가장 아름다운 삶이고 행복한 삶인가, 어떤 삶을 사는 것이 주님 앞에서 가장 복된 삶인가 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치장하는 데 급급하지 맙시다. 오늘 내 안에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치장하십시오. 그 분을 돋보이게 하십시오. 그 분이 여러분의 지도자가 되게 하십시오. 내 마음에 와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늘 진정으로 나의 삶의 주인이 되도록 모셔야만 합니다. 그 분을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 분이 여러분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여러분, 날마다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뭡니까 “아, 누구는 좋겠다, 빽이 좋아서.” 강성교회 온 사람 중에 빽 있는 사람 있어요 한번 손들어 봐요. 솔직히 말해 요즈음 빽 있으면 이 동네 삽니까 벌써 저쪽 동네 갔지. 우리는 빽 없어요. 그러나 빽 없다고 한탄하지 마세요. 여러분, 왜 인생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은 바라보지 않습니까 왜 압살롬처럼 자기 아름다움과 자기 재능과 자기 능력과 자기 방법 가지고 살다가 망할 삶을 삽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면 우리 인생은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여러분은 어떤 모습으로 서시겠습니까 오늘 여러분 안에 와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분 안에 여러분의 삶이 새롭게 조명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삶의 주인으로 모십시오. 그 분을 여러분 앞에 내세우십시오. 그리하면 어떤 삶이 주어집니까 여러분, 시편 127편을 찾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시편 121편부터 먼저 봅시다.
시편 121편 한 목소리로 봉독합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127편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러분, 우리 모두는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 안에서 열심히 사시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인본주의 사상에 물들어 내 지혜와 지식과 지능과 내 경험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어리석은 삶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만 합니다. 시편 128편 1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시온에서 복을 주신다고 그랬어요. 하나님을 경외하면 주의 전에 모여서 예배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범사에 복을 주신다고 약속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시간이 없으니까, 한 구절만 더 찾아보고 마치겠습니다. 잠언 21장을 찾아봐 주시기 바랍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오늘 말씀의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싸울 날을 위하여 무엇을 예비했습니까 마병을 예비했습니다. 그러나 승리는 누구에게 있습니까 여호와께 달렸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삶을 살아가면서 사업장과 직장에서 열심히 하셔야 됩니다. 준비도 하셔야 되고 최선을 다하셔야 됩니다. 그러나 그 성패는 누구에게 달렸습니까 여호와께 달렸습니다. 시편 127편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이 끝나고 맙니다. 여호와께서 지켜 주시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수고와 지킴이 소용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잠언 16장 1절에 보면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9절에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여러분, 마음의 계획을 여러분이 세운다 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시고 안 이루시고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거에요.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에서 우리 자신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수고를 의지하며 살지 않기를 다시 한번 부탁 드리며, 동시에 우리 안에 와 계신 그 분을 앞세우고 그 분을 경외함으로써 그 분이 더하시는 축복 그 분이 인도하시는 축복 그 분이 책임지시는 축복을 여러분의 삶에서 누리시길 바랍니다. 이번 한 주일 동안도 여러분이 주님을 앞세우심으로써 진정한 승리를 맛볼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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