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 사독을 돌려보내는 다윗 (삼하15:24-29)
본문
다윗의 피신을 통해서 다윗을 따라가는 충성된 일꾼들에 대해서 두 주에 걸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에는 항상 반란의 세력이 있고 그 반란의 세력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성도들을 유혹하고 마음을 도둑질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깨뜨리는가를 우리가 몇 주 전에 말씀을 상고했고, 그 다음으로 우리는 이렇게 교회가 어려움을 겪을 때에 끝까지 충성하는 일꾼들의 모습을 또한 말씀을 통해서 상고한 바가 있습니다. 이제 다윗의 피신하는 과정에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제사장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함께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인 사독과 그와 함께한 네 사람이 다윗이 예루살렘 궁궐을 버리고 도망가는 이 상황에서 다윗의 편에 서서 함께 도망을 치겠다고 하는, 다시 말하면 다윗의 편에서 함께 싸우겠다고 하는 태도를 표명합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인 사독과 제사장인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하나님의 정통성이 쿠데타를 일으킨 압살롬에 있지 않고 다윗에게 있다고 인정을 하는 모습입니다. 이 시대는 신정국가입니다. 하나님이 왕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고 계시는 시대입니다. 신정국가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누구 편에 서느냐가 정권을 유지하는 기초가 되고 또 백성들에게도 정통성의 상징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그 권력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왕을 부인할 때 그 왕은 왕권을 잃어버리는 그와 같은 상황이 신정국가의 상황입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사장의 무리들이 다윗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다윗의 왕권이 계속 다윗에게 주어지고 있다고 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백성들에게 다윗이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왕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기회입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메고 나오는 제사장의 무리를 향해서 너희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25절에 보니까, “너희는 도로 법궤를 예루살렘성으로 메어 가라. 만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은혜를 받는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여서 이 법궤와 하나님이 계신 이 예루살렘 성전을 내게 다시 보여줄 것이다. 다시 돌아오게 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않고 나를 버리신다 할지라도 내게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내가 말하겠다” 이렇게 고백을 하면서 제사장의 무리에게 돌아가라고 권면을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 사건에서 나타나는 다윗의 신앙을 통해 오늘 우리의 신앙을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사실 하루 아침에 왕권을 잃어버리고 도망을 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 이후에 기록된 성경을 보면 그가 얼마나 비참했던지 맨발로 예루살렘성을 떠나서 맨발로 걸어가면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울면서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상황으로 보면 다윗은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믿었던 신하들로부터, 가장 가까운 측근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아주 비참한 심정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와 같은 비참한 심정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인간적으로 보면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 빠져 있을 때에 제사장의 무리가 자기 편에 서준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군대를 얻은 것보다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힘이 생기는 기회요, 축복이라고 생각되어질 그러한 상황입니다. 사실 그 어떠한 군대를 얻은 것보다도 제사장의 무리가 자기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자기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힘입니다. 우리 나라 옛날 왕조시대에도 그 왕권의 상징은 무엇이었습니가 옥새가 왕권의 상징이었잖아요 이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법궤는 바로 그와 같은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하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도 그 광야에서 법궤를 만들고난 다음부터는 항상 이스라엘 앞에 법궤가 갑니다. 법궤가 출발하면 출발하는거고 법궤가 머물면 머무는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려 요단강을 건널 때도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들어갈 때 요단강물이 갈라지면서 이스라엘 군대가 범람하는 요단강을 그냥 건너갑니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법궤가 갖는 의미가 굉장히 극대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상고한 바대로 사무엘상에서 상고한 바대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가운데 계속 참패를 하니까 무엇을 가지고 나갑니까 법궤를 앞에 메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다 결과적으로는 패전하고 법궤를 빼앗겨버리고 두 아들은 죽어버려요, 그러나 블레셋이 그 법궤를 빼앗아다가 자기네 신상에다 갖다 놓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나까 신상이 깨어져버립니다. 그래도 못 깨달으니까, 그 다음에는 기근과 그 다음에는 질병들이 전염병이 돌아다닙니다.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깨닫죠. 하나님의 법궤가 우리 땅에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이말이에요.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보내자. 그래서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이게 진짜 하나님 법궤 때문이라면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송아지를 갓낳은, 젖먹이는 송아지를 둔 어미소를 가지고 수레에 매어서 법궤를 실어 이스라엘 땅을 향해서 한번 가게 해보자 그래도 계속 이스라엘 땅을 향해서 이 소가 간다면 이건 진짜 하나님의 법궤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진노다. 이방 사람들도 그렇게 깨달았다구요. 송아지를 떼어놓은 암소가 눈물을 흘리면서 길을 가더라 이것입니다. 여러분 법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하는 임재의 상징이요, 실질적으로 그와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쫓겨나는 다윗의 입장에서 이 법궤가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왜 거부합니까 이 절망적 상황에서 이 비참한 상황에서 왜 최대의 힘이 될 수 있는 법궤를 거부합니까 이 법궤를 거부한 다윗에게는 의미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그 믿음은
첫째로 주권적 신앙을 가졌던 믿음입니다. 오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의 법궤를 성으로 다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시들을 보이시리라.” 다윗은 알았습니다. 법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궤와 함께 하는, 법궤가 상징하고 의미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궤가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그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윗은 깨달았다 이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다윗은 도망을 칩니다.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을 칩니다. 그 다윗의 마음 속에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아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그것이 바로 자기가 밧세바를 취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결과로 하나님의 징계가 자기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그 징계하는 채찍 앞에서 대항해본들 몸부림쳐본들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오직 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로 돌이켜 주신다면, 나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면, 내가 그때 와서 법궤를 보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나를 버리신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행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환란을 당하며 채찍을 맞는 다윗의 믿음을 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불순종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채찍을 맞을 때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결과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저와 여러분들은 다윗의 이 지혜로움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의 결과로 오는 채찍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채찍을 그대로 감수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또 그 징계 뿐만 아니라, 치료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바로 이 주권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비극적이고 이와 같이 비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것도 내가 범죄한 결과로 하나님이 채찍을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회복시킬 수 있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이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 자신의 불순종의 결과임을 깨닫고,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이제는 그렇기 때문에 채찍을 드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 베푸시는 것만이 구원의 길임을 그는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임을 깨달았다 그말입니다. 제가 지난번 기도회 때도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는 정말 기도할 때는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도 될 때 기도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맡길 때, 주의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소원으로 주실 때는 기도해보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 문제라고요 어떻게 하는 문제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내가 감당 할만한 것을 나에게 맡길 때는 그때는 기도해보고 결정할 때가 아니라, 바로 순종할 때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때 기도해보겠다고 기도하다 보니까 그만 욕심이 생겨서 성령님의 소원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말아요. 진짜 진짜 기도해야 될 때는 언제라고 그랬습니까 진짜 기도할 때는 내 힘과 내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할 때야말로 그때가 진짜 기도해야 할 때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기도 안해요. 진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정말 내 힘과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 기도할 것 같은데 그때는 기도가 안 돼요. 그리고는 어떻게 하느냐 아는 사람한테 쫓아다닙니다.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저기다 돈 써보고 여기다 아쉬운 소리해보고, 저기다 아쉬운 소리해보고, 그러니까 망하는 것 아닙니까 다윗은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구보고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해를 보니까 돌아가라고 권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지금 이 절대절명의 비참한 상황에서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지 그 어떠한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고 그는 벌써 깨닫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요, 어려운 일도 참 많이 당해요.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결과로 채찍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 채찍은 아픕니다. 비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때마다 기억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을 들고 계신다는 사실을요. 하나님이 다윗을 이 비참한 환경에 몰아넣는 것은 다윗을 버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더 철저히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남은 인생을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랑의 채찍을 드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채찍을 드신다. 채찍을 들지 않는 자, 매를 때리지 않는 자는 사생자, 버린 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불순종했을 때 채찍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더니 손해가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쫓겨감이 있습니까 빼앗김이 있습니까 감수하십시오. 그러나 감수할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다윗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십시오. 이제 주님을 의지하고 다윗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가는 것을 봅니다. 자기의 범죄를 뼈저리게 느끼고 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26절에 보면 주권적 신앙을 가진 다윗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환궁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내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보다 왕권을 다시 회복하기보다는, 그것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다윗은 26절에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는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하나님께서 내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면 내가 그때 예루살렘에서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고 나를 버리신다 할지라도 내가 그 하나님 뜻대로 행하겠다고 다윗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다윗의 주권적 믿음을 봅니다. 자기의 회복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어떻게 살 것이냐, 무엇을 하며 살 것이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하나의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씁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한 모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자기의 왕권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습니다. 내가 회복되느냐, 다시 왕위를 복직하느냐 안 하느냐는 두 번째 문제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느냐가 우선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내가 기쁘게 행하겠다고 다윗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봐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도 우리는 어디에 더 관심이 있습니까 무엇에 더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더 많습니까 이것을 물어봐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제자리에 모셔야 된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자기와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습니다. 서론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법궤가, 제사장들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은 천군만마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법궤는 있어야 될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다윗의 주권적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좌우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은 제자리에 제 위치에 모셔져야 된다는 것이 다윗의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생활도 자기의 편의에 따라서 자기의 계획에 맞추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날의 모습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어떠한 불리한 위치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모셔져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기보다는 내가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을 다윗은 깨닫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신앙을 마음대로 바꾸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도 마음대로 변형시켜 버립니다. 내 편리에 따라서, 내 마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도 내 마음대로 왜곡해서 변경해 버립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는 앞에서 나오는 사울왕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할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짐승까지도 진멸하라고 명령을 받았지만 그가 막상 점령하는 과정에서 보니까 너무나 소들이 살진 소란 말이예요.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남겨두게 합니다. 그려면서 뭐라고 하면서 그것을 남겨둡니까 뭐하기 위해서요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위해서,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요.” 명분을 보십시요.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요. 사랑의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위치에 하나님이 모셔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존재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겁니다. 오늘 우리 편리에 의해서 마음대로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디모데서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법대로 경주하지 않는 자는 면류관을 받지 못한다 하셨잖아요. 법을 어기면서 경주하면 상급이 있습니까 없단 말이에요. 죽어라고 열심히 뛰어서 일등으로 골인했지만, 일등으로 테이프를 끊었지만 금메달을 못 받은 것처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을 제위치에 모셔두지 않고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번 귀기울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의 위치에 모셔질 때에 그것이 은헤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제 위치에 모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 삶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어디에 계십니까 주인으로 계십니까 아니면 시종으로 변해 있습니까 어쩌다가 한번 대화를 나누는 이웃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그러한 위치에 모셔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 모셔 두기 위해서 내가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하나님 위치에 모셔 두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사업을 하시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불이익을 좀 당하십시오. 직장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위치에 두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면 좀 당하십시오. 오늘 다윗이 그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법궤는 예루살렘에 있어야 한다 이말이에요. 하나님의 법궤가 나와 함께 가면 나야 물론 좋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말이에요. 하나님을 제 위치에다 모십시오. 오늘 하나님은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쩌다가 한번 생각나면 한번씩 불러보는 그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분이고 우리에게 더없는 은헤, 무한한 은헤를 주시기를 오늘도 기다리시는 은헤로운 아버지이심을 여러분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그 분은 여러분의 파트너가 되기만을 원하지 않고, 그 분은 오늘 우리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봐요. 여러분이 부부지간에도, 우리 남편들 어때요 인간끼리 만난 부부지간에도 부인이 나를 무시하고 부인이 딴 사람한테 신경쓰면 기분좋을 남편 손들어봐요. 만날 때마다 무슨 이야기하냐면, 퇴근해서 집에만 오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아이구, 여보, 옆집에 있는 그 김선생있지요, 참 멋있습디다. 아 그 양반 아내를 기가막히게 사랑합디다. 아휴 그런 사람이랑 한번 살아봤으면.” 그런 소리 하는데 가만히 있을 남편 있으면 한번 손들어봐요. 자식을 키우면서도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나빠요 아빠가 부르는데 대답을 안 하면 화가 난단 말이에요. 왜지요 아빠의 권위를 무시해서지요. 인간의 권위도 무시하면 이렇게 기분이 나쁜데, 하물며 오늘 인생의 생사화복을 쥐고 계시고 우리의 인생을 만드신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 분이 어떤 위치에 있기를 원하시는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것을 제대로 안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형식과 의식보다는 하나님의 은헤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본문에서 더쉽게 다루어야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 없을 때는 법궤를 의존했습니다. 형식을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신앙이 있을 때는 법궤보다는 그 법궤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이 없을 때는 하나님보다는 법궤 자체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궤가 뭐가 됩니까 법궤가 바로 우상으로 변해버리는 모습들을 봅니다. 법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러면 이길 줄 알고 말이지요. 법궤가 하나의 우상으로 변해버려요.
오늘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의식중심이 되고 있다면 우리는 심각하게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 주일날 와서 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낮예배 한번 참석하시는 것으로 여러분 신앙생활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배치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궤보다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 하나님 은헤가 더욱 중요하다고 그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일날 와서 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여러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의식주의입니다. 형식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오늘 우리의 삶에서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그분은 원하고 계십니다. 철야기도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이사야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뭘 지적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내게 성전을 밟고 안식일을 지키고 월삭을 지키고 대회로 모이고 집회가 있다면 다 모인다. 거기다가 희생제물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다 하지만 너희가 많이 기도할 때 내가 듣기 싫고 그 기도 들어주지 않고 너희들이 드리는 예배와 너희들이 드리는 헌금 내가 받기에 역겹다고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 너희가 성전 뜰만 밟을 뿐이다라고 하셨어요, 오늘 우리로 말하면 교회에 와서 자리에만 앉아 있다 가는 것 뿐이다 이말이에요. 헌금을 드립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어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은헤예요. 여러분들, 주일날 하루 와서 예배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 두렵고 떨림으로 서실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 앞에 우리 마음을 드려야지, 한 시간 그냥 와서 예배 드리고 간다고. 어떤 목사님 그럽디다. “주보가 뭐냐 주보는 영수증이다. 무슨 영수증이냐 주일예배 드렸습니다. 낮예배 한번 드렸습니다 하는 영수증이다.” 영수증 받으러 교회로 온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셨지요 오늘 날짜 보셨지요 나 이것 같고 있잖아요. 예배 드렸어요. 암 십일조도 했구요.” 형식보다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 27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편안히 성으로 돌아가라.” 여기 보면 제사장에게 말하기를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너는 제사장이 아니냐 이말이에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냐. 그러니 너는 편안히 성으로 돌아가 있어라.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너는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이지 이 정치적인 싸움에, 이 분쟁에 휘말려가지고 피해를 봐서는 안 될 사람이다. 너는 오직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만 섬겨야 될,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될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냐. 그러니 네가 이런 정치적인 분쟁 가운데 휘말려가지고 피해를 봐서는 안 되고 여기에 쫓겨 다녀서는 안 된다. 어느 한편에 치우쳐가지고 다른 편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너는 성으로 돌아가서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런 말씀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목사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태도를 분명이 좀 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도 분명히 집사를 뽑으면서 사도들이 고백한 말씀이 있습니다. 집사를 왜 뽑습니까 사도가 직접 구제를 하다가 헬라파 과부들과 유대파 과부들의 분쟁에 휘말려서 말을 듣게 되는 겁니다. “누구는 많이 주고 누구는 조금 준다. 사도들이 유대 사람이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또한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좀 지방색이 강한 사람들은 목사가 경상도 사람이니까, 뭐 전라도 사람이니까, 경상도 사람만 좋아한다, 뭐 전라도 사람만 좋아한다. 교회내에서 요따위 소리가 나옵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됩니다. 목사가 누구 편을 든다, 누구를 더 좋아한다 그런 말씀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것을 또 유도하는 사람도 있어요. “목사님이 우리 집에 와서 뭐라고 했다.”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려요. “그래, 목사님이 나를 아주 그렇게 인정을 해요.” 그러나 그 말은 반대 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 때는 소외감을 느끼는 말입니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나요. 여러분 다윗은 말이죠,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제사장이 자기와 함께 가는 것은 엄청난 힘이에요. 그러나 지금 다윗은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 말이에요. 휘말려서는 안 된다 그말이에요. 인간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일들을 당할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때마다 유념하시고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집사님을 뽑은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항상 이런 자세를 가져주셔야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목사를 보호해주셔야 됩니다. 목사가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목사는 항상 중립적 위치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셔야 합니다. 다윗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다윗편도 아니고 압살롬편도 아니라, 그 중간에서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일할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 강성교회 성도님들, 목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바랍니다. 그래서 교인들 눈에 목사가 누구편이다 누구를 더 좋아한다. 그런 표현이 안 나오도록 여러분 스스로 좀 막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사업에 정치에 영향을 받아서 되겠습니까 아, 목사가 여당주의다 야당주의다 그런 소리 들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한국적 상황은 참 안타까워요. 저는 오늘 아침에도 참 마음이 아팠어요. 국민을 지켜야 될 경찰이 국민을 죽이는 이 사회,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 생명 하나 우습게 여기는 이 세대, 이런 지도자들. 마음이 아파 죽겠습니다. 여당 야당을 떠나서 이건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안 되는거예요. 국민 하나가 죽을 상황이면 자기가 물러나야죠. 국민이 죽을 상황이라면 자기가 물러나야죠. 국민을 죽이면서까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면 이건 아니될 말입니다. 이건 안돼요. 이것은 마음 아프게 기도해야 할 부분입니다.
오늘날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우리는 너무나 기도를 안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목사들이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은 왜 가만 있습니까 이런 걸 보고도 왜 가만 있습니까 좀 나서서 비판도 하고 따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는 만들지 마십시오. 그것도 안 됩니다. 목사님들은 정치에 휘말려서는 안 돼요. 더군다나 우리 한국적 상황에서는 옳은 말을 해도 그 옳은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저거 반대편이구만.” 그러고. 또 잘할 때 잘한다고 하면 “저거 여당이구만.”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 상황은 그래요. 그러니 여러분들 그거 요구하지 말라구요. 특히 우리 젊은친구들 목사들한테 불만이 그거예요.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대학교에서 물을 먹이거든요. 목사님들 왜 가만 있습니까 교회에 가가지고 왜 이 따위로 믿습니까 아, 교회가 정치세력이에요 아, 교회가 정치하는 곳이에요 목사는 정치적인 분쟁에 휘말려서는 안 돼요. 젊은 친구들 아시겠어요 목사는 뭐만 해야 돼요 말씀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되고, 하나님 섬기는 일에 전념해야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목사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지켜야 될 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그렇게 만들어 주어야 됩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여당, 야당, 있잖아요. 틀림없이 있다구요. 여당 지지하는 교인도 있고 야당 지지하는 교인도 있어요. 아, 여당 지지하는 교인들이 목사한테 은밀히 이야기합니다. 압력을 넣어요. “목사님 좀 지지 좀 하셔야죠.” 그리고 야당 쪽에서도 “목사님, 지지 좀 하셔야죠.” 아 그러면 목사는 어느 장단에 춤출 거예요 기억하셔야 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십시오. 다윗은 사독더러 “너는 제사장이 아니냐.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전념해라. 나를 따라왔다가는 분쟁에 휘말린다.” 그말이에요, 사랑의 여러분, 다윗은 제사장과 법궤가 함께 하지 않음으로써 큰 힘을 잃어버리는 겁니다만 자기는 많은 손해를 보는 겁니다마는 하나님을 제 위치에 모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제사장 위치에 놓아두었습니다. 목사 가지고 장난치지 마십시오. 목사 가지고 여러분들의 명예와 여러분들의 일에 이용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오직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인의 장막을 쳐주셔야 됩니다. 그러한 우리 강성교회의 장로, 집사들이 되어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강성교회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오늘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은헤가 더욱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일에 더 열심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이후에 기록된 성경을 보면 그가 얼마나 비참했던지 맨발로 예루살렘성을 떠나서 맨발로 걸어가면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울면서 예루살렘을 떠났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때 상황으로 보면 다윗은 아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믿었던 신하들로부터, 가장 가까운 측근들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아주 비참한 심정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그와 같은 비참한 심정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인간적으로 보면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에 빠져 있을 때에 제사장의 무리가 자기 편에 서준다고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군대를 얻은 것보다도,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힘이 생기는 기회요, 축복이라고 생각되어질 그러한 상황입니다. 사실 그 어떠한 군대를 얻은 것보다도 제사장의 무리가 자기를 따른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자기와 함께 있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힘입니다. 우리 나라 옛날 왕조시대에도 그 왕권의 상징은 무엇이었습니가 옥새가 왕권의 상징이었잖아요 이 신정국가인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법궤는 바로 그와 같은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라고 하는것은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하는 상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는 과정에서도 그 광야에서 법궤를 만들고난 다음부터는 항상 이스라엘 앞에 법궤가 갑니다. 법궤가 출발하면 출발하는거고 법궤가 머물면 머무는거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려 요단강을 건널 때도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강을 들어갈 때 요단강물이 갈라지면서 이스라엘 군대가 범람하는 요단강을 그냥 건너갑니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항상 하나님의 법궤를 앞세우고 나가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 법궤가 갖는 의미가 굉장히 극대화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상고한 바대로 사무엘상에서 상고한 바대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가운데 계속 참패를 하니까 무엇을 가지고 나갑니까 법궤를 앞에 메고 나가지 않습니까 그러다 결과적으로는 패전하고 법궤를 빼앗겨버리고 두 아들은 죽어버려요, 그러나 블레셋이 그 법궤를 빼앗아다가 자기네 신상에다 갖다 놓으니까, 어떤 일이 일어납나까 신상이 깨어져버립니다. 그래도 못 깨달으니까, 그 다음에는 기근과 그 다음에는 질병들이 전염병이 돌아다닙니다.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그 사람들이 나중에 깨닫죠. 하나님의 법궤가 우리 땅에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이말이에요. 하나님의 법궤를 돌려보내자. 그래서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이게 진짜 하나님 법궤 때문이라면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송아지를 갓낳은, 젖먹이는 송아지를 둔 어미소를 가지고 수레에 매어서 법궤를 실어 이스라엘 땅을 향해서 한번 가게 해보자 그래도 계속 이스라엘 땅을 향해서 이 소가 간다면 이건 진짜 하나님의 법궤 때문에 일어난 하나님의 진노다. 이방 사람들도 그렇게 깨달았다구요. 송아지를 떼어놓은 암소가 눈물을 흘리면서 길을 가더라 이것입니다. 여러분 법궤라고 하는 것은 이렇게 하나님이 함께 한다고 하는 임재의 상징이요, 실질적으로 그와 같이 하나님이 함께 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쫓겨나는 다윗의 입장에서 이 법궤가 함께 한다고 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거예요. 그러나 다윗은 이것을 거부합니다. 왜 거부합니까 이 절망적 상황에서 이 비참한 상황에서 왜 최대의 힘이 될 수 있는 법궤를 거부합니까 이 법궤를 거부한 다윗에게는 의미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 그 믿음은
첫째로 주권적 신앙을 가졌던 믿음입니다. 오늘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 하나님의 법궤를 성으로 다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시들을 보이시리라.” 다윗은 알았습니다. 법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궤와 함께 하는, 법궤가 상징하고 의미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알았습니다.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궤가 의미하고 있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 그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윗은 깨달았다 이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다윗은 도망을 칩니다.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을 칩니다. 그 다윗의 마음 속에는 깨달음이 있습니다. 아들이 반란을 일으킬 때 그것이 바로 자기가 밧세바를 취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결과로 하나님의 징계가 자기에게 임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징계하실 때 그 징계하는 채찍 앞에서 대항해본들 몸부림쳐본들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오직 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의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로 돌이켜 주신다면, 나로 다시 예루살렘으로 회복시켜 주신다면, 내가 그때 와서 법궤를 보리라,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나를 버리신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행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환란을 당하며 채찍을 맞는 다윗의 믿음을 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불순종에 이르러 하나님 앞에 채찍을 맞을 때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결과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저와 여러분들은 다윗의 이 지혜로움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자기의 범죄의 결과로 오는 채찍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 채찍을 그대로 감수하기로 작정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징계가, 또 그 징계 뿐만 아니라, 치료하는 것도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바로 이 주권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은 비극적이고 이와 같이 비참한 상황에 빠뜨리는 것도 내가 범죄한 결과로 하나님이 채찍을 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회복시킬 수 있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자기 아들이 반역을 일으키는 것이 자신의 불순종의 결과임을 깨닫고, 그것이 하나님의 징계임을 깨닫고 이제는 그렇기 때문에 채찍을 드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 베푸시는 것만이 구원의 길임을 그는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그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임을 깨달았다 그말입니다. 제가 지난번 기도회 때도 그런 말씀을 드렸어요, 우리는 정말 기도할 때는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아도 될 때 기도한다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맡길 때, 주의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 속에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을 소원으로 주실 때는 기도해보고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하는 문제라고요 어떻게 하는 문제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이 내가 감당 할만한 것을 나에게 맡길 때는 그때는 기도해보고 결정할 때가 아니라, 바로 순종할 때라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때 기도해보겠다고 기도하다 보니까 그만 욕심이 생겨서 성령님의 소원대로 순종하지 못하고 불순종하고 말아요. 진짜 진짜 기도해야 될 때는 언제라고 그랬습니까 진짜 기도할 때는 내 힘과 내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할 때야말로 그때가 진짜 기도해야 할 때라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때는 기도 안해요. 진짜 절대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정말 내 힘과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을 때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때 기도할 것 같은데 그때는 기도가 안 돼요. 그리고는 어떻게 하느냐 아는 사람한테 쫓아다닙니다.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저기다 돈 써보고 여기다 아쉬운 소리해보고, 저기다 아쉬운 소리해보고, 그러니까 망하는 것 아닙니까 다윗은 지금 이 상황에서 누구한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구보고 도와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해를 보니까 돌아가라고 권면을 하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지금 이 절대절명의 비참한 상황에서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지 그 어떠한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고 그는 벌써 깨닫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요, 어려운 일도 참 많이 당해요.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결과로 채찍을 맞을 때도 있습니다. 그 채찍은 아픕니다. 비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때마다 기억을 하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채찍을 들고 계신다는 사실을요. 하나님이 다윗을 이 비참한 환경에 몰아넣는 것은 다윗을 버리시기 위함이 아니라, 다윗으로 하여금 더 철저히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서 남은 인생을 바르게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랑의 채찍을 드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 히브리서에서는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는 채찍을 드신다. 채찍을 들지 않는 자, 매를 때리지 않는 자는 사생자, 버린 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불순종했을 때 채찍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았더니 손해가 있습니까 아픔이 있습니까 쫓겨감이 있습니까 빼앗김이 있습니까 감수하십시오. 그러나 감수할 뿐만 아니라 철저하게 다윗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십시오. 이제 주님을 의지하고 다윗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가는 것을 봅니다. 자기의 범죄를 뼈저리게 느끼고 나가는 것이 보입니다. 26절에 보면 주권적 신앙을 가진 다윗은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나는 환궁보다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내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보다 왕권을 다시 회복하기보다는, 그것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원한다. 다윗은 26절에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는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하나님께서 내게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면 내가 그때 예루살렘에서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고 나를 버리신다 할지라도 내가 그 하나님 뜻대로 행하겠다고 다윗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다윗의 주권적 믿음을 봅니다. 자기의 회복보다는 하나님이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가 어떻게 살 것이냐, 무엇을 하며 살 것이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하나의 악세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씁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한 모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다윗은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자기의 왕권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더 중요했습니다. 내가 회복되느냐, 다시 왕위를 복직하느냐 안 하느냐는 두 번째 문제이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느냐가 우선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내가 기쁘게 행하겠다고 다윗은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 우리의 믿음을 다시 점검해봐야 되겠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있으면서도 우리는 어디에 더 관심이 있습니까 무엇에 더 관심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더 많습니까 이것을 물어봐야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법궤를 제자리에 모셔야 된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가 자기와 같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것을 그는 원치 않았습니다. 서론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하나님의 법궤가, 제사장들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것은 천군만마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하나님의 법궤는 있어야 될 자리에 있어야 된다고 하는 것이 다윗의 주권적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필요에 의해서 좌우되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하나님은 제자리에 제 위치에 모셔져야 된다는 것이 다윗의 신앙인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본문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의 필요에 따라서 사용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생활도 자기의 편의에 따라서 자기의 계획에 맞추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오늘날의 모습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고백합니다. 내가 어떠한 불리한 위치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리에 모셔져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이용하기보다는 내가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것이 더 좋다는 사실을 다윗은 깨닫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신앙을 마음대로 바꾸어버립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도 마음대로 변형시켜 버립니다. 내 편리에 따라서, 내 마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뜻도 내 마음대로 왜곡해서 변경해 버립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가는 앞에서 나오는 사울왕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할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짐승까지도 진멸하라고 명령을 받았지만 그가 막상 점령하는 과정에서 보니까 너무나 소들이 살진 소란 말이예요. 너무나 아름다운 것들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남겨두게 합니다. 그려면서 뭐라고 하면서 그것을 남겨둡니까 뭐하기 위해서요 “하나님 앞에 제사하기 위해서, 제물로 바치기 위해서요.” 명분을 보십시요.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하나님을 위해서요. 사랑의 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위치에 하나님이 모셔질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존재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겁니다. 오늘 우리 편리에 의해서 마음대로 맞추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디모데서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법대로 경주하지 않는 자는 면류관을 받지 못한다 하셨잖아요. 법을 어기면서 경주하면 상급이 있습니까 없단 말이에요. 죽어라고 열심히 뛰어서 일등으로 골인했지만, 일등으로 테이프를 끊었지만 금메달을 못 받은 것처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법대로 하나님을 제위치에 모셔두지 않고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인정하지 않으실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번 귀기울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의 위치에 모셔질 때에 그것이 은헤요, 축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제 위치에 모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여러분 삶에서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어디에 계십니까 주인으로 계십니까 아니면 시종으로 변해 있습니까 어쩌다가 한번 대화를 나누는 이웃입니까 오늘 하나님은 그러한 위치에 모셔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위치에 모셔 두기 위해서 내가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을 하나님 위치에 모셔 두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서 불이익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으로 사십시오. 사업을 하시면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위해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불이익을 좀 당하십시오. 직장에서 하나님을 하나님 위치에 두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해서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면 좀 당하십시오. 오늘 다윗이 그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법궤는 예루살렘에 있어야 한다 이말이에요. 하나님의 법궤가 나와 함께 가면 나야 물론 좋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말이에요. 하나님을 제 위치에다 모십시오. 오늘 하나님은 악세사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어쩌다가 한번 생각나면 한번씩 불러보는 그와 같은 분이 아닙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던 분이고 우리에게 더없는 은헤, 무한한 은헤를 주시기를 오늘도 기다리시는 은헤로운 아버지이심을 여러분은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그 분은 여러분의 파트너가 되기만을 원하지 않고, 그 분은 오늘 우리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고 계신다는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봐요. 여러분이 부부지간에도, 우리 남편들 어때요 인간끼리 만난 부부지간에도 부인이 나를 무시하고 부인이 딴 사람한테 신경쓰면 기분좋을 남편 손들어봐요. 만날 때마다 무슨 이야기하냐면, 퇴근해서 집에만 오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아이구, 여보, 옆집에 있는 그 김선생있지요, 참 멋있습디다. 아 그 양반 아내를 기가막히게 사랑합디다. 아휴 그런 사람이랑 한번 살아봤으면.” 그런 소리 하는데 가만히 있을 남편 있으면 한번 손들어봐요. 자식을 키우면서도 자식이 말을 안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기분이 나빠요 아빠가 부르는데 대답을 안 하면 화가 난단 말이에요. 왜지요 아빠의 권위를 무시해서지요. 인간의 권위도 무시하면 이렇게 기분이 나쁜데, 하물며 오늘 인생의 생사화복을 쥐고 계시고 우리의 인생을 만드신 그 창조주 하나님께서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그 분이 어떤 위치에 있기를 원하시는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이것을 제대로 안 사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형식과 의식보다는 하나님의 은헤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이 본문에서 더쉽게 다루어야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앙이 없을 때는 법궤를 의존했습니다. 형식을 의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신앙이 있을 때는 법궤보다는 그 법궤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신앙이 없을 때는 하나님보다는 법궤 자체에 더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궤가 뭐가 됩니까 법궤가 바로 우상으로 변해버리는 모습들을 봅니다. 법궤를 메고 전쟁터에 나갑니다. 그러면 이길 줄 알고 말이지요. 법궤가 하나의 우상으로 변해버려요.
오늘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의식중심이 되고 있다면 우리는 심각하게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여러분, 주일날 와서 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십니까 낮예배 한번 참석하시는 것으로 여러분 신앙생활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이요,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배치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법궤보다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 하나님 은헤가 더욱 중요하다고 그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주일날 와서 예배 한번 드리는 것으로 여러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바로 의식주의입니다. 형식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오늘 우리의 삶에서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을 그분은 원하고 계십니다. 철야기도 시간에 말씀 드렸듯이, 이사야서 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뭘 지적하고 있습니까 너희가 내게 성전을 밟고 안식일을 지키고 월삭을 지키고 대회로 모이고 집회가 있다면 다 모인다. 거기다가 희생제물을 드리고 기도를 하고 다 하지만 너희가 많이 기도할 때 내가 듣기 싫고 그 기도 들어주지 않고 너희들이 드리는 예배와 너희들이 드리는 헌금 내가 받기에 역겹다고 이사야 1장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 너희가 성전 뜰만 밟을 뿐이다라고 하셨어요, 오늘 우리로 말하면 교회에 와서 자리에만 앉아 있다 가는 것 뿐이다 이말이에요. 헌금을 드립니다. 예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 마음은 하나님을 멀리 떠났어요. 형식보다 더 중요한 게 뭔지 아십니까 은헤예요. 여러분들, 주일날 하루 와서 예배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가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여러분 두렵고 떨림으로 서실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은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그 분 앞에 우리 마음을 드려야지, 한 시간 그냥 와서 예배 드리고 간다고. 어떤 목사님 그럽디다. “주보가 뭐냐 주보는 영수증이다. 무슨 영수증이냐 주일예배 드렸습니다. 낮예배 한번 드렸습니다 하는 영수증이다.” 영수증 받으러 교회로 온다는 거예요. “하나님, 보셨지요 오늘 날짜 보셨지요 나 이것 같고 있잖아요. 예배 드렸어요. 암 십일조도 했구요.” 형식보다는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마음을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 27절을 보고 마치겠습니다.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편안히 성으로 돌아가라.” 여기 보면 제사장에게 말하기를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다시 말하면 너는 제사장이 아니냐 이말이에요.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냐. 그러니 너는 편안히 성으로 돌아가 있어라. 이게 무슨 말이냐면요, 너는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이지 이 정치적인 싸움에, 이 분쟁에 휘말려가지고 피해를 봐서는 안 될 사람이다. 너는 오직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만 섬겨야 될,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고 하나님께 예배 드려야 될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냐. 그러니 네가 이런 정치적인 분쟁 가운데 휘말려가지고 피해를 봐서는 안 되고 여기에 쫓겨 다녀서는 안 된다. 어느 한편에 치우쳐가지고 다른 편으로부터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니 너는 성으로 돌아가서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런 말씀이에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목사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태도를 분명이 좀 취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도 분명히 집사를 뽑으면서 사도들이 고백한 말씀이 있습니다. 집사를 왜 뽑습니까 사도가 직접 구제를 하다가 헬라파 과부들과 유대파 과부들의 분쟁에 휘말려서 말을 듣게 되는 겁니다. “누구는 많이 주고 누구는 조금 준다. 사도들이 유대 사람이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런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오늘날 또한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있지요 좀 지방색이 강한 사람들은 목사가 경상도 사람이니까, 뭐 전라도 사람이니까, 경상도 사람만 좋아한다, 뭐 전라도 사람만 좋아한다. 교회내에서 요따위 소리가 나옵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됩니다. 목사가 누구 편을 든다, 누구를 더 좋아한다 그런 말씀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것을 또 유도하는 사람도 있어요. “목사님이 우리 집에 와서 뭐라고 했다.” 동네방네 소문을 퍼뜨려요. “그래, 목사님이 나를 아주 그렇게 인정을 해요.” 그러나 그 말은 반대 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들을 때는 소외감을 느끼는 말입니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나요. 여러분 다윗은 말이죠,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제사장이 자기와 함께 가는 것은 엄청난 힘이에요. 그러나 지금 다윗은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 말이에요. 휘말려서는 안 된다 그말이에요. 인간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일들을 당할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때마다 유념하시고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목사는 설교하고 기도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집사님을 뽑은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항상 이런 자세를 가져주셔야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목사를 보호해주셔야 됩니다. 목사가 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목사는 항상 중립적 위치에서 일할 수 있도록 보호해주셔야 합니다. 다윗은 제사장으로 하여금 다윗편도 아니고 압살롬편도 아니라, 그 중간에서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일할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참다운 하나님의 일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 강성교회 성도님들, 목사를 그렇게 만들어 주시기바랍니다. 그래서 교인들 눈에 목사가 누구편이다 누구를 더 좋아한다. 그런 표현이 안 나오도록 여러분 스스로 좀 막아주시기를 바랍니다. 목사가 사업에 정치에 영향을 받아서 되겠습니까 아, 목사가 여당주의다 야당주의다 그런 소리 들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한국적 상황은 참 안타까워요. 저는 오늘 아침에도 참 마음이 아팠어요. 국민을 지켜야 될 경찰이 국민을 죽이는 이 사회,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 생명 하나 우습게 여기는 이 세대, 이런 지도자들. 마음이 아파 죽겠습니다. 여당 야당을 떠나서 이건 안 되는 일 아닙니까 안 되는거예요. 국민 하나가 죽을 상황이면 자기가 물러나야죠. 국민이 죽을 상황이라면 자기가 물러나야죠. 국민을 죽이면서까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하면 이건 아니될 말입니다. 이건 안돼요. 이것은 마음 아프게 기도해야 할 부분입니다.
오늘날 기도하지 않아서 그래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우리는 너무나 기도를 안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나 목사들이 나서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교인들이 “목사님은 왜 가만 있습니까 이런 걸 보고도 왜 가만 있습니까 좀 나서서 비판도 하고 따져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게는 만들지 마십시오. 그것도 안 됩니다. 목사님들은 정치에 휘말려서는 안 돼요. 더군다나 우리 한국적 상황에서는 옳은 말을 해도 그 옳은 말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저거 반대편이구만.” 그러고. 또 잘할 때 잘한다고 하면 “저거 여당이구만.” 그러지 않습니까 우리 한국 상황은 그래요. 그러니 여러분들 그거 요구하지 말라구요. 특히 우리 젊은친구들 목사들한테 불만이 그거예요. 대학교에만 들어가면 대학교에서 물을 먹이거든요. 목사님들 왜 가만 있습니까 교회에 가가지고 왜 이 따위로 믿습니까 아, 교회가 정치세력이에요 아, 교회가 정치하는 곳이에요 목사는 정치적인 분쟁에 휘말려서는 안 돼요. 젊은 친구들 아시겠어요 목사는 뭐만 해야 돼요 말씀 전하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해야 되고, 하나님 섬기는 일에 전념해야죠.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목사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지켜야 될 뿐만 아니라, 교인들도 그렇게 만들어 주어야 됩니다. 우리 교인들 중에도 여당, 야당, 있잖아요. 틀림없이 있다구요. 여당 지지하는 교인도 있고 야당 지지하는 교인도 있어요. 아, 여당 지지하는 교인들이 목사한테 은밀히 이야기합니다. 압력을 넣어요. “목사님 좀 지지 좀 하셔야죠.” 그리고 야당 쪽에서도 “목사님, 지지 좀 하셔야죠.” 아 그러면 목사는 어느 장단에 춤출 거예요 기억하셔야 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 아니라는 걸 기억하십시오. 다윗은 사독더러 “너는 제사장이 아니냐.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전념해라. 나를 따라왔다가는 분쟁에 휘말린다.” 그말이에요, 사랑의 여러분, 다윗은 제사장과 법궤가 함께 하지 않음으로써 큰 힘을 잃어버리는 겁니다만 자기는 많은 손해를 보는 겁니다마는 하나님을 제 위치에 모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을 제사장 위치에 놓아두었습니다. 목사 가지고 장난치지 마십시오. 목사 가지고 여러분들의 명예와 여러분들의 일에 이용하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는 오직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인의 장막을 쳐주셔야 됩니다. 그러한 우리 강성교회의 장로, 집사들이 되어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강성교회가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오늘 주신 말씀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은헤가 더욱 중요하다는 걸 깨닫고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일에 더 열심하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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