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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새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삼하15:30-37)

본문

한 달 만에 사무엘하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오래간만에 돌아왔기에 조금은 생소해서 그 동안 함께 상고했던 15장 앞 부분을 다시 한번 잠깐 보면서 오늘 본문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앞에 보면 다윗이 도망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앞에서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고 또 그 사람들 대다수가 압살롬을 따름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할수없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수도를 버리고 도망을 가게 됩니다. 우리가 13절에서 23절까지의 다윗의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알게 된 것은 다윗을 따르는 무리가 소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부분을 통해서 깨달은 것은 다수라고 해서 항상 진리는 아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교회의 일에 있서서 항상 많은 사람이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진리는 아니에요. 하나님의 뜻은 소수에 의해서 지켜질 때가 종종 있고, 기독교 역사상 전체적인 조명을 놓고 보면 오히려 소수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지켜질 때가 더 많았음을 오늘 우리는 압니다. 그래서 다수라고 항상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과 또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바른 안목을 가진,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분별할 줄 아는, 깨어 있는 성도들이 항상 진리를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도망가는 다윗을 따르는 소수의 무리를 통해서, 가드 사람들을 통해서, 그리고 또 가드에서 따라 나왔던 육백 명의 용사를 통해서 우리는 정말 처음부터 주님 앞에 충성하는 복된 자들이 돼야 할 것을 생각해 본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24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서 제사장들이 그 하나님의 법궤를 내려 가지고 다윗과 함께 도피하는 데 가려고 할 때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예루살렘 성으로 다시 돌려보낸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다윗의 주권적 신앙을 생각해 본 바가 있습니다. 법궤가 같이 간다고 해서 형통한 길이 열리고 법궤가 같이 가지 않는다고 해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다윗의 신앙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에 따라 움직여서는 아니 되며, 오히려 우리가 그 분에 의해서 움직이는 존재가 돼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편리에 따라서 움직여지는, 우리의 요구에 따라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왔다가 또 멀어지는 그와 같은 존재로 되고 있음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사와는, 우리의 결정과는 상관없이 계서야 될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모셔져야 할 자리에 모셔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주권적인 위치에, 오늘 우리 가정에서도 가장 주권적 위치, 그리고 내 마음에서도 가장 주권적인 위치에 계서야 될 것을 우리가 상고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생각해보았던 것은 바로 다윗의 바른 직분관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자기를 따르고 또 자기가 제사장들을 데려가는 것은 천군만마를 얻은 것보다 더 큰 힘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제단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종은 그 맡은 직분을 잘 감당해야지 이런 전쟁에 휘말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 제사장들을 데려 가지 않고 도로 돌려보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만 충실히 해야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사는 목사의 위치에서 충실히 해야지 세상 정치 세력을 위해서나 또한 성도들의 경제적인 활동을 위해서나 어떤 이권적 타산을 위해서 이용돼서는 안 될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목사는 항상 정치와 세상 이권과는 거리를 두고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 전하는 데에만 최선을 다해야 될 직분임을 우리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요즘에 또 광역의회가 생기고 그러니까 만나자고 하는 사람이 자꾸 생겨요. 목사한테는 그런 요구를 안 하시는 게 좋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그런 요구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만 우리 교회 교인들이 아닌 교인들이 자꾸 만나서 식사한번 하자고 해요. 거기다 장로님과 집사님 여러분들과 함께 나와달라고 내가 그랬지요. “뭔가 착각을 하고 계십니다. 아마 그렇게 제가 모시고 나가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겁니다.” 여러분, 이런 걸 볼 때마다 우리가 바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목사는 그런 영향력을 행사할 사람이 아닙니다. 목사가 이런 이런 사람이 돼야 합니다 하고 말해주면 좋을 때도 있지만, 안 좋은 때가 더 많아요. 그 다음에는 다른 것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해달라는 요구가 들어와요. 그러다 보면, 휘말리다 보면 목사는 제 갈 길을 못 가는 것입니다. 목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여당을 할 수 있고 야당을 할 수도 있어요. 그리고 저도 여당을 할 수도 있고 야당을 할 수도 있어요. 그것 가지고 서로 이용하지 맙시다. 다윗은 도망을 가는 자기에게 제사장들이 따라온다면 그것은 그 어떤 세력을 얻은 것 보다 더 큰 정치적인 의미가 있음을 잘 압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 하면 그건 정치적으로 막강한 세력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압살롬이 점령한 그 성에 그대로 남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런 영향력을 자꾸 행사해 달라는 요구가 들어옵니다. 그 전에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목사가 유명해지고 교회가 커지면 인천 시장부터 자꾸 보자고, 또 인천 시경 국장부터 자꾸 보자고 하게 돼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하면 우리 성도들이 사업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 번은 발목이 잡힌다는 걸 기억하세요.
앞으로 여러분들이 사업하실 때나 어떠한 직장생활을 하시면서 문제가 있을 때 목사를 통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목사가 전화 한 통화 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있어요. 그러나 언젠가는 전화 한 통화 하면 또 도와줘야 될 일이 다시 돌아옵니다. 항상 주고난 다음에는 요구해 오는 세상풍속 아닙니까 그리고 그런 부분에서 목사가 다치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좀 손해를 감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세무사찰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목사는 거기에다 개입을 안 시키는 것이 신앙생활에 장기적인 안목에서 유익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함께 기억을 해야 되겠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을 드리면서 언급한 내용입니다만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30절과 31절에 있는 말씀을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30절에 보면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그랬어요. 여기에 보면 감람산이라는 산이 나오는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조그마한 야산입니다. 이 감람산은 유명한 산이죠. 예수님이 종종 올라가서 기도하시던 산이며, 또 제자들과 함께 강론하시던 그 산입니다. 이 다윗이 이 산을 넘어가면서, 도망가는 것이지요, 도망가면서 머리를 풀어가지고 얼굴울 가리우고 그 다음에 맨발로 울면서 그 길을 걸어 갔다고 그랬고, 그를 따르는 신하들도 그렇게 머리를 가리우고, 얼굴울 가리고 울면서 다윗을 따랐다고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어요. 오늘 이 모습을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왜 울고 갔느냐 아들한테 배신을 당하는 그 아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가장 가까운 다른 측근에게 배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아들한테 배신을 당하는 게 마음은 좀 편할 것 같아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 생각으로는 부모된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럴 것 같아요. 그 왕좌라고 하는 것은 어차피 자기가 죽으면 아들들한테 물려줄 왕좌인데 다른 사람이 차지하는 것보다는 아들이 차지 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어요 그리고 똑 같은 배신을 당한다 할 때 어떻게 생각하면 아들한테 배신당하는 것이 좀 더 낫지 않겠어요 가슴이 무척 아플 것 같지만, 부모자식간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볼 때 그럴 것 같아요.
여러분들이 부모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다윗이 왜 이 예루살렘 성을 그렇게 쉽게 나가는지 좀 이해할 수 있지 않습니까 다윗이 오늘 여기서 머리로 얼굴을 가리우고 눈물을 흘리면서 맨발로 도망을 갔다는 것은 단순한 배신에 대한 아픔만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주목해야 될 대목은 맨발로 걸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맨발로 도망가는 사람은 제일 우선적으로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신발이에요.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군화예요. 군화가 발에 안 맞으면 전쟁을 제대로 못합니다. 아파서도 제대로 못하고 또 작전상 후퇴할 때 도망을 못 가요. 그래서 이 신발이라고 하는 것은 도망을 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신발이 없이 맨발로 얼마나 도망을 치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이 맨발로 걸어갔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지금 회개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울면서 가는 것은 왕좌에서 쫒겨난 것과 또한 아들한테 배신을 당한 것 때문에 슬픔이 극에 달해서라기보다는 좀 더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이러한 상황 즉 골육간에, 부모자식지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가정이 파탄되는 이와 같은 상황은 바로 자기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고 간음한 결과임을, 그리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서 그 죄없는 의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인 그 죄악의 결과임을 다윗은 깨달은 것입니다. 자기의 죄악의 결과로 이와 같은 아픔이 온 것을 깨닫고 다윗은 지금 눈물을 흘리며 이 길을 떠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의 삶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어려운 문제를 직면할 때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그 어려움으로 인한 좌절과 아픔과 자존심 상함과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서 슬퍼할 줄 알고 눈물흘릴 줄은 알지만, 오늘 그 좌절이 그 실패가 왜 내게 찾아왔는가, 그 쓰라린 상처가 왜 내게 발생됐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고, 나타나는 현실에 대해서만 마음 아파하고 사람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우리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 그 문제 발생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바로 직시할 줄 아는 영적인 사람들이 돼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나타나는 현실을 판단합니다. 다윗의 딱한 입장에서 보면 그는 배신한 아들을 원망할 수 있지요. 그리고 그 배신한 아들을 추종하는, 지금까지 자기를 따르던 수많은 신하들을 저주하며 원망하며 슬퍼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 다음 장에 나타나는 다윗의 모습을 보며 그것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장에 보면 시므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도망가는 다윗에게 돌을 던지고 흙을 뿌리면서 저주합니다. 그때 다윗의 측근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합니다만, 다윗은 말하기를,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쳐서 내가 이렇게 도망을 가고, 내가 이런 상황이 됐는데 저 사람이 나를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하나가 아니냐. 저 사람의 성미를 건드리지 말아라.”라고 합니다. 다윗의 그런 모습을 보면, 다윗이 지금 이렇게 도망가며 슬퍼하는 모습은 자기의 현실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현실이 나타난 원인, 즉 자기의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채찍에 대하여 회개하며 슬퍼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세상을 살아가면서 다윗이 당한 이와 같은 아픔들을 다 경험합니다. 어느 때는 친구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어느 때는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합니다. 어느 때는 정말 마음 아파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안타까운 일들을 당합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어떠한 모습을 나타냅니까 환경을 원망하지는 않습니까 사람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 어떠한 자라도 우리에게 대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안타까운 상황에서 우리의 자존심 상함과 좌절과 아픔 때문에 슬퍼할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그와 같은 좌절을 맛보게 하시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문제를 바로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을 원망합니다. 환경을 탓합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어떤 일 때문이라고 아닙니다. 오늘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바로 나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1절에 보면 이렇게 회개하는 다윗이 도망을 치는 과정에서 안타까운 소식을 하나 더 듣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다윗이 가장 신임했던, 그것도 작전참모였던, 모든 지략과 모든 계획과 지혜로 도와주었던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신하고 그 아들 압살롬의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아히도벨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고 그래서 왕의 측근에서 왕을 도와준 참모 중에 참모였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다윗에 대하여, 그리고 다윗의 진영에 대하여,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지략과 그들의 작전계획과 그들의 모든 형편에 대해서 정확하게 꿰뚫고 있던 사람, 다시 말씀드리면 다윗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사람이에요. 이 아히도벨이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의 편에 섰습니다. 이 소식은 다윗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것입니다. 아히도벨이 볼 때 다윗은 손바닥 안에 들어 있는 것과 똑 같습니다. 다윗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까 이제 앞으로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전략과 어떤 계획을 세울 것인가 하는 것까지 벌써 훤히 다 내다보고 있는 사람이 아히도벨입니다.
그런데 그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섰다는 이 소식은 다윗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소식입니다. 그래서 다른 부분은 몰라도 다윗이 이 부분에 와서 보면, 31절에 보면 이렇게 말을 합니다. “아히도벨이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압살롬 편에 섰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데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될 것은, 다윗이 도망가는 이 와중에서 치명적인 소식을 들으면서, 더 절망적인 소식을 들으면서 그가 취한 행동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31절에 있는 말씀이 오늘 우리가 신앙생활 함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서 막상 쉽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무엇입니까 이런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 다윗이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앞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탄식하지 않습니다. 아히도벨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해도 너무합니다. 적당히 때리십시오.”라고 하나님 앞에 대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다윗은 도망가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한 기도 한 마디를 던집니다. “오, 나의 주여, 저를 어리석게 하옵소서.”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저의 지혜가, 저의 조언이 어리석게 하옵소서.”라는 이 한마디의 기도. 무릎을 꿇고 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지금 울면서도망을 가면서 소식을 들으면서 이 소식을 듣자마자 그냥 한마디 툭 던집니다. “아버지여, 나의 주여, 아히도벨이 조언하는 그 조언이 어리석게 하옵소서.” 여러분, 야고보서 5장 16절에 보면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그랬어요. 많은 기도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진실된 마음으로 진실되게 회개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적에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적 상황과 큰 아픔이 있을 때에 기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절망적 살황일 때에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진짜 극심한 절망에 빠져버리면요 사람이 자포자기하기가 쉽지 기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런 절망적 상황과 큰 아픔이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는 것은 큰 일입니다. 정말 도저히 방법이 없을 때에 기도한다는 것은 정말 큰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가능성이 없는데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게 아닙니까 여러분, 사업이 잘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기가 쉬워요 일이 잘될 때에는 하나님 믿기가 쉽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뭐가 잘되면 신앙생활이 재미가 있어요. 바람이 불어야 쭉정이는 날아가고 알곡은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환란이 왔을 때에 그 사람의 신앙의 진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오늘 이 다윗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절망적 상황에 빠졌을 때가 바로 기도할 때라는 사실, 그리고 그것은 적은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비록 짧은 기도이긴 하나 이 다윗의 짧은 기도가 아히도벨의 그 막강한 지혜와 그의 조언을 어리석게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이 다음 장에 보면 그의 지혜가 얼마나 어리석어졌는가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은 끝내 자기 지략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자기 고향에 내려가서 목을 매고 자살을 하고 맙니다. 왜요 자기 집에서 살 기력이 없거든요. 자기가 섬기던 다윗을 배신하고 압살롬을 따랐는데 압살롬은 자기 말을 들어주지 않거든요.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다윗이 심어 놓은 후새가 들어와서 한 마디 던지는 말을, 압살롬이 그 후새의 말을 더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히도벨이 자기의 지략이 통하지 않는 것을 보고 고향에 내려가서 자살하고 맙니다. 여러분,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다윗의 간단한 한마디 기도의 응답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32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이 얼마나 기가막힌 장면입니까 다윗이 울면서 하나님 앞에 한마디 기도를 던집니다. “아버지여, 주여, 저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색케 하옵소서.” 그 기도가 떨어지고 조금 행하니까, 평상시 다윗이 하나님을 섬기던 산에 올라갔을 때에 후새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 사람도 또한 지략가입니다. 다윗이 이 사람을 보자마자 깨닫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자기의 기도의 응답이란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후새가 자기를 따르겠다고 할 때에 다윗이 말합니다. “너는 나를 따르지 말고 나를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압살롬의 신하가 되라. 그리고 네가 지략을 동원해서 의견을 내놓아서 아히도벨의 의견을 네가 무색케 하고 궁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게 연락을 취해 달라.” 그래서 후새를 궁중으로 보냅니다. 그 결과가 나중에 압살롬이 자기의 측근인 아히도벨의 말을 듣지 않고 이 후새의 의견이 더 지혜롭다고 받아들이므로서 압살롬의 반역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이런 극한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도 다윗이 기도했을 때에 바로 그 다음 절에 하나님의 응답이 신속하게 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기억해야 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바로 이런 환경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의 응답인 줄 모를 때가 참 많아요. 하나님의 응답은, 그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색케 해달라는 다윗의 기도의 응답은 바로 후새라는 사람을 통해서 다윗에게 옵니다. 다윗은 이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후새를 데리고 같이 도망가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들여 보내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기억해야 될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슬픔에 빠져 있을 때 안타까울 때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선 여러분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다윗처럼 정말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과 불순종한 것을 회개하면서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선 여러분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리고 그 응답은 환경을 통해서, 사람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때 우연이라고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때 누가 나를 도와왔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다윗이 두고 두고 후새가 나를 도왔다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요. 물론 후새가 도운 충성심은 인정을 해야지요. 그러나 그 후새를 보낸 것은 하나님 아닙니까 그 후새의 의견이 압살롬에게 있어서 아히도벨의 의견보다 더 낫도록 여겨지게 하며 또한 그가 그 의견을 취하도록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까 분명히 아히도벨의 의견이 더 정확한 의견이고 다윗을 추격하고 다윗을 진멸시키는 데는 더 정확한 의견이잖아요.
그런데 압살롬이 그것을 모릅니다. 아히도벨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여 지금 나에게 군사를 주십시오. 그러면 다윗이 도망가다가 요단강을 아직 안 건넜는데, 지금 이렇게 지쳐 있고 정신이 없을 때에 이 밤에 기습을 해가지고 완전히 진멸합시다. 그래야 후환이 없습니다.” 후새는 말합니다. “왕이여,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역전의 용사가 아닙니까. 그렇게 급하게 치다가는 오히려 당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시간을 좀 두고 군인들을 다시 모아가지고 전력을 재정비해가지고 완전히 포위해서 없애버리면 깨끗하게 없애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후새는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때 상황으로는 다윗을 따르는 사람의 수는 얼마 안 돼요. 그리고 지금 경황도 없어요. 그날 밤에 그저 몇천 명만 가서 쳐버리면 긑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압살롬은 그 계획을 따르지 않고 후새의 의견이 더 좋은 의견인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맞다. 우리 아버지가 역전의 용사가 아니냐 분명히 도망을 가면서도 무슨 함정을 파놓고 도망갔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그냥 치다가는 우리가 당하니까 네 말이 맞다. 대낮에 전력을 제정비해가지고 수많은 군대를 동원해가지고 완전히 포위해서 한꺼번에 없애버리는 것이 더 좋은 편인것 같다.” 그래 가지고 말미를 줍니다. 시간적 여유를 주었어요. 그 동안에 다윗은 요단강을 건너서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다윗이 도망가서 전력을 재정비합니다. 오히려 다윗이 전력을 재정비해요. 그런 시간을 버는 겁니다. 이런 두 가지 의견 가운데 하나를 취하는 것은 압살롬입니다. 압살롬이 의견을 취할 때 어느 것을 취하느냐 하는 것은 압살롬의 지혜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후새의 의견을 취하도록 했다 그랬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요, 어떤 것을 결정하는 데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환경을 역사하실 때 환경을 통해서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의 손길을 여러분들이 발견하십시오. 여러분들이 그냥 사는 것 같고, 여러분이 사업하는 것 같고, 여러분이 직장생활 하는 것 같고, 여러분들이 어떤 환경에 직면하는 것 같지만 오늘 그 환경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다윗은 이것을 보았어요. 그래서 그는 실패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회복을 받는 축복을 받습니다. 오늘 비록 짧은 구절이지만 이 말씀을 통해서
첫째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에게 절망적 상황과 아픔이 찾아올 때 그 절망 때문에, 아픔 때문에 슬퍼하지 마시고 오히려 그 절망적 상황이 내게 왜 왔는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앞에서 문제를 깨닫고 슬퍼하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그때가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갈 기회이고 그때가 바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선 여러분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되 하늘에서 음성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렇게 후새를 통해서 응답하시는 것처럼 여러분에게 사람을 붙여주시고 환경을 변화시키시고 여러분의 안타까운 환경들을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직면할 때에 슬픔을 당할 때에 성도들이 어떤 모습을 해야 될 것인가 오늘 다윗을 통하여서 우리가 다시 한번 생각을 해보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아픔과 슬픔이 찾아올 때에 성도의 바른 모습을 보여 줄 수 있는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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