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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영광을 누리는 자들 (삼하2:3-4)

본문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다윗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감격적이고 또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어린 소년 때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시대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였던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후 그는 마음 속에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라는 사실을 깊이 간직하고 여전히 들판에 나가서 양을 치는 목자의 생활을 하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심부름으로 전장에 나가서 골리앗을 쳐 죽이고 영웅이 된 다음에 이스라엘의 부마가 되는 출세와 부귀를 한 몸에 누리는 그와 같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상고해 보았듯이, 자그만치 10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왕의 미움을 받아 쫓겨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한 순간도 편하게 잠을 잘 수 없는 불안과 초조, 공포 가운데서 도망다녔습니다. 어느 때는 비굴하게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아부하며 자기 생명을 지킬 수 밖에 없었던 다윗의 생애를 뒤돌아본다면, 오늘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모습은 그 일생 가운데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감격적인 순간이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다윗이 다음과 같이 여호와 하나님께 물어 보고 유다 땅에서 다시 시글락 땅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좌는 비어 있습니다.
사울왕은 전장에서 죽었고 이스라엘은 전쟁에 져서 백성들의 민심은 흩어져 버렸습니다. 왕이 없는 상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마음 속으로 흠모의 대상이었던 다윗의 입장에서는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었지만, 다윗은 그 기회를 자기 스스로 잡아서 왕이 되려는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 유다 땅으로 돌아가야 될지를 묻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그의 삶이 많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더러 헤브론으로 올라가라고 하셨고, 다윗은 그 말씀대로 헤브론으로 올라갔습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에 보니, 다윗이 그 두 아내와 함께 올라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성경이 왜 이렇게 두 사람의 이름을 계속 기록하고 있는가 두 아내, 이스라엘 여인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사람 아비가일의 이름이 왜 이렇게 다윗이 가는 곳마다 다윗이 옮기는 때마다 같이 기록되고 있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3장에서 또 다시 언급되기 때문에 그때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함께 영광을 누리는 다윗 3절에 보니, 다윗이 그와 같이 함께했던 군사들이 함께 헤브론의 각 성에 유하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과 함께 고통을 나누었던 800여 용사들 그리고 그 가족들, 비록 그들이 다윗을 배신한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다윗을 따랐던 그들은, 오늘 본문에 보니, 헤브론에 올라 가서 각 성을 맡아 거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다윗이 헤브론에 올라 가서 통치권을 발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들도 함께 그 통치권 영역 안에서 누리기 시작한다는 말이지요. 오늘날로 보자면 시장이나 구청장쯤 되겠지요. 다윗과 함께 고난을 받았던 자들이 다윗과 함께 영광을 같이 나누는 모습이 기록되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를 위해서 고난 당한 자들, 나와 함께 고난 당한 자들은 나와 함께 그 기업에서 그 영광을 누리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해 핍박을 받고 나를 위해 고난을 받는 자들, 나를 위해 욕먹는 자들, 나를 위해 피해를 당하는 자들, 나를 위해 전토와 그 아내와 형제를 버린 자들은 이 땅에서도 내세에서도 그 상급을 받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와 함께 영광에 동참하겠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를 부부로 비유하실 때가 있습니다. 나는 남편이고 너희는 나의 신부라고 비유하셨는데, 부부의 성격 가운데는 영광을 함께 나눈다는 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남편이 출세하면 그 부인도 그 남편이 출세하는 만큼 영광을 받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부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부부라는 것은 함께 고난도 받고 함께 영광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 신부다. 너희와 나는 하나다.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자들, 아니 주님과 함께 고난을 당하는 자들,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위하여 헌신하는 자들, 그들은 그 영광의 날에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눌 것이고, 주님과 함께 그 영광을 나눌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도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6장 8절과 갈라디아서 6장 8-9절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수고가 헛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상당히 외로운 길입니다. 다윗을 추종했던 800여 군사들은 사실 큰 모험을 한 것입니다. 다윗을 따른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외로움의 길이었고, 자기들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는 생활이었습니다. 그 당시 실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부귀와 풍요로움을 줄 수 있는 사울을 따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었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길이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이 삶을 살아는 우리의 눈 앞에는 이 세상의 문화와 세상의 명예와 물질과 권세가 클로즈업되고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한테 이런 말을 하지요. 내 앞에 엎드려 절을 하라. 그러면 내가 세상 영광을 네게 다 주겠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더러 똑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출세하려면 하나님을 따르기보다는 세상 풍속을 따라야 한단 말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 있는 말씀처럼 세상 풍속을 쥐고 있는 사탄의 권세를 따라야 세상에서는 출세할 수 있고 잘될 수 있다고들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사조가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느 것이 지혜롭다고 말합니까 정말 곧이곧대로 말씀 대로 살아가면 미련하다고 말합니다. 꽉 막혔다고 표현해요. 예수 믿으면서도 그저 슬쩍슬쩍 잘 빠져나가면 그런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해요. 사실 그 시대에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미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이 사람들 가운데 절반은 어쩔 수 없이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다 지명수배 받고 동네에서 불량아로 낙인 찍혀 쫓겨난 사람들 아니면 죄를 짓고 도망다니던 사람들이었거든요. 이런 사람들이 광야에 있는 다윗을 찾아와서 따랐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스스로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비교해 보면,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과도 비슷해요. 세상에서 성공해서 잘될 때에는 예수 모르고 살다가, 건강할 때에는 예수 모르고 살다가, 편안할 때에는 예수 모르고 살다가, 일이 망쳐지고 사업이 망하고 직장에서 어려움 당하고 가정에서 어려움 당하고 이모저모로 건강이 악화되고 괴로움을 당할 때에, “아, 안 되겠다. 이제는 마지막 방법으로 예수를 믿어보자.” 이렇게 생각하고 예수 따르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지요. 사실 우리가 예수 처음 믿을 때, 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믿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런 사람들이 반 정도는 될 거에요. 그러나 반은 정말 예수를 따르고 싶어서 따르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나 어떤 이유로 예수를 따르든지 간에,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외로운 길인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고 하니, 예수를 제대로 따르려 하다 보니, 세상 친구와 점점 멀어지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옛날에 친구 많았지요
그런데 예수 믿고난 다음부터는 친구가 점점 떨어지지 않습니까 외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고난 다음부터 보니까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가 통하지 않습니다. 적당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갈등이 생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다 보니까 갈등이 참 많지요 목회하다 보면 이런 말을 종종 들어요. “목사님, 솔직히 말하자면, 이럴 줄 알았다면 예수 안 믿었을 거에요. 이렇게 괴로울 줄 알았다면 예수 안 믿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말을 목사인 제게 하시는 것을 보면, 이제 신앙생활 그만두겠다는 뜻이 아니라, 이제는 이미 되돌아설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는 그런 고백 아니겠습니까 진짜 그만둘 사람 같으면, 그런 표현 하지도 않고 그냥 그만두지요. 사실 그런 표현이 나올 정도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을 하십시오. 예수를 따르는 것이, 다윗을 따르는 것이 참 괴롭고 외롭고 어렵고, 세상적으로는 지혜롭지 못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나중은 어떻습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 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난 순간부터 그 불안하고 쫓기고 동네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하던 그들이 이스라엘의 공신들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에서는 쓸모없는 사람들, 세상에서는 실패한 사람들, 세상 사람들이 다 손가락질하던 그런 미련한 사람들, 그래서 오고갈 데 없어서 다윗을 따르던 그들이, 이제는 이스라엘의 구국의 공신들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처럼 사람의 모습을 바꾸어 놓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 가운데에 참으로 하찮은 존재에서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가꾸어져 가는 그러한 은혜가 있음을 우리는 기독교 역사를 통해 많이 보고 있습니다. 멀리서 예를 찾을 것 없어요. 바로 저를 보십시오. 아까 어느 분이 저더러 출세했다고 말씀하시더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굉장히 출세했다고 생각합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제가 목사가 되지 않았더라면 세상에서 누가 여러분들처럼 그렇게 저를 알아주겠습니까 그런 그릇도 못 돼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사울을 따랐던 사람들은 부귀영화를 누렸습니다. 출세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울이 망하자 함께 망했습니다. 영원히 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은 다윗과 함께 계속 그 영화를 누립니다. 그들의 왕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세상 방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집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 3절에 보십시오. 다윗을 따랐던 자들이 다 각 성에 거하더라고 되어 있지요 지금까지는 함께 살았지만 이제는 흩어져서 한 성씩 차지하여 누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윗의 왕권이 확대되면 될수록 그들의 영역도 확대되기 시작합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 모두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누려지는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과 같은 세상 세력을 좇아서 누리려고 하지 마세요. 어둡고 지루하고 힘이 들어도 진정한 복 영원한 복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저와 여러분이 분복을 누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누려지는 복 그러나 오늘 우리가 함께 생각하여야 할 중요한 말씀은 4절의 말씀입니다. 저는 4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보았습니다. 우리 다 함께 읽어 봅시다. “유다 사람들이 와서 거기서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유다 족속의 왕을 삼았더라 혹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사울을 장사한 사람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니이다 하매” 여러분,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의문이 하나 생기지 않습니까 저는 이 본문을 보면서 이런 질문이 생겼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 이렇게 간단하게 짤막하게 기록하고 계신가 다윗이라는 사람은 자기가 왕이 되고 싶어서 된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왕이 되라고 13년 전에 기름부어 주셔서, 그래서 그동안 참으로 온갖 연단 다 받아가면서 죽으라 고생하여 이제 드디어 왕이 되었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도 짤막하게 딱 한 구절, 그냥 쓱 지나가는 말처럼 기록하고 계신가” 저는 이것이 참 궁금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읽어본 다윗의 연단 과정을 보면, 참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실패하고 용기를 잃고 도망다니고 할 때의 일은 그렇게 자세히 기록하시면서, 왜 이 사건은 이다지도 소홀히 기록되고 있는가 여러분, 저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은근히 화가 났어요.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냐면요, 제게는 다윗의 그 13년 동안의 고생이 자꾸 생각이 나서지요.
그런데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다 함께 따라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당한 고난과 수고는 우리의 공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오해하진 마세요. 그 고난과 수고가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가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어떤 공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지금까지 목회를 해 오면서, 특히 이 교회를 건축하는 과정에서 이런 생각을 순간적으로 해본 적이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 많았거든요. 고생이 많았지요. 참으로 여러분들 모두 고생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총 책임을 맡고 있으니 그 중압감이란 이루 말을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지요.
그래서 제 얼굴도 말이 아니었지요. 건축하다 보면, 날마다 철야기도 해야지요, 금식해야 지요. 그러니 바짝 말라서 보기가 흉할 정도였지요. 속도 아프고요. 그리고 마음이 상하는 일도 많았지요. 그럴 때마다 마음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 이렇게 했으면 뭐 좀 누리는 게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나님, 이 정도 했으면 이제 좀 누려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셔요. “내가 언제 목사 되고 싶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목사 되라고 해서 목사가 되었고, 또한 그러기 위해 나의 모든 꿈을 포기했고, 지금까지 이렇게 살았는데, 이제 뭔가 좀 아름답게 풍성하게 나타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도 마음에 소원이 있단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다시 한번 제 마음에 깨닫게 하시는 것은, “이목사야, 이철호야, 너라는 보잘것없는 존재가,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너는 다윗처럼 일평생 양의 틈바구니에서 광야에서 이슬을 맞아가며 양의 똥냄새나 맡아가며 그렇게 살지 않았겠느냐 네가 그런 존재 아니었느냐 네가 고생을 많이 했고, 잘 견디어냈고, 잘 참고 잘 인내해서도 아니고, 네가 열심히 충성해서도 아니다. 내가 너를 이 자리까지 인도한 것이다.” 무언의 말씀이 이 본문 속에 숨겨져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철호야, 오늘날 네가 이 자리까지 서게 된 것은 네가 수고해서 네가 땀흘려서 네가 능력 있어서 네가 열정이 있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다. 너는 그 때마다 도망가고 싶어했고 그것을 피해 가고 싶어했고 그렇게 살기를 원치 않았지만, 내가 너를 붙잡았고 이 자리에까지 인도하지 않았느냐 네가 나를 위해 산다고 말하지 말아라. 네가 본래의 네 모습보다 더 존귀해 졌고 더 가치있어 지지 않았느냐” 하는 이 음성이 이 말씀을 통하여 제게 들려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곧 잘 그런 착각에 빠집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열심히 일했고 주님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생각하고는 어떤 결과를 기대합니다. 충성한 만큼 하나님의 복을 기대합니다. 헌신한 만큼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네가 나를 위해 쓰임 받는다는 그 사실 자체가 영광이 아니겠느냐 네가 이 자리에 나와서 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찬송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에게 영광이 아니냐 네가 나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고 헌신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이 귀한 것 아니냐”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무슨 생각을 합니까 저도 질문이 생긴단 말이에요. 다윗이 13년 동안이나 고생하면서 이 일을 잘 해냈다면 이것이 멋있게 기록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지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여러분 표정을 가만 보니, 저 혼자만 감격하고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이 자리에 나온 게 뭐 감격스러운 일인가 내가 입술을 벌려 찬송을 하고, 내가 이 자리에 나와서 주일 지켜 주는 것만으로도 목사님이 내 얼굴을 쳐다보면서 “아, 당신 나왔군요. 고맙습니다.”라고 해 줘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하는 표정인 것 같에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나타내고 싶어합니다. 하나님 앞에 인정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맞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에 조금이라도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우리의 공로로 내세우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수고와 공로는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역사에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감격해야 할 것이고, 독생자를 피로 값주고 나를 사서 구원해 주신 그 분을 위해 내가 헌신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마음 속에는 정반대의 욕구가 있습니다. 조금 고생했다 수고했다 싶으면 우리 마음에는 “그래도 내가 이 교회의 초창기 멤버인데. 아, 집사님은 몰라. 이 교회 건축할 때 보통 고생한 게 아니야.” 건축하는 현장에서 일했던 집사님들한테서 이런 말들이 나온단 말이에요. “아이구, 그때는 얼마나 고생했는데. 요즘이야 편하지, 뭐.” 이런 말들이 무슨 말입니까 “교회 건축 끝나고 들어온 당신들은 뭘 몰라. 그 당시 우리들이 얼마나 고생했는데.” 하는 뜻 아닙니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런 생각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한 가지 질문을 하여야 합니다. 내 마음 속에는 이런 요소들이 이런 생각들이 이런 기대들이 없는가 우리는 기대하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이 자리에 나와서 주의 도구 되는 사실에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돼요. 우리 모두는 이제 참으로 존귀한 존재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에 있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어떤 교훈이 주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13년 동안이나 고생한 끝에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이 모습이 왜 이다지도 초라할 정도로 기록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나의 공로 나의 헌신을 내세우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러한 생각들이 없어지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오늘 4절에서 함께 생각할 부분이 더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다음 주에 상고해 보도록 하고, 오늘은 일단 3절과 4절에 있는 말씀을 통하여,
첫째 다윗과 함께 고난을 당했던 자들이 함께 기업을 누린다는 사실을 알고, 오늘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당하는 여러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다윗을 따랐던 길은 세상적으로는 지혜로운 길이 아니고 현명한 길이 아니라 바보 같은 길이었고 미련한 길이었지만, 그 길을 걸음으로 해서 그들이 더 큰 영광과 복을 누렸던 것처럼, 오늘 세상에 잠깐 있다가 없어질 것 때문에 약삭빠르게 현실적응을 하기 위해 주님의 곁을 떠나는 어리석음이 저와 여러분에게 없길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그래서 그 결과로 얻어질 영광과 복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나의 공로로 얻어지는 것인양 착각하여 하나님 앞에서 누려야 할 그 기쁨과 은혜와 복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다시 한번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복된 시간들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길 주의 이름으로 부탁 드립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가 그 시대에 버림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원해서 따랐던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보면 고생길을 택한 사람들이었고, 지혜롭게 처신할 줄 모르는 답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결국은 그들이 다윗과 함께 기업을 누리는 것을 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넓은 길로 가지 말라. 그 길은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지만, 그 길은 넓고 편한 길이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다. 너희는 좁은 길로 가라. 그 길은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고 가기가 어렵지만 그 길은 생명의 길이니, 너희는 좁은 길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 오늘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어려운 길 같고, 참으로 세상적으로는 미련한 길 같이 생각되지만,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길이 진정한 생명과 은혜와 복을 누리는 길임을 깨닫고, 그 길을 걸어가기에 부족함이 없는 저희들이 되도록 지혜를 주시고 용기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오늘 또한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응답을 우리가 봅니다. 13년 동안이나 눈물 뿌렸고, 인간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그 모든 일들을 체험하며 고난의 길을 걸었던 다윗이 드디어 하나님의 약속 대로 왕위에 오르지만, 오늘 그것이 너무나도 초라하게 성경에 기록되는 모습을 바라볼 때 우리 마음에 아픔이 있습니다. 왜 이렇게 기록되어야 하는가 좀 더 멋있게 좀 더 풍성한 모습으로 왕위에 오르지 못하는가 아버지, 오늘도 우리의 마음 속으로는 우리의 공로가 나타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고한 만큼 아름다운 것들로 누리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우리의 마음 속에 이러한 생각들이 없어지길 원합니다. 우리의 모든 수고와 헌신은 주님의 십자가 뒤에 감추어지길 바랍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로 우리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고백하게 되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도구 된, 그의 백성 된 사실에 감격이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구 되어 우리의 입술을 벌려 주님 앞에 찬양하는 일에 감격이 있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그의 도구 되어 몸된 교회를 위해 직분 감당하고 헌신하고 수고하며 봉사할 수 있는 사실에 기쁨이 있기를 원합니다. 만족이 있기를 원합니다. 저희들의 마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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