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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드고아 여인 (삼하14:1-17)

본문

오늘 본문에 우리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4절에서는 그를 “드고아 여린”이라 부르고, 2절에서는 이 여인을 가리켜 “슬기있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이리하여 이 시간 설교제목음 “슬기로운 드고아 여인”이라고 잡아 보았습니다. 다윗이 밧세바 때문에 부하 장수 우리야의 목숨을 빼앗은 다음, 예언자 나단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꾸중을 듣고 뉘우쳐 용서받은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저지른 무서운 죄가 암긴 흔적은 매우 큽니다. 왕자 암논이 이복누이인 다말을 범하자 다말의 친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해치고 달아난 것이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나서 삼 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다음 슬기로운 드고아 여인이 다윗에게 찾아옵니다. 본문 첫머리에 보면 이 여인이 다윗에게 나아온 것은 요압 장군이 시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압은 자신이 세운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사람을 지방에서 구했습니다. 그 사람은 드고아 여인으로 슬기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요압의 지시와 가르침에 따라 자기의 임무를 잘 수행하여 다윗의 마음이 움직이도록 하였습니다. 요압은 그 여인 하나를 잘 써서 중요한 일을 수행했습니다. 하나님께는 그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사람을 택하십니다. 택하심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을만한 봉사의 큰 책임을 필요로 합니다. 이시간 우리가 눈여겨 보려는 것은 이 여인이 맡은 일을 얼마나 슬기롭게 잘해 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드고아 여인은 지혜롭고 말을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왕 앞에 가서 요압이 가르쳐준 바를 잘 처리했습니다. 먼저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먼 차근차근 되살펴 보십시다.
1. 인생의 원리를 들어 설득했습니다. 다윗 임금 앞에 나타난 드고아 여인은 막 장례를 치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상복을 입고 몸맵시를 다듬지 않고 슬퍼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여인이 임금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댄채 아룁니다. “임금님 절 도와주십시오!” 무슨 억울한 일이나 어려운 일이 있어서 찾아온 줄 생각한 다윗이 부드럽게 묻습니다. “무슨 일이요” 왕이시여, 저는 불쌍한 과부올습니다요. 젊어서 남편을 잃은 다음 저홀로 두 아들을 키우느라 갖은 어려움을 다 겪었습지요. 이젠 아들 둘도 다 커서 모처럼 허리펴고 살 만큼 되었는데, 그만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알았지 뭡니까 아 글쌔, 이 두녀석이 들에서 싸우다가 그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형이란 놈이 제 아우를 쳐죽여 버렸습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온 집안 사람들이 다 일어나 그 몹쓸 놈을 내놓으로고 제게 졸라 대고 있습니다. 이 일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하나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그 누가 남에게 맞아 죽으면 맞아 죽은 사람의 집안에서 복수하는 것을 바른 일로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본문 이야기에서도 형제간에 난 살인이 그 가정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고 집안이 관여하여 아우를 죽인 형도 죽여야 그것이 정의롭게 일을 마무리짓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이 게속 말합니다. “왕이시여, 아들 하나 잃은 것만 해도 가슴이 찢어질 듯한데 아무리 그것이 법이라 한다 하더라도 남은 아들 하나 마저 잃게 된다면 내 남편의 대가 끊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저를 꼭 좀 도와주십시오.” 이야기를 들은 다윗에게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거 참 안됐구려, 무슨 좋은 수가 있을 것이요. 내 한 번 알아보리다.” 그러나 여인은 그 정도의 답을 듣고는 물러가지 않습니다. “왕이시여, 마땅히 죽일 녀석을 살려 두어서 그것이 법에 어긋난다면 그 허물은 저와 제 가정이 지겠습니다. 왕께는 누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말로 여인은 임금이 이 문제에 직접 개입해 줄 것을 은근히 요구한 셈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조금 더 똑똑하게 말합니다. “그럼 그대에게 남은 아들을 내놓으라고 졸라대는 사람들을 나에게 데려오시오. 내가 그들로 다시는 그대를 괴롭히지 못하게 하겠소.” 그러나 이 말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2. 하나님의 긍휼을 들어 설득했습니다.
그런데도 여인은 아주 확실한 대답을 듣고자 합니다. “왕이시여, 그래도 저는 겁이 납니다. 복수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이 제 남은 아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왕의 야훼를 생각해서라도 확실히 해주십시오.” 이에 다윗은 여인의 간청에 지고 맙니다. “그리하리이다. 야훼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다. 그대 아들의 머리카락 한 올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는 영원히 버려 두시지 아니 하시고 반드시 방황하는 곳에서 찾으셔서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따라서 다윗도 그의 아들인 압살롬의 생몀을 빼앗거나 이방지역에서 계속 방황하게 버려두고 이스라엘에 돌아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이것이 이 여인의 두 번째 설득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이 여인이 말한 어려운 일에 임금이 직접 들어서 그 때의 복수법에는 어긋난다 하더라도 여인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나옵니다.
3. 바른 판단에 대한 촉구를 설득했습니다. “왕이시여, 저의 일은 이렇게 왕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잘 풀리겠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어찌하여 이와 같은 일을 하나님 백성에게 하시려 하나이까 조금 전에 제게 하신 말씀대로라면 임금님 몸소 잘못하시는 셈입니다. 이찌하여 내쫓긴 자를 집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으십니까” 이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 이 여인이 다윗에게 한 이야기는 실제로 자기가 겪은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였습니다. 이 여인은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고 달아나 삼년이 지나도록 아버지 다윗 임금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는 압살롬을 용서하고 불러들일 때가 되었다는 것을 다윗에게 깨우쳐 주려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우를 죽인 형에게 내릴 복수 때문에 괴로워하는 과부 행세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꾸며낸 이야기에서 자신의 가슴 아픈 형편을 이해하고 복수법을 어기더라도 남아 있는 아들을 살릴 수 있도록 직접 개입하겠다는 식으로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을 걸어 약속했음을 들어서 이제는 임금 자신도 쫓겨 달아난 아들이 다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다윗에게 아뢰는 말을 계속 살펴보십시다.
4. 바른 정책을 받아들였습니다. “왕이시여, 우리 사람들은 어차피 죄다 죽을 목숨 아닙니까 땅에 엎질러진 물은 다시 모아들이지 못함과 같지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목숨을 빼앗으려 하지 않으시지요. 내쫓긴 사람이라도 하나님으로부터는 내쫓기지 않도록 하려 하시지요.” 그리고는 다른 말이 덧붙습니다만, 이만큼만 들어보더라도 이 여인이 임금을 만나러 온 뜻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드고아 여인의 말을 듣고 그 이야기가 그 여인 다독으로 꾸며진 것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 여인 혼자 그같은 이야기를 생각할 수도 없고 위험 부담을 안고 이야기해야 할 이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여인의 배후가 있을 것을 알았고 그만한 일을 할 사람은 요압 외에는 없음을 안 것입니다. 다윗도 이제서야 그 뜻을 알아차리고 배다른 형을 죽이고 쫓겨 달아나 삼 년이 지나도록 아버지를 만나지 못하고 있던 왕자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합니다. 여러분 이제 이러한 이야기에서 드고아 여인의 슬기로움이 어떠한 슬기로움이었는지 두 가지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본문에서 배우는 슬기로움은 형제자매끼리, 부모자식끼리, 이웃 사람들끼리, 같은 동포끼리 사이가 어그러져 서로를 해치고 갈라져 만자려 하지 않을 때 그 사이게 들어서서 죽을 사람을, 죄짓고 쫓겨난 사람을 살리는 슬기로움입니다. 그 원인이야 어떠했든 형제가 형제를 죽이고 그 때문에 아비와 자식이 갈라지고 백성들 사이에 마음이 어그러지는 일이 벌어졌을 때 그 사이에 들어서서 이미 죽은 사람이야 어찌 하려만 산 사람이라도 살리고 산 사람끼리는 화목하게 살도록 한 것이 이 드고아 여인의 슬기로움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 겨레가 겪고 있는 아픔을 생각합니다. 해방 후 육이오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좌우익 다툼의 소용돌이 가운데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몸과 마음을 다친 일이 그 얼마나 많았는지요 흔히들 이 비극을 사상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어찌보면 그보다는 보통 때 서로 미워하고 싫어하던 것에서 비롯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은 보통 때 우리 마을에, 우리 아는 사람들 가운데, 우리 나라에 서로를 미워하고 싫어하고 해치는 일들이 될 수 있으면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얼른 화해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본문에 나온 드고아 여인처럼 슬기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갈라진 사람을 이어주는 슬기로움은 드고아 여인에게서 보듯이 또한 함부로 말하여 상대방의 자존심을 다쳐 일을 그르치지 아니하고 듣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해야 할 바를 깨닫도록 쉽게 차근차근 이야기 할 줄 아는 슬기로움입니다. 여러분, 구약의 예언자들이 잘못된 지도자들을 향해 무섭게 꾸짖는 경우들도 적지 않습니다만 무서운 얼굴을하여 크고 높은 목소리로 야단치는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오늘 이 시대는 잘 잘못을 똑바로 지적하여 말해야 하기도 하겠습니다만 어쩌면 오늘처럼 사람들이 바른 말 듣기 싫어 하는 시대에서는 드고아 여인처럼 부드럽게, 조심스럽게, 간절하게 사태를 밝혀나가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 때로는 더 나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성도는 목적이나 그 과정, 방법도 반드시 선해야 합니다. 여기에 덧붙여 지혜로운 방법도 꼭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슬기로운 드고아 여인처럼 갈라진 겨레를 다시 잇는 슬기로운 사람이 되도록 함께 힘쓰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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