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사람 (삼하6:11-23)
본문
사람은 누구나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표준, 인간 다움을 결정하는 표준, 행복을 결정하는 기본적인 요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幸福이라고 할수 있고, 다른 말로 하면 福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복을 받는다는 것, 복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을 제일 처음 창조하시고, 인간과 가장 먼저 관계를 맺으실 때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지신 문제는 바로 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서 찾아 오셨고, 인간은 하나님 앞에 복을 받기 위해서 섰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최초의 만남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구약 성경에는 이 복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나옵니다. 400번 이상 나옵니다. 福 福 福 계속 나옵니다. 이 복의 개념이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자로 등장합니다. 인간은 복은 받는 자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복을 받지 못하면 그 받지 못하는 책임도 인간 스스로가 져야 한다는 것도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30장 15절을 우리가 참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길을 놓아 두셨다' 고 선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한길입니다. 사망과 화-다른 한길입니다. 이 두길을 네 앞에 두었나니 복을 받는 길을 두셨는가 하면 화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두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누구나 다 복을 원하는 자는 복 받기를 추구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미국헌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든 시민은 살 권리가 있고, 모든 시민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 헌법 정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흐름과는 對照的인 것이 우리 동양의 사고방식입니다. 팔자타령을 많이 합니다. 탓의 文化에 우리가 익숙해 있어서, 누구탓,누구탓을 합니다. 그래서 책임 전가를 잘 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복을 받는 것도, 내 책임이요, 복을 받지 못하는 것도 내 책임입니다. 내가 추구할 권리가 있는 반면에 내가 선택할 자유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절대로 잘못이 아닙니다. 잘 살아 보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저도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좀 행복하기를 원하고 잘살아 보기를 원하지 지지리 고생이나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이라고 말할 때에는 영적인 복이냐, 육적인 복이냐를 너무 지나치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영적인 축복이 가득히 있는가 하면, 육적이 축복도 가득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계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물질계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계의 하나님인 동시에, 물질계의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축복하실수 있는 능력을 가지심과 동시에 육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이 살아 갈 때에 필요한 모든 축복도 주실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단지 신약시대의 차이점이 있다면, 영적인 축복을 육적인 축복보다 앞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축복을 앞세웠다고 해서,육적인 축복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둘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왕 예수 믿을 바에는,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신 것은 일단 받고 싶어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성경을 보면 얼마나 복에 대한 말씀이 많아요. 그것들을 모두 받아야 겠다고 간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오히려 무관심한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스스로 배가 불러 가지고 하나님이 뭐 대단한 것이 있느냐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고 말하는 사람 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면 나는 어떻게 하든지 받아 보겠다. 하는 갈망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태도라고 봅니다. 이와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을 우리는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벳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모시고 3개월을 살았는데, 그 법궤를 모신 오벳에돔이 큰 축복을 받았다는 말을 다윗왕이 듣자말자 못 견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이라면
둘째 가라면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다윗이었기 때문에 아니, 오벳에돔이 받은 축복이라면 내가 왜 못 받겠느냐 고 생각하고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가서 법궤를 모셔오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 믿고 누가 복을 받았다고 하면 나도 좀 받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복을 받았나. 나도 좀 그렇게 해보자. 이렇게 좀 마음을 갖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좋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 한테도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모두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두 사람을 앞에 놓고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오벳에돔이라는 이름이 3번 정도 나오는데 그 때마다 복 받는 것과 관계되어서 나옵니다. 삼하 6:11, 역대상 13:14, 역대상 26:5-이 곳에 오벳에돔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니라.고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세상에서 신분이 대단하고 호화찬란한 생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제사장 가문에 소속된 평범한 집안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위해서 성소를 만들었을 때, 그 성소를 지키는 수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집안의 68명 전체가 성전을 지키는 수위가 되었습니다. 뭐 수위라고 하면 대단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무든 말이 따라 나온지 아세요.-하나님께서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느니라. 하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이라는 것이 사람이 보기에 화려한 것이 복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고요. 인간이 보기에 부러운 무엇을 가지고 복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 '너 복 받았어!' 하면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벳에돔 가정이 그래요.
그런데 그가 이 축복을 받은 것이 얼마나 두드러진 일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하고 비교하면 잘 나타납니다.
아비나답은 삼상&:1-2절을 보면 20년 동안을 집안에 법궤를 모시고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는 20년이라고 말 했지만, 성경의 기록 이후의 기간까지 합하면 4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있었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그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비나답에 대해서는 복을 받았다는 말을 성경이 전혀 하지를 않습니다. 모르겠어요. 복을 받았는데 성경이 기록을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믿을 진대는 아비나답은 40년 동안 법궤를 모시고도 복을 받지 못했는데, 오벳에돔은 3개월 만에 그와 그의 권속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어느정도로 오벳에돔의 가정이 복을 받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사학자 요세프스는 법궤가 오벳에돔의 집에 들어 갈 때에는 그가 제일 가난한 집이 었는데, 법궤가 3개월 후 그 집에서 나올 때는 가장 부잣집이었다.고 그랬습니다. 아비나답과 오벳에돔을 비교해 보면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심지어 아비나답의 집에서 오벳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모시고 올 때에 아비나답의 아들이 법궤를 잘 못 다루다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40년 동안 섬긴다고 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셨던 집안에서 오죽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모시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그 아들이 길에서 죽는 참사가 일어 나겠어요. 그러니 아비나담이라는 집을 대충 짐작을 할 수가 있어요! '그저 하나님의 법궤를 집안 모시라니까 마지 못해 모셔 놓은 것이지, 집안에 법궤가 있어도 별 관심도 없었고, 자녀들에게 그 법궤가 무엇이며 어떻게 모셔야 된다고 철저히 가르치지도 않았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40년을 모셔도 어떤 증거가 안 보이지요. 여러분! 법궤가 무엇입니다. 출 25:22절을 참고하면-법궤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존잽니다.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보기를 좋아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하는 증거물로 주신 것이 법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법궤를 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법궤 앞에서 내가 너와 만나고, 이 법궤 앞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한 모든 것을 이르리라'
그러므로 법궤는 사람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솝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법궤를 가정에 모셨다고 했을 때,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과 날마다 만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가정이 된 것입니다. 이 법궤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다윗은 시편 16:2절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주는 나의 주시오니,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하나님이 나의 복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84:11에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는 좋은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지금 집에 모신 거에요. 이런 하나님을 집안에 모신 것 자체만 해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73:28절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좋으신 분입니까 그 분이 복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분에게 가까이 닥아가는 것만해도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과 만나고, 이런 하나님을 통해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가정이라면 어찌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도 이런 분을 모신 가정에서 40년 동안 복 받았다는 말이 없으면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비나답의 가정은 오벳에돔의 가정과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지금 신약시대의 법궤는 누굽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 부활하셔서 오늘날 나와 함께 동거하시고, 나와 함께 말씀하시고, 나와 함께 거니시는 주님! 우리 가정에 늘 함께 계셔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예수님은 구약의 법궤와 같습니다.
그런데 아비나답은 40년 동안 법궤를 모시고도 복을 받지 못했어요.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분들이 많아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손대대로 믿었는데도 뭐 신통한 것이 안보여요. 예수를 30년, 40년을 믿었는데도 달라지는 것이 없고, 어쩐지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안하고 비슷하지 안을까 마음에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데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주변에 소문이 날 정도로 받지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무엇인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길래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를 했길래 하나님을 어떻게 모셨길래 그 엄청난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을 우리 집안에 모셨는데도 표가 안나니 부끄럽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예수를 갓 믿었는데도, 1-2년 지나고 나면 그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주변 사람들이 볼 때에, 저집은 예수 믿고 나더니 뭔가 다르더라. 정말로 가정도 행복하고, 하나님이 그 가정에 무엇인가 주시는 것 같더라. 확실히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시는가 봐! 주변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가 되는 데., 그 집에 뭐 대단한 것 있냐 주일날 책 끼고 가는 것 밖에., 만약에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숙연히 머리를 숙이고 한번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가정은 이제 예수를 갓 믿엇도 성경 말씀을 날마다 읽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날마다 확인하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시간마다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시는 새힘을 얻고 부부의 문제가 해결되고,자녀의 문제가 해결 되어서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가 바쁜데, 한 가정은 성경을 40년을 지고 있어도,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도 들을 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자랑할 만한 것 하나 확인학 있지 못하고 있다면 도대체 아비나답의 집이나 다른 것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그런데 오벳에돔의 집안이 단순히 법궤를 모시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 집안이 축복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어요. 여러분이 집에 가셔서 사무엘하 6장을 좀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40여년 동안 법궤가 있다가 드디어 법궤를 옮기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법궤를 옮기다가 아비나답의 아들이 즉사하는 불상사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다윗이 기절초풍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운 법궤를 내가 어떻게 모시고 가느냐 왕이 못 모시고 가겠다고 발을 빼고 나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제사장이나, 다른 신하나 백성들이 우리가 모시겠소 하고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다윗과 같은 왕, 믿음이 좋은 사람도 뒤로 물러서는데 누가 감히 나서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슬금슬금 두려워서 꽁무니를 뺍니다.
이 법궤를 누가 모시고 갈 것이냐 다윗왕의 성격을 보아서 '너! 네가 이 법궤를 모셔!'하고 강요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난처해진 제사장들이 근심스럽게 모여서 의논을 했을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에, 오벳에돔이 제가 모시지요! 라고 나서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모시기를 부담스러워 하고, 두려워 하고, 겁을 내 때에 오벳에돔이 제가 모시지요. 이런 무엇이 있길래 하나님이 3개월 만에 그런 큰 축복을 주시지 그냥 집안에 갔다가 한구석에 먼지가 쌓이도록 쳐 박아 놓았는데 복을 주실리가 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싫어서 버린 법궤를 기쁨으로, 정성을 다해서 자기 집에 모신 오벳에돔의 가정입니다. 역대상 13:14절을 보면 하나님의 궤가 오벳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 그 권속과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오벳에돔 혼자서 모신 것이 아닙니다. 법궤가 그 집안으로 들어 오자, 오 집안 식구들이 한마음이 되어 정성껏 하나님을 집안에 모시고 모든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하나님을 그 가정은 기뻐하면서 즐거워 하며 모셨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 가정에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느니라!! 있으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 가정에 축복 해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이유없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축복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모시고 사는지 수십년이 된 크리스챤의 가정에 식구들을 보면 가끔씩 하나님을 몹시 부담스러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생각해요. 예수 믿는 그 사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대손손이 집에서 예수를 믿은 집안일수록 그런 현상이 더 많고, 예수를 믿은 부모 밑에서 자라난 자녀일수록 그런 현상이 더 많아요. 예수 믿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단 말에요 얘들아 교회가라!-또 교회!! 오늘 부흥회에 참석해야 된다.-또 부흥회야. 해마다 하는 부흥회. 그래서 예수 믿는 집안에서 시집온 자부도 남편보고-여보, 우리 빨리 분가해요. 부담스러워서 못살 겠어요. 주일날은 어떻게 그렇게 자주 닥아 오는지. 그저 놀러 가고 싶은 데., 등을 돌리자니-벌을 받을 것 같아서 겁이나고, 껴 안자니 겁이 싫고., 여러분,예수 믿은 집안의 자녀들, 예수를 오래 믿은 배경을 가지신 분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렇게 달갑지 않게 억지로 믿는 사람들 얼마나 많아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그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겠어요. 안 주겠어요 이야기 해 보세요. 이왕 예수 믿을 방에는 오벳에돔의 가정처럼 확끈하게 믿자는 이야깁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예수 믿은지는 얼마 안되지만 뜨겁게 믿는 가정을 자주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저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할 텐데., 하고 저의 가슴도 안달이 나고, 조급해 지는 것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처음 예수 믿을 때부터 미지근하고, 예배드리러 올 때부터 한 20분 지각해 가기고 않았다 가고., 참 문제가 보통이 아닙니다. 여러분, 전도하신 분들-책임져야 해요. 잘못하면 천국문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도 못들어가게 하는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전도한 사람이 확끈하면 전도 받은 사람도 그의 신앙을 따라서 확끈해집니다. 전도한 사람이 미지근하면, 전도 받은 사람도 꼭같이 미지근해 집니다. 전도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축복 받은 것이 확실하면, 전도 받은 사람도 기도하면 축복 받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벳에돔의 가정에서 우리는 이렇게 뜨겁고 열정적인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럴때에 하나님이 축복해요. 한사람더 비교합니다. 12절에 보면,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고, 14절에 보면 ' 여호와 앞에서 다윗은 힘을 다하여서 춤을 추면서 메고 옵니다. 15절을 보면,' 다윗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즐거이 찬송하면서 나팔을 불면서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옵니다. 그리고 16절 끝에 가서 보면 다윗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떠했습니까 마치 법궤 앞에서 춤을 추면서 뛰노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들어옵니다. 할수 없이 모시고 들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서 기뻐서 모시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어요. 당신왜 산을 오르느냐-산이 좋아서 오른다. 꼭 마찬가집니다. 당신은 왜 하나님을 모시느냐-하나님이 좋아서 모신다. 나는 하나님이 내 가정에 계시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 어찌할 줄 모르고 모셨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모습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미갈이라는 여자와 비교합시다. 다윗의
첫째 되는 아냅니다. 미갈은 법궤가 왕궁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창문을 열고 보았습니다. 법궤 앞에서 다윗이 속옷이 다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추면서 백성들과 어울려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한마디고 미친사람 같았어요. 이것을 보고 뭐라고 그랬지요. 16절 끝에-다윗을 없신여기니라. 보세요. 지금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들어 오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어찌할 줄 모르고 춤을 추는데, 한사람은 없신 여겼습니다. 미갈은 하나님이 집안으로 오시는데도 냉담했습니다. 미갈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겁게 모시는 식구들을 멸시했습니다. 교회 안에도, 예수 믿는 집안에도 이런 미갈의 근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미갈은 어떤 다윗을 좋아 했는지 알아요 군복을 입고 적토마에 앉아,수십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싸움터에 나가서 전쟁을 하고,피뭏은 갑옷을 입은 채 개선하는 영웅적인 모습을 좋아한 여잡니다. 아니면, 왕복을 입고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다윗을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 드리고,제사드리며,찬송하는 성도로서의 다윗은 멸시했습니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있습니다. 우리 성도의 가정에 있습니다. 믿음 좋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내려다 보고,사회적으로나 배경으나 왕복을 입은 다윗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자세를 낮추고 높이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 있는 처녀들 시집갈 때 보면, 믿음 좋고 성품도 좋고 결혼을 하면 부인을 사랑하면서 잘 살거야1 하고 소개하면 그래요. 직장은요. 학교는요.재산은요., 별로 신통치 않아요. 그러나 이 사람은 학벌 좋고, 직장 좋고,배경 좋아-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어, 교회는 주일날 만 왔다갔다 한데, 아직 잘 안 믿나 봐! 세례도 아직 안 받았고. 그러면 여자는 그런 거 괜 챦아요. 내가 나중에 믿게 하면 되쟎아요. 좋아요. 여러분, 그렇게 시집가서 신앙생활 하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고, 아니면 믿음을 팔아먹고 나중에 다 잃어 버린다음에 후회하고 눈물 흘리며 돌아 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미갈과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에 이런 좋지 못한 자세가 남아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하나님을 최고로 놓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제일 위헤 모시고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 한분 만이면 마음에 기쁨이 솟을 수 있을 정도로 만족할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까 우연히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누구냐 라는 책을 보았는데, 뜻 밖에도 다윗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다윗이 제일 부자래요. 다윗은 10만 달란트, 은이 100만 7000달란트가 있었는데, 이것을 요즈음 화폐로 환산하면 1200억 불이 되고 그것은 미국 전체에서 유통 되는 현금의 두배라고 합니다. 다윗만큼 재산을 가졌던 사람들이 없대요. 그것 나중에 무엇합니까 성전 짓는데 다 썼다구요. 우리가 다윗을 알아요.
그런데 이런 육적인 축복은 다윗이 받은 영적인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날마다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성령님이 그와함께 했기 때문에 날마나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찬송이 끊어지지 않았고, 기도가 끊어지지 아니해서 그의 입으로 수십편, 수백편으로 주옥 같은 시편이 나왔습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뿐만 아니라, 그는 멀리 하나님의 나라가 닥아 옴을 바라 보면서 자기의 후손 중에서 그 왕위를 가진 메시야가 나타날 것을 내다보고 그는 그의 왕위가 영원히 계승 될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영원한 왕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와같은 축복들을 주셨을까 이유없이 주셨을까 아니요. 그만큼 하나님을 높이고,좋아하고, 사랑했기 때문에-한마디로 확끈하게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에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왕에 우리가 복을 받을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정적으로 하나님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벳에돔의 가정처럼,다윗처럼, 중심으로 기뻐서 즐겁게,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아멘. 여호와께서 함께 함이 네게 복이라.
그런의미에서 구약 성경에는 이 복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나옵니다. 400번 이상 나옵니다. 福 福 福 계속 나옵니다. 이 복의 개념이 신약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자로 등장합니다. 인간은 복은 받는 자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복을 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복을 받지 못하면 그 받지 못하는 책임도 인간 스스로가 져야 한다는 것도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30장 15절을 우리가 참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 길을 놓아 두셨다' 고 선언했습니다.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한길입니다. 사망과 화-다른 한길입니다. 이 두길을 네 앞에 두었나니 복을 받는 길을 두셨는가 하면 화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두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하셨습니다. 누구나 다 복을 원하는 자는 복 받기를 추구할 수 있다는 이야깁니다. 미국헌법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모든 시민은 살 권리가 있고, 모든 시민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 헌법 정신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이런 성경의 흐름과는 對照的인 것이 우리 동양의 사고방식입니다. 팔자타령을 많이 합니다. 탓의 文化에 우리가 익숙해 있어서, 누구탓,누구탓을 합니다. 그래서 책임 전가를 잘 시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복을 받는 것도, 내 책임이요, 복을 받지 못하는 것도 내 책임입니다. 내가 추구할 권리가 있는 반면에 내가 선택할 자유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고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는 마음은 절대로 잘못이 아닙니다. 잘 살아 보려는 마음을 가지는 것,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저도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좀 행복하기를 원하고 잘살아 보기를 원하지 지지리 고생이나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복이라고 말할 때에는 영적인 복이냐, 육적인 복이냐를 너무 지나치게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 안에는 영적인 축복이 가득히 있는가 하면, 육적이 축복도 가득히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계의 하나님입니다. 그렇다고 물질계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계의 하나님인 동시에, 물질계의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서 축복하실수 있는 능력을 가지심과 동시에 육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육신이 살아 갈 때에 필요한 모든 축복도 주실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단지 신약시대의 차이점이 있다면, 영적인 축복을 육적인 축복보다 앞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축복을 앞세웠다고 해서,육적인 축복을 무시해도 된다는 것은 성경의 정신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둘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왕 예수 믿을 바에는,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신 것은 일단 받고 싶어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성경을 보면 얼마나 복에 대한 말씀이 많아요. 그것들을 모두 받아야 겠다고 간절한 마음을 갖는 것이 오히려 무관심한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봅니다. 스스로 배가 불러 가지고 하나님이 뭐 대단한 것이 있느냐 하나님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고 말하는 사람 보다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면 나는 어떻게 하든지 받아 보겠다. 하는 갈망을 가지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 하시는 태도라고 봅니다. 이와같은 태도를 가진 사람을 우리는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입니다. 오벳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모시고 3개월을 살았는데, 그 법궤를 모신 오벳에돔이 큰 축복을 받았다는 말을 다윗왕이 듣자말자 못 견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이라면
둘째 가라면 싫어하는 성격을 가진 다윗이었기 때문에 아니, 오벳에돔이 받은 축복이라면 내가 왜 못 받겠느냐 고 생각하고는 지체하지 아니하고 가서 법궤를 모셔오는 다윗을 보게 됩니다.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예수 믿고 누가 복을 받았다고 하면 나도 좀 받을 수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복을 받았나. 나도 좀 그렇게 해보자. 이렇게 좀 마음을 갖는 것이 자기를 위해서 좋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는 세상 사람들 한테도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모두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두 사람을 앞에 놓고 배우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오벳에돔이라는 이름이 3번 정도 나오는데 그 때마다 복 받는 것과 관계되어서 나옵니다. 삼하 6:11, 역대상 13:14, 역대상 26:5-이 곳에 오벳에돔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복을 주셨는니라.고 나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세상에서 신분이 대단하고 호화찬란한 생을 살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제사장 가문에 소속된 평범한 집안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여호와의 법궤를 위해서 성소를 만들었을 때, 그 성소를 지키는 수위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집안의 68명 전체가 성전을 지키는 수위가 되었습니다. 뭐 수위라고 하면 대단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무든 말이 따라 나온지 아세요.-하나님께서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느니라. 하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복이라는 것이 사람이 보기에 화려한 것이 복이라고 성경은 말하지 않고요. 인간이 보기에 부러운 무엇을 가지고 복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 '너 복 받았어!' 하면 그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오벳에돔 가정이 그래요.
그런데 그가 이 축복을 받은 것이 얼마나 두드러진 일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알기 위해서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하고 비교하면 잘 나타납니다.
아비나답은 삼상&:1-2절을 보면 20년 동안을 집안에 법궤를 모시고 산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는 20년이라고 말 했지만, 성경의 기록 이후의 기간까지 합하면 40년 동안 아비나답의 집에 법궤가 있었다고 성서학자들은 말합니다. 그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비나답에 대해서는 복을 받았다는 말을 성경이 전혀 하지를 않습니다. 모르겠어요. 복을 받았는데 성경이 기록을 안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믿을 진대는 아비나답은 40년 동안 법궤를 모시고도 복을 받지 못했는데, 오벳에돔은 3개월 만에 그와 그의 권속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셨습니다. 어느정도로 오벳에돔의 가정이 복을 받았느냐 하면 이스라엘의 사학자 요세프스는 법궤가 오벳에돔의 집에 들어 갈 때에는 그가 제일 가난한 집이 었는데, 법궤가 3개월 후 그 집에서 나올 때는 가장 부잣집이었다.고 그랬습니다. 아비나답과 오벳에돔을 비교해 보면 이것은 대단히 충격적입니다. 심지어 아비나답의 집에서 오벳에돔의 집으로 법궤를 모시고 올 때에 아비나답의 아들이 법궤를 잘 못 다루다가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40년 동안 섬긴다고 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셨던 집안에서 오죽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모시는 법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으면 그 아들이 길에서 죽는 참사가 일어 나겠어요. 그러니 아비나담이라는 집을 대충 짐작을 할 수가 있어요! '그저 하나님의 법궤를 집안 모시라니까 마지 못해 모셔 놓은 것이지, 집안에 법궤가 있어도 별 관심도 없었고, 자녀들에게 그 법궤가 무엇이며 어떻게 모셔야 된다고 철저히 가르치지도 않았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40년을 모셔도 어떤 증거가 안 보이지요. 여러분! 법궤가 무엇입니다. 출 25:22절을 참고하면-법궤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존잽니다.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보기를 좋아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여기 계신다' 하는 증거물로 주신 것이 법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법궤를 놓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법궤 앞에서 내가 너와 만나고, 이 법궤 앞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한 모든 것을 이르리라'
그러므로 법궤는 사람이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장솝니다. 굉장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법궤를 가정에 모셨다고 했을 때, 상상해 보세요! 하나님과 날마다 만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축복을 누리는 가정이 된 것입니다. 이 법궤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는 하나님이 도대체 어떤 분입니까 다윗은 시편 16:2절에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주는 나의 주시오니,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나이다' 하나님이 나의 복이라는 말입니다. 시편 84:11에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는 좋은 아끼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을 지금 집에 모신 거에요. 이런 하나님을 집안에 모신 것 자체만 해도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다윗은 73:28절에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니라. 얼마나 하나님이 좋으신 분입니까 그 분이 복 자체이시기 때문에 그 분에게 가까이 닥아가는 것만해도 축복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하나님과 만나고, 이런 하나님을 통해서 말씀을 들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가정이라면 어찌 복을 받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런데도 이런 분을 모신 가정에서 40년 동안 복 받았다는 말이 없으면 아무래도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아비나답의 가정은 오벳에돔의 가정과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지금 신약시대의 법궤는 누굽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보이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또 부활하셔서 오늘날 나와 함께 동거하시고, 나와 함께 말씀하시고, 나와 함께 거니시는 주님! 우리 가정에 늘 함께 계셔서 우리와 교제하시는 예수님은 구약의 법궤와 같습니다.
그런데 아비나답은 40년 동안 법궤를 모시고도 복을 받지 못했어요.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분들이 많아요. 예수 그리스도를 자손대대로 믿었는데도 뭐 신통한 것이 안보여요. 예수를 30년, 40년을 믿었는데도 달라지는 것이 없고, 어쩐지 답답하고 한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아비나답의 집안하고 비슷하지 안을까 마음에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데도 영적으로 육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이 주변에 소문이 날 정도로 받지를 못하고 있다고 한다면 무엇인가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믿었길래 하나님과 어떻게 교제를 했길래 하나님을 어떻게 모셨길래 그 엄청난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을 우리 집안에 모셨는데도 표가 안나니 부끄럽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제 예수를 갓 믿었는데도, 1-2년 지나고 나면 그 가정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주변 사람들이 볼 때에, 저집은 예수 믿고 나더니 뭔가 다르더라. 정말로 가정도 행복하고, 하나님이 그 가정에 무엇인가 주시는 것 같더라. 확실히 하나님이 계시기는 계시는가 봐! 주변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가 되는 데., 그 집에 뭐 대단한 것 있냐 주일날 책 끼고 가는 것 밖에., 만약에 이렇게 말한다면 우리는 주님 앞에 숙연히 머리를 숙이고 한번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가정은 이제 예수를 갓 믿엇도 성경 말씀을 날마다 읽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날마다 확인하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구하기 위해서 시간마다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주시는 새힘을 얻고 부부의 문제가 해결되고,자녀의 문제가 해결 되어서 그것을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가 바쁜데, 한 가정은 성경을 40년을 지고 있어도, 거기서 하나님의 음성을 한번도 들을 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자랑할 만한 것 하나 확인학 있지 못하고 있다면 도대체 아비나답의 집이나 다른 것이 무엇이냐 말입니다.
그런데 오벳에돔의 집안이 단순히 법궤를 모시고 있었다는 것만으로 그 집안이 축복을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어요. 여러분이 집에 가셔서 사무엘하 6장을 좀 읽어 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아비나답의 집에 40여년 동안 법궤가 있다가 드디어 법궤를 옮기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법궤를 옮기다가 아비나답의 아들이 즉사하는 불상사가 생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다윗이 기절초풍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두려운 법궤를 내가 어떻게 모시고 가느냐 왕이 못 모시고 가겠다고 발을 빼고 나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제사장이나, 다른 신하나 백성들이 우리가 모시겠소 하고 나서기가 어려웠습니다. 다윗과 같은 왕, 믿음이 좋은 사람도 뒤로 물러서는데 누가 감히 나서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슬금슬금 두려워서 꽁무니를 뺍니다.
이 법궤를 누가 모시고 갈 것이냐 다윗왕의 성격을 보아서 '너! 네가 이 법궤를 모셔!'하고 강요는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난처해진 제사장들이 근심스럽게 모여서 의논을 했을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을 때에, 오벳에돔이 제가 모시지요! 라고 나서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모시기를 부담스러워 하고, 두려워 하고, 겁을 내 때에 오벳에돔이 제가 모시지요. 이런 무엇이 있길래 하나님이 3개월 만에 그런 큰 축복을 주시지 그냥 집안에 갔다가 한구석에 먼지가 쌓이도록 쳐 박아 놓았는데 복을 주실리가 없어요! 모든 사람들이 싫어서 버린 법궤를 기쁨으로, 정성을 다해서 자기 집에 모신 오벳에돔의 가정입니다. 역대상 13:14절을 보면 하나님의 궤가 오벳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으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 그 권속과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오벳에돔 혼자서 모신 것이 아닙니다. 법궤가 그 집안으로 들어 오자, 오 집안 식구들이 한마음이 되어 정성껏 하나님을 집안에 모시고 모든 사람들이 부담스러워 하는 하나님을 그 가정은 기뻐하면서 즐거워 하며 모셨다는 이야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 가정에 권속과 함께 석달을 있느니라!! 있으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그 가정에 축복 해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이유없이 그렇게 짧은 기간에 축복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모시고 사는지 수십년이 된 크리스챤의 가정에 식구들을 보면 가끔씩 하나님을 몹시 부담스러워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생각해요. 예수 믿는 그 사실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대대손손이 집에서 예수를 믿은 집안일수록 그런 현상이 더 많고, 예수를 믿은 부모 밑에서 자라난 자녀일수록 그런 현상이 더 많아요. 예수 믿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한단 말에요 얘들아 교회가라!-또 교회!! 오늘 부흥회에 참석해야 된다.-또 부흥회야. 해마다 하는 부흥회. 그래서 예수 믿는 집안에서 시집온 자부도 남편보고-여보, 우리 빨리 분가해요. 부담스러워서 못살 겠어요. 주일날은 어떻게 그렇게 자주 닥아 오는지. 그저 놀러 가고 싶은 데., 등을 돌리자니-벌을 받을 것 같아서 겁이나고, 껴 안자니 겁이 싫고., 여러분,예수 믿은 집안의 자녀들, 예수를 오래 믿은 배경을 가지신 분들,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렇게 달갑지 않게 억지로 믿는 사람들 얼마나 많아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그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겠어요. 안 주겠어요 이야기 해 보세요. 이왕 예수 믿을 방에는 오벳에돔의 가정처럼 확끈하게 믿자는 이야깁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예수 믿은지는 얼마 안되지만 뜨겁게 믿는 가정을 자주 봅니다. 그리고 저는 주목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어떤 일을 하시는가를 보고 있습니다. 저 가정이 축복을 받아야 할 텐데., 하고 저의 가슴도 안달이 나고, 조급해 지는 것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처음 예수 믿을 때부터 미지근하고, 예배드리러 올 때부터 한 20분 지각해 가기고 않았다 가고., 참 문제가 보통이 아닙니다. 여러분, 전도하신 분들-책임져야 해요. 잘못하면 천국문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도 못들어가게 하는 사람이 되기가 쉽습니다. 전도한 사람이 확끈하면 전도 받은 사람도 그의 신앙을 따라서 확끈해집니다. 전도한 사람이 미지근하면, 전도 받은 사람도 꼭같이 미지근해 집니다. 전도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축복 받은 것이 확실하면, 전도 받은 사람도 기도하면 축복 받기를 갈망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벳에돔의 가정에서 우리는 이렇게 뜨겁고 열정적인 태도를 배워야 합니다. 그럴때에 하나님이 축복해요. 한사람더 비교합니다. 12절에 보면,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고, 14절에 보면 ' 여호와 앞에서 다윗은 힘을 다하여서 춤을 추면서 메고 옵니다. 15절을 보면,' 다윗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즐거이 찬송하면서 나팔을 불면서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옵니다. 그리고 16절 끝에 가서 보면 다윗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어떠했습니까 마치 법궤 앞에서 춤을 추면서 뛰노는 것이 어린아이 같았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너무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모르고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고 들어옵니다. 할수 없이 모시고 들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서 기뻐서 모시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어요. 당신왜 산을 오르느냐-산이 좋아서 오른다. 꼭 마찬가집니다. 당신은 왜 하나님을 모시느냐-하나님이 좋아서 모신다. 나는 하나님이 내 가정에 계시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 어찌할 줄 모르고 모셨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의 모습을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 미갈이라는 여자와 비교합시다. 다윗의
첫째 되는 아냅니다. 미갈은 법궤가 왕궁 옆으로 지나가는 것을 창문을 열고 보았습니다. 법궤 앞에서 다윗이 속옷이 다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추면서 백성들과 어울려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한마디고 미친사람 같았어요. 이것을 보고 뭐라고 그랬지요. 16절 끝에-다윗을 없신여기니라. 보세요. 지금 하나님이 다윗의 집에 들어 오십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어찌할 줄 모르고 춤을 추는데, 한사람은 없신 여겼습니다. 미갈은 하나님이 집안으로 오시는데도 냉담했습니다. 미갈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겁게 모시는 식구들을 멸시했습니다. 교회 안에도, 예수 믿는 집안에도 이런 미갈의 근성을 가진 사람들이 가끔 있습니다. 미갈은 어떤 다윗을 좋아 했는지 알아요 군복을 입고 적토마에 앉아,수십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싸움터에 나가서 전쟁을 하고,피뭏은 갑옷을 입은 채 개선하는 영웅적인 모습을 좋아한 여잡니다. 아니면, 왕복을 입고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다윗을 좋아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 드리고,제사드리며,찬송하는 성도로서의 다윗은 멸시했습니다. 이런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는 있습니다. 우리 성도의 가정에 있습니다. 믿음 좋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그저 대수롭지 않게 내려다 보고,사회적으로나 배경으나 왕복을 입은 다윗처럼 보이는 사람 앞에서는 자세를 낮추고 높이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 있는 처녀들 시집갈 때 보면, 믿음 좋고 성품도 좋고 결혼을 하면 부인을 사랑하면서 잘 살거야1 하고 소개하면 그래요. 직장은요. 학교는요.재산은요., 별로 신통치 않아요. 그러나 이 사람은 학벌 좋고, 직장 좋고,배경 좋아-그러나 한가지 문제가 있어, 교회는 주일날 만 왔다갔다 한데, 아직 잘 안 믿나 봐! 세례도 아직 안 받았고. 그러면 여자는 그런 거 괜 챦아요. 내가 나중에 믿게 하면 되쟎아요. 좋아요. 여러분, 그렇게 시집가서 신앙생활 하느라고 죽을 고생을 하고, 아니면 믿음을 팔아먹고 나중에 다 잃어 버린다음에 후회하고 눈물 흘리며 돌아 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미갈과 같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마음에 이런 좋지 못한 자세가 남아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 주시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복을 받습니까 하나님을 최고로 놓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을 제일 위헤 모시고 즐거워 하고 기뻐하는 사람이에요. 하나님 한분 만이면 마음에 기쁨이 솟을 수 있을 정도로 만족할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을 하나님이 축복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얼마나 축복을 받았습니까 우연히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가 누구냐 라는 책을 보았는데, 뜻 밖에도 다윗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다윗이 제일 부자래요. 다윗은 10만 달란트, 은이 100만 7000달란트가 있었는데, 이것을 요즈음 화폐로 환산하면 1200억 불이 되고 그것은 미국 전체에서 유통 되는 현금의 두배라고 합니다. 다윗만큼 재산을 가졌던 사람들이 없대요. 그것 나중에 무엇합니까 성전 짓는데 다 썼다구요. 우리가 다윗을 알아요.
그런데 이런 육적인 축복은 다윗이 받은 영적인 축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영적으로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는지. 날마다 하나님의 영이 그와 함께 했습니다. 성령님이 그와함께 했기 때문에 날마나 마음 속에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찬송이 끊어지지 않았고, 기도가 끊어지지 아니해서 그의 입으로 수십편, 수백편으로 주옥 같은 시편이 나왔습니다. 복을 받은 사람이에요. 뿐만 아니라, 그는 멀리 하나님의 나라가 닥아 옴을 바라 보면서 자기의 후손 중에서 그 왕위를 가진 메시야가 나타날 것을 내다보고 그는 그의 왕위가 영원히 계승 될 것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영원한 왕이 되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다윗에게 이와같은 축복들을 주셨을까 이유없이 주셨을까 아니요. 그만큼 하나님을 높이고,좋아하고, 사랑했기 때문에-한마디로 확끈하게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에게 축복하신 것입니다. 이왕에 우리가 복을 받을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정적으로 하나님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 어려운 문제들을 안고 있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오벳에돔의 가정처럼,다윗처럼, 중심으로 기뻐서 즐겁게,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모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아멘. 여호와께서 함께 함이 네게 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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