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아의 죽음 (삼하11:6-13)
본문
지난 주에는 1-5절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점에서 개혁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 개혁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가 무엇인가 한 가지를 성취하고난 다음에 성취욕에 빠져 있을 때, “이 정도면 할만큼 했다.”라고 하는 그와 같은 만족감이 우리 마음에 찾아 올 적에, 우리가 그 누구보다는 좀 낫다는 생각을 가진 그 순간에, 우리는 바로 개혁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다윗의 실패를 통해서 지난 주에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우리는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가 설 자리가 어디인가를 동시에 봤습니다. 다윗이 전쟁터에 있었더라면 이와 같은 실패를 맛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가 있어야 될 자리가 비록 싸움의 자리이고, 목숨을 거는 자리이며, 피곤하고 지친 자리라 할지라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더 안전하고,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6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살다 간 우리아를 보며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리아라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하게 죽은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고 충성했던 자기의 왕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위해서 싸웠던 충성의 대상이었던 주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 배신도 가장 아픈 배신, 부인을 빼앗기는 배신이었고, 그로 인해서 목숨까지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 가운데서 이 우리아 같이 비극적으로 인생을 끝낸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이와 같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던 우리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신가 다시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참 허무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대하게 됩니다. 신약에서 보면 야고보 사도가 그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붕괴되는 순간 야고보 사도는 체포 되어 순교를 당했고, 한 시대를 개혁시켰던 세례 요한도 한 여인의 미움 때문에 목이 잘리는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습니다. 초대 교회 집사였던 스데반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그 사실 자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을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33살에 미움과 질시 가운데 그 시대 최고로 잔인한 형벌, 파렴치한 사람들에게만 씌우는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삶을 성경에서는 비극적이었다고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그렇게 망신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영광스러운 죽음이고 가장 멋있는 죽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아의 죽음을 봅니다. 당시 37명의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군대에서 최고 우두머리 사단장급입니다. 다윗에게 가장 충성했던 신하였고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37명의 용사 가운데 뽑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충성했던 다윗에게 엄청난 배신을 당합니다. 배신당한 우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이렇게 파렴치하고 정말 잔인하고 어떻게 보면 정말 비겁하게 처신한 다윗의 모습은 추후 다시 다루도록 하고, 오늘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당면한 현실적인 생활을 통해서 우리아와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이와 같은 시대입니다. 아무리 충성해도 하루아침에 배신 당하는 시대입니다. 목숨을 건 친구라 할지라도 절간으로 쫓아 보내고 해외로 쫒아 보내는 모습도 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고 세계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역사가 아니라 모든 나라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것은, 세상에는 항상 배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적,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친구도 원수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배신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세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해야만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아 같이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목숨까지도 빼앗길 수 밖에 없고, 부인까지도 빼앗길 수 밖에 없는 그와 같은 시대적 상황,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 우리아의 죽음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본문에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장수 요압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 정도 되지요. 그리고 우리아는 그 아래 단계의 지휘관 쯤 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아를 불러들입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들여서는 노고를 치하하고 집에 가서 푹 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요즈음으로 보자면 경호실 숙소에 가서 잠을 잡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즉 다윗의 심부름을 했던 시종들 가운데 몇 사람이, 다시말해 우리아의 아내와 다윗 사이에 일어난 그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경호실의 측근 세력의 한 두 사람이겠죠, 이 사람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으니까 즉각 보고합니다.
다윗이 그 다음날 아침 다시 우리아를 부릅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야, 네가 먼길을 왔기 때문에, 내가 너보고 집에 가서 푹 쉬라 그랬는데, 왜 집에 가지 않느냐 부인도 만나야 되지 않느냐” 하니까, 우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와 이스라엘의 군사들 그리고 나의 직속 상관 요압이 지금 들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내 집에 들어가서 편히 쉴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자, 여러분! 이 충성스런 신하 앞에 다윗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일단 접어둡시다. 다음에 다루기로 하구요. 다윗이 다시 말하기를, “그래 좋다. 너를 다시 전쟁터로 보내겠다. 그러니 오늘은 일단 좀 먹고 마셔라.” 그러고는, 다시 작전을 바꿉니다. 이번에는 우리아에게 술을 잔뜩 먹여 술취하게 만듭니다. “네가 술이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니까 부인을 찾아 집으로 들어가겠지.” 그런 간교한 생각으로 우리아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합니다. 우리아가 술에 취했어요. 왕이 주는 것이니 안 받을 수 있어요 술마셔 보신 분들 감잡으시겠죠 이런 상황에서 술이 잘 취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거 뭐 상식이지요. 오랫동안 술을 전혀 안 마시다가 술 한잔 드시면 어떻게 됩니까 더 쉽게 취한다면서요
그런데 고의적으로 취하라고 잔뜩 먹여 놨습니다. 거나하게 취했겠죠 “오늘 밤은 취했으니 이제 집에 가서 편히 쉬어라.” 하고 다윗은 우리아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아를 보십시오. 다시 경호실 요원들이 쉬고 있는 숙소에 가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깨닫고 다시 방법을 바꿉니다. 병사의 손에다 편지 하나를 쥐어 줍니다. 그것은 군대장관 요압에게 주는 편지입니다. “요압아, 우리아가 도착하거든 적진 깊숙히 내어 보내라. 그때 갑자기 후퇴를 해서 우리아로 하여금 적군의 손에 죽게 해라.” 우리아를 죽이라는 편지를 우리아와 함께한 병사의 손에 쥐어 보내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렇게 충성스런 신하를. 우리아는 그것도 모르고 돌아가서, 결국 요압에 의해 전쟁터에서 죽게 됩니다. 요압은 다윗의 편지를 받고 어떤 처신을 합니까 우리아를 전방에 내세웁니다. 다음에 요압에 대해서 다시 한번 다룰 필요가 있어요. 이렇게 해서 우리아는 죽었습니다. 우리아가 죽고난 다음에 우리아의 아내는 다윗의 아내가 되는데, 이것도 속전속결입니다.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7일 동안 호곡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호곡이 끝난 후 바로 데려왔습니다. 왜 재빨리 데려왔겠어요 출산 날짜를 맞춰야 되니까 그렇지요. 늦게 데려왔다가는 다윗과의 불륜의 관계로 임신한 것이 알려질까 봐, 이것을 감추려고 우리아가 죽고 호곡이 끝나자마자 바로 데려온 것입니다. 한 달이나 보름 정도의 차이는 잘 모르니까, 바로 데려왔어요. 이것이 다윗의 계획이었고, 그대로 했습니다. 우리아의 비극적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아가 취했던 태도입니다. 하나님 편과 자기 자신의 편을 놓고 따지자면, 그는 하나님 편에 충성했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하러 나갈 때면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갔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에서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터에 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전쟁에서 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경험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고 나갈 때는 승리했습니다. 이번에도 그 언약궤가 지금 전쟁터에 나가 있단 말이에요. 그 언약궤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전쟁터에 있다니까, 아마 천막 속에 있겠지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천막 속에 있는데, 어찌 집에 가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다윗은 우리아의 말을 듣고 대성통곡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범죄해서 눈이 어두워지고 강퍅해져서 마음이 가질 않아요. 그러나 우리아는 항상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여러분, 전쟁터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부인, 더구나 다윗이 한번에 반했을 만큼 아리따운 부인인데,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그러나, 자기의 본능적 욕구를 절제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하나님 앞과 왕 앞에서 충성스런 모습을 끝까지 견지합니다. 충성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우리아가 충신이었던 것은, 그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먼저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가 술취한 상태에서도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궤를 생각했으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늘 하나님 편에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오늘 우리가 우리아의 모습을 보고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충성스런 일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충성된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어디 가더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우리 강성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어요 어디를 가든지 교회를 염려하는 사람, 시간 나면 들여다 보고 아끼고, 시간 나면 와서 기도하고, 거저 마음이 항상 교회에 와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거에요. 아니 항상 교회만 생각하고 교회만 와서 있고 하면, 그럼 세상에선 어떻게 사나 여러분, 보십시오. 항상 그 마음이 하나님 편에 가 있는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가면 용감합니까, 비굴합니까 예 용감한 겁니다. 다윗도 항상 그 마음이 하나님 편에 있었지요.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 편에 있었을 때, 그때 다윗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적으로 무책임했습니까 자기 직무에 대해서 무책임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은 세상 일에도 열심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거에요. 여러분, 보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 충성한다고 그랬어요.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작은 일과 큰 일을 따로 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로부터, 집안일도 몰라라 하고, 애들도 모른다 하고, 남편도 모른다 하고, 그냥 미쳐서 돌아간다는 말을 듣는 분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제대로 미쳐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남편도 자식도 미쳐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왜요 멋있는 삶을 살기 때문이지요. 정말 예수한테 미친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건 간에 이제 거듭나서 멋진 삶을 살 겁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엿세 동안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남의 눈치 보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 눈치보면서 적당히 떼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너희가 하나님께 보이듯이 일하라.”고 권면했어요. 이것은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일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절대 사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일도 그렇고 직장 일도 그렇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 보이듯이 하여야만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서 자라면서 귀가 아프게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 줄 아십니까 “교회가 왜 이래 아, 목사님들이 왜 저래” 하는 말입니다.
저를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혹 계실 겁니다. “아니, 우리 목사님이 왜 저래 안 그럴 줄 알았더니, 저 양반도 좀 이상하구만.” 안 그럴 줄 알았다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다윗을 보십시오.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정말 멋있게 나간 사람 아니에요 비록 조그만 실수들이 있긴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멋있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다윗의 삶은 엉망진창이 됩니다. 치명적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다윗의 가정에는 칼이 떠나질 않고, 자식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식들이 아버지의 첩들을 취하는 아주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것은 다윗의 운명에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와 같은 사건을 일으키리라고 생각을 못 했잖아요. 앞의 모습들을 보면, 언젠가는 팍 쓰러져서 여러분들 보기에 “저럴 수가 있는가” 라는, 그런 일을 저지럴 것 같지 않죠 그러나 그러한 그도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한숨쉬게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그러나 심각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다윗이 아무리 타락하고 다윗이 아무리 완악하고 비겁하고 잔인한 군주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아의 충성된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부패했고 지도자들이 타락했다는 이유 때문에 신앙 생활을 적당히 하고 내가 열심히 안 해도 된다고 합리화는 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교회나 목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목사가 타락하는 것은 하나님이 타락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질적으로 내가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으면서도 핑계는 어디에 둡니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돈이 아까워서 헌금하지 않으면서도, “아이고, 우리 교회는 헌금해 봤자 쓸데없는 데 쓰니까 헌금할 맛이 안 나.” 그러면서 헌금 안 하는 분이 있다구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이 우리의 충성의 대상입니다. 우리아는 다윗이 자기를 배신하고, 아내를 빼앗고, 또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해도 그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서는 이 부분의 해석이 조금씩 다르긴 합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우리아가 군대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미 부인과 왕과의 관계를 귀뜸 받았지 않았겠느냐,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 집을 의도적으로 안 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어요. 그러나 이 사건 가운데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기를 죽이려 하고 자기 부인까지 빼앗아 가는 왕이라도 우리아는 끝까지 자기 일을 다하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들 목회자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고 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들이 가만 있어도 된다거나 열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의 충성은 그 분을 향할 뿐입니다. 이철호 목사가 아무리 타락했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만은 하나님 앞에서 견고해야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목사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이 아프고 사기가 저하 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럴수록 하나님께 충성하십시오. 비록 오늘 이 사회가 우리아처럼 고지식하게 충성하고 살다가는 비참하게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성하며 살다가는 비극적인 실패를 맛봐야 될 것입니다.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것입니다. 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말씀대로 충성하면서 살다가는 비극적인 실패를 맛 봐야 될 것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말씀대로 살다간 따돌림을 당할 것입니다. 이용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세상적으론 이용을 당하고 무시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실패를 맛본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우리아처럼 산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자로 기록이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짧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 예수 믿는 자로서 주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아 가기 위해서 고통과 갈등과 실패가 있을 것이며, 또한 배신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만, 그러한 모든 눈물들이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 영광의 상급으로 주님의 칭찬으로 변하여 여러분에게 되돌아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의 면류관, 썩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살려다가는 우리아처럼 비극적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직장에서 승진을 못할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손해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신앙생활 바르게 하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 순간을 겪을 때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이고 힘이 되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하나씩 준비 될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영광의 날에 주님의 잔치에 영광스럽게 참여하는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나를 위하여 부모나 형제나 전토를 버리는 자는 이 세상에서 10배를 받을 것이고 내세에 영생을 얻을 것이니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며 사는 자들은, 우리아와 같이 하나님께서 불러가는 사람도 있지만, 이 땅에서도 10배의 축복을 더하셔서, “봐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 편에 서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신다.”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축복하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렇게 충성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충성된 사람의 순교를 받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느 쪽에 해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다가 이 세상에서 매장을 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복받은 분들입니다. 반면에 “봐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충성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복을 주시는 법이야.”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 샘플로 축복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때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잘나서 축복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샘플로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여러분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그저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들 아닙니까 그런 것들에 눈이 어두워 그럭저럭 살다가, 어느날 문뜩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도중에 하나님을 배신하고 나가 떨어지는 모습들을 보지 않습니까 허무한 데다 인생을 투자하지 맙시다. 오늘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시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우리의 왕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 주님 앞에 충성하며 삽시다. 우리가 결론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 각자는 사람을 보지 말고, 오로지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가 그날에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날 하나님 앞에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고 아름답게 서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기쁨으로 그날을 맞이합시다. 이땅에서 사는 날까지 승리하시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은 6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살다 간 우리아를 보며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는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우리아라는 사람은 세상적으로 보면 정말 비참하게 죽은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고 충성했던 자기의 왕으로부터, 목숨을 걸고 위해서 싸웠던 충성의 대상이었던 주인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사람입니다. 그 배신도 가장 아픈 배신, 부인을 빼앗기는 배신이었고, 그로 인해서 목숨까지도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정말 세상 사람 가운데서 이 우리아 같이 비극적으로 인생을 끝낸 사람을 찾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이와 같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했던 우리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신가 다시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참 허무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대하게 됩니다. 신약에서 보면 야고보 사도가 그랬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붕괴되는 순간 야고보 사도는 체포 되어 순교를 당했고, 한 시대를 개혁시켰던 세례 요한도 한 여인의 미움 때문에 목이 잘리는 비극적인 삶을 마감했습니다. 초대 교회 집사였던 스데반도,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그 사실 자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의로운 사람을 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33살에 미움과 질시 가운데 그 시대 최고로 잔인한 형벌, 파렴치한 사람들에게만 씌우는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삶을 성경에서는 비극적이었다고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이 그렇게 망신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영광스러운 죽음이고 가장 멋있는 죽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아의 죽음을 봅니다. 당시 37명의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요즘으로 하면 군대에서 최고 우두머리 사단장급입니다. 다윗에게 가장 충성했던 신하였고 용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37명의 용사 가운데 뽑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충성했던 다윗에게 엄청난 배신을 당합니다. 배신당한 우리아의 모습을 통해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이렇게 파렴치하고 정말 잔인하고 어떻게 보면 정말 비겁하게 처신한 다윗의 모습은 추후 다시 다루도록 하고, 오늘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당면한 현실적인 생활을 통해서 우리아와 비교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이 시대가 이와 같은 시대입니다. 아무리 충성해도 하루아침에 배신 당하는 시대입니다. 목숨을 건 친구라 할지라도 절간으로 쫓아 보내고 해외로 쫒아 보내는 모습도 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고 세계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만 갖고 있는 역사가 아니라 모든 나라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것은, 세상에는 항상 배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적,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역사입니다. 친구도 원수로 변하는 것을 봅니다. 배신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이와 같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 것인가 걱정하게 됩니다. 그래서 처세술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해야만 성공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아 같이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은 목숨까지도 빼앗길 수 밖에 없고, 부인까지도 빼앗길 수 밖에 없는 그와 같은 시대적 상황,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이 우리아의 죽음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본문에 두 사람이 나오는데, 한 사람은 장수 요압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국방부 장관 정도 되지요. 그리고 우리아는 그 아래 단계의 지휘관 쯤 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아를 불러들입니다.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들여서는 노고를 치하하고 집에 가서 푹 쉬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가지 않고 요즈음으로 보자면 경호실 숙소에 가서 잠을 잡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이, 즉 다윗의 심부름을 했던 시종들 가운데 몇 사람이, 다시말해 우리아의 아내와 다윗 사이에 일어난 그 모든 일을 알고 있는 경호실의 측근 세력의 한 두 사람이겠죠, 이 사람들이 예의주시하고 있다가 우리아가 집에 가지 않으니까 즉각 보고합니다.
다윗이 그 다음날 아침 다시 우리아를 부릅니다. 다윗이 말하기를 “야, 네가 먼길을 왔기 때문에, 내가 너보고 집에 가서 푹 쉬라 그랬는데, 왜 집에 가지 않느냐 부인도 만나야 되지 않느냐” 하니까, 우리아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와 이스라엘의 군사들 그리고 나의 직속 상관 요압이 지금 들에서 야영을 하고 있는데 내가 어찌 내 집에 들어가서 편히 쉴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자, 여러분! 이 충성스런 신하 앞에 다윗이 어떤 반응을 나타내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일단 접어둡시다. 다음에 다루기로 하구요. 다윗이 다시 말하기를, “그래 좋다. 너를 다시 전쟁터로 보내겠다. 그러니 오늘은 일단 좀 먹고 마셔라.” 그러고는, 다시 작전을 바꿉니다. 이번에는 우리아에게 술을 잔뜩 먹여 술취하게 만듭니다. “네가 술이 취하면 제 정신이 아니니까 부인을 찾아 집으로 들어가겠지.” 그런 간교한 생각으로 우리아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합니다. 우리아가 술에 취했어요. 왕이 주는 것이니 안 받을 수 있어요 술마셔 보신 분들 감잡으시겠죠 이런 상황에서 술이 잘 취하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거 뭐 상식이지요. 오랫동안 술을 전혀 안 마시다가 술 한잔 드시면 어떻게 됩니까 더 쉽게 취한다면서요
그런데 고의적으로 취하라고 잔뜩 먹여 놨습니다. 거나하게 취했겠죠 “오늘 밤은 취했으니 이제 집에 가서 편히 쉬어라.” 하고 다윗은 우리아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아를 보십시오. 다시 경호실 요원들이 쉬고 있는 숙소에 가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다윗이 자기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깨닫고 다시 방법을 바꿉니다. 병사의 손에다 편지 하나를 쥐어 줍니다. 그것은 군대장관 요압에게 주는 편지입니다. “요압아, 우리아가 도착하거든 적진 깊숙히 내어 보내라. 그때 갑자기 후퇴를 해서 우리아로 하여금 적군의 손에 죽게 해라.” 우리아를 죽이라는 편지를 우리아와 함께한 병사의 손에 쥐어 보내는 다윗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렇게 충성스런 신하를. 우리아는 그것도 모르고 돌아가서, 결국 요압에 의해 전쟁터에서 죽게 됩니다. 요압은 다윗의 편지를 받고 어떤 처신을 합니까 우리아를 전방에 내세웁니다. 다음에 요압에 대해서 다시 한번 다룰 필요가 있어요. 이렇게 해서 우리아는 죽었습니다. 우리아가 죽고난 다음에 우리아의 아내는 다윗의 아내가 되는데, 이것도 속전속결입니다. 이스라엘 법에 의하면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7일 동안 호곡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호곡이 끝난 후 바로 데려왔습니다. 왜 재빨리 데려왔겠어요 출산 날짜를 맞춰야 되니까 그렇지요. 늦게 데려왔다가는 다윗과의 불륜의 관계로 임신한 것이 알려질까 봐, 이것을 감추려고 우리아가 죽고 호곡이 끝나자마자 바로 데려온 것입니다. 한 달이나 보름 정도의 차이는 잘 모르니까, 바로 데려왔어요. 이것이 다윗의 계획이었고, 그대로 했습니다. 우리아의 비극적인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 우리아가 취했던 태도입니다. 하나님 편과 자기 자신의 편을 놓고 따지자면, 그는 하나님 편에 충성했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하러 나갈 때면 언약궤를 앞세우고 나갔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에서 언약궤를 앞세우고 전쟁터에 나갔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전쟁에서 패하고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경험도 있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갖고 나갈 때는 승리했습니다. 이번에도 그 언약궤가 지금 전쟁터에 나가 있단 말이에요. 그 언약궤가 지금 어디에 있어요 전쟁터에 있다니까, 아마 천막 속에 있겠지요. “하나님의 언약궤가 천막 속에 있는데, 어찌 집에 가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다윗은 우리아의 말을 듣고 대성통곡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범죄해서 눈이 어두워지고 강퍅해져서 마음이 가질 않아요. 그러나 우리아는 항상 하나님 편에 있습니다. 여러분, 전쟁터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부인, 더구나 다윗이 한번에 반했을 만큼 아리따운 부인인데, 얼마나 보고 싶겠어요 그러나, 자기의 본능적 욕구를 절제합니다. 그리고 자기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고 하나님 앞과 왕 앞에서 충성스런 모습을 끝까지 견지합니다. 충성이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입니다. 우리아가 충신이었던 것은, 그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먼저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가 술취한 상태에서도 항상 하나님과 하나님의 언약궤를 생각했으며,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늘 하나님 편에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오늘 우리가 우리아의 모습을 보고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충성스런 일꾼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요구하시는 충성된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어디 가더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그런 사람! 우리 강성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어요 어디를 가든지 교회를 염려하는 사람, 시간 나면 들여다 보고 아끼고, 시간 나면 와서 기도하고, 거저 마음이 항상 교회에 와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제일 기뻐하시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면 어떤 분은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거에요. 아니 항상 교회만 생각하고 교회만 와서 있고 하면, 그럼 세상에선 어떻게 사나 여러분, 보십시오. 항상 그 마음이 하나님 편에 가 있는 우리아가, 전쟁터에 나가면 용감합니까, 비굴합니까 예 용감한 겁니다. 다윗도 항상 그 마음이 하나님 편에 있었지요. 다윗의 마음이 하나님 편에 있었을 때, 그때 다윗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세상적으로 무책임했습니까 자기 직무에 대해서 무책임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은 세상 일에도 열심입니다. 그렇게 되게 되어 있는 거에요. 여러분, 보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 충성한다고 그랬어요. 이것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작은 일과 큰 일을 따로 따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로부터, 집안일도 몰라라 하고, 애들도 모른다 하고, 남편도 모른다 하고, 그냥 미쳐서 돌아간다는 말을 듣는 분은 회개하셔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제대로 미쳐 돌아가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남편도 자식도 미쳐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왜요 멋있는 삶을 살기 때문이지요. 정말 예수한테 미친 사람들은 그가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건 간에 이제 거듭나서 멋진 삶을 살 겁니다.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엿세 동안 충성할 줄 아는 사람이에요. 남의 눈치 보지 않습니다. 주위 사람 눈치보면서 적당히 떼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서신을 통해서 “너희가 하나님께 보이듯이 일하라.”고 권면했어요. 이것은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들일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 사람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절대 사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일도 그렇고 직장 일도 그렇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하나님께 보이듯이 하여야만 합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교회에서 자라면서 귀가 아프게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무엇인 줄 아십니까 “교회가 왜 이래 아, 목사님들이 왜 저래” 하는 말입니다.
저를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혹 계실 겁니다. “아니, 우리 목사님이 왜 저래 안 그럴 줄 알았더니, 저 양반도 좀 이상하구만.” 안 그럴 줄 알았다는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다윗을 보십시오.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정말 멋있게 나간 사람 아니에요 비록 조그만 실수들이 있긴 있었지만 그가 얼마나 멋있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다윗의 삶은 엉망진창이 됩니다. 치명적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다윗의 가정에는 칼이 떠나질 않고, 자식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자식들이 아버지의 첩들을 취하는 아주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들이 계속 일어납니다. 이것은 다윗의 운명에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와 같은 사건을 일으키리라고 생각을 못 했잖아요. 앞의 모습들을 보면, 언젠가는 팍 쓰러져서 여러분들 보기에 “저럴 수가 있는가” 라는, 그런 일을 저지럴 것 같지 않죠 그러나 그러한 그도 얼마든지 우리로 하여금 한숨쉬게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시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에요. 그러나 심각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다윗이 아무리 타락하고 다윗이 아무리 완악하고 비겁하고 잔인한 군주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아의 충성된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부패했고 지도자들이 타락했다는 이유 때문에 신앙 생활을 적당히 하고 내가 열심히 안 해도 된다고 합리화는 시키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교회나 목사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오로지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목사가 타락하는 것은 하나님이 타락하는 것이 아닌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실질적으로 내가 하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으면서도 핑계는 어디에 둡니까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돈이 아까워서 헌금하지 않으면서도, “아이고, 우리 교회는 헌금해 봤자 쓸데없는 데 쓰니까 헌금할 맛이 안 나.” 그러면서 헌금 안 하는 분이 있다구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우리의 충성의 대상은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이 우리의 충성의 대상입니다. 우리아는 다윗이 자기를 배신하고, 아내를 빼앗고, 또 자신을 죽이려고까지 해도 그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서는 이 부분의 해석이 조금씩 다르긴 합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우리아가 군대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미 부인과 왕과의 관계를 귀뜸 받았지 않았겠느냐, 그럴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가 자기 집을 의도적으로 안 들어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으니 확인할 길이 없어요. 그러나 이 사건 가운데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자기를 죽이려 하고 자기 부인까지 빼앗아 가는 왕이라도 우리아는 끝까지 자기 일을 다하는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특히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은 교회의 부정적인 모습들 목회자의 부정적인 모습들을 많이 보고 들어 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들이 가만 있어도 된다거나 열심을 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로지 우리의 충성은 그 분을 향할 뿐입니다. 이철호 목사가 아무리 타락했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신앙만은 하나님 앞에서 견고해야 될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기 때문에 목사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이 아프고 사기가 저하 되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그럴수록 하나님께 충성하십시오. 비록 오늘 이 사회가 우리아처럼 고지식하게 충성하고 살다가는 비참하게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사회라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충성하며 살다가는 비극적인 실패를 맛봐야 될 것입니다. 주변의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것입니다. 그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말씀대로 충성하면서 살다가는 비극적인 실패를 맛 봐야 될 것입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말씀대로 살다간 따돌림을 당할 것입니다. 이용도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세상적으론 이용을 당하고 무시당하고 배신을 당하고 실패를 맛본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우리아처럼 산다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칭찬 받는 자로 기록이 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짧은 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 때문에, 아니 예수 믿는 자로서 주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아 가기 위해서 고통과 갈등과 실패가 있을 것이며, 또한 배신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만, 그러한 모든 눈물들이 주님 앞에 서는 그날에 영광의 상급으로 주님의 칭찬으로 변하여 여러분에게 되돌아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의 면류관, 썩지 않는 생명의 면류관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하나님 앞에 충성하며 살려다가는 우리아처럼 비극적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망할 수도 있고 직장에서 승진을 못할 수도 있고 경제적으로 손해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 신앙생활 바르게 하는 것 바로 그것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배신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순간 순간을 겪을 때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들의 친구가 되어 주실 것이고 힘이 되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들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이 하나씩 준비 될 것입니다. 그 마지막 날 영광의 날에 주님의 잔치에 영광스럽게 참여하는 축복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나를 위하여 부모나 형제나 전토를 버리는 자는 이 세상에서 10배를 받을 것이고 내세에 영생을 얻을 것이니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며 사는 자들은, 우리아와 같이 하나님께서 불러가는 사람도 있지만, 이 땅에서도 10배의 축복을 더하셔서, “봐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 편에 서는 자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들, 믿음으로 사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축복하신다.”라고 하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 축복하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반면 이런 상황 가운데서는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렇게 충성해야 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충성된 사람의 순교를 받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어느 쪽에 해당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대로 살다가 이 세상에서 매장을 당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복받은 분들입니다. 반면에 “봐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충성하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복을 주시는 법이야.”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서 샘플로 축복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때 교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여러분이 잘나서 축복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들에게 샘플로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여러분을 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그저 잠깐 있다 없어지는 것들 아닙니까 그런 것들에 눈이 어두워 그럭저럭 살다가, 어느날 문뜩 돌아보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도중에 하나님을 배신하고 나가 떨어지는 모습들을 보지 않습니까 허무한 데다 인생을 투자하지 맙시다. 오늘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으시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우리의 왕이시고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우리 주님 앞에 충성하며 삽시다. 우리가 결론으로 기억해야 할 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우리 각자는 사람을 보지 말고, 오로지 신실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오로지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하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가 그날에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서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날 하나님 앞에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고 아름답게 서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기쁨으로 그날을 맞이합시다. 이땅에서 사는 날까지 승리하시는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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