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갑절의 영감만을 (왕하2:9-10)
본문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 전적 부패한 인간의 심령 우리의 심령은 전적 부패한 심령이었고, 또 악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 합니다. 그러기에 예레미야 선지자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렇게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이 부패해져서 거기에 생기가 하나도 남 아 있지 않는 것을 가리켜서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마음에 각종의 그 요소가 완전히 부패되어 있고, 또 거 기다가 악령이 쉬지 않고 에덴동산에서부터 계속 타락한 인간의 심령에 왕 노릇을 하고 있으니 인간의 마음은 완전히 악령화 되고, 완전히 부 패한 마음들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지만 이를 누가 능히 알리요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를 통해서 말씀하시 기를 사람들이 이렇게 되어 있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느냐 성령님이 아니면 절대 돌이키지 못함 예레미야 17장 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모든 언행 심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심판해서 금생에 보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원 무궁토록 보응을 하시는데, 인간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 하고, 거기에다가 악령은 사로잡고 놓지 아니하고 제 주장에 복종시킬 려고 하니, 첩첩이 쌓여 있는 깊은 함정 속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 어떻 게 솟아나며 어떻게 돌아설 수가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불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공중의 악한 영이 그를 주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비록 중생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에 순 종하지 아니할 때는 악령이 그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영은 구출해 놓았지만 심신 으로 된 육은 구출하지를 않았습니다. 구출된 영을 통해서 영감과 진리 를 줄 때에 이를 달게 받아 힘을 씀으로 비로소 영접이 되고 구출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불의한 것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자기가 욕심 하나 잘못된 가짐으로 제 일생과 영원이 망쳐지지만 그 욕심이 틀렸다는 것을 죽는 날까지 모르고, 죽을 때에야 비로소 아, 헛일했다. 또 안다 할지라도 그것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자녀로서 학습도 세례도 받았지만 세상과 세상에 있는 어떤 학문을 해야 된다고, 학문에 욕심이 있어 불철주야로 죽는 날까지 노력하여 세상에서 유력한 권위 있는 학자가 됐다 할지라 도, 그의 일생 생활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과 천국은 다 저 버리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일생 동안 하다가 끝마쳤으니,그 요 소는 영원히 멸망받고 그 사람은 구원은 얻지만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과 같이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사상에, 그 욕심에 삐뚤어진 것을 누가 인간에게 가르쳐서 참으 로 이 욕심은 잘못됐다 하는 것을 실지로 느끼게 할 자가 누가 있습 니까 어떤 웅변가, 어떤 열변가가 아무리 말한다 할지라도 입은 막고 설득은 시킬 수 있어도 그 마음에 실감을 느껴 돌이킬 수 있게는 못 하는 것입니다. 다만 아버지의 성령님으로서만 인간의 마음에 악령을 뽑아낼 수 있고, 조물주가 뚜렷이 있는데 자기 중심대로 사는 그 악성을 뽑아낼 수 있 고, 대대로 인간 중심으로 살아온 더러운 풍속, 습성, 유전, 모든 세상 더러운 그런 것을 뽑아낼 수가 있지, 인간의 각오나 결심이나 뭐 회개 하는 어떤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인간의 것으로는 안 된다고 하나님이 단언을 해 놨습니다. 천하에 있는 불신자는 다 내버려두고 믿는 사람들의 그 마음과 모든 몸도 악령이 주장하기 때문에,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지, 입술로만 예수 믿지 실지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이루는 사람은 참 흰쌀에 뉘같이 귀합니다. 모두가 다 악령이 주관하여 있고,원죄가 주관하여 있고, 본죄인 악 성이 주관하고 있으니, 그 강한 세력은 천하 인간을 다 삼키고 있는 강 한 세력인데 우리가 무슨 힘으로 그 세력을 꿰뚫고 벗어날 수 있습니 까 절대 안 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이방과 교회의 권세를 마구 줄 수 있는 그런 권위가 엘리 야에게 있었고, 오만 기적과 능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신유의 권위를 줄 수 있는 엘리야지만 엘리사는 모든 것 싫고 당신 안에서 역사하는 그 영감을 나에게 달라고 구했습니다. 영감 받은 4단계 신앙 엘리야와 엘리사와 그 선지 생도들은 오늘 신약 교회의 성도들과 신 앙의 길을 모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길갈, 여리고는 모두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에 있는 곳인데,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강 이렇게 이 순위로 가게 된 것이, 지역이 그렇게 돼서 된 것보다도, 우리에게 벌써 신앙 사상들이 걸어온 유명한 그런 역사가 있는 곳곳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신령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길갈의 신앙:세상 축복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너는 길갈 여기에 있거라. 나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벧엘로 보내신다 할 때에, 길갈은 어떤 곳인고 하니, 이스라엘 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곡식, 만나 먹다가 곡식을 처음으로 먹기 시작한 그 장소가 길갈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기 전에 제 힘으로 살려고 이렇게 바둥 거리다가, 예수 믿고난 다음에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살게되는 모든 이 세상살이를 가졌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축복을 받아서 참 가정 에 우환스러운 것도 없어지고, 또 여러가지 얽혔던 것도 풀려지고, 이래 서 육신의 생활도 형통해지고, 또 신령한 믿음의 생활도 잘되는 생활입니다. 길갈에 머문다는 말은 예수 믿어 등따시고 배부르고 아무 어려움 없 이 지내니까 이만하면 족하다 하는 그 자리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처져 있슴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엘리야가 말하기를 나는 벧엘로 가겠는데 너는 여 게 머물라. 엘리사는 아닙니다. 나는 맹세코 따라가겠습니다. 말 할 때에 그러면 가자. 했던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옆에서 강권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원하는 마음과 단마음이 있어야 신앙 생활이 되는 것이지 단마음 없으 면 안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예수 믿기 전에 자기 개인 교회와 가정 교회, 사회 생활, 모든 것이 얽혀서 뒤죽박죽으로 이렇게 되 어 있다가, 예수 믿고난 다음에 그런 것이 정리가 되고 평안하고 이렇 게 참 등따시고 배부른 생활 하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권면은 해도 강제로 끌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성공은 있지 아니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무리들이 다 그만 그러다가 일생 동안 죽는 생활 하고 끝마쳤지, 하나님과 접선되는 그런 생활은 하지를 못했습니다.
2. 벧엘의 신앙:제단 생활 거기에서 벧엘로 내려갔는데, 벧엘은 성경에 믿음의 조상 때부터 하나님이 약속으로 세워 놓은 축복의 곳입니다. 벧엘은 제단 쌓은 곳이라 고, 모두 다 출발할 때에 첫 제단을 쌓은 곳이기 때문에 벧엘은 제단 쌓은 곳이라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다 인식하도록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벧엘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 쌓는 생활. 그저 주일 잘 지키고, 성경 보고, 연보하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이렇 게 아무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신앙 생활 하면 이것으로 다 족하게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하고 사는 생활을 벧엘로 가르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서 살아라 거기에는 선지 생도들이 많은데, 선지자 될려고, 하나님의 일꾼 될려고 모두 벌뜩 거리는 그런 사람들이 벧엘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생도들도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지금 당신이 따르는 그 주를 하나님이 데려가시기로 작정된 것을 아느냐 갔다가는 낭패당 할 터인데 뭐할려고 따라가겠느냐 우리와 같이 있자. 나도 안다 잠잠하라 거기에서 붙들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엘리야를 따를려고 함으로 그 자리를 초월했습니다. 그저 평안한 가운데서 일반적인신앙 생활 하고 있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아니하고 엘리야가 가는 곳을 끝까지 따라가겠 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신앙 생활 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사람이 많고, 주 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주님이 인도하시는 성경 말씀대로 다 가고 영감 을 따라서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이 벧엘 생활에서 그 만 만족하고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벧엘에 있는 그 선지자 생도들이 뭣 때문에 거기 있었겠소 우리에 게 가르칠려고 그런 역사적인 형식을 꾸민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꾸며 서 우리에게 보인 것이오. 다만 거기에서 엘리사만이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 습니다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한 사람은 많은 선지 생도 있었지만 엘 리사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3. 여리고의 신앙:이적과 기사 여리고에 가니까 거기에서는 특출한 선지 생도 50인이 기다리고 있 으면서 또 엘리사의 가는 길을 멈추게 해서, 같이 있자고, 가지 말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점령했던 곳입니다. 초자연 초능력의 믿음생활을 말씀함이니 예수 믿고 능력까지 받아 병든 자를 치료하고 여 러 가지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 그런 신앙생활을 가르쳐서 여리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당신의 주를 이제는 하나님이 불러 가실 터인데 따라가다가 낭패되지 않느냐 이제는 그대로 가면 어떤 역경이나 어려 움이 있을 터인데 그만 우리와 같이 있자. 나도 안다. 잠잠하라. 하고 이적과 기사의 생활에서 머물고 만족치 않고 따라가니까 요단강을 만났습니다.
4. 요단강의 신앙:사선 초월 요단강은 죽음으로 상징하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다 공통입니다. 요 단강은 물살이 심한 곳인데, 배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건너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갔을 때에 비로소 네 소원이 뭐이 냐 하는 것을 물었고, 그 소원을 말할 때에 나를 하나님이 올리워 가셔서 너와 이별되는 그때까지 네가 나를 바라봐야 이 일이 이루어지 지,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말을 하고 떠나고난 다음 에 회리바람 속에서 엘리야를 끝까지 바라보는 데에서 거기에서 엘리야 의 겉옷을 던져 주는 것을 받아 가졌습니다. 그것이 뭐이냐 하나의 형식이라 말입니다. 옷이 무슨 상관 있어요, 그까짓 게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 형식으로 계시해 보이는 모형입니다.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 엘리야는 오늘에 예수님의 모형으로 우리에게 보여 줬고, 엘리사는 끝까지 주를 따르는 성도로 보여 줬고, 선지 생도들은 길갈 정도에서, 벧엘 정도에서, 여리고 정도에서 각각 만족하고 주저앉아 더 이상의 신 앙 전진이 없는 신앙들을 표시한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그저 성경 보고 하나님의 축복받아 일 없이 살면 잘 믿는 줄로 알고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제단 쌓아 그저 새벽기도 나 나오고, 기도나 하고, 주일이나 지키고 이러면 예수 잘 믿는 줄로 만 족하고, 거기에서 좀 나아가서 예수 믿어 이적과 기사의 은혜를 받았고 이러면 족한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길갈, 벧엘, 여리고에 각각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말씀하시기를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거짓 선지자가 누군데 와서 주의 이름으로 내가 선지자노릇 해서 많은 사람들을 인도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이적과 기사를 내가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말할 때에 주 님이 이 악한 자들아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 가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 이 아니요, 이적과 기사라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과연 주님이 계신 다는 증거로 너희들이 똑똑히 믿고 의심 없이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구원되는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적을 보인 것은 이적 을 봐서 참 믿으라고 보인 것이지 이적 그것이 구원인 줄 아느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는 자는 다 멸망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6장에 가서는 보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이는 네 육신이 알게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영이 너에게 알게 해 준 것이니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운 그 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보면 성전 밖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성전과 제단과 그 가운데 경배하는 자들만 측량하고 그 외에 것은 측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 해서 많은 사람에게 전도를 했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했고, 이적과 기사를 행했는데 이것이 구원이 아닌가 하는 자가 거짓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것은 도가 아니오. 구원의 도가 아 니오. 그것은 구원의 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표적은 믿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 말씀이 참되니 이대로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이 오. 주의 말씀대로 살다니 그러면 교회는 어디에다 세우는데 천국 열쇠는 무엇으로 주는데 육신이 인간의 심신의 연구에서 나온 것 아니고 아버지가 알려 준 그 영감 그 영감 위에 교회 세우고, 그 영감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고, 그 영감 그것이 땅위의 것을 매면 매이 고 풀면 풀리지, 영감에 집중하라고 그런 것 하는 것이지 그런 것 자체는 영감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오.
그러기에 길갈 생활, 벧엘 생활, 여리고 생활, 이런 일반적인 신앙 생활은 거기에서 참 신앙의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길 갈 하나님의 은혜받아 가지고 영육에 새로운 은혜를 받는 생활, 벧 엘하나님 앞에 제단 쌓는 제단 생활, 여리고 이적의 신유 생활. 여기에 있는 이 선지 생도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엘리야의 마지막 끝이 마쳐지는 회리바람에서 엘리사가 엘리야를 잃어버리게 되는 이런 일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엘리야가 회리바람에 날려 없어질 것 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알았지만 안 것이 그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던 가 엘리야를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또 그들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영감이 온 것을 보고 그 앞에 무릎 을 꿇고 주라고 시인했습니다. 알았는데 안 것이 뭐했던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승천시켰는데 하나님의 종말 일에 믿지 아니하고 의심해서 용사 50인을 보내서 찾도록, 찾아 가지고 보라. 승천이 아니고 추락 낙 상돼 가지고 지금 이렇게 죽어 있다는 그런 것을 은연중 원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안 되는 면을 원해서 언제나 반발하는 그 반대편에 서서 있은 선지자들입니다. 오늘도 이렇습니다. 영감만을 구하는 최종까지 길갈을 초월, 벧엘을 초월, 여리고를 초월, 아직도 멀었습니다. 요단 의 죽음을 초월해 사선을 넘었을 때에, 생명을 내놓고 죽는 것을 개의 치 않고 육의 생명보다도 신령한 영원한 생명을 존귀하게 여겼을 때에, 모든 피조물보다도 창조주 조물주 주의 모든 능력이 크다고 인정될 때 에, 이 세상을 깔볼 때에, 피조물을 깔볼 때에, 세상과 조물주와 비교될 때에, 그 비중을 조물주에게 높이고, 땅위에 있는 소망과 하늘의 소망을 비교할 때에 땅위의 소망보다 하늘의 소망을 더 높이고, 모든 것 다 끝 나고라도 하나님의 영감받아 가지고 엘리야 모양으로 일하려는, 엘리야 모양으로 신앙 생활 하려는 거기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초월해서 성령님이 아니면 인간은 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믿어, 이 성신의 감화로 자신과 모든 부패성과 악령의 모든 역 사가 다 변화되어 탈출되고 자유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닫는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보다, 저것보다, 무엇보다, 길갈보다, 벧엘보다, 여리고보다, 요단 강의 생사보다 더 원했을 때에 네가 원하는 게 뭐이냐 물었고, 원 하는 것을 말할 때도 땅위에 있는 모든 것 원치 않고 영감을 원할 때에 비로소 영감이 그이에게 약속됐고, 약속된 그 영감이 언제 이루어졌느 냐 엘리야의 최종 회리바람이 부는데, 최종까지를 바라보고 끝까지 바라 보는 거기에서 영감은 그에게 임했습니다.
오늘도 참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 생활을, 길갈 목회 생활에서 만족하는 자들 많습니다. 벧엘 목회 생활에서 만족하는 자들 많습니다. 여리고 목회 생활에서 만족하는 자들 많습니다. 이적이나 기사나 행하고, 교인수나 모아서 밥이나 먹고, 그냥 현상 유지만 되면 만족하는 여기에서, 정말로 사선을 넘지 못하고, 자기의 생 명을 완전히, 보다, 생명보다 구원을 크게 여겨서 생명을 투자하지 못하 고 그 안에서, 안 믿는 사람들이 세상 것을 탐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 이 세상에 있는 그것을 탐해서 그것을 욕망하고, 만족하고, 이렇게 가는 신자들이 많은 것을 여기에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감의 신앙 생활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을 받은 다음에 그가 한 행사는 여리고 성에 그 모든 지질과 수질이 나쁜 그것을 고쳐서, 하나님이 고쳐 줬다 하고 고쳐서 그 모든 것이 다 변질되어 오늘까지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 줬겠습니까 소금을 뿌린다고 됐겠소 아니오. 하나님과 엘리사가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오. 영감받고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과 엘리사가 함께 행동할 때에, 먼저 땅위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해결지워서 영광 을 돌리게 하고, 땅위에 있는 인간들에게 평강이 이르도록 하고, 그다음 에는 조롱하고 배격하는 자들을 저주했습니다. 저주했으니까 이거는 엘 리사의 실수라 봅니까 하나님이 하시지 않았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셔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42인이 곰에게 찢겨서 죽은 것은 뭘 보였느냐 땅위에 있는 건설 과 파괴, 구원과 멸망, 땅에서 네가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리고, 하늘에서 도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린다. 왜 영감이 매면 매여지지, 영감이 풀면 풀려지지. 풀고 매고, 구원하고 실패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과 같이 움직이는 자 되는 것이 영감에서 되는 것이지 이적과 기사나 그런 것 행하는 데에서 되는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신앙 생활을 하는 데에 요런 형식을 가지고 가르쳤 으니까 우리가 잘 알게 됩니다. 요 형식을 가지고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잘 깨달을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오늘도 길갈 신앙 생활에 머물고 있는 자, 벧엘 신앙 생활에 머물고 있는 자, 여리고 신앙 생활에 머물고 있는 자, 아직까지 생명을 주님의 제단 위에 내어 놓지 않고, 생명을 제 것으로, 생명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암만 날뛰어 봤자, 마귀는 제까짓 거야 마지막에 쓸면 다 쓸 려올 것 다 쓸려오는 것입니다.
사선을 넘지 않고는 참된 구원은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죽자껏 해도 마귀의 밥만 만들고 마귀의 소득만 만들지 소용 없습니다. 요단을 건너가고난 다음에 네 소원이 뭐이냐 거기에는, 사선을 넘어서 다 주님과 주님의 도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 제물로 바치고 나니 까 거기에는 세상이고 뭐이고, 하나님께서 뭐이든지 네게 주마. 뭐 할래 할 때에 땅위에 있는 모든 것보다도 영감을 달라고 하는 거기에서 성신의 감동이 자기를 주 관하는 그 은혜가 그에게 오는 것이지, 이렇게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얻기가 힘드는 것이지, 그저 제 마음대로 욕심대로 날뛸 대 로 날뛰고, 살 대로 살고, 제 모든 심령과 정력은 다 쓰고 찌꺼기 남은 그거 가지고, 찌끄러기 남은 것, 돈버는 데도 쓰지 못할 찌끄러기 남은 거 이거 가지고 주일이나 슬슬 지키고, 성경이나 보고, 기도나 하고, 뭐 전도나 하면 다 되는줄 알면 안됩니다. 이것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길갈을 넘읍시다! 벧엘을 넘읍시다! 여리고를 넘읍시다! 요단을 넘읍시다! 성신의 능력을 받읍시다! 그래 가지고 엘리사는 다시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하나님 백성들 있는 데 건너갔습니다. 갔으니까, 엘리사나 다른 사람들이나 꼭 같은 사람 으로 꼭 같이 살고 있지만 이는 길갈을 벗어났고, 벧엘을 벗어났고, 여 리고를 벗어났고, 요단강을 벗어났고, 회리바람에서 마지막 주님을 이별 하고 최종까지 바라보는 이 끝을 마치고 영감을 받아 가지고 다시 요단 강을 건너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영감 준비의 생활 이러기 때문에 기름을 준비한 자들도 다 신랑이 더디 오매 졸며 잘 새 밤중에 신랑이라 하니까 준비한 자들은 다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준 비하지 못한 자들은 다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보다, 어떤 것보다, 무엇보다, 주님과 하늘나라를 크게 여기고 자기보다 주님을 크게 여겨서 이 순위를 통과해 가지고 예수를 믿는 자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분명히 많습니다. 이런 순서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이렇게 꼬물거려 봐야 혹시 그러다가 거기 서 뭣이 될까 해서 그런 것이지 실은 건설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믿으면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어떤 것이 거짓 선지자인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 하고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말씀 많이 가르쳤고 가르치면 그것은 하나님의 도를 증거하는 것이요, 가르쳤다고 제가 성화된 것 아닙니다. 제가 된 것 아니오.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했 다고 제가 변화된 것 아니오. 주의 일로 능력 있는 큰 일을 많이 했다 고 된 것 아닙니다. 어찌 되느냐 네가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된다 했습니다. 뜻대 로 행하는 자. 그것이 뭐이요 그것이 영감입니다. 그것이 영감이오. 거기에서부터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고, 다른 것은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 이하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네 이름을 반석이라 해라, 반석 위에 교회 세우겠다. 반석이 뭣이며 천국 열쇠가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아는 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니이다 이렇게 네가 안 것이 모든 선배들, 대대로 내려오는 신학자들 에게 배운 것 아니다. 인간에게 배운 것 아니다. 네 속에 아버지의 영감 으로 너에게 알려 준 그 영감을 그대로 배워 가지고, 그대로 네가 인정 하고, 그 영감대로 인정하는 그것으로써 네가 안 것이지 육신이 너에게 알린 것 아니다. 거기, 네 속에 성신의 감화가 인도해 준 영감 그대로 네가 행동하는 그 행동, 그 사람 위에 교회 세우고, 거기에 천국 열쇠 준다. 네 속 에 영감된 그 영감이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린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까 이 제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려서 산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데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네 행위에 온전한 것을 내가 보지 못했다. 100가지 중 에 한 가지나 행하고 어떤 자는 만족하고, 100가지 가운데에 50가지나 행하고 만족하는 것 아니다. 온전한 행위 거기에서만 생명 역사는 이루 어진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도를 에누리하고 행 동을 에누리한 이런 것을 다 이제는 버립시다.
요한일서 2장 27절 이하에 보면 너희들에게 기름부음이 너를 옳고 바르게 가르치는데 인간에게 배울 것이 없다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다. 사람에게 배운 그것은 성경 상식으로 배우고 있고, 네 속에 영감 이 영감시켜 준 그대로 하는 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교회 서고, 거기 에 네가 건설되고, 거기에 변화가 되고, 거기에 능력이 있지 일반 상식 적으로 성경 가르치는 거기에 구원 있는 것 아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치 말라 그리하면 아버지의 사랑 이 네 속에 거하지 아니하나니 세상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서 쫓겨납니다. 있지를 못합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3대 구속이 거기에 역사할 수 있습니까 3대 구속은 당장 쫓겨 나갑니다. 3대 구속은 그 사람에게 있는 세상을 죽이고 세상을 잡아먹고 이용하는 것인데, 세상을 기르는 것과 주의 구속의 역사는 정반대인데, 구속의 역사는 세상 을 죽이고 세상은 구속의 역사를 죽일려 하고 서로 반대인데,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어떻게 되겠느냐 아버지의 사랑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이 네 속에 거하지 아니하느니라 왜 이는 다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 세상 으로 좇아 온 것이니 세상 새끼다, 세상 새끼! 아버지로 좇아 온 것이 아니니라 그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정 욕 세상 것을 욕심내는 그 욕심내는 자, 안목의 정욕, 세상에 보 이는 그것을 욕심내는 그자, 그자가 사는 생활이니 그자는 멸망할 자식 이라. 그자는 옛사람이라. 그자는 주의 피공로에 원수된 자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너는 그 사람으로도 살 수 있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로도 살 수 있다. 세상과 세상 의 것을 사랑하는 그자는 세상으로 좇아 온 자다. 아버지께로 온 자가 아니다. 그자의 모든 행위는 주의 역사를 대적하는 그 행위이기 때문에 주의 공로는 거기에 거할 수가 없다. 네가 그것 돼 가지고 대적하니까 쫓겨 나가야 될 것 아니냐 하신 것입니다. 길갈의 선지, 벧엘의 선지, 여리고의 선지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 고 하늘나라를 그렇게 고조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전부 엘리사 행위를 반대했습니다. 미혹하고 반대했어. 하나님이 완성해 놓은 일도 다 유혹 해서 반대하고 조롱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우리가 깊이…. 이제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습니다. 재림이 늦어도 세상은 못 견딥니다.
세상은 모든 면이 멸망의 직전에 있을만큼 죄악이 관영해 있습니다. 모든 면에 다 죄악이 관영해 있습니다. 주의 재림이 가까왔습니다. 빨리 빨리 그들이 멸망하는 그 죄악에서 나와야 됩니다. 그 죄악이 뭐인데 주님보다 저 사랑하는 것. 주님보다 저 사랑하는 것. 예수를 믿되 요 선지자들 모양으로 자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 주님 이 나 위해서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셔서 모든 것 다 제물되어 나 위해서 나를 구출해 주셨으니까 구출받은 나는 이제 남은 때는 당신 위해 사는 것이 법이지요, 마땅한 법리지요. 이런데 아직도 예수 믿는 것도, 자기 위해서 예수 믿는 이 생활 하는 것을 그대로 붙여 두는 것은 성전 겉마당이오. 그런 가운데서 행여나 일어날까 살아날까 하는 것이지 주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자기를 중심해서 사는 생활은, 그 생활, 행동이라 하는 것은 건설구원에 속한 것인데 건설구원은 털끝만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루어지 지 않습니다. 기본구원은 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이 됐기 때문에 단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이 됐기 때문에 듣든지 안 듣든지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자기가 자기를 기쁘게 좋게 하기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사는 그 죄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제는 내 중심으로 주님을이용하고 주의 도를 이용할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전부는 대속하신 주를 위해서 살아 야 하는 자로 인식하고 살 자로 출발하고, 주를 위해서 사는 그 걸음에 서만, 털끝만큼이라도 거기에서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다른 데는 건설구원은 절대 없습니다. 이것을 구원 있다고 하는 자는 다 거짓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신유의 은혜를 받아서 신유의 행사를 해도 안 됩니다. 많은 전도를 해도 안 됩니다. 전도했으면 전도는 됐는데 전도받은 그 사람이, 자기를 주 위해서 바쳐서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해서, 사나 죽으나 주 의 것이라,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먹어도 주를 위해 서 마셔도 주를 위해서 행한 것이라야 됩니다. 자기를 향한 데서 방향 을 전환해서 빽 돌아서서, 이제는 내가 주를, 나 위해서 이용할 게 아니 라 내가 주의 이용물로, 주의 것으로, 주를 위해 사는 여기에서만 건설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다 같이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고 일하나 기름 준비 한 자와 안한 자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벌써 요단을 건너서 그 생도들하고 여리고에 같이 있었습니다. 같이 있었지만 그 순서를 통과해 가지고 같이 있는 자, 거기에 가 지 않고있는 자, 기름을 준비하고 조는 자, 기름 준비 안 하고 조는 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거는 다 옆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될까 싶 어서 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뜻대로 무슨 말이오 영감에 피동된 거기에서만 구원 있습니다. 다른 데는 없습니다. 헛된 위안을 받지 맙시다. 다른 데는 구원 없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단언을 내립니다. 이제는, 슬슬 붙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했지만 그거 가지고 정말 안 됩니다. 이제 나도 마지막으로 단 언을 내려야됩니다. 주의 영감에 붙들려 인도하는 거기에만 성화도 되고, 그 행위만 영생 도 되고, 그것이 주님에게 속하게 되지 자기가 주인이 돼 가지고 자기 시비, 비판, 이해, 평가, 자기가 주관되어서 다 해 가지고, 꺾지 못할 강 한 왕이 자기가 돼 가지고 있으면서 주님을 대해서는 이렇게도 상대하 고, 저렇게 간교도 부리고, 저렇게 웃기도 하고, 저렇게 예물도 드리고 암만 해 봤자 거기에는 내나 옛사람의 행위요, 새사람의 행위는 아닙니다. 우리가 반사 노릇을 하는 것도 그러는 가운데에서 가장 영감에 접하 기 쉽고, 그런 가운데서 세상 재미 취미는 멀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인간 구원에, 취미도 슬슬 껍데기에서부터 바꾸어 나가다가 이제자기 와 주님을 완전히 바꾸는 요 역사 하기가 쉽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 되지 않으면 암만 해 봤자 내가 선지자 노릇을 많이 했습니다 이 악한 자들아 내가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것이 자기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자기 구원 되는 일에 가장 용이한 방편입니다. 가장 가까운 방편입니다.
예레미야 선지를 통해서 말씀하시 기를 사람들이 이렇게 되어 있지만 누가 그것을 알겠느냐 성령님이 아니면 절대 돌이키지 못함 예레미야 17장 9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그 모든 언행 심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심판해서 금생에 보응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영원 무궁토록 보응을 하시는데, 인간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 하고, 거기에다가 악령은 사로잡고 놓지 아니하고 제 주장에 복종시킬 려고 하니, 첩첩이 쌓여 있는 깊은 함정 속에 있는 인간의 마음이 어떻 게 솟아나며 어떻게 돌아설 수가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불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공중의 악한 영이 그를 주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비록 중생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에 순 종하지 아니할 때는 악령이 그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십자가 대속의 공로로 영은 구출해 놓았지만 심신 으로 된 육은 구출하지를 않았습니다. 구출된 영을 통해서 영감과 진리 를 줄 때에 이를 달게 받아 힘을 씀으로 비로소 영접이 되고 구출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성령님이 아니면 우리는 우리의 불의한 것을 돌이키지 못합니다. 자기가 욕심 하나 잘못된 가짐으로 제 일생과 영원이 망쳐지지만 그 욕심이 틀렸다는 것을 죽는 날까지 모르고, 죽을 때에야 비로소 아, 헛일했다. 또 안다 할지라도 그것을 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자녀로서 학습도 세례도 받았지만 세상과 세상에 있는 어떤 학문을 해야 된다고, 학문에 욕심이 있어 불철주야로 죽는 날까지 노력하여 세상에서 유력한 권위 있는 학자가 됐다 할지라 도, 그의 일생 생활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영감과 천국은 다 저 버리고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일생 동안 하다가 끝마쳤으니,그 요 소는 영원히 멸망받고 그 사람은 구원은 얻지만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과 같이될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사상에, 그 욕심에 삐뚤어진 것을 누가 인간에게 가르쳐서 참으 로 이 욕심은 잘못됐다 하는 것을 실지로 느끼게 할 자가 누가 있습 니까 어떤 웅변가, 어떤 열변가가 아무리 말한다 할지라도 입은 막고 설득은 시킬 수 있어도 그 마음에 실감을 느껴 돌이킬 수 있게는 못 하는 것입니다. 다만 아버지의 성령님으로서만 인간의 마음에 악령을 뽑아낼 수 있고, 조물주가 뚜렷이 있는데 자기 중심대로 사는 그 악성을 뽑아낼 수 있 고, 대대로 인간 중심으로 살아온 더러운 풍속, 습성, 유전, 모든 세상 더러운 그런 것을 뽑아낼 수가 있지, 인간의 각오나 결심이나 뭐 회개 하는 어떤 마음으로는 안 됩니다. 인간의 것으로는 안 된다고 하나님이 단언을 해 놨습니다. 천하에 있는 불신자는 다 내버려두고 믿는 사람들의 그 마음과 모든 몸도 악령이 주장하기 때문에, 이름만 예수 믿는 사람이지, 입술로만 예수 믿지 실지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이루는 사람은 참 흰쌀에 뉘같이 귀합니다. 모두가 다 악령이 주관하여 있고,원죄가 주관하여 있고, 본죄인 악 성이 주관하고 있으니, 그 강한 세력은 천하 인간을 다 삼키고 있는 강 한 세력인데 우리가 무슨 힘으로 그 세력을 꿰뚫고 벗어날 수 있습니 까 절대 안 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이방과 교회의 권세를 마구 줄 수 있는 그런 권위가 엘리 야에게 있었고, 오만 기적과 능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신유의 권위를 줄 수 있는 엘리야지만 엘리사는 모든 것 싫고 당신 안에서 역사하는 그 영감을 나에게 달라고 구했습니다. 영감 받은 4단계 신앙 엘리야와 엘리사와 그 선지 생도들은 오늘 신약 교회의 성도들과 신 앙의 길을 모형적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길갈, 여리고는 모두 요단강 건너 가나안 땅에 있는 곳인데, 길갈, 벧엘, 여리고, 요단강 이렇게 이 순위로 가게 된 것이, 지역이 그렇게 돼서 된 것보다도, 우리에게 벌써 신앙 사상들이 걸어온 유명한 그런 역사가 있는 곳곳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신령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길갈의 신앙:세상 축복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너는 길갈 여기에 있거라. 나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벧엘로 보내신다 할 때에, 길갈은 어떤 곳인고 하니, 이스라엘 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축복의 곡식, 만나 먹다가 곡식을 처음으로 먹기 시작한 그 장소가 길갈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기 전에 제 힘으로 살려고 이렇게 바둥 거리다가, 예수 믿고난 다음에 예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아 살게되는 모든 이 세상살이를 가졌습니다. 은혜를 받아서 축복을 받아서 참 가정 에 우환스러운 것도 없어지고, 또 여러가지 얽혔던 것도 풀려지고, 이래 서 육신의 생활도 형통해지고, 또 신령한 믿음의 생활도 잘되는 생활입니다. 길갈에 머문다는 말은 예수 믿어 등따시고 배부르고 아무 어려움 없 이 지내니까 이만하면 족하다 하는 그 자리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이 처져 있슴을 말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엘리야가 말하기를 나는 벧엘로 가겠는데 너는 여 게 머물라. 엘리사는 아닙니다. 나는 맹세코 따라가겠습니다. 말 할 때에 그러면 가자. 했던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옆에서 강권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제가 원하는 마음과 단마음이 있어야 신앙 생활이 되는 것이지 단마음 없으 면 안 됩니다. 오늘도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예수 믿기 전에 자기 개인 교회와 가정 교회, 사회 생활, 모든 것이 얽혀서 뒤죽박죽으로 이렇게 되 어 있다가, 예수 믿고난 다음에 그런 것이 정리가 되고 평안하고 이렇 게 참 등따시고 배부른 생활 하면 그것으로 족한 줄 알지만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권면은 해도 강제로 끌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거기에 성공은 있지 아니했습니다. 거기에 있는 무리들이 다 그만 그러다가 일생 동안 죽는 생활 하고 끝마쳤지, 하나님과 접선되는 그런 생활은 하지를 못했습니다.
2. 벧엘의 신앙:제단 생활 거기에서 벧엘로 내려갔는데, 벧엘은 성경에 믿음의 조상 때부터 하나님이 약속으로 세워 놓은 축복의 곳입니다. 벧엘은 제단 쌓은 곳이라 고, 모두 다 출발할 때에 첫 제단을 쌓은 곳이기 때문에 벧엘은 제단 쌓은 곳이라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다 인식하도록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다 벧엘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제단 쌓는 생활. 그저 주일 잘 지키고, 성경 보고, 연보하고, 전도하고, 기도하고 이렇 게 아무 어려움 없이 평안하게 신앙 생활 하면 이것으로 다 족하게 생각하고 거기에서 만족하고 사는 생활을 벧엘로 가르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너는 여기서 살아라 거기에는 선지 생도들이 많은데, 선지자 될려고, 하나님의 일꾼 될려고 모두 벌뜩 거리는 그런 사람들이 벧엘에 많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생도들도 엘리사에게 말하기를 지금 당신이 따르는 그 주를 하나님이 데려가시기로 작정된 것을 아느냐 갔다가는 낭패당 할 터인데 뭐할려고 따라가겠느냐 우리와 같이 있자. 나도 안다 잠잠하라 거기에서 붙들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엘리야를 따를려고 함으로 그 자리를 초월했습니다. 그저 평안한 가운데서 일반적인신앙 생활 하고 있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아니하고 엘리야가 가는 곳을 끝까지 따라가겠 다고 했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신앙 생활 하는 것으로 만족해 하는 사람이 많고, 주 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주님이 인도하시는 성경 말씀대로 다 가고 영감 을 따라서 가겠다고 하는 사람은 많지 못합니다. 이 벧엘 생활에서 그 만 만족하고 주저앉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벧엘에 있는 그 선지자 생도들이 뭣 때문에 거기 있었겠소 우리에 게 가르칠려고 그런 역사적인 형식을 꾸민 것입니다. 영원 전부터 꾸며 서 우리에게 보인 것이오. 다만 거기에서 엘리사만이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 습니다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한 사람은 많은 선지 생도 있었지만 엘 리사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3. 여리고의 신앙:이적과 기사 여리고에 가니까 거기에서는 특출한 선지 생도 50인이 기다리고 있 으면서 또 엘리사의 가는 길을 멈추게 해서, 같이 있자고, 가지 말라고 말을 했습니다. 여리고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점령했던 곳입니다. 초자연 초능력의 믿음생활을 말씀함이니 예수 믿고 능력까지 받아 병든 자를 치료하고 여 러 가지 특별한 은사를 가진 사람, 그런 신앙생활을 가르쳐서 여리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당신의 주를 이제는 하나님이 불러 가실 터인데 따라가다가 낭패되지 않느냐 이제는 그대로 가면 어떤 역경이나 어려 움이 있을 터인데 그만 우리와 같이 있자. 나도 안다. 잠잠하라. 하고 이적과 기사의 생활에서 머물고 만족치 않고 따라가니까 요단강을 만났습니다.
4. 요단강의 신앙:사선 초월 요단강은 죽음으로 상징하는 것이 일반 학자들의 다 공통입니다. 요 단강은 물살이 심한 곳인데, 배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건너갈 수가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따라서 요단강을 건너갔을 때에 비로소 네 소원이 뭐이 냐 하는 것을 물었고, 그 소원을 말할 때에 나를 하나님이 올리워 가셔서 너와 이별되는 그때까지 네가 나를 바라봐야 이 일이 이루어지 지, 그렇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아니하리라. 말을 하고 떠나고난 다음 에 회리바람 속에서 엘리야를 끝까지 바라보는 데에서 거기에서 엘리야 의 겉옷을 던져 주는 것을 받아 가졌습니다. 그것이 뭐이냐 하나의 형식이라 말입니다. 옷이 무슨 상관 있어요, 그까짓 게 그것이 우리에게 하나 형식으로 계시해 보이는 모형입니다. 참된 신앙과 거짓 신앙 엘리야는 오늘에 예수님의 모형으로 우리에게 보여 줬고, 엘리사는 끝까지 주를 따르는 성도로 보여 줬고, 선지 생도들은 길갈 정도에서, 벧엘 정도에서, 여리고 정도에서 각각 만족하고 주저앉아 더 이상의 신 앙 전진이 없는 신앙들을 표시한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서 그저 성경 보고 하나님의 축복받아 일 없이 살면 잘 믿는 줄로 알고 있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제단 쌓아 그저 새벽기도 나 나오고, 기도나 하고, 주일이나 지키고 이러면 예수 잘 믿는 줄로 만 족하고, 거기에서 좀 나아가서 예수 믿어 이적과 기사의 은혜를 받았고 이러면 족한 줄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길갈, 벧엘, 여리고에 각각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는 말씀하시기를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거짓 선지자가 누군데 와서 주의 이름으로 내가 선지자노릇 해서 많은 사람들을 인도했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냈고, 이적과 기사를 내가 행하지 아니하였습니까 말할 때에 주 님이 이 악한 자들아 내가 도무지 너희를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 가라.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 이 아니요, 이적과 기사라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과연 주님이 계신 다는 증거로 너희들이 똑똑히 믿고 의심 없이 따라오라고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구원되는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적을 보인 것은 이적 을 봐서 참 믿으라고 보인 것이지 이적 그것이 구원인 줄 아느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지 않는 자는 다 멸망하리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16장에 가서는 보면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이는 네 육신이 알게 한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영이 너에게 알게 해 준 것이니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 그 위에 교회를 세운 그 에게 천국 열쇠를 주겠다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보면 성전 밖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성전과 제단과 그 가운데 경배하는 자들만 측량하고 그 외에 것은 측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 해서 많은 사람에게 전도를 했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을 했고, 이적과 기사를 행했는데 이것이 구원이 아닌가 하는 자가 거짓 선지자인 것입니다. 그것은 도가 아니오. 구원의 도가 아 니오. 그것은 구원의 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표적은 믿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 을 위해서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 말씀이 참되니 이대로라는 것을 인정하고 주의 말씀대로 살라는 것이 오. 주의 말씀대로 살다니 그러면 교회는 어디에다 세우는데 천국 열쇠는 무엇으로 주는데 육신이 인간의 심신의 연구에서 나온 것 아니고 아버지가 알려 준 그 영감 그 영감 위에 교회 세우고, 그 영감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고, 그 영감 그것이 땅위의 것을 매면 매이 고 풀면 풀리지, 영감에 집중하라고 그런 것 하는 것이지 그런 것 자체는 영감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오.
그러기에 길갈 생활, 벧엘 생활, 여리고 생활, 이런 일반적인 신앙 생활은 거기에서 참 신앙의 길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길 갈 하나님의 은혜받아 가지고 영육에 새로운 은혜를 받는 생활, 벧 엘하나님 앞에 제단 쌓는 제단 생활, 여리고 이적의 신유 생활. 여기에 있는 이 선지 생도들,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엘리야의 마지막 끝이 마쳐지는 회리바람에서 엘리사가 엘리야를 잃어버리게 되는 이런 일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엘리야가 회리바람에 날려 없어질 것 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알았지만 안 것이 그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던 가 엘리야를 따라가지 못하게 하는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또 그들이 엘리사에게 엘리야의 영감이 온 것을 보고 그 앞에 무릎 을 꿇고 주라고 시인했습니다. 알았는데 안 것이 뭐했던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승천시켰는데 하나님의 종말 일에 믿지 아니하고 의심해서 용사 50인을 보내서 찾도록, 찾아 가지고 보라. 승천이 아니고 추락 낙 상돼 가지고 지금 이렇게 죽어 있다는 그런 것을 은연중 원해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되기를 원하는 것보다 안 되는 면을 원해서 언제나 반발하는 그 반대편에 서서 있은 선지자들입니다. 오늘도 이렇습니다. 영감만을 구하는 최종까지 길갈을 초월, 벧엘을 초월, 여리고를 초월, 아직도 멀었습니다. 요단 의 죽음을 초월해 사선을 넘었을 때에, 생명을 내놓고 죽는 것을 개의 치 않고 육의 생명보다도 신령한 영원한 생명을 존귀하게 여겼을 때에, 모든 피조물보다도 창조주 조물주 주의 모든 능력이 크다고 인정될 때 에, 이 세상을 깔볼 때에, 피조물을 깔볼 때에, 세상과 조물주와 비교될 때에, 그 비중을 조물주에게 높이고, 땅위에 있는 소망과 하늘의 소망을 비교할 때에 땅위의 소망보다 하늘의 소망을 더 높이고, 모든 것 다 끝 나고라도 하나님의 영감받아 가지고 엘리야 모양으로 일하려는, 엘리야 모양으로 신앙 생활 하려는 거기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이 모든 것을 다 초월해서 성령님이 아니면 인간은 할 수 없다는 이 사실을 믿어, 이 성신의 감화로 자신과 모든 부패성과 악령의 모든 역 사가 다 변화되어 탈출되고 자유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깨닫는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보다, 저것보다, 무엇보다, 길갈보다, 벧엘보다, 여리고보다, 요단 강의 생사보다 더 원했을 때에 네가 원하는 게 뭐이냐 물었고, 원 하는 것을 말할 때도 땅위에 있는 모든 것 원치 않고 영감을 원할 때에 비로소 영감이 그이에게 약속됐고, 약속된 그 영감이 언제 이루어졌느 냐 엘리야의 최종 회리바람이 부는데, 최종까지를 바라보고 끝까지 바라 보는 거기에서 영감은 그에게 임했습니다.
오늘도 참 평신도뿐 아니라 목회 생활을, 길갈 목회 생활에서 만족하는 자들 많습니다. 벧엘 목회 생활에서 만족하는 자들 많습니다. 여리고 목회 생활에서 만족하는 자들 많습니다. 이적이나 기사나 행하고, 교인수나 모아서 밥이나 먹고, 그냥 현상 유지만 되면 만족하는 여기에서, 정말로 사선을 넘지 못하고, 자기의 생 명을 완전히, 보다, 생명보다 구원을 크게 여겨서 생명을 투자하지 못하 고 그 안에서, 안 믿는 사람들이 세상 것을 탐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들 이 세상에 있는 그것을 탐해서 그것을 욕망하고, 만족하고, 이렇게 가는 신자들이 많은 것을 여기에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영감의 신앙 생활 엘리사가 엘리야의 영감을 받은 다음에 그가 한 행사는 여리고 성에 그 모든 지질과 수질이 나쁜 그것을 고쳐서, 하나님이 고쳐 줬다 하고 고쳐서 그 모든 것이 다 변질되어 오늘까지 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기도한다고 하나님이 들어 줬겠습니까 소금을 뿌린다고 됐겠소 아니오. 하나님과 엘리사가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보인 것이오. 영감받고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과 엘리사가 함께 행동할 때에, 먼저 땅위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해결지워서 영광 을 돌리게 하고, 땅위에 있는 인간들에게 평강이 이르도록 하고, 그다음 에는 조롱하고 배격하는 자들을 저주했습니다. 저주했으니까 이거는 엘 리사의 실수라 봅니까 하나님이 하시지 않았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셔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42인이 곰에게 찢겨서 죽은 것은 뭘 보였느냐 땅위에 있는 건설 과 파괴, 구원과 멸망, 땅에서 네가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리고, 하늘에서 도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린다. 왜 영감이 매면 매여지지, 영감이 풀면 풀려지지. 풀고 매고, 구원하고 실패하는 그 모든 것을 하나님과 같이 움직이는 자 되는 것이 영감에서 되는 것이지 이적과 기사나 그런 것 행하는 데에서 되는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신앙 생활을 하는 데에 요런 형식을 가지고 가르쳤 으니까 우리가 잘 알게 됩니다. 요 형식을 가지고 가르쳤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잘 깨달을 수가 있다 그말입니다. 오늘도 길갈 신앙 생활에 머물고 있는 자, 벧엘 신앙 생활에 머물고 있는 자, 여리고 신앙 생활에 머물고 있는 자, 아직까지 생명을 주님의 제단 위에 내어 놓지 않고, 생명을 제 것으로, 생명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자는 암만 날뛰어 봤자, 마귀는 제까짓 거야 마지막에 쓸면 다 쓸 려올 것 다 쓸려오는 것입니다.
사선을 넘지 않고는 참된 구원은 이루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죽자껏 해도 마귀의 밥만 만들고 마귀의 소득만 만들지 소용 없습니다. 요단을 건너가고난 다음에 네 소원이 뭐이냐 거기에는, 사선을 넘어서 다 주님과 주님의 도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 제물로 바치고 나니 까 거기에는 세상이고 뭐이고, 하나님께서 뭐이든지 네게 주마. 뭐 할래 할 때에 땅위에 있는 모든 것보다도 영감을 달라고 하는 거기에서 성신의 감동이 자기를 주 관하는 그 은혜가 그에게 오는 것이지, 이렇게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고 얻기가 힘드는 것이지, 그저 제 마음대로 욕심대로 날뛸 대 로 날뛰고, 살 대로 살고, 제 모든 심령과 정력은 다 쓰고 찌꺼기 남은 그거 가지고, 찌끄러기 남은 것, 돈버는 데도 쓰지 못할 찌끄러기 남은 거 이거 가지고 주일이나 슬슬 지키고, 성경이나 보고, 기도나 하고, 뭐 전도나 하면 다 되는줄 알면 안됩니다. 이것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길갈을 넘읍시다! 벧엘을 넘읍시다! 여리고를 넘읍시다! 요단을 넘읍시다! 성신의 능력을 받읍시다! 그래 가지고 엘리사는 다시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 하나님 백성들 있는 데 건너갔습니다. 갔으니까, 엘리사나 다른 사람들이나 꼭 같은 사람 으로 꼭 같이 살고 있지만 이는 길갈을 벗어났고, 벧엘을 벗어났고, 여 리고를 벗어났고, 요단강을 벗어났고, 회리바람에서 마지막 주님을 이별 하고 최종까지 바라보는 이 끝을 마치고 영감을 받아 가지고 다시 요단 강을 건너서 하나님의 백성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영감 준비의 생활 이러기 때문에 기름을 준비한 자들도 다 신랑이 더디 오매 졸며 잘 새 밤중에 신랑이라 하니까 준비한 자들은 다 혼인잔치에 들어갔고, 준 비하지 못한 자들은 다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보다, 어떤 것보다, 무엇보다, 주님과 하늘나라를 크게 여기고 자기보다 주님을 크게 여겨서 이 순위를 통과해 가지고 예수를 믿는 자 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분명히 많습니다. 이런 순서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이렇게 꼬물거려 봐야 혹시 그러다가 거기 서 뭣이 될까 해서 그런 것이지 실은 건설구원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말씀들을 믿으면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됩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어떤 것이 거짓 선지자인데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노릇 하고 주의 이름으로 하나님 말씀 많이 가르쳤고 가르치면 그것은 하나님의 도를 증거하는 것이요, 가르쳤다고 제가 성화된 것 아닙니다. 제가 된 것 아니오. 귀신을 쫓아내는 이적을 행했 다고 제가 변화된 것 아니오. 주의 일로 능력 있는 큰 일을 많이 했다 고 된 것 아닙니다. 어찌 되느냐 네가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된다 했습니다. 뜻대 로 행하는 자. 그것이 뭐이요 그것이 영감입니다. 그것이 영감이오. 거기에서부터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고, 다른 것은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는 것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 이하에 보면,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준다, 네 이름을 반석이라 해라, 반석 위에 교회 세우겠다. 반석이 뭣이며 천국 열쇠가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아는 것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니이다 이렇게 네가 안 것이 모든 선배들, 대대로 내려오는 신학자들 에게 배운 것 아니다. 인간에게 배운 것 아니다. 네 속에 아버지의 영감 으로 너에게 알려 준 그 영감을 그대로 배워 가지고, 그대로 네가 인정 하고, 그 영감대로 인정하는 그것으로써 네가 안 것이지 육신이 너에게 알린 것 아니다. 거기, 네 속에 성신의 감화가 인도해 준 영감 그대로 네가 행동하는 그 행동, 그 사람 위에 교회 세우고, 거기에 천국 열쇠 준다. 네 속 에 영감된 그 영감이 매면 매이고 풀면 풀린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까 이 제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정신을 차려서 산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사데교회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네 행위에 온전한 것을 내가 보지 못했다. 100가지 중 에 한 가지나 행하고 어떤 자는 만족하고, 100가지 가운데에 50가지나 행하고 만족하는 것 아니다. 온전한 행위 거기에서만 생명 역사는 이루 어진다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도를 에누리하고 행 동을 에누리한 이런 것을 다 이제는 버립시다.
요한일서 2장 27절 이하에 보면 너희들에게 기름부음이 너를 옳고 바르게 가르치는데 인간에게 배울 것이 없다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다. 사람에게 배운 그것은 성경 상식으로 배우고 있고, 네 속에 영감 이 영감시켜 준 그대로 하는 데에 구원이 있고, 거기에 교회 서고, 거기 에 네가 건설되고, 거기에 변화가 되고, 거기에 능력이 있지 일반 상식 적으로 성경 가르치는 거기에 구원 있는 것 아니다.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치 말라 그리하면 아버지의 사랑 이 네 속에 거하지 아니하나니 세상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서 쫓겨납니다. 있지를 못합니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3대 구속이 거기에 역사할 수 있습니까 3대 구속은 당장 쫓겨 나갑니다. 3대 구속은 그 사람에게 있는 세상을 죽이고 세상을 잡아먹고 이용하는 것인데, 세상을 기르는 것과 주의 구속의 역사는 정반대인데, 구속의 역사는 세상 을 죽이고 세상은 구속의 역사를 죽일려 하고 서로 반대인데,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어떻게 되겠느냐 아버지의 사랑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는 구원이 네 속에 거하지 아니하느니라 왜 이는 다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니, 세상 으로 좇아 온 것이니 세상 새끼다, 세상 새끼! 아버지로 좇아 온 것이 아니니라 그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정 욕 세상 것을 욕심내는 그 욕심내는 자, 안목의 정욕, 세상에 보 이는 그것을 욕심내는 그자, 그자가 사는 생활이니 그자는 멸망할 자식 이라. 그자는 옛사람이라. 그자는 주의 피공로에 원수된 자인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너는 그 사람으로도 살 수 있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로도 살 수 있다. 세상과 세상 의 것을 사랑하는 그자는 세상으로 좇아 온 자다. 아버지께로 온 자가 아니다. 그자의 모든 행위는 주의 역사를 대적하는 그 행위이기 때문에 주의 공로는 거기에 거할 수가 없다. 네가 그것 돼 가지고 대적하니까 쫓겨 나가야 될 것 아니냐 하신 것입니다. 길갈의 선지, 벧엘의 선지, 여리고의 선지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선지 고 하늘나라를 그렇게 고조했지만 그들의 행동은 전부 엘리사 행위를 반대했습니다. 미혹하고 반대했어. 하나님이 완성해 놓은 일도 다 유혹 해서 반대하고 조롱하는 입장에 섰습니다. 우리가 깊이…. 이제는 주님의 재림이 가까왔습니다. 재림이 늦어도 세상은 못 견딥니다.
세상은 모든 면이 멸망의 직전에 있을만큼 죄악이 관영해 있습니다. 모든 면에 다 죄악이 관영해 있습니다. 주의 재림이 가까왔습니다. 빨리 빨리 그들이 멸망하는 그 죄악에서 나와야 됩니다. 그 죄악이 뭐인데 주님보다 저 사랑하는 것. 주님보다 저 사랑하는 것. 예수를 믿되 요 선지자들 모양으로 자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 주님 이 나 위해서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셔서 모든 것 다 제물되어 나 위해서 나를 구출해 주셨으니까 구출받은 나는 이제 남은 때는 당신 위해 사는 것이 법이지요, 마땅한 법리지요. 이런데 아직도 예수 믿는 것도, 자기 위해서 예수 믿는 이 생활 하는 것을 그대로 붙여 두는 것은 성전 겉마당이오. 그런 가운데서 행여나 일어날까 살아날까 하는 것이지 주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자기를 중심해서 사는 생활은, 그 생활, 행동이라 하는 것은 건설구원에 속한 것인데 건설구원은 털끝만큼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절대로 이루어지 지 않습니다. 기본구원은 있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이 됐기 때문에 단정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 이 됐기 때문에 듣든지 안 듣든지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실은 자기가 자기를 기쁘게 좋게 하기 위해서 자기 중심으로 사는 그 죄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제는 내 중심으로 주님을이용하고 주의 도를 이용할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전부는 대속하신 주를 위해서 살아 야 하는 자로 인식하고 살 자로 출발하고, 주를 위해서 사는 그 걸음에 서만, 털끝만큼이라도 거기에서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다른 데는 건설구원은 절대 없습니다. 이것을 구원 있다고 하는 자는 다 거짓 선지자입니다. 아무리 신유의 은혜를 받아서 신유의 행사를 해도 안 됩니다. 많은 전도를 해도 안 됩니다. 전도했으면 전도는 됐는데 전도받은 그 사람이, 자기를 주 위해서 바쳐서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해서, 사나 죽으나 주 의 것이라, 살아도 주를 위해서 죽어도 주를 위해서, 먹어도 주를 위해 서 마셔도 주를 위해서 행한 것이라야 됩니다. 자기를 향한 데서 방향 을 전환해서 빽 돌아서서, 이제는 내가 주를, 나 위해서 이용할 게 아니 라 내가 주의 이용물로, 주의 것으로, 주를 위해 사는 여기에서만 건설 구원은 이루어집니다.
다 같이 한 자리에서 먹고 마시고 일하나 기름 준비 한 자와 안한 자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벌써 요단을 건너서 그 생도들하고 여리고에 같이 있었습니다. 같이 있었지만 그 순서를 통과해 가지고 같이 있는 자, 거기에 가 지 않고있는 자, 기름을 준비하고 조는 자, 기름 준비 안 하고 조는 자.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거는 다 옆에서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될까 싶 어서 하는 것이지. 아버지의 뜻대로 무슨 말이오 영감에 피동된 거기에서만 구원 있습니다. 다른 데는 없습니다. 헛된 위안을 받지 맙시다. 다른 데는 구원 없습니다. 이제는 마지막으로 단언을 내립니다. 이제는, 슬슬 붙들어서 이래라 저래라 했지만 그거 가지고 정말 안 됩니다. 이제 나도 마지막으로 단 언을 내려야됩니다. 주의 영감에 붙들려 인도하는 거기에만 성화도 되고, 그 행위만 영생 도 되고, 그것이 주님에게 속하게 되지 자기가 주인이 돼 가지고 자기 시비, 비판, 이해, 평가, 자기가 주관되어서 다 해 가지고, 꺾지 못할 강 한 왕이 자기가 돼 가지고 있으면서 주님을 대해서는 이렇게도 상대하 고, 저렇게 간교도 부리고, 저렇게 웃기도 하고, 저렇게 예물도 드리고 암만 해 봤자 거기에는 내나 옛사람의 행위요, 새사람의 행위는 아닙니다. 우리가 반사 노릇을 하는 것도 그러는 가운데에서 가장 영감에 접하 기 쉽고, 그런 가운데서 세상 재미 취미는 멀어지고 하나님의 나라에, 인간 구원에, 취미도 슬슬 껍데기에서부터 바꾸어 나가다가 이제자기 와 주님을 완전히 바꾸는 요 역사 하기가 쉽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 되지 않으면 암만 해 봤자 내가 선지자 노릇을 많이 했습니다 이 악한 자들아 내가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했습니다. 그것이 자기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자기 구원 되는 일에 가장 용이한 방편입니다. 가장 가까운 방편입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