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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사의 능력의 수혜자들 (왕하4:1-7)

본문

성경은 참으로 소중한 책입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절대 불변의 진리가 담긴 책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연구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성경 연구 방법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귀납적 성서 연구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경우를 종합해서 어떤 공통점을 찾아내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접근하는 방법입니다. 어떤 사람이 늘 즐겨 입는 옷들을 종합해 보면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으로 그 사람이 좋아하는 취향을 찾을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사람은 늘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도 일관성이 있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베푸신 기적의 사건 여섯 가지가 계속 연달아 등장을 합니다. 이 여섯 개의 여러 사건들을 종합해서 그 어떤 공통점을 찾게 된다면 바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 하나님은 항상 그러한 능력을 베풀어주시는가 하는 하나님의 진리, 하나님의 일관성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 기적의 사건들은 모두 선지자 엘리사를 통해서 이루어졌는데 도대체 이들 기적적인 사건들이 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를 알아보고자 합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능력이 이처럼 대단했다는 것을 말하고자 이런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엘리사의 능력은 바로 주님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처럼 다양하고도 엄청나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주고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뿐만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께서 과연 어떤 경우에 엘리사를 통해서 기적적인 은혜와 도움을 허락하시는가, 바로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경우가 어떤 경우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좋은 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에도 일관성이 있습니다. 아무나 그냥 되는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도와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뚜렷한 이유가 있을 때에 일관성 있게 하나님께서는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보다 훨씬 더 일정하게 행동을 하시고 또한 그분의 이러한 본질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일정한 기준 점을 중심으로 도와주시기도 하시고 외면하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도우심의 사건들이 반드시 어떤 하나님의 정하신 기준에 도달되었기에 하나님께서 도우신 것이라는 확실한 전제하에서 이제 그 기준 점을 찾고자 시도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먼저 첫 번째로 오늘 본문의 사건부터 살펴보십시다. 어떤 여인이 등장을 하는데 그의 남편은 선지자의 생도라고 했습니다. 요즘 말하면 주의 종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신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신학 공부 중인 전도사 또는 목사 후보생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그냥 죽어 버렸습니다. 그의 아내는 이제 두 아들을 데리고 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아마도 남편의 학업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전에 얼마간의 돈을 빌었던 것이 있었는지 이제 그 채주가 와서는 빚 독촉을 합니다. 그리고 빚을 갚지 못할 경우 그 당시의 관습법대로 아들을 노예로 잡아가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기가 막힐 운명입니다. 이러한 경우를 당해서 이제 그 여인이 엘리사에게로 와서 호소를 할 때에 엘리사는 기름병을 있는 대로 최대한 모아서 준비하라고 하였고 그 준비된 기름병마다 기름이 가득가득 채워 지는 기적적인 은혜를 주어서 그것을 팔아서 빚을 갚고 또 앞으로의 생활비까지 충당하게 되는 아름다운 은총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 당시에 어려움을 당한 가정이 이 한 가정뿐이었겠습니까 가난하던 시절, 툭하면 자식을 노예로 팔아야만 하던 시절에 이 가정만은 이러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왜 특별하게도 이 가정에 이러한 은혜를 주었을까요 무슨 기준에 의해서 이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입니까 두 번째 사건은 8절부터 나오는 수넴 여인의 가정입니다. 성경은 이 여인을 귀한 여인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자기 집 근처로 지날 때마다 간권하여서 음식을 대접하는 그러한 가정이었습니다. 9절에 “여인이 그 남편에게 이르되 항상 우리에게로 지나는 이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인 줄을 내가 아나이다. 우리가 저를 위하여 작은 방을 담 위에 짓고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진설하사이다. 저가 우리에게 이르면 거기 유하리이다.” 지나가는 엘리사에게 음식 대접 뿐 아니라 방도 만들어서 또한 책상과 촛대와 의자도 들여다 놓아서 하나님의 사람에게 최대의 대접을 하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자식이 없던 이 가정에 앞으로 아들이 있게 될 것이다 하면서 이 가정에 은혜를 베풀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죽자 엘리사는 그 아들을 다시 살려주는 기적의 은혜를 베풀게 됩니다.
두 번씩이나 이런 은혜를 받은 귀한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기가 없는 가정이 한둘이었겠습니까 그 당시 자식이 먼저 죽은 경우의 가정이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오직 이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자식이 생기고, 또 죽었다가 다시 살리심을 받는 이런 기가 막힌 은혜를 받았습니다. 무슨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도움을 주셨습니까 그 다음 세 번째의 사건은 38절부터 나옵니다. 길갈이라는 곳에 흉년이 들었을 때입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때에 선지자의 생도들을 먹이기 위하여 큰솥을 걸어 놓고 국을 끓이게 되었습니다. 그 공궤를 위하여 어떤 한 사람이 채소를 캐러 들에 나가서 어떤 열매를 따 가지고 국에 썰어 넣었습니다.
그런데 다 끓여서 먹고자 하니까 국에 독이 생겨서 먹지를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그 솥에다가 가루를 던져 해독이 된후에 배고픈 그들이 다행히 그 국을 먹게 되었습니다. 아니 흉년의 때에 배고픈 자가 그 당시에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왜 하필 그 경우에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서 그 국을 먹게 해 주셨습니까 네 번째 사건은 42절부터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 익은 식물로 만든 보리떡 20개와 채소 한 부대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가 그것을 받아서 무리들에게 주어 먹게 하는데 놀랍게도 100명이 먹고도 남은 풍성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흉년의 때에 음식이 모자라는 경우가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런데 하필 왜 이 경우에만 그렇게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음식을 불려 주셨습니까 다섯 번째로 문둥병의 고침을 받은 나아만 장군의 경우입니다.
“아람 왕의 군대 장관 나아만은 그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저로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저는 큰 용사나” 문둥병자라고 했습니다. 문둥병자인 그가 이스라엘의 대 선지자인 엘리사 앞에 찾아왔을 때에 엘리사는 내다보지도 않고 대문 앞에서 자기 종을 통해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 그 말만 전달케 했습니다. 크고 존귀한 자인 나아만으로서는 너무 뜻밖의 대접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아만은 결국 이러한 모욕과 수치에도 불구하고 선지자 엘리사의 말에 겸손히 순종을 했더니 결국은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당시 어디 문둥병자가 나아만 혼자 뿐이었겠습니까 누가복음 4장 27절에 예수님의 말씀에 보면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니라”고 했습니다. 이로 보건대 그 당시에 많은 문둥병자가 있었으되 나아만 한 사람만이 은혜를 입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다음 여섯 번째의 사건은 6장 1절에 나옵니다. 엘리사와 그 생도들을 위하여 집을 짓겠다고 나선 어떤 사람이 그만 나무를 벨 때에 빌어 온 도끼를 물에 빠뜨렸습니다.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엘리사가 나뭇가지를 베어 물에 던졌더니 쇠로 만든 도끼가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행히도 도끼를 건진 사건이 나옵니다. 무슨 일을 하다가 이처럼 낭패를 당하여 안타까운 경우가 어디 한둘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여기도끼 날이 물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이 기적적 방법으로 떠오르게 해 주셨을까요
무슨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은혜를 베푸셨을까 이상 여섯 가지 계속 이어지는 기적적인 사건들을 살펴보았는데 도대체 왜 이러한 경우에 질서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든 이 세상의 자연법칙을 깨뜨리시면서까지 기적을 베푸셔서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떤 타당한 기준 점이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타당한 공통점이 있었기에 이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 그럼 무엇이 공통점이겠습니까 무엇이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기준 점이 되었습니까 먼저 도끼로 나무를 베는 사건을 한 번 봅시다. 특별히 무엇을 지으려고 했었는가 했더니 바로 엘리사와 그의 생도들이 거할 집을 지으려고 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만일 자기 혼자 살집을 짓다가 도끼가 물에 빠졌을 경우에도 하나님이 능력으로 도와주었겠습니까 엘리사와 엘리사의 생도들을 위해서 집을 짓다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적을 베푸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의 일을 하다가 죽은 선지자의 가정도 만일 주의 일을 하다가 죽은 선지자의 생도의 가정이 아니고 주의 일은 전혀 안하고 죽어서 가족을 남기게 되었는데도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기름병 채워 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겠습니까 선지자의 생도였고 엘리사를 쫓아 하나님의 일을 했기 때문에 이런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엘리사가 아들을 주고 또한 그 아들이 죽자 다시 살려주는 그러한 은혜는 바로 엘리사를 그렇게 극진히 대접하며 모시려는 가정이었기 때문에 베풀어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흉년에 선지자 생도들에게 대접하기 위한 국이 특별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엘리사와 엘리사의 생도들에게 대접하려 했기 때문에 엘리사가 해독을 해서 그 국을 먹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처음 익은 실과로 떡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 에게 먼저 가져왔던 보리떡이었기에 100명이 먹고도 남는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 아닙니까 그 떡으로 나 혼자 배부르기 위해서 먹는데도 그 떡이 한정 없이 불어났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바치고 생도들을 위해서, 주의 일을 위해서 그것을 드렸기 때문에 그런 풍성한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이 나타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크고 존귀한 나아만이 엘리사 앞에서 겸비하게 되지 않고 끝까지 거만하게 굽히지 않았더라면 과연 나아만에게 문둥병이 치료되는 능력의 은혜가 나타났을까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공통점입니다. 6가지 엘리사의 능력이 임하는 사건의 공통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로 엘리사 선지자 생도의 아내의 가정이었다는 사실,둘째 엘리사 선지자를 대접하는 부부였다는 사실,셋째로 엘리사 선지자 생도들을 위하여 국을 끓였던 사람이었다는 사실,넷째로 엘리사 선지자에게 보리떡을 드리는 경우였다는 사실, 다섯째로 엘리사 선지자에게 나아와 겸손해진 경우였다는 사실, 여섯째로 엘리사 선지자의 생도들을 위하여 집을 짓는 경우였다는 사실. 여섯 가지 전부가 다 엘리사와 생도들을 위한 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공통점이요, 이것이 하나님의 기준이었습니다. 이것을 신약 시대인 우리의 시대에 적용되는 말씀으로 바꿉니다. 엘리사는 바로 주님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생도들은 바로 엘리사와 함께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엘리사와 그의 생도들을 위한다는 것은 바로 주님과 주님의 일을 위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일하고 협력하고 봉사하고 정성을 다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고 하나님의 전폭적인 기적적 도우심이 같이하신다는 사실 이것이 오늘 찾아진 그 기적들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메세지입니다. 주님의 일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사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에게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사닥다리로 건너가게 해서 저 하나님 나라 영생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것이 주님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사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잘 살아갈까 이런 저런 것을 더욱 걱정하면서 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요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정말 주를 위해서 첫 곡식으로 보리떡 20개 드렸더니 100명이 먹고도 남았습니다. 정말 주의 일을 위해서 국을 끓였더니 흉년 가운데 국을 해독까지 해 주셔서 먹게 하셨습니다. 정말 주를 위해 남편을 바쳤더니 빚도 갚아 주시고 앞으로의 생활비도 그 가정에 허락하셨습니다. 정말 주의 일을 위해서 집을 지어 드리려 하였더니 빌려 온 도끼도 걱정 없게 다시 건지게 해 주셨습니다.
정말 자식 없는 것 걱정한 게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하면 하나님 선지자 엘리사를 잘 대접하고 그가 거처할 방을 만들어 드릴까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며 협력을 하였더니 구하지 아니한 자식까지 주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해 힘쓰는 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는 말씀이 오늘 구약의 본문들을 통해서 증명된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여 알곡 되게 하여서 천국으로 구원시키는 것이 바로 주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더 우선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파란 나무가 있는데 거기서 나뭇가지 하나를 꺾었습니다. 그러면 이 나뭇가지는 죽은 것입니까, 살아 있는 것입니까 지금 당장은 생명이 붙어 있다손 치더라도 얼마 못 가서 시들해지고 말라 버립니다. 죽은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불에 태워 버립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나무에 맺혀진 열매를 땄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열매는 죽은것입니까, 살아있는 것입니까 그 열매 속에는 씨가 있습니다. 씨는 일년 이년 두어도 말라서 죽지 않습니다. 생명이 있습니다. 이집트 미라 속에서 3000년된 완두콩 하나를 발견했는데 바싹 말랐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들이 그것을 심었더니 3000년된 그 씨에서 다시 싹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알곡의 차이입니다. 가을철이 되면 논에서 추수를 합니다. 벼를 밑동까지 낫으로 자른 후에 그 다음 탈곡을 합니다. 그래서 알곡인 벼 낱알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나머지인 볏짚은 짚단으로 들에 쌓아 둡니다. 그 볏짚단 더미는 죽은 것입니까 산 것입니까 겨울철에 쌓아 둔 볏짚 단은 썩어 버립니다. 그래서 겨울철에 아궁이에 넣어서 뜨뜻하게 지펴 버립니다. 그러나 곡간에 들인 벼 낱알은 죽은 것입니까 산 것입니까 이 낱알은 산것입니다. 그 이듬해에 이것을 다시 심으니까 다시 싹이 나옵니다. 볏짚단과는 틀립니다. 똑같이 잘라졌으나, 똑같이 이 땅에서는 생명을 다하여 죽음을 맞이했으나 알곡된 것들은 계속 생명이 이어갑니다. 새로운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알곡이 없는 가라지와 볏짚들은 말라져서 결국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살다가 누구나 다 죽습니다만은 그러나 예수 믿고 알곡 되어 새 생명이 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 땅의 생명으로 끝나 예수의 생명이 없는 사람들은 모아다가 지옥 불에 던집니다.
이 성경의 논리가 틀렸습니까 이 땅에 살다 보면 쓸모 없는 물건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쓰레기에 모아서 나중에 불태워 버립니다. 그러나 똑같은 물건이라 할지라도 귀중한 물건은 오히려 소중히 박물관에 잘 소장하여 100년 아니 천년이 지나도록 보물로 간수하는 것을 봅니다. 인간도 이렇게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이 땅에서 하나님을 안 믿어 버려진 자들은 쓰레기로 모아서 불태워 버리겠으나 하나님께서 간수하시고 보호하시며 아들, 딸 삼으신 자들은 천국 곡간에 모아들여서 영원토록 별과 같이 빛나게 하신다는 것이 이상합니까 세상 원리는 다 똑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자연 현상을 보고 하나님을 알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땅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인간들을 알곡으로 만들어 영원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주님의 일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인데 우리 인간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서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면서 합력을 할 때에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셔서 그러한 자에게 기적적 도움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주간에 한 성도의 소천을 당하여서 그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먼저 보내고 장례 예배를 드렸습니다. 약 3개월 전에 우리 교회에 등록하셨는데 이제 나이 40되신 젊은 남자 분입니다. 암으로 투병 중에 우리 교회에 등록을 하시고 몇 번 교회에 출석을 하셨으나 병의 고통으로 더 이상 나오시지는 못하고 누워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거의 매일과 같이 찾아가서 예배를 드리며 치유를 위해 기도를 했습니다만 그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영혼은 그 동안 우리와 함께 기도 생활 예배 생활을 하면서 주님을 확실히 만나게 되었고 주님을 꼭 붙잡고 의지해서 예수 믿고 알곡 되어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그분이 처음 우리 교회 등록을 했을 때에 그분은 사실 천국이 확실히 존재하는지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온 교인들이 새벽마다 그분을 위해서 기도를 드렸고 거의 매일 예배를 드리고 예수님을 증거하고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그의 믿음이 점점 자라서 기도할 때마다 아멘으로 답하고 이 놀라운 주님은 생명까지도 고쳐 주시는 주님으로 확실히 믿으면서 끝까지 주님을 의지하면서 붙잡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를 의지해서 평안 가운데 하나님 나라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두 가지를 위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는 그분이 이 고난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발견하고 의지하고 붙들어서 하나님의 영생의 자녀가 되는 것과 그리고 또하나는 이제 하나님께서 더욱 은혜를 베푸셔서 삶의 기회를 주시고 앞으로 이 땅에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살게 될 것을 소원했었습니다. 첫 번째의 것은 이루어져서 그는 끝까지 아멘을 하면서 주님을 붙잡았고 평안히 영생의 나라로 그의 영혼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의 것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영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큰 슬픔 가운데서도 얼마나 우리에게 위안이 되고 감사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의 아내가 모든 장례식이 끝나고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헌금 봉투에 이렇게 적혀져 있는 것을 보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천국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최고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재산을 쌓아 놓고 갔다고 해도 죽음 앞에서 이런 감사는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엄청난 다른 일을 많이 해 놓고 갔다고 해도 죽음 앞에서 이런 감사는 못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를 믿고 죽음 후에 천국간 사실, 이것 때문에 죽음의 슬픔 앞에서도 오히려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혼 구원은 이 세상에서 최고의 일입니다. 우리는 엄숙한 죽음을 앞에 두고 두 가지밖에 바랄 것이 없습니다. 하나는 영혼 구원받는 것과 그리고 하나는 건강 주신다면 주님의 일을 더욱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최고의 소원은 두 가지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의 영혼이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 또 하나는 만약 이 땅에 살아 있다면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밖에 없습니다. 이것밖에 바랄 것이 없습니다. 평생 두 가지 소원 중 하나가 바로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만큼 아직 살아 있는 나에게 있어서 주의 일을 협력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의 계속 이어지는 기적도 사실 주의 일을 위해서 협력했기에 그렇게 기적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내게 아직 건강 있을 때에 부지런히 주의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을 소개하고 말씀을 마칩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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