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이 결여된 인생 (왕하5:20-27)
본문
저는 이시간에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게 사는 인생에 대해서 성경을 가지고 우리 같이 생각해 볼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진실의 위기 속에 놓여 있습니다.대화를 할 때에나,기사를 읽을 때에나, 거래를 할 때에 어느 정도가 진실이고 어느 정도가 거짓인가를 구별하느라고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경우를 자주 만납니다.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이 모자라면 누구나 다 생존 경쟁에서 밀려나고 맙니다. 또 통탄할 것은 어느 정도의 거짓말은 세상에서 지혜로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약간 거짓말을 해도 거짓말 한 사람을 욕하지 않고,거짓말에 속는 사람을 탓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을 너무 모른다고 오히려 비웃습니다. 또한가지는 지나치게 우리가 세상에서 정직하면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 남을수 없다는 타부를 정설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풍조의 거센 파도는 우리의 양심을 사정없이 난타하여 침몰 직전까지 가고 있는 것 같은 불안을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세상이 거짓말투성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이 본문에 등장하는 게하시라고 하는 인물은 진실이 결여된 전형적인 성경인물 중의 하납니다. 그를 우리 앞에 거울로 걸어 놓고 우리 자신을 비추어 가면서 우리 자신에게도 진실이 결여 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을 한번 검토해 보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게하시와 우리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선지자 그룹에 속한 그 당시에는 그래도 정신이 제대로 밖인 그룹의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바로 살아 보자고 하는 사람입니다. 게하시는 당시에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사회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긴장이 날마다 고조되어 가는 답답한 생활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세계적인 환경으로 보나, 국내적인 상황으로 보나 안심할 수 없는 위압감을 항상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게하시와 우리는 통합니다. 그 사람의 사건은 바로 내 사건이요,그 사람의 교훈은 나의 교훈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웃하고 있는 아람 나라에 권세를 쥐고 있는 국방장관인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유대나라는 문둥병환자를 격리 시켜서 사회와 접촉하지 못하게 합니다만은 아람 나라는 문둥병에 대해서 좀 관용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관직에서 자기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이스라엘의 엘리사가 굉장한 기적을 행한다는 말을 듣고는 찾아와서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엘리사가 그에게 말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씻으면 낳으리라 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너무나 심통이 상해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만 씻으라고 하니까 내가 어디 목욕을 안하는 사람이냐 고 자존심이 상해 있을 때에 지혜로운 종이 권유해서 드디어 요단강 물에 들어 갔습니다. 일곱번 목욕을 하고 깨끗해 졌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몸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자기가 가지고 온 거액의 선물을 엘리사 앞에 놓고 궂이 받아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한다디로 일축했습니다. 그 사람이 떠난 다음에 엘리사의 시종을 드는 일종의 비서실장입니다. 게하시가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왜 이와같이 좋은 기회를 우리 선생님은 놓칠까 이렇게 가난하고 고된 생활을 하는데,왜 그 사람을 그대로 돌려 보내느냐 그래서 그는 주인 몰래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옷 두벌과 은 두 달란트를 그는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숨겨 놓고는 네가 어디 갔다 오느냐고 엘리사가 물으니까 그는 입을 씻고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에게 뿐만 아니라,그의 자손이 계속해서 문둥병이 걸린다고 큰 저주를 받고 엘리사 앞에서 쫒겨 났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몇가지로 검토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게하시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합시다. 당시 이 게하시의 선생님이었던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바로 살아 볼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서 그를 따르며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우상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가 생겼고,신학교의 학생이 너무 넘쳐서 나중에는 교사를 신축할 정도였습니다. 엘리사야말로 망해가는 이스라엘에 마지막 남아 있는 등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위대한 지도자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 게하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게하시의 입장을 부러워 했겠습니까 엘리사 옆에서 24시간 붙어서 사는 게하시가 얼마나 부러웠겠느냐 말입니다. 분명히 엘리사는 자기의 비서실장을 선택할 때,희미한 사람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학교수가 조교를 선택할 때나,비서를 선택하는데,성적이 나쁘고 전혀 무능한 사람을 택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게하시가 뽑힌 것은 그만큼 출중한 데가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게하시는 엘리사 옆에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철저한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 보좌 앞으로 깊이 나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절대로 하나님의 뜻과 연관이 없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큰 이적기사를 많이 행했습니다. 엘리사의 생활은 검소하고 경건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습니다. 그의 인격은 대단히 고매했습니다. 그래서 게하시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엘리사에게 가장 감동을 많이 받는 사람이요,그럼으로 자기도 모르게 엘리사를 닮아 갈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엘리사의 후계자로 지목을 받을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그는 서 있었다고 그는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자녀였다면, 게하시는 마귀의 자녀였고, 엘리사가 경건한 생활을 추구했다면, 게하시는 세속적인 삶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 중심이었다면, 게하시는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양심적인 인물이었다면, 게하시는 이미 양심이 파괴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은연중에 因果法則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선은 선을 낳고,악은 악을 낳고, 좋은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녀가 태어나고, 탁월한 선생님 밑에서 자랑스러운 제자가 만들어 지고, 좋은 환경은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因果法則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의 입장에서는 이 법칙도 모순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교회당을 짓는데 목수가 돌을 깎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전을 짓는 돌을 깍고 있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모순이 게하시에게 있습니다. 성경을 인쇄하는 식자공이 성경 말씀의 한자한자를 뽑아서 책을 꾸며가고 있습니다마는 그 말씀이 그를 전혀 감동시킬수 없는 것과 같은 모순이 게하시에게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엘리사 집에서 엘리사와 같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마는, 그 밑바닥에는 생자 그래로 남아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문둥이 나아만의 종들보다도 더 저질적인 사람이 게하시였습니다. 나아만의 종들은 주인에게 충고를 하고 엘리사를 소개했지만, 게하시는 그것마저도 못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순이 역사에는 자주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도 그 측근에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칼빈에게도,우리 감리교회를 창시하고 영국을 파국에서 구원한 웨슬레에게도 그 측근에 비양심적인 사람이, 그야말로 그 선생님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사람이 같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거짓말하는 사람이 누구냐 할 때에, '거짓말은 나보다도 더 악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나보다 더 비양심적인 사람-불신자가 하는 것'이라고 판단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엘리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아니야!-그런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보다도 다른 측면에서 거짓말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게하시와 같은 사람입니다. 겉으로 경건한 생활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장이 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양심적이라고 인정을 받을수 있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장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자리에 앉아서 참말 만을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에게 거짓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와 게하시와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가 어떤 생활을 추구합니까 선한 생활이요, 일주일에 한두번씩 거룩한 설교를 귀에 못이 밖히도록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나는 교회의 목사요,권사요,집사니까 다 인정해 줄 만큼 신뢰를 받을수 있을지 모릅니다.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수 있는 진실이 결여된 한면이 남아 있을수 있다는 것이 바로 게하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강해 목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스윈들 목사의 글을 보면, 고소를 금치 못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텍사스 주에서 은행 실무자들이 가장 믿을수 없는 고객으로 점을 찍은 사람들이 목사들이라는 것입니다.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은행이 불신하는 목사라면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 신용이 없었지 않았나 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이 미국교회의 목사님들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훨씬 더 경건하고 양심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가고 생각하는 목사의 세계에도 거짓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신학교에서는 시험지 끝에다가 이런 사인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나는 절대로 부정을 하지 않았습니다.'왜 이런 사태가 일어 났을까요 그래서 어떤 학생은 시험을 보다가 슬적 컨닝을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사인을 할려고 보니까 도저히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나는 이시간에 부정을 조금했습니다.'라고 썼다고 해요. 그래서 과낙이 되고 졸업이 1년 늦어진 경우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제자훈련을 받는 사람들은 귀가 아프도록 듣는 말입니다.'크리스챤은 작은 예수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요, 예수님처럼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되고, 진실해야 되고,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받을수 있는 인격과 삶을 가져야 된다고 우리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그렇게 겉으로 안전하게 신실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숨은 거짓이 있다는 것! 이것을 우리가 경계해야 된다는 사실을 게하시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금방에 들어 가면 금을 살 때에 99%의 순도냐 아니냐를 세밀하게 검사를 합니다만,내 말 한마디에 100%의 순도가 들어 있는가를 검토하는 일은 드뭅니다. 나의 행동에 거짓이 숨어 있지 않나, 검토하는 일은 드뭅니다. 참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 거짓으로 그 마음을 채우고 있는 모순이 나에게 없는지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두번째로 게하시의 거짓에 들어 있는 특징은 그 동기가 탐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청빈한 생활을 했습니다.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게하시도 같이 살았으니까 깨끗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누가 보아도 엘리사나 게하시의 마음에 탐욕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게하시의 마음에 무서운 탐욕이 복병처럼 숨어 있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상상할수 있었겠어요. 탐욕은 활동할 수 있는 여건만 조성이 되면 대단히 민첩하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게하시가 탐욕의 발동을 일으키자, 그는 머리가 잘 돌아 갔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울수 있는 구실을 쉽게 만들었습니다.
신학생 두사람이 왔으니까 돈을 좀 주시고, 옷 두벌을 주십시요. 탐욕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자, 나아만에게 얼마를 받는 것이, 죄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아니,병고치고 내 놓는 것인데 그 것좀 받으면 어떤가'그래서 엘리사에게 말하지 않고, 가서 좀 얻었어요. 그래서 자기 욕심도 채우고 선생님에게는 여전히 신임을 받을수 있는 위장을 할수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게하시에게 탐욕이 제거 되지 않은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탐욕이 남아 있지 않은지 검토을 좀 합시다. 바울이 개척한 에베소 교회는 대단히 질이 놓은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읽으면,그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수준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에게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탐욕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4:22절 이하에 보면,'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쫒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오, 무슨 옛사람을 벗어 버릴 것이 있습니까 이미 예수 믿고 중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라고 말할 분이 있습니까 그러나 교리적으로는 내가 십자가에 함께 죽었는지 모르지만,실제적인 생활을 보면 옛사람의 욕심이 그래로 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탐욕의 사람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성령님으로 새롭게 함을 받으라' 그래서 하나님의 닮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그만큼 안 돼 있다는 이야깁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옵소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주옵소서.마음이 더럽습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에베소 교인이나, 다윗이나, 오늘 우리나 꼭같이 그와같은 기도를 안할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새사람이 된 다음에 제일 처음에 실천할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 드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을 보세요.'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거짓말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서 가장 변화될 부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미 탐욕을 십자가에 못밖지 아니했나요
그런데 왜 이 탐욕이 가끔 고개를 들고 나옵니까 탐욕이 내 속에 있는 이상 나는 언제고 거짓말 할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엔드리 훌러라는 사람이 금방을 찾아가서 금덩어리를 들고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황금덩어리를 손에 쥐고 있을 동안에는 이 황금이 나늘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황금을 내 마음에 담으면, 나는 망하고 말것입니다.' 탐욕이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게하시와 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밖았다고 했습니다. 교리로만 그것을 인정하지 말고, 저로부터 시작해서 여러분 한사람까지 다같이 실제로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탐욕이 처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시던,공무원이든,교육가이든,직장인이든 어디에 있든간에 황금을 쥐고 일을 하던지간에, 그 황금을 내 마음에 담는 탐욕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실을 말할수 있고, 정직하게 살수 있습니다. 게하시의 거짓말 속에는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요솝니다. 여러분, 엘리사가 나아만의 선물 공세를 받을 때에 왜 거절했을까요 받았다고 뭐 잘못된 것이 있나요. 26절을 한번 보세요. 엘리사가 불꽃이 튀는 눈으로 게하시를 응시하면서 그야말로 서릿발로 꾸중을 하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 바로 이것이 답입니다. 엘리사는 왜 선물을 받지 않았느냐 엘리사가 일하고 있는 당시의 이스라엘은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탐욕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들이었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율법을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들이었으며, 탐욕 때문에 국가가 지금 멸망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하나님이 엘리사를 보내실 때에는 회개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회개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탐욕을 버리고 가난한자가 되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거짓말 못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면 거짓말 쉽게 합니다. 거짓말 을 못하는 이유로 '내 양심이 아프니까'라고 들고 나옵니다.아니요,그것은 이차 문에에요. 또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축복을 주시지 않을지 몰라서'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이차삼차의 이야깁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가정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의 골방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사업하는 내 사무실에 거하십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고 계십니다. 거짓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며, 진실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내가 왜 거짓말을 못합니까 내 옆에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못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분명히 의식하고 사는 이상, 진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처럼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살면,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요, 거짓말을 쉽게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거짓말을 못하는 경우에 가끔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꼭 명심해 두십시요. 정직할려고 하면 손해를 봅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이, 청주의 50만 시만이 다 정직하면 누가 손해를 볼까요 거짓말 하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다 거짓말 투성이일 때 누가 손해를 봅니까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은 '손해 보지 않고 정직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에 말한 신학생도 정직하게 부정했다고 썼기 때문에 손해을 봤어요. 학교를 1년을 더 다녀야 했지요. 어느 병원장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세무서에서 년말이 되어 세금납부 통지서가 왔습니다. 수입이 2억 얼마이고,경비를 제하고 순수입에서 계산한 세금이 11,000,000만원이었습니다. 이 통지서를 받고 이 부부가 자신의 병원의 수입을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무서에서 누락시킨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외상으로 처리 된것 등등 5천여 만원이 누락되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부부가 밤새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음날 세무서를 찾아가 신고를 했습니다. 세무서 직원이 입을 딱 벌렸어요. 그러나 별수 없이 추가로 450만원의 세금을 물렸습니다. 정직하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온 천지가 거짓말 투성이인데. 그러나 우리가 손해를 보면서도 왜 진실할려고 합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 때문에, 나는 그 분의 아들이라고 하는 체면 때문에 우리는 어쩔수가 없습니다. 내가 정직할려다가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 부하게 살 것을 믿고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직할려다가 출세를 못하면,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를 누리며 살 것을 믿고, 그 손해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입니다. 세번째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거짓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게하시에게 옮겼습니다.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거짓말 한마디에 이렇게 가혹한 심판을 하나님이 하실까 신약성경에 보면, 거짓말 해가지고 큰 심판을 받은 부부가 있습니다. 아나니아나 삽비랍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게하시가 한 거짓말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죄를 포함하고 있는 굉장히 무거운 거짓말이었습니다. 그가 나아만에게 가서 거짓말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락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심으로 이스라엘 만이 참 하나님을 모시고 계신다는 것을 전 세계에 선포하기를 원했고, 이 세상에서 참 신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는데, 게하시 때문에 그 영광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게하시에게 옷 두벌과 은 두달란트를 주고 나아만이 떠나면서 나아만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흥, 문둥병을 고칠수는 있을지 모르지만,엮시 이스라엘의 여호와도 돈에는 약하구만, 신학생 한두명을 못 먹여서 사람을 보내서 돈을 다시 가지고 갈까' '역시 돈이 최고야!'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 뜨렸습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죕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아만을 하나님이 고쳐 주실 때에는 값 받지 않고 거저로 고쳐 주었습니다. 그럼으로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만들었습니다마는 하나님 대신에 게하시는 값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거져 주신 것을 게하시가 중간에서 값을 받아서 가로채었습니다. 이것은 죽을 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게하시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짓말을 참으로 가볍게 여길지 모릅니다.저에게도 그런 습관이 나도 모르게 나옵니다. '가벼운 거짓말이야,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것이지. '하고 가끔씩 나올 때가 있습니다. 어쩔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 이것 생갑합시다. 얼마나 것짓말을 하나님이 미워하시느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이라고 하면 성경의 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구원하신자는 영원한 나라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은 자는 영원한 형벌로 나누어 지고, 드디어 영원한 파라다이스가 전개되는 순간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왜 많은 죄인 가운데서 거짓말쟁이에 대해서 두번 세번 언급을 하셨을까요 계21:8에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왜 거짓말 하는 자들을 갑자기 들고 나오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가볍게 보시지 않으신다는 이야깁니다. 또 27절에도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로 들어 오지 못하리라.' 왜 성경 마지막 부분에 가서 특별히 거짓말을 강조하느냐 하나님은 거짓말을 가볍게 보시지 않는다는 이야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들 보다는 정직할지 모릅니다. 또 당연히 정직해야 합니다. 어떤 글을 보니까 설문 조사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한다'하는데, 거기에 그렇다고 대답한 퍼셑테지가 0.7%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도 일단은 믿어 주자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그렇지만, 한편으로 마음으로부터 아픔을 가지고 이 설교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교회의 지도자들의 생활과 목회자들의 세계에 거짓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입에도 거짓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맙시다. 그들은 거짓말장이요, 거짓말해도 괜챦은 사람들이에요. 우리를 생각하자구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보고 소금이라고 했어요. 소금은 많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 교회의 작은 성도들이라도 진실의 소금이 될수만 있으면 이 사회를 구제할 수 있다구요. 성령님께서 이 시간 오셔서, 황목사를 위시해서 우리 모두의 말 속에 담겨 있는 거짓이라는 약간의 티라도 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행동 어딘지 모르게 거짓이 담겨 있는 것이 있으면, 이 시간 주님의 피로 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사고와 내 의식 속에 진실이 결여된 어떤 부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오!성령님이시여 우리를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만 정직하고 우리만 진실할수 있다면 청주와 대한민국을 구제할 수 있는 소금이 될수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어도 왜 오늘날 이 문제를 놓고 교회가 탄식하지 않는지 저는 알수가 없습니다. 93년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 하나님 앞에 진실합시다. 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 한것을 회개하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약하고 사람들 앞에서 장담했던것, 속였던 모든 것들을 회개하면서 자신을 돌아 봅시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선지자 그룹에 속한 그 당시에는 그래도 정신이 제대로 밖인 그룹의 사람이라고 말할수 있습니다. 우리 역시 바로 살아 보자고 하는 사람입니다. 게하시는 당시에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사회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긴장이 날마다 고조되어 가는 답답한 생활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세계적인 환경으로 보나, 국내적인 상황으로 보나 안심할 수 없는 위압감을 항상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게하시와 우리는 통합니다. 그 사람의 사건은 바로 내 사건이요,그 사람의 교훈은 나의 교훈이 될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웃하고 있는 아람 나라에 권세를 쥐고 있는 국방장관인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유대나라는 문둥병환자를 격리 시켜서 사회와 접촉하지 못하게 합니다만은 아람 나라는 문둥병에 대해서 좀 관용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관직에서 자기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이스라엘의 엘리사가 굉장한 기적을 행한다는 말을 듣고는 찾아와서 고쳐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엘리사가 그에게 말하기를 요단강에 가서 일곱번 몸을 씻으면 낳으리라 고 말했습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너무나 심통이 상해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나와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몸만 씻으라고 하니까 내가 어디 목욕을 안하는 사람이냐 고 자존심이 상해 있을 때에 지혜로운 종이 권유해서 드디어 요단강 물에 들어 갔습니다. 일곱번 목욕을 하고 깨끗해 졌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몸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감격해서 자기가 가지고 온 거액의 선물을 엘리사 앞에 놓고 궂이 받아 달라고 합니다. 엘리사는 한다디로 일축했습니다. 그 사람이 떠난 다음에 엘리사의 시종을 드는 일종의 비서실장입니다. 게하시가 마음이 몹시 상했습니다. 왜 이와같이 좋은 기회를 우리 선생님은 놓칠까 이렇게 가난하고 고된 생활을 하는데,왜 그 사람을 그대로 돌려 보내느냐 그래서 그는 주인 몰래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옷 두벌과 은 두 달란트를 그는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에 숨겨 놓고는 네가 어디 갔다 오느냐고 엘리사가 물으니까 그는 입을 씻고 아무데도 가지 않았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드디어 그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에게 뿐만 아니라,그의 자손이 계속해서 문둥병이 걸린다고 큰 저주를 받고 엘리사 앞에서 쫒겨 났습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몇가지로 검토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는 게하시라고 하는 사람에 대해서 생각을 합시다. 당시 이 게하시의 선생님이었던 엘리사는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바로 살아 볼려고 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서 그를 따르며 배우기를 원했습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의 우상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신학교가 생겼고,신학교의 학생이 너무 넘쳐서 나중에는 교사를 신축할 정도였습니다. 엘리사야말로 망해가는 이스라엘에 마지막 남아 있는 등불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이런 위대한 지도자를 모시고 사는 사람이 게하시였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게하시의 입장을 부러워 했겠습니까 엘리사 옆에서 24시간 붙어서 사는 게하시가 얼마나 부러웠겠느냐 말입니다. 분명히 엘리사는 자기의 비서실장을 선택할 때,희미한 사람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대학교수가 조교를 선택할 때나,비서를 선택하는데,성적이 나쁘고 전혀 무능한 사람을 택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게하시가 뽑힌 것은 그만큼 출중한 데가 있었다는 이야깁니다. 게하시는 엘리사 옆에서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많은 시간,철저한 기도와 찬양과 말씀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 보좌 앞으로 깊이 나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사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절대로 하나님의 뜻과 연관이 없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하나님은 큰 이적기사를 많이 행했습니다. 엘리사의 생활은 검소하고 경건했습니다. 그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했습니다. 그의 인격은 대단히 고매했습니다. 그래서 게하시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엘리사에게 가장 감동을 많이 받는 사람이요,그럼으로 자기도 모르게 엘리사를 닮아 갈수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엘리사의 후계자로 지목을 받을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그는 서 있었다고 그는 볼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였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의 자녀였다면, 게하시는 마귀의 자녀였고, 엘리사가 경건한 생활을 추구했다면, 게하시는 세속적인 삶을 추구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나님 중심이었다면, 게하시는 자기 중심이었습니다. 엘리사가 양심적인 인물이었다면, 게하시는 이미 양심이 파괴된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은연중에 因果法則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선은 선을 낳고,악은 악을 낳고, 좋은 부모 밑에서 훌륭한 자녀가 태어나고, 탁월한 선생님 밑에서 자랑스러운 제자가 만들어 지고, 좋은 환경은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 하는 因果法則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의 입장에서는 이 법칙도 모순에 봉착하고 있습니다. 교회당을 짓는데 목수가 돌을 깎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전을 짓는 돌을 깍고 있어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은 모순이 게하시에게 있습니다. 성경을 인쇄하는 식자공이 성경 말씀의 한자한자를 뽑아서 책을 꾸며가고 있습니다마는 그 말씀이 그를 전혀 감동시킬수 없는 것과 같은 모순이 게하시에게 그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엘리사 집에서 엘리사와 같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마는, 그 밑바닥에는 생자 그래로 남아 있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문둥이 나아만의 종들보다도 더 저질적인 사람이 게하시였습니다. 나아만의 종들은 주인에게 충고를 하고 엘리사를 소개했지만, 게하시는 그것마저도 못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순이 역사에는 자주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에게도 그 측근에는 비양심적인 사람이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칼빈에게도,우리 감리교회를 창시하고 영국을 파국에서 구원한 웨슬레에게도 그 측근에 비양심적인 사람이, 그야말로 그 선생님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사람이 같이 활동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거짓말하는 사람이 누구냐 할 때에, '거짓말은 나보다도 더 악한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라고 '나보다 더 비양심적인 사람-불신자가 하는 것'이라고 판단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이, 엘리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아니야!-그런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보다도 다른 측면에서 거짓말 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게하시와 같은 사람입니다. 겉으로 경건한 생활을 표방하는 사람들이 거짓말장이 일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양심적이라고 인정을 받을수 있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장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직자의 자리에 앉아서 참말 만을 하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에게 거짓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와 게하시와 닮은 점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자녀요. 우리가 어떤 생활을 추구합니까 선한 생활이요, 일주일에 한두번씩 거룩한 설교를 귀에 못이 밖히도록 듣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나는 교회의 목사요,권사요,집사니까 다 인정해 줄 만큼 신뢰를 받을수 있을지 모릅니다.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우리에게 거짓말을 할수 있는 진실이 결여된 한면이 남아 있을수 있다는 것이 바로 게하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강해 목사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스윈들 목사의 글을 보면, 고소를 금치 못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텍사스 주에서 은행 실무자들이 가장 믿을수 없는 고객으로 점을 찍은 사람들이 목사들이라는 것입니다.왜 이런 결론이 나왔는지 모르지만 은행이 불신하는 목사라면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 신용이 없었지 않았나 봅니다. 저는 한국교회의 목사님들이 미국교회의 목사님들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훨씬 더 경건하고 양심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누가 보아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가고 생각하는 목사의 세계에도 거짓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신학교에서는 시험지 끝에다가 이런 사인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나는 절대로 부정을 하지 않았습니다.'왜 이런 사태가 일어 났을까요 그래서 어떤 학생은 시험을 보다가 슬적 컨닝을 했어요. 그리고 마지막에 사인을 할려고 보니까 도저히 양심에 가책이 되어서 '나는 이시간에 부정을 조금했습니다.'라고 썼다고 해요. 그래서 과낙이 되고 졸업이 1년 늦어진 경우도 발생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자주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제자훈련을 받는 사람들은 귀가 아프도록 듣는 말입니다.'크리스챤은 작은 예수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요, 예수님처럼 진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자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아야 되고, 진실해야 되고, 모든 사람에게 신뢰를 받을수 있는 인격과 삶을 가져야 된다고 우리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게하시는 우리에게 교훈합니다. 그렇게 겉으로 안전하게 신실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숨은 거짓이 있다는 것! 이것을 우리가 경계해야 된다는 사실을 게하시는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이 시간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금방에 들어 가면 금을 살 때에 99%의 순도냐 아니냐를 세밀하게 검사를 합니다만,내 말 한마디에 100%의 순도가 들어 있는가를 검토하는 일은 드뭅니다. 나의 행동에 거짓이 숨어 있지 않나, 검토하는 일은 드뭅니다. 참 말을 하는 것 같으면서 거짓으로 그 마음을 채우고 있는 모순이 나에게 없는지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두번째로 게하시의 거짓에 들어 있는 특징은 그 동기가 탐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엘리사는 청빈한 생활을 했습니다. 금욕생활을 했습니다. 게하시도 같이 살았으니까 깨끗한 생활을 해왔습니다. 누가 보아도 엘리사나 게하시의 마음에 탐욕이 있으리라고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게하시의 마음에 무서운 탐욕이 복병처럼 숨어 있었습니다. 누가 그것을 상상할수 있었겠어요. 탐욕은 활동할 수 있는 여건만 조성이 되면 대단히 민첩하게 우리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게하시가 탐욕의 발동을 일으키자, 그는 머리가 잘 돌아 갔습니다. 자기 욕심을 채울수 있는 구실을 쉽게 만들었습니다.
신학생 두사람이 왔으니까 돈을 좀 주시고, 옷 두벌을 주십시요. 탐욕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자, 나아만에게 얼마를 받는 것이, 죄라고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아니,병고치고 내 놓는 것인데 그 것좀 받으면 어떤가'그래서 엘리사에게 말하지 않고, 가서 좀 얻었어요. 그래서 자기 욕심도 채우고 선생님에게는 여전히 신임을 받을수 있는 위장을 할수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게하시에게 탐욕이 제거 되지 않은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탐욕이 남아 있지 않은지 검토을 좀 합시다. 바울이 개척한 에베소 교회는 대단히 질이 놓은 교회였습니다. 우리가 에베소서를 읽으면,그 교회의 교인들의 신앙수준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에게 문제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탐욕이 아직도 그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4:22절 이하에 보면,'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쫒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 “오, 무슨 옛사람을 벗어 버릴 것이 있습니까 이미 예수 믿고 중생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라고 말할 분이 있습니까 그러나 교리적으로는 내가 십자가에 함께 죽었는지 모르지만,실제적인 생활을 보면 옛사람의 욕심이 그래로 있습니다. 유혹의 욕심을 따르는 탐욕의 사람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성령님으로 새롭게 함을 받으라' 그래서 하나님의 닮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도 그만큼 안 돼 있다는 이야깁니다.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해 주옵소서.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주옵소서.마음이 더럽습니다.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 에베소 교인이나, 다윗이나, 오늘 우리나 꼭같이 그와같은 기도를 안할수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놀라운 것은 에베소 교인들이 새사람이 된 다음에 제일 처음에 실천할 것이 있었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랑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 드리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을 보세요.'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거짓말 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어서 가장 변화될 부분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경고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미 탐욕을 십자가에 못밖지 아니했나요
그런데 왜 이 탐욕이 가끔 고개를 들고 나옵니까 탐욕이 내 속에 있는 이상 나는 언제고 거짓말 할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엔드리 훌러라는 사람이 금방을 찾아가서 금덩어리를 들고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황금덩어리를 손에 쥐고 있을 동안에는 이 황금이 나늘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황금을 내 마음에 담으면, 나는 망하고 말것입니다.' 탐욕이 내 마음 속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게하시와 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 밖았다고 했습니다. 교리로만 그것을 인정하지 말고, 저로부터 시작해서 여러분 한사람까지 다같이 실제로 확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탐욕이 처리가 되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시던,공무원이든,교육가이든,직장인이든 어디에 있든간에 황금을 쥐고 일을 하던지간에, 그 황금을 내 마음에 담는 탐욕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진실을 말할수 있고, 정직하게 살수 있습니다. 게하시의 거짓말 속에는 또 하나 중요한 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요솝니다. 여러분, 엘리사가 나아만의 선물 공세를 받을 때에 왜 거절했을까요 받았다고 뭐 잘못된 것이 있나요. 26절을 한번 보세요. 엘리사가 불꽃이 튀는 눈으로 게하시를 응시하면서 그야말로 서릿발로 꾸중을 하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옷을 받으며, 감람원이나 포도원이나 양이나 소나 남종이나 여종을 받을 때냐 ' 바로 이것이 답입니다. 엘리사는 왜 선물을 받지 않았느냐 엘리사가 일하고 있는 당시의 이스라엘은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에 이르기까지 탐욕에 눈이 어두워 가지고, 우상숭배에 빠진 사람들이었고, 탐욕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율법을 헌신짝처럼 버린 사람들이었으며, 탐욕 때문에 국가가 지금 멸망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 하나님이 엘리사를 보내실 때에는 회개하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회개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진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탐욕을 버리고 가난한자가 되어 주님을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거짓말 못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면 거짓말 쉽게 합니다. 거짓말 을 못하는 이유로 '내 양심이 아프니까'라고 들고 나옵니다.아니요,그것은 이차 문에에요. 또 '거짓말을 하면 하나님이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축복을 주시지 않을지 몰라서'라고 말합니다. 이것도 이차삼차의 이야깁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 자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내 마음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가정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의 골방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내 사업하는 내 사무실에 거하십니다. 불꽃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고 계십니다. 거짓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며, 진실을 원하시는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동행하십니다. 내가 왜 거짓말을 못합니까 내 옆에 계시는 하나님 때문에 못합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분명히 의식하고 사는 이상, 진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게하시처럼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살면, 아무리 교회에 다녀도요, 거짓말을 쉽게 합니다. 하나님 때문에 거짓말을 못하는 경우에 가끔 손해를 보기도 합니다. 꼭 명심해 두십시요. 정직할려고 하면 손해를 봅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이, 청주의 50만 시만이 다 정직하면 누가 손해를 볼까요 거짓말 하는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다 거짓말 투성이일 때 누가 손해를 봅니까 정직한 사람이 손해를 봅니다.
그런데 기독교 신자들이 흔히 빠지는 함정은 '손해 보지 않고 정직할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에 말한 신학생도 정직하게 부정했다고 썼기 때문에 손해을 봤어요. 학교를 1년을 더 다녀야 했지요. 어느 병원장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세무서에서 년말이 되어 세금납부 통지서가 왔습니다. 수입이 2억 얼마이고,경비를 제하고 순수입에서 계산한 세금이 11,000,000만원이었습니다. 이 통지서를 받고 이 부부가 자신의 병원의 수입을 다시 정리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무서에서 누락시킨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외상으로 처리 된것 등등 5천여 만원이 누락되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부부가 밤새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음날 세무서를 찾아가 신고를 했습니다. 세무서 직원이 입을 딱 벌렸어요. 그러나 별수 없이 추가로 450만원의 세금을 물렸습니다. 정직하면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온 천지가 거짓말 투성이인데. 그러나 우리가 손해를 보면서도 왜 진실할려고 합니까 누구 때문입니까 하나님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 때문에, 나는 그 분의 아들이라고 하는 체면 때문에 우리는 어쩔수가 없습니다. 내가 정직할려다가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면,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가서 부하게 살 것을 믿고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직할려다가 출세를 못하면,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살지라도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과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를 누리며 살 것을 믿고, 그 손해 감수해야 합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입니다. 세번째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거짓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게하시에게 옮겼습니다. 너무나 가혹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거짓말 한마디에 이렇게 가혹한 심판을 하나님이 하실까 신약성경에 보면, 거짓말 해가지고 큰 심판을 받은 부부가 있습니다. 아나니아나 삽비랍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게하시가 한 거짓말은 하나님 앞에서 다른 죄를 포함하고 있는 굉장히 무거운 거짓말이었습니다. 그가 나아만에게 가서 거짓말을 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추락시켰습니다.
왜냐하면, 나아만의 문둥병을 고쳐 주심으로 이스라엘 만이 참 하나님을 모시고 계신다는 것을 전 세계에 선포하기를 원했고, 이 세상에서 참 신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는데, 게하시 때문에 그 영광이 땅에 떨어진 것입니다. 게하시에게 옷 두벌과 은 두달란트를 주고 나아만이 떠나면서 나아만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흥, 문둥병을 고칠수는 있을지 모르지만,엮시 이스라엘의 여호와도 돈에는 약하구만, 신학생 한두명을 못 먹여서 사람을 보내서 돈을 다시 가지고 갈까' '역시 돈이 최고야!'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 뜨렸습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죕니다. 그리고 또 하나. 나아만을 하나님이 고쳐 주실 때에는 값 받지 않고 거저로 고쳐 주었습니다. 그럼으로 일생동안 하나님 앞에 감사하게 만들었습니다마는 하나님 대신에 게하시는 값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거져 주신 것을 게하시가 중간에서 값을 받아서 가로채었습니다. 이것은 죽을 죕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게하시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렸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거짓말을 참으로 가볍게 여길지 모릅니다.저에게도 그런 습관이 나도 모르게 나옵니다. '가벼운 거짓말이야, 사람이면 누구나 하는 것이지. '하고 가끔씩 나올 때가 있습니다. 어쩔수 없는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한가지 우리 이것 생갑합시다. 얼마나 것짓말을 하나님이 미워하시느냐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21장이라고 하면 성경의 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이 구원하신자는 영원한 나라로, 하나님께로부터 버림 받은 자는 영원한 형벌로 나누어 지고, 드디어 영원한 파라다이스가 전개되는 순간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왜 많은 죄인 가운데서 거짓말쟁이에 대해서 두번 세번 언급을 하셨을까요 계21:8에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왜 거짓말 하는 자들을 갑자기 들고 나오셨을까요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가볍게 보시지 않으신다는 이야깁니다. 또 27절에도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하나님 나라로 들어 오지 못하리라.' 왜 성경 마지막 부분에 가서 특별히 거짓말을 강조하느냐 하나님은 거짓말을 가볍게 보시지 않는다는 이야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들 보다는 정직할지 모릅니다. 또 당연히 정직해야 합니다. 어떤 글을 보니까 설문 조사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잘한다'하는데, 거기에 그렇다고 대답한 퍼셑테지가 0.7%가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도 일단은 믿어 주자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그렇지만, 한편으로 마음으로부터 아픔을 가지고 이 설교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교회의 지도자들의 생활과 목회자들의 세계에 거짓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입에도 거짓말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지 맙시다. 그들은 거짓말장이요, 거짓말해도 괜챦은 사람들이에요. 우리를 생각하자구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보고 소금이라고 했어요. 소금은 많을 필요가 없어요. 우리 교회의 작은 성도들이라도 진실의 소금이 될수만 있으면 이 사회를 구제할 수 있다구요. 성령님께서 이 시간 오셔서, 황목사를 위시해서 우리 모두의 말 속에 담겨 있는 거짓이라는 약간의 티라도 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행동 어딘지 모르게 거짓이 담겨 있는 것이 있으면, 이 시간 주님의 피로 씻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사고와 내 의식 속에 진실이 결여된 어떤 부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면 오!성령님이시여 우리를 치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만 정직하고 우리만 진실할수 있다면 청주와 대한민국을 구제할 수 있는 소금이 될수 있습니다. 많은 크리스챤들이 거짓을 말하고 있어도 왜 오늘날 이 문제를 놓고 교회가 탄식하지 않는지 저는 알수가 없습니다. 93년을 마무리 하면서 우리 하나님 앞에 진실합시다. 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 한것을 회개하고 고백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약하고 사람들 앞에서 장담했던것, 속였던 모든 것들을 회개하면서 자신을 돌아 봅시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