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하나님의 응답 (삿10:10-16)

본문

이스라엘에 돌라와 야일이라는 사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있을 동안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잘 섬겼지만, 그들이 죽은 후에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블레셋과 암몬 사람의 손에 괴로움을 당하도록 이스라엘을 넘겨 주셨습니다(7-8절). (삿10:7-8)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의 손과 암몬 자손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그 해부터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니 요단 저편 길르앗 아모리 사람의 땅에 거한 이스라엘 자손이 십팔 년 동안 학대를 당하였고 그 괴로움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심해지자 드디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10절). (삿10:10)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그들은 이런 일을 여러 번 되풀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삿10:1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이전에도 여러 번 하나님을 거역했으며, 그 때마다 하나님은 아모리, 암몬, 블레셋, 시돈, 아말렉 등 여러 족속들에게 이스라엘을 붙이셨습니다. 애굽 사람-여기서 '애굽 사람'이 언급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시키신 사건(출 1-14장)을 상기시키기 위함 입니다. 아모리 사람-이들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노정 가운데 정복한 족속 중 하나이다(민 21:21-26). 그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노정(路程)을 방해하였는데 결국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이스라엘에 의해 격멸 당했었습니다. 암몬 자손-모압 왕 에글론과 동맹을 하여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사람들 입니다.(3:13). 그러나 이때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에홋을 보내사 그들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습니다.(3:15-30). 블레셋 사람-이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것은 아마 에훗의 뒤이은 사사 삼갈이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던 사건과 관런된 듯 합니다.(3:31). 시돈 사람-이들은 사사 시대까지의 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적도, 이스라엘에 의해 공격당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기서 이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리적으로 아셀과 납달리 북쪽에 거주했던 이들은 아마 하솔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압제할 때(4:1-3) 그를 도왔던 것 같습니다. 장차 이스라엘을 압제할 열국 가운데 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던 까닭도 아마 이 때문인 듯합니다.(3:3). 아말렉 사람-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그들을 대적했던 족속으로(출17:8-13) 사사 시대에도 미디안 족속과 함께 이스라엘을 압제한 적이 잇었습니다.(6:3). 마온 사람-70인역(LXX)에는 '마디암', 즉 '미디안'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수 15:55에서 '마온'은 유다 지파의 기업에 속해 있는 것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삼상 23:24에서도 그와 같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하 26:7에서는 이곳이 사해 남쪽과 페트라 동쪽 지역으로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본절의 '마온' 역시 유다 지경에 속한 '마온'이 아니라 요단 동편 사해 남쪽에 있는 '마온' 곧 미디안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 합니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마온'과 '미디안'을 동일시 합니다. 물론 혹자는 이 '마온'을 미디안이 아니라 아말렉 족속과 같은 유목민 중 한 부족으로 추정 하기도 하지만(Cassel) 그 근거는 회박합니다. 이스라엘이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혹은 압제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이키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심한 괴로움 속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버린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또다시 하나님을 떠나 버렸고, 그 일들의 반복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믿음과 돌이킴이 신실하지 않고 정함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습니다. 다시 11절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고 계십니다. 10:13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치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의 배역(背逆)과 불신앙과 불순종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무서운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 말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매우 컸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벡성들이 그들의 행위를 회개하자 다시금 사사 입다를 보내어 그들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 입니다.(11장). 따라서 본절의 말씀은 우상 숭배에 젖을 대로 젖은 당신의 백성들에 대한 강한 경고(히 6:4-6)로 이해될 수 있는데, 궁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극진하신 간섭을 잘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이 경고는 신약성경에도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6:4-6) 한番 비췸을 얻고 하늘의 恩賜를 맛보고 聖靈에 參與한 바 되고, 하나님의 善한 말씀과 來世의 能力을 맛보고, 墮落한 者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悔改케 할 수 없나니 이는 自己가 하나님의 아들을다시 十字架에 못박아 顯著히 辱을 보임이라 10:14 “그들로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본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어리석은 우상 숭배를 지적하는 내용 입니다. 즉 본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던 우상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환란 가운데서 구원할 수 없는 헛된 것들임을 강조합니다. 모세도 우상들은 헛되며, 인생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것들이라고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신32:37,38).
첫째, 하나님은 끊임 없이 응답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 참으로 놀라운 메시지가 숨어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11-14절은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대답의 내용이 부정적이고 또 꾸중하는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사실 하나를 쉽사리 놓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찌되었든 간에 하나님께서 대답을 해 주시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상종을 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지 알겠습니까 아예 버리실 거라면 대답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응답을 안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혼을 내며 돌아가라고 하시고, 너희가 잘못했다고 말씀 하시지만, 그러나 일단 대답을 하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시거나 더 이상 돌보지 않으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아예 응답을 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혼을 내는 한이 있어도 응답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발견하게 되는 특별한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 없이 응답하고 계시는구나. 그렇게 많이 반역하고 그렇게 많이 하나님의 가슴을 아프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버리시는 법이 없구나.” 하는 것 입니다. 이 때 이스리엘 자손은 하나님에게 기도를 합니다. 10:15 “주의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이러한 고백은
(1)이스라엘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악을 깊이 깨닫고 있음과
(2)자기들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싶을 깊이 인지하였음을 보여 줍니다. 즉 이제 그들이 이처럼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려 한 자세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그래도 그들이 진정한 회개의 마음을 갖게 되었음을 나타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건져 내옵소서” 지금 막 하나님의 어떠한 처벌이든지 달게 받겠다고 고백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는 적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 것은 조금 모순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인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압제를 당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당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입니다.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원수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하시어 자신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진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영광받게 해달라는 간구를 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어떠한 행동을 보여 줍니까 10:16 “자기 가운데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지금까지의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음을 알 수 있습니다.
(1)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의 죄를 고백했습니다.(10절). 그것도 죄를 고백하되 아주 구체적으로 고백했습니다.
(2)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마음의 준비를 했다(15절).
(3)그리고 죄의 고백과 더불어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이 고백한 그 죄로부터 떠났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거친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우리의 염려들, 그러나 하나님은 버리시지 않습니다. 10:16 “여호와께서.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이는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원수의 압제를 당하는 그들의 곤고한 삶을 보시고서 그들을 구원하시려 마음 먹으신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근심하다'에 해당하는 원어 '카차르'는 '견디지 못하다'란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그들의 곤고한 삶을 보시고 더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른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우리는 끊임 없이 “하나님이 나를 버리시면 어떻게 하나”, “나중에 나를 모른다고 하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을 합니다. 그러나 기억 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시지 않습니다. 또 우리는 흔히 이런 생각도 합니다. “나의 이런 모습으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경건한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쏟으시며, 죄를 짓고 연약해서 실수를 잘하는 사람에게는 무관심한 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자들조차도 너무나 쉽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평가해 봐도 “나는 도저히 경건한 생활을 하는 축에 들지 못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위축당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그 자녀된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셋째,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은 쓸모 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분은 죄인을 위하여 오신 분입니다. 의원이 필요한 자는 건강한 자가 아니요 병든 자라고 선언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은 탕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실패 했습니까 감당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를 주신 것은 알지만, 그 은혜받은 대로 합당한 생활을 하지 못 하고 살았기에 괴로워 하고 있습니까 이런데도 하나님이 나를 받아 주실 것인가 염려스럽습니까 오늘도 긍휼하심을 얻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십시오. 그 문은 늘 열려 있습니다. 물론 꾸중하기도 하며 엄한 책망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사랑의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다스리시기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한 번도 버리시는 적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알고 계시며, 우리가 실수하는 것을 똑똑히 보고 계십니다. 우리를 가장 적절히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주 예수 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품에 안식하기를 배웁시다. 쉬기를 연습합시다. 삶을 살아가면서 고달플 때마다 하나님 품에 안기십시오. 하나님 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돌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181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