값진 눈물 (삿11:34-40)
본문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전쟁터에서 죽어간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슬픈 애통의 눈물이 이 땅을 적신다. 어린 나이에 시 집와서 기둥처럼 믿었던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의 슬픈 통곡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확실치 않은 기억을 더듬으며, 전사한 아버지를 애도하는 전쟁고아의 눈마다 눈물이 맺힌다. 입다의 무남독녀 외딸은 자신이 처녀로 죽는 것이 슬퍼서 2개월간이나 애통했다고 했다. 그녀는 왜 울어야 했을까 왜 2 개월 씩이나 울어야 했을까 "여자의 눈물을 믿지 말라. 마음대로 우는 것은 여자의 천 성이니까!"-소크라테스. "여자는 명령만 내리면 어떠한 방법 으로든 넘쳐 흐를 수 있는 풍부한 눈물을 언제나 준비하고 있다."-유베날리스. "눈물은 슬픔의 말 없는 언어이다."-볼 테르. "사람은 다만 칠정(엇 ) 중에서 슬플 때에만 우는 줄로 알고, 칠정 모두가 울 수 있음을 모르는 모양이요. 기쁨이 사무 치면 울게 되고, 노여움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즐거움이 사무 치면 울게 되고, 사랑이 사무치면 울게 되고, 욕심이 사무치면 울게 되는 것이오. 불평과 억울함을 풀어 버림에는 소리보다 더 빠름이 없고, 울음이란 천지간에 있어서 우뢰와도 같은 것이오. 지정(솰 )이 우러나오는 곳에는 이것이 저절로 이치에 맞을진 대 울음이 웃음과 무엇이 다르리요. 인생의 보통 감정은 오히려 이러한 극치를 겪지 못하고, 교묘히 칠정을 늘어놓되 슬픔에다 울음을 배치했으니, 이로 인하여 상고를 당했을 때 억지로 '애 고' '어이' 따위의 소리를 부르짖었으나, 참된 칠정에서 우러나 온 지극하고도 참된 소리란 참고 눌러서 저 천지 사이에 서리고 엉기어 감히 나타내지 못한다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나오는 말이다. 참된 눈물은 참고 눌 러서 감히 나타내지 못한다고 정의했다.
1. 부모를 염려하는 효도의 눈물이었다(34, 36절). 34절 말씀에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고 하였다. 자식이라 고는 오직 하나 뿐인 딸을 믿고 살아 오신 부모를 염려하는 지 극한 효성의 눈물이었다. 더러는 /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 도 / 금가지 않은 /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 로 / 드리라 하올제, /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 을 보시고 /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 신다.-김현승 "눈물"-여기 소개하는 시인 김현승의 시가 어느 정도 희생자의 심 정을 표현할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따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몸부림칠 때가 있다.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때가 있다. 애 2:19에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라고 했다. 슬픈 내 마음을 위로받는 길은 오직 하나, 밀실에서 주께 기도하는 일 뿐이다. 애굽에 팔려와 갖은 고난 끝에 총리가 된 요셉이 동생 베냐민을 만났을 때 그 어 오르는 애틋한 혈육의 정을 가눌길 없어 안방으로 들어가 실컷 울었다고 했다(창 43:3O). 친근한 자의 동정보다는 주의 사랑이 우리의 감정을 더욱 더 위로해 준다. 그리고 내 마음에, 슬픔의 자리에 기쁨을 더해준다. 시 94:19에는 "내 속에 생각이 많은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라고 하였다. 삼상 1:1O에는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였고, 그 고통을 "여호와께" 가지고 갔다. 자신이 아버지의 서원에 의해 번제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 을 알게 된 외동딸은 슬픈 감정을 누를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 소녀의 마음은 자신의 유 익보다는 국가의 유익이 우선이며, 개인의 사정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이 도리일 것이라는 결단으로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 했으니, 이 아름다운 지극한 효성이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 까 그러나 그녀의 마음인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녀도 인간인 것이다. 더군다나 무남독녀 외동딸로 크면서 얼마나 부모 의 사랑을 많이 받았을 것인가 우리 같으면 버르장머리 없다는 핀잔 듣기 십상의 가정환경이요, 아들가진 부모가 혼담나눌 때 같으면야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가정환경이 입다의 딸이 처한 위치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비통에 잠긴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소크라테스가 여자의 눈물을 믿지 말라고 했다 할 지라도 만일 이 환경에서 눈물을 보인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자 살이라도 했을지 모를 일인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간청을 했다.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37절). 십자가에서 운명을 앞 두신 주님의 칠언(엇 ) 중 세번째 말씀은 "아들아! 네 어머니다"(요 19:25-27) 하시는 말씀이었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하셨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 하시면서도 어머니를 염려하셨다. 무남독녀 고명딸인 자신만을 바라고 일생을 살아오신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 이 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찢어지는 비 련의 아픔이 그녀의 가슴에 가득했을 것이고 메어지는 아픔은 그녀의 눈물조차도 절제시켰을 것이다. 진정으로 부모를 염려하는 지극한 효성의 눈물을 보게 된다.
2.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37절). 37절 말씀에 "나의 처녀로 죽음을 애곡하겠나이다"라고 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번제물이 될 것을 결심하고 자 신의 죽음을 스스로 애통하겠다고 했다. 민 11:4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 찬 울음이 소개되 어 있다. 자신의 욕심에만 급급한 거듭나지 못한 육신의 추악한 울부짖음이었다. 사 14:16-17에는 삼손 아내의 거짓에 가득찬 간사한 울음이 소개되고 있다. 이별이 서러워라 맞잡고 우는 눈물/ 다음날 만날 때엔 차 라리 비가 되어 / 알뜰한 님의 옷에다 뿌려 뿌려 보오리. 중국 연단이라는 사람의 이별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 말 이 죽음을 앞둔 "소녀"의 마음을 잘 나타내 준다. 주님은 눅 6:21에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 임이요"라고 하셨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 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고향 생각에 눈물 지었다고 시 137:1은 말하고 있다. 삼하 18:33은 압살롬을 잃은 다윗왕의 슬 픈 눈물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했던 예수의 죽음 앞에서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 은 자신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과연 누구를 위한 눈물이었던가 "울면서 구 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니"라고 요 2O:11은 소개한다. 이미 예수는 살아계신 것이다. 결국 마리아의 눈물은 예수를 위한 눈 물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억제 못한 한탄어린 동정의 눈물에 지나지 않았다.
동생에게 축복권을 빼앗긴 에서는 "방성대곡하며" 울었노 라고 창 27:34은 말씀하신다. 동생이 미웠기에 미운 감정의 눈 물이었다. 주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 찾아 다녔던 바울의 인생은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었다. 비록 그들이 만날 때는 별로 반갑지 않았고 시큰둥 했지만 그들이 헤어질 때는 서로의 헤어짐이 아쉬워 이별의 아 픈 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행 2O:36-38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일종의 사형선고를 받았던 히스기야는 기도로 심히 통곡하였다고 왕하 2O:3에서 말해준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앞 으로 있을 대환란을 생각하시면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 신" 것이다(눅 19:41). 결코 주님 자신을 위한 눈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베다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신 주님은 "눈물을 흘리 셨다"(요 11:35).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던 나사로의 죽음을 슬 퍼하셨기 때문이었다. 입다의 딸의 마음은 얼마나 착찹했을까 막상 비탄에 젖어 상심해 있는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려고 죽겠노라고 장담이야 했 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보나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어 찌 마음이 슬프지 않겠는가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자식의 병상을 지키는 그 어머니 의 슬픈 가슴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하는 그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만 하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이심을 분명히 아시는 주님이셨지만 막상 내일 있을 그 엄청난 사건의 임박함 앞에서는 주님 자신도 비탄의 슬픈 감정을 감출 수 없으셨다. "할수만 있다면."하는 주님의 애는 기도를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마태는 주님의 심정을 마 26:37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도 이러하셨거늘 하물며 나약하고 나이 어린 입다의 딸의 감정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그 눈물은 값진 눈물이다. 진주 보다도 귀한 눈물 이었다.
왜냐하면 억압 당하고 굴욕의 생활에 찌들린 나의 조국 과 동포를 살리는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라는 작품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떤 절망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흘린 눈물에 의하여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려는 것이다"라고 눈물을 정의했다. 지난날 이 땅의 위급한 상황을 구하려는 애국충정에 불타는 수십만의 청춘들이 그들의 젊음을 초개와 같이 불살랐다. 그 리고 이 나라를 풍전등화의 운명에서 건졌다. 진정코 저들의 희 생이 아니었던들 오늘의 우리가 어찌 있을 것이며 지난해의 서 울 올림픽이라는 겨레의 영광은 더욱 우리가 상상조차 못할 일 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살신성인의 눈물은 이 나라의 생명을 건졌다. 한 소녀의 눈물은 암몬 족속의 침입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 을 살렸다. 한 소녀의 결단과 희생은 비통에 빠진 자신의 부모 를 기쁘게 해드렸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우리 모두 울자. 나사 로의 죽음 앞에서 큰 소리로 흐느끼며 우셨던 주님처럼 이 값진 죽음의 영령들을 위한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자. 나를 키워 주시 고 보살펴 주신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는 눈물을 흘리자. 나만 살겠다고 탈세하고, 투기하고, 온갖 못된짓 했던 지난날의 부끄 러움을 회개하는 눈물을 흘리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금주의 설교를 위하여-
1. 사회력을 따라가던 본문은 이제 오순절 후 두번째 주일 을 맞아 다시 교회력으로 일시 환원되어 갈 1:1-1O이다. 6월에는 현충일 자료(6월 4일)와 6.25 자료가 사회력을 쫓아간다.
2. 사이비가 득세하고 있다. 정세가 어지러운 까닭은 무엇 일까 사이비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사이비는 추방되어야 한다. 사이비 기독교인, 사이비 목사, 사이비 부모, 사이비 지도자, 사 이비 경찰, 사이비 기자, 사이비 정치인, 이 사회 구석 구석을 누 비고 있는 사이비의 행렬을 주목하자.
3. 성도는 "의인인가 죄인인가" 구원의 전제조건은 " 행위인가 믿음인가" 교회의 사명은 "사회구원인가 개인구원인 가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바울 의 심정으로 복음은 외쳐져야 한다. 다른 복음은 안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외쳐져야 한다.
1. 부모를 염려하는 효도의 눈물이었다(34, 36절). 34절 말씀에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고 하였다. 자식이라 고는 오직 하나 뿐인 딸을 믿고 살아 오신 부모를 염려하는 지 극한 효성의 눈물이었다. 더러는 /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 흠도 티 도 / 금가지 않은 /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 더욱 값진 것으 로 / 드리라 하올제, /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 을 보시고 /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 신다.-김현승 "눈물"-여기 소개하는 시인 김현승의 시가 어느 정도 희생자의 심 정을 표현할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따금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괴로움으로 몸부림칠 때가 있다.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때가 있다. 애 2:19에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 쏟듯 할지어다"라고 했다. 슬픈 내 마음을 위로받는 길은 오직 하나, 밀실에서 주께 기도하는 일 뿐이다. 애굽에 팔려와 갖은 고난 끝에 총리가 된 요셉이 동생 베냐민을 만났을 때 그 어 오르는 애틋한 혈육의 정을 가눌길 없어 안방으로 들어가 실컷 울었다고 했다(창 43:3O). 친근한 자의 동정보다는 주의 사랑이 우리의 감정을 더욱 더 위로해 준다. 그리고 내 마음에, 슬픔의 자리에 기쁨을 더해준다. 시 94:19에는 "내 속에 생각이 많은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라고 하였다. 삼상 1:1O에는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였고, 그 고통을 "여호와께" 가지고 갔다. 자신이 아버지의 서원에 의해 번제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 을 알게 된 외동딸은 슬픈 감정을 누를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이 소녀의 마음은 자신의 유 익보다는 국가의 유익이 우선이며, 개인의 사정보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함이 도리일 것이라는 결단으로 오히려 아버지를 위로 했으니, 이 아름다운 지극한 효성이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 까 그러나 그녀의 마음인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그녀도 인간인 것이다. 더군다나 무남독녀 외동딸로 크면서 얼마나 부모 의 사랑을 많이 받았을 것인가 우리 같으면 버르장머리 없다는 핀잔 듣기 십상의 가정환경이요, 아들가진 부모가 혼담나눌 때 같으면야 신중히 생각하고 결정해야 할 가정환경이 입다의 딸이 처한 위치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비통에 잠긴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리 소크라테스가 여자의 눈물을 믿지 말라고 했다 할 지라도 만일 이 환경에서 눈물을 보인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자 살이라도 했을지 모를 일인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간청을 했다.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37절). 십자가에서 운명을 앞 두신 주님의 칠언(엇 ) 중 세번째 말씀은 "아들아! 네 어머니다"(요 19:25-27) 하시는 말씀이었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하셨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운명 하시면서도 어머니를 염려하셨다. 무남독녀 고명딸인 자신만을 바라고 일생을 살아오신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 이 딸의 심정은 어떠했겠는가 찢어지는 비 련의 아픔이 그녀의 가슴에 가득했을 것이고 메어지는 아픔은 그녀의 눈물조차도 절제시켰을 것이다. 진정으로 부모를 염려하는 지극한 효성의 눈물을 보게 된다.
2.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었다(37절). 37절 말씀에 "나의 처녀로 죽음을 애곡하겠나이다"라고 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꺼이 번제물이 될 것을 결심하고 자 신의 죽음을 스스로 애통하겠다고 했다. 민 11:4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 찬 울음이 소개되 어 있다. 자신의 욕심에만 급급한 거듭나지 못한 육신의 추악한 울부짖음이었다. 사 14:16-17에는 삼손 아내의 거짓에 가득찬 간사한 울음이 소개되고 있다. 이별이 서러워라 맞잡고 우는 눈물/ 다음날 만날 때엔 차 라리 비가 되어 / 알뜰한 님의 옷에다 뿌려 뿌려 보오리. 중국 연단이라는 사람의 이별이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 말 이 죽음을 앞둔 "소녀"의 마음을 잘 나타내 준다. 주님은 눅 6:21에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 임이요"라고 하셨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들 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고향 생각에 눈물 지었다고 시 137:1은 말하고 있다. 삼하 18:33은 압살롬을 잃은 다윗왕의 슬 픈 눈물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했던 예수의 죽음 앞에서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 은 자신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은 과연 누구를 위한 눈물이었던가 "울면서 구 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 보니"라고 요 2O:11은 소개한다. 이미 예수는 살아계신 것이다. 결국 마리아의 눈물은 예수를 위한 눈 물이 아닌, 자신의 감정을 억제 못한 한탄어린 동정의 눈물에 지나지 않았다.
동생에게 축복권을 빼앗긴 에서는 "방성대곡하며" 울었노 라고 창 27:34은 말씀하신다. 동생이 미웠기에 미운 감정의 눈 물이었다. 주의 복음사역을 위하여 밤낮 가리지 않고 이곳 저곳 찾아 다녔던 바울의 인생은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었다. 비록 그들이 만날 때는 별로 반갑지 않았고 시큰둥 했지만 그들이 헤어질 때는 서로의 헤어짐이 아쉬워 이별의 아 픈 눈물을 흘려야 했다고 행 2O:36-38은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일종의 사형선고를 받았던 히스기야는 기도로 심히 통곡하였다고 왕하 2O:3에서 말해준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예수님은 앞 으로 있을 대환란을 생각하시면서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 신" 것이다(눅 19:41). 결코 주님 자신을 위한 눈물은 아니었던 것이다. 베다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신 주님은 "눈물을 흘리 셨다"(요 11:35). 친구처럼 가까이 지냈던 나사로의 죽음을 슬 퍼하셨기 때문이었다. 입다의 딸의 마음은 얼마나 착찹했을까 막상 비탄에 젖어 상심해 있는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려고 죽겠노라고 장담이야 했 지만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보나 어린아이가 아니고서야 어 찌 마음이 슬프지 않겠는가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자식의 병상을 지키는 그 어머니 의 슬픈 가슴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하는 그 어머니의 마음을 우리는 이해할만 하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이심을 분명히 아시는 주님이셨지만 막상 내일 있을 그 엄청난 사건의 임박함 앞에서는 주님 자신도 비탄의 슬픈 감정을 감출 수 없으셨다. "할수만 있다면."하는 주님의 애는 기도를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마태는 주님의 심정을 마 26:37에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도 이러하셨거늘 하물며 나약하고 나이 어린 입다의 딸의 감정이야 오죽했겠는가 그러나 그 눈물은 값진 눈물이다. 진주 보다도 귀한 눈물 이었다.
왜냐하면 억압 당하고 굴욕의 생활에 찌들린 나의 조국 과 동포를 살리는 눈물이었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라는 작품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어떤 절망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자기가 흘린 눈물에 의하여 자기가 행복하다는 것을 느끼려는 것이다"라고 눈물을 정의했다. 지난날 이 땅의 위급한 상황을 구하려는 애국충정에 불타는 수십만의 청춘들이 그들의 젊음을 초개와 같이 불살랐다. 그 리고 이 나라를 풍전등화의 운명에서 건졌다. 진정코 저들의 희 생이 아니었던들 오늘의 우리가 어찌 있을 것이며 지난해의 서 울 올림픽이라는 겨레의 영광은 더욱 우리가 상상조차 못할 일 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살신성인의 눈물은 이 나라의 생명을 건졌다. 한 소녀의 눈물은 암몬 족속의 침입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 을 살렸다. 한 소녀의 결단과 희생은 비통에 빠진 자신의 부모 를 기쁘게 해드렸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우리 모두 울자. 나사 로의 죽음 앞에서 큰 소리로 흐느끼며 우셨던 주님처럼 이 값진 죽음의 영령들을 위한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자. 나를 키워 주시 고 보살펴 주신 부모님 은혜에 보답하는 눈물을 흘리자. 나만 살겠다고 탈세하고, 투기하고, 온갖 못된짓 했던 지난날의 부끄 러움을 회개하는 눈물을 흘리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금주의 설교를 위하여-
1. 사회력을 따라가던 본문은 이제 오순절 후 두번째 주일 을 맞아 다시 교회력으로 일시 환원되어 갈 1:1-1O이다. 6월에는 현충일 자료(6월 4일)와 6.25 자료가 사회력을 쫓아간다.
2. 사이비가 득세하고 있다. 정세가 어지러운 까닭은 무엇 일까 사이비는 구분되어져야 한다. 사이비는 추방되어야 한다. 사이비 기독교인, 사이비 목사, 사이비 부모, 사이비 지도자, 사 이비 경찰, 사이비 기자, 사이비 정치인, 이 사회 구석 구석을 누 비고 있는 사이비의 행렬을 주목하자.
3. 성도는 "의인인가 죄인인가" 구원의 전제조건은 " 행위인가 믿음인가" 교회의 사명은 "사회구원인가 개인구원인 가오직 예수,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바울 의 심정으로 복음은 외쳐져야 한다. 다른 복음은 안된다.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외쳐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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