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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의 선택 (수24: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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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원래 인간은 우리는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항상 무언가를 섬기며 살도록 만들어졌다. 원시인-해, 달, 나무, 동물 등을 섬겼다. 현대인-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무엇인가를 섬기며 산다. 고대-대자연을 신으로, 중세-유일신, 근세-인간이성을 신으로, 현대-과학을 신으로 섬김 현대인의 우상적인 신은 돈, 명예, 권력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섬기는 대부분의 것들은 우리가 참으로 섬길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종으로 부려야 할 대상이다. 돈-우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돈이 주인이 되어서 돈을 섬기며 사는 사람은 참으로 비참하다. 이왕 섬기며 사는게 우리 인생이라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해 줄 대상을 섬기며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를 통해서 누구를 섬겨야 할 지를 함께 생각하자. 죽음을 눈 앞에 둔 여호수아는 이제 그 백성들에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고 말하였다. 엘리야도 갈멜 산에서 백성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사도 요한도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에게 말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계 3:15). 이는 모두 다 결단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여호수아는 마지막 설교에서 백성들에게 분명한 신앙의 선택을 교훈하였다. 그리고 그의 선택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밝혔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도 많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은 우리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한국 사람으로 어떤 사람은 백인으로 어떤 사람은 흑인으로태어나지만 그런 것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이씨로, 어떤 사람은 박씨로, 어떤 사람은 김씨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남자로, 어떤 사람은 여자로 태어나지만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우리의 자유 의지에 따라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일들도 많이 있다. 친구를 잘 선택하고, 직업과 학교와 학과를 선택하고,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해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선이냐 악이냐, 의냐 불의냐를 선택하는 것도 하나님이 정해준 것이 아니라 각자가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진리편에 서느냐, 비진리편에 서느냐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너희의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외쳤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마 6:24)고 했다. 예수님이 말씀 하시기를 우리 앞에는 두개의 문이 있는데,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마 7:13-14)고 했다. 우리는 한 주인을 선택해야 한다. 두개의 문 중에서 한 곳을 선택해야만 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는 종교 혼합주의나 하나님도 섬기지 않고 우상도 섬기지 않는 종교적 중용의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여호수아는 본문 15절에서 “네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고 했다. 내일이 아닌 오늘, 내년이 아닌 바로 지금 하나님을 선택해야 할 시간이라고 말한 것이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사탄의 최상의 술책은 사람들로 하여금 차차, 천천히, 나중에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공개적 선택을 요구했다. 만민 앞에서 “오직 나와 내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고백했다. 이렇게 선택은 공개적이어야 한다. 한 남자와 여자가 결혼할 때도 많은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거행한다. 우리도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할 때 공개적으로 자랑하며 선택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 우리의 결단이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만민 앞에 증거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앞에서 나를 부인하면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2-33)고 하셨다. 여호수아의 선택에 나타난 특징은 전혀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섬길 신을 선택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너희가 어떤 신을 선택한다고 하여도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고백하였다. 여호수아의 이 선택은 사람들이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좌우되지 않는 선택이었다. 사람들이 많이 선택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따라서 선택하고, 사람들이 많이 포기한다고 해서 사람들을 따라서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더라도 ‘오직 나와 내 집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는 신앙이다. 신앙은 사람을 따라 선택해서는 안된다. 신앙의 목적지를 바라보고 신앙의 결단으로 선택하여야 한다. 자신의 신앙에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유혹하고 외면한다 할지라도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야 한다. 여호수아의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는 신앙의 선택처럼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과 세상의 유혹 사이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함으로써 믿음의 조상이 되고 복의 근원이 됐다. 모세는 왕자의 권세와 애굽의 보화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의 길을 택함으로써 위대한 사람이 되었다(히 9:26).
한편 여호수아의 이같은 선택은 일생 동안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선택이 달라진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림길에서 롯의 관심과 아브라함의 관심이 다르므로 선택의 결과가 달랐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종으로, 그리고 모세의 후계자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여호수아의 관심은 하나님이 전부였다. 세상의 물질을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다. 여호수아의 선택은 평생토록 살아오면서 여호와를 섬기는 것만이 참된 신앙인 것을 직접 체험함으로서 나온 선택이었다. 여호수아는 이러한 자신의 선택을 모든 백성이 모여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확인을 하였다. 신앙은 때로 이렇게 공개적으로 확인하여야 한다. 우리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어떤 사람은 순간의 바른 선택으로 일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일생을 불행하게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봇이나 기계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을 닮은 인격체로 만드시고 선택과 자유를 주셨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창4:7) 아담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하나는 가인이고 다른 하나는 아벨 이었다. 아벨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희생을 드렸고 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에게 마음을 고치고 순종하면 그를 용납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가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반항하며 아벨 을 죽였다.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에 우리는 어느 길을 갈 것인가 아벨의 순종의 길인가 가인의 죄악의 길인가 예수 따라가며 복음 순종하면 우리 행할 것 환하겠네! 주를 의지하며 순종하는 자를 주가 늘 함께 하시리라.
선택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르게 된다. 마 27:17-22에 보면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고 강도 바라바를 택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그대로 졌고, 그 대가를 그대로 받았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에는 계속적인 선택의 길에 머물고 만다. 중요한 것은 지혜로운 선택을 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한 복을 받지만, 그렇지 아니한 자는 영원한 저주를 벗을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에는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된 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의 길에도 넓은 길이 있고, 좁고 험한 길이 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있고 멸망으로 통하는 문이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게는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하는 것은 벌써 지나간 문제이다. 우리는 신앙 문제에 있어서 아무런 의혹도 품을 것이 없으며 아무런 논쟁할 것도 없다. 그것은 신앙의 표준과 기준되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우리 손에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요, 탈선된 신앙이다. 성경이 있는 이상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분명하다. “너희 열조가 강 저편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신앙은 언제나 단순하여야 하며, 명백하여야 하고, 철저하여야 한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 순간이 선택의 순간이요, 결단의 순간이다.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일생과 우리의 영혼이 달라진다. 오늘 우리에게도 여호수아와 같은 확신이 있어야 한다.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다가와도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우리는 오늘 바로 나의 신앙을 점검해야 한다. 더러는 5년, 10년, 또는 그 이하, 또는 그 이상으로 교회에 다녔으나, 예수를 만나 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 그러한 사람이 곧 내가 아닌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를 바로 믿지 못하고, 그 믿음이 잘못되어, 예수 믿은 만큼 병이 깊어가지 않았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내가 정말 올바로 하나님을 섬기는지 내 믿음을 살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바른 신앙을 요청하신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말씀하신다.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 들이 섬기던 사신 우상이든지, 현대인이 섬기는 각종 세상 풍조든지 각종 세상 가치관을 좇아서 살아라. 돈을 섬기든지, 세상 쾌락을 섬기든지, 그릇된 풍조를 섬기든지 마음대로 하여라. “나와 내집은 하나님만 섬기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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