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전자전 (수24:29-33)
본문
적어도 선민 이스라엘의 경우, 여호와(하나님) 경외는 유대교의 기초요, 유대 민족이 하나 되는 단결의 동맥이요, 나라를 지키는 정신적인 마지막 보루였습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여호와 경외는 개인의 행복과 가정의 번성, 생산성 있는 미래(vision)와 세상 중에서 머리가 되는 축복 그리고 앞서가는 선진(先進)의 출력(出力)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조부(祖父)들과 자손들은 대대 무궁토록 여호와 경외를 부전자전(父傳子傳)한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 교회의 두 번째 지도자 여호수아도 그의 나그네 인생의 임종 앞에서 여호와 경외를 부전자전(父傳子傳) 하는데 그 마지막 선도자적(先導者的) 사명을 다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성경을 기록한 성령님께서는 본문에서 여호수아의 죽음과 장사를 언급하고 있음을 봅니다. 24장 29절로 30절에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일백십 세에 죽으매 무리가 그를 그의 기업의 경내 딤낫 세라에 장사하였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선배 모세도 여호와의 종의 신분으로 12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신 34:7),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도 여호와의 종의 신분으로 그 선생보다 10년 짧게 110년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수명은 저들 조부 요셉의 수명과 같게 살았음을 보게 됩니다(창 50:26). 그리고 여호수아의 신앙적 영향력은 그 시대, 그와 함께 살던 모든 자손들에게 여호와 경외의 삶을 살도록 하였음을 보게 됩니다(수 24:31). 그리고 우리는 본문에서 성령님께서는 여호수아의 고별 설교가 이루어졌던 바로 그 자리 세겜에서 뜻밖의 한 장면을 보여 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요셉의 해골(뼈)을 장사지냈다고 하는 기록입니다. 다시 32절을 읽어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고 하였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은 살아 있던 여호수아의 유언을 부전자전(父傳子傳)했던 사람들인 동시에, 이미 죽었던 저들의 조상 요셉의 유언을 부전자전(父傳子傳)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 하였다는 본문에서 또 하나의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사상을 배우게 됩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들은,
I. 종된 애굽에서의 구원을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3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 라고 한 말에 유의해야 됩니다. 이 말은 저들의 조상 요셉이 애굽에 살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총리로 세계를 먹여 살리고 이스라엘 집의 아비가 되었던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뿐아니라 저들의 조부 요셉이 그 땅 애굽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함께 상기시켜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50장 26절에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역시 저들이 조상의 빛나는 역사와 함께 종된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애굽에서 이끌어 냄을 받음), 지금 자유로운 가나안 땅 세겜 현장에서 숨쉬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Ⅱ. 요셉의 신앙적 예언인 유언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요셉의 임종 유언을 성실하게 시행한 결과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세상을 떠날 때 유언하기를 「···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고 맹세를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창 50:25). 요셉이 그곳 애굽 땅에 묻힌 먼 훗날에, 저들 자손이 요셉의 신앙 예언대로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유언을 따라 그 해골을 메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이 끝나던 그 다음 날 새벽,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던 그 감격적인 아침에, 모세는 그들의 조상 요셉의 해골을 취하여 백성과 함께 나왔습니다. 그때 모세는 그 조상의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조상 요셉이 애굽에서 죽을 때 먼 장래에 이루어질 출애굽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그 역사의 현장을 실감나게 하기 위하여, 그 요셉의 해골을 백성 앞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조상들의 신앙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웅변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임종시에 그 후손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예언하였습니다(히 11:22). 그리고 그 후손 모세와 그의 백성은 믿음으로 그 예언의 성취를 실행하는 역사의 현장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의 이동 생활 중에도 그 조상 요셉의 해골을 메고 다녔습니다. 물론 미라(mirra)로 만든 관이었습니다. 저들은 모세가 죽은 다음 여호수아의 시대를 맞아 요단강 도하, 아이성 점령 그리고 가나안 정복의 전란 중에도 어김없이 그 조상 요셉의 뼈를 메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생애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던 여기 가나안의 세겜 땅에 안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요셉의 해골이 묻힌 그 세겜 땅은 저들 조상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수 24:32). 이렇게 함으로 요셉이 묻힌 그 땅이 남의 땅이 아닌 자기 조부의 땅, 아니 그 자손의 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기업의 땅도 부전자전(父傳子傳)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저들이 어떤 혈통적 전통이나 전승을 유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요셉 자손의 명예나 그 신앙을 자랑하기 위함도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들 조부들에게 애굽에서의 구원을 약속하고 새 땅 가나안을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의 언약의 성실성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조부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고 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을 전승(傳承)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신앙을 계승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조상 요셉의 뼈를 세겜에 안장함으로 조상들의 신앙을 계승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신앙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거룩한 축복의 유산이었습니다. 실로 아름답고 행복한 유산이었습니다.
Ⅲ. 이 사건은 과거야말로 현재를 창조하는 생산적 신앙의 행동임을 보여 주는 현대적 교훈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광야 40년의 배회 기간과, 가나안 정복의 기간 그리고 거기서 자리잡는 동안 어깨에 메고 다니다가, 마침내 세겜의 땅에 안장하였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기록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 ‘요셉의 뼈’라 함은 물론 미라(mirra) 개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는 사실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들은 그 기나긴 광야의 여로에 그의 뼈를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미라(mirra)로 만들어 어깨에 메고 다녔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물론 이것이 조상을 숭배하는 미신적 종교 신앙의 관념이 아님은 이미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 약속 성취를 굳게 믿는 신앙고백의 행동화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믿었던 하나님을 우리도 믿습니다.’ ‘요셉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하는 언약 신앙의 행동적 고백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동적 신앙고백은 바로 과거야말로 현재를 창조해 내는 생산적 신앙 행동입니다. 바로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역사입니다. 지금 우리는 급변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숨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난 날의 고정된 사상적 이념의 대립 시대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른바 냉전 시대가 지나가고 데땅드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치 기준이 여러 양태로 둔갑을 해 버리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인생관, 사회관, 민족관, 국가관, 세계관, 우주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인류의 삶 전 분야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더욱이 발달된 통신 기술은 세계가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거와의 단절 문제입니다. 그래서 세대교체의 바람이 세차게 일고 있는 현실을 봅니다. 낡은 기계와 새 기계의 결별, 구세대와 신세대의 결별, 구시대와 신시대의 결별 등이 세차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조는 하나님과 인간관계, 인간과 인간 관계의 창조적 축복의 법칙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의 완전 단절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지난 과거의 역사라고 하는 뿌리와, 그 역사를 경험한 조부들의 숨결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말없는 요셉의 해골을 어깨에 메고 역사의 현장을 걸어가던 저들에게는, 그 해골을 메고 간다는 그 자체가 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저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를 창조하는 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말없는 요셉의 뼈를 메고 다니면서, 요셉에게 말씀하시던 그 약속 성취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런 동안에 저들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내는 축복을 받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전자전(父傳子傳)! 이것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위대한 축복 질서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6)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의 기원 속에서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소서!”(신 1:11)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부모라고 하는 과거없이 자식이라고 하는 새로운 현재는 없습니다. 그 출발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의 선험자(先驗者)들의 훌륭한 업적을 모른 체 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호반’은 말하기를 ‘만일 과거가 현재를 가르칠 수 없고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칠 수 없다면, 역사는 더 계속할 필요가 없고, 세상은 많은 시간만 허비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세 시대의 사람들은 요셉의 유언을 좇아 그의 뼈를 메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을 계속해서 메고 진군하였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은 그 선배들이 메고 나아갔던 요셉의 뼈를 또 어깨에 메고 가나안 정복 운동을 계속하다가, 그 일이 끝난 정착 시점에 조부의 땅 세겜에 장사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신앙의 부전자전(父傳子傳)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과거야말로 현재를 창조하는 생산적 신앙 행동임을 보여주는 현대적 교훈입니다. 아니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고···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의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현대적 교훈입니다. 이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은혜시대의 사람들은 조상의 해골을 메지 아니합니다. 그 이유는 그 조상들이 대망하고 예언하던 그 메시아 예수께서 오셨고,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여호수아가 아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하십니다.
2,000년 전에 갈보리에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던 그 예수의 십자가를,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져야 된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구원의 고백입니다. 뿐아니라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전하는 사명적 행동의 고백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세상의 구주로 전파하는 내 마음의 고백이, 입으로 시인하고 행동으로 나타내는 고백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의 예수 십자가의 과거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현재를 재창조하는 신앙고백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는 영원한 미래의 불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뼈를 세겜에 묻는 구약의 사람들에 비해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뼈를 땅에 묻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죽지 않고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십자가를 자자손손 부전자전(父傳子傳)합시다. 아버지가 짊어진 십자가를 아들이 또 짊어지는 부전자전(父傳子傳)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장수하는 계대적 축복이 아닌가!--
I. 종된 애굽에서의 구원을 생각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32절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 라고 한 말에 유의해야 됩니다. 이 말은 저들의 조상 요셉이 애굽에 살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총리로 세계를 먹여 살리고 이스라엘 집의 아비가 되었던 것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뿐아니라 저들의 조부 요셉이 그 땅 애굽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함께 상기시켜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50장 26절에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역시 저들이 조상의 빛나는 역사와 함께 종된 애굽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애굽에서 이끌어 냄을 받음), 지금 자유로운 가나안 땅 세겜 현장에서 숨쉬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Ⅱ. 요셉의 신앙적 예언인 유언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요셉의 임종 유언을 성실하게 시행한 결과였습니다. 요셉은 애굽에서 세상을 떠날 때 유언하기를 「···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고 맹세를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창 50:25). 요셉이 그곳 애굽 땅에 묻힌 먼 훗날에, 저들 자손이 요셉의 신앙 예언대로 애굽에서 해방을 받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셉의 유언을 따라 그 해골을 메고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3장 19절에 모세가 요셉의 해골을 취하였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었더라 고 하였습니다. 유월절이 끝나던 그 다음 날 새벽,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오던 그 감격적인 아침에, 모세는 그들의 조상 요셉의 해골을 취하여 백성과 함께 나왔습니다. 그때 모세는 그 조상의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조상 요셉이 애굽에서 죽을 때 먼 장래에 이루어질 출애굽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는 그 역사의 현장을 실감나게 하기 위하여, 그 요셉의 해골을 백성 앞에서 어깨에 메고 나가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조상들의 신앙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웅변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요셉은 믿음으로 임종시에 그 후손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예언하였습니다(히 11:22). 그리고 그 후손 모세와 그의 백성은 믿음으로 그 예언의 성취를 실행하는 역사의 현장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40년의 이동 생활 중에도 그 조상 요셉의 해골을 메고 다녔습니다. 물론 미라(mirra)로 만든 관이었습니다. 저들은 모세가 죽은 다음 여호수아의 시대를 맞아 요단강 도하, 아이성 점령 그리고 가나안 정복의 전란 중에도 어김없이 그 조상 요셉의 뼈를 메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생애가 대단원의 막을 내리던 여기 가나안의 세겜 땅에 안장을 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요셉의 해골이 묻힌 그 세겜 땅은 저들 조상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수 24:32). 이렇게 함으로 요셉이 묻힌 그 땅이 남의 땅이 아닌 자기 조부의 땅, 아니 그 자손의 땅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기업의 땅도 부전자전(父傳子傳)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은 저들이 어떤 혈통적 전통이나 전승을 유산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요셉 자손의 명예나 그 신앙을 자랑하기 위함도 물론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저들 조부들에게 애굽에서의 구원을 약속하고 새 땅 가나안을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의 언약의 성실성을 나타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들의 조부들에게 약속하신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고 만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을 전승(傳承)하였던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신앙을 계승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들의 조상 요셉의 뼈를 세겜에 안장함으로 조상들의 신앙을 계승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신앙을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거룩한 축복의 유산이었습니다. 실로 아름답고 행복한 유산이었습니다.
Ⅲ. 이 사건은 과거야말로 현재를 창조하는 생산적 신앙의 행동임을 보여 주는 현대적 교훈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이끌어 낸 ‘요셉의 뼈’를 광야 40년의 배회 기간과, 가나안 정복의 기간 그리고 거기서 자리잡는 동안 어깨에 메고 다니다가, 마침내 세겜의 땅에 안장하였다는 기록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기록 앞에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여기 ‘요셉의 뼈’라 함은 물론 미라(mirra) 개념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깨에 메고 다녔다는 사실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들은 그 기나긴 광야의 여로에 그의 뼈를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미라(mirra)로 만들어 어깨에 메고 다녔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물론 이것이 조상을 숭배하는 미신적 종교 신앙의 관념이 아님은 이미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하나님 약속 성취를 굳게 믿는 신앙고백의 행동화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믿었던 하나님을 우리도 믿습니다.’ ‘요셉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의 약속이 오늘 우리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믿습니다.’ 하는 언약 신앙의 행동적 고백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동적 신앙고백은 바로 과거야말로 현재를 창조해 내는 생산적 신앙 행동입니다. 바로 부전자전(父傳子傳)하는 역사입니다. 지금 우리는 급변하는 역사의 현장에서 숨쉬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지난 날의 고정된 사상적 이념의 대립 시대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이른바 냉전 시대가 지나가고 데땅드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가치 기준이 여러 양태로 둔갑을 해 버리는 시대를 맞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는 인생관, 사회관, 민족관, 국가관, 세계관, 우주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인류의 삶 전 분야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더욱이 발달된 통신 기술은 세계가 어지러움을 느낄 정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가장 심각한 문제는 과거와의 단절 문제입니다. 그래서 세대교체의 바람이 세차게 일고 있는 현실을 봅니다. 낡은 기계와 새 기계의 결별, 구세대와 신세대의 결별, 구시대와 신시대의 결별 등이 세차게 일어납니다. 이러한 시대적 사조는 하나님과 인간관계, 인간과 인간 관계의 창조적 축복의 법칙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와의 완전 단절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니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지 못하지만 지난 과거의 역사라고 하는 뿌리와, 그 역사를 경험한 조부들의 숨결이 우리와 동행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말없는 요셉의 해골을 어깨에 메고 역사의 현장을 걸어가던 저들에게는, 그 해골을 메고 간다는 그 자체가 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들을 격려하였습니다. 저들을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를 창조하는 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말없는 요셉의 뼈를 메고 다니면서, 요셉에게 말씀하시던 그 약속 성취의 하나님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런 동안에 저들은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내는 축복을 받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전자전(父傳子傳)! 이것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위대한 축복 질서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6)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의 기원 속에서 “현재보다 천 배나 많게 하소서!”(신 1:11)라고 하였습니다. 결코 부모라고 하는 과거없이 자식이라고 하는 새로운 현재는 없습니다. 그 출발 자체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생의 선험자(先驗者)들의 훌륭한 업적을 모른 체 하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호반’은 말하기를 ‘만일 과거가 현재를 가르칠 수 없고 아버지가 아들을 가르칠 수 없다면, 역사는 더 계속할 필요가 없고, 세상은 많은 시간만 허비할 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모세 시대의 사람들은 요셉의 유언을 좇아 그의 뼈를 메고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동안을 계속해서 메고 진군하였습니다. 모세가 죽은 후 여호수아 시대의 사람들은 그 선배들이 메고 나아갔던 요셉의 뼈를 또 어깨에 메고 가나안 정복 운동을 계속하다가, 그 일이 끝난 정착 시점에 조부의 땅 세겜에 장사하였습니다. 이것은 여호와 신앙의 부전자전(父傳子傳)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과거야말로 현재를 창조하는 생산적 신앙 행동임을 보여주는 현대적 교훈입니다. 아니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이 되고, 이삭의 하나님이 야곱의 하나님이 되고···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의 나의 하나님, 우리의 하나님이 된다는 현대적 교훈입니다. 이제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은혜시대의 사람들은 조상의 해골을 메지 아니합니다. 그 이유는 그 조상들이 대망하고 예언하던 그 메시아 예수께서 오셨고, 사셨고, 죽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영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이나 모세나 여호수아가 아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지라고 하십니다.
2,000년 전에 갈보리에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던 그 예수의 십자가를,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짊어져야 된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 쉽고 가벼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구원의 고백입니다. 뿐아니라 그 십자가를 사랑하고 전하는 사명적 행동의 고백입니다.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세상의 구주로 전파하는 내 마음의 고백이, 입으로 시인하고 행동으로 나타내는 고백이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입니다.
2,000년 전의 예수 십자가의 과거야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현재를 재창조하는 신앙고백의 본질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는 영원한 미래의 불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셉의 뼈를 세겜에 묻는 구약의 사람들에 비해 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의 뼈를 땅에 묻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는 죽지 않고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진다는 것은 묻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예수 십자가를 자자손손 부전자전(父傳子傳)합시다. 아버지가 짊어진 십자가를 아들이 또 짊어지는 부전자전(父傳子傳)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장수하는 계대적 축복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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