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을 감당하는 요나 (욘3:1-10)
본문
인도에 가서 일한 선교사 가운데 와일더 박사라는 유명한 선교사가 계셨습니다. 한 번은 인도에 미군 해병부대가 도착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도에서 일하 고 있는 선교사님들과 해군 장교 한 팀이 같이 식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중 에 더러는 믿지 않는 군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장교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아니, 선교사들이 여 기에까지 와서 일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선교는 미국에서나 하면 되지, 이 인 도인에게 기독교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을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와일더 선교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장교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장교님, 당신의 사령관이 오늘 밤 당신에게 당신의 배를 가지고 당신의 소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향해서 떠나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겠소" 이 장교는 대답하기를 "명령이라면 가야죠"라고 했습니다. 그 때, 와일더 선교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장교님, 내 인생의 사령관이신 예수님께서 명하시기를 가야 한다고 명하셨소. 나는 그래서 그 명령을 따라 이 자리에 와 있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 복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사람들 을 찾아가라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가야만 합니다. 주님의 이같은 엄숙한 명령 앞 에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가라고 명령하시면 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요나서1장에서는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배 밑층에서 잠을 자 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지워지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요나서 2장을 살펴보았는데, 2장에서 요나는 물고 기 뱃속에서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풍랑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던 요나, 바다에 던지워지는 지경에 이르렀음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던 요나를 하나님은 물고기라는 징계를 통하여 굴종이라도 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요나가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 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니느웨에 가서 복음 전하라는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니느웨로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 속에서 도망가던 요나가 변하여 '사명을 감당 하는 요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로 임하였다 라고 하는 것은 참 으로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도망가던 요나를 그래도 하나님은 포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택하시고 세운 자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이끌어 세우시 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잠을 자던 요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 은 그를 다시 불러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 뱃속에서 죽어야 할 요나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가 없 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삼세판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마는 만약에, 하나님께서는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끝내시는 분이시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어 느 누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루에도 조석지 간으로 수 십 번씩 마음이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한 번만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장 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못난 나에게 기회를 주시되 다시 한 번 더 주시는 하나님, 그분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얼마나 자주 두 번째 은총의 기회를 주셨습니까 이 은총 때문에,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응답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주신 사명에 감사함으로 능히 감 당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2절의 말씀을 여러분께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요나에게 첫 번째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말씀과 두 번째 말씀이 똑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처럼 이랬 다, 저랬다 수시로 그 말이 바뀌는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은 요나에게 처음에 하신 말씀 그대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외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 그대로 전하 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마음에 내키는 대로 선포하려고 하지를 말고, 또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로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대로 외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나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 자 신의 뜻이나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면서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축복의 말씀보다 책망의 말씀을 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위로의 말씀보다 징계의 말씀을 전하기가 더 힘이 듭니다. 듣기 좋은 칭찬의 말보다는 듣기 싫은 책망의 말을 하 기가 더 신경이 쓰입니다. 솔직히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좋고 남이 싫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 께서 이 시대, 오늘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내 뜻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 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명자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믿 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결례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분을 의식하고 이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 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3절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 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오히려 바 른 말씀, 바른 진리를 듣지 않으려는 때가 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찔림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육 신의 정욕에 따라 찔림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 을 받았는데 이들은 그 말씀 앞에 아멘으로 받아 회개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에게 찔림이 되었던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축복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 7장 54절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도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육신의 정욕이 가로 막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말씀 앞에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 에 앞장 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복된 말씀이 아 니라 저주의 말씀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그 말씀에 찔림을 받고 저 말씀이 바로 나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라고 생각이 되시면 아멘으로 받으시 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들에게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셨을 때 요나는 어떻게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3절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요나는 어떻게 하였다고 했습니까 여호와 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을 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 이 임하였을 때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거역하고 도망쳤다가 죽을 뻔했던 요나, 그에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하였을 때 그는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면 영원히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시겠지만 그러나 영원히 기회를 주시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 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 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시겠지만, 그러나 계속해서 거역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어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우신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 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하룻길을 행하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 당하였을 때 니느웨 성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5절과, 6절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 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하나님 앞에 죄악이 상달되었던 니느웨, 그래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 지리라는 요나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성을 보십시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 사람들이 요나의 선 포를 듣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백성으로부터 왕에게 이르 기까지 아래로부터의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회개하는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도 무지 믿기지 않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지금 요나 앞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생명운동이 일어난다는 이 놀랍고도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아골 골짜기와 같은 곳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하십니까 에스겔 37장의 말씀에서처럼, 골자기의 마른 뼈들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살이 붙고 생기가 있어 살아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가서 외치라고 하셨을 때 완악한 이방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라고 의구심을 가졌을는지도 모르겠지 만,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였는가를 보 십시오.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 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 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니느웨 사람들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여러분, 회개는 입술만의 자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개는 뉘우침이나 죄책감과도 다릅니다. 회개는 죄악된 곳으로부터 돌아서는 완전한 방향 전환이 있 어야만 합니다. 회개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죄를 버리고 일 어나야 합니다. 회개는 과거의 죄악된 생활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 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자리 를 바꾸는 것이요, 옷을 갈아 입는 것입니다. 가령, 탕자에게 있어서 회개는 그가 돼지우리를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보십시오. 니느웨 사람들이 죄의 길에서 죄를 버리고 떠나는 역사가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사죄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10절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 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 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 아 멸망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심 판하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깨달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 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7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행하던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손하고 또 기도하여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번영하도록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십 일 후에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니느웨 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던 것도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켰기 때문이었습니다. 힘이 있 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기 때문이었 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이 죄악의 길에서 죄를 버리고 떠나는 구체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게 악하던 니느웨 성에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여러분께서는 니느웨 성의 회개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나, 요나 한 사람의 위대한 회개가 죄악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니느웨 성을 구원하였습니다. 요나 한 사람의 회개가 니느웨 성 전체를 변화시키는 도화 선이 되었습니다. 요나 한 사람의 선지자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남으로 인하여 니 느웨 성도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요놈의 나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요놈의 내가 변하기만 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으십니까 확실하게 믿으십니까 보십시오. 처음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도망을 가다가 물고기 뱃속 에 들어가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앞에 굴종 하고 이제 두 번째 주신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은 요나를 통하여 니 느웨 온 도성을 깨끗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란, 그 속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 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명 앞에서 "아니오!"라고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예!", "아멘!"이라고 대답해야만 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께서 맡기신 그 사명에 감당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영신교회에서는 주신 사명을 감 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 사람에게 대한 위대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 각 사람을 통하여 성취하시고자 원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들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으로 부르셨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신 사명에 "아멘!"으로 순종해야만 합니다.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 야만 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순종하고 감당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를 들어 쓰십니다. 내게 주신 사명에 감당하기만 하면, 나를 통해서 내 가정을 변화시켜 주시고 새롭게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세워 주신 그 직분과 사명에 감당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내 교회를 변화시켜 주시고 부흥하게 하여 주십니다. 요나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였을 때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어린아이 12만명과 무수한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잃 어버린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명령하신다면, 여러분은 이 명령 앞에서 어떻게 대답 하시렵니까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령 앞에 여러분 이 쉽게 아멘으로 응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분의 변명은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를 보내 주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통해서 성취하시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과 변화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요나로 말미암아 니느웨가 살아났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놈의 나 한 사람이 사명을 감당하게 될 때 내 가정이 변화를 받게 됩니다. 내 교회가 새롭게 됩니다. 내 나라가 바로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명 앞에 도망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힘들지만 그래도 그 사명을 감당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눈을 감고 지나온 날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 속에서 얼마나 자주 두 번째 은총의 기회를 주셨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기회를 거부했던가요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명령하신다면, 여러분은 이 명령 앞에서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를 보내 주소서!"라고 응답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 하시렵니까 오늘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통해서 성취하시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과 변화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오, 하나님! 지금까지 내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던 요 나, 이제 당신 앞에서 내게 주신 이 사명을 잘 감당하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주여, 이 사 명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옵소서.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종이 되기 를 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주여" 크게 외친 후에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런데, 어떤 장교 한 사람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다가 "아니, 선교사들이 여 기에까지 와서 일할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선교는 미국에서나 하면 되지, 이 인 도인에게 기독교가 필요하겠는가"라고 말을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와일더 선교사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 장교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장교님, 당신의 사령관이 오늘 밤 당신에게 당신의 배를 가지고 당신의 소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향해서 떠나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겠소" 이 장교는 대답하기를 "명령이라면 가야죠"라고 했습니다. 그 때, 와일더 선교사님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장교님, 내 인생의 사령관이신 예수님께서 명하시기를 가야 한다고 명하셨소. 나는 그래서 그 명령을 따라 이 자리에 와 있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 복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사람들 을 찾아가라고 명령하시면 우리는 가야만 합니다. 주님의 이같은 엄숙한 명령 앞 에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가라고 명령하시면 가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요나서1장에서는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다시스로 도망을 갑니다. 그리고 배 밑층에서 잠을 자 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지워지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요나서 2장을 살펴보았는데, 2장에서 요나는 물고 기 뱃속에서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됩니다. 풍랑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던 요나, 바다에 던지워지는 지경에 이르렀음에 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던 요나를 하나님은 물고기라는 징계를 통하여 굴종이라도 하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요나가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 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니느웨에 가서 복음 전하라는 사명을 받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니느웨로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본문의 말씀 속에서 도망가던 요나가 변하여 '사명을 감당 하는 요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 본문 1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두 번째 요나에게 임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두 번째로 임하였다 라고 하는 것은 참 으로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도망가던 요나를 그래도 하나님은 포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택하시고 세운 자를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이끌어 세우시 기 때문에 비록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잠을 자던 요나였지만, 그러나 하나님 은 그를 다시 불러 사명을 감당하도록 역사하시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고기 뱃속에서 죽어야 할 요나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크나큰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위로의 말씀이 아닐 수가 없 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삼세판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마는 만약에, 하나님께서는 한 번으로 모든 것을 끝내시는 분이시라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설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어 느 누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루에도 조석지 간으로 수 십 번씩 마음이 변하고 또 변하는 것이 우리들 인생이 아닙니까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한 번만 말씀하시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끝장 내시는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못난 나에게 기회를 주시되 다시 한 번 더 주시는 하나님, 그분께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얼마나 자주 두 번째 은총의 기회를 주셨습니까 이 은총 때문에, 이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다시 응답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주신 사명에 감사함으로 능히 감 당하며 오늘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본문 2절의 말씀을 여러분께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요나에게 첫 번째 주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은 요나에게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 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첫 번째 말씀과 두 번째 말씀이 똑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19절에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처럼 이랬 다, 저랬다 수시로 그 말이 바뀌는 분이 아니시라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은 요나에게 처음에 하신 말씀 그대로 니느웨 사람들에게 외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 그대로 전하 라고 하십니다. 자신의 마음에 내키는 대로 선포하려고 하지를 말고, 또 백성들이 듣기 좋은 말로 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대로 외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나 선지자의 사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지, 자 신의 뜻이나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면서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 개인적으로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 축복의 말씀보다 책망의 말씀을 전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위로의 말씀보다 징계의 말씀을 전하기가 더 힘이 듭니다. 듣기 좋은 칭찬의 말보다는 듣기 싫은 책망의 말을 하 기가 더 신경이 쓰입니다. 솔직히 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가 좋고 남이 싫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 께서 이 시대, 오늘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내 뜻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 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명자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믿 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는 말은 결례가 되는 말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기분을 의식하고 이 말씀을 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영 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3절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 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때가 되면, 많은 사람들이 잘못된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오히려 바 른 말씀, 바른 진리를 듣지 않으려는 때가 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찔림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육 신의 정욕에 따라 찔림을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37절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림 을 받았는데 이들은 그 말씀 앞에 아멘으로 받아 회개하였기 때문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들에게 찔림이 되었던 그 말씀은 그들에게는 축복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도행전 7장 54절에 보면,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많은 사람들도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들은 육신의 정욕이 가로 막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말씀 앞에 이를 갈았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 에 앞장 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복된 말씀이 아 니라 저주의 말씀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다가 그 말씀에 찔림을 받고 저 말씀이 바로 나를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다 라고 생각이 되시면 아멘으로 받으시 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의 자세입니다. 그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 우리들에게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두 번째로 말씀하셨을 때 요나는 어떻게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본문 3절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요나는 어떻게 하였다고 했습니까 여호와 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을 쳤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 이 임하였을 때는 그렇게 하지를 않았습니다. 요나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니느웨로 갔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거역하고 도망쳤다가 죽을 뻔했던 요나, 그에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임하였을 때 그는 말씀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또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게 되면 영원히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시겠지만 그러나 영원히 기회를 주시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 5절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 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 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회를 주시고 또 주시겠지만, 그러나 계속해서 거역하고 불순종하게 되면 결국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내어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세우신 촛대를 옮길 수밖에 없 을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이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니느웨 성에 들어가서 하룻길을 행하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 당하였을 때 니느웨 성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본문 5절과, 6절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무론 대소하고 굵은 베를 입은 지라. 그 소문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조복을 벗고 굵은 베를 입고 재에 앉으니라." 하나님 앞에 죄악이 상달되었던 니느웨, 그래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 지리라는 요나의 경고를 들은 니느웨 성을 보십시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 사람들이 요나의 선 포를 듣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백성으로부터 왕에게 이르 기까지 아래로부터의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들이 베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회개하는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도 무지 믿기지 않는,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지금 요나 앞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는 그곳이 어떤 곳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생명운동이 일어난다는 이 놀랍고도 분명한 역사적인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아골 골짜기와 같은 곳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인정하십니까 에스겔 37장의 말씀에서처럼, 골자기의 마른 뼈들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살이 붙고 생기가 있어 살아나게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에 가서 외치라고 하셨을 때 완악한 이방 사람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라고 의구심을 가졌을는지도 모르겠지 만, 그러나 니느웨 사람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회개를 하였는가를 보 십시오. "왕이 그 대신으로 더불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가로되, 사람이나 짐 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 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니느웨 사람들은 그야말로 철저하게 회개를 했습니다. 여러분, 회개는 입술만의 자복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개는 뉘우침이나 죄책감과도 다릅니다. 회개는 죄악된 곳으로부터 돌아서는 완전한 방향 전환이 있 어야만 합니다. 회개는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죄를 버리고 일 어나야 합니다. 회개는 과거의 죄악된 생활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 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말씀함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자리 를 바꾸는 것이요, 옷을 갈아 입는 것입니다. 가령, 탕자에게 있어서 회개는 그가 돼지우리를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고 말씀 하십니다. 보십시오. 니느웨 사람들이 죄의 길에서 죄를 버리고 떠나는 역사가 일어날 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사죄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10절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 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 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모든 사람이 심판을 받 아 멸망에 이르도록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 심 판하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한 사람이라도 더 깨달아 구원에 이르도록 하시 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역대하 7장 14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나의 백성이 스스로 겸손해져서, 기도하며 나를 찾고, 악한 길에서 떠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며, 그 땅을 다시 번영시켜 주겠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지금까지 행하던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손하고 또 기도하여 하나님을 찾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번영하도록 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사십 일 후에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니느웨 성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았던 것도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켰기 때문이었습니다. 힘이 있 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기 때문이었 습니다. 니느웨 성 사람들이 죄악의 길에서 죄를 버리고 떠나는 구체적인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그렇게 악하던 니느웨 성에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던 근본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여러분께서는 니느웨 성의 회개는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요나, 요나 한 사람의 위대한 회개가 죄악으로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니느웨 성을 구원하였습니다. 요나 한 사람의 회개가 니느웨 성 전체를 변화시키는 도화 선이 되었습니다. 요나 한 사람의 선지자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남으로 인하여 니 느웨 성도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언제나 요놈의 나 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요놈의 내가 변하기만 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으십니까 확실하게 믿으십니까 보십시오. 처음에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도망을 가다가 물고기 뱃속 에 들어가는 환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 앞에 굴종 하고 이제 두 번째 주신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였을 때, 하나님은 요나를 통하여 니 느웨 온 도성을 깨끗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란, 그 속에 그리스도가 살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 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명 앞에서 "아니오!"라고 대답해서는 안 됩니다. "예!", "아멘!"이라고 대답해야만 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께서 맡기신 그 사명에 감당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 영신교회에서는 주신 사명을 감 당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각 사람에게 대한 위대한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들 각 사람을 통하여 성취하시고자 원하시는 일들이 있습니다.
그 일들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으로 부르셨고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신 사명에 "아멘!"으로 순종해야만 합니다.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사명은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 야만 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순종하고 감당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를 들어 쓰십니다. 내게 주신 사명에 감당하기만 하면, 나를 통해서 내 가정을 변화시켜 주시고 새롭게하여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세워 주신 그 직분과 사명에 감당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 내 교회를 변화시켜 주시고 부흥하게 하여 주십니다. 요나 한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였을 때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어린아이 12만명과 무수한 사람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잃 어버린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명령하신다면, 여러분은 이 명령 앞에서 어떻게 대답 하시렵니까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명령 앞에 여러분 이 쉽게 아멘으로 응답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여러분의 변명은 무엇입니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를 보내 주소서!"라고 응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통해서 성취하시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과 변화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요나로 말미암아 니느웨가 살아났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놈의 나 한 사람이 사명을 감당하게 될 때 내 가정이 변화를 받게 됩니다. 내 교회가 새롭게 됩니다. 내 나라가 바로 서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사명 앞에 도망을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힘들지만 그래도 그 사명을 감당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눈을 감고 지나온 날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삶 속에서 얼마나 자주 두 번째 은총의 기회를 주셨던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자주 그 기회를 거부했던가요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지고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가라고 명령하신다면, 여러분은 이 명령 앞에서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내를 보내 주소서!"라고 응답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 하시렵니까 오늘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나 한 사람을 통해서 성취하시고자 하는 놀라운 계획과 변화를 준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오, 하나님! 지금까지 내게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던 요 나, 이제 당신 앞에서 내게 주신 이 사명을 잘 감당하겠노라고 다짐을 합니다. 주여, 이 사 명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옵소서.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종이 되기 를 원합니다" 우리 다같이 '주여" 크게 외친 후에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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