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보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욘4:1-11)
본문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요나가 하나님 앞에서 거역했음에도 그가 영원히 멸망을 당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요나를 폭풍 속에 집어 던지고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가게 하시고 마침내 그를 회개시키시어 욕지에 토해 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주셨습니다. 요나의 회개를 통하여 니느웨 백성들이 구원에 이르게 되었으니 요나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놓고 누구보다도 감사해야 되었고 누구보다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와 권능을 생각하며 찬송을 부르고 마음에 기쁨을 가져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불만이 가득히 쌓여 있었습니다.
1.요나의 불만 요소
1).니느웨에 떠어진 하나님의 자비 “여호와요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4:2) 요나의 불만은 하나님의 자비가 니느웨에 떨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안 내리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4:2)날보고 가서 재앙을 내린다고 소리를 치라고 했으니 결국 나만 병신된 것이 아닙니까. 어째서 나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요나의 불만은 하나님의 입장과 자기의 입장을 분별못한 소지입니다. 이 사건을 자기의 입장에서 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에 대해서 자기 정당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스로 간 것이 옮지 않습니까 억을 합니다.” 오히려 항거를 하고 있습니다. 결과의 부당성과 타당성을 판단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순종하면 되었겠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다가 이렇게 망했다고 억울하다고 넉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니 요지경 밖에 된 것이 없다고 볼멘소리로 하나님 앞에 항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스스로 하나님을 모순되게 만들어 버리고 하나님의 과실을 오히려 지적하고 하나님이 자기 실수를 인정도록 설득 작전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처럼 요나도 성경을 들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시기를 더디하십니다.” 사탄의 장난은 언제나 진리를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자기 편리를 위해서 이용합니다. 사탄은 사실은 교회 안에서 가장 크게 역사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 성경안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을 하고 자기의 신학을 세우기 위해 성경을 오용하고 성경에서 자기 행동의 근거를 찾으려는 비신앙적인 태도가 많습니다. 성경을 합리화하여 해석합니다. 가령 불의한 혼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구약에 아브라함의 첩이 몇이었으며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고 성경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의 문화와 유대인의 문화와 구별해야 할 사실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문화가 성경문화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다고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문화에는 첩을 얻을 수 있었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문화, 기독교 문화는 그렇지 않은데도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편에 편리하게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 집의 불신자가 나보다 더 잘 산다고 불평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들게 되어 불만스럽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불순종의 대한 자기 정당화는 불신앙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와 항변하는 것은 사탄의 짓입니다. 결과의 부당성과 타당성을 판단치 말고 낭패와 곤고중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좋은 날이 더해질 것입니다. 날마다 감사, 날마다 찬양, 날마다 기쁨의 띠를 띠시는 삶이 될 것입니다.
2).화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요나는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증거했지만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어투에서 나타납니다.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순종한 후에 기쁨이 없고 오히려 죽기를 우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면 “죽여 주시오” 합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마지 못해 하는 순종, 분노예 차서 하는 순종은 불순종보다 악한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을 가리켜 맹종이라고 하고 할 수 없이 따라가는 것을 굴종이라고 합니다. 요나가 아직도 불만에 가득차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화합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요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주장을 내세운 사람입니다. 자기 개조를 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때리시니까 할 수 없이 고기 배속에서 눈물을 콸콸 흘리면서 회개기도까지 드렸으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날 잡아 주시오, 날 죽여 주시오, 억울합니다”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표준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심에 기쁨이 없고 자기 뜻을 못 이룬 것을 못내 슬퍼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베푸신 자비를 또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것입니다. 특히 은혜받은 것을 쉬 잊어 버립니다.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 것처럼 자기가 과거에 죄인인 것도 기억을 안하려고 합니다. 과거의 죄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은혜를 한 없이 고마워할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형편이 없는 인생이었고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까지 대접을 해 주셨다고 하는 이 사실을 만분의 일이라도 기억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가 조금은 달라질 것입니다. 요나는 그가 생각한 것만큼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명색이 하나님의 선지자요 명색이 하나님의 종인데 하나님을 모르다니 넌센스입니다. 명색 가지고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때리시면서 즐거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고 탕자처럼 돌아오면 문 앞에 서 있다가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는 아버지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부합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뜻만 내세웠습니다. 아직도 감사한 마음이나 감격이 없어 맹종이나 굴종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날마다 자라가 마음이 유쾌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신앙 생활에 열매가 없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의 뜻에 화합하지 못해서입니다. 어디서나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내 뜻을 앞세우는 자는 아닙니까 무엇보다 화합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화합치 못한 요나처럼 어디나 화합치 못한 자는 마음에 기쁨이 없고 고집 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2.요나의 포기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4:5상) 요나는 성에서 나갔습니다. 그 성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성이 망하는 것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밖으로 나가면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요나는 성에 가서 더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외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3일길인 니느웨에 라루길만 복음을 외쳤습니다. 온 니느웨성에 복음을 전해야 함에도 삼분의 일에게만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개인의 휴식처를 짓고 편히 앉아 있었습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더 나쁜 것은 구경꾼 노롯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행과 죄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개인의 휴식처로 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신 안정을 위해 마음의 평강을 위해 교회를 방패막으로 삼으면 안됨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 나의 교회가 아닙니다.
3.하나님의 자비
1).세가지 질문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해서 자기가 보낸 자기의 종이 자기를 너무나 모르고 자기의 뜻을 모르니 너무나 답답하여셔서 질문을 퍼 부으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십니다.
1.너의 성냄이 합당하냐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4하) 내가 내 백성을 구원하고 있는데 네가 성낼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진멸하지 안했다고 화를 내고 있는데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아의 성냄의 부당성을 지적하십니다.
2.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합당하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9상) 요나가 니느웨 성이 망한다고 소리지르고 다니다가 니느웨 성이 망하는 꼴을 좀 볼려고 산위에 올라가서 동네를 쳐다 보고 있는데 햇볕이 쨍쨍 나니까 하나님이 박넘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늘을 즐길 때 벌레가 와서 박넝쿨을 싹싹 쓸어 버렸습니다. 박넝쿨이 시들어 삽시간에 말라버리니까 요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하나님 왜 박넝쿨까지 없애 버립니까”하고 불만을 토해 놓습니다. 하나님은 묻습니다. “네가 박넝쿨 하나 없어 진 것도 그렇게 화를 내는데 내 백성 없어지는 것 내 마음이 어떻겠니”
3.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11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박넝쿨을 아끼는 것 이상으로 내가 내 백성을 아끼는데 박넝쿨 까닭에 화를 내는 네 마음을 안다면 내 백성 까닭에 아픈 나의 마음은 왜 모르냐”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니느웨 백성처럼 하나님 앞에서 열번 스무번 떠났던 우리를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쓸모없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다시 부르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감격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이고 그 사랑에 감사해서 헌신하는 것이고 그 사랑 때문에 몸도 마음도 재산도 생명도 청춘도 다 바치는 것이지 억지로 십일조 바치고 억지로 주일 성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2).하나님의 기쁨 같은 사건을 놓고 하나님의 입장과 요나의 입장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니느웨가 하나님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요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선민 의식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의 사명도 큰 물고기의 구원도 두번째 사명을 받았을 때도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요나가 처음으로 기뻐한 것은 박넝쿨을 인해 기뻐했을 뿐 입니다. 자기의 이익이 있을 때에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보고 호를 냈지만 이제는 박넝쿨이 없어지는 조그만 일로 화를 냅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마음이 자꾸 좁아집니다. 요나의 잘못이 무었입니까. 하나님의 편에서 일하지 않고 자기의 명예와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면서 일했습니다. 자기의 체면 상한 것이 그렇게도 소중하였던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일을 하고 있는 정치가들도 알마든지 있습니다. 명분론 때문에 개인도 시회도 교회도 국가민족도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들도 명분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데모대에 끼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롬3:4절에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됩니다. “요나가 참 불쌍하다. 요나가 왜 그럴까” 아닙니다. 요나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에 요나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네가 그랬고 내가 그랬고 우리가 그랬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를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는 요나를 끝까지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니느웨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명예를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까 체면 때문에 일하고 있습니까 일하지는 아니하고 다른 사람 일하는 것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경만하면서 ‘잘되나 보자’ 하는 악한 마음은 없습니까. 요나서의 전체 주제인 하나님의 주권자 자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묵상합시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와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사시;ㄹ도 잊지 맙시다. 속죄일에 회당에서는 유대인의 의식이 일부로 항상 요나서가 읽혀졌으며 사람들은 그때마다 “우리는 요나와 같으니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나가 바로 나 자신인 것도 기억합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아멘-
1.요나의 불만 요소
1).니느웨에 떠어진 하나님의 자비 “여호와요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4:2) 요나의 불만은 하나님의 자비가 니느웨에 떨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안 내리시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4:2)날보고 가서 재앙을 내린다고 소리를 치라고 했으니 결국 나만 병신된 것이 아닙니까. 어째서 나를 이렇게 만드십니까” 요나의 불만은 하나님의 입장과 자기의 입장을 분별못한 소지입니다. 이 사건을 자기의 입장에서 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아야 했습니다.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불순종에 대해서 자기 정당하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다시스로 간 것이 옮지 않습니까 억을 합니다.” 오히려 항거를 하고 있습니다. 결과의 부당성과 타당성을 판단치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 순종하면 되었겠는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다가 이렇게 망했다고 억울하다고 넉두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니 요지경 밖에 된 것이 없다고 볼멘소리로 하나님 앞에 항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는 스스로 하나님을 모순되게 만들어 버리고 하나님의 과실을 오히려 지적하고 하나님이 자기 실수를 인정도록 설득 작전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할 때처럼 요나도 성경을 들고 나옵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시기를 더디하십니다.” 사탄의 장난은 언제나 진리를 역이용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자기 편리를 위해서 이용합니다. 사탄은 사실은 교회 안에서 가장 크게 역사합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 가운데 성경안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을 하고 자기의 신학을 세우기 위해 성경을 오용하고 성경에서 자기 행동의 근거를 찾으려는 비신앙적인 태도가 많습니다. 성경을 합리화하여 해석합니다. 가령 불의한 혼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보시오 구약에 아브라함의 첩이 몇이었으며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고 성경을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성경의 문화와 유대인의 문화와 구별해야 할 사실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유대인의 문화가 성경문화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했다고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의 문화에는 첩을 얻을 수 있었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문화, 기독교 문화는 그렇지 않은데도 사람들이 성경을 자기편에 편리하게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 집의 불신자가 나보다 더 잘 산다고 불평한 적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들게 되어 불만스럽습니까 하나님의 입장에서 그 사건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불순종의 대한 자기 정당화는 불신앙입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와 항변하는 것은 사탄의 짓입니다. 결과의 부당성과 타당성을 판단치 말고 낭패와 곤고중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좋은 날이 더해질 것입니다. 날마다 감사, 날마다 찬양, 날마다 기쁨의 띠를 띠시는 삶이 될 것입니다.
2).화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4:3) 요나는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증거했지만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어투에서 나타납니다.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순종한 후에 기쁨이 없고 오히려 죽기를 우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억울하고 원통하면 “죽여 주시오” 합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마지 못해 하는 순종, 분노예 차서 하는 순종은 불순종보다 악한 것입니다. 알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을 가리켜 맹종이라고 하고 할 수 없이 따라가는 것을 굴종이라고 합니다. 요나가 아직도 불만에 가득차 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화합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입니다. 요나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주장을 내세운 사람입니다. 자기 개조를 하려는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때리시니까 할 수 없이 고기 배속에서 눈물을 콸콸 흘리면서 회개기도까지 드렸으나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여전히 “날 잡아 주시오, 날 죽여 주시오, 억울합니다”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순종하면서 속으로는 자기 표준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심에 기쁨이 없고 자기 뜻을 못 이룬 것을 못내 슬퍼하는 인생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베푸신 자비를 또 잃어버렸습니다. 인간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짧은 것입니다. 특히 은혜받은 것을 쉬 잊어 버립니다.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 것처럼 자기가 과거에 죄인인 것도 기억을 안하려고 합니다. 과거의 죄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지금의 은혜를 한 없이 고마워할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얼마나 형편이 없는 인생이었고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까지 대접을 해 주셨다고 하는 이 사실을 만분의 일이라도 기억을 한다면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가 조금은 달라질 것입니다. 요나는 그가 생각한 것만큼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명색이 하나님의 선지자요 명색이 하나님의 종인데 하나님을 모르다니 넌센스입니다. 명색 가지고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때리시면서 즐거워 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고 탕자처럼 돌아오면 문 앞에 서 있다가 달려가서 아들의 목을 껴안는 아버지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부합시키지 못하고 자기의 뜻만 내세웠습니다. 아직도 감사한 마음이나 감격이 없어 맹종이나 굴종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날마다 자라가 마음이 유쾌해지도록 노력합시다. 신앙 생활에 열매가 없습니까. 아직도 하나님의 뜻에 화합하지 못해서입니다. 어디서나 다른 사람의 의견보다 내 뜻을 앞세우는 자는 아닙니까 무엇보다 화합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화합치 못한 요나처럼 어디나 화합치 못한 자는 마음에 기쁨이 없고 고집 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2.요나의 포기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4:5상) 요나는 성에서 나갔습니다. 그 성을 포기해 버린 것입니다. 성이 망하는 것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끝까지 순종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밖으로 나가면서 자기의 잘못을 고백하지도 않았습니다. 요나는 성에 가서 더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외쳐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3일길인 니느웨에 라루길만 복음을 외쳤습니다. 온 니느웨성에 복음을 전해야 함에도 삼분의 일에게만 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개인의 휴식처를 짓고 편히 앉아 있었습니다. 요나에게 있어서 더 나쁜 것은 구경꾼 노롯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불행과 죄를 구경하고 있습니다. 니느웨가 망하는 꼴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개인의 휴식처로 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정신 안정을 위해 마음의 평강을 위해 교회를 방패막으로 삼으면 안됨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이지 나의 교회가 아닙니다.
3.하나님의 자비
1).세가지 질문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해서 자기가 보낸 자기의 종이 자기를 너무나 모르고 자기의 뜻을 모르니 너무나 답답하여셔서 질문을 퍼 부으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십니다.
1.너의 성냄이 합당하냐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4하) 내가 내 백성을 구원하고 있는데 네가 성낼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진멸하지 안했다고 화를 내고 있는데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아의 성냄의 부당성을 지적하십니다.
2.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합당하야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4:9상) 요나가 니느웨 성이 망한다고 소리지르고 다니다가 니느웨 성이 망하는 꼴을 좀 볼려고 산위에 올라가서 동네를 쳐다 보고 있는데 햇볕이 쨍쨍 나니까 하나님이 박넘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늘을 즐길 때 벌레가 와서 박넝쿨을 싹싹 쓸어 버렸습니다. 박넝쿨이 시들어 삽시간에 말라버리니까 요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하나님 왜 박넝쿨까지 없애 버립니까”하고 불만을 토해 놓습니다. 하나님은 묻습니다. “네가 박넝쿨 하나 없어 진 것도 그렇게 화를 내는데 내 백성 없어지는 것 내 마음이 어떻겠니”
3.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4:11하)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마지막으로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박넝쿨을 아끼는 것 이상으로 내가 내 백성을 아끼는데 박넝쿨 까닭에 화를 내는 네 마음을 안다면 내 백성 까닭에 아픈 나의 마음은 왜 모르냐”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니느웨 백성처럼 하나님 앞에서 열번 스무번 떠났던 우리를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쓸모없는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셔서 다시 부르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감격을 가지고 봉사하는 것이고 그 사랑에 감사해서 헌신하는 것이고 그 사랑 때문에 몸도 마음도 재산도 생명도 청춘도 다 바치는 것이지 억지로 십일조 바치고 억지로 주일 성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2).하나님의 기쁨 같은 사건을 놓고 하나님의 입장과 요나의 입장이 다릅니다.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이 회개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화가 머리끝까지 올랐습니다. 니느웨가 하나님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요나는 알지 못했습니다. 선민 의식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의 사명도 큰 물고기의 구원도 두번째 사명을 받았을 때도 기뻐했다는 말이 없습니다. 요나가 처음으로 기뻐한 것은 박넝쿨을 인해 기뻐했을 뿐 입니다. 자기의 이익이 있을 때에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보고 호를 냈지만 이제는 박넝쿨이 없어지는 조그만 일로 화를 냅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되면 마음이 자꾸 좁아집니다. 요나의 잘못이 무었입니까. 하나님의 편에서 일하지 않고 자기의 명예와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면서 일했습니다. 자기의 체면 상한 것이 그렇게도 소중하였던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일을 하고 있는 정치가들도 알마든지 있습니다. 명분론 때문에 개인도 시회도 교회도 국가민족도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생들도 명분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고 데모대에 끼이는 사람이 많습니다.
롬3:4절에 사도 바울은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됩니다. “요나가 참 불쌍하다. 요나가 왜 그럴까” 아닙니다. 요나가 그런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런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에 요나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바로 네가 그랬고 내가 그랬고 우리가 그랬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나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아끼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를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비는 요나를 끝까지 버리시지 아니하시고 니느웨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명예를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까 체면 때문에 일하고 있습니까 일하지는 아니하고 다른 사람 일하는 것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경만하면서 ‘잘되나 보자’ 하는 악한 마음은 없습니까. 요나서의 전체 주제인 하나님의 주권자 자비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묵상합시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와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사시;ㄹ도 잊지 맙시다. 속죄일에 회당에서는 유대인의 의식이 일부로 항상 요나서가 읽혀졌으며 사람들은 그때마다 “우리는 요나와 같으니이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요나가 바로 나 자신인 것도 기억합니다.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신 하나님은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 중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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