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를 원하는 요나 (욘4:1-5)
본문
우리가 계속해서 요나서를 살펴보고 있습니다만, 요나서를 대할 때마다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요나가 바로 '요 나'와 어쩌면 그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지만 그 사명을 외면하고 도망가는 요나, 그로 인하 여 엄청난 풍랑을 만났지만 그 풍랑 앞에서도 잠을 자던 요나, 인생의 풍랑 앞에서 뉘우치고 회개하며 그 문제에 책임을 지는 요나, 그리고 물고기에게 삼킴을 당하는 처절한 실패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굴종을 배웠던 요나, 그리고 다시 일어나서 사 명을 감당하는 요나…. 어떻습니까 성경 속의 이 요나가 오늘의 바로 '요 나'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습 니까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3장에서의 요나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니느웨로 발길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할 때 그 성읍에 놀라운 성령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요나 한 사람이 회개하고 사명을 감당했을 때, 니느웨 성의 왕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회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자신들이 지금까지 행하던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며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않기로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나서 3장 마지막 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놀라우신 은혜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 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니느웨가 요나 한 사람이 회개하고 사명을 감당 함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나 한 사람이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므로 어느 누군가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이것은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가 훗날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내가 아무개의 전도로 구원을 받았노라고 내 이름 석자를 불러줄 것을 생각한다면 너무너무 기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요나서 3장을 읽다가 본문의 4장을 읽으면 참으로 이해하 기가 어려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3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확 뚫리는 것 같던 것이 4장을 읽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해지면서 내 마음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울하고 짜증이 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3장에서는 요나가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뛰면서 주신 사 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아름다운 사명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이렇 게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며 은혜롭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믿음의 사명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요나는 또다시 주저 앉아버린 나약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죽기를 원하는 요나",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불평하는 요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3장에서의 요나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얼 마나 열심히 일했습니까 그는 분명히 일하는 요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 고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였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사명자 요나였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요나가 많이 있다면 그 교회는 분명히 부흥할 것이라고 저는 확실 히 믿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일하는 요 나, 사명을 감당하는 요 나로서 살아가시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4장에서의 요나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주저앉아 버립니다.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던 요나가 이제는 불평하는 자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요나는 주저앉아서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자리 를 잡고 있습니다.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방관자는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남들 은 열심히 일하는데, 또 지금은 모두가 열심히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 하고 뒤에 처져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과 전체를 위해서 좋지 않 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있을수록 분위기가 흐트러지고, 단합이 되지 않습니다. 방관자, 구경꾼,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나서 4장을 대하면 첫 출발부터가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니까 본문 1절을 여러분께서 함께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렇다면, 요나로 하여금 무엇이 이토록 못마땅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요나 로 하여금 이토록 잔뜩 화가 나게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감찰하시고 용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는 그것이 정말 로 싫었습니다. 니느웨 성에 내려야 할 재앙을 내리지 않았음에 화가 났더라는 겁니다. 보십시오. 요나 한 사람의 전도로 말미암아 니느웨 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는 이 놀 라운 사건 앞에서 요나는 분명히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요나로서는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선지자 요 나, 사명자 요나로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십배, 몇 백배 이상의 기쁨과 감격을 누 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니느웨 성이 입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오히려 문제 삼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지금 화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 하게 따지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는 니느웨를 저주하시는 하나님은 알았지만 니 느웨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몰랐습니다. 지금 요나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요나는 니느웨 성에 회개를 선포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 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요나는 입으로는 회개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 지만, 그의 속마음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망하기를 바랐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왜 요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그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요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원수의 나라 니느웨 사람들이 망하기를 바랐 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그곳에 가서 말씀을 선포는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한 마디로 속이 좁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한 믿음으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고 보십니까 그것은 아직도 내 마음에 누구를 용납하고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어떤 일에 대하여 포용하고 감싸 줄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어도 그 일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들 주변에 보면, 논쟁이 싸움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소한 의견 대립이 생명까지 위협하는 비극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서 어느 누구든지, 설령 그 가 철천지원수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에 들어와서 편안히 쉬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태평양 바다보다도 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 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나는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생각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 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너무나도 훌륭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뜻에 한정시켜서 생각하고자 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인애 를 더하시는 분이 되어도 좋습니다마는,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마는, 그러나 원수의 나라를 위해서는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나는 자기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기의 잣대로 하나님 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이러한 요나의 모습을 얼마든지 찾 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요나처럼 하나님을 나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또 나 자신의 편협된 눈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야 합니다. 나를 향한 그분은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한없는 하나님 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 이어야 한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나는 죄를 지으면 용서를 받아야 하지만, 아무개 가 죄를 지으면 철저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해를 받아야 하 지만 아무개는 철저히 정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가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내 중심 으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 때문에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 앙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 생활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비록, 내가 생각했 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아멘으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바뀌어 질 때에 사명을 감당하는 열심은 그만큼 더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잣대로 하나님을 바라 보았던 요나, 그는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고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요나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감정이 폭발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평합니다. 뭐라고 말입니까 본문 3절을 다시 읽 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 이니이다" 무슨 뜻입니까 이방인이 구원받아 잘 사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니느웨에 임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나는 한 때 물고기 뱃속이라는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서원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엄청난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 요나의 이같은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 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때때로 어떤 일을 하다가 감정이 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일 을 그르치게 했던 적이 없었던가요 가정의 일에서나, 교회의 일에 있어서 사소한 감정 때문에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분란을 일으켰던 때는 없었던가요 감정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 자신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옛 성품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 감정을 앞세우고 자신이 우선이 되면 자기가 원하는 바가 채워지지 않음에 항상 불평하게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중심이 자기에 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정이 상합니다. 그래서 불평하게 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불평하는 사람은 혼자서 끝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는 자신만의 불평불만을 마치 전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립니다. 그래서 결국 그 한 사람의 불만으로 인하여 전체가 흩어지게 되고, 전체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주변에서 불평하는 사람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 앞에서 어느 누군 가가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그를 멀리 하셔도 좋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을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계속 살펴보십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편협된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 불 평하면서 죽기를 원하는 요나에게 다가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나님께서는 지금 요나가 화를 내고 불평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 것이냐고 묻 고 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니느웨 성읍이 구원을 받았다면 당연히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원망하고 못마땅해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선지자 인 네가, 사명자인 네가 가져야 할 태도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요나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지금 니 느웨 성에 되어지는 일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 시는 일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응답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던 요나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본문 5절의 말씀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요나가 성밖으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 때문에 성밖으로 나갔다 고 했습니까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요나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켜 진 노를 거두었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싫어하고 화를 내었음에도 불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핀잔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성 밖에 나가서 성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 던 것입니다. 저는 요나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면서 인간의 못돼먹은 심보를 떠올려 봅니다. 솔직히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 어디엔가는 이와 같은 못된 심보가 숨어 있습니다. 나는 잘 되고 남은 망해도 좋다는 마음이 우리들의 죄악된 심성에 다 있습니다. 사촌 논밭 사면 배가 아픕니다. 인류의 다른 모든 것은 변해도 이 심보는 절 대로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말입니다. 그래서 단테의 신곡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의 화를 기뻐하는 것이 자기의 복보다는 훨씬 기쁘다" 버어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란 남이 겪고 있는 불행이나 괴로 움에 대하여 적지 않은 기쁨을 느낀다" 입으로는 축하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갖는 것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나의 마음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요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평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의 나를 한 번 되돌 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나도 요나처럼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혹여 지금도 어떤 일이 내 마음 에 들지 않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 마음에는 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일하기가 싫고 그래서 뒤에 처져서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중심의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굴종이라도 했던 요나는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감정을 앞세웠던 요나는 그의 입에서 불평 불만이 나오 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중심적인 생각에서 자기 감정을 앞세우면 불평 불만 밖에 나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님 께서 하시기에 아멘으로 순종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나처럼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 불평을 하면서 구경꾼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 까 아니면 비록 내 생각은 그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 죽기를 원하는 요나…. 일하는 요나, 불평하는 요나….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에 대해서, 아니면 어떤 일에 있어서 실망하셨던 적 은 없습니까 그가 미워졌던 때는 없었는지요 그것이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 까 혹여 여러분은 그가 더 뛰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몇 걸음 더 걸으면 되는 걸 말입니다. 혹여 지금도 어떤 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중심의 자리에 들어 오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불평하면서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열심히 땀흘리며 사명을 감당하는 멋진 일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시겠습니까 "주여, 나로 하여금 불평하는 요나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변을 맴도는 방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내게도 주신 사명이 있음을 믿사오니 이 사명을 충성되 게 감당하게 하옵소서. 내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다같이 '주여' 크게 외친 후에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요나서 3장을 읽다가 본문의 4장을 읽으면 참으로 이해하 기가 어려운 사건이 벌어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3장을 읽으면서 마음이 확 뚫리는 것 같던 것이 4장을 읽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더 답답해지면서 내 마음에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우울하고 짜증이 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3장에서는 요나가 일어나 하나님과 함께 뛰면서 주신 사 명을 열심히 감당하는 아름다운 사명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평생을 이렇 게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며 은혜롭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믿음의 사명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오늘 봉독한 본문에서 요나는 또다시 주저 앉아버린 나약한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죽기를 원하는 요나",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불평하는 요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3장에서의 요나를 기억하십니까 그가 얼 마나 열심히 일했습니까 그는 분명히 일하는 요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 고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였습니다. 참으로 멋있는 사명자 요나였습니다. 교회 안에 이런 요나가 많이 있다면 그 교회는 분명히 부흥할 것이라고 저는 확실 히 믿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일하는 요 나, 사명을 감당하는 요 나로서 살아가시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4장에서의 요나를 보십시오. 그는 하나님 앞에서 다시 주저앉아 버립니다.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던 요나가 이제는 불평하는 자로 변모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요나는 주저앉아서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를 구경하는 구경꾼으로 자리 를 잡고 있습니다. 방관자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여러분,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방관자는 결코 바람직한 자세가 아닙니다. 남들 은 열심히 일하는데, 또 지금은 모두가 열심히 사명을 감당해야 할 때임에도 불구 하고 뒤에 처져서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다면 그는 자신과 전체를 위해서 좋지 않 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있을수록 분위기가 흐트러지고, 단합이 되지 않습니다. 방관자, 구경꾼, 그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나서 4장을 대하면 첫 출발부터가 우리의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니까 본문 1절을 여러분께서 함께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나는 이 일이 매우 못마땅하여 화가 났다"
그렇다면, 요나로 하여금 무엇이 이토록 못마땅하게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요나 로 하여금 이토록 잔뜩 화가 나게 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니느웨 성을 저주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감찰하시고 용서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는 그것이 정말 로 싫었습니다. 니느웨 성에 내려야 할 재앙을 내리지 않았음에 화가 났더라는 겁니다. 보십시오. 요나 한 사람의 전도로 말미암아 니느웨 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멸망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았다는 이 놀 라운 사건 앞에서 요나는 분명히 감사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에 요나로서는 기뻐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아닌 선지자 요 나, 사명자 요나로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몇 십배, 몇 백배 이상의 기쁨과 감격을 누 렸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니느웨 성이 입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오히려 문제 삼고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그는 지금 화를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 하게 따지고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는 니느웨를 저주하시는 하나님은 알았지만 니 느웨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몰랐습니다. 지금 요나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요나는 니느웨 성에 회개를 선포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는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린 것 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요나는 입으로는 회개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 지만, 그의 속마음은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망하기를 바랐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왜 요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그에게 있어서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요나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 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요나는 자기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원수의 나라 니느웨 사람들이 망하기를 바랐 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명령이었기에 그곳에 가서 말씀을 선포는 했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들은 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는 한 마디로 속이 좁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온전한 믿음으로 감당하기가 어렵다 고 보십니까 그것은 아직도 내 마음에 누구를 용납하고 받아들일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어떤 일에 대하여 포용하고 감싸 줄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명을 감당하고 싶어도 그 일 때문에, 그 사람 때문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들 주변에 보면, 논쟁이 싸움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소한 의견 대립이 생명까지 위협하는 비극으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서 어느 누구든지, 설령 그 가 철천지원수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에 들어와서 편안히 쉬고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태평양 바다보다도 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 게 원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요나는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을 이해하고 생각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 2절의 말씀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 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요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하여 너무나도 훌륭하게 알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자기의 뜻에 한정시켜서 생각하고자 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고 인애 를 더하시는 분이 되어도 좋습니다마는,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마는, 그러나 원수의 나라를 위해서는 자비와 은혜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나는 자기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자기의 잣대로 하나님 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에게서도 이러한 요나의 모습을 얼마든지 찾 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도 요나처럼 하나님을 나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또 나 자신의 편협된 눈으로 하나님을 믿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하나님은 은혜로우셔야 합니다. 나를 향한 그분은 자비로우시며 사랑이 한없는 하나님 이셔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은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 이어야 한다고 생각들을 합니다. 나는 죄를 지으면 용서를 받아야 하지만, 아무개 가 죄를 지으면 철저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해를 받아야 하 지만 아무개는 철저히 정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가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이해하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가 받아들이기 싫은 것은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내 중심 으로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여기에 우리들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세 때문에 우리가 신앙 생활을 바르게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의 잘못된 편견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신 앙 생활에서 하나님 중심적인 신앙 생활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비록, 내가 생각했 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아멘으로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이 바뀌어 질 때에 사명을 감당하는 열심은 그만큼 더 뜨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자신이 만들어 놓은 잣대로 하나님을 바라 보았던 요나, 그는 자기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니까 자존심이 몹시 상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고 못마땅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요나는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감정이 폭발 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 앞에 불평합니다. 뭐라고 말입니까 본문 3절을 다시 읽 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 이니이다" 무슨 뜻입니까 이방인이 구원받아 잘 사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니느웨에 임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요나는 한 때 물고기 뱃속이라는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서원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감정을 억제하지를 못하고 엄청난 시험에 빠져 있습니다. 여러분, 요나의 이같은 모습을 보면서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 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때때로 어떤 일을 하다가 감정이 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나님의 일 을 그르치게 했던 적이 없었던가요 가정의 일에서나, 교회의 일에 있어서 사소한 감정 때문에 문제를 어렵게 만들고 분란을 일으켰던 때는 없었던가요 감정이 앞서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 자신이 우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잘못된 옛 성품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가 감정을 앞세우고 자신이 우선이 되면 자기가 원하는 바가 채워지지 않음에 항상 불평하게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언제나 중심이 자기에 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소한 일에도 쉽게 감정이 상합니다. 그래서 불평하게 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더구나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불평하는 사람은 혼자서 끝나는 것이 아니더라는 겁니다. 그는 자신만의 불평불만을 마치 전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퍼뜨립니다. 그래서 결국 그 한 사람의 불만으로 인하여 전체가 흩어지게 되고, 전체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주변에서 불평하는 사람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 앞에서 어느 누군 가가 불평을 늘어놓는다면 그를 멀리 하셔도 좋습니다. 불평하는 사람을 절대로 가까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본문을 계속 살펴보십시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편협된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 불 평하면서 죽기를 원하는 요나에게 다가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나님께서는 지금 요나가 화를 내고 불평하는 것이 이치에 합당한 것이냐고 묻 고 있습니다. 너로 말미암아 니느웨 성읍이 구원을 받았다면 당연히 기뻐하고 또 기뻐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원망하고 못마땅해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 과연 선지자 인 네가, 사명자인 네가 가져야 할 태도냐고 되묻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요나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마음을 돌이켜야 했습니다. 지금 니 느웨 성에 되어지는 일이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정반대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 시는 일이기 때문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응답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책망을 들었던 요나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본문 5절의 말씀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나가 성에서 나가서 그 성 동편에 앉되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서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 하니라" 요나가 성밖으로 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무엇 때문에 성밖으로 나갔다 고 했습니까 "성읍이 어떻게 되는 것을 보려고" 요나는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회개하는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켜 진 노를 거두었음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때문에 싫어하고 화를 내었음에도 불 구하고,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핀잔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그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성 밖에 나가서 성이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 던 것입니다. 저는 요나의 이와 같은 행동을 보면서 인간의 못돼먹은 심보를 떠올려 봅니다. 솔직히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은 곳 어디엔가는 이와 같은 못된 심보가 숨어 있습니다. 나는 잘 되고 남은 망해도 좋다는 마음이 우리들의 죄악된 심성에 다 있습니다. 사촌 논밭 사면 배가 아픕니다. 인류의 다른 모든 것은 변해도 이 심보는 절 대로 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말입니다. 그래서 단테의 신곡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남의 화를 기뻐하는 것이 자기의 복보다는 훨씬 기쁘다" 버어크라는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란 남이 겪고 있는 불행이나 괴로 움에 대하여 적지 않은 기쁨을 느낀다" 입으로는 축하하면서도 속으로는 딴 생각을 갖는 것이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나의 마음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요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평하는 요나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의 나를 한 번 되돌 아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어쩌면 나도 요나처럼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혹여 지금도 어떤 일이 내 마음 에 들지 않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도 내 마음에는 보기 싫은 사람 때문에 일하기가 싫고 그래서 뒤에 처져서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중심의 자리에 들어오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굴종이라도 했던 요나는 사명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중심적인 생각에서 감정을 앞세웠던 요나는 그의 입에서 불평 불만이 나오 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죽여 달라고 생떼를 쓰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내 중심적인 생각에서 자기 감정을 앞세우면 불평 불만 밖에 나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비록,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그러나 하나님 께서 하시기에 아멘으로 순종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는 묵묵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충성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요나처럼 자기 감정에 사로잡혀 불평을 하면서 구경꾼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 까 아니면 비록 내 생각은 그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는 충성된 사명자의 길을 걸어가시겠습니까 사명을 감당하는 요나, 죽기를 원하는 요나…. 일하는 요나, 불평하는 요나…. 여러분은 어느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구에 대해서, 아니면 어떤 일에 있어서 실망하셨던 적 은 없습니까 그가 미워졌던 때는 없었는지요 그것이 무슨 이유 때문이었습니 까 혹여 여러분은 그가 더 뛰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내가 몇 걸음 더 걸으면 되는 걸 말입니다. 혹여 지금도 어떤 일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중심의 자리에 들어 오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불평하면서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시겠습니까 아니면 열심히 땀흘리며 사명을 감당하는 멋진 일꾼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시겠습니까 "주여, 나로 하여금 불평하는 요나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주변을 맴도는 방관 자가 되지 않게 하옵소서. 내게도 주신 사명이 있음을 믿사오니 이 사명을 충성되 게 감당하게 하옵소서. 내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않게 하옵소서" 우리 다같이 '주여' 크게 외친 후에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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