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못 차리는 요나 (욘4:6-11)
본문
'승리의 생활'이라고 붙여진 팜플렛으로 만들어진 오래된 잡지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주인을 잃어버린 짐승을 찾습니다!'라는 아주 재미있는 글이 실린 적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자세히 들어보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주인을 잃어버린 짐승이 어떤 짐승인가를 말입니다. 이 짐승은 개보다는 조금 큽니다. 그러나 개보다 영리하지는 못합니다. 돼지보다는 뚱뚱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돼지보다 더 더럽습니다. 소보다는 힘이 약합니다. 그러나 움켜쥐는 손아귀는 더욱 셉니다. 원숭이보다는 좀 잘 생겼습니다. 그러나 흉내는 더 잘 냅니다. 말보다는 얼굴이 짧습니다. 그러나 좀 더 음란합니다. 표범보다 가죽은 더 고운 것을 걸쳤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추악함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호랑이보다는 순합니다. 그러나 그 이빨은 더 사납습니다. 이런 짐승을 못 보셨는지요 여러분은 그 짐승이 무엇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이것은 사람을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조금 너무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주인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이 짐승이 주인을 찾고, 그 주인 아래 있었더라 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을 터인데, 불행하게도 주인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그러 니까 이 짐승이 교활해졌습니다. 이 짐승이 못된 짓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다시 찾아 주자는 그런 글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다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하 나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 변하기가 그렇게 힘들고, 인간됨의 변화가 너무 너무 힘 이 듭니다. 뭔가 좀 바뀌었으면 참으로 좋겠는데…,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사람들이 우리들 주위에 적지 않게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 하나가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드는 겁니다. 우리는 요나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와 같은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지를 않 습니까 '요나',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일반 적으로 기쁨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순결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요나는 자 신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누려야 하고,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순결한 삶을 살도록 해 야 하는 생활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요나는 그의 이름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요나로 인 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쁨의 소식을 들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요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와 같이 이름에 맞지 않는 삶을 살다가 책망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다윗의 아들이었던 압살롬, 그의 이름은 "평강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권력에 눈이 어두워 아버지를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압살롬으로 인하여 그의 가정에 평강이 임했던 것이 아니라 불화와 전쟁을 가지고 온 파괴자였습니다. 삭개오는 "순수한 자"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오히려 그는 순수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세금을 좀 더 많이 빼앗을 수가 있을까를 생각했던 결코 순수하 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귀한 이름으로 주셨음 을 아십니까 '성도',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 '믿음의 사람'…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이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 까 우리는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요나를 보면서 인간됨의 변화, 그 사람의 성격이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에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지금 요나는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천국이 아름답고 귀한 곳이라고 해도, 그래도 이 세상이 좋은 것 입니다. 지금 이 생명이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떼를 쓰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당신이 그렇게 하시면 내 입 장은 도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왜 내 뜻대로 해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여러분, 이것은 완전히 생떼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갖고 싶은 장난감을 갖기 위하여 어머니에게 생떼를 부리는 것처럼, 지금 요나는 하나님 께 생떼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전혀 씨가 먹혀들지 않는 요나,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불평을 하고 있는 요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십니다.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생떼를 부 리고 있는 요나의 비뚤어진 인간됨을 깨닫게 하시고자 삶의 교육현장으로 그를 불 러내십니다. 그러면, 올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삶의 교육현장이란 무엇입니까 본문 6절 말씀을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셨다고 했습니까 박넝쿨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에 대하여 불평하며 화를 내면서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견딜 수 없는 무더위 속에서 도 억지를 부리는 요나였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깨닫게 하시려고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동풍을 '시로코'라고 불리는데 이 열풍이 불면 기온이 급상승하고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 대낮의 기온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 동풍 은 공기 중의습기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가 당기는 듯한 느낌 을 갖게 되고, 불쾌지수가 높아져서 성격이 까다로와지고 신경이 날카로와집니다. 그리고 동풍이 불면 초목은 메말라 버립니다. 이런 기후적인 어려움에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이 박넝쿨로 인하여 심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화가 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요나가 본문 6절 하반절 말씀에 보면 '심 히 기뻐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싫어하면서 화를 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니느웨 성이 구원받음에 화를 냈더랬습니다. 니느웨 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싫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요나가 이처럼 심히, 심히 기뻐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기록하 고 있습니까 6절 하반절에서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요나가 기뻐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 감격스러워서 기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기뻐한 것은 하찮은 박넝쿨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하박국 3장 18절에서 하박국은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노래했고, 시편 35편 9절에서 다윗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나가 기뻐한 것은 무엇입니까 박넝쿨입니다. 니느웨 성의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을 뻔하였다가 회개하여 구원 을 받았을 때 요나는 정말로 기뻐했어야 했습니다. 선지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래야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것이 오히려 싫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하찮은 박넝쿨을 인하여서는 기뻐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기뻐했던 것이 아니라 심히 기뻐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의 눈에는 구원받아 기뻐 하는 생명들이 아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질 박넝쿨만 보였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너무나도 이기적인 한 인간의 모습을 보 게 됩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요놈의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 라고 하시지를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희생적인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이웃 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위대한 계명 에 따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십시오. 이제 요나는 뜨겁게 내리 쬐는 햇볕을 피하여 박넝쿨 그늘 밑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는 여전히 구경꾼으로서 역사의 방관자로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 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그리고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 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 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지 못하는 요나, 하나님의 지고하신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삶의 교육현장으로 불러 세우십니다. 그리고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박넝쿨로 인하여 기뻐하는 요나를 깨닫게 하 시고자 이제는 벌레를 준비하셔서 뿌리를 씹게 하셨고, 또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셔 서 박넝쿨을 마르게 하십니다. 어리석은 요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여러 가지로 준비하셨고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 정신 못 차리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보십시 오.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큰 폭풍을 준비하셨습니다. 폭 풍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던 요나를 이제는 굴종이라도 하게 하시려고 물고기 를 준비하셨습니다.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생명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계신 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요나를 깨닫게 하고자 하나님께서는 벌레도 준비하셨고, 뜨거운 동 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는 박넝쿨이 없어진 것에 화를 내면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박넝쿨을 위해서 요나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그가 박넝쿨을 위해서 수고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시 잠간 있다가 없어질 박넝쿨을 사랑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박넝쿨을 준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께 감사한 일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엄청난 축복을 받고 살면서도 그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이 배은망덕한 요나를 보면서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면서도,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건강을 자랑하면서도 건강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자랑하면서도, 성공하도록 축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척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 때문에 기뻐하고 자랑하면서도 그 자 녀들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행동이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박넝쿨만을 사랑한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더란 말입니 까 하나님은 요나를 깨닫게 하시고자 그를 삶의 교육현장으로 불러 내었지만 그러나 그는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조금만 좋아도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이 된 듯이 날뛰다가도 조금만 어려우면 땅이 꺼진 것처럼 탄식하는 우리들처럼 요나 도 벌레와 동풍이 박넝쿨의 기쁨을 빼앗아가니까 이제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라면서 또다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이렇게 원망하 고 불평할 때에 하나님은 다시금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박넝쿨을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이때 요나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여러분, 요나의 이 항변이 도무지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요나는 뜨거운 햇볕에 견딜 수 있도록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를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 박넝쿨을 시들게 하신 하나님께 대하여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박넝쿨이 시들어 버린 것에 대하여 요나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왜 화를 내느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요나는 화를 내어 죽기까지 하여도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 대들고 있습니다. 아직도 요 나는 편협된 생각, 이기적인 생각,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기적인 생각, 편협된 생각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 다 옳다고 주 장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바르다고 주장합니다. 내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항 변합니다. 따라서 내가 왜 화를 내는지, 그리고 그것이 합당한지 조차도 알지를 못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문제 투성이라고 불평하게 됩니다. 요나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요나, 깨닫지를 못하고 무가치한 박넝쿨에 연연 하고 있는 요나를 깨우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께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 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자신의 모든 관심과 기쁨이 박넝쿨에만 있는 요나를 향하여 하나님은 박넝쿨이 자라는 동안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였고 단 한 시간의 수고도 하지 아니하였 으며, 또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시들어버린 그 박넝쿨을 아끼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잠시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박넝쿨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았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귀하게 여겨야 할 인간의 영혼은 왜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주위에는 정말로 무엇이 귀한 것인지 올바로 분간 하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소중한 것 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정말로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길 줄을 모르고 오로지 박넝쿨에만 관심이 있는 요 나를 향하여 하나님은 네가 가치없는 박넝쿨을 아꼈다면 내가 천하보다 귀중한 생 명이 있는 니느웨 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 성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 순히 사십 일 후에 망한다는 소식을 선포하시려고 요나를 보냈더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굳이 요나를 니느웨에 보낼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십 일 후면 당연히 망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냥 그때를 기다렸다가 멸망시키면 될 테인데 무엇하려고 위험 부담까지 감수하면서 요나를 보냈겠습니까 하나님이 요나를 왜 보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신 것은 니느웨 성 에 있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12만명의 생명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 귀중한 그 영혼들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구경꾼으로 방관자로서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혼들에 대한 애정이 결핍된 요나를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한 번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주위에는 요나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 없이 멸망을 향해 잃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잃어져 가는 이들의 영혼들에 대 하여 얼마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요나처럼 시원한 박넝쿨 아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과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박넝쿨을 거두어 가 시기 위하여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이 벌레는 나의 편안함을 방해하는 남편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벌레는 나에게 문제아로 다가오는 자녀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 벌레는 재산의 몰 락일 수도 있고, 건강의 상실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벌레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하나님의 마지막 징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벌레가 내 인생의 기쁨과 부귀영화를 빼앗아가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잃어져 가는 영혼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의 일에서나 교회의 일에 있어서 뒤에 멀찍이 처져서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에든지 열심으로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이 개입을 하셨던가요 그때마다 정신 못 차리는 '요 나'를 깨닫게 하시고자 얼 마나 자주 벌레들을 준비하셨던가요 빨리 깨닫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더 위 대한 자는 빨리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요나처럼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관자로서 부끄러운 삶을 살 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상한 감정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금 허리띠를 조여메고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요나 앞에선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부끄러운 나의 삶을 고백합니다. 회개합니다. 나로하여금 요나와 같은 부끄러운 요나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나에게 도 당신께서 주신 사명이 있음을 믿사오니 이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성령님이여, 내 마음을 뜨겁게 하옵소서.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사명 감 당하게 하옵소서" 우리 다같이 '주여' 한 번 크게 부른 후에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런데 주인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이 짐승이 주인을 찾고, 그 주인 아래 있었더라 면 문제가 간단히 해결되었을 터인데, 불행하게도 주인을 잃었다고 했습니다. 그러 니까 이 짐승이 교활해졌습니다. 이 짐승이 못된 짓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을 다시 찾아 주자는 그런 글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다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변하지 않는 것이 하 나 있습니다. 사람의 성격 변하기가 그렇게 힘들고, 인간됨의 변화가 너무 너무 힘 이 듭니다. 뭔가 좀 바뀌었으면 참으로 좋겠는데…,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사람들이 우리들 주위에 적지 않게 많이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 하나가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드는 겁니다. 우리는 요나라는 사람을 통해서 그와 같은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지를 않 습니까 '요나', '요나'라는 이름의 뜻은 '비둘기'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일반 적으로 기쁨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순결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요나는 자 신의 이름에 걸맞는 삶을 살았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요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누려야 하고,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순결한 삶을 살도록 해 야 하는 생활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요나는 그의 이름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요나로 인 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쁨의 소식을 들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요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위험에 처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와 같이 이름에 맞지 않는 삶을 살다가 책망 받은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보게 된다. 예를 들면, 다윗의 아들이었던 압살롬, 그의 이름은 "평강의 아버지"라는 뜻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권력에 눈이 어두워 아버지를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압살롬으로 인하여 그의 가정에 평강이 임했던 것이 아니라 불화와 전쟁을 가지고 온 파괴자였습니다. 삭개오는 "순수한 자"라는 이름을 가졌으나 오히려 그는 순수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세금을 좀 더 많이 빼앗을 수가 있을까를 생각했던 결코 순수하 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참으로 귀한 이름으로 주셨음 을 아십니까 '성도',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자녀', '빛의 자녀', '믿음의 사람'…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이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 까 우리는 얼마나 변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까 요나를 보면서 인간됨의 변화, 그 사람의 성격이 변화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에 하나님께 불평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발 내 목숨을 나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지금 요나는 하나님께 자기를 죽여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천국이 아름답고 귀한 곳이라고 해도, 그래도 이 세상이 좋은 것 입니다. 지금 이 생명이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지금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정말로 죽기를 원하고 있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금 떼를 쓰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당신이 그렇게 하시면 내 입 장은 도대체 뭐가 되는 겁니까 왜 내 뜻대로 해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나를 죽여주십시오" 여러분, 이것은 완전히 생떼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갖고 싶은 장난감을 갖기 위하여 어머니에게 생떼를 부리는 것처럼, 지금 요나는 하나님 께 생떼를 부리고 있는 겁니다. 전혀 씨가 먹혀들지 않는 요나, 자기 감정에 도취되어 불평을 하고 있는 요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용서하십니다. 용서하실 뿐만 아니라, 생떼를 부 리고 있는 요나의 비뚤어진 인간됨을 깨닫게 하시고자 삶의 교육현장으로 그를 불 러내십니다. 그러면, 올바르지 못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삶의 교육현장이란 무엇입니까 본문 6절 말씀을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하며 그 괴로움을 면케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 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 하나님께서 요나를 위하여 무엇을 준비하셨다고 했습니까 박넝쿨입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음에 대하여 불평하며 화를 내면서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고 있는 요 나를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견딜 수 없는 무더위 속에서 도 억지를 부리는 요나였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깨닫게 하시려고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팔레스틴 지방의 기후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북아프리카에서부터 지중해 연안으로 불어오는 동풍을 '시로코'라고 불리는데 이 열풍이 불면 기온이 급상승하고 때로는 밤에도 기온이 올라가 대낮의 기온을 그대로 유지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이 동풍 은 공기 중의습기를 완전히 없애버리기 때문에 사람들은 피부가 당기는 듯한 느낌 을 갖게 되고, 불쾌지수가 높아져서 성격이 까다로와지고 신경이 날카로와집니다. 그리고 동풍이 불면 초목은 메말라 버립니다. 이런 기후적인 어려움에 있는 요나에게 하나님께서는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요나는 이 박넝쿨로 인하여 심히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1절에서 요나는 심히 싫어하고 화가 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요나가 본문 6절 하반절 말씀에 보면 '심 히 기뻐하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싫어하면서 화를 냈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니느웨 성이 구원받음에 화를 냈더랬습니다. 니느웨 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이 싫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요나가 이처럼 심히, 심히 기뻐했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기록하 고 있습니까 6절 하반절에서 무엇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요나가 박넝쿨을 인하여 심히 기뻐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요나가 기뻐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 감격스러워서 기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나가 기뻐한 것은 하찮은 박넝쿨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하박국 3장 18절에서 하박국은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라"고 노래했고, 시편 35편 9절에서 다윗은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 구원을 기뻐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가 아닙니까
그런데 요나가 기뻐한 것은 무엇입니까 박넝쿨입니다. 니느웨 성의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을 뻔하였다가 회개하여 구원 을 받았을 때 요나는 정말로 기뻐했어야 했습니다. 선지자라고 한다면 당연히 그 래야 합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것이 오히려 싫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나는 하찮은 박넝쿨을 인하여서는 기뻐했습니다. 그것도 그냥 기뻐했던 것이 아니라 심히 기뻐했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의 눈에는 구원받아 기뻐 하는 생명들이 아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없어질 박넝쿨만 보였더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너무나도 이기적인 한 인간의 모습을 보 게 됩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요놈의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요나처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치신 교훈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살 라고 하시지를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희생적인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이웃 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면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의 위대한 계명 에 따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십시오. 이제 요나는 뜨겁게 내리 쬐는 햇볕을 피하여 박넝쿨 그늘 밑에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니느웨 성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는 여전히 구경꾼으로서 역사의 방관자로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7절을 보니까, "하나님이 벌레를 준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씹 게 하시매 곧 시드니라" 그리고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쬐매 요 나가 혼곤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 다" 하나님께서 징계하시고자 하시는 궁극적인 목적을 깨닫지 못하는 요나, 하나님의 지고하신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삶의 교육현장으로 불러 세우십니다. 그리고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박넝쿨로 인하여 기뻐하는 요나를 깨닫게 하 시고자 이제는 벌레를 준비하셔서 뿌리를 씹게 하셨고, 또 뜨거운 동풍을 준비하셔 서 박넝쿨을 마르게 하십니다. 어리석은 요나를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렇게 여러 가지로 준비하셨고 역사하셨습니다. 여러분, 정신 못 차리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를 보십시 오. 불순종하여 도망가는 요나를 깨닫게 하시려고 큰 폭풍을 준비하셨습니다. 폭 풍 앞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않던 요나를 이제는 굴종이라도 하게 하시려고 물고기 를 준비하셨습니다. 온 천하보다도 더 귀한 생명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고 계신 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깨닫게 하시려고 박넝쿨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요나를 깨닫게 하고자 하나님께서는 벌레도 준비하셨고, 뜨거운 동 풍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아직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는 박넝쿨이 없어진 것에 화를 내면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실, 박넝쿨을 위해서 요나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없습니다. 그가 박넝쿨을 위해서 수고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잠시 잠간 있다가 없어질 박넝쿨을 사랑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박넝쿨을 준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하나님께 감사한 일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엄청난 축복을 받고 살면서도 그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이 배은망덕한 요나를 보면서 어쩌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지는 않습니까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는 행복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면서도, 행복하게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건강을 자랑하면서도 건강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을 자랑하면서도, 성공하도록 축복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른척 합니다. 우리는 자녀들 때문에 기뻐하고 자랑하면서도 그 자 녀들을 주신 하나님은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우리의 이와 같은 행동이 요나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박넝쿨만을 사랑한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이더란 말입니 까 하나님은 요나를 깨닫게 하시고자 그를 삶의 교육현장으로 불러 내었지만 그러나 그는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조금만 좋아도 세상이 온통 자기 것이 된 듯이 날뛰다가도 조금만 어려우면 땅이 꺼진 것처럼 탄식하는 우리들처럼 요나 도 벌레와 동풍이 박넝쿨의 기쁨을 빼앗아가니까 이제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라면서 또다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요나가 이렇게 원망하 고 불평할 때에 하나님은 다시금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박넝쿨을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이때 요나가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까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니이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옳다 뿐이겠습니까 저는 화가 나서 죽겠습니다" 여러분, 요나의 이 항변이 도무지 이치에 맞다고 생각하십니까 요나는 뜨거운 햇볕에 견딜 수 있도록 박넝쿨로 그늘을 만들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를 않으면서도 오히려 그 박넝쿨을 시들게 하신 하나님께 대하여는 화를 내고 있습니다. 박넝쿨이 시들어 버린 것에 대하여 요나가 화를 내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왜 화를 내느냐고 묻습니다. 그랬더니 요나는 화를 내어 죽기까지 하여도 자신이 화를 내는 것이 합당하다고 하나님께 대들고 있습니다. 아직도 요 나는 편협된 생각, 이기적인 생각, 잘못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기적인 생각, 편협된 생각에 빠지게 되면 자신의 생각이 다 옳다고 주 장합니다. 자신의 행동이 바르다고 주장합니다. 내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항 변합니다. 따라서 내가 왜 화를 내는지, 그리고 그것이 합당한지 조차도 알지를 못 합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은 문제 투성이라고 불평하게 됩니다. 요나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요나, 깨닫지를 못하고 무가치한 박넝쿨에 연연 하고 있는 요나를 깨우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께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 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 자신의 모든 관심과 기쁨이 박넝쿨에만 있는 요나를 향하여 하나님은 박넝쿨이 자라는 동안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였고 단 한 시간의 수고도 하지 아니하였 으며, 또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시들어버린 그 박넝쿨을 아끼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잠시 잠간 있다가 없어지는 박넝쿨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았다면,
그렇다면 정말로 귀하게 여겨야 할 인간의 영혼은 왜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주위에는 정말로 무엇이 귀한 것인지 올바로 분간 하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소중한 것 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정말로 귀한 것을 귀하게 여길 줄을 모르고 오로지 박넝쿨에만 관심이 있는 요 나를 향하여 하나님은 네가 가치없는 박넝쿨을 아꼈다면 내가 천하보다 귀중한 생 명이 있는 니느웨 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 성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 순히 사십 일 후에 망한다는 소식을 선포하시려고 요나를 보냈더라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굳이 요나를 니느웨에 보낼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십 일 후면 당연히 망할 것이라고 한다면, 그냥 그때를 기다렸다가 멸망시키면 될 테인데 무엇하려고 위험 부담까지 감수하면서 요나를 보냈겠습니까 하나님이 요나를 왜 보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요나를 보내신 것은 니느웨 성 에 있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12만명의 생명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천하보다 귀중한 그 영혼들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직도 구경꾼으로 방관자로서의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서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영혼들에 대한 애정이 결핍된 요나를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한 번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있는 주위에는 요나 때 보다 훨씬 더 많은 영혼들이 그리스도 없이 멸망을 향해 잃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잃어져 가는 이들의 영혼들에 대 하여 얼마만큼의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가 요나처럼 시원한 박넝쿨 아래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명과 하나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박넝쿨을 거두어 가 시기 위하여 벌레를 준비하십니다. 이 벌레는 나의 편안함을 방해하는 남편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이 벌레는 나에게 문제아로 다가오는 자녀들일 수도 있습니다. 이 벌레는 재산의 몰 락일 수도 있고, 건강의 상실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 벌레는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하나님의 마지막 징계일 수도 있습니다. 이 벌레가 내 인생의 기쁨과 부귀영화를 빼앗아가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고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스도 없이 잃어져 가는 영혼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정의 일에서나 교회의 일에 있어서 뒤에 멀찍이 처져서 구경꾼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어떠한 일에든지 열심으로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에 얼마나 많이 개입을 하셨던가요 그때마다 정신 못 차리는 '요 나'를 깨닫게 하시고자 얼 마나 자주 벌레들을 준비하셨던가요 빨리 깨닫는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 더 위 대한 자는 빨리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요나처럼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방관자로서 부끄러운 삶을 살 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모든 상한 감정들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시금 허리띠를 조여메고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시겠습니까 요나 앞에선 여러분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부끄러운 나의 삶을 고백합니다. 회개합니다. 나로하여금 요나와 같은 부끄러운 요나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게 하옵소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나에게 도 당신께서 주신 사명이 있음을 믿사오니 이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할 수 있도록 하옵소서. 성령님이여, 내 마음을 뜨겁게 하옵소서.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사명 감 당하게 하옵소서" 우리 다같이 '주여' 한 번 크게 부른 후에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