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란 그릇에 담긴 행복 (욥30:16-31)
본문
한 팀의 러시아 과학자들이 편안하고 안락한 인생이 과연 생명을 단축 시키는지 혹은 연장시키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했 습니다. 두 그룹의 동물을 선정했습니다. 한 그룹의 동물들은 아주 이 상적인 환경에 두었습니다. 이들은 상쾌한 공기, 많은 음식, 방해물이 없는 곳에서 놀고먹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룹의 동물들에 겐 좋고 나뿐 환경을 고루 주었습니다. 이들은 편히 쉬다가도 적과 맛서 기도 하고 음식을 찾아 끓임 없이 움직여야 했습니다. 그 결과 좋은 환 경에 있던 그룹들은 금방 노쇠하였지만, 두 번째 그룹의 동물들은 팽팽 한 젊음을 유지했다고 합니다. 조류학자들도 새들이 미풍에서보다 바람에 맛설 때 더 날세게 난다고 합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인생도 고난이 없으면 무의미 합니다. 인간은 고난과 맛서면서 활기를 띠게 됩니다. 고통이 불행이냐 행복이냐는 단답식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고통의 의미와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욥의 고통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단이 여호와 하나님께 고소합니다. 이렇게 비판합니다. '하나님! 사실 욥의 믿음은 별 것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잘 해 주니까 해- 해- 거리고 경외하지요. 지금 당장 하나님이 욥의 모든 소유물을 빼앗아 가면 삿대 질을 하고 하나님을 오히려 욕할 겁니다.'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 외하리이까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 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 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1:9-12) 하나님은 사단의 고소를 통과하는 욥의 믿음의 순수를 검증하기로 하 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욥의 고통은 시작되었습니다. 욥은 단 하루만에 모든 재산과 자녀들을 잃습니다. 욥은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던 위치 에서, 갑자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위치로 전락합니다. 친구들과 아내까 지 욥을 비판하고 교정하러 듭니다.
욥은 의롭게 산 자였기에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딜레마를 만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단련의 시간입니다. 따뜻하고 맑은 날의 믿음이 아닙니다. 폭풍 치는 험한 날의 믿음입니다. 순풍에 돛단 잔잔한 날의 믿음이 아닙니다. 파도치는 험한 날의 믿음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고 계속 승승장구 축복의 지대로 만 살아왔다고' 그러나 기억하세요. 그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은 믿음의 분량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렇게 축복의 지대에만 두시는 겁니다. 예수 믿고 부자로만 살았다면,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부자가 아니면 주님께 삿대질을 하고 돌아설 정도의 믿음 밖에 되지 않으니 안전의 지대에 그냥 두시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축복이라기보다 수치입니다. 험한 세상에 나가 꿋꿋이 풍상과 역경을 헤 치며 부모의 유업을 이어 가는 힘찬 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부모의 보 호막 아래만 안주하는 걱정스러운 자녀인 것입니다. 성경에 어디 인생의 굴곡이 전혀 없는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까 인생의 굴곡이 있을 때마다 전부 저주받은 것입니까 이제 욥은 이런 시험대에 올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에도 믿음은 지속될 것인가 고난의 시기에도 믿음은 꽃을 피울 것인가 이제 바야흐로 검증 받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부러 고난을 주시지는 않 습니다. 욥은 하나님 경외의 정도를 검증 받기 위해 시련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욥처럼 엄청나고 특이한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개 인간으로서 수 천년 동안 단골 품목처 럼 있었던 필연적인 고통들입니다. 생노병사, 희노애락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단지 지금, 바로 나에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암은 현대인들에게 만연한 것입니다. 교통사고, 가스사고, 화재사고, 붕 괴사고, 폭발사고, 도난사고, 폭행사고 이런 갑작스런 사고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언제나 손쉽게 닥쳐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부도, 파산, 경제적 몰락 이것도 경제 활동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광범하게 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런 모든 불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비껴 갑니까 면 제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암으로 죽습니다. 그리스도인 실업 가도 부도를 당합니다. 파산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경제위기 무 풍지대에다 실어 줍니까 이것 잘 아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아주 천박해 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보호는 끝이 없습니다. 그의 도우심의 손길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구출해 주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 까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 발 딛고 살면서 당하는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어서는 것,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순전히 믿음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고통을 고통으로만 체험하고 끝내는 불행한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고통을 행복의 씨앗으로 느끼고 바꾸는 행복한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대개 두 가지로 옵니다. 소유물과 몸입니다. 물론 소유 물은 재산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으며, 재능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욥기에 보니, 사단이 하나님께 욥을 쳐보라고 합니다. 그 첫 번째 가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입니다. 두 번째는 '뼈와 살을 치소서'라고 합니다. 그대로 욥은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또 몸에는 천형의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욥의 고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욥은 이 이중적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 대개 고통의 순간 인간은 불행을 느낍니다. 고통이 오면 하나님 원 망과 범죄의 충동에도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믿음의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서 겸허(겸손), 간절, 정화, 의지, 단련, 희망을 진하게 경험 하게 됩니다. 반대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은 오만, 방탕, 오염, 자 존감, 쾌락에 빠져 있기 쉽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참된 행복은 고 통을 통해서 옵니다 고난을 당하면 겸손해 지는 것 경험하시지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 별로 없구나 자신의 무력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콧대가 좀 낮아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좀 겸손해 졌어요. 또 어려우면 간절해집니다. 요즈음은 모두가 종교인입니다. 모두가 기도하는 마음들입니다. 사람 이 간절해지면 그때는 인생을 느끼는 때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 일한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내한 고통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를 깊은 물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 기 위함이다"고 말했습니다. 삼저 호황, 경제가 잘 나갈 때는, 우리가 얼마나 쾌락과 안정과 욕망과 오만에 들떠 있었습니까 이 찌꺼기와 불순물을 이제 우리 주님은 깨 끗이 씻어 주시기 위해, 생명의 강가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욥이 바로 그렇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정화와 단련입니다. 금을 제련해 내듯 불순물 찌꺼기는 다 걸러 내고 정제된 금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 나이다"(욥42:6) 직접 경험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합니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항상 성경 말씀은 "-하더라"(They say)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겪는 순간은 "나의 고백"(I say)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이 바 로 인간이 종교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대를 통과하게 되니 더 겸손해 집니다. 더 간절해집니다. 더 불순물을 씻어내고 맑게 갠 하늘을 보게 됩니다. 전에는 쾌락도 보고, 욕망도 보고, 재물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하고 선명하게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바 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벌써 축복입니다.
"행복의 조건"(THE CONQUEST OF HAPPYNESS)이라는 책으로 럿셀은 행복을 논했지만,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산상수훈에서 역설적인 행복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 그 자체로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 '팔복(八福)'으로 시를 지었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을 여덟 번 반복한 다음 마지막에는 '영원히 슬퍼할 것이요' 했습니다. 암울한 조국의 운명 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애통하는 자는 그 자체로서 행복한 것이니 영원히 행복을 누리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축복 같이 들립니다. 일차적인 행복의 조건은 물질입니다. 그 다음 행복의 조건은 환경입니다.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은 안락입니다. 이것 무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질의 동물이요, 환경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 기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행복은 언제나 산산조각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언제나 파도처럼 춤을 출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불행입니다. 이제 고통의 순간을 통과하는 욥의 모습을 한 번 보십시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16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니'라는 뜻입니다. 너무 괴롭다는 표현입니다.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17절)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밤에도 걱정과 고통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의 식이 있는 동안은 고통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같게 하셨구 나"(19절) 진흙이나 티끌, 재는 모두 파괴되고 낮은 곳으로 쳐 박히는 모습입니다.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으시고, 판결과 면회를 청하는 마음으 로 기다려도 응답이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애절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25-26절)
악을 행하지 않고 오히 려 바르고 힘쓰며 살았는 데 오히려 재앙이 왔다는 것입니다. 고통 당하는 자를 돕고, 가난한 자를 구제해 주는 삶을 살았는데 복은커녕 화가 찾아 왔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29절) 이리의 울부짖는 소리는 어미를 잃고 배고픔에 지쳐 울어대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습니다. 처절한 울음소리입니다. 타조의 울음소리는 쉰 듯한 음성으로 애절한 느 낌을 자아냅니다. 모두 메아리 없는 외로운 울음소리입니다. 자신의 애 절한 울음소리를 이렇게 딱 표현합니다. 우리의 지금의 처지와 딱 맞아 떨어집니다. 수금은 원래 기쁨을 표현하고 흥을 돋우는 악입니다.
그런데 그 수금의 소리가 오히려 애곡성(哀哭聲)-슬픈 울음소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렇지요. 기분에 따라, 처지에 따라 듣기 좋은 꽃노래가 슬픈 장송곡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는, 사람들의 재잘거리고 떠드는 소리도 걱정 없는 사람들의 사치처럼 들려집니다. 이렇듯 오늘 본문은 특별히 비통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을 보세요. 욥은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는 무신경한 별 종이 아닙니다. 고통의 무게를 영웅적으로 이겨내는 철인도 아닙니다. 욥기서 전체를 잘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욥은 하나님께 반항도 하고 질문도 합니다. 질문, 주장, 변론, 간청, 탄식 독백 이런 것들이 막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중요합니다. 질문, 주장, 변론, 간청, 탄식, 독백, 원망, 분 노, 이런 아픔 끝에 여호와 경외를 잃어버린다면, 불행을 불행으로 마감 하는 사람입니다. 사단이 원하고 고소한 대로 단물만 빨아먹는 믿음을 가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고통의 끝을 여호와 경외로 바꾸는 사람 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행복의 싹을 키웁니다. 그 과정과 그 끝이 삶의 행복을 더 진하게 해 줍니다. 욥은 이런 고난 끝에 여호와 경외를 잃지 않아 현실적인 축복도 받습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 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42:10) 그러나 이 구절을 잃는 그리스도인들은 '갑절'에만 신경을 집중합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삶들의 관심은 욥이 마지막에 회 복한 '재산의 갑절'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통과한 욥의 믿음의 승리를 우리는 같이 축하하고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이미 욥은 고통 중에 고난을 대면하는 치열한 자세와 실천 에서 벌서 승리의 싹을 키웠습니다.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 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라고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생노병사 희노애락, 사고와 불행, 재앙과 재난을 다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처럼 한 번 믿음으로 이겨본 사람은 고통을 통과하는 방 법을 압니다. 고난을 통과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조절하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순간뿐만 아니라, 슬픔과 노여 움의 순간에도 희망의 무지개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여호와 경외를 어떤 경우에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재료로 불행의 옷을 짤 것인가, 행복의 옷을 지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믿음의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잘 견뎌 배나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고통의 순간에도 행복한 시절과 똑같이 여호와 경외를 결론적으로 도출해 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위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맑은 날과 흐 린 날을 관통해 행복을 캐낸 것, 이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배나 되는 재산은 덤으로 따라 온 것입니다. 자세가 바르면 풍요와 평 화는 덤으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 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같은 맥락입니다. 구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도 의를 추구하고 믿음을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여호와 경외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전천후 행복을 낳는 비결입니다. 이런 행복을 캐내는 여러분에게 <타고르의 시>를 드 립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위험에 처하여도 겁을 내지 말게 하옵소서.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그통에 처하여서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인생의 싸움터에서 동조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인생과 싸워서 이길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근심스러운 공포 속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내가 싸워서 이길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너무 너무 내가 기쁘고 성공할 때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게 마옵시고 매일 매일 내가 슬프고 괴롭고 남이 나를 핍박하고 내가 배고플 때 하나님이 내 손목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욥은 의롭게 산 자였기에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딜레마를 만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단련의 시간입니다. 따뜻하고 맑은 날의 믿음이 아닙니다. 폭풍 치는 험한 날의 믿음입니다. 순풍에 돛단 잔잔한 날의 믿음이 아닙니다. 파도치는 험한 날의 믿음입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믿고 계속 승승장구 축복의 지대로 만 살아왔다고' 그러나 기억하세요. 그것은 자랑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 은 믿음의 분량이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그렇게 축복의 지대에만 두시는 겁니다. 예수 믿고 부자로만 살았다면,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부자가 아니면 주님께 삿대질을 하고 돌아설 정도의 믿음 밖에 되지 않으니 안전의 지대에 그냥 두시는 겁니다. 사실 이것은 축복이라기보다 수치입니다. 험한 세상에 나가 꿋꿋이 풍상과 역경을 헤 치며 부모의 유업을 이어 가는 힘찬 아들의 모습이 아닙니다. 부모의 보 호막 아래만 안주하는 걱정스러운 자녀인 것입니다. 성경에 어디 인생의 굴곡이 전혀 없는 믿음의 사람이 있습니까 인생의 굴곡이 있을 때마다 전부 저주받은 것입니까 이제 욥은 이런 시험대에 올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련의 시기에도 믿음은 지속될 것인가 고난의 시기에도 믿음은 꽃을 피울 것인가 이제 바야흐로 검증 받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일부러 고난을 주시지는 않 습니다. 욥은 하나님 경외의 정도를 검증 받기 위해 시련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욥처럼 엄청나고 특이한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대개 인간으로서 수 천년 동안 단골 품목처 럼 있었던 필연적인 고통들입니다. 생노병사, 희노애락은 인간으로서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한 부닥칠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단지 지금, 바로 나에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특별한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암은 현대인들에게 만연한 것입니다. 교통사고, 가스사고, 화재사고, 붕 괴사고, 폭발사고, 도난사고, 폭행사고 이런 갑작스런 사고는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언제나 손쉽게 닥쳐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부도, 파산, 경제적 몰락 이것도 경제 활동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광범하게 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이런 모든 불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비껴 갑니까 면 제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암으로 죽습니다. 그리스도인 실업 가도 부도를 당합니다. 파산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이라고 경제위기 무 풍지대에다 실어 줍니까 이것 잘 아셔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아주 천박해 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보호는 끝이 없습니다. 그의 도우심의 손길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구출해 주시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 까 우리 인간들이 이 땅에 발 딛고 살면서 당하는 고통의 순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일어서는 것,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순전히 믿음의 문제입니다. 여기에 고통을 고통으로만 체험하고 끝내는 불행한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고통을 행복의 씨앗으로 느끼고 바꾸는 행복한 인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대개 두 가지로 옵니다. 소유물과 몸입니다. 물론 소유 물은 재산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으며, 재능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욥기에 보니, 사단이 하나님께 욥을 쳐보라고 합니다. 그 첫 번째 가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입니다. 두 번째는 '뼈와 살을 치소서'라고 합니다. 그대로 욥은 재산과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또 몸에는 천형의 병이 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욥의 고통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욥은 이 이중적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 대개 고통의 순간 인간은 불행을 느낍니다. 고통이 오면 하나님 원 망과 범죄의 충동에도 빠져들게 됩니다. 그러나 대부분 믿음의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서 겸허(겸손), 간절, 정화, 의지, 단련, 희망을 진하게 경험 하게 됩니다. 반대로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은 오만, 방탕, 오염, 자 존감, 쾌락에 빠져 있기 쉽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참된 행복은 고 통을 통해서 옵니다 고난을 당하면 겸손해 지는 것 경험하시지요 아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 별로 없구나 자신의 무력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콧대가 좀 낮아지는 것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좀 겸손해 졌어요. 또 어려우면 간절해집니다. 요즈음은 모두가 종교인입니다. 모두가 기도하는 마음들입니다. 사람 이 간절해지면 그때는 인생을 느끼는 때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는 '고통의 깊이는 진실의 깊이로 향하는 유 일한 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인내한 고통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를 깊은 물로 이끄시는 것은 물에 빠뜨리기 위함이 아니라 깨끗하게 하 기 위함이다"고 말했습니다. 삼저 호황, 경제가 잘 나갈 때는, 우리가 얼마나 쾌락과 안정과 욕망과 오만에 들떠 있었습니까 이 찌꺼기와 불순물을 이제 우리 주님은 깨 끗이 씻어 주시기 위해, 생명의 강가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보세요. 욥이 바로 그렇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23:10) 정화와 단련입니다. 금을 제련해 내듯 불순물 찌꺼기는 다 걸러 내고 정제된 금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 나이다"(욥42:6) 직접 경험입니다. 고통은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게 합니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항상 성경 말씀은 "-하더라"(They say)입니다. 그러나 고통을 겪는 순간은 "나의 고백"(I say)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고통은 하나님께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이 바 로 인간이 종교적인 모습으로 돌아가는 순간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대를 통과하게 되니 더 겸손해 집니다. 더 간절해집니다. 더 불순물을 씻어내고 맑게 갠 하늘을 보게 됩니다. 전에는 쾌락도 보고, 욕망도 보고, 재물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선명하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단순하고 선명하게 집중적으로 하나님을 바 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서 벌써 축복입니다.
"행복의 조건"(THE CONQUEST OF HAPPYNESS)이라는 책으로 럿셀은 행복을 논했지만, 우리 주님은 마태복음 산상수훈에서 역설적인 행복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 그 자체로서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애통하는 자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윤동주 시인은 이 '팔복(八福)'으로 시를 지었습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을 여덟 번 반복한 다음 마지막에는 '영원히 슬퍼할 것이요' 했습니다. 암울한 조국의 운명 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슬픔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사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애통하는 자는 그 자체로서 행복한 것이니 영원히 행복을 누리라는 말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축복 같이 들립니다. 일차적인 행복의 조건은 물질입니다. 그 다음 행복의 조건은 환경입니다. 또 다른 행복의 조건은 안락입니다. 이것 무시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물질의 동물이요, 환경의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 기에만 머문다면 우리의 행복은 언제나 산산조각이 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언제나 파도처럼 춤을 출 것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불행입니다. 이제 고통의 순간을 통과하는 욥의 모습을 한 번 보십시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같습니다. "이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날이 나를 잡음이라(16절)" '내 영혼이 내 속에서부터 쏟아져 나오니'라는 뜻입니다. 너무 괴롭다는 표현입니다. "밤이 되면 내 뼈가 쑤시니"(17절) "아픔이 쉬지 아니하는구나" 밤에도 걱정과 고통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밤이나 낮이나 의 식이 있는 동안은 고통 중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로 티끌과 재같게 하셨구 나"(19절) 진흙이나 티끌, 재는 모두 파괴되고 낮은 곳으로 쳐 박히는 모습입니다. 부르짖어도 대답이 없으시고, 판결과 면회를 청하는 마음으 로 기다려도 응답이 없는 하나님의 모습을 애절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고생의 날 보내는 자를 위하여 내가 울지 아니하였는가 빈궁한 자를 위하여 내 마음에 근심하지 아니하였는가 내가 복을 바랐더니 화가 왔고 광명을 기다렸더니 흑암이 왔구나"(25-26절)
악을 행하지 않고 오히 려 바르고 힘쓰며 살았는 데 오히려 재앙이 왔다는 것입니다. 고통 당하는 자를 돕고, 가난한 자를 구제해 주는 삶을 살았는데 복은커녕 화가 찾아 왔다는 말입니다. "나는 이리의 형제요 타조의 벗이로구나"(29절) 이리의 울부짖는 소리는 어미를 잃고 배고픔에 지쳐 울어대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같습니다. 처절한 울음소리입니다. 타조의 울음소리는 쉰 듯한 음성으로 애절한 느 낌을 자아냅니다. 모두 메아리 없는 외로운 울음소리입니다. 자신의 애 절한 울음소리를 이렇게 딱 표현합니다. 우리의 지금의 처지와 딱 맞아 떨어집니다. 수금은 원래 기쁨을 표현하고 흥을 돋우는 악입니다.
그런데 그 수금의 소리가 오히려 애곡성(哀哭聲)-슬픈 울음소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렇지요. 기분에 따라, 처지에 따라 듣기 좋은 꽃노래가 슬픈 장송곡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는, 사람들의 재잘거리고 떠드는 소리도 걱정 없는 사람들의 사치처럼 들려집니다. 이렇듯 오늘 본문은 특별히 비통하고 우울한 분위기로 채색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욥을 보세요. 욥은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하는 무신경한 별 종이 아닙니다. 고통의 무게를 영웅적으로 이겨내는 철인도 아닙니다. 욥기서 전체를 잘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욥은 하나님께 반항도 하고 질문도 합니다. 질문, 주장, 변론, 간청, 탄식 독백 이런 것들이 막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끝이 중요합니다. 질문, 주장, 변론, 간청, 탄식, 독백, 원망, 분 노, 이런 아픔 끝에 여호와 경외를 잃어버린다면, 불행을 불행으로 마감 하는 사람입니다. 사단이 원하고 고소한 대로 단물만 빨아먹는 믿음을 가진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고통의 끝을 여호와 경외로 바꾸는 사람 은 엄청난 고통 속에서 행복의 싹을 키웁니다. 그 과정과 그 끝이 삶의 행복을 더 진하게 해 줍니다. 욥은 이런 고난 끝에 여호와 경외를 잃지 않아 현실적인 축복도 받습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 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욥42:10) 그러나 이 구절을 잃는 그리스도인들은 '갑절'에만 신경을 집중합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삶들의 관심은 욥이 마지막에 회 복한 '재산의 갑절'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고통을 통과한 욥의 믿음의 승리를 우리는 같이 축하하고 부러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의 승리입니다. 이미 욥은 고통 중에 고난을 대면하는 치열한 자세와 실천 에서 벌서 승리의 싹을 키웠습니다. 행복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 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16:33)라고 했습니다.
인간으로서 당할 수 있는 생노병사 희노애락, 사고와 불행, 재앙과 재난을 다 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욥처럼 한 번 믿음으로 이겨본 사람은 고통을 통과하는 방 법을 압니다. 고난을 통과하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조절하는 방법을 발견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순간뿐만 아니라, 슬픔과 노여 움의 순간에도 희망의 무지개를 잃지 않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여호와 경외를 어떤 경우에도 놓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고통이란 재료로 불행의 옷을 짤 것인가, 행복의 옷을 지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믿음의 행위에 달려 있습니다. 욥은 고난을 잘 견뎌 배나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고통의 순간에도 행복한 시절과 똑같이 여호와 경외를 결론적으로 도출해 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위대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맑은 날과 흐 린 날을 관통해 행복을 캐낸 것, 이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배나 되는 재산은 덤으로 따라 온 것입니다. 자세가 바르면 풍요와 평 화는 덤으로 따라 오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 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같은 맥락입니다. 구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도 의를 추구하고 믿음을 추구하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여호와 경외를 잃지 않는 것이 바로 전천후 행복을 낳는 비결입니다. 이런 행복을 캐내는 여러분에게 <타고르의 시>를 드 립니다.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게 마옵시고 위험에 처하여도 겁을 내지 말게 하옵소서.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그통에 처하여서도 그 고통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인생의 싸움터에서 동조자를 찾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인생과 싸워서 이길 스스로의 힘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근심스러운 공포 속에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게 하옵시고 내가 싸워서 이길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게 하옵소서 겁쟁이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도와 주십시오 너무 너무 내가 기쁘고 성공할 때만 하나님이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게 마옵시고 매일 매일 내가 슬프고 괴롭고 남이 나를 핍박하고 내가 배고플 때 하나님이 내 손목을 꼭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믿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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