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요나 (욘1:1-10)
본문
우리는 이번 주일부터 5시간에 걸쳐서 요나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요나서를 살펴보는 가운데 현재 나 자신의 신앙의 상태를 살펴보고 이 시점에서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합니다. 먼저 우리는 요나서를 살펴보기 전에 요나라는 선지자가 어떤 사람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요나는 어떤 인물입니까 열왕기하 14장 25절에 보면,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로서 북이스라엘 가드헤벨 출신의 선지자였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의 전승에 의하면 그는 엘리야가 살려 준 사렙다 과부의 아들이었으며(왕상17:17-24), 엘리사가 예후 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붓기 위해 보냈던 그 소년(왕하9:1-6)이 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대에 활동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면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당시 시대적인 상황은 어떠했느 냐 결론적으로 말씀을 드리자면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은 어쩌면 오늘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시대적인 상황 과 너무나도 닮았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로보암 2세는 40여 년간 북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입니다. 이것은 그가 북이스라엘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통치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옛 국경을 회복했던 왕이요, 잃어버린 목초지와 평원과 무역로의 통제권을 회복시킴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번창하게 만들었던 왕입니다. 따라서 당시 북이스라엘은 건국이래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새로 번창한 부는 사치를 일삼고 가난한 자들을 억압한 몇몇 부 자들에게 집중되는 빈익빈부익부의 현상이 심화되었던 때였습니다. 그런 반면에 국외적으로는 시리아가 내적으로 상당히 약화되었지 만, 앗수르는 점점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주변국 들은 앗수르가 강성해지는 것을 상당히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많 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사치와 죄악이 만연한 북이스라엘이 결 국은 강력한 앗수르의 군대 앞에 굴복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던 그러한 때였습니다. 그리고 그 앗수르의 수도가 바로 요나서 에서 등장하는 느니웨입니다. 그러니까 요나가 활동하던 시대의 북이스라엘은 안으로는 건국이 래 최고의 번성을 누렸지만 백성들의 영적인 상황은 무디어지고 있 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앗수르의 힘이 점점 강성해지던 때였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 앞에서 하나님은 니느웨를 향한 선교 적 사명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이 요나서를 살펴보아야 합니까 거기에는 나 름대로의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요나서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 요나서가 오늘날의 교회상을 너무나도 잘 조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도피하 고 있는 현대의 교회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오늘 의 교회를 향해서 요나서는 선교를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을 은폐 하기 위해서 잠을 청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상을 우리는 요나서를 공부하면서 재조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오늘날 모든 문제가 남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현대인들의 성도상을 이 요나서가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우리들 주위에 일어나는 사회의 문제를 남에게로 돌 려버리려는 잘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나서를 공부 하면서 문자 그대로 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 나 자신의 어둡고 부끄러운 자화상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내 자신의 문제, 가정의 문제, 이 사 회의 모든 문제가 다 내 탓이라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 이래로 오늘만큼 이 사회가 경제적 으로 어렵고, 도덕적으로 문란했던 때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이 문제들 앞에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사회가 이렇게 어렵고 문 란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이라고 저 스스로 채찍질을 해 봅니다.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로 이 사회가 도덕적으로 망각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교회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우리는 현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공범이 아니라 주범이라는 책임의식이 있 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올바르지 못한 문제들 앞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문제의 인식을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로마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기독교가 국교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0.9%의 기독교인으로 기독교가 국교화 되었 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물질에 1%의 소금만 있어도 결코 오 염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 나라에는 25%의 소 금이 있지만 사회는 더 부패되었습니다. 날로 더 오염되고 있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졸한 사건들이 얼마나 일어나고 있 습니까 그리고 부끄러운 것은 국가적인 대형 비리 사건들 앞에는 기독교인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정말로 가슴 아픈 것은 그렇게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그들의 삶에 감격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기 때문에 눈가에 눈물 이 없습니다. 그저 먼지만 떨어질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감격해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감격에 겨워 밤잠을 설쳐본 기억이 여러분들에게 있습 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눈가에는 눈물 대신에 먼지가 떨어지고 있 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요나서를 살펴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 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가식없이, 꾸밈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 야 합니다. 문제는 요놈의 '나' 때문입니다.
요나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1장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께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열 려진 교통의 통로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열린 귀와 마음이 있 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시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 들에게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과 귀 를 가지고 있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고 자 하시는 시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과 귀를 소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요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말씀은 1장2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시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중요한 세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께서 요나에게 주신 선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 렇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부정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 나야 합니다. 소극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안일한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머 물러 있는 사람은 이 선교의 명령 앞에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은 전적인 복종이 요구됩니다. 거기에는 반문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 셨으니 일어나야만 합니다.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가라"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 은 우리의 뜻과는 정반대의 장소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아름답고 편한 곳이 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 은 아골 골짜기로 나를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은 그것이 아닌데, 나는 그곳으로 가기가 싫은데 하나님 께서는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안됩니다. 그곳만은 못 가겠습니다"라고 항변하시겠습니 까 내가 그렇게 항변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 신 곳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가야만 합니다. 오늘 교회의 잘못된 타성 중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 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한 사람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외치라"고 하십니다. "외치라" 여러분, 하나님 께서 외치라고 하신 것은 내 철학을 외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철학과 사상은 아무도 구원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으로는 한 사람의 영혼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우리는 다만 주님이 주신 말씀만을 외쳐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외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는데 내가 무엇을 외칠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기 때문에 엉뚱한 소리를 외쳐댑니다. 받은 말씀이 없기에 자기 소리만 질러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내 가정이 시끄러운 겁니다. 내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 겁니다. 이 사회가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주께로부터 받은바 말씀이 있습 니까 오늘 이 시간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다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셨 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던 요나, 그러나 요나는 그 하나님 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본문 3절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 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 더라" 그러나,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낮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 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여러분, 우리가 가만히 보면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언제나 "그러나"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도 봉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도 전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상황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도 사랑하고 싶 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자존심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가장 싫어하고 어려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소위 자기 자신의 신념이 굳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러나"라는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내 철 학을, 내 경험을, 내 주관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자기 사상의 벽을 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쓰시기에 즐겨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 니까 "주님, 말씀만 하십시오. 저는 언제든지 제 생각을 바꿀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은 두 종류의 사람 중 어느 쪽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찾아오셔서 "일어나라. 가라. 내가 너를 위 한 계획을 갖고 있다.
너를 사용하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렵니까 요나처럼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내가 꼭 그 일을 해 야만 합니까아무도 내 사상의 영역을, 내 사상의 벽을 넘볼 수가 없다. 나는 내 경험을 통해서 나의 인생과 종교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라고 대답하 시렵니까 아니면,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실 때는 언제든지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내 생각도, 내 주관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당신의 말씀이라면 내 생각도 바꾸겠고, 모든 것을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시겠습 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의 주관과 경험과 사상을 다 포기 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려는 삶의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앞에 "아멘"이라는 고백만 있어야지 "그러나"라는 것이 있었어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찾으시고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릇, 제자된 제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 시스로 가고 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배 삯을 지불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요 나, 그 말씀을 외면하고 도망가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 까 본문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다에 바람을 일으키셔서 큰 태풍 이 휘몰아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탄 배는 깨어질 지경이 되 었다고 했습니다. 큰 풍랑 앞에서 이리 밀려가고 저리 밀려가면서도 살기 위해 몸 부림치는 뱃사람들, 그 처절한 아우성 속에서도 요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지금 뱃사공들은 겁에 질려 저마다 저희의 신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있는 짐을 바다에 던집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큰 풍랑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허 덕이고 있는데 요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배 밑창에 내려가 깊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배가 깨어질 정도로 큰 태풍을 만나 사람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겁에 질려 있는데도 불구하 고 요나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요나의 이 한심한 모습을 보고 선장은 "이 판국에도 잠을 잘 수가 있느냐"고 야단을 칩니다. 정 말로 이 판국에 잠이 오는가 양심이 괴로워서 어떻게 잠이 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죄는 사람의 영혼을 아무런 감각이 없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보십시오. 지금 배 위에서는 태 풍 때문에 모두가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발버둥을 치는데 요나는 양심을 마비시켜 버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주일날 예배 시간에 들려오는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들은 그 말씀을 내 삶 속에 적용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면 그 사람은 예배를 한바탕의 꿈 정도로 생각한 것이요, 자장 가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니고, 자장가가 아니라 면 그 사람은 말씀대로 행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그 말씀에 따 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자장가를 불 러야 합니까 아니면 나팔을 불어야 합니까 나팔을 불어야 한다 면, 교회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말씀 앞에 왜 나는 아무런 반응 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말씀 앞에 반응이 있고, 말씀 앞에 깨달음 이 있고, 말씀 앞에 행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지금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성도간에, 이웃과 이웃간에 배타적이고 편협된 교제가 이루 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나가 이렇게 잠을 자게된 것은 그가 니느웨 성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싫어서였습니다. 그래서 도망하다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이 싫었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시스로 도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사귀는데 가려가면서 사귀지는 않습니까 전도하는 것도 자기의 입맛 에 맛도록 구별해서 전도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만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공평한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과 교제도 배타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배타적이고 편협된 관계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어쩌면 이 요나처럼 우리의 영혼 이 잠을 자고 있지는 않는지요 내 이웃 가운데 누군가가 복음을 받아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함에도 그를 향한 내 마음이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나는 지금 잠 을 자고 있는 겁니다. 내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주를 영접하지 않 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나는 지금 깊은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을 꼭 다물고 있다면 나는 지금 심각한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요나처럼 내 영혼이 잠을 자고 있지는 않습니 까 잠에서 깨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현재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갖기를 바랍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잃 을 뻔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덤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 로 서서 살아가면 나로 말미암아 나의 가정이 덤으로 행복해집니다. 나의 이웃이 행복해집니다. 나 때문에 그들은 덤으로 살아갑니다. 로마는 0.9%의 기독교인들로 말미암아 99.1%의 인생들이 덤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그 한 사람 때문에 롯과 그의 가족이 구원 을 받았습니다. 노아, 그 한 사람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 았습니다. 그러나 사울, 그 한 사람 때문에 그의 자녀들이 전쟁에서 몰살당 했습니다. 솔로몬, 그 한 사람의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 으로 갈라졌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영혼의 깊은 잠을 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아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영혼의 잠에서 깨어 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 로 응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덤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약 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도무지 그것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 없습니다. 니까 우리도 요나처럼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깊은 잠에서,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처럼 오늘 내 영혼이 잠을 자고 있지는 않 습니까 내 이웃 가운데 누군가가, 내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주를 영접하지 않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 기는 마음도 없고, 그를 바라보면서 아무런 영적인 감각이 없다면 나는 지금 깊은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생의 말씀을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을 꼭 다물고 있다면 나는 지금 심각한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11월 21일, 70명 돌파를 위한 전교인 이삭줍기 운동 을 시작합니다. 2000년을 앞둔 마지막 영적 대운동 앞에서 여러분 은 요나처럼 곤히 주무시겠습니까 묻습니다. "하나님, 일어나겠습니다. 가겠습니다. 그리고 외치 겠습니다"라고 마음으로 결심하시고 다짐하시는 분은 두 손을 높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 "하나님, 새 천년을 앞두고 우리 교회가 벌이는 영적 대 운동, 11 월 21일 70명 돌파를 위한 전교인 이삭줍기 운동에 이 한 몸 당신 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 의 헌신과 영적 각성이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고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요나서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 요나서가 오늘날의 교회상을 너무나도 잘 조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나서를 통해서 주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도피하 고 있는 현대의 교회상을 다시 한 번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오늘 의 교회를 향해서 요나서는 선교를 외칩니다. 주님의 말씀을 은폐 하기 위해서 잠을 청하고 있는 오늘의 교회상을 우리는 요나서를 공부하면서 재조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오늘날 모든 문제가 남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현대인들의 성도상을 이 요나서가 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현대인들은 우리들 주위에 일어나는 사회의 문제를 남에게로 돌 려버리려는 잘못된 습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나서를 공부 하면서 문자 그대로 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피하여 도망하고 있는 나 자신의 어둡고 부끄러운 자화상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내 자신의 문제, 가정의 문제, 이 사 회의 모든 문제가 다 내 탓이라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역사 이래로 오늘만큼 이 사회가 경제적 으로 어렵고, 도덕적으로 문란했던 때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하나 이 문제들 앞에서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오늘 이 사회가 이렇게 어렵고 문 란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이라고 저 스스로 채찍질을 해 봅니다. 입에 담기 부끄러울 정도로 이 사회가 도덕적으로 망각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교회의 책임이라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우리는 현 사회의 문제에 대해서 공범이 아니라 주범이라는 책임의식이 있 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벌어지는 올바르지 못한 문제들 앞에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습니다. 나 때문입니다. 문제의 인식을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보십시오. 로마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서 기독교가 국교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는 0.9%의 기독교인으로 기독교가 국교화 되었 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모든 물질에 1%의 소금만 있어도 결코 오 염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 나라에는 25%의 소 금이 있지만 사회는 더 부패되었습니다. 날로 더 오염되고 있습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치졸한 사건들이 얼마나 일어나고 있 습니까 그리고 부끄러운 것은 국가적인 대형 비리 사건들 앞에는 기독교인들이 약방의 감초처럼 끼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회를 하면서 정말로 가슴 아픈 것은 그렇게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 고 그들의 삶에 감격이 없습니다. 감격이 없기 때문에 눈가에 눈물 이 없습니다. 그저 먼지만 떨어질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은 나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감격해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하면서 그 감격에 겨워 밤잠을 설쳐본 기억이 여러분들에게 있습 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눈가에는 눈물 대신에 먼지가 떨어지고 있 지는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요나서를 살펴보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 자신 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가식없이, 꾸밈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아 야 합니다. 문제는 요놈의 '나' 때문입니다.
요나서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1장1절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께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요나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열 려진 교통의 통로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열린 귀와 마음이 있 었다는 것입니다. 저도 이 시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은 저와 여러분 들에게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과 귀 를 가지고 있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고 자 하시는 시대적인 하나님의 계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열린 마음과 귀를 소유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요나에게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말씀은 1장2절에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 주시겠습니다.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보십시오. 여기에 보면, 중요한 세 단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어나", "가서", "외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께서 요나에게 주신 선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 렇습니다.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부정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 나야 합니다. 소극적인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안일한 삶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 머 물러 있는 사람은 이 선교의 명령 앞에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은 전적인 복종이 요구됩니다. 거기에는 반문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라고 하 셨으니 일어나야만 합니다.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이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가라"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곳 은 우리의 뜻과는 정반대의 장소가 될 수도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생각대로라면 아름답고 편한 곳이 되기를 바라지만 하나님 은 아골 골짜기로 나를 보내실 수도 있습니다. 내 생각은 그것이 아닌데, 나는 그곳으로 가기가 싫은데 하나님 께서는 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안됩니다. 그곳만은 못 가겠습니다"라고 항변하시겠습니 까 내가 그렇게 항변하고 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 신 곳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가야만 합니다. 오늘 교회의 잘못된 타성 중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흔 아홉 마리의 양 도 중요하지만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이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소명은 한 사람의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찾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외치라"고 하십니다. "외치라" 여러분, 하나님 께서 외치라고 하신 것은 내 철학을 외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철학과 사상은 아무도 구원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논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할 지라도 그것으로는 한 사람의 영혼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외쳐야 합니까 우리는 다만 주님이 주신 말씀만을 외쳐야 합니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외치기 위해서는 먼저 주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는데 내가 무엇을 외칠 것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없기 때문에 엉뚱한 소리를 외쳐댑니다. 받은 말씀이 없기에 자기 소리만 질러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내 가정이 시끄러운 겁니다. 내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는 겁니다. 이 사회가 폭풍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주께로부터 받은바 말씀이 있습 니까 오늘 이 시간 사랑하는 주님의 음성을 다 들을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일어나라", "가라", "외치라" 여호와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셨 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였던 요나, 그러나 요나는 그 하나님 의 말씀 앞에서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본문 3절을 여러분께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 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선가를 주고 배에 올랐 더라" 그러나,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낮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 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여러분, 우리가 가만히 보면 신앙 생활을 함에 있어서 언제나 "그러나"가 문제였습니다. "하나님, 나도 봉사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도 전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상황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나도 사랑하고 싶 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내 자존심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가장 싫어하고 어려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소위 자기 자신의 신념이 굳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그러나"라는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내 철 학을, 내 경험을, 내 주관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자기 사상의 벽을 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지 않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쓰시기에 즐겨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 니까 "주님, 말씀만 하십시오. 저는 언제든지 제 생각을 바꿀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은 두 종류의 사람 중 어느 쪽에 해당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찾아오셔서 "일어나라. 가라. 내가 너를 위 한 계획을 갖고 있다.
너를 사용하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실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렵니까 요나처럼 "하나님,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내가 꼭 그 일을 해 야만 합니까아무도 내 사상의 영역을, 내 사상의 벽을 넘볼 수가 없다. 나는 내 경험을 통해서 나의 인생과 종교에 대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아무도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라고 대답하 시렵니까 아니면,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이 원하실 때는 언제든지 쓰임 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내 생각도, 내 주관도 바꿀 수가 있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당신의 말씀이라면 내 생각도 바꾸겠고, 모든 것을 포기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시겠습 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자기의 주관과 경험과 사상을 다 포기 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려는 삶의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 앞에 "아멘"이라는 고백만 있어야지 "그러나"라는 것이 있었어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찾으시고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그릇, 제자된 제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이제 요나는 하나님의 낮을 피하여 니느웨로 가지 아니하고, 다 시스로 가고 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나 배 삯을 지불하고 다른 사람과 함께 배를 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요 나, 그 말씀을 외면하고 도망가는 요나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 까 본문 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다에 바람을 일으키셔서 큰 태풍 이 휘몰아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요나가 탄 배는 깨어질 지경이 되 었다고 했습니다. 큰 풍랑 앞에서 이리 밀려가고 저리 밀려가면서도 살기 위해 몸 부림치는 뱃사람들, 그 처절한 아우성 속에서도 요나는 지금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지금 뱃사공들은 겁에 질려 저마다 저희의 신에게 부르짖고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있는 짐을 바다에 던집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큰 풍랑 앞에서 어찌할 줄을 몰라 허 덕이고 있는데 요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배 밑창에 내려가 깊은 잠을 자고 있습니다. 배가 깨어질 정도로 큰 태풍을 만나 사람들은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서 겁에 질려 있는데도 불구하 고 요나는 잠을 자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럴 수가 있는 겁니까 요나의 이 한심한 모습을 보고 선장은 "이 판국에도 잠을 잘 수가 있느냐"고 야단을 칩니다. 정 말로 이 판국에 잠이 오는가 양심이 괴로워서 어떻게 잠이 들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 죄는 사람의 영혼을 아무런 감각이 없도록 만듭니다. 우리의 양심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보십시오. 지금 배 위에서는 태 풍 때문에 모두가 사느냐, 죽느냐의 기로에서 발버둥을 치는데 요나는 양심을 마비시켜 버리고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여러분들이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은 주일날 예배 시간에 들려오는 설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들은 그 말씀을 내 삶 속에 적용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면 그 사람은 예배를 한바탕의 꿈 정도로 생각한 것이요, 자장 가로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 아니고, 자장가가 아니라 면 그 사람은 말씀대로 행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갖고 그 말씀에 따 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자장가를 불 러야 합니까 아니면 나팔을 불어야 합니까 나팔을 불어야 한다 면, 교회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말씀 앞에 왜 나는 아무런 반응 을 하지 않는 것입니까 말씀 앞에 반응이 있고, 말씀 앞에 깨달음 이 있고, 말씀 앞에 행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 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내가 지금 영적으로 잠들어 있는지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성도간에, 이웃과 이웃간에 배타적이고 편협된 교제가 이루 어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나가 이렇게 잠을 자게된 것은 그가 니느웨 성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싫어서였습니다. 그래서 도망하다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소식이 전해지는 것이 싫었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다시스로 도망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람을 사귀는데 가려가면서 사귀지는 않습니까 전도하는 것도 자기의 입맛 에 맛도록 구별해서 전도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은 만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차별하시는 사랑이 아니라, 공평한 사랑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신앙과 교제도 배타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배타적이고 편협된 관계는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어쩌면 이 요나처럼 우리의 영혼 이 잠을 자고 있지는 않는지요 내 이웃 가운데 누군가가 복음을 받아들지 않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함에도 그를 향한 내 마음이 아무런 감각이 없다면 나는 지금 잠 을 자고 있는 겁니다. 내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주를 영접하지 않 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나는 지금 깊은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을 꼭 다물고 있다면 나는 지금 심각한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다시 묻습니다. 요나처럼 내 영혼이 잠을 자고 있지는 않습니 까 잠에서 깨어나시기를 바랍니다. 현재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문제에 대하여 책임의식을 갖기를 바랍니다. 요나,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잃 을 뻔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나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덤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바 로 서서 살아가면 나로 말미암아 나의 가정이 덤으로 행복해집니다. 나의 이웃이 행복해집니다. 나 때문에 그들은 덤으로 살아갑니다. 로마는 0.9%의 기독교인들로 말미암아 99.1%의 인생들이 덤으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 그 한 사람 때문에 롯과 그의 가족이 구원 을 받았습니다. 노아, 그 한 사람 때문에 그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 았습니다. 그러나 사울, 그 한 사람 때문에 그의 자녀들이 전쟁에서 몰살당 했습니다. 솔로몬, 그 한 사람의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이 남과 북 으로 갈라졌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영혼의 깊은 잠을 자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아 버리지는 않았습니까 영혼의 잠에서 깨어 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아멘"으 로 응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덤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으로부터 약 속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없습니다. 도무지 그것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감격과 기쁨의 눈물이 없습니다. 니까 우리도 요나처럼 잠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깊은 잠에서,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요나처럼 오늘 내 영혼이 잠을 자고 있지는 않 습니까 내 이웃 가운데 누군가가, 내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주를 영접하지 않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 기는 마음도 없고, 그를 바라보면서 아무런 영적인 감각이 없다면 나는 지금 깊은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생의 말씀을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 입을 꼭 다물고 있다면 나는 지금 심각한 영적인 잠을 자고 있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11월 21일, 70명 돌파를 위한 전교인 이삭줍기 운동 을 시작합니다. 2000년을 앞둔 마지막 영적 대운동 앞에서 여러분 은 요나처럼 곤히 주무시겠습니까 묻습니다. "하나님, 일어나겠습니다. 가겠습니다. 그리고 외치 겠습니다"라고 마음으로 결심하시고 다짐하시는 분은 두 손을 높이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 "하나님, 새 천년을 앞두고 우리 교회가 벌이는 영적 대 운동, 11 월 21일 70명 돌파를 위한 전교인 이삭줍기 운동에 이 한 몸 당신 께 바치기를 원합니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기를 원합니다. 나 의 헌신과 영적 각성이 우리 교회를 부흥시키고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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