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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겜 언약 (수24:1-13)

본문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은 24장의 말씀을 생각하고자 합니다. 지난 주일에 생각했던 23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당부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길로 가지 말고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에게 백성의 사활이 달려 있기 때문에 먼저 지도자들을 불러서 이러한 당부를 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24장에서 여호수아는 모든 백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장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호수아는 온 백성을 하나님 앞으로 불러모습니다
(1). 모인 백성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구원사를 되새깁니다. 아브라함의 선택에서부터 가나안 땅에서 안식을 누리는 당시의 상황까지를 약술합니다. 2-13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우상과 여호와 중에서 선택을 촉구합니다. 백성들은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백성으로 더불어 세겜에서 언약을 세웁니다. 14-28이 이러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29-33절은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 죽는 것과 요셉의 뼈가 세겜에 장사된 사건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는 이렇게 하여 끝을 맺습니다. 그러면 먼저 이스라엘이 모인 장소부터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이스라엘이 모인 장소가 세겜이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세겜에 모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약궤는 실로에 있었습니다. 언약궤가 실로에 있었다면(수18:1,삼상1:3) 그 곳에 모일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세겜에 모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를 32절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32절은 요셉의 뼈가 세겜에 장사되었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겜은 '야곱이 세겜의 아비 하몰의 자손에게 금 일백 개를 주고 산 땅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가나안 땅을 한 평도 얻은 것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무덤까지도 돈주고 사야했었으니 땅은 다만 약속으로만 받았을 뿐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 요셉은 그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자기의 시체를 가나안 땅에 장사하도록 유언을 했었는데 그대로 이루어져서 요셉이 자기 자손의 기업이 된 세겜에 묻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주마고 약속하시던 대로 이루셨고 그것을 믿었던 요셉은 죽어서라도 그 땅에 묻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겜에 모이게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겜은 약속이 믿던 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의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앞으로도 하나님은 약속하시던 대로 이루실 하나님이시니 그 하나님을 신실히 믿도록 하기 위해서 세겜에 모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1절 끝을 보면 이 세겜에 아마도 하나님이 나타나셨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고 한 것이 하나님이 나타나셨음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세겜에는 법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여호수아 자신 앞에서 나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오는 것으로 말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옛적에 임하셨던 것처럼 임하여 오셨던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임하여 오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서 이 설교를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혹시 지금도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 신으로 임재하시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고 그 안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고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우리가 사는 것이 힘이 들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타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도 그것은 우리의 욕망입니다. 내어버려야 할 욕망입니다. 이러한 욕망들은 부질없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상을 만들어 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욕망들에 의해서 요구되는 하나님은 우상에 불과할 뿐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난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은 자기의 말씀으로 이미 믿는 자와 함께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앞에 내가 바라는 신상을 포기하고 버리십시오. 그래야 이미 말씀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뵈올 수가 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말씀하는 내용을 생각해 봅시다. 여호수아는 먼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스라엘에게 진술합니다(2-13). 그 내용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어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일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정착까지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이 속에 애굽을 심판하고 이루어진 출애굽, 홍해를 건넌 사건, 광야 체류, 요단 동편 전쟁들, 발람의 술수를 하나님이 막으심, 요단강을 건넘과 가나안 족속들과의 전쟁들, 정착과 안식이 진술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구원역사를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상을 섬기는 집에서 부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집에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요즈음 믿지 않는 집에서 믿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친 것이나, 홍해에 애굽 사람은 수장시키고 이스라엘은 건너게 한 것이나, 광야 거류할 때 먹인 것이나, 수많은 동서편의 민족들과 싸운 것은 하나님이 싸우신 것이며, 또 지금 '이스라엘이 수고하지 아니한 땅과 건축하지 않은 성읍을 얻은 것과 심지 않은 과실을 먹는 것 등 모두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이스라엘의 힘과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되게 했고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을 가리켜 은혜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바로 하나님 홀로 사역하신 은혜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호수아가 말한 구원사만으로는 흡족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말한 구원사에다가 길게 더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구원사는 여호수아로서 끝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오신 사건까지 도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은 이 구원사의 끝을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7:56)고 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보라 하늘이 열렸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것을 보고 있노라"고 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만국을 통치하고 계심을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이 만국을 통치한다고 해서 우리들이 잘 먹고 살 사는 길로 인도한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합시다. 주님은 성령님을 통해서 다스리되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도록 우리를 이끄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죽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는 구원사건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어려운 환경에서 주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해 주실까를 생각하지 말고 어려운 환경에서 죽을 생각을 하십시오. 그것이 세상을 탈출하는 길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죽는 것을 출애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벗어나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을 벗어나고 이기는 길이 세상에서 죽는 것이었다면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세상의 어려운 환경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이 환경을 버리고 이 세상 환경에서 죽는 길로 가도록 하십시오. 이제 구원역사를 경험한 이스라엘에게 여호수아가 무엇을 촉구하고 있는 지 생각해 봅시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고 촉구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결단코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않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만을 섬길 것을 다짐하고 스스로 증인이 되기로 서약하였습니다. 이런 이스라엘과 여호수아는 언약을 세웁니다. 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제물을 잡아 반으로 갈라놓고 약속을 하는 것인데 만약 이 약속을 범하면 제물이 갈라지듯이 죽음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하는 서약식입니다.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는 약속을 이스라엘은 한 셈입니다. 이러한 점은 오늘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예수와 함께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을 때 나도 죽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고 산다는 것은 날마다 죽는 것을 반복하는 일입니다. 이미 죽은 것을 반복하고 반복하면서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는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에는 말할 것도 없이 날마다 선택과 결심이 따릅니다. 신앙과 불신앙의 기로에서 날마다 신앙을 택하고 불신앙에 대한 죽음을 반복하는 결심이 따릅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사람이 완전히 신앙적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넘어지고 실패하는 때가 많지만 믿음이 있다는 표적으로서 신앙적인 것을 선택하고 불신앙적인 것에 대하여 죽는 생활을 날마다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제가 자주 말하는 신앙의 생명현상입니다. 신앙은 신앙을 선택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신앙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죽은 신앙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 믿음도 죽은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우상을 섬기게 되고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화를 내리시게 되고 멸하신다고 합니다. 20절에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믿다가도 망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가 불신앙에 빠져서 망하게 되기도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저의 말이 아닙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박윤선 박사님은 그의 여호수아 주석에서 "신약 시대 신자들도 은혜를 받은 후에 배도하면 멸망 받는다"고 하면서 히브리서 6:4-6,10:26-27을 참고 구절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학을 대표했던 학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도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는 자리에 빠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믿다가도 멸망하게 됩니다. 날마다 신앙적인 삶을 선택하십시오. 불신앙에 대하여 이미 죽은 자임을 기억하고 죽음을 반복하도록 하십시오. 신앙이 있으면 이런 일은 당연히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 있는 표적입니다. 날마다 죽음으로 주 여호와를 선택하도록 하십시오. 이러한 결심을 하는 백성들에게 여호수아는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를 가르쳤습니다. 아마도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25)고 한 것을 볼 때 모세의 율법을 가지고 설교하면서 가르쳤을 것입니다. 설교란 율법을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해석하고 생활에 적용하여 가르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남은 생애동안에 생명을 다 하여 이 일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 언약을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성소'(26) 곧 옛날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처음 들어와서 제단을 쌓았던 그 곳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 큰 돌을 증거물로 세웠습니다. 그 돌을 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증거물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납니다. 엘르아살도 죽습니다. 언약이 이루어진 것을 확인하고는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면 기꺼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언약 성취를 보았기 때문에 아마도 이들은 평안히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죽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마끼고 죽어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미래는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언약의 완성이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마끼고 죽어갈 준비가 되었습니까 주님만 있으면 족하니 이 주님을 바라보면서 여러분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갈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여호수아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는 언약 성취를 보고 죽은 한 줌의 흙에 불과합니다. 비록 그가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그는 모세가 받은 법 즉 언약이 가나안에 들어와 가나안을 지배하도록 사용된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는 모세보다 나은 자가 아닙니다. 여호수아보다는 오히려 모세가 더 큰 자입니다. 모세는 언약을 받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약을 받은 그 모세가 범죄하였을 때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범죄해도 하나님이 그 죄악을 담당하고 극복하시면서 자기 언약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범죄는 언약을 더욱 드러내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보다 언약 정신 즉 하나님의 긍휼을 더 잘 보여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인이지만 완전한 언약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자들이기 때문에 주님의 긍휼이 우리에게 더욱 빛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러면서 날마다 불신앙 쪽으로는 죽고 주님을 선택하도록 하십시오. 믿음은 이것을 하게 하는 생명력으로서 여러분 속에서 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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