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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하는 것이냐 선택하게 되는 것이냐 (수24:14-22)

본문

지난 주에 우리는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여호와를 택하든지 다른 신을 택하든지 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여호와를 선택하라는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했습니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은 선택하라는 것은 우리에게 낯선 이야기다라는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저도 그러한 생각을 가졌더랬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우리를 선택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말에는 익숙해 있는데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다는 말에는 익숙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 문제를 좀 더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요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냐 아니면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이것을 확실히 구분하도록 합시다. 제 설교가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을 저도 늘 느끼고 탄식할 때가 많습니다만 여러 가지 복잡한 것들을 다 잊어버리고 이 요점 하나만 기억하도록 합시다. 한 설교에서 하나만 알면 족합니다. 먼저 여호수아가 어떤 사람들에게 선택을 촉구했느냐를 생각하는 것이 이 문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어떤 사람들에게 선택을 하도록 촉구합니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에게 여호수아는 촉구합니다(32). 여호와의 구원을 이미 경험한 자들에게 이런 촉구를 했습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이미 예수를 믿는 자에게 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백성들이 '우리가 여호와를 섬기겠습니다'고 응답한 것은 전혀 구원을 모르는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을 섬겨야지'라고 생각하고 결단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의 응답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힘이 되어서 움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이 그들로 하여금 응답하도록 힘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믿음은 믿는 자가 움직이도록 해 주는 힘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이스라엘이 선택하고 응답한 것은 믿음이 응답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택한 것은 자기들이 선택한 것입니까 아니면 구원을 알고 보니 선택하게 된 것입니까 물론 구원을 알고 보니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믿음이 움직이는 힘이 되어서 선택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믿고 살아오면서 겪은 일 한 두 가지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키가 작습니다. 왜 키기 작을까요 물론 키가 자라야 할 때 자라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키가 크지 않다는 것은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기와 청년기를 지나오면서 저의 고민거리였습니다. 자라면서 아이들이 해보듯이 저도 문틀에 대고 서서 자와 연필로 키를 측정하면서 금긋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측정 금은 좀체 잘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못 측정을 해서 그런가 싶어서 측정의 정확성을 기해보려고 애도 써보았습니다. 또 머리가 앞뒤로 긴 짱구형이니 앞머리에 재는 것이 클까 뒷머리에 재는 것이 클까를 궁리해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 쓸 데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성경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말씀은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하므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6:27)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제 마음에 와서 부딪치면서 '그렇다 이것은 내가 염려할 거리가 아니구나, 주님의 소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오자 키 작은 것에 대하여서 전혀 염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부터는 키 커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염려하지 않게 된 것은 제가 '염려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면서 결심을 하고 애를 써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진리로구나'라는 깨달음이 오자 저절로 염려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저로서는 지금 생각해도 이상한 일입니다. 어떻게 염려에서 떠나게 되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그것은 참 묘한 일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된 것이 제가 노력해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달리 말하면 말씀의 능력으로 되어진 사건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이 와서 제 마음속에 머물자 그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자라면서 밤을 무서워했었습니다. 그래서 어두운 밤에 교회에라도 갈라치면 상당히 무서웠습니다. 이렇게 무서워하게 된 것은 저의 체질적인 면도 있고 또 자라면서 들어온 도깨비 이야기, 매구(천년 묵은 늙은 여우가 둔갑하여 된 환상적인 짐승) 이야기 등을 듣고 자라서 그런 것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도깨비나 매구 같은 것은 내가 자라던 때의 사람들에게는 거의 실제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점을 치던 할머니가 발목이 뒤틀려서 절뚝거리며 살았었는데 발목이 그렇게 된 이유가 부슬비가 내리는 밤에 어디 갔다 오다가 산모퉁이 도는 곳에서 도깨비에게 홀려서 도랑에 빠져 발목이 부러져서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자라던 시절에는 도깨비나 매구는 실제적인 존재였습니다. 더구나 한 동네에서 도깨비에게 당한 사람이 절뚝거리며 다니는 것을 보았으니 그런 것들이 참으로 실제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배경은 저로 하여금 겁이 많은 중에 자라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런 깨달음이 왔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면 밤에 죽을 자가 낮이라고 죽지 않겠으며, 낮에 죽지 않을 자가 밤이라고 죽겠느냐 생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면 밤과 낮이 구별이 없구나! 단 차이라면 낮에는 빛이 있어서 광명이 있고 밤에는 햇빛이 없어 광명이 없는 차이 뿐이로구나'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오자 밤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밤에 달이 밝을 때면 산 속에 가서 놀기도 하고 거기서 산토끼들이 뛰어 다니는 것을 구경하면서 낭만을 즐길 수 있었고 또 밤에 무덤 가에서 앉아서 조용함을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된 것도 제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말씀이 깨달아졌을 때 별안간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말씀이 제게 힘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변화라고 한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이 믿어지고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생명의 주인이라는 것이 믿어지고 나니 죽는 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기다림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죽는 과정에서 오는 고통이 괴롭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병이 들어 아프다거나 사고를 당해서 고통을 당하면서 죽는 것은 원하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을 당해서 죽든 혹은 자연적으로 죽든 죽음 그 자체는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겪어야 할 하나의 과정으로서 기다림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지금 저는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길게 남지 않은 세월에 내가 무엇을 하고 가야 할까를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물론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기도 하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하며 따라주지 않는 체질에 짜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남길 것을 남겨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설교를 하고 또 써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주님의 말씀이 제게 와 있기 때문에 일어난 변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결심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믿게 된 것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말씀이 저를 이렇게 만든 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러한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분야마다 이런 식으로 믿음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삶을 말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삶의 각 분야마다 이렇게 믿음에 의해서 움직여진다면 그것은 억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의 결정이 따르고 우리 인격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각 분야마다 결정하고 선택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의식적이든 또는 무의식적이든 믿음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선택이기 때문에 자기 혼자만의 선택이 아니라 믿음의 힘에 의해서 선택하게 되는 선택입니다. 믿음이 힘이 되어 움직이는 셈이지요.
그러므로 선택은 자기의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분야마다 이러한 선택을 하게 되면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두 번째 생각할 것은 이러한 선택을 모든 분야에서 완전하게 함으로 완전하게 산다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별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선택을 하는 경우도 많고 또 의식하고 알았다고 해서 완전히 하나님 쪽으로만 선택하게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는 반대쪽으로 선택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지만 경제적으로 또는 인간관계상 큰 손해를 볼 것 같아서 거짓말을 하는 수가 있습니다.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럴 때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이 옛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옛 모습을 따라 가기보다는 하나님을 따라서 가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이 믿음을 주신 것은 이러한 새 사람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주님을 믿고 있다는 표일 뿐입니다. 즉 주님 안에 있고 또 주님을 알고 있다는 흔적입니다. 이렇게 완전하게 살아서 천당을 간다는 것은 아닙니다.
셋째,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은 주님을 알기 때문에 하는 다짐이요 사랑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믿는 내 자신이 스스로 하는 자유스런 행위입니다. 구원과는 상관이 없지만 새 사람을 귀중하게 생각하고 새 삶을 열심히 살아 보려고 하는 생명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믿음의 마음이 주는 힘을 가지고 열심히 사십시오. 새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새 생명의 모습입니다. 새 생명을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만큼 실감은 더 날 것이요 그렇지 않을 수록 잊고 살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쪽을 많이 택하십시오. 그렇게 함으로 다짐을 새로이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구원과 상관은 없지만 자기 자신은 자기 속에 주의 말씀이 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사는 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이나 집에서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도 다 이런 삶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에게 새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신자에게는 새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런 새 삶을 생의 모든 분야로 넓혀 가십시오. 경제적으로 좀 나누려고 하고, 사회적으로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가지고, 문화적으로는 신앙에 도움이 되는 것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이런 식으로 모든 분야로 넓혀 가십시오. 생명 있는 믿음은 분야마다 하나님 쪽을 택하도록 힘이 주어져 있습니다.
끝으로 여러분은 자기가 잘못해서 타락할 것이 아니냐에 신경을 쓰지 마십시오.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멸하시리라'는 말씀을 들을 때 타락하면 어떻게 할까, 구원 얻지 못하면 어쩔까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다. 이런 말씀의 목적은 구원을 아는 사람에게 정신차리라고 하는 말씀이니 '정신 차리라고 하는구나, 정신을 차리자'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돌아보고 정신을 가다듬고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이런 말씀들이 촉구하고 분발하게 하는 것이 될지언정 거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잘못 생각하여 시험이 되지 않도록 합시다. 또 복잡하게 된 것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 쪽으로 택하고 움직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따라 택하기에 주저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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