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을 건넙시다 1 (수3:1-6)
본문
과속으로 차를 모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걱정이 된 아내가 조심해서 운전을 하라고 아무리 애기해도 막무가내 였습니다. 바가지를 긁다 못해 나중에는 “꼭 사고를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릴 셈이냐”“생과부 만들 작정이냐”고 협박까지 했답니다.
그런데도 남편의 습관은 여전했습니다. 숱한 야단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내가 지혜를 냈습니다. 남편의 핸들위에 이런 메로를 남겨 놓았습니다. 여보 운전을 하실 때는 언제나 찬송을 부르세요. 당신이 시속 60Km로 달릴때는 456장 ‘주와 함께 길가는 것 즐거운 것 아닌가’라는 곡이 어울릴 것에요. 만약 80Km로 달릴 때는 490장‘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저 하늘 나라 나 올라가’를 그리고 100Km로 달릴 때는 291장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가 좋을 거예요. 그리고 120Km가 넘을 때는 503장 ‘이 풍랑(운전)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참 지혜로운 아내입니다. 저가 오늘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주제가 ‘요단강을 건너자’라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이 요단강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의미지가 무엇이냐 하면 믿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죽어 천국에 들어가는,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이런 죽음과 죽음 후의 모습을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 요단강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들의 꿈의 성취요, 그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목표를 실현하기 전에 뛰어넘어야 할 최후의 과제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 문제, 방해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 모두에게도 나름대로의 다 꿈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꿈꿉니다. 하는 일들이 잘되기를 꿈꿉니다. 이런 일들을 위하여 진력해 나갑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된 계획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 범사가 잘되는 축복, 강건케 되어지는 축복, 바로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나안땅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복된 삶이란 단순히 돈 많이 벌어서, 잘먹고, 잘입고, 잘 쓰고, 잘사는 이런 측면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먹고, 잘노는 것은 돼지도 합니다. 삶의 양이 아니라, 질이 어떠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잠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가졌던 안가졌던, 잘하던, 안하던 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은혜가 있고, 어떤 형편이든 자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축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또 복된 삶이 무엇입니까 이 땅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끝이 난 후에,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때에도 하나님 나라에서 큰 기업,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에게 이런 가나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을 누리고야 마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라는 길목에 요단강이라는 것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단강이 길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고, 아픔이 있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매우 힘든 상황, 요단강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개인이나, 가정을 보면 나름대로의 다 요단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여러 모양의 요단강이 있습니다. 요단강의 폭이 짧으냐 길으냐의 차이지 다 요단강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격고 있는 민족적인 시련이나 개인, 그리고 가정이 격고 있는 시련들이 결코 이유없는 고난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유없는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회개하고, 다시 바로 선다면 민족적인 시련이,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당한 시련이, 우리 민족과 가정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사건을 반드시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머지 않아 우리들로 더 큰 축복의 일들로 들어 사용하시기 위하여 우리 민족을 깨끗케 하고 있는것이며, 우리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세우시고 있는 중이시며, 우리 가정과 교회를 연단하시는 중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게 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오늘 우리 민족이, 우리 가정과 교회가, 그리고 우리 성도들 한 사람 사람이 어떻게 하면 요단강을 건너 주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축복된 삶을 살수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잘 붙들어서 우리 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널수 있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은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자를 통해서 요단강을 거너게 하십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기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그가 어느 날 일찍이 일어났다는 우연한 하루 생활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 표현이 매우 의도를 가지고 반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12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여리고성 사건때 일 7:16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아이성 실패후 누구 때문인지 찾을 때 일 8:10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아이성 정복 사건때 일 여호수아가 늙어서 아침에 잠이 없어서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준비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이끌던 모세가 죽고, 대신 하여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이끄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시는 말씀이 (수1: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수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가나안 땅을 ‘앞으로 너희들이 잘 하면 주마’가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가나안 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이 가나안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져야만 했던 땅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려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요단강 도하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어진 땅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손을 내밀어 취해야 그들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은 주셨지만, 밥을 만들어서 입에 떠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밥을 지어 밥을 먹어 배 부르느냐, 아니면 밥을 만들 모든 것을 주셨지만 밥 하기가 싫어서 밥을 하지 않느냐에 따라 배가 부르냐, 아니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기 위하여 행하는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아침 일찍 행하는 사람 준비하는 사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이 경제위기시절을 지나면서 정말 하나님앞에 회개할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축복의 사건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고난을 당하지만 이 기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굳게 설수 만 있다면, 여러분 각자에게 당한 고난이 오히려 축복의 사건이 될것이라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어렵습니다. 다 힘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우리의 믿음의 그릇이 준비되도록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준비된다면, 교회의 당한 어려움이 오히려 부흥의 사건이 될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위하여 우리에게 힘든 일을 허락하시고, 아픔을 허락하시고, 문제를 동원하시고, 힘든 상황가운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 사람들 자체가 힘들지 않으면, 문제가 없으면, 나에게 어떤 곤란한 일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붙들지도 않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내 나름대로 한다고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되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해도 사람의 힘으로 안되면 그제사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될 이런 상황이 되어야 찾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길로 가면 망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요단강을 주시기도하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잘 가고 있는데도 요단강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자만하지 않고, 더 잘 되어져 가도록 요단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름대로의 요단강을 다 주셨습니다. 그 요단강을 주심은 ‘가나안을 얻었을 때에 내가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얻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는 길목에 요단강이 가로막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음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픔이 있는 것은, 어려움이 있는 것은, 일이 잘 안되는 것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붙들어라고 주셨는데, 어떤 이는 내 힘으로 요단강을 건너보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아예 돌아왔던 광야기를 거쳐 애굽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어떤 이는 요단강앞에서 맥없이 요단강만 바라보고 한 숨만 쉬고,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 서 있습니까 어떤 모습의 요단강이던 건너가야 합니다. 그래야 가나안이 주어집니다. 어떤 요단강이던 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건너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처럼 건너기 위해서 아침 일찍이 일어나 건널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 새벽에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새벽에 할 일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여호수아는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을 건널 길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힘으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건날 수 없나이다. 길을 내시옵소서” 이렇게 하기를 몇일 요단강 도하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7-8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도하문제 뿐 아니라 6장에 가면 여리고 성을 지나야 할 때에도 동일하게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힘으로는 요단강을 건널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건너려다 오히려 빠져 죽습니다. 지금 내게 당한 이 힘들고 어려운 문제, 답답하고 괴로운 문제, 불안하고 초조한 문제, 미치고 팔딱 뛰고 싶은 일들을 여러분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해결하실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요단강을 건널수 있도록 길을 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삼상2: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2: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준비해야 합니다. 즉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앞에 우리들의 요단강을 가지고 나아와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참 답답합니다. 정말 힘듭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해결하여 주시옵솟. 하나님 길을 내시기 원합니다.” 부르짖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이 무엇하신다고 하십니까 (렘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 이 이르노라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여호수아처럼 아침일찌기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길을 내실 것인데,
그런데 어쩐 일로 잠만 자고 있습니까 그래놓고는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왜 해결책을 앞에 높고 다른데서 찾으려 합니까 다시 기도가 삶이 되살아나기를 원합니다. 다시 새벽을 깨우는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시 그옛날 뜨겁게 하나님을 만났던 그 열정이 불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나안땅은 요단강을 건너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땅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마귀가 쉽게 얻어라고 그냥 놓아 두지 않습니다. 대가를 치루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땅은 어떤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얻어야 할 땅입니다.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사모하며 은혜받을 준비된자에게 주어집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믿음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도록 말씀을 붙드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나오는, 기도를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집니다. 응답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하나님은 가만히 있다고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새벽에 일찍이 일어납시다. 즉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서 분명 여러분들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게 될줄로 믿습니다.
2.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널수 있도록 명령하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같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언약궤를 보고 쫓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언약궤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광야를 행진 할 때에는 제일 앞에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들이 뒤를 따라 갔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들 앞서 간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진행하다가 머물면 장막을 치는데 이 언약궤는 한 복판(중앙)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를 중심하여 12지파가 진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행진할 때에는 언약궤를 앞세우고, 진을 칠 때에는 가운데 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상한 것은 행진 할 때에 그 언약궤 가까이 가지 말고 이천 규빗(약 1Km)정도 앞서 가게 하라고 합니다.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왜 언약궤를 멀리 있게 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모든 백성이 언약궤를 볼수 있도록, 모두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를 행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는 적어도 200만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가는데 언약궤를 바로 앞에 세웠다면 앞에 있는 사람의 뒤통수만 보이지 언약궤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습만 보이고, 사람들의 소리만 듣다가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요단강을 건널때에 언약궤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앞사람, 뒷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네게 호흡을 주시고, 너를 이 땅에 존재케 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언약궤, 곧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약궤를 바라보지 않고 요단강을 본다고 해 보십시오. 즉, 우리에게 있는 문제만 바라보고, 안되고, 힘든것만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은 건널수가 없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 이 사람, 저사람을 기도중에 생각해 봅니다. 어떤 때는 그 성도만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일이 잘되어야 할 텐데, 왜 일이 그렇게 잘 안풀리는지, 이제 문제가 그만좀 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문제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소서. 일이 잘되게 하소서. 어려움을 잘 이기게 하소서. 축복하여 주소서”
그런데 어떤이들을 생각하면 참 속이 상합니다. 열심히 해야 데는데, 주님을 붙들어 하는데, 그렇게 해야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있으면 속이 상합니다. 목사가 시험에 듭니다. “왜 저럴까 왜 안할까” 낙심이 됩니다. 또 앞사람, 뒷사람을 바라 본다고 해보십시오. 즉, 이 사람, 저 사람의 경험과 말과 생각들을 듣는다고 했을 때 우리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과 말들이 다 틀리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람들에게서 듣는 것은 부정적인 말, 실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여호수아 돈게 아니야, 지금 요단강물이 철철 넘치고 있는데 말이야, 어떻게 여기를 건널수 있다고 그래” 제발 부정적인 말, 유익이 안되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한다고 이득이 없습니다. 하는 사람 은혜 떨어져, 듣는 사람 시험에 들어, 당사가 그것을 알고 더 괴로워. 부족하거나 연약한 모습을 보거든 ‘기도해 주세요’‘힘을 북돋아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을 내 생각과 지헤와 방법으로는 건널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건널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나 다른 사람들은 요단강 앞에서는 못건넌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요단강을 건널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앞과 뒤의 사람이 무엇이라 하든 말든, 요단강물이 철철 흘러 넘치든 말든 우리는 오직 언약궤, 하나님, 주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나아가면 요단강이 갈라지게 될줄 믿습니다. 내가 갈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널수 있도록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이 되십니다. 생명이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 그분은 분명 우리를 살길로 인도하십니다. 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있게 하시기 위하여 백성들 앞서 요단강에 먼저 들어가셔서 그것을 바라보고 뒤쫓아 오라고 합니다. 오직 우리들은 앞서 가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어떤 요단강이든 분명히 건너게 될줄 믿습니다. 오늘날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문제와 사건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 문제를 바라보기 전에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럴 때 문제는 적게 보이고, 주님은 크게 보이기에 문제속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좇아 가느냐갸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물위로 걸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나갔던 베드로도 주님처럼 물위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선을 바다에 두지 않고 주님께 둘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선을 주께 두지 않고 바다의 물과 바람에 두었더니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오직 주만 바라봅시다.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는지에 귀를 기울입시다. 살고 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되고 안되고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힘이 될것입니다. 몹시 추운 겨울에 험한 산길을 어린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걷고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추워서 그만 그 어머니는 온 몸이 얼어 얼마 안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마침 어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다가 그 애처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이 운전수는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한가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 옆에 도착하여 이 운전수는 그 여인에게 어린아기만 차에 태우게 하고는 그 여인은 차에 타지 아니하고 멀찍이 갔습니다. 이 운전수는 그 여인의 발걸음에 맞추어서 천천히 가는 듯 하다가 속력을 내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없이 뒤따라오던 그 어머니는 이 운전수를 어린이 유괴범으로 알고 소리지르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갔습니다. 얼마쯤 가노라니 그 차가 눈앞에 보이더니 아주 천천히 갑니다. 거의 다 갔을 무렵에 이 차는 또 달아나 버립니다. 이렇게 하기를 십여리를 뛰다보니 추워서 얼어 죽어가던 그 여인의 몸은 다 녹아지고 온 몸에서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운전수는 그제서야 정차를 하고 차에 올라 타게하고 어린아기를 주었답니다. 이 여인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원망 섞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때 운전수는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대뜸 차에 올라타고 갔으면 좋을 것 같지만 너무 몸이 얼었기 때문에 그대로 탔다가는 당신도 이 어린이도 다 죽기 쉽기 때문에 몸을 녹이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노라’고 말했답니다. 가나안 땅,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단강을 주심은 우리를 애태우고, 고생케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고,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더 잘되게 하시려고 요단강을 주셨습니다. 요단강을 주셨다고 원망불평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가운데 굳게 서는 사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줄 믿습니다.
그런데도 남편의 습관은 여전했습니다. 숱한 야단이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아내가 지혜를 냈습니다. 남편의 핸들위에 이런 메로를 남겨 놓았습니다. 여보 운전을 하실 때는 언제나 찬송을 부르세요. 당신이 시속 60Km로 달릴때는 456장 ‘주와 함께 길가는 것 즐거운 것 아닌가’라는 곡이 어울릴 것에요. 만약 80Km로 달릴 때는 490장‘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주께로 날마다 더 가까이 저 하늘 나라 나 올라가’를 그리고 100Km로 달릴 때는 291장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가 좋을 거예요. 그리고 120Km가 넘을 때는 503장 ‘이 풍랑(운전)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참 지혜로운 아내입니다. 저가 오늘 말씀을 드리고자 하는 주제가 ‘요단강을 건너자’라는 제목입니다.
그런데 이 요단강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의미지가 무엇이냐 하면 믿는 사람들이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죽어 천국에 들어가는,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이런 죽음과 죽음 후의 모습을 말씀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이 요단강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거쳐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에 만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들의 꿈의 성취요, 그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목표를 실현하기 전에 뛰어넘어야 할 최후의 과제요,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어려움, 문제, 방해의 모습들인 것입니다. 오늘 여기 모인 우리 모두에게도 나름대로의 다 꿈이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행복한 가정을 꿈꿉니다. 하는 일들이 잘되기를 꿈꿉니다. 이런 일들을 위하여 진력해 나갑니다. 더군다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된 계획이 있고, 뜻이 있습니다. 영혼이 잘되는 축복, 범사가 잘되는 축복, 강건케 되어지는 축복, 바로 이것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나안땅이라 할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이 땅에서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복된 삶이란 단순히 돈 많이 벌어서, 잘먹고, 잘입고, 잘 쓰고, 잘사는 이런 측면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먹고, 잘노는 것은 돼지도 합니다. 삶의 양이 아니라, 질이 어떠냐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잠 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가졌던 안가졌던, 잘하던, 안하던 그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고, 평강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은혜가 있고, 어떤 형편이든 자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이야 말로 진정한 축복을 누리며 사는 사람입니다. 또 복된 삶이 무엇입니까 이 땅뿐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생명이 끝이 난 후에,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될 때에도 하나님 나라에서 큰 기업,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에게 이런 가나안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과 저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가나안을 누리고야 마는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들어가야 할 가나안이라는 길목에 요단강이라는 것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단강이 길을 가로 막고 있다는 것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이고, 아픔이 있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매우 힘든 상황, 요단강을 만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 개인이나, 가정을 보면 나름대로의 다 요단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여러 모양의 요단강이 있습니다. 요단강의 폭이 짧으냐 길으냐의 차이지 다 요단강이 있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가 격고 있는 민족적인 시련이나 개인, 그리고 가정이 격고 있는 시련들이 결코 이유없는 고난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유없는 고난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회개하고, 다시 바로 선다면 민족적인 시련이,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당한 시련이, 우리 민족과 가정과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의 사건을 반드시 보게 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머지 않아 우리들로 더 큰 축복의 일들로 들어 사용하시기 위하여 우리 민족을 깨끗케 하고 있는것이며, 우리들을 믿음의 사람들로 세우시고 있는 중이시며, 우리 가정과 교회를 연단하시는 중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요단강을 어떻게 건너게 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오늘 우리 민족이, 우리 가정과 교회가, 그리고 우리 성도들 한 사람 사람이 어떻게 하면 요단강을 건너 주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축복된 삶을 살수 있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잘 붙들어서 우리 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널수 있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은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자를 통해서 요단강을 거너게 하십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기 일어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그가 어느 날 일찍이 일어났다는 우연한 하루 생활을 말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 표현이 매우 의도를 가지고 반복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12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여리고성 사건때 일 7:16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아이성 실패후 누구 때문인지 찾을 때 일 8:10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아이성 정복 사건때 일 여호수아가 늙어서 아침에 잠이 없어서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하여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준비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 보면 이스라엘을 이끌던 모세가 죽고, 대신 하여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이끄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시는 말씀이 (수1:3)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이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여호수아에게 주어졌습니다. 어떤 약속입니까 가나안 땅을 ‘앞으로 너희들이 잘 하면 주마’가 아니라, 이미 그들에게 가나안 땅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즉, 이 가나안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져야만 했던 땅입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이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위해 요단강을 건너려고 아침 일찍이 일어나 요단강 도하를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주어진 땅이기는 하지만 그들이 가만히 있으면, 자동으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것을 손을 내밀어 취해야 그들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것은 주셨지만, 밥을 만들어서 입에 떠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밥을 지어 밥을 먹어 배 부르느냐, 아니면 밥을 만들 모든 것을 주셨지만 밥 하기가 싫어서 밥을 하지 않느냐에 따라 배가 부르냐, 아니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요단강을 건너기 위하여 행하는 모습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아침 일찍 행하는 사람 준비하는 사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이 경제위기시절을 지나면서 정말 하나님앞에 회개할 수 있다면, 이것이 우리에게 더 나은 내일을 위한 축복의 사건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우리가 개인적인 고난을 당하지만 이 기회에 하나님께 대한 믿음으로 굳게 설수 만 있다면, 여러분 각자에게 당한 고난이 오히려 축복의 사건이 될것이라 믿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어렵습니다. 다 힘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우리의 믿음의 그릇이 준비되도록 하나님앞에 기도하며, 주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준비된다면, 교회의 당한 어려움이 오히려 부흥의 사건이 될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위하여 우리에게 힘든 일을 허락하시고, 아픔을 허락하시고, 문제를 동원하시고, 힘든 상황가운데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 사람들 자체가 힘들지 않으면, 문제가 없으면, 나에게 어떤 곤란한 일이 있지 않으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붙들지도 않는 속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내 나름대로 한다고 열심히 하기는 하는데 되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방법과 수단을 다 동원해도 사람의 힘으로 안되면 그제사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으면 안될 이런 상황이 되어야 찾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지금 우리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그 길로 가면 망한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요단강을 주시기도하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잘 가고 있는데도 요단강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자만하지 않고, 더 잘 되어져 가도록 요단강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름대로의 요단강을 다 주셨습니다. 그 요단강을 주심은 ‘가나안을 얻었을 때에 내가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얻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가는 길목에 요단강이 가로막고,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음에도 끄떡도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픔이 있는 것은, 어려움이 있는 것은, 일이 잘 안되는 것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붙들어라고 주셨는데, 어떤 이는 내 힘으로 요단강을 건너보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아예 돌아왔던 광야기를 거쳐 애굽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어떤 이는 요단강앞에서 맥없이 요단강만 바라보고 한 숨만 쉬고, 원망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위치에 서 있습니까 어떤 모습의 요단강이던 건너가야 합니다. 그래야 가나안이 주어집니다. 어떤 요단강이던 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건너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처럼 건너기 위해서 아침 일찍이 일어나 건널 준비를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 새벽에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새벽에 할 일은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막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여호수아는 가로막고 있는 요단강을 건널 길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힘으로는, 내 힘으로는 도저히 건날 수 없나이다. 길을 내시옵소서” 이렇게 하기를 몇일 요단강 도하의 문제를 가지고 나아온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7-8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수아는 요단강 도하문제 뿐 아니라 6장에 가면 여리고 성을 지나야 할 때에도 동일하게 아침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힘으로는 요단강을 건널수 없습니다. 내 힘으로 건너려다 오히려 빠져 죽습니다. 지금 내게 당한 이 힘들고 어려운 문제, 답답하고 괴로운 문제, 불안하고 초조한 문제, 미치고 팔딱 뛰고 싶은 일들을 여러분들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해결하실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요단강을 건널수 있도록 길을 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삼상2: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2: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이때 우리가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준비해야 합니다. 즉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앞에 우리들의 요단강을 가지고 나아와 아뢰어야 합니다. “하나님, 참 답답합니다. 정말 힘듭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도와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해결하여 주시옵솟. 하나님 길을 내시기 원합니다.” 부르짖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하나님이 무엇하신다고 하십니까 (렘 33:2)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 이 이르노라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가 여호수아처럼 아침일찌기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길을 내실 것인데,
그런데 어쩐 일로 잠만 자고 있습니까 그래놓고는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역사하지 않는다고 하십니까 왜 해결책을 앞에 높고 다른데서 찾으려 합니까 다시 기도가 삶이 되살아나기를 원합니다. 다시 새벽을 깨우는 주인공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시 그옛날 뜨겁게 하나님을 만났던 그 열정이 불 타오르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나안땅은 요단강을 건너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땅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쉽게 얻어지지 않습니다. 마귀가 쉽게 얻어라고 그냥 놓아 두지 않습니다. 대가를 치루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가나안땅은 어떤 대가를 치루어서라도 얻어야 할 땅입니다.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사모하며 은혜받을 준비된자에게 주어집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가만히 있는다고 믿음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도록 말씀을 붙드는,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 나오는, 기도를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큰 믿음의 사람이 되어집니다. 응답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하나님은 가만히 있다고 응답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새벽에 일찍이 일어납시다. 즉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서 분명 여러분들앞에 있는 요단강을 건너게 될줄로 믿습니다.
2.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요단강을 건널수 있도록 명령하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3절 말씀을 같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서 ‘언약궤를 보고 쫓아가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이 언약궤가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입니다. 그들이 광야를 행진 할 때에는 제일 앞에 언약궤를 앞세우고 그들이 뒤를 따라 갔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그들 앞서 간다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진행하다가 머물면 장막을 치는데 이 언약궤는 한 복판(중앙)에 세웁니다. 그리고 그 언약궤를 중심하여 12지파가 진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행진할 때에는 언약궤를 앞세우고, 진을 칠 때에는 가운데 둔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이상한 것은 행진 할 때에 그 언약궤 가까이 가지 말고 이천 규빗(약 1Km)정도 앞서 가게 하라고 합니다. 굉장히 먼 거리입니다. 왜 언약궤를 멀리 있게 했을까요 이유는 하나입니다. 모든 백성이 언약궤를 볼수 있도록, 모두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광야를 행진 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는 적어도 200만명이 훨씬 넘었을 것입니다. 이런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가는데 언약궤를 바로 앞에 세웠다면 앞에 있는 사람의 뒤통수만 보이지 언약궤는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모습만 보이고, 사람들의 소리만 듣다가 끝장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요단강을 건널때에 언약궤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말은 앞사람, 뒷사람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되시는 하나님, 네게 호흡을 주시고, 너를 이 땅에 존재케 한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신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언약궤, 곧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언약궤를 바라보지 않고 요단강을 본다고 해 보십시오. 즉, 우리에게 있는 문제만 바라보고, 안되고, 힘든것만 바라보십시오. 우리들은 건널수가 없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 이 사람, 저사람을 기도중에 생각해 봅니다. 어떤 때는 그 성도만 생각하면 안타깝기도 하고, 가슴이 아프기도 합니다. 일이 잘되어야 할 텐데, 왜 일이 그렇게 잘 안풀리는지, 이제 문제가 그만좀 있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문제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힘을 주소서. 일이 잘되게 하소서. 어려움을 잘 이기게 하소서. 축복하여 주소서”
그런데 어떤이들을 생각하면 참 속이 상합니다. 열심히 해야 데는데, 주님을 붙들어 하는데, 그렇게 해야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있으면 속이 상합니다. 목사가 시험에 듭니다. “왜 저럴까 왜 안할까” 낙심이 됩니다. 또 앞사람, 뒷사람을 바라 본다고 해보십시오. 즉, 이 사람, 저 사람의 경험과 말과 생각들을 듣는다고 했을 때 우리들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생각과 경험과 말들이 다 틀리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람들에게서 듣는 것은 부정적인 말, 실패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여호수아 돈게 아니야, 지금 요단강물이 철철 넘치고 있는데 말이야, 어떻게 여기를 건널수 있다고 그래” 제발 부정적인 말, 유익이 안되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한다고 이득이 없습니다. 하는 사람 은혜 떨어져, 듣는 사람 시험에 들어, 당사가 그것을 알고 더 괴로워. 부족하거나 연약한 모습을 보거든 ‘기도해 주세요’‘힘을 북돋아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요단강을 내 생각과 지헤와 방법으로는 건널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 것을 듣고는 건널수 없습니다. 오히려 나나 다른 사람들은 요단강 앞에서는 못건넌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요단강을 건널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앞과 뒤의 사람이 무엇이라 하든 말든, 요단강물이 철철 흘러 넘치든 말든 우리는 오직 언약궤, 하나님, 주께서 주신 말씀을 따라 나아가면 요단강이 갈라지게 될줄 믿습니다. 내가 갈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가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건널수 있도록 길을 내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길이 되십니다. 생명이 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인도하는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앞서 가시는 하나님, 그분은 분명 우리를 살길로 인도하십니다. 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에 있게 하시기 위하여 백성들 앞서 요단강에 먼저 들어가셔서 그것을 바라보고 뒤쫓아 오라고 합니다. 오직 우리들은 앞서 가시는 주님만 바라보고 나가면 어떤 요단강이든 분명히 건너게 될줄 믿습니다. 오늘날 앞서 가시는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됩니다. 우리 모두에게 문제와 사건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 문제를 바라보기 전에 문제의 해결자 되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그럴 때 문제는 적게 보이고, 주님은 크게 보이기에 문제속에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좇아 가느냐갸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물위로 걸어 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나갔던 베드로도 주님처럼 물위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시선을 바다에 두지 않고 주님께 둘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선을 주께 두지 않고 바다의 물과 바람에 두었더니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오직 주만 바라봅시다. 주님이 무엇이라 말씀하는지에 귀를 기울입시다. 살고 죽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되고 안되고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주님만 바라보는 믿음이 요단강을 건너게 하는 힘이 될것입니다. 몹시 추운 겨울에 험한 산길을 어린아이를 업은 어머니가 걷고 있었습니다. 너무너무 추워서 그만 그 어머니는 온 몸이 얼어 얼마 안가서 죽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때에 마침 어떤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가다가 그 애처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이 운전수는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 한가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그 옆에 도착하여 이 운전수는 그 여인에게 어린아기만 차에 태우게 하고는 그 여인은 차에 타지 아니하고 멀찍이 갔습니다. 이 운전수는 그 여인의 발걸음에 맞추어서 천천히 가는 듯 하다가 속력을 내서 달아나 버렸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런 생각없이 뒤따라오던 그 어머니는 이 운전수를 어린이 유괴범으로 알고 소리지르면서 있는 힘을 다해서 뛰어갔습니다. 얼마쯤 가노라니 그 차가 눈앞에 보이더니 아주 천천히 갑니다. 거의 다 갔을 무렵에 이 차는 또 달아나 버립니다. 이렇게 하기를 십여리를 뛰다보니 추워서 얼어 죽어가던 그 여인의 몸은 다 녹아지고 온 몸에서 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운전수는 그제서야 정차를 하고 차에 올라 타게하고 어린아기를 주었답니다. 이 여인은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원망 섞인 어조로 말했습니다. 그때 운전수는 말하기를 ‘당신이 만약 대뜸 차에 올라타고 갔으면 좋을 것 같지만 너무 몸이 얼었기 때문에 그대로 탔다가는 당신도 이 어린이도 다 죽기 쉽기 때문에 몸을 녹이게 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랬노라’고 말했답니다. 가나안 땅, 하나님의 축복된 삶을 살게 하시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단강을 주심은 우리를 애태우고, 고생케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복되게 하시려고,우리를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더 잘되게 하시려고 요단강을 주셨습니다. 요단강을 주셨다고 원망불평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가운데 굳게 서는 사람,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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