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수난과 신앙 고백 (욥1:13-22)
본문
오늘은 고난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절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욥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고난을 음미하고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언뜻 고난 하면 예수님의 고난 말고는 욥의 고난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욥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 오르는 것은 고난이라는 말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만큼 욥은 고난의 사람입니다. 욥이 당했던 고난은 무능 때문에 당한 것이 아닙니다. 실패 때문도 아닙니다. 그 고난은 순전히 시험 때문입니다.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을 극구 칭찬을 하십니다. 8절에 보면 “(욥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그러니까 사탄이 대답합니다. “(욥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 그렇지, 만일 그의 재산을 뺏으시면 하나님을 욕하리이다.” 그리고 사탄이 나와서 욥을 시험해 봅니다. 사탄은 욥의 재산을 뺏으면 금방 하나님을 저주하고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의 시험은 시작된 것입니다.
첫째는 “재산을 잃는 고난”입니다. 욥은 그 시대의 부자였습니다. 3절을 보면 욥의 재산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 때 욥이 동방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양이 7,000마리, 약대가
3,000마리, 암나귀가 500마리, 소가 500마리, 그 밖에 시종이 여럿입니다.
그런데 짐승을 치던 종들이 갑자기 오더니 이웃 나라 야만인들이 쳐들어와서 종들을 모두 죽이고 목장을 모두 불태우고 짐승떼를 모두 끌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 재산이 하루 아침에 모두 없어지 것입니다. 어떻게 손을 써 볼 겨를도 없이 하루 아침에 망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애석한 것은 갑자기 어느 날 큰 재산을 잃는 일입니다. 재산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갑자기 재산을 잃어 버리게 되면 충격을 받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정신을 잃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재산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하루 아침에 유산으로 물려 받은 소중한 재산이 모두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때 욥의 심정을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신앙이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욥은 이 사건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것을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물질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이 물질관이 잘 세워져야 합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물질의 관리자일 뿐입니다. 물질을 관리하고 필요에 따라 선용하고 선한 뜻을 위해서 활용하는 권한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로부터 그 물질을 회수해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물질을 잃어 버렸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잃어 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회수해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서 얻는 교훈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물질관입니다. 사람이 이 같은 물질관에 분명하면 물질 때문에 시험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질이 많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또한 물질이 적다고 해서 비관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욥의 물질에 대한 신앙관입니다. 사탄의 제 일차 시험은 이렇게 해서 실패를 합니다.
둘째는 자식을 잃는 고난입니다. 욥에게는 10남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우애가 좋았습니다. 형제 중에 한 사람이 생일을 당하면 모든 형제들이 한 집에 모여서 즐겁게 보내곤 했습니다. 그 날도 맏아들이 생일이라 모든 형제들이 한 집에 모여서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종이 뛰어어더니 “잔치 잡이 무너져서 10남매가 모두 죽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재산을 잃어 버리는 아픔이 이보다 더 했겠습니까 그것도 자식 하나가 아니고 10남매 모두가 한날 한시에 한 장소에서 죽어 버렸습니다. 욥은 재산을 잃은 충격도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두 번째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욥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20절을 보면 그 때의 모습을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랬습니다. 그냥 앉아서 들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극도의 슬픔을 당하게 되면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 나라 사람 같았으면 머리를 쥐어 뜯었거나 가슴을 쥐어 뜯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 털을 밀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표시합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서는 죄인에게 상투를 잘라 버렸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표시입니다. “너는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개화기 때 단발령이 내렸지만 사람들이 한사코 상투 자르기를 거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욥도 머리를 밀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하는 말이 21절에서 “(욥1:21)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했습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어떻게 여기서 그렇게 공손하게 하나님께 엎드려서 경배를 할 수가 있습니까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욥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초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욥이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에 없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 재산이 한꺼번에 없어진 것이나 열 남매가 한날 한시에 모두 죽은 사건은 모두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욥은 여기에 분명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누구를 탓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불평을 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신앙의 길에서 떠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여기 욥이 파악한 하나님의 섭리 인식은 아주 예리한 분석입니다. 그러니까 원망을 한다든가 누구를 탓한다든가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 부분에서 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사탄이 두 번째 시험에도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또 시험이 주어집니다.
셋째는 “아내는 잃는 고난”입니다. 세상을 살아 보니까 세상의 것을 다 잃어 버려도 아내는 잃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때 아내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아내는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부부는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또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어 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소중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세상에는 철 없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내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습니다. 욥의 고통이 한층 더 가증된 것은 이 철 없는 아내 때문입니다. 욥이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나니까 아내가 욥을 저주하고는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당신 믿고 살아 봤자 고생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 없는 아내입니다. 세상에 보면 이런 아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식 버리고 집 나가고,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는 말이 나오도록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한 가지씩 빼앗아 갑니다. 평소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무자비하게 격리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고독하게 만들고 외롭게 만들고 소외시켜 버립니다. 사람은 주위로부터 소외될 때 괴로운 고독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주위에서 모두 다 빼앗아 갔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아내까지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을 저주하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래서 더 처절했습니다. 사람의 처지가 이 정도가 되면 별 소리가 다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땅을 치기도 하고, 원망을 하게도 되고, 불평을 하게도 되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곱지 않게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좀처럼 중심을 흐트러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 한 마디 말을 합니다. 그것이 23:10에 나오는 말입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욥은 지금 이 고낭이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시련이고 훈련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여기서도 실패를 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시험이 주어집니다.
넷째는 “건강을 상실하는 고난”입니다. 사람은 재산을 잃어도 살 수 있습니다. 또 벌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잃어도 아내를 잃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잃으면 어렵습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인생도 잃게 되고, 의욕도 잃고, 꿈도 잃고, 내일도 잃고, 모두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욥은 이제 모두를 잃었습니다. 재산도 잃고, 자식도 잃고, 아내도 잃고, 이제는 건강까지도 잃었습니다. 2:7절을 보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다고 했습니다. 온몸이 가려워서 기왓장으로 긁었다고 했습니다. 진물이 나고 피가 나서 개들이 와서 핥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가려워 견딜 수가 없어서 잿더미 속에서 뒹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살 가죽이 뼈에 붙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의 고난은 입체적인 고난입니다. 이것은 속수 무책입니다. 정신 차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욥의 중심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백한 말이 19:26에서 “(욥19:26) 나의 이 가죽,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그럽니다. 이 말은 “이러다가 내가 죽으면 내 영혼이 친히 몸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을 뵈오리라” 그 말입니다. 욥은 여기서 내세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얼마 앞에 두고는 확실하게 죽는 그 날 내가 하나님을 직접 볼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 이 내세관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상황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때 욥이 여기서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자식 죽은 것도 참을 만합니다. 재산 잃은 것도 참을 만합니다. 아내가 도망치고 몸에 병이 든 것도 참을 만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모른 척하고 외면하시는 일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위로가 없습니다. 고독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욥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뇌입니다. 그래서 한 말이 13:24입니다.
“(욥13:24)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하고 항변을 합니다.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하나님은 왜 모른 척하고만 있습니까 그런 말입니다. 그 때 욥을 더 화가 나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친구들입니다. 친구들이 와서 위로한다는 것이 “회개해, 네가 죄가 없으면 이런 고난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그럽니다. 그너니까 욥이 귀를 틀어 막으면서 소리 지르기를 “제발 입 좀 다물라.”하고 화를 냅니다. 이 친구들이 상식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혹시 위로한다고 가서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누가 와서 위로를 한다고 해도 사실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가에 가서 상주에게 위로를 한다는 말이 “안녕하십니까” 그랬더니 상주가 기가 막혀서 “안녕하지 못하니까 이러고 있지 않소” 하더랍니다. 욥에게 가서 무슨 말로 위로를 하겠습니까 그런 때는 위로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같이 울어 주는 일입니다. 무슨 말이 그로 하여금 위로가 될 것입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모른 척하십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다급해서 호소를 해도 기별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 누가 와서 조롱을 한다 해도 견디겠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외면하시는 것만큼은 못 참겠습니다. 그래서 탄식하기를 “어찌하여 얼굴을 내게서 가리우시나이까”하며 탄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었던 바로 그 절규입니다. 욥의 이 피 맺힌 절규를 듣고는 사탄이 마침내 욥에게서 손을 들고 도망갑니다. 사탄이 끝내 항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그대로 승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욥에게 전에 있었던 것보다 배나 되는 복을 주셨고, 10남매를 또 낳고, 140세를 더 살면서, 자손 4대를 보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고난 주일의 아침에 욥의 수난을 통해서 주시는 고난의 의미입니다.
첫째는 “재산을 잃는 고난”입니다. 욥은 그 시대의 부자였습니다. 3절을 보면 욥의 재산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 때 욥이 동방에서 제일 가는 부자였다고 했습니다. 양이 7,000마리, 약대가
3,000마리, 암나귀가 500마리, 소가 500마리, 그 밖에 시종이 여럿입니다.
그런데 짐승을 치던 종들이 갑자기 오더니 이웃 나라 야만인들이 쳐들어와서 종들을 모두 죽이고 목장을 모두 불태우고 짐승떼를 모두 끌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전 재산이 하루 아침에 모두 없어지 것입니다. 어떻게 손을 써 볼 겨를도 없이 하루 아침에 망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애석한 것은 갑자기 어느 날 큰 재산을 잃는 일입니다. 재산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갑자기 재산을 잃어 버리게 되면 충격을 받기도 하고, 어떤 이는 정신을 잃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살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재산은 생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하루 아침에 유산으로 물려 받은 소중한 재산이 모두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때 욥의 심정을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신앙이 위대하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욥은 이 사건의 원인을 하나님에게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셨던 것을 하나님이 가져가신 것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물질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갈 때 이 물질관이 잘 세워져야 합니다. 물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물질의 관리자일 뿐입니다. 물질을 관리하고 필요에 따라 선용하고 선한 뜻을 위해서 활용하는 권한이 주어졌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필요에 의해서 우리로부터 그 물질을 회수해 가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물질을 잃어 버렸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잃어 버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회수해 가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통해서 얻는 교훈이고 우리가 알아야 할 물질관입니다. 사람이 이 같은 물질관에 분명하면 물질 때문에 시험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물질이 많다고 해서 교만할 이유도 없는 것이고 또한 물질이 적다고 해서 비관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욥의 물질에 대한 신앙관입니다. 사탄의 제 일차 시험은 이렇게 해서 실패를 합니다.
둘째는 자식을 잃는 고난입니다. 욥에게는 10남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우애가 좋았습니다. 형제 중에 한 사람이 생일을 당하면 모든 형제들이 한 집에 모여서 즐겁게 보내곤 했습니다. 그 날도 맏아들이 생일이라 모든 형제들이 한 집에 모여서 잔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종이 뛰어어더니 “잔치 잡이 무너져서 10남매가 모두 죽었다.”고 보고를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도 있습니까 재산을 잃어 버리는 아픔이 이보다 더 했겠습니까 그것도 자식 하나가 아니고 10남매 모두가 한날 한시에 한 장소에서 죽어 버렸습니다. 욥은 재산을 잃은 충격도 아직 가시지 않았는데 두 번째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욥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20절을 보면 그 때의 모습을 자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랬습니다. 그냥 앉아서 들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옷을 찢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극도의 슬픔을 당하게 되면 옷을 찢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 나라 사람 같았으면 머리를 쥐어 뜯었거나 가슴을 쥐어 뜯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머리 털을 밀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죽음을 표시합니다. 옛날 우리 나라에서는 죄인에게 상투를 잘라 버렸습니다. 이것은 죽음의 표시입니다. “너는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이다.”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개화기 때 단발령이 내렸지만 사람들이 한사코 상투 자르기를 거부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욥도 머리를 밀었습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하는 말이 21절에서 “(욥1:21)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했습니다. 우리 같은 범인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어떻게 여기서 그렇게 공손하게 하나님께 엎드려서 경배를 할 수가 있습니까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욥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초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욥이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가 여기에 없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전 재산이 한꺼번에 없어진 것이나 열 남매가 한날 한시에 모두 죽은 사건은 모두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욥은 여기에 분명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누구를 탓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발견하지 못하면 불평을 하게 되고 원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때로는 신앙의 길에서 떠날 수 있는 위험도 있습니다. 여기 욥이 파악한 하나님의 섭리 인식은 아주 예리한 분석입니다. 그러니까 원망을 한다든가 누구를 탓한다든가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이 부분에서 받아야 할 교훈입니다. 사탄이 두 번째 시험에도 실패를 했습니다. 그래서 또 시험이 주어집니다.
셋째는 “아내는 잃는 고난”입니다. 세상을 살아 보니까 세상의 것을 다 잃어 버려도 아내는 잃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때 아내가 곁에 있으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아내는 인생의 동반자입니다. 부부는 고난을 함께 나누는 사람입니다. 또 무거운 짐을 서로 나누어 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아내가 소중한 존재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세상에는 철 없는 아내들이 있습니다. 그런 아내는 차라리 없는 편이 낫습니다. 욥의 고통이 한층 더 가증된 것은 이 철 없는 아내 때문입니다. 욥이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나니까 아내가 욥을 저주하고는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이제는 당신 믿고 살아 봤자 고생뿐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철 없는 아내입니다. 세상에 보면 이런 아내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식 버리고 집 나가고,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욥의 입에서 하나님을 욕하고 저주하는 말이 나오도록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한 가지씩 빼앗아 갑니다. 평소에 소중하게 여겼던 것들을 무자비하게 격리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고독하게 만들고 외롭게 만들고 소외시켜 버립니다. 사람은 주위로부터 소외될 때 괴로운 고독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주위에서 모두 다 빼앗아 갔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아내까지도 빼앗아 버렸습니다. 그의 아내가 남편을 저주하고 집을 나가 버렸습니다. 욥의 고난은 그래서 더 처절했습니다. 사람의 처지가 이 정도가 되면 별 소리가 다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땅을 치기도 하고, 원망을 하게도 되고, 불평을 하게도 되고, 하나님을 향해서도 곱지 않게 할 말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좀처럼 중심을 흐트러트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단 한 마디 말을 합니다. 그것이 23:10에 나오는 말입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그럽니다. 그러니까 욥은 지금 이 고낭이 철저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시련이고 훈련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좀처럼 흔들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이 여기서도 실패를 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시험이 주어집니다.
넷째는 “건강을 상실하는 고난”입니다. 사람은 재산을 잃어도 살 수 있습니다. 또 벌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잃어도 아내를 잃어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을 잃으면 어렵습니다. 사람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 것입니다. 사람이 중병에 걸리면 인생도 잃게 되고, 의욕도 잃고, 꿈도 잃고, 내일도 잃고, 모두를 잃어 버리게 됩니다. 욥은 이제 모두를 잃었습니다. 재산도 잃고, 자식도 잃고, 아내도 잃고, 이제는 건강까지도 잃었습니다. 2:7절을 보면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악창이 났다고 했습니다. 온몸이 가려워서 기왓장으로 긁었다고 했습니다. 진물이 나고 피가 나서 개들이 와서 핥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에는 가려워 견딜 수가 없어서 잿더미 속에서 뒹굴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살 가죽이 뼈에 붙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욥의 고난은 입체적인 고난입니다. 이것은 속수 무책입니다. 정신 차릴 사이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욥의 중심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고백한 말이 19:26에서 “(욥19:26) 나의 이 가죽,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그럽니다. 이 말은 “이러다가 내가 죽으면 내 영혼이 친히 몸 밖으로 나와서 하나님을 뵈오리라” 그 말입니다. 욥은 여기서 내세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얼마 앞에 두고는 확실하게 죽는 그 날 내가 하나님을 직접 볼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에는 이 내세관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상황 속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이때 욥이 여기서 무엇보다도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자식 죽은 것도 참을 만합니다. 재산 잃은 것도 참을 만합니다. 아내가 도망치고 몸에 병이 든 것도 참을 만합니다.
그런데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지금 자신을 모른 척하고 외면하시는 일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위로가 없습니다. 고독해서 살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욥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뇌입니다. 그래서 한 말이 13:24입니다.
“(욥13:24)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하고 항변을 합니다. 내가 지금 죽게 생겼는데 하나님은 왜 모른 척하고만 있습니까 그런 말입니다. 그 때 욥을 더 화가 나게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친구들입니다. 친구들이 와서 위로한다는 것이 “회개해, 네가 죄가 없으면 이런 고난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 그럽니다. 그너니까 욥이 귀를 틀어 막으면서 소리 지르기를 “제발 입 좀 다물라.”하고 화를 냅니다. 이 친구들이 상식이 없습니다. 우리들도 혹시 위로한다고 가서는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정도가 되면 누가 와서 위로를 한다고 해도 사실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가에 가서 상주에게 위로를 한다는 말이 “안녕하십니까” 그랬더니 상주가 기가 막혀서 “안녕하지 못하니까 이러고 있지 않소” 하더랍니다. 욥에게 가서 무슨 말로 위로를 하겠습니까 그런 때는 위로하는 방법이 한 가지 있기는 합니다. 그것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같이 울어 주는 일입니다. 무슨 말이 그로 하여금 위로가 될 것입니까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도 자신을 모른 척하십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다급해서 호소를 해도 기별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 누가 와서 조롱을 한다 해도 견디겠는데 하나님이 자신을 이렇게 외면하시는 것만큼은 못 참겠습니다. 그래서 탄식하기를 “어찌하여 얼굴을 내게서 가리우시나이까”하며 탄식을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었던 바로 그 절규입니다. 욥의 이 피 맺힌 절규를 듣고는 사탄이 마침내 욥에게서 손을 들고 도망갑니다. 사탄이 끝내 항복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그대로 승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하나님은 욥에게 전에 있었던 것보다 배나 되는 복을 주셨고, 10남매를 또 낳고, 140세를 더 살면서, 자손 4대를 보고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고난 주일의 아침에 욥의 수난을 통해서 주시는 고난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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