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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승리 (욥1:20-22)

본문

오늘은 욥이 고통과 실패를 딛고 일어선 재기의 과정을 바로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함께 찾고자 합니다. 사람이 실패하거나 고통을 겪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한때 실패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에, 요셉이 한 때 실패했던 것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봉독한 성경 말씀에 나타난 욥은 자신의 잘못이나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겪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고통을 겪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통을 주셨기 때문에 욥이 비참한 고통을 겪은 것입니다. 하루는 하나님 앞에 천사들과 사탄이 함께 모였습니다. “(욥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 여기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부름꾼으로 지음을 받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천사들 중에 타락한 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일종의 “천국 회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 앞에서 저 동방에 살고 있는 욥을 가리키며 극찬을 하셨습니다. “(욥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 이 말을 들은 사탄은 하나님 앞에 항변하기를 “하나님, 욥이 그토록 선하고 올바르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크게 축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욥에게 내리신 축복을 다 거두신다면, 욥을 망하게 하면 욥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배반할 것입니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한번 시험해 보라고 1:12와 2:6절에 두 번이나 반복해 말씀하셨습니다. “(욥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서 욥에게 와서 욥에게 고통을 일으킵니다. 먼저 스바 사람, 갈대아 사람들이 침략해 와서 욥의 종들을 다 죽이고 욥의 재산, 소와 말과 약대 등의 짐승들을 다 탈취해 가 버렸습니다. 한순간에 거지가 되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이 모두 날아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풍이 불어와서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집에 있던 열 자녀들이 함꺼번에 떼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몸에는 중병이 생겨서 온몸에 부스럼이 나고, 종기가 생겨서 고통스럽고 아픕니다.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욥에게 아내는 그가 하도 딱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며 “차라리 죽도록 하시오”라고 말합니다. 오죽 어려웠으면 아내가 남편에게 차라리 죽으라고 이야기했겠습니까 욥이 당한 고통을 이야기로 들을 때는 흥미 진진하지만 막상 그 고통이 내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뼈아픈 고통이겠습니까 얼마나 비참하겠습니까 그 많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다 날아가고, 열 자녀들이 한꺼번에 다 죽고, 몸에는 병까지 생겨서 운신하지 못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이 자기 자신이 잘못해서도 아니고, 남이 잘못해서도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고통이므로 하나님 때문에 이런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욥과 같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합시다.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우리의 모든 재산을 다 날려보내고, 우리 자녀들을 다 죽게 만들고, 우리에게 병까지 주어서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두었다 합시다. 여러분 기분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런 하나님을 믿으시겠습니까 제가 만약 욥과 같은 위체에 있다면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봅니다. 제 마음속의 세 가지 반응을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도 어떤 감정을 가질지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1. 감정적인 반발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너무하십니다. 저는 그래도 잘 믿으려고 애를 썼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올바르게 믿으려 했고, 정직하게 살았고, 의롭게 살아 왔습니다. 남의 물건을 탈취한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올바르게 살려고 발버둥친 저를 이렇게 치시다니요 너무하십니다.” 이런 통곡을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도 종종 이런 감정적인 폭발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모처럼 믿음의 새로운 결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노력을 하는데 이런저런 시험이 밀어닥칩니다. 가정에 우환이 생기고, 사업이 잘 안 되고, 직장에 어려움이 생길 때 어떤 감정을 가집니까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왜 우리를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주십니까” 답답한 나머지 이런 울분이 절로 우러나옵니다. 한 여집사님이 남편을 구원하기 위해서 무척 노력을 했습니다. 10년 만에 남편을 전도해서 교회에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졌습니다. “남편이 교회에 나오면서부터 사업이 어려워졌다고 가끔 투덜댈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런 염려를 토로하였습니다. 그때 그 집사님 마음속에는 “내 남편이 예수를 좀 잘 믿기 시작하니까 이런 시험이 악쳤구나.” 하는 그 고민과 함께 믿음의 회의가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 때문에 이런 고통이 자기에게 밀어닥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적인 폭발을 하지 않았습니다. “(욥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 동물과 사람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동물은 본능과 감정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면서 내일을 바라보며 올바른 것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되어질 때는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가기도 하고 순교를 당하기도 합니다. 동물의 세계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인간은 감정의 올무에서 벗어나서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는 그런 신앙의 안목을 키워가야 합니다. 신앙은 감정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감정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한 가지 성령님이 역사하는 곳에는 꼭 마귀의 시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욥이 의롭게 살고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살 때 사탄이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시샘을 하고 시험을 해서 흔들어댔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사역을 처음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성령님이 충만히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예수님을 돌보고 계셨습니다. 이때 마귀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흔들어 댑니다. 어디 예수님뿐입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결심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잘 하려고 할 때 마귀의 역사가 꼭 일어납니다. 이때 마귀 역사를 이겨야만이 신앙이 굳세어지고, 신앙에 힘이 생기고, 신앙이 성숙되어 가고, 신앙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고난중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운명론에 사로잡히기 쉬울 것입니다. 특히 불교나 유교 문화권에서 살아온 우리들은 어떤 일을 하다가 잘 안 되면 쉽게 체념하거나, 팔자소관 내지 운명론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처녀가 시집 가서 잘 살아도 제 팔자이고, 지질하게 못살고 시집가서 온갖 구박을 받아도 자기 팔자소관으로 돌립니다. 자기 운명이 그렇게 된 것을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윤회사상을 가진 우리의 선조들은 흔히 전쟁의 업이 현세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의 문제를 과거 속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다가 제대로 안 되면 “이것도 내 팔자이지, 내 천생연분이지, 내 운명이지.”라고 생각하면서 쉽게 중간에 포기하거나 채념해 버립니다. 낙심을 합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를 시키고 새롭게 창조해 나가려고 하는 의지가 약해집니다. 우리의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욥은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욥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면 전능하신 하나님과 인간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주고 있는 마귀가 합작해서 나를 지금 못살게 구는데 내 힘으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 나는 망하게 되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하면서 자포자기한 나머지 자살하고 싶은 생각도 가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욥은 믿음과 소망을 버리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자포 자기하지 아니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 때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갔습니다. “(욥2: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 “(욥5:18)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욥5:19) 여섯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
3.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나 때문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실수해서도 아니고, 하나님 때문에 고통을 겪게 되어지면 조용히 고통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착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생각을 해볼 만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그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고통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길을 하나님으로부터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욥이 이러한 방법을 택했고 이것이 우리 신앙인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기가 지극히 사랑하는 자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일부러 환난을 일으킬 때가 있고, 일부러 문제를 제기시켜 주실 때가 있고, 일부러 어느 한 부분을 약하고 어럽게 만들어 두실 때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말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경우가 크게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진지하게 회개히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 회개의 계기를 삼도록 하기 위해 고통을 주십니다. 사실 모든 것이 잘되고 편안할 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로 고통을 겪게 되면, 사업에 실패하거나, 실직하게 되면, 몸이 아파 병원에 조용히 누워 있게 되면 깊이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아 내가 그때 참 잘못했구나. 그때 직장생활 할 때 그 친구에게 좀더 잘했더라면 그 친구가 성공할 수 있었는데 내가 돈이 있었을 때에 그때 남을 좀더 도와 주었더라면 내가 이와 같이 몰락하지 않았을 터인데, 내가 건강할 때 좀더 절제했더라면 이와 같이 병상에 누워 있지 아니할 텐데,” 하는 등의 깊이있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시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시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 고통 때문에 내가 회개하고 주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요나를 보십시오. 편안하고 좋을 때는 자기 마음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니느웨로 가라 했지만 요나는 니느웨 대신 편안한 장소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이때 태풍이 불어 왔고, 결국 물에 빠지게 되었고, 큰 고기의 뱃속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고통 속에 들어가서야 비로소 제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회개시켜 돌이키기 위해서 고통의 계기를 주셨습니다. 욥기서는 모두 42장으로 되어 있는데, 1장부터 41장까지는 욥이 계속 고통을 당하는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욥이 이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인간적인 노력을 기울이며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고통은 해결되지 않습니다. 1장보다는 2장이, 2장보다는 3장이, 4장보다 5장. 갈수록 고통은 더 심해집니다. 이 고통이 욥기서 41장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그런데 42장에 와서 그때서야 욥이 자기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합니다. “(욥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자 그 순간 욥에게 있었던 모든 고통이 다 날아가 없어지고, 하나님은 그에게 제2의 생을 걷도록 하십니다. 그것이 욥기서 42장 마지막의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이 회개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바로 회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서 고통을 거두게 하시고 다시 욥을 일으켜서 고통받기 전보다도 갑절로 더 축복해 주십니다. 그것이 욥기서의 메시지입니다. 회개를 통해 재기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 좀더 겸손해져서 남을 섬기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한 부분을 약하게 하시고 고통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전도자로서 크게 성공한 다음에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가는 곳마다 교회를 세우고 전도의 열매가 넓게 맺혀갑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크게 성공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몸에 육체의 가시가 생겨서 몸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뚜렷이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불치의 병인 것 같습니다. 어떤 병이 생겨서 몸에 통증을 일으킵니다. 마치 가시가 몸을 찌르듯이 몸을 아프게 만듭니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이 문제를 해결받기 위해서 세 번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유대의 관습에 의해서 한 번 기도하는 것은 40일 동안 금식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40일 금식기도를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런데도 육체의 질병이 고쳐지기는커녕 사도 바울이 받은 하나님의 응답은 전혀 달랐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도한 다음에 깨달은 것은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가 너무 크고 너무 많기 때문에,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나로 하여금 자고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교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내개 육체의 가시, 내 한 부분을 약하게 만들어서 아프게 만드셨다. 하나님의 은혜는 약한 데서 온전하니라. 내가 약할 그때에 강하니라. 오히려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노라”라는 것들이었습니다. 내용이 무어입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축복하시고 사랑하실 때에 100% 다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꼭 한두 부분은 약한 점을 만들어 두십니다. 꼭 한 두 부분 고통스런 문제를 남겨 두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한두 부분의 약한 점, 고통스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붙들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미워서 고통을 주시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살도록 하기 위해서 약한 부분을 남겨 두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게 어떤 약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머물게 하는 자리가 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이 약한 부분을 만들어 두시기도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좀더 연단시켜서 더 큰 사람, 더 큰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 더 큰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고통을 주십니다. 하나님꼐서 욥에게 고통을 주신 것은 욥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욥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욥을 더 크게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욥을 더 크게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욥에게 더 큰 일을 맡기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감당할 수 있고 그 축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훈련의 관정으로서 연단시켜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은 처참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낙심치 않고 자신의 믿음을 키워갔습니다. “(욥1:20)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연단시켜서 더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연단을 인내할 수 있고, 그 연단을 믿음으로 이겨갈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약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약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약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의 인생 승리를 마음에 담고 사시기 바랍니다. 때로는 애매하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고, 고통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누구를 원망하시지 마십시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을 가까이하시기 바랍니다.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피할 길이 있고 해결할 대답이 있습니다. 결코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해답이 있습니다. 고통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게 고통을 주시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고통의 의미를 파악해야 합니다. 나를 회개시키기 위해서, 나를 겸손히 섬기는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나를 더 키우고 더 축복하기 위해서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와 같은 뜻을 찾아 자기 인생에서 승리한 욥의 승리를 우리가 안고 살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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