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의 단 (수22:1-34)
본문
본 장은 여호수아가 동쪽에 기업을 얻은 지파들을 돌려보내면서 하는 마지막 당부가 나옵니다(1-9). 그리고 동쪽에 기업을 얻은 지파들이 돌아가다가 쌓은 단 때문에 동서 지파들 사이에 전쟁을 할 뻔했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이 사건들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여호수아는 동쪽에 땅을 얻은 르우벤 사람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제 전쟁이 끝이 났으니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 일은 아마도 주전 1400년경에 있었던 일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가나안 7년 전쟁이 끝나고 즉각 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주전 1400년경에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연대나 숫자를 말해 보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이러한 연대기가 꼭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연대나 숫자를 말해 보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실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연대를 말하지 않을 때는 막연하게 들리던 이야기도 연대를 말하면 역사적인 사실로 실감 있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동안 우리가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연대기도 정확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연대기를 접하면 실감을 느끼게 되고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가 역사라면 으레 연대기를 생각하는 식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건도 연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대를 몰라도 또 연대가 정확하기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전쟁하는 동안 동편의 사람들은 신실하게 그들의 책임을 이행했었습니다. 그들이 처자와 부모를 동쪽에 남겨두고 7년 동안이나 서편의 전쟁에 참여하여 앞장을 서서 싸워서 서편 지파들이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충성스럽고 신실하게 생명을 걸고 도왔습니다. 여호수아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동편 사람들을 칭찬합니다
(3). 이제 전쟁이 끝나고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지파마다 자기의 몫을 얻었고 이스라엘을 위협할 가나안의 세력은 없어졌습니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가나안 사람들은 큰 힘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점령하면 다 점령이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땅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4절에서 안식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안식을 주셨다는 말은 전쟁을 그치고 정착하게 된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서 약속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안식이 주어지자 여호수아는 동편 사람들에게 돌아가거든 전심전력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라고 당부하면서 그들을 동쪽 땅으로 돌려보냅니다. 물론 돌려보낼 때는 빈손으로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얻은 많은 재산과 가축과 금, 은, 동, 철과 의복들을 함께 보내어 남아 있는 사람들과 나누도록 했습니다. 이것들은 전쟁에서 얻은 탈취물이기 때문에 그 탈취물들을 나눔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승리와 안식을 그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서편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크심을 깨닫고 되새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탈취물을 나누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여주며 누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예수님의 사역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엡4:8).
그러므로 여기서 탈취물을 나누는 것은 옛날 이스라엘 동편의 사람들에게 계시를 깨닫게 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기심으로 그들이 그 승리의 증거물인 탈취물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의미로 탈취물을 가지고 가서 나도록 하고 돌려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가다가 요단 강가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착하여 요단을 건너려 하다가 보니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제 요단을 건너면 동쪽과 서쪽은 영영 요단을 중심으로 하여 나뉘어지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훗날 서편 사람들이 동편 사람들을 보고 '너희는 여호와와 상관이 없다. 여호와의 단은 서편에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와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동편 사람들은 여호와의 기업을 함께 받은 한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신분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편 땅을 위하여 동편 사람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싸웠던가 하는 것도 망각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다가 요단에 이르러서 건너려고 할 즈음에야 이러한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편 요단 언덕에 단을 쌓기로 하였습니다. 서편 실로에 쌓은 제단을 본받아 모조단을 쌓았습니다. 대단히 크고 볼 만한 단이었습니다. 10절 에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고 한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단을 세우고 동편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동쪽 땅으로 와버렸던 모양입니다. 이 소식을 서편 이스라엘 자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로 제단 앞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였다고 하는 것(12)을 보아 모일 만한 사람은 다 모였던 것 같습니다. 모여서 의논한 끝에 싸우러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서편 사람들은 동편 사람들을 치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치러 가기 전에 먼저 사람을 파송하여 엄중히 책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비느하스를 대표로 하고 이스라엘 10 지파의 중에서 어른 한 명씩을 함께 보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온 회중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16절에는 '온 회중'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들은 동편 길르앗 땅으로 가서 동쪽 사람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서편의 실로 성막에 있는 단 외에 다른 단을 쌓는 것을 보니 여호와를 떠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여호와의 진노가 온 이스라엘에 내려 망하게 될 것이니다른 단을 쌓아 여호와를 떠나는 패역을 범하지 말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가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명기에서 모세가 명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한 곳에서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는 의식이 온 이스라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장소에서 온 이스라엘이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한 하나님의 똑같은 백성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는 데 아주 중요하였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상숭배를 막는 데도 중요한 방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한 장소의 예배를 강조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둘째는 일부라도 패역하면 온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좋은 실례가 이스라엘 백성이 브올에서 모압 여인들과 행음함으로 백성의 두령들이 목매달려 죽고 백성 중에서도 여인들로 인하여 바알브올 숭배에 빠진 자들과 그 외에 24000명이 죽음을 당한 경우입니다. 백성의 두령들이 목매달려 죽은 것은 온 백성들이 목매달려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연루된 온 백성들을 죽이는 대신 백성의 두령들을 목매달아 죽이도록 했던 것입니다(민25:3-4). 두령들은 온 백성을 대표하여 죽은 셈입니다. 그리고 아간의 사건도 한 사람의 범죄로 온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한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여호수아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일부라도 패역하면 온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로 다루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편 사람들의 패역으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둘째 원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 한 사람이 이스라엘이 되었고 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야곱의 자손 전체가 덧입고 있으니 온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스라엘 한 사람의 뻥튀기와 같습니다. 즉 온 이스라엘 자손 전체가 한 사람 이스라엘이 확대된 것과 같은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와 전체가 떼어놓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후에 사사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 사사들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사시대 이후에는 왕직으로 나타났습니다. 세움 받은 한 사람 왕으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또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혜의 방도였습니다. 온 이스라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다윗이 범죄할 때는 우리야가 남아 있었기에 이스라엘 다윗 왕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라도 남을 때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유지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열왕시대는 선지자와 남은 자에게 이스라엘 이름을 지고 가도록 했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이스라엘로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원리는 결국 하나가 살면 온 이스라엘 전체가 사는 원리입니다. 그루터기 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여호수아 당시의 사람들은 부분이 범죄하면 전체가 벌을 받을 것으로만 이해하고 두려워하였지만, 역으로 부분이 살면 그 부분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이 산다는 것 또한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멀리 온 것 같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어쨌든지 서편 사람들의 책망을 받았을 때 동편의 사람들은 그들이 단을 만든 뜻을 설명했습니다. 그들의 설명한 내용이 21절부터 나오는데 여기에는 동편 사람들의 의도가 진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의도는 특히 24-29까지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단을 쌓은 것은 여호와를 떠나려는 뜻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후일에 동편의 자손과 서편의 자손들 사이에 여호와를 한 하나님으로 섬기는 같은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세운 모조품이라는 것입니다. 즉 서편의 자손들이 동편 자손에게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몫이 없는 사람들이다'(27)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상관없는 자손들이 되지 않기 위하여 증거의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행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후손을 여호와와 관계없는 백성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전에 취한 조처라고 하겠습니다. 이 설명을 들은 서편 사람들은 그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비느하스는 '이렇게 된 것이 모두가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신 덕분이구나 동편 사람들이 범죄하지 않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진노를 받지 않게 되었구나'라고 하고는 돌아가서 동편 사람들의 의도를 잘 전하였습니다. 비느하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으며 다시는 싸워 멸하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동편의 자손들은 그 단의 이름을 엣이라고 불렀습니다.
엣이란 증거란 뜻입니다. '동편과 서편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동편도 서편도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동편이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서편 이스라엘에 떨어지지 않는 동등한 백성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제단 엣은 이러한 확신이 담겨진 소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엣은 동편 이스라엘이 동일한 하나님 백성이라는 신앙의 구현체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본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편 사람들의 이러한 확신은 그들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보았기 때문에 얻어진 결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없습니까 우리가 누구보다 못하지 않는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뢰심이 없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본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 사역의 결과로 오신 성령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오늘날 엣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엣은 우리의 마음에 서 있습니다. 돌이나 세멘트로 세운 제단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세워진 엣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를 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쟁을 종결지은 분이요 안식을 가져다 준 분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물론 이 우리의 믿음도 모조품입니다. 주님이 아버지를 믿었던 믿음의 모조품입니다. 주님의 그 믿음을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모조품만은 아닙니다. 실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 보다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누구와도 하나님의 백성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이런 자들을 오늘 성경은 '우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우리'는 이사야서에도 나타납니다. 아하스 시대에 믿지 않는 아하스와 가난하고 보잘것 없지만 아하스와 같은 죄에 속하지 않는 믿는 남은 자를 구분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 곧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이런 '우리'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없습니까 주를 믿는 자거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 곧 광야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단 동편은 광야 곧 세상에 열려져 있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만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이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땅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함께 세상 어디까지든지 확대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백성 된 것을 분명히 아십시오.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실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연대를 말하지 않을 때는 막연하게 들리던 이야기도 연대를 말하면 역사적인 사실로 실감 있게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동안 우리가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연대기도 정확한 것이 있을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러한 연대기를 접하면 실감을 느끼게 되고 사실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우리가 역사라면 으레 연대기를 생각하는 식으로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사건도 연대를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대를 몰라도 또 연대가 정확하기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아무튼 전쟁하는 동안 동편의 사람들은 신실하게 그들의 책임을 이행했었습니다. 그들이 처자와 부모를 동쪽에 남겨두고 7년 동안이나 서편의 전쟁에 참여하여 앞장을 서서 싸워서 서편 지파들이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을 도왔습니다. 충성스럽고 신실하게 생명을 걸고 도왔습니다. 여호수아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동편 사람들을 칭찬합니다
(3). 이제 전쟁이 끝나고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지파마다 자기의 몫을 얻었고 이스라엘을 위협할 가나안의 세력은 없어졌습니다. 부분적으로 남아 있는 가나안 사람들은 큰 힘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점령하면 다 점령이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땅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을 4절에서 안식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4).
그러므로 안식을 주셨다는 말은 전쟁을 그치고 정착하게 된 것을 의미하며 나아가서 약속이 성취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안식이 주어지자 여호수아는 동편 사람들에게 돌아가거든 전심전력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기도록 하라고 당부하면서 그들을 동쪽 땅으로 돌려보냅니다. 물론 돌려보낼 때는 빈손으로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얻은 많은 재산과 가축과 금, 은, 동, 철과 의복들을 함께 보내어 남아 있는 사람들과 나누도록 했습니다. 이것들은 전쟁에서 얻은 탈취물이기 때문에 그 탈취물들을 나눔으로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승리와 안식을 그들도 함께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서편 전쟁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크심을 깨닫고 되새기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쟁에서 탈취물을 나누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승리를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보여주며 누리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예수님의 사역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엡4:8).
그러므로 여기서 탈취물을 나누는 것은 옛날 이스라엘 동편의 사람들에게 계시를 깨닫게 하는 의미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기심으로 그들이 그 승리의 증거물인 탈취물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의미로 탈취물을 가지고 가서 나도록 하고 돌려보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가다가 요단 강가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착하여 요단을 건너려 하다가 보니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제 요단을 건너면 동쪽과 서쪽은 영영 요단을 중심으로 하여 나뉘어지게 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훗날 서편 사람들이 동편 사람들을 보고 '너희는 여호와와 상관이 없다. 여호와의 단은 서편에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와 우리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동편 사람들은 여호와의 기업을 함께 받은 한 이스라엘 자손이라는 신분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편 땅을 위하여 동편 사람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싸웠던가 하는 것도 망각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여호와의 백성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사람이란 한계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것을 미쳐 깨닫지 못하다가 요단에 이르러서 건너려고 할 즈음에야 이러한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편 요단 언덕에 단을 쌓기로 하였습니다. 서편 실로에 쌓은 제단을 본받아 모조단을 쌓았습니다. 대단히 크고 볼 만한 단이었습니다. 10절 에 '볼 만한 큰 단이었더라'고 한 말씀이 이 사실을 말해 줍니다. 이렇게 단을 세우고 동편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너서 동쪽 땅으로 와버렸던 모양입니다. 이 소식을 서편 이스라엘 자손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실로 제단 앞에 모였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모였다고 하는 것(12)을 보아 모일 만한 사람은 다 모였던 것 같습니다. 모여서 의논한 끝에 싸우러 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서편 사람들은 동편 사람들을 치기로 결정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치러 가기 전에 먼저 사람을 파송하여 엄중히 책망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비느하스를 대표로 하고 이스라엘 10 지파의 중에서 어른 한 명씩을 함께 보내었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 온 회중을 대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16절에는 '온 회중'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들은 동편 길르앗 땅으로 가서 동쪽 사람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서편의 실로 성막에 있는 단 외에 다른 단을 쌓는 것을 보니 여호와를 떠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그렇게 되면 여호와의 진노가 온 이스라엘에 내려 망하게 될 것이니다른 단을 쌓아 여호와를 떠나는 패역을 범하지 말라'고 책망하였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가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신명기에서 모세가 명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은 한 곳에서 여호와를 섬겨야 한다는 의식이 온 이스라엘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 장소에서 온 이스라엘이 예배해야 한다는 것은 한 하나님의 똑같은 백성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는 데 아주 중요하였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상숭배를 막는 데도 중요한 방도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한 장소의 예배를 강조하여 가르쳤던 것입니다.
둘째는 일부라도 패역하면 온 이스라엘에 재앙이 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좋은 실례가 이스라엘 백성이 브올에서 모압 여인들과 행음함으로 백성의 두령들이 목매달려 죽고 백성 중에서도 여인들로 인하여 바알브올 숭배에 빠진 자들과 그 외에 24000명이 죽음을 당한 경우입니다. 백성의 두령들이 목매달려 죽은 것은 온 백성들이 목매달려 죽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연루된 온 백성들을 죽이는 대신 백성의 두령들을 목매달아 죽이도록 했던 것입니다(민25:3-4). 두령들은 온 백성을 대표하여 죽은 셈입니다. 그리고 아간의 사건도 한 사람의 범죄로 온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한 것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하여 여호수아 당시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은 일부라도 패역하면 온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로 다루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편 사람들의 패역으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둘째 원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속에 이미 배태되어 있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야곱 한 사람이 이스라엘이 되었고 이 이스라엘의 이름을 야곱의 자손 전체가 덧입고 있으니 온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이스라엘 한 사람의 뻥튀기와 같습니다. 즉 온 이스라엘 자손 전체가 한 사람 이스라엘이 확대된 것과 같은 셈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와 전체가 떼어놓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후에 사사들에게 나타났습니다. 한 사람 사사들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사시대 이후에는 왕직으로 나타났습니다. 세움 받은 한 사람 왕으로 인하여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또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은혜의 방도였습니다. 온 이스라엘 중에서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다윗이 범죄할 때는 우리야가 남아 있었기에 이스라엘 다윗 왕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라도 남을 때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이름을 유지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열왕시대는 선지자와 남은 자에게 이스라엘 이름을 지고 가도록 했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이스라엘로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세우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원리는 결국 하나가 살면 온 이스라엘 전체가 사는 원리입니다. 그루터기 원리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여호수아 당시의 사람들은 부분이 범죄하면 전체가 벌을 받을 것으로만 이해하고 두려워하였지만, 역으로 부분이 살면 그 부분을 통해서 온 이스라엘이 산다는 것 또한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멀리 온 것 같습니다. 이제 돌아갑시다. 어쨌든지 서편 사람들의 책망을 받았을 때 동편의 사람들은 그들이 단을 만든 뜻을 설명했습니다. 그들의 설명한 내용이 21절부터 나오는데 여기에는 동편 사람들의 의도가 진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의도는 특히 24-29까지 잘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단을 쌓은 것은 여호와를 떠나려는 뜻으로 한 것이 아니라 후일에 동편의 자손과 서편의 자손들 사이에 여호와를 한 하나님으로 섬기는 같은 백성이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세운 모조품이라는 것입니다. 즉 서편의 자손들이 동편 자손에게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몫이 없는 사람들이다'(27)고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호와와 상관없는 자손들이 되지 않기 위하여 증거의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행동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후손을 여호와와 관계없는 백성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전에 취한 조처라고 하겠습니다. 이 설명을 들은 서편 사람들은 그것을 좋게 여겼습니다. 비느하스는 '이렇게 된 것이 모두가 여호와께서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신 덕분이구나 동편 사람들이 범죄하지 않으므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진노를 받지 않게 되었구나'라고 하고는 돌아가서 동편 사람들의 의도를 잘 전하였습니다. 비느하스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도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찬송하였으며 다시는 싸워 멸하자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동편의 자손들은 그 단의 이름을 엣이라고 불렀습니다.
엣이란 증거란 뜻입니다. '동편과 서편 사이에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되시는 증거'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동편도 서편도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섬기는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으로 이러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동편이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코 서편 이스라엘에 떨어지지 않는 동등한 백성이라는 확신이 강하게 담겨 있습니다. 제단 엣은 이러한 확신이 담겨진 소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엣은 동편 이스라엘이 동일한 하나님 백성이라는 신앙의 구현체입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본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편 사람들의 이러한 확신은 그들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보았기 때문에 얻어진 결론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확신이 없습니까 우리가 누구보다 못하지 않는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뢰심이 없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본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 사역의 결과로 오신 성령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을 우리 하나님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오늘날 엣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엣은 우리의 마음에 서 있습니다. 돌이나 세멘트로 세운 제단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세워진 엣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를 주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전쟁을 종결지은 분이요 안식을 가져다 준 분이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물론 이 우리의 믿음도 모조품입니다. 주님이 아버지를 믿었던 믿음의 모조품입니다. 주님의 그 믿음을 성령님으로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은 단순한 모조품만은 아닙니다. 실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사람들 보다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구원받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믿는 누구와도 하나님의 백성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의 하나님입니다. 이런 자들을 오늘 성경은 '우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우리'는 이사야서에도 나타납니다. 아하스 시대에 믿지 않는 아하스와 가난하고 보잘것 없지만 아하스와 같은 죄에 속하지 않는 믿는 남은 자를 구분하여 부르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자 곧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들을 부르는 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은 이런 '우리'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없습니까 주를 믿는 자거든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세상 곧 광야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요단 동편은 광야 곧 세상에 열려져 있는 장소입니다. 하나님과만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이 동편과 서편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땅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함께 세상 어디까지든지 확대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이스라엘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백성 된 것을 분명히 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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