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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을 사라 (렘32:6-15)

본문

강철왕 카네기의 사무실에는 그가 아끼는 그림 한 폭이 걸려 있답니다. 그 그림은 유명한 화가의 작품도 아니였고, 값나가는 골동품도 아니였습니다. 그 그림은 커다란 나룻배에 노 하나가 걸쳐 있는 그림으로 썰물 때에 밀려 모래 사장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볼품없고 처절하까지 한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밑에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오리라”라는 글귀가 씌어 있었습니다. 카네기는 춥고 배고프고 초라했던 청년기에 그 글귀를 보고 소망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밀물 때를 기다리는 마음”, “눈에 덮인 나뭇가지를 보면서 연두빛 새싹을 그리는 마음”, “먹구름을 보며 그 뒤에 숨어 있는 햇빛을 보는 마음”, 바로 이것이 희망입니다. 본문의 상황 지난주에 오늘 보았던 본문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오늘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시한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상황이 이랬습니다. 본문은 유대민족사의 희망의 끝, 그 희망이 마지막 벼랑에 몰려 있던 역사의 무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때는 주전 587년, 그러니까 586년에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하기 7,8개월 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당년 57세였던 선지자 예레미야는 조국에 다가오고 있는 불길한 미래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하다가 시드기야왕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에게 그의 친척 한 사람이 찾아 옵니다. 예레미야의 숙부 아들 하나멜(7절)입니다. 숙부의 아들이니까 사촌 사이인 그가 찾아와서 ‘당신도 형편이 어렵겠지만 내가 지금 너무나 어려우니 내 밭을 사달라’(7절)고 합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을 동정은 못할 망정 자기 경제 형편이 어렵다고 예리미야에게 자기 밭을 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럴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그 당신에는 친척사이에만 땅의 매매가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가 지금 어느 상황입니까 전시의 상황입니다. 나라가 망하기 일보 직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때에 무슨 밭이 필요하겠으며, 부동산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런 때는 오직 현금만 필요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9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이런 상황에서 이 밭을 삽니다.
그런데 그가 이 밭을 사게 된 것은 그가 정신이 이상해서, 뭔가 모자라서 산 것이 아니였습니다. 예레미야는, 물론 나라가 어려워지고, 심지어 나라를 잃어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 민족은 반드시 회복된다, 설사 잃어버려지는 경우가 있을지라도 다시 정상화 될 것이고, 그 때 이 밭은 대단히 쓸모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밭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단순히 밭을 산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예레미야가 밭을 산 것은 믿음의 결정이었습니다. 그가 밭을 사는 행위는 미래를 사는, 희망을 사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지금 그의 조국의 앞날에 먹구름이 짙게 드려워져 있었지만 그는 조국의 미래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 자신의 상황이나 앞날을 볼 때에 어떻습니까 ‘이 어려운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어려운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먹고 살아야 하나’할 이런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있는 분이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이 기대했던 대로 다 이루어지리라 바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뭔가 좀 될줄 알았는데 되기는커녕 더 힘들어가고 어려워져 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앞을 보고, 뒤를 보고, 옆을 보아도 별로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고 캄캄한 절벽과 같은 이런 때야 말로 역설적인 희망을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 희망을 창조라도 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이런 일에 관해서 예레미야는 우리에게 모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희망을 창조해서라도 유다의 민족,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밭을 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떻게 이 절망적인 암울한 시대에 희망을 창조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을것인가에 대해서 지난주에 말씀을 드리면서, 사람의 말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암울한 시대에 희망을 창조하는 자로 살아 갈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말에 희망을 걸고, 사람의 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움직일때에 희망을 창조하는자가 되어집니다.
2.개인의 유익이 아닌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만드는 자로 살아가려면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추구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대가 어두워지면, 절망의 때가 되면 사람들은 그저 자기밖에 모릅니다. 나혼자 몸 도사리고 살길 마련하면 끝이 라는 생각에, 내가 살기 위해서 언제든지 공동체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참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한가지 들었습니다. 어떤 가정에 젊은 여인이 가정이 너무 어렵다 보니까 자식들을 내버려 두고 자기 살겠다고 도망을 갔다고 합니다(어린 자식들 내버려 두고 말입니다). 이런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가끔씩 듣는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다 자기가 살겠다고 가정을 팽개치면 그것이 어떻게 자기가 살겠습니까 그러나 공동체의 무너짐이 개인의 몰락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쉽게 깨닫지 못합니다. 공동체를 살려야 내가 삽니다. 가정을 살려야 내가 살고, 교회를 살려야 내가 살고, 국가를 살려야 내가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진리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러면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리하면 이 모든 것(개인적으로 필요한 모든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필요를 위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희생해 버립니다. 즉 내게 주일날 친구와 중요한 약속이 있다면 그 약속을 위하여 예배를 드리지 않고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나가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레미야가 밭을 샀던 것은 개인적으로는 희생입니다. 당장은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한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내 행동은 주변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매우 유익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판단을 했습니다. 당장에 자기에게는 손해이지만 그는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며 밭을 산것입니다. 재미 있는 것은 예레미야가 밭을 사기 위해서 계약을 체결할 때 매매를 증서를 쓰는데, 매매 증서를 한 장이 아니라 두장을 씁니다. 하나는 인봉을 해서 토기 속에다 집어넣습니다. 즉 영구 보존을 위해서입니다. 세월이 좋아 지는날, 그 미래를 내다보고 밭을 사기로 계약을 했던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또한 장은 인봉하지 않았습니다. 32:10-11을 읽어 보겠습니다. 11절 말씀대로 인봉하는 것이 그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매매 문서는 인봉치 않고 개봉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다 볼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리고 그 증서를 조인하는 식을 예레미야가 비록 죄수의 몸으로 있지만 자기를 찾아 왔던 사촌과 함께 일대일로 조용히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시위대 뜰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했습니다(12절)
왜 이런 행위가 필요 했겠습니까 그가 공개적으로, 인봉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매매 계약을 체결한 이유는 밭을 산 것을 선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절망의 시대에,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시대에 그는 희망을 전염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밭을 샀습니다. 쓸데 없는 것 같지만 내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셨습니다. 이 땅은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다시 건강해 질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것이 정상화 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 이 밭이 꼭 필요 하게 될 것입니다.” 그가 밭을 산것은 희망을 전파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했을 때 그것은 얼마나 상징적인 행동이 되었을까요 그가 하는 말과 행동이 절망의 시대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희망의 도전이 되었겠습니까 저는 우리 시대에 이런 상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위축되고 움추러져 있는 시대에 희망을 선전하는 상징적인 행위가 얼마나 좋은 것이 되겠습니까 이런 모습이 성경에 보면 나옵니다. 이제 유다 나라가 곧 멸망해야 할 이런 상황에, 모르드개에게 전해진 에스더의 행동은 모르드개 뿐 아니라 유다 민족 전체에 큰 희망이었습니다. 하만 이라는 악한 사람의 모함에 의해 유다 민족 전체가 죽을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에스더가 왕의 허락이 없이 나아가면 죽을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 3일동안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자세로 기도하며 나갈 때에 유다 민족의 사람들은 큰 힘을 얻었습니다. 에스더 한 사람의 희망의 상징적인 행동은 에스더는 힘이 들었지만 유다 민족 전체가 힘을 얻고, 다시 살아나난 일이 있었습니다. 세계 2차대전이 일어났습니다. 영국 런던이 첫 번째 폭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튿날 아침에 런던에 있던 모든 신문사의 기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답니다. 그때 한 기자가가 이런 제안을 했답니다. “영국 언론은 사회에 대해서 아주 예리한 비판적인 안목을 가진 언론으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비판할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전시입니다. 지금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비판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이제 우리 잠시 동안만은 희망을 선전하십시다. 희망의 기사를 쓰십시다. 신문에서 희망의 그림을 보게 합시다. 우리가 어려워 낙심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다는 낙관과 희망을 우리 민족에게 주도록 하십시다.” 그들은 이 일에 합의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모든 기사의 논조가 달라 졌습니다. 전쟁에 대한 긍정적인 매세지가 실려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 출정하는 젊은이들의 늠름한 모습들이 보도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사랑하는 아들을 전쟁터에 내 보내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러 모인, 예배당을 꽉꽉 채우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지도자들의 희망의 찬 메시지가 실리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한 순간 영국 국토 전체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희망을 믿기 시작했고 승리를 믿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런 시대를 맞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희망을 증거해야 할 시대라고 믿습니다. 부정의 언어 대신 긍정의 언어를 말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안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되는 이야기를 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할 수 있다는, 하면 된다는 이런 믿음을 증거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며,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천국을 증거해야 할 때라고 믿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식구들과 이웃에게 희망을 심고 희망을 선전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때 우리 자신이 살것입니다. 그때 우리 가정이 살것입니다. 그때 우리 교회가 살것입니다. 그때 우리 나라가 살것입니다. 어떻게 희망을 만드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개인의 유익, 개인의 삶에만 초점을 맞추지 말고 무대를 넓히십시오. 내가 속한 공동체를 바라볼 줄 아는자, 그리하여 그 공동체에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결단과 용기를 가져 보십시오. 그로 인하여 반드시 희망의 불꽃이 타 오르게 될 것입니다.
3.가까운 오늘이 아니라 멀리 있는 내일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불안합니다. 잠시후도 불안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안하고 초조한 이 현실 건너편에서 확실히 다가올 빛나는 미래를 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비젼,꿈 이라고 합니다. 비젼은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치 독일 수용소에 갇혀있었던 유명한 심리학자 빅터 프랭클 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료들이 삶을 포기하고 죽어가는 광경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친구 여러분, 저 조그마한 창이 보이지 않습니까” 한 죄수가 신경질적으로 대답을 합니다. “봐야 회색 담밖에 없지 않소.” “아니, 그 회색 담벼락 저 건너편에 있는 푸른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밤에도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십시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현신은 차가운 회색 벽과 같습니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가정, 내일이 보이지 않는 우리 사회, 내일이 보이지 않는 직장과 사업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차가운 회색 벽 저건너편에 있는 별들을 볼수 있어야 합니다. 아직 내게는 성취되지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내게 하신 약속의 말씀과 환상들, 아직 내게 이루어지 지고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중에 내게 확신을 주셨고, 감동을 주셨고, 음성을 주셨던 응답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 앞에 놓여 있는 현실은 아직도 자식을 얻지 못하는 참 안타까운 세월들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결코 실망하지 않고 굳게 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해주시고,보여 주셨던 말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현실 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나갔을 때에 그 꿈을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어릴적에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의 볏단을 향해 열한 볏단이 절하는 꿈과 별들의 꿈을 꾸었습니다. 요셉을 들어 쓰시고, 축복하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이루어질 일을 미리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의 현실은 캄캄한 밤이었으며, 봐야 회색 담벼락이었습니다. 그의 꿈이 이루어 지기는커녕 형들에 의해 팔려가게 되고, 그리고 누명에 씌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이 절망하지 않았던 것은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분명한 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어렵다구요.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런 어려운 시대에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으로 세워지는 한 우리에게는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가 반드시 일어 날것입니다. 지금 당장만 생각하지 말고, 내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내일을 바라 보십시다. (롬 8: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예레미야는 희망을 선전하고 희망을 심기위해서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은 일, 그리고 자기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서 희망을 그 사회에 전파했던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에 보면 이런 애기가 있습니다. 그가 그리스의 큰 전쟁에 출정하기 직전에, 그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대대적인 전쟁에 출정하기 직전에 그는 자기의 보물창고를 열어 보물을 모두 꺼내서 자걔 휘하의 장군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답니다. 한 참모가 물었습니다. “보물을 하나도 남겨 두지 않고 다 나누어 주시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알렉산더 대왕이 이렇게 말했답니다. “나는 가장 중요한 보물을 남겨 두었네. 바로 희망을 남겨 두었네. 나는 동과 서로 나누어진 이 세계가 나의 꿈으로 하나가 되는 위대한 희망을 가지고 있네. 그리고 이 희망을 위해서라면 나는 이 보물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네.” 그가 창고에 가두어 두었던 보물보다 더 위대한 보물은 희망이었습니다. 세계를 향한 그의 비젼이었습니다. 그는 그의 위대한 비젼의 실현을 위해서 그 어떤 대가도 지불 할 수 있는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시대에 내일의 꿈을, 하나님나라에 대한 꿈을,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실 일에 대한 꿈을 꿀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위대한 일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역사가 어렵습니다. 시대가 어렵습니다. 이 어두운 시대 가운데 우리 교회를 세워 주신 목적은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참 희망, 소망을 갖게 하시기 위해서 세워주셨다고 믿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 믿는자들을 세워주심은 우리 믿는자들을 통하여 꿈을 심어주시기 위함인줄 믿습니다.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이 꿈을 가지고 있다면 주께서 인도해 주실 것이고,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한 분이 선교 대상 지역을 답사하는 도중에 정글에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지역에 사는 토인 한 사람을 가이드로 고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이상한 데로 데리고 다닙니다. 그래서 “당신 도대체 길을 아시오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요”했더니 토인이 웃으면서 하는 소리가 “선교사님, 정글에서는 길이 없어요. 내가 길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14: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지금 이 시대에도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비젼을 가진 사람들에게 주께서 길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복된 길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가 우리를 다시 일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어렵습니다. 힘든 시대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사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좇아가고, 공동체를 위하여 내가 희생할 각오로 나아가며, 지금 당장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일을 바라보고 나가는 사람들에게 이 힘들고, 어려운 시대가 오히려 복이 될것입니다. 앞날이 유망한 어떤 조각가가 작업 도중 그만 불의의 사고를 당해 오른손을 쓸수 없게 됐습니다. 조각가는 한동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실의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나에게 왼손이 있지 않느냐는 생각이 퍼뜩 들어 그때부터 왼손을 사용해 작품에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오른손을 사용할 때의 작품보다 더 뛰어난 작품이 왼손에 의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조각가는 이 작품의 제목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고 붙였답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있는 것을 다 잃는다 해도 나에게는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한 우리들은 이전 보다 더 좋은 축복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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