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방향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사66:9)
본문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될 신앙의 방향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있고, 또한 교회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인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속하여 목자의 말씀을 따르며 모든 성도들이 화합하여 선(善)을 이 루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우리는 화합(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공유하는 차원이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차원 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자 개개인의 신앙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 약 각자 개개인의 신앙이 다 제 갈길로 감으로 인해서 교회가 퇴보 의 길을 걷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각자 개개인의 신앙은 제대로 된 것 같은데 교회가 퇴보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직 신앙은 공유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되어서 진전의 방향, 즉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즉, 어떠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책망이 임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어떠한 길에서 돌이켰다고 했을 때 그것이 (각자 개개인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교회의 전체가 나아가는데 (+) 로 작용해야지 (-)로 작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무엇을 깨달았을지라도, 무슨 일을 할지라도 그것이 항상 교회에 (+)로 작용되어야 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된다는 사실 을 반드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될 신앙의 방향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 신의 정욕이나,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 교만 등을 버리고 오직 교회에 유익과 덕을 세우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유익 과 덕을 앞세우는 교회가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서 유익과 덕은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결국 교회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 고 사명을 향하여 발맞취 나아갈 때 교회는 승리할 수 있으며, 마 지막 때 하나님이 교회를 측량하실 때 하나님 앞에 인정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공유되어야 하며, 유익과 덕을 앞세워야 되며, 또한 모든 성도가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고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야 된다. 유익과 덕을 앞세움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유익과 덕을 앞세울 때 사단은 교회에 역사하지 못한다.'' 공유하는 차원을 이룸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함이며, 모든 성도가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고 나아감은 교회에 생명감이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 세 가지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교회는 능히 일어설 수 있다.
세 가지 형태(방향)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이사야서 66장 9절의 본문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께서는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부 르시고 택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를 인도하셔서 열매를 거두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즉,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구원의 문을 닫힌 문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시겠냐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열린 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열린 구원이라는 것을 믿고 그것을 전제로 하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배워 보도록 하겠 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의 방향의 형태로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면 그 세 가지의 방향의 역사 형태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잠시 배워 보 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수용하고, 의지해야 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은 내 안의 하나님, 즉 나의 지각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일하시는 하나님, 즉 나의 사명이 되시고, 나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 국은 이 세 분의 하나님이 내 안에 나의 머리로서 계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이 하나인데, 이렇듯 세 가지 역사 형태로 분류가 됩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모습이자 나에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성령님나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명을 향하여 나아간다 하지만 부분적인 인간의 머리로써 생각하기엔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란 참 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 독특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마치 혼선인듯이 생각하는 경우 가 있는데 그와 같은 생각은 부분적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 로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나도 부분적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주시는 신앙의 환경 안에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라는 말들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방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독특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였구나!"하고 깨닫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시며, 하나님은 어디든지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역사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 면 능히 모든 어려움의 환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을 광야에서 헤매었는데 만약에 그들이 이 세 가지의 방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 다면, 그들은 40 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헤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잠시 출애굽을 예로서 세 가지 형태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 해서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은 애굽의 압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나님을 바라봐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수용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애굽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빠져나오게 하실 수 있는 분이,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스 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수용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진정한 가치로 여기지 않았다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우리가 한 번 생각 해 봅시다.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수용하고 의지해야 할 첫 번 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모세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 한 하나님의 법(뜻)과 모든 명령은 모세를 통해서만이 나타나게(전 달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세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이는 (이동하는) 모든 방향의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통한 하나님을 만나지 아니하면 그들의 구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환경의 하나님이십니다. 잠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 계신가 하면, 그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종살이 하게끔 만드 신 하나님이 계셨고, 또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순탄하게 애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끔 쫓기고 쫓기는 상황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또한 40 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헤매게 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이 모든 환경의 설정이 율법과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잘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수용해야 될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환경의 하나님, 이 세 가 지 형태의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머리의 비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수용해야 될 세 가지 형태 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해야 될, 우리 안에 절대적으로 존재하셔야 될, 내 안에 잊어버리지 말 아야 될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애굽 에서 종살이하는 것이 좋아. 나는 이곳에서 나가기 싫어."라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을 향한 구원의 역사는 시작될 수도 없었을 것 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에서 나가고자 하는, 즉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 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모세를 통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였다면 그 때 그때의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없는고로 그들에게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 를 통한 하나님, 즉 모세의 하나님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하나님이 핵이고, 그 나머지는 수용하고 가치를 보존해야 될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 모세의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매달려야 되고, 놓지 말아야 될 하나님이 시기 때문입니다. 즉, 인내해야 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보고 혼선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분적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수용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데서 벌어진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따르는 우리 또한 인생을 좇아가는 것이 아닌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보고 좇아 가지 않고 가나안 땅만을 보고 좇아 갔기 때문에, 즉 그것을 인생 속의 목표로 삼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가나안 땅을 취하지 못했 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면 그들이 왜 그런 믿음없는 모 습을 하나님 앞에 보여 드렸겠습니까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 속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가 취하고자 원하는 것, 우리가 얻고자 원하는 것은 인생 속의 목표가 아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 을 수 있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모세는 마치 방송 보도를 위해서 나가 있는 중계차와도 같습니다. 방송에 있어서 가장 중요 한 것, 핵의 point가 되는 것은 보도하고자 원하는 내용입니다. 잠 시 어떠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서 나간 중계차를 생각해 봅시다. 보도진들이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서 중계차를 타고 계속적으로 따 라가면서 그 상황에 맞게 모든 것을 신속하게 찍어서 본부 수신탑 으로 송신을 해 주면 본부 수신탑은 중계차에서 취재해서 보내온 내용을 받아서 가정 텔레비전으로 송신을 해 줍니다. 바로 모세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좇아다니는 하나님의 눈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 한 존재인 것입니다. 중계차가 송신한 것을 방송 본부가 수신하여 가정 텔레비젼으로 송신을 하게 되는데, 결국 방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보도 내용이듯이 믿음 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의 발견인 것입니다. 중계차에서 보내온 내용을 받은 방송 본부, 텔레비젼은 그 내용을 수용한 것뿐, 그 신호를 받 은 것뿐입니다. 이렇듯 모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며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고, 세 번째로는 그 자세로써 환경을 이길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독특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잉태케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해산케 하실 것입니다. 결국에 가선 그 부르신 자를 알고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숙명으로 그 뜻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이 계시 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데, 우리는 약속의 하나님을 또한 바라 봐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절대 기준적으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될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계신 하나님과, 늘 취해야 될 하나님과, 주위의 모든 환경을 통해서 다가오는 하나님, 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의 실체를 늘 체험하고 만나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 가지 형태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역사를 눈을 열어서 바라보지 못한 까닭에 부분적인 인간의 틀에 박힌 생각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역사하신 것을 보고도, 홍해가 그 자리에서 갈라진 것을 보고도 왜 그들은 가나안 땅을 취 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 가지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우리는 영적 가나안 땅인 천국을 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로 하여금 자기들 을 추적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가나안 땅을 자기들에게 공짜로 넘겨 주신 것 같은데 그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서 싸움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즉, 그런 환경들을 계속적으로 만들어 가신 그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그들이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차원에서 바라보지 못함으로써 환경에만 급급 한, 자신이 살기에만 급급한 그런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 의 역사를 이룰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졸장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도 오묘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 당장 잘 되는 것만 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즉, 지금 잘 되지 않는 것, 나에게 마찰 로 느껴지는 것 등 나의 방향과는 아주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는 모 든 요소들도 다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환경의 하나님, 이 세 가지의 방향으 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그들이 다 생각할 수만 있었어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단 두 명만이 가나안 땅을 취하게 되는 이런 황당한 사건은 벌어지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정말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구원의 역사를 하십니다.
1 수용해야 되는 가치의 하나님이 계시고,
2 내 안에서 내 머리 되신, 즉 그때 그 때 나의 지각이 되시는, 나와 동해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3 나 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환경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틀 자체로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한 마디로 스케일이 커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사명자로서, 하나님의 택한 자로서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역사를 바라봐야 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결국에 가선 넘어지게 되는 것 입니다. 즉, 그 순간 순간만을 바라보다가 끝나버리고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장부가 되려면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심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을 누구라고 말하리이까"라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 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너희들의 하나님 이다라고 말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이제는 나를 부르시고 진정으로 나를 이끄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역사는 이 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구원으로 인도함을 받는 첫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르신 자와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 부르신 자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이 루시는 하나님, ''부르신 자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 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룸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이시다.'' 즉 성령님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전투적인 신앙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우리에게 숙명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하나님 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원함은 구약 때나 신약 때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환경 에만 급급하면, 자신이 사는 구멍만을 찾기에 급급하면 우리는 절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고개를 조금만 들면 놋뱀을 바라볼 수 있는데 불뱀에 뜯기는 자신만 쳐다보다가 결국 죽게 된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이겠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놋뱀을 바 라보면 사는데 왜 자신이 살기에만 급급하여, 환경에만 급급하여 죽음의 길로 가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 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 계속적으로 나에게 방향을 알려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미 풀어진 (나온)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은 계속적으로 풀어나아가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자를 기억한 자가 그때 그때마다 계속 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취함으로써 주위의 모든 환경을 수용하게 될 때 급기야는 전투적인 (사명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것을 알았던 자였습니다. 그들은 부르신 자를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그들에게 임한 주위 의 환경이 자신들이 살기에만 급급한 그런 환경으로 다가오지 않음 으로써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의 정탐꾼과 같지 않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 왜 겁을 내느냐"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 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자신들을 좇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 이 자신들로 하여금 전투적인 신앙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명감으 로 넘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 이 살기에만 급급해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방향이 되시는 하나님 은 동시에 다가오시고, 증거되시고, 나타나시고, 요구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깊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죽은 그리스도인이다. 머리는 있는데 뇌가 없는 사람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존재 자체가 없는 사람입니다. 머리만 있고 뇌가 없는 사람 에게 "네가 누구냐"라고 아무리 물어보십시오.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말을 하지 못 합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이런 이치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가 있어야 됩니다. '' 만약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는 죽은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원래부터 나를 부르신 자, 그리고 나와 하나되어야 될 하나님, 또한 나에게 주신 모든 환경의 틀을 내가 수용함으로써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시는, '위대함' 이라는 형용사가 따라붙게 하는 그러한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 을 우리는 늘 만나야 됩니다. 이 세 가지의 형태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실족지 아니할 것이며, 우리를 잉태케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산케 하시고 또한 해산케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의 태를 닫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열린 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시라 생각하시며 모든 방향 에서 나오는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시는 그리스도인들 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뜻과 방향과 계획의 역사가 참으로 오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또한 위대한 차원의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될 것 입니다. 부르신 자를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회가 더욱 빛나기 위해서는
1 신앙을 공유해야 하며
2 유익과 덕을 앞세워야 하며 ''유익과 덕을 앞세울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을 뿐더러 사단의 더러운 역사를 막을 수 있다.''3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고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야 됩니다. 부 르신 자를 기억하고 그 부르신 자와 동행하는 삶이 나의 숙명이 되 기까지.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의 숙명이 되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가 강퍅케 되던, 그 바로가 좇아 오 던, 끝까지 고난이 있던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요동하지 않고) 변 치 않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켜야만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들의 구원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전해 드린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시야를 열어주기 위함입니다. 졸장부가 되지 말고, 진정으로 위대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르신 자를 기억하는 자가 진정으로 그분과 동행했다면 그는 그 동행하는 차원 에서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었어야만 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는 두 명밖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포화 상태로 수용한 사람은 금강석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누구도 깰 수 없습니다. 시험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바라보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은 샬롬, 라파, 닛시의 하나님과도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어 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에 속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자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인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에 속하여 목자의 말씀을 따르며 모든 성도들이 화합하여 선(善)을 이 루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의 교회 안에서 우리는 화합(협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공유하는 차원이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차원 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자 개개인의 신앙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 약 각자 개개인의 신앙이 다 제 갈길로 감으로 인해서 교회가 퇴보 의 길을 걷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입니다. ''각자 개개인의 신앙은 제대로 된 것 같은데 교회가 퇴보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오직 신앙은 공유하는 차원이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되어서 진전의 방향, 즉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 합당한 것이다. 즉, 어떠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책망이 임함으로써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어떠한 길에서 돌이켰다고 했을 때 그것이 (각자 개개인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교회의 전체가 나아가는데 (+) 로 작용해야지 (-)로 작용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가 무엇을 깨달았을지라도, 무슨 일을 할지라도 그것이 항상 교회에 (+)로 작용되어야 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야 된다는 사실 을 반드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될 신앙의 방향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 신의 정욕이나, 자신이 추구하는 방향, 교만 등을 버리고 오직 교회에 유익과 덕을 세우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유익 과 덕을 앞세우는 교회가 합력하여 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서 유익과 덕은 참으로 귀중한 것입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가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고 있지 아니하면 결국 교회는 성장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 고 사명을 향하여 발맞취 나아갈 때 교회는 승리할 수 있으며, 마 지막 때 하나님이 교회를 측량하실 때 하나님 앞에 인정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공유되어야 하며, 유익과 덕을 앞세워야 되며, 또한 모든 성도가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고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야 된다. 유익과 덕을 앞세움은 사단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유익과 덕을 앞세울 때 사단은 교회에 역사하지 못한다.'' 공유하는 차원을 이룸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교회가 되기 위함이며, 모든 성도가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고 나아감은 교회에 생명감이 있게 하기 위함이다. 이 세 가지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교회는 능히 일어설 수 있다.
세 가지 형태(방향)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이사야서 66장 9절의 본문 말씀은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께서는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나는 해산케 하는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부 르시고 택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를 인도하셔서 열매를 거두게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즉,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구원의 문을 닫힌 문으로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를 구원으로 초청하시겠냐는 것입니다. 구원의 문은 열린 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열린 구원이라는 것을 믿고 그것을 전제로 하면서 우리가 알아야 할 세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배워 보도록 하겠 습니다. 하나님은 세 가지의 방향의 형태로 역사를 하십니다. 그러면 그 세 가지의 방향의 역사 형태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 잠시 배워 보 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은 우리가 수용하고, 의지해야 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두 번째 하나님은 내 안의 하나님, 즉 나의 지각이 되시고,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일하시는 하나님, 즉 나의 사명이 되시고, 나를 운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 국은 이 세 분의 하나님이 내 안에 나의 머리로서 계셔야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이것이 하나인데, 이렇듯 세 가지 역사 형태로 분류가 됩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모습이자 나에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성령님나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명을 향하여 나아간다 하지만 부분적인 인간의 머리로써 생각하기엔 하나님의 뜻을 모를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기란 참 으로 힘들고 어렵습니다. 이 독특한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마치 혼선인듯이 생각하는 경우 가 있는데 그와 같은 생각은 부분적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 로 이해하고 수용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나도 부분적이기 때문에 어려움을 주시는 신앙의 환경 안에서는 "참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라는 말들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의 방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독특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였구나!"하고 깨닫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시며, 하나님은 어디든지 살아 역사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역사이다."라는 것을 우리가 기억한다 면 능히 모든 어려움의 환경 속에서도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간을 광야에서 헤매었는데 만약에 그들이 이 세 가지의 방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했 다면, 그들은 40 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헤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잠시 출애굽을 예로서 세 가지 형태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에 대 해서 배워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은 애굽의 압제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해야만, 하나님을 바라봐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수용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애굽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빠져나오게 하실 수 있는 분이, 구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스 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수용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진정한 가치로 여기지 않았다면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을 우리가 한 번 생각 해 봅시다. 이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수용하고 의지해야 할 첫 번 째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모세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 한 하나님의 법(뜻)과 모든 명령은 모세를 통해서만이 나타나게(전 달되게) 되어 있었습니다. 모세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움직이는 (이동하는) 모든 방향의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를 통한 하나님을 만나지 아니하면 그들의 구원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환경의 하나님이십니다. 잠시 이스라엘의 역사를 돌아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이 계신가 하면, 그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종살이 하게끔 만드 신 하나님이 계셨고, 또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셔서 순탄하게 애굽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끔 쫓기고 쫓기는 상황을 만드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또한 40 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헤매게 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이 모든 환경의 설정이 율법과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음을 잘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수용해야 될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환경의 하나님, 이 세 가 지 형태의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머리의 비밀에 대해서 알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이 수용해야 될 세 가지 형태 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하나님은 우리가 의지해야 될, 우리 안에 절대적으로 존재하셔야 될, 내 안에 잊어버리지 말 아야 될 하나님이십니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는 애굽 에서 종살이하는 것이 좋아. 나는 이곳에서 나가기 싫어."라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들을 향한 구원의 역사는 시작될 수도 없었을 것 입니다. ''구원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애굽에서 나가고자 하는, 즉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 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모세를 통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였다면 그 때 그때의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할 수 없는고로 그들에게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모세 를 통한 하나님, 즉 모세의 하나님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하나님이 핵이고, 그 나머지는 수용하고 가치를 보존해야 될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이 모세의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매달려야 되고, 놓지 말아야 될 하나님이 시기 때문입니다. 즉, 인내해야 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보고 혼선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부분적인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수용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 데서 벌어진 상황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생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뜻을 따르는 우리 또한 인생을 좇아가는 것이 아닌 것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주신 하나님을 보고 좇아 가지 않고 가나안 땅만을 보고 좇아 갔기 때문에, 즉 그것을 인생 속의 목표로 삼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가나안 땅을 취하지 못했 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했다면 그들이 왜 그런 믿음없는 모 습을 하나님 앞에 보여 드렸겠습니까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인생 속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가 취하고자 원하는 것, 우리가 얻고자 원하는 것은 인생 속의 목표가 아닌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 을 수 있었습니다. 간단히 예를 들자면 모세는 마치 방송 보도를 위해서 나가 있는 중계차와도 같습니다. 방송에 있어서 가장 중요 한 것, 핵의 point가 되는 것은 보도하고자 원하는 내용입니다. 잠 시 어떠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서 나간 중계차를 생각해 봅시다. 보도진들이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서 중계차를 타고 계속적으로 따 라가면서 그 상황에 맞게 모든 것을 신속하게 찍어서 본부 수신탑 으로 송신을 해 주면 본부 수신탑은 중계차에서 취재해서 보내온 내용을 받아서 가정 텔레비전으로 송신을 해 줍니다. 바로 모세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좇아다니는 하나님의 눈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 한 존재인 것입니다. 중계차가 송신한 것을 방송 본부가 수신하여 가정 텔레비젼으로 송신을 하게 되는데, 결국 방송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보도 내용이듯이 믿음 생활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의 발견인 것입니다. 중계차에서 보내온 내용을 받은 방송 본부, 텔레비젼은 그 내용을 수용한 것뿐, 그 신호를 받 은 것뿐입니다. 이렇듯 모세를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며 그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고, 세 번째로는 그 자세로써 환경을 이길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독특합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잉태케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와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를 해산케 하실 것입니다. 결국에 가선 그 부르신 자를 알고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숙명으로 그 뜻을 이루게 하신 하나님이 계시 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는데, 우리는 약속의 하나님을 또한 바라 봐야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절대 기준적으로 잃어버리지 말아야 될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계신 하나님과, 늘 취해야 될 하나님과, 주위의 모든 환경을 통해서 다가오는 하나님, 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의 실체를 늘 체험하고 만나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세 가지 형태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역사를 눈을 열어서 바라보지 못한 까닭에 부분적인 인간의 틀에 박힌 생각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무엇인지 도대체 모르겠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역사하신 것을 보고도, 홍해가 그 자리에서 갈라진 것을 보고도 왜 그들은 가나안 땅을 취 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 가지의 머리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되면 우리는 영적 가나안 땅인 천국을 취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신 하나님의 뜻을, 바로로 하여금 자기들 을 추적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가나안 땅을 자기들에게 공짜로 넘겨 주신 것 같은데 그 가나안 땅을 얻기 위해서 싸움을 일으키신 하나님의 뜻을 몰랐습니다. 즉, 그런 환경들을 계속적으로 만들어 가신 그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그들이 몰랐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런 차원에서 바라보지 못함으로써 환경에만 급급 한, 자신이 살기에만 급급한 그런 삶을 살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 의 역사를 이룰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졸장부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즉, 구원을 이루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너무나도 오묘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지금 당장 잘 되는 것만 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즉, 지금 잘 되지 않는 것, 나에게 마찰 로 느껴지는 것 등 나의 방향과는 아주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는 모 든 요소들도 다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들의 하나님, 모세의 하나님, 환경의 하나님, 이 세 가지의 방향으 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그들이 다 생각할 수만 있었어도 이스라엘 백성 중에 단 두 명만이 가나안 땅을 취하게 되는 이런 황당한 사건은 벌어지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정말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구원의 역사를 하십니다.
1 수용해야 되는 가치의 하나님이 계시고,
2 내 안에서 내 머리 되신, 즉 그때 그 때 나의 지각이 되시는, 나와 동해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3 나 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환경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이 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개개인 한 사람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틀 자체로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한 마디로 스케일이 커야 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사명자로서, 하나님의 택한 자로서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의 역사를 바라봐야 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결국에 가선 넘어지게 되는 것 입니다. 즉, 그 순간 순간만을 바라보다가 끝나버리고 말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장부가 되려면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심을 받은 모세가 하나님께 "내가 그들에게 하나님을 누구라고 말하리이까"라고 묻자 하나님께서는 "나는 아 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너희들의 하나님 이다라고 말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이제는 나를 부르시고 진정으로 나를 이끄시는 그 하나님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들에게 있어서 구원의 역사는 이 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구원으로 인도함을 받는 첫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르신 자와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 부르신 자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이 루시는 하나님, ''부르신 자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이루 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이룸의 하나님이신 성령님이시다.'' 즉 성령님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전투적인 신앙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왜 우리에게 숙명을 주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때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하나님 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원함은 구약 때나 신약 때나 똑같습니다. 우리가 환경 에만 급급하면, 자신이 사는 구멍만을 찾기에 급급하면 우리는 절 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고개를 조금만 들면 놋뱀을 바라볼 수 있는데 불뱀에 뜯기는 자신만 쳐다보다가 결국 죽게 된다면 이 얼마나 비참한 노릇이겠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놋뱀을 바 라보면 사는데 왜 자신이 살기에만 급급하여, 환경에만 급급하여 죽음의 길로 가려고 하십니까 우리는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 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나를 부르신 하나님, 계속적으로 나에게 방향을 알려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이미 풀어진 (나온)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입장에서 구원은 계속적으로 풀어나아가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르신 자를 기억한 자가 그때 그때마다 계속 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취함으로써 주위의 모든 환경을 수용하게 될 때 급기야는 전투적인 (사명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것을 알았던 자였습니다. 그들은 부르신 자를 기억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그들에게 임한 주위 의 환경이 자신들이 살기에만 급급한 그런 환경으로 다가오지 않음 으로써 12명의 정탐꾼 중 10명의 정탐꾼과 같지 않게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가 들어갈 수 있다. 왜 겁을 내느냐"라는 말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 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자신들을 좇아오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 이 자신들로 하여금 전투적인 신앙이 되게 하기 위해서, 사명감으 로 넘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임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 이 살기에만 급급해 하였습니다. 이 세 가지 방향이 되시는 하나님 은 동시에 다가오시고, 증거되시고, 나타나시고, 요구되시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로 깊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죽은 그리스도인이다. 머리는 있는데 뇌가 없는 사람을 상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존재 자체가 없는 사람입니다. 머리만 있고 뇌가 없는 사람 에게 "네가 누구냐"라고 아무리 물어보십시오. 그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말을 하지 못 합니다. 만약에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가 없다면 이런 이치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가 있어야 됩니다. '' 만약에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는 죽은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원래부터 나를 부르신 자, 그리고 나와 하나되어야 될 하나님, 또한 나에게 주신 모든 환경의 틀을 내가 수용함으로써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게 하시는, '위대함' 이라는 형용사가 따라붙게 하는 그러한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 을 우리는 늘 만나야 됩니다. 이 세 가지의 형태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우리는 실족지 아니할 것이며, 우리를 잉태케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해산케 하시고 또한 해산케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의 태를 닫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구원은 열린 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만유시라 생각하시며 모든 방향 에서 나오는 환경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느끼시는 그리스도인들 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하시는 뜻과 방향과 계획의 역사가 참으로 오묘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또한 위대한 차원의 구원의 역사를 이룰 수 있게 될 것 입니다. 부르신 자를 기억하십시오. 말씀을 정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교회가 더욱 빛나기 위해서는
1 신앙을 공유해야 하며
2 유익과 덕을 앞세워야 하며 ''유익과 덕을 앞세울 때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낼 수 있을 뿐더러 사단의 더러운 역사를 막을 수 있다.''3 하나된 방향의 비젼을 가지고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야 됩니다. 부 르신 자를 기억하고 그 부르신 자와 동행하는 삶이 나의 숙명이 되 기까지.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그들의 숙명이 되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가 강퍅케 되던, 그 바로가 좇아 오 던, 끝까지 고난이 있던 그것에 상관하지 않고(요동하지 않고) 변 치 않는 믿음으로 자신들의 신앙을 굳건히 지켜야만 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때 그들의 구원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전해 드린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의 시야를 열어주기 위함입니다. 졸장부가 되지 말고, 진정으로 위대한 차원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시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부르신 자를 기억하는 자가 진정으로 그분과 동행했다면 그는 그 동행하는 차원 에서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었어야만 됩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는 두 명밖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신의 마음 속에 포화 상태로 수용한 사람은 금강석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누구도 깰 수 없습니다. 시험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바라보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은 샬롬, 라파, 닛시의 하나님과도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형태의 하나님이 우리의 머리가 되어 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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