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아를 버리지 말라 (사8:5-9)
본문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점이 많은 민족입니다. 끈기가 있고 노력을 많이하며 무엇보다도 근실한 백성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부지런 합니까 오늘 우리나라가 이렇게 살게 된 것도 우리 민족에게 그런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에게는 큰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옛부터 강대국들 틈에 끼여 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사대주의적인 생각에 많이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나라를 우습게 여기고 남의 나라를 무조건 좋게 여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우리만 그렇다고 말합니다. 외국은 모두 선진국이고 우리만 후진국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외제를 무조건 선호하고 좋다고 믿어 버리는 습성도 생겼습니다. 이것이 큰 약점입니다. 옷도 외제가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비싼 값으로 사다 입습니다. 물건도 외제가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다가 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습성이 있습니다. 내 것이 좋은 줄을 모릅니다. 이것은 병중의 병입니다. 본문을 보면 실로아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실로아는 “보내는 자” 라는뜻을 가진 작은 개천 이름입니다. 이 개천은 모리아산 남서쪽 구릉계곡인 기혼에서 발원해서 예루살렘을 관통하는데 성전 예배에서도 사용되는 청정수였습니다. 이 개천을 아하스왕 때 “실로암”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실로암이 바로 이 곳입니다. 이 개천은 소리도 없고 고요히 아래로 흘러 내리는 아주 작은 개천이기 때문에 초라하고 빈약해서 사람들은 실개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이 개천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들어 있는 생명의 물입니다. 예루살렘은 이 물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만큼 이 물은 중요한 물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이 시원찮은 물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박력있게 흐르는 애굽의 나일강에 비하면 너무 초라합니다.
길이가
2,850㎞나 되고 4, 5월 해빙기의 증수기가 되면 대홍수를 이루는 시리아의 유브라데강에 비하면 답답하고 초라해서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큰 나라 앗수르를 흠모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나라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큰 나라 앗수르를 끌어들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저 앗수르와 동맹을 할 수 있는가 온갖 방법으로 앗수르를 끌어들여 마침내 예루살렘은 앗수르의 물결에 휩싸이게 됩니다. 원래 유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그리고 실로아도 하나님이 주신 물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그것이 귀한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현재의 처지가 못마땅해서 자꾸만 남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애굽의 나일강과 실로아을 비교하면 초라하고 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앗수르와 유대를 비교하면 자신들의 문화나 종교는 유치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끌어들인 것이 그만 예루살렘 전체가 앗수르 문화에 침식당해 결국에는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1.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내 것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남의 것이 자기 것보다 더 좋게 보입니다. 더 크게 보이고 더 멋이 있어 보입니다. 남을 보면 언제나 자신은 빈곤하게 보입니다. 작게 보이고 초라하게 보이고 빈약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부인들이 동창회에 갔다 오면 꼭 부부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동창들을 보니 모두 좋아 보입니다. 거기서 자신의 무력감, 초라함, 빈약함을 크게 느끼고 남편의 무능함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이런 비교 의식이 많은 아내들은 동창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갔다 오면 괜히 속만 상합니다. 이 비교 의식은 남자들보다 여성들이 더 심합니다. 여성들은 샘도 많고 욕심도 많고 비교 의식도 많습니다. TV에서 화장품 광고를 보면 화장품 회사들이 이 점을 잘 활용합니다. 예쁜 탤런트들에게 화장을 시켜서 특수 조명 아래서 사진을 찍어 광고를 내보내면 여성들이 모두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저마다 그렇게 이뻐질 욕심으로 그 비싼 화장품들을 사다가 바릅니다. 그것이 이 비교 의식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좋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기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것을 헐값에 버려 버립니다. 자기 것을 마구 헐고 고쳐 버립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자기 얼굴까지도 깎아 내고 고치고 그럽니다. 탤런트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자기도 이 얼굴처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쓰는 여성도 있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앗수르의 거대한 문화를 보고 자신들의 문화를 초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의 나일강을 보니 예루살렘을 통과하는 그 힘없고 초라하기 그지 없는 실로아 실개천이 답답합니다. 그래서 그만 앗수르를 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문화도 받아들이고 유행도 받아들이고 풍습도 정치도 문물도 다 받아들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온통 앗수르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던 신앙도 점점 앗수르의 신을 섬기는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음성은 듣지를 않고 유행하는 앗수르의 소리만 듣습니다. 이제는 실로아 같은 답답한 물줄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큰 나라 큰 강물을 동경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앗수르와 애굽의 유행의 물결이 발꿈치까지 차 올라옵니다. 사람들은 좋아라 하고 즐깁니다. 그러다가 그 물결이 허리까지 차 오릅니다. 약간 겁도 납니다. 그러나 단번에 그 문물은 가슴까지 차 올아왔고 이제는 힘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목까지 차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루살렘은 디글랏 빌레셀 대군에 짓밟히고, 앗수르의 산혜립 왕에게 짓밟히고(B.C 701), 바벨론에게(B.C 586년) 짓밟혀서 결국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2. 여기서 우리들이 기억할 것은 유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실로아 라는 강이 어떤 강인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 강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강으로 아무리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고 변함없이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비록 가냘프게 흐르기는 했지만 이 물줄기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 물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들에게 주신 것임을 몰랐습니다. 이 강 이름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을 지닌 실로아입니다. 이 물줄기는 조상 대대로 흘러 왔고 그후 600년 후에도 흘러서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이 실로암에서 눈을 씻고 고침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 강 이름이 왜 실로아인지를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쉽게 버리고 포기하고 남의 것을 흠모하다가 결국에는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천금을 손에 쥐어 주어도 소용없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다른 어떤 것들을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남들을 쳐다보고 자신의 빈곤을 느끼며 한탄하며 삽니다. 고층맨션을 올려다보고 초라한 내 집에 불만을 품습니다. 호화스런 남의 환경을 올려다보고 빈약한 내 집 살림에 불만을 품습니다. 돈 잘 버는 남의 남편을 올려다보고 용렬하고 무능한 내 남편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다른 집 남편들은 멋있고 돈도 잘 버는데 당신은 뭐예요” 이 생각이 실로아에 불만을 품었던 유다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지금은 좋아졌지만 제가 한참 제 누님이 그럽니다. 다른 교회들은 성도들도 많이 들어가던데, 그 말은 “다른 목사님들은 나일강인데 왜 동생은 실로아이냐” 그런 뜻입니다. “다른 남편들을 보면 모두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재주도 좋은데 왜 내 남편은 꼭 실로아 같으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실로아을 버리고 나일강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이 주신 이 소중한 물의 진가를 몰랐습니다. 그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데 이들은 그 원인을 몰랐습니다. 그 물 속에는 보고가 쌓여 있었는데도 그 진가를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외모만 보고 초라하다고 버렸던 실로아,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만 큰 화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큰 재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하수 곧 앗수르를 끌어들이리라. 그들이 유다 위에 덮이리라”고 했습니다. 졸졸 흐르는 실로아 물줄기가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좀 박력 있게 흐르고 시원스럽게 흐르는 큰 강물이 그리웠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드디어 답답한 실로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골짜기에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뛰면서 기뻐했습니다. 물이 언덕까지 오르자 만면에 웃음을 띠며 좋아했습니다. 그 물이 쉬지 않고 불어나 발목에 찼습니다. 허리까지 차 올라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목까지 차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큰물 큰물 하다가 원을 풀기는 했는데 그만 그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3. 여러분, 가난은 참기 힘든 불행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했던 과거를 잊지 못합니다. 배고픔의 기억을 어떻게 잊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거에 그렇게 배고프게 살았기 때문에 오늘 그토록 실컷 먹고 남기고 사치하고 그러는지도 모릅니다. 배고팠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 절약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보복 심리로 더 낭비하고 더 사치하고 과시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도 풍부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나의 처지와 환경이 내가 보기에는 불행한 것 같고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환경이라면 바로 실로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멘이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가난은 싫다. 이 환경이 싫다. 부한 것이 좋다 하여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긁어 모아 부를 이루었다고 하면 과연 그 부가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겠습니까 사람은 부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옛날 그 어려웠던 시절보다 오늘이 훨씬 더 행복하십니까 오늘 이 세상이 옛날보다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옛날보다 세상이 더 좋아졌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신앙도 옛날보다 오늘이 더 좋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옛날이 훨씬 인간다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옛날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펄벅이 쓴 대지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룽이라는 주인공은 농부입니다. 아주 진실한 젊은이입니다.
그런데 농사를지어 놓으면 황충이 떼가 와서 곡식을 다 갉아 먹습니다. 아니면 홍수가 나서 다 쓸어 버리거나 가뭄이 와서 농사를 다 망쳐 놓습니다. 이 왕룽 부부는 할 수 없이 무작정 도시로 떠납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리어카를 사서 장사를 합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고 그렇게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법니다. 꿈도 많았습니다. 고생도 했지만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토를 많이 사서 머슴들을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래서 이 두 부부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땅을 많이 사서 일꾼을 두고 대지주가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 대로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난했던 사람이 부해지고 더 행복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생활이 즐거움이 있고 고생한 보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생각대로 되질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 동안 이 두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남편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하루는 여자 하나를 데리고 들어오더니 조강지처를 문간방으로 내보내고 첩을 안방에 들어 앉힙니다. 고생한 조강지처는 조석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 올리고 자기는 부엌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이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하루는 이 조강지처가 부엌 부뚜막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다가 “그때가 좋았는데, 그때가 좋았는데” 그럽니다. 남편은 리어카를 끌고 자기는 뒤에서 밀며 살아가던 그 어렵던 시절이 행복했고 기뻤고 좋았다는 말입니다. 이 부부에게는 많은 부가 재앙이었습니다. 차라리 없었을 때가 훨씬 좋았습니다. 그때가 더 행복했고 그때가 더 좋았습니다.
그런데 부를 이루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부는 마침내 이 부부에게 상상도 못할 재앙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졸졸 흐르는 실로아을 답답해 했습니다. 그들은 큰물 큰물 하고 소원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에게 큰 물이 주어졌습니다. 골짜기에도, 언덕에도, 온 나라가 물천지가 되었습니다. 그 물이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불행과 저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그 풍성한 물에 치여서 그만 나라가 망해 버리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난도 풍부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어야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질병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아주 고마운 선물일 수 있습니다.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초가삼간만을 주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무능한 남편도 하나님이 주신 남편이라면 그 사람이 바로 복된 남편입니다. 아주 유능하고 잘나서 괜히 속이나 썩이고 불화나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성공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라면 더없이 좋은 축복이지만 불행까지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라면 축복으로 받을 수 있어야 그것이 은혜를 아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 “의욕도 좋고 야심도 좋고 포부도 좋지만 먼저 자족하는 법부터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믿음 안에서 누구보다도 세상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혹시 원망과 불만을 품은 채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처지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실로아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최상의 축복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비로소 오늘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민족에게는 큰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옛부터 강대국들 틈에 끼여 살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사대주의적인 생각에 많이 물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나라를 우습게 여기고 남의 나라를 무조건 좋게 여기는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우리만 그렇다고 말합니다. 외국은 모두 선진국이고 우리만 후진국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외제를 무조건 선호하고 좋다고 믿어 버리는 습성도 생겼습니다. 이것이 큰 약점입니다. 옷도 외제가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비싼 값으로 사다 입습니다. 물건도 외제가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사다가 쓰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품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그런 습성이 있습니다. 내 것이 좋은 줄을 모릅니다. 이것은 병중의 병입니다. 본문을 보면 실로아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실로아는 “보내는 자” 라는뜻을 가진 작은 개천 이름입니다. 이 개천은 모리아산 남서쪽 구릉계곡인 기혼에서 발원해서 예루살렘을 관통하는데 성전 예배에서도 사용되는 청정수였습니다. 이 개천을 아하스왕 때 “실로암”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오는 실로암이 바로 이 곳입니다. 이 개천은 소리도 없고 고요히 아래로 흘러 내리는 아주 작은 개천이기 때문에 초라하고 빈약해서 사람들은 실개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이 개천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이 들어 있는 생명의 물입니다. 예루살렘은 이 물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만큼 이 물은 중요한 물입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들은 이 시원찮은 물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박력있게 흐르는 애굽의 나일강에 비하면 너무 초라합니다.
길이가
2,850㎞나 되고 4, 5월 해빙기의 증수기가 되면 대홍수를 이루는 시리아의 유브라데강에 비하면 답답하고 초라해서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큰 나라 앗수르를 흠모하기 시작했습니다. 큰 나라들에게 열등감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회의가 열렸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저 큰 나라 앗수르를 끌어들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저 앗수르와 동맹을 할 수 있는가 온갖 방법으로 앗수르를 끌어들여 마침내 예루살렘은 앗수르의 물결에 휩싸이게 됩니다. 원래 유다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그리고 실로아도 하나님이 주신 물입니다.
그런데 이 백성들이 그것이 귀한 것인 줄을 몰랐습니다. 현재의 처지가 못마땅해서 자꾸만 남의 모습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애굽의 나일강과 실로아을 비교하면 초라하고 빈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앗수르와 유대를 비교하면 자신들의 문화나 종교는 유치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끌어들인 것이 그만 예루살렘 전체가 앗수르 문화에 침식당해 결국에는 무너져 내리고 만 것입니다.
1.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한 가지 있습니다. “내 것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자신을 남과 비교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남의 것이 자기 것보다 더 좋게 보입니다. 더 크게 보이고 더 멋이 있어 보입니다. 남을 보면 언제나 자신은 빈곤하게 보입니다. 작게 보이고 초라하게 보이고 빈약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부인들이 동창회에 갔다 오면 꼭 부부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동창들을 보니 모두 좋아 보입니다. 거기서 자신의 무력감, 초라함, 빈약함을 크게 느끼고 남편의 무능함을 토로합니다. 그래서 이런 비교 의식이 많은 아내들은 동창회에 나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갔다 오면 괜히 속만 상합니다. 이 비교 의식은 남자들보다 여성들이 더 심합니다. 여성들은 샘도 많고 욕심도 많고 비교 의식도 많습니다. TV에서 화장품 광고를 보면 화장품 회사들이 이 점을 잘 활용합니다. 예쁜 탤런트들에게 화장을 시켜서 특수 조명 아래서 사진을 찍어 광고를 내보내면 여성들이 모두 착각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저마다 그렇게 이뻐질 욕심으로 그 비싼 화장품들을 사다가 바릅니다. 그것이 이 비교 의식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보다 더 좋고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동경하는 습성이 있습니다. 자기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 것을 헐값에 버려 버립니다. 자기 것을 마구 헐고 고쳐 버립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자기 얼굴까지도 깎아 내고 고치고 그럽니다. 탤런트의 사진을 가지고 와서 자기도 이 얼굴처럼 만들어 달라고 떼를 쓰는 여성도 있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앗수르의 거대한 문화를 보고 자신들의 문화를 초라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애굽의 나일강을 보니 예루살렘을 통과하는 그 힘없고 초라하기 그지 없는 실로아 실개천이 답답합니다. 그래서 그만 앗수르를 과감하게 받아들입니다. 문화도 받아들이고 유행도 받아들이고 풍습도 정치도 문물도 다 받아들입니다. 결국 예루살렘은 온통 앗수르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던 신앙도 점점 앗수르의 신을 섬기는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예언자들의 음성은 듣지를 않고 유행하는 앗수르의 소리만 듣습니다. 이제는 실로아 같은 답답한 물줄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큰 나라 큰 강물을 동경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앗수르와 애굽의 유행의 물결이 발꿈치까지 차 올라옵니다. 사람들은 좋아라 하고 즐깁니다. 그러다가 그 물결이 허리까지 차 오릅니다. 약간 겁도 납니다. 그러나 단번에 그 문물은 가슴까지 차 올아왔고 이제는 힘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목까지 차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예루살렘은 디글랏 빌레셀 대군에 짓밟히고, 앗수르의 산혜립 왕에게 짓밟히고(B.C 701), 바벨론에게(B.C 586년) 짓밟혀서 결국 망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2. 여기서 우리들이 기억할 것은 유대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실로아 라는 강이 어떤 강인지를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 강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강으로 아무리 가뭄이 와도 마르지 않고 변함없이 흐르는 강이었습니다. 비록 가냘프게 흐르기는 했지만 이 물줄기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이 물이 하나님께서 특별히 자신들에게 주신 것임을 몰랐습니다. 이 강 이름이 “보내심을 받았다”는 뜻을 지닌 실로아입니다. 이 물줄기는 조상 대대로 흘러 왔고 그후 600년 후에도 흘러서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소경이 실로암에서 눈을 씻고 고침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 강 이름이 왜 실로아인지를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쉽게 버리고 포기하고 남의 것을 흠모하다가 결국에는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천금을 손에 쥐어 주어도 소용없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고유한 다른 어떤 것들을 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남들을 쳐다보고 자신의 빈곤을 느끼며 한탄하며 삽니다. 고층맨션을 올려다보고 초라한 내 집에 불만을 품습니다. 호화스런 남의 환경을 올려다보고 빈약한 내 집 살림에 불만을 품습니다. 돈 잘 버는 남의 남편을 올려다보고 용렬하고 무능한 내 남편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다른 집 남편들은 멋있고 돈도 잘 버는데 당신은 뭐예요” 이 생각이 실로아에 불만을 품었던 유다 백성들의 마음입니다. 지금은 좋아졌지만 제가 한참 제 누님이 그럽니다. 다른 교회들은 성도들도 많이 들어가던데, 그 말은 “다른 목사님들은 나일강인데 왜 동생은 실로아이냐” 그런 뜻입니다. “다른 남편들을 보면 모두 건강하고 돈도 잘 벌고 재주도 좋은데 왜 내 남편은 꼭 실로아 같으냐” 그 말입니다. 그래서 실로아을 버리고 나일강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이 주신 이 소중한 물의 진가를 몰랐습니다. 그 물은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데 이들은 그 원인을 몰랐습니다. 그 물 속에는 보고가 쌓여 있었는데도 그 진가를 몰랐습니다. 모르니까 외모만 보고 초라하다고 버렸던 실로아, 그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만 큰 화를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큰 재앙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하수 곧 앗수르를 끌어들이리라. 그들이 유다 위에 덮이리라”고 했습니다. 졸졸 흐르는 실로아 물줄기가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좀 박력 있게 흐르고 시원스럽게 흐르는 큰 강물이 그리웠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드디어 답답한 실로아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골짜기에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때 사람들은 뛰면서 기뻐했습니다. 물이 언덕까지 오르자 만면에 웃음을 띠며 좋아했습니다. 그 물이 쉬지 않고 불어나 발목에 찼습니다. 허리까지 차 올라왔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목까지 차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들은 큰물 큰물 하다가 원을 풀기는 했는데 그만 그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3. 여러분, 가난은 참기 힘든 불행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했던 과거를 잊지 못합니다. 배고픔의 기억을 어떻게 잊습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거에 그렇게 배고프게 살았기 때문에 오늘 그토록 실컷 먹고 남기고 사치하고 그러는지도 모릅니다. 배고팠던 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 절약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보복 심리로 더 낭비하고 더 사치하고 과시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여기서 생각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가난도 풍부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나의 처지와 환경이 내가 보기에는 불행한 것 같고 초라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환경이라면 바로 실로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아멘이로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가난은 싫다. 이 환경이 싫다. 부한 것이 좋다 하여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긁어 모아 부를 이루었다고 하면 과연 그 부가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겠습니까 사람은 부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옛날 그 어려웠던 시절보다 오늘이 훨씬 더 행복하십니까 오늘 이 세상이 옛날보다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옛날보다 세상이 더 좋아졌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의 신앙도 옛날보다 오늘이 더 좋아졌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옛날이 훨씬 인간다웠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옛날을 잊지 못하는 것입니다. 펄벅이 쓴 대지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왕룽이라는 주인공은 농부입니다. 아주 진실한 젊은이입니다.
그런데 농사를지어 놓으면 황충이 떼가 와서 곡식을 다 갉아 먹습니다. 아니면 홍수가 나서 다 쓸어 버리거나 가뭄이 와서 농사를 다 망쳐 놓습니다. 이 왕룽 부부는 할 수 없이 무작정 도시로 떠납니다. 그리고 아내와 함께 리어카를 사서 장사를 합니다.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고 그렇게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법니다. 꿈도 많았습니다. 고생도 했지만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생각을 합니다.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토를 많이 사서 머슴들을 거느리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래서 이 두 부부가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땅을 많이 사서 일꾼을 두고 대지주가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 대로 행복하게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난했던 사람이 부해지고 더 행복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 생활이 즐거움이 있고 고생한 보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생각대로 되질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얼마 동안 이 두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부터 남편이 바람을 피우기 시작합니다. 하루는 여자 하나를 데리고 들어오더니 조강지처를 문간방으로 내보내고 첩을 안방에 들어 앉힙니다. 고생한 조강지처는 조석으로 따뜻한 밥을 지어 올리고 자기는 부엌에서 밥을 먹어야 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이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하루는 이 조강지처가 부엌 부뚜막에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밥을 먹다가 “그때가 좋았는데, 그때가 좋았는데” 그럽니다. 남편은 리어카를 끌고 자기는 뒤에서 밀며 살아가던 그 어렵던 시절이 행복했고 기뻤고 좋았다는 말입니다. 이 부부에게는 많은 부가 재앙이었습니다. 차라리 없었을 때가 훨씬 좋았습니다. 그때가 더 행복했고 그때가 더 좋았습니다.
그런데 부를 이루고 보니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 부는 마침내 이 부부에게 상상도 못할 재앙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졸졸 흐르는 실로아을 답답해 했습니다. 그들은 큰물 큰물 하고 소원했습니다. 마침내 그들에게 큰 물이 주어졌습니다. 골짜기에도, 언덕에도, 온 나라가 물천지가 되었습니다. 그 물이 그들을 행복하게 해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오히려 불행과 저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백성들은 그 풍성한 물에 치여서 그만 나라가 망해 버리는 비극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가난도 풍부도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것이어야 행복이고 축복입니다. 질병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그것이 아주 고마운 선물일 수 있습니다.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초가삼간만을 주셨다면 우리는 그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신 무능한 남편도 하나님이 주신 남편이라면 그 사람이 바로 복된 남편입니다. 아주 유능하고 잘나서 괜히 속이나 썩이고 불화나 일으키는 것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성공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이라면 더없이 좋은 축복이지만 불행까지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것이라면 축복으로 받을 수 있어야 그것이 은혜를 아는 성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6장에서 “의욕도 좋고 야심도 좋고 포부도 좋지만 먼저 자족하는 법부터 배우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믿음 안에서 누구보다도 세상을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비결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계십니까 혹시 원망과 불만을 품은 채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처지가 바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실로아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최상의 축복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아야 비로소 오늘의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면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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