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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 (사9:1-7)

본문

오늘 말씀은 흑암과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빛과 희망을 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이 되어 있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이 시리아와 동맹을 맺고, 남쪽 유다를 침략했습니다. 동족 상잔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사야는 두려워 떨고 있는 아하스 왕에게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할 것을 예고했습니다(사 8:5-8). 그러나 멸시받는 그 땅 갈릴리에 메 시야가 탄생할 것이며, 이를 통해서 그 땅이 영화롭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심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메시야의 탄생과 그로 말미암아 그 백성이 누리게 될 축복이 무엇인가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1-4) 1절을 보십시오. "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 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 음페이지(리턴키) > 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 하셨느니라" 나님은 갈릴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습니다. 특히 BC 734년에는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이 갈릴리 북방을 침략하여 스불 론과 납달리 온 땅을 취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끌고 갔 습니다(왕하 15:29). 또 앗수르 사람들을 그곳에 강제 이민을 시켜 살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결혼을 하게 되 었고, 혼혈아가 많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동족들 로부터 '이방의 갈릴리'라는 멸시를 받았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왕하 15:28). 여로보암은 쿠데타로 북이스 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이 남쪽 유다에 있는 예 루살렘 성전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브엘세바에 금송아지를 만들 어 우상숭배를 강요했습니다. 이 여로보암의 죄로 인하여 북이스라 엘에는 끊임없는 쿠데타가 일어났습니다. 바알의 여선지가 왕후가 되어 여호와의 제사장을 집단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를 통해서 그 백성들의 우상숭배의 죄를 깨우치 고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북이스라엘을 앗수르를 통해 징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 것을 대신하리라고 했습니다(사 9:9,10). 이사야 8:19-22를 보십 시오. 그들은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 기도하기보다 점쟁이와 마술 사를 찾아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저주했습니다. 이들은 헤매고 주 灼構 되었습니다(21). 위를 쳐다보 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장차 하나님께서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 신다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그곳에 임하여 그 땅을 영화롭게 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심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 은 멸시 당하였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 이방의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 4:12-16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이루기 위해 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위치한 가버나움에서 복음역사를 시작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복음 역사를 시작하심으로써 멸시받던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가장 영화 로운 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12사도들도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 이었습니다. 생선을 잡아 팔던 어부 시몬이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 심을 받은 후 성 베드로가 되었습니다. 동족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 던 세리 레위가 성 마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 놀랍게 변화되어 마태복음을 기록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통해서 얼마나 영화롭게 되었습니까 그가 쓴 산상보훈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우리 마음 속에 살아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영화롭게 됩니다. 현재 의 형편이 아무리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아무 리 크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상상할 수 없을만큼 그 인생을 영화롭게 하여 주십니다. 이사야는 고통하며 흑암 가운 데 거하는 백성들이 장차 예수님을 통해서 영화롭게 될 것을 바라 보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러면 그 백성이 어떻게 영화롭게 됩니까 2절을 보십시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 에게 빛이 비취도다" 메시야가 오시게 되면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췬다고 노래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 행하는 사람은 방향이 없습니다. 길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인생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생명도 없습니다. 삶의 의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절망과 고통과 탄식과 한숨 소리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결 국 그들은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에게 큰 빛이 비취게 됩니다. 큰 빛이 비취면 흑암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이 빛은 죽 음의 그늘에 앉은 백성들에게는 생명의 빛이 됩니다.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는 희망의 빛이 됩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 랴는 예수님을 '돋는 해'라고 노래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긍휼 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 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 하시리로다(눅 1:78,79)."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흑암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약 400년 동 안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들이지 않 고 계속하여 하나님을 대적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타 락한 본성대로 버려 두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로마 식민지 하에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포악한 헤롯 왕에게 시달렸습니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던 요한도 투옥되고 처형되었습니다. 백성들의 희망이 꺾였습니다. 젊은이들은 로마에 항거하는 열혈당 원이 되었습니다. 또 유능한 젊은이들이 세리가 되어서 국민의 세 금을 훔쳐가 사리사욕을 채웠습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흑암에 앉 아 죽음의 권세에 시달리며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망의 땅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이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예수님은 흑암과 절망 가운데 있는 인생들에게 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면 사망의 그늘진 땅 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생명의 나라, 희망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아무리 비참한 인생이라도 영화로운 인생으로 변합니다. 오늘날 이 시대 사람들도 흑암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곳곳에서 내란이 일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 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아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들을 생각할 때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나라도 지난 한해를 돌 아볼 때 어둡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연속되는 대형사고와 끔직한 살인사건들과 공무원들의 부정과 부패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총체적인 부정과 부패로 인해 백성들의 마음 속에 깊은 절 망감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이 백성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 통치 권자는 끊임없이 개혁을 부르짖고, 엄벌을 내리고 새로운 법을 만 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엄벌을 내릴수록 범죄는 조롱이나 하는듯 더욱 심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나라가 어찌 이꼴이 되었느냐 고 탄식합니다.
그런데도 어둠의 세력들이 좀처럼 근절되지 않습니다. 이를 보면 어둠이란 단순한 빛이 없는 상태가 아니고 어떤 세력 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둠의 요소를 파고 들어가보면 결국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의 소욕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 이번 에 도세(盜稅)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보십시오. 이들이 학교 다 닐 때는 다 모범생들이었을 것입니다. 다 자식들을 키우고, 사회에 서 대접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엄청난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처럼 어둠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둠은 빛으로 나오기를 싫어합니다. 빛을 미워하고 빛을 대적합니다. 이를 볼 때 결국 이 시대의 문제는 외면적인 제도의 문제나 정치 문제가 아니 라 인간의 내면에 있는 죄의 문제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지 않고는 결코 이 시대의 문제 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어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습니까 인간의 내면의 어두움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 접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고려대학 총장은총체적인 부패를 해결하 기 위해서 먼저 도덕 재무장을 해야 한다고 하며 5000억 모금운동 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을 전원 기숙사에 넣고, 명심보감 을 가르치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필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명심보 감으로 어둠의 세력을 몰아낼 수는 없습니다. 이 시대의 문제를 해 결하는 길은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는 길 뿐입니다. 도덕 재무장이 아니라 태양보다 더 강렬한 예수님의 빛으로 인간의 어두 운 내면을 밝혀야 합니다.
현재 우리 나라의 기독교인구가 1200만 이나 됩니다. 그러나 이들이 빛의 자녀로서 빛을 밝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크리스천들의 내면에 큰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가정과 직장과 캠퍼스에 그리스도의 큰 빛을 비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캠퍼스에 복음 의 빛을 비추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캠퍼스에 방 황하는 지성인들에게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줄기차게 증거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내면에 모든 어두 움이 사라집니다. 죄의식으로 고통하던 사람이 사죄의 은혜를 덧입 고 참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미움과 증오심에 불타던 사람도 큰 빛 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용서와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사망 권세에 시달리던 분들이 생명을 얻습니다. 근심과 슬픔이 가득하던 사람이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방황하는 사람이 분명한 삶의 목 적과 방향을 찾게 됩니다. 이기심으로 병든 사람이 변하여, 가난하 고 병든 자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운명주의와 열등의식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자신감에 넘치게 됩니다. 절망에 허덕이는 사람이 희망에 넘치는 새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이 누리게 될 즐거움이 어떠합 니까 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 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즐거움은 예수님 안에서 열매 맺는 생활의 기쁨이 요, 승리의 기쁨입니다. 이는 복음 전파를 통해서 양떼들이 변화되 고, 하나님 나라가 창성케 되는 영적인 기쁨입니다. 우리가 과거 흑암 중에 행할 때는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해도 항상 마음이 공허 하고 허무했습니다. 일을 열심히 하고, 돈을 많이 벌어도 마음에 참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 안에서 열매 맺는 생활 을 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고, 학문과 직장 생활을 감당 함으로써 승리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농부가 씨를 뿌리듯이 캠퍼스 양떼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뿌리고 심는 목자들에게는 추수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또 원수 마귀의 세력과 싸우며 승리를 얻는 기쁨도 큽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 전 쟁에서 승리를 얻고, 항상 승리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년 내내 농부와 같이 추수하는 즐거움을 누리고, 탈취물 을 나누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까
4,5절을 보십시 오. " 이는 그들의 무겁게 멘 멍에와 그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의 갑옷과 피묻은 복장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스 블론과 납달리 사람들이 앗수르의 포로로 잡혀 가서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일생 동안 노예의 멍에를 메고, 비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디안의 날과 같이 이제 압제자들의 막 대기를 꺾으시고, 참 자유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미디안의 날이란 기드온의 삼백 용사가 모래같이 많은 미디안 군대를 멸한 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날과 같이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원수들의 막대 기를 꺾으시고 무겁게 맨 멍에를 벗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 앞에서 즐거움을 누리게 된 것은 큰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무겁게 맨 멍에를 벗어주시고,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를 꺾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산다 ÷都求. 그래서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 외에도 가난의 멍에, 운명의 멍에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멍에는 죄와 죽음의 멍에입니다. 이 멍 에는 인간의 힘으로 떨쳐 버릴 수 없는 무거운 멍에입니다. 채찍과 압제자의 막대기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고통 스러운 멍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서 모든 멍에를 꺾으셨습니다. 압제자의 마음을 꺾으셔서 그 막대기를 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시는 군인의 갑옷이 필 요가 없고, 피묻는 복장이 필요 없게 됩니다. 이런 것들은 다 불에 살라집니다. 그날에는 용서와 사랑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 정한 평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사회가 발달하고 인지가 발달하면 전쟁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날 이갈수록 전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동서 냉전 시대가 끝나면 전쟁이 더 이상 없어질 줄 알았는데 더 많 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저는 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하 면서 전쟁은 외적인 원인보다 인간의 내면에 항상 잠재되어 있는 악의 요소 때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은 근본적으로 인간 의 내면에 있는 이기심과 탐욕의 죄악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누 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총대를 부러뜨리고, 전쟁의 막대기를 꺾을 수 있습니까 우리를 죄와 사망의 고통에서 구원해 주실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Ⅱ.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5-7) 6a 절을 보십시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하나님께서는 한 아기를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아기의 어깨 에 정사를 메었습니다. 정사란 goverment 곧 정부를 가리킵니다. 곧 통치권자임을 말해 줍니다. 이 아기는 별명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6b절을 보십시오.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러면 이 이름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첫째, 기묘자입니다. 기묘자란 영어로 Wonderful입니다. 이 아 기는 기묘하신 분, 놀라우신 분, 기이한 분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읽을 때 예수님이야말로 기묘하신 분이심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얼마나 기묘합니까 어떻게 사람이 처 녀의 몸에서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 의 몸을 빌려서 탄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 에 가지신 기묘하신 분이십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어떠합니까 예수님의 기적과 사랑 과 가르치신 말씀들은 얼마나 기이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은 얼마나 기묘합니까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강도가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게 되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성경대로 사흘만에 사망권세 를 파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사건을 기념하며 매주일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또 그분은 장 차 재림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심판하시고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빌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합리적인 머리로서는 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Wonderful하며 예수님을 영접하며 하나님 께 영광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모사이십니다. 모사라는 말은 어감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뜻은 나쁘지 않습니다. 모사라는 말은 영어로 보면 Counselor입니다. 이 말은 상담자라는 말입니다. 탁월한 지혜를 가 지고 어려운 문제를 풀어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 인생들은 참으로 상담자가 필요합니다. 특히 젊은 사람들에게는 고민이 많습니다. 불안, 공허, 고독, 허무와 같은 영혼의 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또 내면에 독버섯처럼 돋아나는 정욕과 온갖 죄의 소욕들로 인 해 절망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또 가난과 운명적인 인간 조건으 로 인해 절망하고 중풍병자와 같이 되어버린 분도 있습니다. 또 복 잡한 가정문제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 갑 작스럽게 닥친 환난으로 인해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답답 해 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부부 사이의 갈등으로 고통스러운 나날 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문제를 들어주는 풀어주는 상담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우리에게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상담자가 되어 주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님 만이 우리의 참 상담자가 되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시기 전에 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 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요 14:16)." 여기에서 보혜사라는 말은 곧 Counselor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곧 우리의 영원한 상담자이십니다. 또 모사라는 말은 군대용어로서 작전참모를 가리킵니다. 복음역 사는 악의 세력을 잡은 원수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 기려면 모사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복음 역사를 섬기는 주의 종 들의 모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복음역사를 섬 겨도 마귀와 싸움에서 패하면 아무 열매도 거둘 수 없습니다. 마귀는 틈만 있으면 양떼들의 마음에 불신을 심습니다. 사명을 버리고, 이기적인 욕심을 좇아 안일하게 살도록 유혹합니다. 영적인 질서를 파괴하고, 복음 역사를 훼방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복음 역사를 시 작하실 때도 40일 동안 금식하며 사단과 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모든 궤계를 파하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모든 하나님의 종들의 모사가 되십니다. 우리의 모사 되신 예수님을 굳게 의지할 때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셋째,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한 아기로 이 땅에 오 셨습니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2,3에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습니다(요 1:18). 아기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난 파도를 꾸짖어 잔잔케 하셨고, 보리떡 다 섯 개로 오 천 명을 배불리 먹이실 수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 기도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연약한 인간에게 무한한 힘과 능력 을 공급해 주시는 능력의 근원이 되십니다. 사도 바울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고백했습니다(빌 4:13).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능력을 탓하며 부정적인 생각에 시달리거나 인생을 비관 해서 안됩니다. 능력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믿음으로 도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뽕 나무를 명하여 바다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눅 17:6).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학문과 구직, 제자양성에 도전하 여 승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넷째,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영원히 살아 계시는 아버지 입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보호자요, 사랑으로 양육하시는 분이 십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직접적이고 섬세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의 사랑은 은근하고 깊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모님의 사랑도 영원 하지는 못합니다. 그분들도 인간인지라 허물과 약점이 많습니다. 또 그분들은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흐르면 누구나 다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됩니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사랑과 인격을 가진 아버지, 또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그 우리를 보호해 주실 아버 지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요 14:18).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 지십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살기 힘들어도 우리는 영존하시는 아 버지가 계시기 때문에 염려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그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구하는 대로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평화 가 없는 세상에 평화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시던 날 밤에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 노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 結,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 화로다(눅 2:14)." 예수님은 평강의 왕으로 세상에 소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은 지형적으로 열강들의 각축장소로 알맞는 땅이었 습니다. 그래서 전쟁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전쟁의 공포 속 에 시달리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큰 소원이 있다면 참된 평 화를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인사도 "샬롬(평화)" 입니다. 이기적이고 교만한 인간이 사는 곳에는 참된 평화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경쟁의 대상이요, 적입니다. 끊임없는 긴장 만이 있을 뿐입니다. 서로 짓밟고 올라서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 사 함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됩니다.
또 사람들과도 서로 용서하며, 참된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게됩니다. 우리는 세상 의 어떤 것으로도 평안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왕으로 모실 때만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을 변화시켜 주시고, 거듭나게 하시고, 하나님 과 화목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7절 을 보십시오.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시 라." 지상 나라는 끊임없이 흥망성쇠를 거듭합니다. 영원히 망할 것 같지 않던 로마도 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영원합니다. 또 세상 나라에는 정의와 평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합니다.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실 것을 믿습니다. 결론. 흑암에 앉은 백성들에게 큰 빛을 비추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주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2000년 전에 오신 예수님은 지금 도 살아 계시며, 저와 여러분들에게 모사가 되시고, 영존하시는 아 버지시요, 평강의 왕이 되십니다. 이 예수님이 이 나라의 진정한 희망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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