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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사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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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는 예배가 신앙인의 삶의 핵심이며 그래서 모든 신앙과 실천적 삶이 예배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에 예배를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고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올해 이 예배를 충분히 이해하고 새롭게 하여 우리 신앙에 튼튼한 기초를 쌓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예배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예배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혹은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 등 여러가지 차원에서 그 개념을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만 오늘 저는 성서가 말하는 예배를 함께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 아브라함 등 족장들의 예배입니다. 족장들의 예배를 자세히 살펴보면 묘한 특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등을 보면 자기의 생활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체험을 합니다. 아브라함은 조상들과의 종교갈등이 원인이 되긴 하였으나 어쨋든 그 결과로 고향을 떠나라고 하는 명령을 하나님이 하셨고 그리고 나중에 큰 민족을 이루어 주겠다는 약속을 아브라함의 생활과 관련하여 하십니다. 그리고서는 정처없이 지시한 땅으로 향하고 거기에 당도하면 어김없이 돌을 세우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했다고 했습니다. 또 야곱의 경우에도 보면 아버지 이삭을 속여 축복을 받고 하란으로 도망을 가는데 중간에 루스벌판에서 지쳐서 돌베게를 베고 잠에 빠져듭니다. 그는 유명한 사닥다리 꿈을 꾸는데 거기에서 하나님은 그에게 네가 지금 누워있는 땅을 너와 너 자손에게 주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항상 너를 지켜주겠다는 언약을 해줍니다. 이에 야곱은 베게로 했던 그 돌을 세우고 거기에 기름을 붓고 벧엘, 즉 하나님의 집이라고 명명하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여기에서 나타난 예배를 볼 것 같으면 족장들의 예배는 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고난 뒤에 그 경험을 기초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족장들의 예배의 특징은
1) 자기들의 실존적인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2) 그 하나님과 그 경험을 기념하고 그 관계를 객관화하고 서원하는 형식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족장들이 예배드릴 때, 돌이라든가, 상수리 나무밑이라든가, 우물같은 물건들을 사용했으므로 이들의 예배는 정령숭배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령숭배는 장소과 그 물건에 절대적으로 메여서 옮길 수 없습니다. 반면에 족장들은 그 장소를 그들이 이동하는 대로 바꾸었고 물건도 여러가지를 사용하였는데 그들의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속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사실과 그들의 삶과 함께 하여주시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해 주신 하나님에 대해 신뢰를 구체적으로 보이는 표로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족장들의 이 예배에서 우리는 예배란 개인의 삶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이 개인의 삶을 돌보아주신다는 약속에 대해 인간이 신뢰를 표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가 출애굽사건을 통해서는 상당히 광역화합니다. 출애굽사건은 아시는대로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의 개입으로 압제자 애급으로부터 해방되는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3:12과 5:3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서 이스라엘민족을 애급으로 부터 해방시키라는 명령을 하면서 그 근거로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께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 하나님의 목적대로 결국 해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해방의 경험을 유월절 예식에 담아서 일년에 한 번씩 거대한 축제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는 벌써 예배가 민족해방사건이란 상당히 정치적이고 민족적이고 역사적인 것임을 봅니다.
아브라함과 야곱 등 족장들에게는 개인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도와주시고 이것에 대한 개인적인 응답과 감사의 형태로 나타났는데 출애급사건에서는 민족의 해방사건에 하나님이 모세를 직접 불러 개입하시고 애급의 바로왕과의 대결을 통해서 승리하셔서 억압받던 민족을 해방시키시는 정치적이고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그런 일을 기념하고 거기에 임재했던 하나님을 다시 체험하는 차원에서 유월절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유월절 예배뿐만이 아니라 오순절, 장막절 등도 모두 원래는 농경축제였는데 장막절은 모두 출애급이후에 가나안땅에 들어가기까지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예배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예배는 이런 역사적 사건만 기념하는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 안식년, 희년, 하나님앞에 혹은 형제에게 의식, 무의식가운데 지은 죄들을 자복하고 회개하는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등 제사를 드리도록 하여 예배가 하나님과 이웃과 심지어 땅과 같은 자연까지에 대하여 삶의 윤리를 확립하는 삶의 총체적 구조로 조직되었습니다. 이런 예배의 조직은 신명기, 레위기 등에 보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예배의 사회화가 이루어지는 셈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은 우리 개인의 삶에 개입하시고 개인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며 이에 대해 인간이 신뢰를 표현하는 것에서 이제 그 하나님이 개인뿐만이 아니라 민족적 고통에 참여하시고 정치적으로 억압당하는 약소민족을 강대국으로부터 해방시키시고 이에 대해 온 민족이 민족의 하나님으로 섬기며 그 역사를 찬양하는데로 발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안식일, 희년,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들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인간의 고백인 동시에 바로 나 이외에도 하나님의 은혜속에 있는 존재들, 즉, 이웃들, 특히 고아와 과부와 같은 고난당하는 자들, 그리고 심지어 우리가 농사를 짓고 있는 땅과 같은 하나님의 창조된 자연과도 하나님의 사랑의 계약을 맺고 사귐을 갖는 차원으로 확대됩니다. 그래서 예배는 사회전반에 걸친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삶을 위하여 하나님과 나와 우리 이웃과 온 창조물 사이에 가지게 되는 가장 보장된 약속의 외적 표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밀하게 규정된 예배는 왕국시대가 전개되는 동안 변질되게 됩니다. 사울과 다윗 등 초기의 왕들은 절대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고 철저히 그 규칙을 따랐지만 솔로몬 때부터 이방종교가 들어오고 왕국이 분단되어 진행될 때는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이탈하고 이방신을 섬기고 거기에서 사상은 해이해져서 왕도 인근 국가의 왕처럼 신적인 권위를 갖게 되고 예배는 미신화되어 가고 사회정의나 평화같은 것은 무시되는 방향으로 흐르게 됩니다. 여기에는 제사장들이 왕들의 보호아래 어용제사장이 되어 치부하고 교권도 왕권 비슷하게 강화하고 희생제사는 미신적으로 예배자들을 철저히 성전과 제사장에게 복종시키는 그런 쪽으로 흘러가는 것을 강력히 비판한 그룹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왕들과 제사장들을 비판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우습게 여기는 백성들의 잘못된 신앙을 비판하고 정의나 평화나 사랑이나 자비같은 예배의 본질을 멀리한 채 오로지 형식만 있는 예배를 비판하였습니다.
예언자들의 예배에 대한 두 가지 태도는
1) 형식보다 내용을 중시하고 2) 사회정의와 평화가 수반되지 않는 예배는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의 한결같은 요구는 예배의 정신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예언자들 중에 가장 정치적 예언자로 인식되는 이사야는 이 예배에 대해 아주 분명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이 자리는 지금 새 왕이 등극하는 대관식인데 그는 여기에서 왕이 등극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등극하시며 하나님이 사실상의 통치자임을 고백하고 둘 째는 자기의 죄를 철저히 참회하고 그 다음에는 이 가치관이 혼란된 세상에 나가서 증인이 될 것을 서약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간결하게 예배의 요소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예배란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주권자로서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우리의 죄를 그 앞에 참회하며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과 격려로 가치관이 혼란된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증인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예배의 발전을 보면 그 차원이 점점 광역화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예배는 개인적이고 자기의 삶에 관계되는 예배였으나 출애급의 예배에서 예배는 개인의 삶에만 관계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적, 정치적, 사회적 차원까지로 그 영역이 확대되고 동시에 개인과 사회윤리로까지 확대됩니다. 그러다가 왕국시대에 와서는 민족의 해방같은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통치권이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국가를 다스리시며 그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의무가 예배하는 공동체에 있다는데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고 개인의 삶은 전혀 배제된 것이 아닙니다. 시편같은 것을 보면 거기에는 인간이 가지는 질병의 고뇌에서 개인의 영혼의 구원에 이르기까지 한 개인이 가지는 모든 실존적인 삶이 다 기도의 제목이 되고 하나님께 간절한 간구로 드려지고 찬양으로 드려지는 것을 보면 민족적이고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주제가 예배의 주제로 확대되어 가는 동시에 개인의 영혼의 문제도 더 깊이 예배의 주제가 되어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런 예배가 예수님에게 와서 그 영역이 한층더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한 중풍병자가 치유를 받고 하나님앞에서 구원받고 새로워지는 데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우주적 차원에까지 확대되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전까지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신이었고 유대인만이 예배드릴 수 있고 그 축복을 유대인만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심으로서 하나님은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계의 거민의 하나님이며 하나님은 유대인만을 애급에서 해방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한국민족을 일제의 압제에서도 해방시키시고 남아프리카 흑인들을 백인들의 손에서 해방시키시는 일도 하시는 하나님을 인식케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경배받고 찬송받는 하나님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온 우주에 의해 경배받고 찬송받는 하나님임이 확인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역시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문제 죽음의 문제를 부활로 해결하신 사건입니다. 주일은 바로 이 죽음의 권세를 이긴 부활의 승리를 축하하는 날이며 이 죽음에 대한 부활의 승리의 힘이 우리의 예배의 중심이 되는 사건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구원이 시간과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땅위에서만이 아니라 하늘과 온 우주가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되며 시간적으로까지 확대되는데 태초부터 종말에 이르기까지로 확대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 장에 나오는 유명한 새 하늘과 새 땅 이야기에서는 이런 구원의 드라마가 마치 교향곡이 곡을 종결하려고 할 때 웅장하게 울려퍼지는 것 같이 구원의 극치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 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인간의 삶속에서 인간이 가지는 모든 실존적인 슬픔으로부터 시작하여 운명적 고통인 죽음, 그리고 불의와 억압이 있는 이 세상의 구조 전체가 다 지나가고 하나님이 단장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되는 찬송입니다. 우리 예배는 승리이고 희망이며 이를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며 우리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 예배는 심장의 박동치럼 힘 찬것이고 생명을 공급하는 하나님의 자원입니다. 예배는 우리 한 개인이 삶에서 흘리는 눈물을 하나님이 그 자비의 손길로 닦아 주시는 은총에서 부터 시작하여 국가와 사회속에 정의와 평화가 세워지고 온 우주가 혼돈속에서 질서로 돌아가게 하며 마지막에 인간과 세상이 지고 있는 모든 궁극적 문제를 새롭게 갱신시키는 하나님의 역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런 기쁨과 희망으로 하나님께 마음껏 예배드리고 그 은총을 나누어 누리며 증거하는 부산진교회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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