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주의를 극복하라 (사58:9-12)
본문
우리 모두 함께 예수님이 승천하셨던 감람산으로 잠깐 가봅시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 앞에서 이제 여호와 하나님 나라로 올리우시는 너무나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때 우리 주님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시면서 마지막으로 하신 일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아마 누가복음이 이 때의 일을 가장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가복음 24장 50절 이하를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축복하실 때에 저희를 떠나 하늘로 올리우시니."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 예수님은 세상을 떠나면서 제자들과 그들을 통해 이 지상에 나타날 하나님의 백성들, 곧 교회를 앞에 놓고 두 손을 들어 축복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 모두가 복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2천 6백여 년 전에 이사야 라고 하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사야 61장 9절을 보십시오. "그 자손을 열방 중에, 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온 세상에 살고 있는 열방들과 모든 족속들이 장차 예수 믿고 이 지상에 나타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을 보며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로다." 하며 부러워하고 칭찬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마지막 떠나시면서 축복을 하셨고 또 이사야를 통해서 우리가 모든 사람으로부터 복 받은 자라는 칭송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예언하셨으니까,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 모두는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복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생전 복 소리 안 하던 옥 목사가 갑자기 복, 복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매우 소중한 말씀입니다. 세 종류의 복 성경을 보면 복에는 주로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순수하게 천상적인 복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영적인 복이라고도 합니다. 또 성경 어느 곳에 보면 하늘에 속한 복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갖다 바쳐도 우리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복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 것, 죄 사함을 받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 이 모든 것은 순수하게 천상적인 복이요,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 모두 이미 이 복을 받은 줄 믿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 주저하지 않고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아니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때가 되면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천상의 축복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아름씩 부어 주시는 큰 은혜의 순간이 올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두 번째 복은 천상적이면서 세상적인 복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이면서 육적인 복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중요하고 육적으로도 중요하고, 그러니까 영과 육을 모두 커버하는 특별한 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복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 하는 복은 바로 이 복입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육적인 사람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백 퍼센트 영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이면서 동시에 육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영적이면서, 육적으로 필요한 복도 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복은 순수하게 세상적인 복입니다. 어떤 복이 있습니까 돈을 많이 버는 복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장수해서 한 130세까지 사는 복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복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복을 세상적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셔서 그 복을 받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하나님하고는 관계없이 그런 복을 누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세상적인 복을 놓고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하고 함부로 말하면 안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세상적인 권력을 얻었을 때 목사가 가서 "주여, 이 가정에 축복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명예를 주시니 복을 주시고 앞날이 형통하게 해주옵소서." 하고 복을 빌어준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그렇게 복을 빌어준 지 일년도 안돼 가지고 백성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까 그게 어떻게 복입니까 화지요. 차라리 장관이 되지 말았으면, 국회의원이 되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복인 줄 알고 덥석 받았다가 나중에는 망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인 복은 꼭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김일성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그렇게 죽고 나서도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까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적으로 재물을 쌓을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고 명예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적인 복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이런 복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주시면 받는 것이고 안 주시면 안 주시는 대로 우리는 세상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미 믿음을 가지고 첫 번째 복은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복입니다.
영적이면서도 육적인 복이 우리에게 참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그렇게 필요한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나니까 이 영적이면서도 육적인 복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날마다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을 보면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여섯 가지의 영적이면서도 육적인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2천 6백여 년 전에 유대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고 싶어서 많은 복들을 미리 선언하시고 이 복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복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안타까우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축복하신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오른손을 높이 드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복을 못 받느냐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대 나라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싶어도 복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워 보면서 알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능력도 있어서 자식만 제대로 하려고 하면 공부도 시킬 수 있고 유학도 시킬 수 있고 학위 받을 때까지 뒷바라지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어서 못 주고 못 받는 일들이 우리 집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모가 자수 성가해서 일으킨 기업, 부모는 자녀가 그 기업을 더 번창시키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 기업을 일으켜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기업을 다 물려주고 싶어도 못 물려줍니다. 자식이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애한테 맡겼다가는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주고 싶지만 자식이 못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어떤 자질, 기능, 또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특별한 비밀이 있잖아요 비결이 있잖아요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못 물려주어서 한이 되어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식이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럴 때마다 부모의 마음이 오죽 답답하겠어요
유대 나라 사람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죽이 답답하니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에게 왜 복을 못 받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게 하셨을까요 그 말씀이 58장 전체에 나와 있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못 받고 결국은 망했느냐 한마디로 요약하면 형식주의 때문이었습니다. 형식주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생활에 마음과 행함이 빠져 있는 것을 형식주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할까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이나 순종은 따라가지 않은 채 종교적인 형식만 남은 것을 놓고 형식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이 불행한, 비참한 비극적인 형식주의의 희생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겉으로는 하자가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요, 선민답게 할 짓은 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행위에 마음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순종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싶어도 못 주는 것입니다. 손에 들고 안타까워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민족이었는지 어디 한 번 볼까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생활을 했나 한 번 볼까요 이사야 58장 2절로 잠깐 넘어가 봅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 하며."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유대 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아시죠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 뜻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듣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금식하면서 기도도 했습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은 금식하면서 기도했고,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날마다 소원하며 기다렸습니다. 그 정도 열심이라면 됐잖아요 우리 보기에는 하자가 전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백성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놓고 무엇이라고 책망하시는지 아십니까 1절을 한 번 보십시오. 이사야를 불러서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이사야야, 크게 외치라." 작은 소리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못 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큰 소리로 외치라는 말입니다. "아끼지 말라." 말을 아껴서 할 말을 안하고 있지 말고 모든 말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네 목소리를 나팔 소리 같이 날려 네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죄를 고하라." 기가 막힙니다. 이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날마다 금식하고 기도할 때가 많고 하나님 앞에 응답 받기를 사모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행위를 놓고 허물이요 죄라고 말합니다. 예배가 죄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허물이 되어 버렸어요. 왜 그런지 압니까 그 예배에, 그 기도에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거예요. 마음이 안 따라가니까 귀로만 들었지 순종을 못해요. 순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해요. 관심이 없어요. 제사를 지내기는 지내지만,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기는 갑니다만 마음은 엉뚱한 데 있어요. 그리고 모든 것을 귓전으로 들으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지적하시는 지 잠깐 봅시다. 3절 끝 부분에 보면 "보라"하고 나오지요 하나님이 유대 나라 사람들을 놓고 진단하시는 그들의 허물입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몇 차례 금식을 합니다. 여러분 금식이 뭡니까 금식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먹고 마시는 것까지도 생략하고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순종하려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 행위, 신앙 행위 중에서 가장 첨단을 걷는 것입니다. 아무나 못 하는 것이지요. 금식을 할 정도라면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금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서 얻으며." 즐기느라고 바빴다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서 어떻게 즐기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는데 마음이 온통 가 있었습니다.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사람들에게 다 종이 있고 그 당시에 하인도 있고 집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에게 인정사정 없이 더 포학하게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4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배가 고픈데, 먹지 않는데 무슨 힘이 나가지고 주먹질을 다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하고 있는데, 내면으로는 할 짓을 다하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간다 싶으면 주먹질도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6절을 보십시오. 이제 주님은 입장을 바꾸어서 말씀합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 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면서 금식을 하든지 해야 되는데, 실제로는 금식을 하면서 이걸 안 한다 그 말입니다. 압박 당하는 자는 다 포학하게 핍박합니다. 더 무자비하게 부려먹습니다. 그리고 주린 자를 보면 그들을 먹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집안 식구들이 아쉬운 게 있어서 찾아오는 것 보면 몸을 피하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또 9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만일 내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그러니까 그들은 금식을 하면서 거짓말도 제 맘대로 했던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그들은 괴로워하는 자를 더 괴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금식하면서 이런 짓을 하면, 이런 것을 일컬어서 형식주의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은 듣는 것이고, 사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듣는 것은 듣는 것으로 끝나고 사는 것은 자기 맘대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고, 사회 생활은 사회 생활인 것입니다. 성경 공부는 성경 공부고 내가 집에 와서 사는 것은, 집안 생활은 또 다른 세계라는 것입니다. 연결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깊이 젖어 들지 못하기 때문에 순종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의 복을 못 받았느냐 마음도 순종도 없는 신앙 생활을 형식적으로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복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런 일들이 그 당시 유대인의 일처럼만 느껴진다면 얼마나 우리가 행복한 신앙인 이겠습니까
그런데 저나 여러분이나 이것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을 보십니다.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는 절대로 외모나 어떤 제스처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던, 찬양을 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락방에서 공부하던, 예물을 주님께 드리던 간에 거기에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됩니다. 내 마음이 따라가야 합니다. 만약에 마음이 따라가지 아니하면 최악의 경우에는 유대 나라 사람의 입장처럼 예배하는 자체가 죄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 형태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고약한 허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안 담고 하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예배하고 그를 섬길 때는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우리의 전 인격을 다 송두리째 바쳐서 하나님에게 예배해야 되고 말씀 앞에 앉아야 되고 예물을 드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연세 많으신 우리 부모님들, 추석이니까 자식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나 부모는 속을 읽고 있습니다. 자식이 과연 자신을 사랑하는가 존경하는가 부모님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찾아왔는가 체면상 찾아와서 앉아서 아양을 떠는가 부모는 다 압니다. 그저 힘이 없으니까 말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뿐입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앞에 차려줘도 마음 한 곳은 슬퍼요. 이게 부모의 심경입니다. 인간의 부모도 이러하다면 하나님이야 오죽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예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같이 하면서도 마음은 엉뚱한 데 있고, 모든 것이 형식적일 뿐이요, 돌아가서는 다 잊어버리고 순종을 안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이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마음이 따라가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듣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순종이 전혀 뒷받침이 안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거기에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얼마나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계기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동차 타고 가면서 자주자주 앞에 있는 계기판을 보지 않습니까 속도도 보고 또 연료가 얼마만큼 있는지도 보고 또 온도는 적당한가도 보고 엔진 오일이 제대로 있는가도 보고 엔진의 회전율이 어느 정도 과하지 않는가 하는 것도 우리가 슬쩍슬쩍 보면서 운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늘이 제대로 동작하고 있어야 될 곳에 바늘이 서 있으면 우리는 안심하고 자동차가 모든 엔진의 기능이 정상인 줄 알고 자신 있게 몰고 갑니다. 그러니까 계기판을 가지고 엔진의 정상 여부를 우리는 판단하지요 오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이 얼마만큼 정상적이냐, 하나님과 그 사람의 관계가 건강하냐, 병들었느냐,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를 뭘 보고 아느냐 순종하는 것을 보고 압니다. 순종은 계기판의 바늘과 같습니다. 순종을 잘 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입니다. 순종이 잘 안됩니까 문제가 있어요. 안타깝게도 이사야 시대의 백성들은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못 받았습니다. 끝까지 순종 안 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다가 나라가 몽땅 망했어. 몽땅 망했어. 그 후로는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불순종 하다가 망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복을 받아야 돼요.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한가지 공식이 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복은 순종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믿음으로 얻고 복은 순종으로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 돼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복을 받을까요
첫째로, 어두움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복을 받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어두움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복입니다. 듣기만 해도 신이 나는 말씀이지요 8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다시 말하면, '네가 전심으로 순종하면' 하는 말입니다.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니라." 얼마나 멋있습니까 또 10절 중간 끝에 가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이 축복은 어두움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복입니다. 이것은 심령의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적 눈이 밝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하늘의 빛이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상하게 생각할 지 모릅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주님의 빛이 우리 마음을 환하게 비추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어두움에 다니는 자가 아니고 대낮같이 밝은 세계를 다니는 빛의 자녀가 아니냐' 우리가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와 같은 빛의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합니다. 우리는 빛이신 주님과 동행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이 빛 가운데로 들어 와서 빛 가운데로 행하다가 순종을 못 하면 다시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어두우니까 어두워진다는 그런 말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음으로 그 마음이 밝아졌던 사람이기 때문에 순종을 하면 그 밝은 빛이 항상 그의 마음을 밝히고 그 눈을 밝히지만 순종을 못하고 불순종하면 자기도 모르게 심령이 어두워져 버립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 왕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천을 받을 만큼 그래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눈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순종을 하지 않자 그가 얼마나 어두움에서 헤맸습니까 눈이 어두워지고 심령이 어두워지면 선악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정욕과 욕심에 끌려 다닙니다. 내 뜻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도무지 분별을 못합니다. 나중에는 초조해집니다. 불안해집니다. 공포에 시달립니다. 그 마음이 불안해서 잠을 못 잡니다. 결국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앞으로 갈까 뒤로 갈까, 한참을 헤매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망하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이 어두운 세상을 걸어가려면 우리 마음이 밝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눈이 밝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도 어두운데 우리 눈 마저 어둡다고 해 보십시오. 이것만큼 절망적인 경우가 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비유 가운데 기가 막힌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었어요. 복음 듣고 그 마음에 천국을 모시니 얼마나 기뻐요. 그 사람 마음에 있던 귀신이 놀라서 쫓겨 나갔습니다. 그 귀신이 나가서 돌아다니는데 마땅히 쉴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참 돌아다니다가 '야, 옛날에 있던 집으로 한번 가보자'하고는 시험 삼아서 그 옛날에 있던 그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와 보았습니다. 돌아왔더니 깨끗이 청소되고 잠겨있을 줄 알았던 문이 활짝 열려있고 너무너무 기가 막히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 말이 완곡해서 이렇게 비유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어 있고 청소되어 있고 문이 열려 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믿고 나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지 마음대로 사니까 그 마음이 귀신 살기에 마침 좋도록 엉망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귀신이 너무 좋아 가지고, 자기 혼자 살기가 너무 아까워서 자기 친구 일곱 명을 끌어다가 함께 사는 일이 벌어졌다고 주님이 비유하셨지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예수 믿고 순종하던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면 그 심령이 어두워져요. 어두워지면 악령의 역사가 그 마음을 쥐어 사로잡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많은 복이 필요합니다만 우리 심령이 밝고 눈이 밝아서 선과 악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을 분별하고,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 손을 대야 할 것과 손을 대지 말아야 할 것, 지혜로운 자의 길과 어리석은 자의 길을 바로 분별하는 빛을 가지는 것, 이것만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순종할 때 이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이 복을 받자 그 말입니다.
둘째로, 빠른 치료의 복을 받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8절 중간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이 말은 우리를 고치시되 빨리 고쳐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쳐주신다는 약속 이상입니다. 무슨 병이든지 오래오래 질질 끌면 사람이 골병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니까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되 빨리 고쳐주시겠다고 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이런 축복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병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병이 영적인 병입니다. 그 다음에 무서운 병이 정신적인 병입니다. 그 다음에 무서운 병이 육적인 병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제일 중요한 것을 영적인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병을 무섭게 생각합니다. 완전히 우선 순위를 바꾸어서 거꾸로 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영적인 병이 가장 심각한 병입니다. 그 다음이 정신적인 병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병이 많습니다. 육신이 병드는 거야 세상을 살다 보면 과로해도 오고, 조심하지 못해도 오고, 어쩌다가 균에 감염되어도 오고, 또 체질상 어떤 병을 이기지 못해서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영적인 병은 없어야 합니다. 혹 가끔 병이 있더라도 금방 없어져야 되고 고침 받아야 됩니다. 그 병이 항상 자리를 잡도록 만들어선 안됩니다. 정신적인 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사람 중에 정신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입니다. 멀쩡한 것 같은 데도 이상해요. 왜 이런 일들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안에 이렇게 끊어지지 않고 계속 사람을 괴롭히고 남아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사람의 삶 속에 순종이 결여되어 있을 때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료를 안 하신다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순종하면 정신적인 병도 하나님이 치료해 주십니다. 치료해 주시되 빨리 치료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복을 받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이것만큼 큰복이 어디 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하나님이 그 영광을 가지고 그 사람 뒤에 따라 가면서 가이드 해 준다는 것입니다. 또 11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이것만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절실한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중에는 아무도 우리 자신을 일평생 완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할 만한 능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외톨이입니다. 인생 길은 너무너무 험하고 멉니다. 지성의 눈을 가지고도 그 길을 다 우리는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그 길이 험하고 멀기 때문에 독수리와 같은 눈을 가지고도 그 미로를 다 살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 길을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외톨이입니다. 갑자기 유턴을 해야 될 곳이 왔습니다. 유턴을 해야 될까요 바로 가야 될까요 잘 몰라요. 누구에게 의논할까요 아내에게 의논하면 아내가 책임지고 말해줍니까 선배에게 가서 의논하니까 선배가 그저 적절한 조언은 해 주지만 자기가 책임지고 어떻게 하라고 말해줍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잘 생각해서 해라." 그 말이야 누구야 못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는 항상 외톨입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길이 두 갈래로 갈립니다. 왼쪽 길, 오른쪽 길, 다 선하게 보입니다. 한쪽이 아주 캄캄하고 악하면 안가면 되겠지만 문제는 양쪽 다 좋은 길처럼 보인다는데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갈까요, 왼쪽으로 갈까요 누구한테 물어볼까요 두 길을 한번에 다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해야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철저하게 외톨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말 필요한 것은 완전하신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실수 없이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 분의 축복이 얼마나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절실한지 모릅니다. 천사가 우리를 보호해 주어도 우리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산에 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하나님이 "모세야, 천사를 보내주마. 가브리엘 보내 줄께. 가브리엘이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산에서 내려가라.아니요, 하나님. 가브리엘도 싫습니다. 미가엘도 싫습니다. 천사가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우리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셔야 만이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옵소서." 우리는 40 주야를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고 이렇게 씨름을 했던 모세를 기억합니다. 천사가 지켜주면 되지 않습니까 천사가 인도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야단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지 아니하고 인도자가 안되면 안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다는 것만큼 큰복이 없습니다. 이 복을 얻으려면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로, 확실한 기도 응답을 받는 축복을 받으려면 순종해야 합니다. 9절을 보면 참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얼마나 실감나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순종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너무 다급해 가지고 소리를 내서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확인 받으면 더 이상 불안해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다섯째로, 우리 영혼이 건강하고 만족하는 복을 얻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주간 동안 외우고 묵상해야 될 구절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항상 인도하여." 여기서 '인도하여'는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인도하며'로 해야 옳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며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자꾸 외워 보십시오. 진짜 속에서 샘이 솟는 것 같은 느낌은 받을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속 사람이 건강해야 합니다. 내적인 자아가 강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건강한 것도 중요지만 중요한 것은 내면의 자아입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다 마시면서 즐기면서 사는 세상이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속 사람이 너무 어린애처럼 약해졌습니다. 탈영병들을 보십시오. 왜 탈영합니까 옛날 우리가 군대 생활 할 때와 비교하면 호강도 그런 호강이 없는데 왜 탈영합니까 조그마한 불편이라도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감정이 상하는 것을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유리그릇과 같다고 할까요 살짝 대도 깨져요.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자기가 얼마나 불행해질 지 미리 생각을 하고 미리 조심을 할 여유도 없어요. 너무나 약해졌어요. 그러니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탈영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부들은 어떻습니까 옛날에 주부생활을 했던 아녀자들에 비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얼마나 복이 터진 여자들입니까 그것도 좀 지나치면, 얼마나 복이 터진 귀부인들입니까 그렇잖아요 전자제품 80퍼센트가 부인들을 위한 전자제품 아닙니까 세탁기로부터 시작해서 전부 다 여자들을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로 풍요롭게, 정말 편리하게 고생 덜 하면서 살 수 있는 여건들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정마다 왜 그렇게 문제들이 많이 일어나는지요 왜 그렇게 부인들은 날마다 불평투성인지요 만족스럽지 못해 가지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팍 튀어 오르는 용수철처럼 말입니다. 왜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워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속 사람이 너무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강해야 되는데, 그래서 참을 수 있고 여유도 있고 건강해서 감사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마음이 약해져 놓으니 아무리 쏟아주어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참 고약합니다. 필업(fill up) 가지고 안됩니다. 필업이 뭡니까 미국에서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어 달라 할 때, "필업!"이라고 말하면 가득 넣어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마음은 필업 가지고 안돼요. 돈을 가지고 아무리 집어넣어도 만족이 없어요. 절대 만족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넣으면 넣을수록 문제가 생깁니다. 요구하는 쾌락을 다 충족시켜 주고 충족시켜 줘도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힐업"(heal up)이라야 됩니다. 치료가 되야 돼요.
그렇다면 누가 치료시켜줍니까 하나님이 시켜줍니다. 어떻게 시켜줍니까 우리의 심령을 물 댄 동산 같이 만들어서 우리 마음이 건강해지고 강해지도록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 만족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바울이 말 한 것처럼 모든 것을 가져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은혜,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손을 들라고 해서 죄송합니다만 한번 들어보세요. 남편의 월급이 50만원 박봉입니다. 50만원을 가지고 와서 생활해도 나도 모르게 항상 기뻐요. 감사해요. "나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도 많은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좁은 아파트 난간에도 국화꽃 화분을 탁 얹어 놓고 향기가 온 집안에 물씬 나게 하면서 식구들을 기쁘게 해요. 이상해요. 기분이 좋은데 어떻게 합니까 감사한데 어떻게 합니까 마음이 평안하고 만족스러운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50만원을 받아도 그렇게 만족스럽고 감사하고 기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하고, 한 달에 월급을 천만 원이나 받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해서 더 주었으면, 더 즐겼으면 하고 사는 사람, 이 두 사람 중 여러분은 어느 쪽을 따라가고 싶습니까 한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50만원 받고도 정말 감사하고 만족하고 기뻐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손 들으라니까 손을 들어주셨지요. 물론 이 가운데는 진짜 그런 은혜를 받은 분들도 꽤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날마다 바가지 긁어도 좋고, 날마다 만족이 없어서 그저 울화통이 터져도 좋으니까 월급은 적어도 천만 원은 가지고 와야지.'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그저 돈,돈 하는 사람에게 돈을 그냥 쏟아주는 것 아닙니다.
적게 받으나 많이 받으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물 댄 동산처럼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복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 은혜를 받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복을 받자 그 말입니다. 여섯째로,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복을 받읍시다.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망한다고 하던 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복을 좀 받고 싶지 않습니까 안 된다고 하는 집안들이 이리저리 풀려서 형통하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망쳐놓은 일을 자식이 다시 세우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3년 전에 잘못된 일들이 3년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모든 사람 앞에 선망의 대상이 되도록 전화위복이 되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너진 데를 다시 수축하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한때 무너뜨렸지만 하나님이 다시 세워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비가 잘못해서 집안이 흔들리지만, 자식 대에 하나님이 그 집안을 튼튼하게 세워주시는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샘 슈메이커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께 10퍼센트 순종하면 10퍼센트의 행복을, 50퍼센트 순종하면 50퍼센트의 행복을, 100퍼센트 순종하면 100퍼센트의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우리에게 불리하거나 손해가 될성싶으면 순종하지 않고 유리하면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이런 변명,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자꾸 순종하기를 지체하면 그것도 순종이 아닙니다. 이런 멋진 말이 있습니다. "지연된 순종은 불순종의 동생이다." 우리가 이런 말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순종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복은 순종으로 받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순종하자 그 말입니다. 할렐루야! 순종하자고요. 그래서 우리 모두 복 받는 사람이 됩시다. 이왕, 대각성 전도 집회다, 우리가 전도다 하는 말을 많이 하지만 뭔가 매력이 있어야 전도를 하지 않겠습니까 매력이 있으려면 영과 육을 아름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축복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 앞에 가서도 전도하면 좀 먹혀들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승천하시면서 축복하시던 그 주님의 축복을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리기 위해서 전심을 다해서 순종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멋진 인생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복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생전 복 소리 안 하던 옥 목사가 갑자기 복, 복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실 지 모르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매우 소중한 말씀입니다. 세 종류의 복 성경을 보면 복에는 주로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순수하게 천상적인 복입니다. 이것을 일컬어서 영적인 복이라고도 합니다. 또 성경 어느 곳에 보면 하늘에 속한 복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갖다 바쳐도 우리 힘으로는 살 수 없는 소중한 복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성령님을 선물로 받는 것, 죄 사함을 받는 것,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권리를 얻는 것, 이 모든 것은 순수하게 천상적인 복이요,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입니다. 우리 모두 이미 이 복을 받은 줄 믿습니다. 아마 우리 중에 주저하지 않고 금방 대답이 나오지 아니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실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때가 되면 여러분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천상의 축복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한아름씩 부어 주시는 큰 은혜의 순간이 올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두 번째 복은 천상적이면서 세상적인 복입니다. 다시 말해 영적이면서 육적인 복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중요하고 육적으로도 중요하고, 그러니까 영과 육을 모두 커버하는 특별한 복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복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려 하는 복은 바로 이 복입니다. 우리는 순수하게 육적인 사람만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다고 백 퍼센트 영적인 사람도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이면서 동시에 육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영적이면서, 육적으로 필요한 복도 받아야 합니다. 세 번째 복은 순수하게 세상적인 복입니다. 어떤 복이 있습니까 돈을 많이 버는 복도 있을 것입니다. 건강하고 장수해서 한 130세까지 사는 복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명예와 권력을 누리는 복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복을 세상적이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복을 주셔서 그 복을 받는 사람도 가끔 있지만 하나님하고는 관계없이 그런 복을 누리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세상적인 복을 놓고 "하나님이 복을 주셨다."하고 함부로 말하면 안됩니다.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세상적인 권력을 얻었을 때 목사가 가서 "주여, 이 가정에 축복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명예를 주시니 복을 주시고 앞날이 형통하게 해주옵소서." 하고 복을 빌어준다고 해 봅시다.
그런데 그렇게 복을 빌어준 지 일년도 안돼 가지고 백성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까 그게 어떻게 복입니까 화지요. 차라리 장관이 되지 말았으면, 국회의원이 되지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복인 줄 알고 덥석 받았다가 나중에는 망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적인 복은 꼭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김일성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그렇게 죽고 나서도 하나님이 되어 있습니까 아무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우에 따라서는 세상적으로 재물을 쌓을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고 명예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적인 복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보면 이런 복에 대해서는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주시면 받는 것이고 안 주시면 안 주시는 대로 우리는 세상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미 믿음을 가지고 첫 번째 복은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복입니다.
영적이면서도 육적인 복이 우리에게 참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전에는 그렇게 필요한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나니까 이 영적이면서도 육적인 복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가를 날마다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을 보면 이사야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적어도 여섯 가지의 영적이면서도 육적인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2천 6백여 년 전에 유대나라 사람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주고 싶어서 많은 복들을 미리 선언하시고 이 복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복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안타까우셨겠습니까 하나님은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축복하신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오른손을 높이 드시고 우리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복을 못 받느냐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대 나라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싶어도 복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자녀들을 키워 보면서 알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능력도 있어서 자식만 제대로 하려고 하면 공부도 시킬 수 있고 유학도 시킬 수 있고 학위 받을 때까지 뒷바라지도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는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어서 못 주고 못 받는 일들이 우리 집안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부모가 자수 성가해서 일으킨 기업, 부모는 자녀가 그 기업을 더 번창시키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아름답게 쓰일 수 있는 기업을 일으켜 주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기업을 다 물려주고 싶어도 못 물려줍니다. 자식이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애한테 맡겼다가는 어떻게 될지 불안해서 맡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주고 싶지만 자식이 못 받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예술적인 어떤 자질, 기능, 또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특별한 비밀이 있잖아요 비결이 있잖아요 자손에게 물려주고 싶지만 못 물려주어서 한이 되어 눈도 제대로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식이 받을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럴 때마다 부모의 마음이 오죽 답답하겠어요
유대 나라 사람들을 보시는 하나님의 심정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오죽이 답답하니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그들에게 왜 복을 못 받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게 하셨을까요 그 말씀이 58장 전체에 나와 있습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못 받고 결국은 망했느냐 한마디로 요약하면 형식주의 때문이었습니다. 형식주의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생활에 마음과 행함이 빠져 있는 것을 형식주의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씀할까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이나 순종은 따라가지 않은 채 종교적인 형식만 남은 것을 놓고 형식주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대 나라 사람들은 이 불행한, 비참한 비극적인 형식주의의 희생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겉으로는 하자가 없어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요, 선민답게 할 짓은 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행위에 마음이 담겨 있지 않습니다. 순종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싶어도 못 주는 것입니다. 손에 들고 안타까워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이 어떤 민족이었는지 어디 한 번 볼까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생활을 했나 한 번 볼까요 이사야 58장 2절로 잠깐 넘어가 봅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하나님께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 하며." 여러분, 이 말씀을 보면 유대 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아시죠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와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 뜻을 알기 위해서 말씀을 듣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금식하면서 기도도 했습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은 금식하면서 기도했고, 하나님이 응답하시기를 날마다 소원하며 기다렸습니다. 그 정도 열심이라면 됐잖아요 우리 보기에는 하자가 전혀 없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백성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놓고 무엇이라고 책망하시는지 아십니까 1절을 한 번 보십시오. 이사야를 불러서 하나님이 말씀합니다. "이사야야, 크게 외치라." 작은 소리로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못 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도록 큰 소리로 외치라는 말입니다. "아끼지 말라." 말을 아껴서 할 말을 안하고 있지 말고 모든 말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네 목소리를 나팔 소리 같이 날려 네 백성에게 그 허물을, 야곱 집에 죄를 고하라." 기가 막힙니다. 이 백성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고, 날마다 금식하고 기도할 때가 많고 하나님 앞에 응답 받기를 사모하는 거룩한 백성으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 모든 행위를 놓고 허물이요 죄라고 말합니다. 예배가 죄가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이 허물이 되어 버렸어요. 왜 그런지 압니까 그 예배에, 그 기도에 마음이 따라가지 않는 거예요. 마음이 안 따라가니까 귀로만 들었지 순종을 못해요. 순종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해요. 관심이 없어요. 제사를 지내기는 지내지만, 예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기는 갑니다만 마음은 엉뚱한 데 있어요. 그리고 모든 것을 귓전으로 들으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수가 없어요.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지적하시는 지 잠깐 봅시다. 3절 끝 부분에 보면 "보라"하고 나오지요 하나님이 유대 나라 사람들을 놓고 진단하시는 그들의 허물입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년에 몇 차례 금식을 합니다. 여러분 금식이 뭡니까 금식은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먹고 마시는 것까지도 생략하고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순종하려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러니까 이 금식이라고 하는 것은 종교 행위, 신앙 행위 중에서 가장 첨단을 걷는 것입니다. 아무나 못 하는 것이지요. 금식을 할 정도라면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의 금식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찾아서 얻으며." 즐기느라고 바빴다는 것입니다. 먹지 않으면서 어떻게 즐기려고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는데 마음이 온통 가 있었습니다. "온갖 일을 시키는 도다." 사람들에게 다 종이 있고 그 당시에 하인도 있고 집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이런 사람들에게 인정사정 없이 더 포학하게 일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4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다투며,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 도다." 배가 고픈데, 먹지 않는데 무슨 힘이 나가지고 주먹질을 다 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금식은 하고 있는데, 내면으로는 할 짓을 다하는 것입니다. 돈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서로 미워하고, 자기에게 손해가 간다 싶으면 주먹질도 사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6절을 보십시오. 이제 주님은 입장을 바꾸어서 말씀합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주며 유리 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하면서 금식을 하든지 해야 되는데, 실제로는 금식을 하면서 이걸 안 한다 그 말입니다. 압박 당하는 자는 다 포학하게 핍박합니다. 더 무자비하게 부려먹습니다. 그리고 주린 자를 보면 그들을 먹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습니다. 심지어 집안 식구들이 아쉬운 게 있어서 찾아오는 것 보면 몸을 피하고 만나주지도 않습니다. 또 9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만일 내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그러니까 그들은 금식을 하면서 거짓말도 제 맘대로 했던 것입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그들은 괴로워하는 자를 더 괴롭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금식하면서 이런 짓을 하면, 이런 것을 일컬어서 형식주의라고 부릅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은 듣는 것이고, 사는 것은 사는 것입니다. 듣는 것은 듣는 것으로 끝나고 사는 것은 자기 맘대로 사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예배고, 사회 생활은 사회 생활인 것입니다. 성경 공부는 성경 공부고 내가 집에 와서 사는 것은, 집안 생활은 또 다른 세계라는 것입니다. 연결이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에 깊이 젖어 들지 못하기 때문에 순종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의 복을 못 받았느냐 마음도 순종도 없는 신앙 생활을 형식적으로 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복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런 일들이 그 당시 유대인의 일처럼만 느껴진다면 얼마나 우리가 행복한 신앙인 이겠습니까
그런데 저나 여러분이나 이것이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음을 보십니다. 중심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는 절대로 외모나 어떤 제스처에 놀아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배를 드리던, 찬양을 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락방에서 공부하던, 예물을 주님께 드리던 간에 거기에는 마음이 담겨 있어야 됩니다. 내 마음이 따라가야 합니다. 만약에 마음이 따라가지 아니하면 최악의 경우에는 유대 나라 사람의 입장처럼 예배하는 자체가 죄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 생활 형태가 하나님 보시기에는 고약한 허물이 될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안 담고 하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상달되지 않는 것과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여 예배하고 그를 섬길 때는 신령과 진정으로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우리의 전 인격을 다 송두리째 바쳐서 하나님에게 예배해야 되고 말씀 앞에 앉아야 되고 예물을 드려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연세 많으신 우리 부모님들, 추석이니까 자식들이 찾아오지요. 그러나 부모는 속을 읽고 있습니다. 자식이 과연 자신을 사랑하는가 존경하는가 부모님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마음에서 찾아왔는가 체면상 찾아와서 앉아서 아양을 떠는가 부모는 다 압니다. 그저 힘이 없으니까 말 안하고 가만히 있는 것뿐입니다. 아무리 진수성찬을 앞에 차려줘도 마음 한 곳은 슬퍼요. 이게 부모의 심경입니다. 인간의 부모도 이러하다면 하나님이야 오죽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속을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예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같이 하면서도 마음은 엉뚱한 데 있고, 모든 것이 형식적일 뿐이요, 돌아가서는 다 잊어버리고 순종을 안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이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마음이 따라가지 아니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이 듣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순종이 전혀 뒷받침이 안됩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 거기에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에 순종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무엇과 같으냐 하면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얼마나 올바른 관계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계기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자동차 타고 가면서 자주자주 앞에 있는 계기판을 보지 않습니까 속도도 보고 또 연료가 얼마만큼 있는지도 보고 또 온도는 적당한가도 보고 엔진 오일이 제대로 있는가도 보고 엔진의 회전율이 어느 정도 과하지 않는가 하는 것도 우리가 슬쩍슬쩍 보면서 운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늘이 제대로 동작하고 있어야 될 곳에 바늘이 서 있으면 우리는 안심하고 자동차가 모든 엔진의 기능이 정상인 줄 알고 자신 있게 몰고 갑니다. 그러니까 계기판을 가지고 엔진의 정상 여부를 우리는 판단하지요 오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그 사람의 신앙 생활이 얼마만큼 정상적이냐, 하나님과 그 사람의 관계가 건강하냐, 병들었느냐, 정상이냐, 비정상이냐를 뭘 보고 아느냐 순종하는 것을 보고 압니다. 순종은 계기판의 바늘과 같습니다. 순종을 잘 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입니다. 순종이 잘 안됩니까 문제가 있어요. 안타깝게도 이사야 시대의 백성들은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려는 복을 못 받았습니다. 끝까지 순종 안 했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다가 나라가 몽땅 망했어. 몽땅 망했어. 그 후로는 일어나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럴 수 없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불순종 하다가 망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복을 받아야 돼요.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한가지 공식이 있습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복은 순종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원은 믿음으로 얻고 복은 순종으로 받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복을 받아야 돼요. 복을 받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복을 받을까요
첫째로, 어두움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복을 받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어두움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복입니다. 듣기만 해도 신이 나는 말씀이지요 8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다시 말하면, '네가 전심으로 순종하면' 하는 말입니다.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니라." 얼마나 멋있습니까 또 10절 중간 끝에 가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하는 이 축복은 어두움이 대낮처럼 밝아지는 복입니다. 이것은 심령의 어두움이 물러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적 눈이 밝아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하늘의 빛이 비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상하게 생각할 지 모릅니다. '아, 예수 믿는 사람은 다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주님의 빛이 우리 마음을 환하게 비추고 있지 않느냐 우리는 어두움에 다니는 자가 아니고 대낮같이 밝은 세계를 다니는 빛의 자녀가 아니냐' 우리가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와 같은 빛의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 행합니다. 우리는 빛이신 주님과 동행합니다. 할렐루야!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이 빛 가운데로 들어 와서 빛 가운데로 행하다가 순종을 못 하면 다시 어두워진다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어두우니까 어두워진다는 그런 말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 믿음으로 그 마음이 밝아졌던 사람이기 때문에 순종을 하면 그 밝은 빛이 항상 그의 마음을 밝히고 그 눈을 밝히지만 순종을 못하고 불순종하면 자기도 모르게 심령이 어두워져 버립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사울 왕은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추천을 받을 만큼 그래도 처음에는 하나님의 눈에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순종을 하지 않자 그가 얼마나 어두움에서 헤맸습니까 눈이 어두워지고 심령이 어두워지면 선악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정욕과 욕심에 끌려 다닙니다. 내 뜻인지 하나님의 뜻인지 도무지 분별을 못합니다. 나중에는 초조해집니다. 불안해집니다. 공포에 시달립니다. 그 마음이 불안해서 잠을 못 잡니다. 결국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고 앞으로 갈까 뒤로 갈까, 한참을 헤매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망하는 자가 되어 버립니다. 영적으로 어두워지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십니까 이 어두운 세상을 걸어가려면 우리 마음이 밝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눈이 밝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도 어두운데 우리 눈 마저 어둡다고 해 보십시오. 이것만큼 절망적인 경우가 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비유 가운데 기가 막힌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었어요. 복음 듣고 그 마음에 천국을 모시니 얼마나 기뻐요. 그 사람 마음에 있던 귀신이 놀라서 쫓겨 나갔습니다. 그 귀신이 나가서 돌아다니는데 마땅히 쉴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한참 돌아다니다가 '야, 옛날에 있던 집으로 한번 가보자'하고는 시험 삼아서 그 옛날에 있던 그 사람의 마음으로 돌아와 보았습니다. 돌아왔더니 깨끗이 청소되고 잠겨있을 줄 알았던 문이 활짝 열려있고 너무너무 기가 막히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이 말이 완곡해서 이렇게 비유하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되어 있고 청소되어 있고 문이 열려 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 믿고 나서 순종하지 아니하고 지 마음대로 사니까 그 마음이 귀신 살기에 마침 좋도록 엉망이 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귀신이 너무 좋아 가지고, 자기 혼자 살기가 너무 아까워서 자기 친구 일곱 명을 끌어다가 함께 사는 일이 벌어졌다고 주님이 비유하셨지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아십니까 예수 믿고 순종하던 사람이 순종하지 않으면 그 심령이 어두워져요. 어두워지면 악령의 역사가 그 마음을 쥐어 사로잡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많은 복이 필요합니다만 우리 심령이 밝고 눈이 밝아서 선과 악을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을 분별하고, 가야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 손을 대야 할 것과 손을 대지 말아야 할 것, 지혜로운 자의 길과 어리석은 자의 길을 바로 분별하는 빛을 가지는 것, 이것만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주님은 우리가 순종할 때 이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이 복을 받자 그 말입니다.
둘째로, 빠른 치료의 복을 받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8절 중간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이 말은 우리를 고치시되 빨리 고쳐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고쳐주신다는 약속 이상입니다. 무슨 병이든지 오래오래 질질 끌면 사람이 골병 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니까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되 빨리 고쳐주시겠다고 합니다. 순종하는 자에게 이런 축복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병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병이 영적인 병입니다. 그 다음에 무서운 병이 정신적인 병입니다. 그 다음에 무서운 병이 육적인 병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제일 중요한 것을 영적인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병을 무섭게 생각합니다. 완전히 우선 순위를 바꾸어서 거꾸로 봅니다. 이것이 세상의 시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영적인 병이 가장 심각한 병입니다. 그 다음이 정신적인 병입니다. 안타깝게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병이 많습니다. 육신이 병드는 거야 세상을 살다 보면 과로해도 오고, 조심하지 못해도 오고, 어쩌다가 균에 감염되어도 오고, 또 체질상 어떤 병을 이기지 못해서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영적인 병은 없어야 합니다. 혹 가끔 병이 있더라도 금방 없어져야 되고 고침 받아야 됩니다. 그 병이 항상 자리를 잡도록 만들어선 안됩니다. 정신적인 병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예수 믿고 교회 나오는 사람 중에 정신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이 꽤 많다는 사실입니다. 멀쩡한 것 같은 데도 이상해요. 왜 이런 일들이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 안에 이렇게 끊어지지 않고 계속 사람을 괴롭히고 남아 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사람의 삶 속에 순종이 결여되어 있을 때가 많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치료를 안 하신다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순종하면 정신적인 병도 하나님이 치료해 주십니다. 치료해 주시되 빨리 치료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을 받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복을 받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이것만큼 큰복이 어디 있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하나님이 그 영광을 가지고 그 사람 뒤에 따라 가면서 가이드 해 준다는 것입니다. 또 11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이것만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절실한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 중에는 아무도 우리 자신을 일평생 완전하게 보호하고 인도할 만한 능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외톨이입니다. 인생 길은 너무너무 험하고 멉니다. 지성의 눈을 가지고도 그 길을 다 우리는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그 길이 험하고 멀기 때문에 독수리와 같은 눈을 가지고도 그 미로를 다 살필 수가 없습니다. 아무도 그 길을 다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외톨이입니다. 갑자기 유턴을 해야 될 곳이 왔습니다. 유턴을 해야 될까요 바로 가야 될까요 잘 몰라요. 누구에게 의논할까요 아내에게 의논하면 아내가 책임지고 말해줍니까 선배에게 가서 의논하니까 선배가 그저 적절한 조언은 해 주지만 자기가 책임지고 어떻게 하라고 말해줍니까 "네가 알아서 해라. 잘 생각해서 해라." 그 말이야 누구야 못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는 항상 외톨입니다. 길을 가다가 보면 길이 두 갈래로 갈립니다. 왼쪽 길, 오른쪽 길, 다 선하게 보입니다. 한쪽이 아주 캄캄하고 악하면 안가면 되겠지만 문제는 양쪽 다 좋은 길처럼 보인다는데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갈까요, 왼쪽으로 갈까요 누구한테 물어볼까요 두 길을 한번에 다 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결국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해야 되는 그 순간, 우리는 철저하게 외톨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정말 필요한 것은 완전하신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실수 없이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 분의 축복이 얼마나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절실한지 모릅니다. 천사가 우리를 보호해 주어도 우리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산에 가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우리와 함께 하옵소서." 하나님이 "모세야, 천사를 보내주마. 가브리엘 보내 줄께. 가브리엘이 너희를 인도할 것이다.
그러므로 산에서 내려가라.아니요, 하나님. 가브리엘도 싫습니다. 미가엘도 싫습니다. 천사가 우리를 인도하는 것은 우리는 안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오셔서 우리와 동행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셔야 만이 우리는 이 광야 같은 세상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와 함께 동행해 주옵소서." 우리는 40 주야를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의 옷자락을 잡고 이렇게 씨름을 했던 모세를 기억합니다. 천사가 지켜주면 되지 않습니까 천사가 인도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야단입니까 우리가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하나님이 보호자가 되지 아니하고 인도자가 안되면 안심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는다는 것만큼 큰복이 없습니다. 이 복을 얻으려면 우리가 순종해야 합니다.
넷째로, 확실한 기도 응답을 받는 축복을 받으려면 순종해야 합니다. 9절을 보면 참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얼마나 실감나는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순종만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 주의 이름을 부를 때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너무 다급해 가지고 소리를 내서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내가 여기 있다."고 말씀해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을 확인 받으면 더 이상 불안해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다섯째로, 우리 영혼이 건강하고 만족하는 복을 얻기 위해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주간 동안 외우고 묵상해야 될 구절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항상 인도하여." 여기서 '인도하여'는 번역이 잘못된 것입니다. '인도하며'로 해야 옳습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며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자꾸 외워 보십시오. 진짜 속에서 샘이 솟는 것 같은 느낌은 받을 것입니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속 사람이 건강해야 합니다. 내적인 자아가 강해야 합니다. 우리의 몸이 건강한 것도 중요지만 중요한 것은 내면의 자아입니다. 물질은 풍요로워서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다 마시면서 즐기면서 사는 세상이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속 사람이 너무 어린애처럼 약해졌습니다. 탈영병들을 보십시오. 왜 탈영합니까 옛날 우리가 군대 생활 할 때와 비교하면 호강도 그런 호강이 없는데 왜 탈영합니까 조그마한 불편이라도 견디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감정이 상하는 것을 참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유리그릇과 같다고 할까요 살짝 대도 깨져요. 앞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자기가 얼마나 불행해질 지 미리 생각을 하고 미리 조심을 할 여유도 없어요. 너무나 약해졌어요. 그러니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고 탈영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부들은 어떻습니까 옛날에 주부생활을 했던 아녀자들에 비해서 얼마나 행복합니까 얼마나 복이 터진 여자들입니까 그것도 좀 지나치면, 얼마나 복이 터진 귀부인들입니까 그렇잖아요 전자제품 80퍼센트가 부인들을 위한 전자제품 아닙니까 세탁기로부터 시작해서 전부 다 여자들을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 이 정도로 풍요롭게, 정말 편리하게 고생 덜 하면서 살 수 있는 여건들이 되어감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가정마다 왜 그렇게 문제들이 많이 일어나는지요 왜 그렇게 부인들은 날마다 불평투성인지요 만족스럽지 못해 가지고 얼굴을 찡그리고 있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팍 튀어 오르는 용수철처럼 말입니다. 왜 이렇게 신경이 날카로워 있느냐 그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속 사람이 너무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강해야 되는데, 그래서 참을 수 있고 여유도 있고 건강해서 감사하는 그런 마음이 있어야 되는데 마음이 약해져 놓으니 아무리 쏟아주어도 끝이 없는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참 고약합니다. 필업(fill up) 가지고 안됩니다. 필업이 뭡니까 미국에서 주유소에 가서 기름을 넣어 달라 할 때, "필업!"이라고 말하면 가득 넣어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마음은 필업 가지고 안돼요. 돈을 가지고 아무리 집어넣어도 만족이 없어요. 절대 만족이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넣으면 넣을수록 문제가 생깁니다. 요구하는 쾌락을 다 충족시켜 주고 충족시켜 줘도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힐업"(heal up)이라야 됩니다. 치료가 되야 돼요.
그렇다면 누가 치료시켜줍니까 하나님이 시켜줍니다. 어떻게 시켜줍니까 우리의 심령을 물 댄 동산 같이 만들어서 우리 마음이 건강해지고 강해지도록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이 스스로 만족하도록 만드는 거예요. 바울이 말 한 것처럼 모든 것을 가져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런 은혜,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손을 들라고 해서 죄송합니다만 한번 들어보세요. 남편의 월급이 50만원 박봉입니다. 50만원을 가지고 와서 생활해도 나도 모르게 항상 기뻐요. 감사해요. "나보다 더 고생하는 사람도 많은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좁은 아파트 난간에도 국화꽃 화분을 탁 얹어 놓고 향기가 온 집안에 물씬 나게 하면서 식구들을 기쁘게 해요. 이상해요. 기분이 좋은데 어떻게 합니까 감사한데 어떻게 합니까 마음이 평안하고 만족스러운데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50만원을 받아도 그렇게 만족스럽고 감사하고 기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하고, 한 달에 월급을 천만 원이나 받으면서도 만족하지 못해서 더 주었으면, 더 즐겼으면 하고 사는 사람, 이 두 사람 중 여러분은 어느 쪽을 따라가고 싶습니까 한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50만원 받고도 정말 감사하고 만족하고 기뻐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새빨간 거짓말이에요. 교회에서 설교 시간에 손 들으라니까 손을 들어주셨지요. 물론 이 가운데는 진짜 그런 은혜를 받은 분들도 꽤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면 '날마다 바가지 긁어도 좋고, 날마다 만족이 없어서 그저 울화통이 터져도 좋으니까 월급은 적어도 천만 원은 가지고 와야지.'하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그저 돈,돈 하는 사람에게 돈을 그냥 쏟아주는 것 아닙니다.
적게 받으나 많이 받으나 감사하고 기뻐하고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물 댄 동산처럼 만들어 주시겠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복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이런 은혜를 받고 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 복을 받자 그 말입니다. 여섯째로,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는 복을 받읍시다. 1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할렐루야! 여러분, 망한다고 하던 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나는 복을 좀 받고 싶지 않습니까 안 된다고 하는 집안들이 이리저리 풀려서 형통하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망쳐놓은 일을 자식이 다시 세우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3년 전에 잘못된 일들이 3년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모든 사람 앞에 선망의 대상이 되도록 전화위복이 되는 은혜를 받고 싶지 않습니까 이것이 무너진 데를 다시 수축하는 축복입니다. 우리가 한때 무너뜨렸지만 하나님이 다시 세워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비가 잘못해서 집안이 흔들리지만, 자식 대에 하나님이 그 집안을 튼튼하게 세워주시는 그런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런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샘 슈메이커라고 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어요. "하나님께 10퍼센트 순종하면 10퍼센트의 행복을, 50퍼센트 순종하면 50퍼센트의 행복을, 100퍼센트 순종하면 100퍼센트의 행복을 누릴 수가 있다." 우리에게 불리하거나 손해가 될성싶으면 순종하지 않고 유리하면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순종이 아닙니다. 이런 변명,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자꾸 순종하기를 지체하면 그것도 순종이 아닙니다. 이런 멋진 말이 있습니다. "지연된 순종은 불순종의 동생이다." 우리가 이런 말을 많이 듣지 않습니까 순종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다시 말합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습니다. 그러나 복은 순종으로 받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 순종하자 그 말입니다. 할렐루야! 순종하자고요. 그래서 우리 모두 복 받는 사람이 됩시다. 이왕, 대각성 전도 집회다, 우리가 전도다 하는 말을 많이 하지만 뭔가 매력이 있어야 전도를 하지 않겠습니까 매력이 있으려면 영과 육을 아름답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축복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남 앞에 가서도 전도하면 좀 먹혀들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승천하시면서 축복하시던 그 주님의 축복을 우리 모두가 받아 누리기 위해서 전심을 다해서 순종합시다. 그러면 우리 모두가 멋진 인생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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