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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의미 (사6: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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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 볼테에르는 '행복은 꿈에 지나지 않고 고통은 현실이다. 고 하였습니다. 저 유명한 인도의 무저항주의자 '간디'는 말했습니다. '고난이란 인류의 표지(標識)이다. 이는 영원의 법칙이다. 어머니는 그녀의 아이가 잘 살수 있게끔 하기 위하여 고난을 겪는다. 밀이 자란다는 것은 씨앗이 죽는 것을 조건으로 한다. 고난의 불길을 거쳐서 정회됨이 없이 일어난 나라는 하나도 없다 우리는 존재에 대 해서 불가결한 근원인 고난의 법칙을 없앤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고 하였습니다. 저 유명한 G. 오웰은 [고난 앞에는 영웅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함께 한국 6.25 동란 46주년을 맞으면서 '고난의 의미'라 고 하는 메시지를 나누기 원합니다.
I. 고난의 역사를 봅니다.
1. 인류 역사는 고난의 과정입니다. 욥은 말하기를 [세상에 있는 인생에게 전쟁이 있지 아니하냐 그 날이 품꾼의 날과 같지 아니하냐 종은 저물기를 심히 기다리 고, 품꾼은 그 삯을 바라나니 이와 같이 내가 여러 달째 곤고를 받으니 수고로운 밤이 내게 작정되었구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인생은 전쟁이다. 인생은 품꾼이다. 인생은 종이다. 이 모 든 인생 여로를 수고로운 밤이라고 인생이 만나 고난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란 눈물의 역사요, 피로 얼룩진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창조 본연의 법칙은 아니었습니다. 태초에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 하신 에덴의 세계와 무죄 세계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고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지음 받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지음 받은 창조 세계의 절정인 아담과 하와는 영생하는 피조물로 세계를 다스리는 왕이요, 신지(神旨)를 개발하는 선 지자요, 그 결과를 하나님께 바치(드림)는 거룩한 제사장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그리고 만물에게 고통이 시작된 것은 아담의 범죄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인류의 범죄와 함께 하나님의 낯을 피하는 두려움의 고통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의 공의(公義)는 남자 아담에게 땀 흘리는 수고의 고통이 주어졌고, 여자 하와에게는 해산의 고통이 주어졌습니다. 땅은 인류가 범한 죄 때문에 저주를 받게되고, 가시덤불과 엉겅 퀴를 내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인생은 필경 죽음의 고통을 만나 게 되고, 흙으로 돌아가는 고통을 알게 되었습니다(창3:14-19). 그 이후 에덴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그의 자손들은 해골을 축석 (築石)으로 성벽을 삼았습니다. 피로 물젖어 버린 왕관과 보좌들 을 주고 받았습니다. 탄식없이는 예술을 구경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비가 자식의 무덤을 파지 않은 사람이나, 자식이 부모의 무덤 을 파지 않은 인생이 없었습니다. 서로 찌르고, 서로 죽이는 피의 언덕 위에서 상아궁을 짓고, 서로가 흘린 피의 호숫가에서 노래 를 부르고, 서로가 파고 묻은 묻음 앞에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인생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 조차 모르고, 또 누 구를 위하여 자신이 생존하며, 역사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그 의 미와 목적조차 모르고, 달려왔고, 달려가고 있습니다.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미래를 향하여 절망의 용맹을 발하면서, 소리들을 치 고, 뛰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길고 긴 고난의 여정이 인류의 역사 입니다.
2. 선민 이스라엘도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연원히 멀리 아벨과 셋과 노아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역사상에 등장하는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부름을 받고, 저 갈대아우르인 고향과 아비와, 친척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아브람때 부터 입니다(창12:1-7). 아브람과 그 자손들은 하나님의 기뻐하신 구속 역사의 무대에 영예롭게 선택받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람, 이삭, 야곱 으로 이어지고, 요셉에 이르러 집성이 되던 저 히브리 선민의 역 사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선민 고난의 실체는 저들이 애굽에 이주하여 바로의 땅에 살 때부터 노골화되었습니다. 자그만치 그 고난은 사백수십년의 길 고 긴 어둠의 터널이었습니다. 저들이 애굽에서 겪는 죽음에 이 르는 고통 소리가 하늘에 사무쳤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당하는 아브라함 자손들의 고통의 현장을 보셨다고 하 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였습니다(출 3:4-8). 그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고 모세를 세우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의 새 비전 을 제시하였습니다. 그 후 전 애굽을 진동시키는 선민들의 출애 굽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고 허락하신 출애굽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가나안 행군 40년은 정말 죽음에 이르는 고난의 행군이었 습니다. 저들은 그 광야 교회의 행군에 아예 100% 하나님 자신 의 초자연적 기적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불기둥, 구름 기둥의 선 진, 그 엄청난 양의 만나와 메추라기, 공급되는 물, 원수들의 침 략에서의 보호실로 은총의 노다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은 하나님께 매를 맞고 아파서 울고 또 울면서 걸 었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로 성취된 가나안 행군이 끝난 다음에, 저들은 이백수십년간 사사 시대를 맞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쉽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하 고, 가나안 이방 신의 숭배와 이방인의 생활 습관에 동화(同化)하 고 말았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방의 나라들을 들어 저들을 징 치하고 저들이 그 매를 맞고 또 하나님께 돌아와 부르짖을 때, 사사들을 세워 저들을 구원하고 눈물을 닦아주고, 매 맞은 상처 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진 신정 국가 시대를 지나자마 자, 대부분의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과 백성들은 사악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때도 하나님은 앗수르와 바벨론을 도구로 삼아 저들을 징치 하였습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하 여 선민 유다가 죄 때문에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국의 비운을 맞을 사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 그루터기'를 남겨 주 어, 하나님이 계획하신 거룩한 구속사가 진행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계 역사의 무대에 구원의 백성으로 성별된 선민도 고난의 역 사로 점철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3. 이 땅을 살아가는 한 민족과 교회도 고난의 역사를 엮어 가 고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한민족 오천여 년의 전 역사는 한 번도 태평성 대의 시대를 기록할 만한 때가 없었습니다. 실로 놀랄 만한 일입니다. 태고 시대는 말할 것도 없고, 삼국 시대 이후로 이 백성이 만난 전쟁만도 그 수가 백번 이상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내란을 제하고, 이 민족이 침략을 받은 것만도 60여회가 된다고 합니다. 그 중에 전 국토와 민족이 진동했던 망국의 지경에 이른 것만 30여회가 넘는 다고 합니다. 외국 민족의 역사에는 그래도 200년, 200년의 태평성대 시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가장 긴 태평 시대라고 할 수 있다면 신라 통일 후 100년 어간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 모릅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사는 이 시대에 우리는 일본의 침략 때문에 36년간이라고 하는 망국의 한을 씹었습니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을 기해 하나님은 이 땅에 해방을 주셨 습니다. 그러나 다시 우리 만족은 남북으로 양단 되는 비극을 씹 어야 했습니다. 해방된지 5년을 맞은 이 땅에는 6.25 사변(1950. 6.25)이 일어났 습니다. 유물론적 공산주의로 무장한 북한의 김일성 집단이 자유 민주주의를 국시(國是)로 삼은 남한을 침략하였습니다. 그 결과 3만명 이상의 이 땅의 청춘들이 죽음을 만났습니다. 1 만명 이상의 병사들은 실종이 되었습니다. 12만이 넘는 상이군인 이 생겨났습니다. 민간인 23만이 전쟁 때문에 희생 제물이 되었 습니다. 22만이 넘는 민간인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29만 명이 지금도 행방을 찾을 길 없는 소위 실종자의 명부에 올랐습니다. 59만 4천여 동의 가옥이 소실 내지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장로교 계통에만도 180여명의 교역자가 순교 내지 실종되었습니다. 300 여동의 예배당이 불에 타 버렸고, 800여동의 예배당이 파괴되었 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한 문화 유산의 손실, 이산가족의 비극, 경제의 도탄, 사회와 정치적 혼란, 교육의 불안 그리고 이 땅에 수많은 고아, 전쟁미망인 등의 눈물이 강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정말 형 용할 길이 없는, 그야말로 비극과 절망을 우리는 씹었습니다. 우리는 그 아프고 또 쓰라린 고난의 정글 지대를 지난 온 자들입니다.
Ⅱ. 고난의 의미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마태복음 10장 29절로 31절의 말씀을 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 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 신바 되었나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제자들의 전도(설교) 여로를 하나님께서 절대적으로 주장하고 계신다는 내용을 나타내면서,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의 손길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참새 한 마리까지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우주와, 그 가운데 만물과 더우기 인류의 역사와, 그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역 사를 외면하실 리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고난의 역사로 점철되는 역사의 섭리에서 우리는 그 큰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1. 일반 역사(세속사)의 고난의 의미는 하나님을 알려 주기 위 함입니다.
(1) 먼저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알려 줍니다.
(2)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살아 계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심을 알려 줍니다.
(3) 그 하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임의적으로 자주장하시는 절대 주권의 하나님이심을 알려 줍니다.
(4) 그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임을 알려 줍니다.
(5) 그 하나님은 결 코 인생이 피조물이고, 유한하고,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결코 인생이 역사의 주인이 될 수 없고, 왕국의 영원한 황제 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류에게 고난(질병, 죽음, 쟁변, 재앙, 천재지변.)을 더하시므로 깨닫게 해 주십니다. 결코 인생이 이 세상에서 소위 말하는 유토피아, 곧 천국을 건 설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온갖 고난들을 더하사, 인생의 어리석음과 무지함과 몽매함을 깨닫게 하고, 저들이 꾸고 있는 헛된 꿈들이 풀이요, 꽃 임을 알려 주기 위함입니다. 범죄한 이 세상은 유한의 나라, 잠정 적인 장소임을 알려 줌에 고난의 의미가 있습니다.
2. 선민(구원인)들에게 임하는 고난의 의미는 궁극적 구속 역 사를 성취하는 성화의 도구임을 알려 줍니다. 고난을 통하여,
(1)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연약과 저들의 죄 성을 알려 줍니다.
(2) 그 고난을 통하여 자기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그 고난을 통하여 자기 죄를 씻고, 정결케 되게 합니다.
(3) 하나님께 부르짖게 합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경에 가득찬 진리입니다. 선민일지라도 이 세상에 머물 동안 자주자주 연약하 고 넘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붙잡지 않고 세상을 붙잡고 의 지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역사요, 기독교 역사의 한 면입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이방 나라를 몽둥이로 쓰던지, 아니면 질 병이나, 재난이나, 기타 여러 가지 도구로 성도를 징계(매를 때 림) 합니다. 그 매를 맞을 때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더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 돌아 와서 부르짖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오히려 성도를 성화시키는 유익을 가져다 줍니다.
(4)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사용하시는 고난이라는 도구는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생활에 일대 진보를 가 져오게 합니다. 신앙생활에 일대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고난의 쓴잔을 마셔 본 자는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새로운 헌신과 봉 사와 충성을 서원하게 됩니다.
(5) 성도를 성도되게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를 새로 깨닫습니다. 고난 중에 흘리는 눈 물의 렌즈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됩니다. 고난 을 통하여 인생의 이기심을 고치고, 비겁한 성질을 고치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와 인내와, 희생을 배우게 됩니다.
(6) 천국을 소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에게 사용하시는 무 수한 고난은 결국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 을 찾게 하는 천국 소망의 촉진제가 되게 합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에게 임한 고난은 궁극적 구원 성취를 위한 수단입니다. 멸망의 도구는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만난, 동족상잔의 6.25 비극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닙니다. 8. 15 해방을 우리 힘으로 쟁취하지 못하고 남의 힘으로 얻어 진 것에 대한 역사적 대가 중에 하나입니다. 8.15 해방을 받은 한국 교회가, 신앙 자유, 예배 자유, 선교 자유를 얻고도, 일제 신사 참배의 교회적 공죄를 회개하지 않고, 여 전히 교권 쟁탈에 혈안이 되었던 한국 교회의 회개를 촉구한 경 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6 25 사변을 통하여 이북에 있는 신자들이 3 8선 을 넘어 남으로 피난 오게 하므로 신앙 자유를 누리게 한 하나님 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 뿐아니라, 이북에서 피난 온 기독교 신자들이 남으로 남으 로 피난하면서 남한 여러 곳에 교회당을(가건물) 세우고, 하나님 께 기도하고, 그것이 나중에 남한 여러 지역에 전도의 기지가 되 어, 예수 믿는 신자들이 많이 생기게 된 결과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한국 교회의 여러 지도자들과 신자들은 각성하고 회개와 구국의 기도 운동이 맹렬하게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6 25 사변을 통하여 일제 때 받지 못한 이 땅에 순교자를 더 많이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1950년 9월 15일 독실한 크리스찬이었던 맥아더 장국의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케 하므로 만 3개월만에 남한을 거 의 다 짓밟았던 공산군은 물러가게 되고, 1953년 7월 27일 판문 점에서 휴전이 성립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 휴전 이후 43년간, 우리 남한은 하늘이 반시동안 고요한 어 간을 맞고 있습니다. 이 어간에 우리는 정치, 교육,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엄청 난 혼란과 비극을 씹는 중에도, 남한의 한국 교회가 기독교적 한 국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바로 여기에 6.25 46주년을 맞는 교회사적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잠정적이나마 '평화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 인 자신들과 오늘 교회의 존재 의미와 사명을 자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조국의 복음화와 세계의 복음화 운동입니다. 이것 이 잠정적인 평화 시대를 살게 하신 그 값을 다하는 일이 됩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이 일입니다(마 6:33).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할(마24:14) 복음 선교 사명을 다하는 교회가 되고,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남은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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