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어디에 (사49:1-4,계3:19-20)
본문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 리라-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한국 기독교 100주년 행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기독교인구가 전체 인구 의 25%가 넘는다는 통계들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외국에서도 우리나라 의 교회를 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도시에는 인구의 약 30%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이렇게 양적인 성장을 하면서 각종 문제점과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은 결국 기독교가 양적인 성장에 비해 질적인 내실을 기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 나라가 모든 국민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우리 社會의 不義한 罪惡 들과 政治,經濟 또 남북 통일의 문제까지도 모두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죄송한 말이지만 이와같은 방법으로는 전국민이 다 교인이 된다 하더라 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대단한 망상이다.-우리를 알지못한 착각에 불과하다.
국민 모두가 복음을 다 받아들인다면 사회가 저절로 변혁되리라는 생각은 대 단한 망상이다.-
왜냐하면 구조악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변한다고 해도 악한 사회 구조가 변하지 못하면 마찬가지다. 지금 식으로는 이 나라 사람이 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도 나라안에는 별 로 진전이 없을 것이다.-서울 강남 지역 인구의 45%가 기독교도라는 1987년 통계 자료가 있다. 강남에는 한국의 중산층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 중산층들 양적 성장에 큰 기여를 해왔다고 본다.
그런데 중산층 교인들이 대거 몰려 있는 강남지역이 한국에서 향락 퇴폐 문화 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어찌 된일인가 사람들이 이곳은 장사가 잘된다고 몰려와 유흥 업소를 열어서 이 지경이 된 걸까요-교인들이 많이 사는 강남이 퇴폐문화가 성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한국의 소돔과 고모라고 불리게 된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무엇일 까요 바다물은 0,4%의 염분에 전체물이 짜다.-일본에는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 의 2% 미만인데 백 년이 채 안 되는 일본에 영향력 있는 기독교 지도자와 기독교 사상가를 많이 배출되였다.-2%가 안 되는 인구지만 일본의 '그리스도'인들 은 우리 보다 사회에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 거듭 나타나고 있는 사건과 타락 현상들과 증후들은 교회들의 양적인 성장을 비웃고 폭로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우리 기독교가 오늘과 같은 잘못된 사회를 선도한것이 무엇인가-문제점을 갖게 된 요인이 무엇인가-그것은 二元論的인 信仰태도요-잘못된 祝福觀 때문이다.-우선 이두가지를 반성하고 고쳐가야 한다.-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여서 내 위치를 바로 판단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사회 구조악에 편승을 했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선도했는지 분명한 선을 그을수 없지만 분명히 그 결과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책임이 크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점을 해결해가야 할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지성인중에서 고민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하루속히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의 불균형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 로 삼고 고쳐가야 우리에게 希望이 있다. 그리고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여야 한다.-'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열심으로 회개하여야 한다.-주님이 우리를 버리시기 전 열심을 내여 회개하여 야 한다.-기독교의 기대는 오직 한길 여기에 있다.
첫째로 二元的인 신앙 태도이다. 이분법적인 신앙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원 문제에서 신앙이냐 행위냐로 나누어 생각하고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생각 한다.-'하나님' 나라도 이 세상은 세속의 나라요 죽어서 가는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일이나 직업에도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로 나누어 생각한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론도 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이 난무하다. 이것이야 말로 한국 기독교의 질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암적인 요인입니다. 믿음과 행위의 상관 관계 부분에서 상당히 문제가 많다. 교회에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行爲를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어떻게 된 셈인지 행위가 따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열심히 배우다가도, 정작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할 관료의 위치에 있게 되면 배운 것을 다 포기해 버렸다.-배운 대로 하다가는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지 못하기 때 문이다. 이분법적인 자세는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한다.-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사로 나가고 신학 공부를 하는 것만을 하나님 의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에서 물리나 화학, 사회과학을 공부하고-가정주부가 가정을 돌보는 것, 회사에 나가 직장 생활을 하는 것,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과는 관 계가 없다고 생각한다.-이분법적인 인간관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눠서 영혼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肉體는 이 세상의 일을 한다고 본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 것"이란 세속적이고 마귀가 좋아하는 것 을 말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바자회를 하는데 여성도님들 몇 분이 와서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이 모자랐는지 어떤 분이 전화로 누군가를 불렀다. "아, 이 집사, 집에서 뭐 하는 거요 여기 나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교회에서 바자회에 참여하는 것이 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 중,고등부를 지도하는 교사들이 굉장히 애를 먹는 것 하나가 학생들이 공부 열심히 하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지 못하고 있는 일이다. 열심히 공부하란 소리를 나오지를 않는다-열심히 공부하는 게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일이란 생각을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까 "내가 하는 이 공부는 하나님의 일과는 관계가 없다"-잘못된 선택이 결국 우리 를 이원적 인격자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개혁가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전부 하나님의 일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소명과 직업이 일치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나를 보내셨다는 생각이 개신교 전통입니다. "부름"(소명)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calling"은 직업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지금 교회가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내가 이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는 소명감과 직업(노동)이 일치해야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확신 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기업하는 사람들이 자기 회사 제품의 질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제품의 질을 높이면서도 수요자에게는 값싸게 공급할수 있고 우리 회사에 일하고 있는 종업원들의 복지를 향상시킬수 있을까 내 기업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할때 이루워진다. 기업 경영 자체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업에서 이윤이 생기면 그 이윤이 어떤 이윤인가는 따지지도 않고 그것을 가지고 전도비에 쓰고 건축 헌금으로 내면 하나님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때문에 문제다. 기독교들이 국회의원되고 공무원들이 공직 생활 자체를 하나님의 일과는 관계없는 세속적인 일로 여기고 교회 장로가 된다든지 집사가 된다든지 주일 날 봉사하는 것만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사회에 상당수의 공직자들이 있는데 교회인구실을 못하는 이유가 이분법 적이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직장에서 교인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였다. 우리의 선자리에서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설자리가 없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도 주님과는 전혀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였다.-주님이 내 곁에 게심을 모르고 있다.-성도곁에 설자리가 없게 되엿다.
둘째로 잘못된 축복관 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잘못된 축복관이 기독교계를 휩쓸있다-"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2절) 참으로 좋은 구절이다.-'예수' 믿다가 건강 잃으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예수'믿고 돈 못 벌면 믿음이 약한 것이라 단정지어 버리는 일들이 벌어졌다. 물론 돈 잘 벌고 건강한 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면 건강도 재물도 얻을 수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거기에만 제한시켜 돈 없고 병들면 마치 복을 못 받 은 것처럼 오해는 데 교회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식으로 축복 구하는 인간들의 욕망속에 꼭 '하나님'께 아니라 하여도 강이 나 바다-모든 우상에도 복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축복을 여기에 제한한다면 使徒 '바울' 같은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 이다.-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득권과 명예와 재물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를 위해 포기하고 자비량 선교사(tent-maker)로 나섰기 때문이다.-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건강마저도 주시지 않았다.-'바울'은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했다(고후 12:7). 기독교의 복이라는 것이 여기에 있다면 '바울'사도 같이 저주받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며 복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 복 있는 자라고 하신 사람들은 어떤 자들입 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義)에 주리고 목 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밖 에 없다. 이렇게 도치된 축복관 때문에 바알 문화와 아세라 문화를 극복할 힘을 잃어 버렸다.-아세라는 미(美)와 성(性)과 생산의 神이다.-향락과 퇴폐 문화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물질이면 모든 것을 해결 할수 있다고 믿는 교인들 마음속에 우리 주님이 게실자리가 없어 졌다. 우리의 마음에 바알 문화와 아세라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많이 소유하는 부 자가 아니라 많이 줄 수 있는 자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 받는 것보다 주는것이 복이 있고-봉사와 희생의 정신이 우리가 주님을 내 곁에 모시는 게기가 될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 리라-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한국 기독교 100주년 행사'에 대한 얘기가 나오면서 기독교인구가 전체 인구 의 25%가 넘는다는 통계들이 자주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고-외국에서도 우리나라 의 교회를 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도시에는 인구의 약 30% 정도가 그리스도인이라는 통계가 나왔다. 이렇게 양적인 성장을 하면서 각종 문제점과 한계를 안고 있다는 것은 결국 기독교가 양적인 성장에 비해 질적인 내실을 기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 나라가 모든 국민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우리 社會의 不義한 罪惡 들과 政治,經濟 또 남북 통일의 문제까지도 모두 해결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죄송한 말이지만 이와같은 방법으로는 전국민이 다 교인이 된다 하더라 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다.-대단한 망상이다.-우리를 알지못한 착각에 불과하다.
국민 모두가 복음을 다 받아들인다면 사회가 저절로 변혁되리라는 생각은 대 단한 망상이다.-
왜냐하면 구조악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변한다고 해도 악한 사회 구조가 변하지 못하면 마찬가지다. 지금 식으로는 이 나라 사람이 다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해도 나라안에는 별 로 진전이 없을 것이다.-서울 강남 지역 인구의 45%가 기독교도라는 1987년 통계 자료가 있다. 강남에는 한국의 중산층이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이 중산층들 양적 성장에 큰 기여를 해왔다고 본다.
그런데 중산층 교인들이 대거 몰려 있는 강남지역이 한국에서 향락 퇴폐 문화 가 가장 발달한 지역이다.-어찌 된일인가 사람들이 이곳은 장사가 잘된다고 몰려와 유흥 업소를 열어서 이 지경이 된 걸까요-교인들이 많이 사는 강남이 퇴폐문화가 성행하는 이유가 무엇일까-한국의 소돔과 고모라고 불리게 된 그곳에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 무엇일 까요 바다물은 0,4%의 염분에 전체물이 짜다.-일본에는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 의 2% 미만인데 백 년이 채 안 되는 일본에 영향력 있는 기독교 지도자와 기독교 사상가를 많이 배출되였다.-2%가 안 되는 인구지만 일본의 '그리스도'인들 은 우리 보다 사회에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 거듭 나타나고 있는 사건과 타락 현상들과 증후들은 교회들의 양적인 성장을 비웃고 폭로하고 있는 느낌을 준다… 우리 기독교가 오늘과 같은 잘못된 사회를 선도한것이 무엇인가-문제점을 갖게 된 요인이 무엇인가-그것은 二元論的인 信仰태도요-잘못된 祝福觀 때문이다.-우선 이두가지를 반성하고 고쳐가야 한다.-지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여서 내 위치를 바로 판단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가 사회 구조악에 편승을 했는지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선도했는지 분명한 선을 그을수 없지만 분명히 그 결과 대해서 기독교인들은 책임이 크다. 어떻게 하면 이런 문제점을 해결해가야 할것이다. 기독교 지도자들과 지성인중에서 고민하는 분들이 많이 생겨나야 한다. 하루속히 양적 성장과 질적 성장의 불균형을 극복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 로 삼고 고쳐가야 우리에게 希望이 있다. 그리고 우리를 지금까지 인도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여야 한다.-'하나님'이 사랑하기 때문에 열심으로 회개하여야 한다.-주님이 우리를 버리시기 전 열심을 내여 회개하여 야 한다.-기독교의 기대는 오직 한길 여기에 있다.
첫째로 二元的인 신앙 태도이다. 이분법적인 신앙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구원 문제에서 신앙이냐 행위냐로 나누어 생각하고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 생각 한다.-'하나님' 나라도 이 세상은 세속의 나라요 죽어서 가는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한다,.-일이나 직업에도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로 나누어 생각한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정교분리론도 있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이분법적인 사고 방식이 난무하다. 이것이야 말로 한국 기독교의 질적인 성장을 저해하는 암적인 요인입니다. 믿음과 행위의 상관 관계 부분에서 상당히 문제가 많다. 교회에서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行爲를 강조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어떻게 된 셈인지 행위가 따르지 못한다. 사람들은 과거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열심히 배우다가도, 정작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할 관료의 위치에 있게 되면 배운 것을 다 포기해 버렸다.-배운 대로 하다가는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취하지 못하기 때 문이다. 이분법적인 자세는 사람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한다.-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여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선교사로 나가고 신학 공부를 하는 것만을 하나님 의 일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대학에서 물리나 화학, 사회과학을 공부하고-가정주부가 가정을 돌보는 것, 회사에 나가 직장 생활을 하는 것, 기업 활동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과는 관 계가 없다고 생각한다.-이분법적인 인간관에서는 인간을 영혼과 육체로 나눠서 영혼은 '하나님'의 일을 하고 肉體는 이 세상의 일을 한다고 본다,. 이분법적으로 세상을 볼 때 "세상 것"이란 세속적이고 마귀가 좋아하는 것 을 말합니다. 어느 교회에서 바자회를 하는데 여성도님들 몇 분이 와서 아주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손이 모자랐는지 어떤 분이 전화로 누군가를 불렀다. "아, 이 집사, 집에서 뭐 하는 거요 여기 나와서 하나님의 일을 해야지." 우리는 흔히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교회에서 바자회에 참여하는 것이 만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또 중,고등부를 지도하는 교사들이 굉장히 애를 먹는 것 하나가 학생들이 공부 열심히 하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을 심어 주지 못하고 있는 일이다. 열심히 공부하란 소리를 나오지를 않는다-열심히 공부하는 게 하나님이 기뻐하 시는 일이란 생각을 어떻게 심어줄 수 있을까 "내가 하는 이 공부는 하나님의 일과는 관계가 없다"-잘못된 선택이 결국 우리 를 이원적 인격자로 만들어 버렸다. 종교개혁가들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다.-우리가 하고 있는 일 자체를 전부 하나님의 일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소명과 직업이 일치했다. '하나님'께서 바로 이 일을 하게 하시려고 이 땅에 나를 보내셨다는 생각이 개신교 전통입니다. "부름"(소명)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calling"은 직업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지금 교회가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 내가 이 일을 하도록 부르셨다는 소명감과 직업(노동)이 일치해야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확신 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기업하는 사람들이 자기 회사 제품의 질을 어떻게 높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제품의 질을 높이면서도 수요자에게는 값싸게 공급할수 있고 우리 회사에 일하고 있는 종업원들의 복지를 향상시킬수 있을까 내 기업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라고 생각할때 이루워진다. 기업 경영 자체를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기업에서 이윤이 생기면 그 이윤이 어떤 이윤인가는 따지지도 않고 그것을 가지고 전도비에 쓰고 건축 헌금으로 내면 하나님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때문에 문제다. 기독교들이 국회의원되고 공무원들이 공직 생활 자체를 하나님의 일과는 관계없는 세속적인 일로 여기고 교회 장로가 된다든지 집사가 된다든지 주일 날 봉사하는 것만을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사회에 상당수의 공직자들이 있는데 교회인구실을 못하는 이유가 이분법 적이 논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직장에서 교인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였다. 우리의 선자리에서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다면 주님께서는 설자리가 없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회식하는 자리에서도 주님과는 전혀관계가 없는 사람이 되였다.-주님이 내 곁에 게심을 모르고 있다.-성도곁에 설자리가 없게 되엿다.
둘째로 잘못된 축복관 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잘못된 축복관이 기독교계를 휩쓸있다-"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삼서 2절) 참으로 좋은 구절이다.-'예수' 믿다가 건강 잃으면 저주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예수'믿고 돈 못 벌면 믿음이 약한 것이라 단정지어 버리는 일들이 벌어졌다. 물론 돈 잘 벌고 건강한 게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시지 않으면 건강도 재물도 얻을 수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축복을 거기에만 제한시켜 돈 없고 병들면 마치 복을 못 받 은 것처럼 오해는 데 교회의 심각성이 있다. 이런식으로 축복 구하는 인간들의 욕망속에 꼭 '하나님'께 아니라 하여도 강이 나 바다-모든 우상에도 복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에 축복을 여기에 제한한다면 使徒 '바울' 같은 사람은 저주받은 사람 이다.-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기득권과 명예와 재물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 를 위해 포기하고 자비량 선교사(tent-maker)로 나섰기 때문이다.-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건강마저도 주시지 않았다.-'바울'은 자기에게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했다(고후 12:7). 기독교의 복이라는 것이 여기에 있다면 '바울'사도 같이 저주받은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육체에 가시가 있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며 복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 복 있는 자라고 하신 사람들은 어떤 자들입 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義)에 주리고 목 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최고의 복은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것이 최고의 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밖 에 없다. 이렇게 도치된 축복관 때문에 바알 문화와 아세라 문화를 극복할 힘을 잃어 버렸다.-아세라는 미(美)와 성(性)과 생산의 神이다.-향락과 퇴폐 문화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물질이면 모든 것을 해결 할수 있다고 믿는 교인들 마음속에 우리 주님이 게실자리가 없어 졌다. 우리의 마음에 바알 문화와 아세라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많이 소유하는 부 자가 아니라 많이 줄 수 있는 자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 받는 것보다 주는것이 복이 있고-봉사와 희생의 정신이 우리가 주님을 내 곁에 모시는 게기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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