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고난을 상기하라. (사53:1-3)
본문
I. 아라비안 나이트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것은 천 일(日) 하고도 하룻 밤 동안이나 끝없이 이어진 이야기란 뜻에서 "천일야화"라고도 합니다. 이 책에는 아라비아, 고대 이집트, 그리스, 인디아 등에서 오래전 부터 전 해 내려오는 신화와 전설 그리고 아라비아인들의 가르침등이 실려 있읍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은 "신바드의 모험", "알라딘과 요술 램프", "알 리바바와 40인의 도둑"입니다. 이 중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옛날 페르시아의 어느 마을에 카시므라는 형과 알리바바라는 동생이 살 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아버지가 떠나자 넉넉한 유산을 물려 받았읍니다.
그런데 형은 돈 많은 장사군의 딸과 결혼을 했고, 장인이 죽는 바람 에 장인의 엄청난 재산까지 카시므에게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형 카시 므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생 알리바바는 재산을 모두 날리고, 겨우 빼빼마른 나귀 3 마 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리바바는 이 3마리의 나귀를 끌고 매일 산 으로 가서 나무를 해다가 연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40명의 도적 떼를 만났습니다. 그들을 엿보니 큰 바위 앞에 가서 "열려라 참깨"하니까 바위문이 저절로 열 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도둑이 들어가자, 바위문이 저절로 닫혔습니다. 알리바바는 그곳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40명의 도둑이 다 나왔습니다. 그리고 "닫혀라 참깨"하자 문이 저저로 닫혔습니다. 알리바바는 그 바위 앞에 가서 "열려라 참깨"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 자 돌 문 이 열렸습니다. 알리바바는 그 속에 들어가서 나귀 세 마리에 실을 만큼 보물을 잔뜩 싣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 금은 보화를 일일이 셀수가 없어서 그리서 형네 집에 가서 저 울을 빌리다가 그 보물을 다 달아서 묻었습니다.
그런데 형수가 저울을 빌려 줄때, 무엇을 다나 보려고 저울 밑에다 찐득 거리는 기름을 발아 놓았 습니다. 그러나 알리바바는 그것도 모르고 보물을 다 달고는 저울을 형네 집에 갔다가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저울에는 금화 한 닢이 붙어 있었읍니다. 이 사실을 안 형 카시므가 알리바바를 찾아와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캐 물었습니다. 알리바바는 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카시므는 10마리의 나귀를 끌고 그 굴로 갔습니다. 그리고 "열려 라 참깨"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돌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카시므는 굴에 들어가서 정신 없이 보석들을 자루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석들에 정신을 팔다보니 그만 돌문을 여는 주문을 잃어 버렸읍니다. 그는 아무리 "열려라 참외", 팥, 쌀, 콩, 다 해봤지만 "참깨"는 생각이 안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온 40인의 도적에 잡혀서 맞아 죽었읍니다. 욕심이 가장 귀한 것을 잊어 버리게 했고, 그것이 죽음을 가져 왔 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보면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어 버리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잊 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 버리지 않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잊 어버려야 할 것을 잊어 버리지 못하는 것도 병이며,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 버리는 것도 병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꼭 잊어버려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 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을 슬프게 만든 것들은 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여러분을 기쁘게 만든 것들은 꼭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진실치 않은 자들로 판명난 친구들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너에 의하여 상처를 입은 자들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지나간 고난들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매일 매일 오는 축복들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이렇게 살아가다가 보면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고, 또한 잊어 버리지 말 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 른 것은 잊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만은 꼭 기억하라고 신신 당부를 했읍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같이 먹으실때,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 시면거 예수님을 기억할 것을 당부 하셨습니다. 이 떡을 떼고, 포도주 잔을 나누는 것은 성만찬입니다. 그래고 초대 교회는 이 성만찬을 예배 때 마다 항상 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버리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라 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또 잊어버리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이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마치 카시므가 도둑의 굴의 바위문을 여는 주문을 잊 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우리를 위 하여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잊어 버린다고 하면 우리가 어찌 예수님 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우리 예수님의 고난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속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어떤 대우를 받을 것인가 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고난을 마치 목격자와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예수님의 고난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예수님이 박해와 위험속에서 탄생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묘사했 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곡식도 비가 와서 촉촉한 땅에서 자라는 것은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가뭄에 마른 땅에서 자라는 곡식들은 억세 보이고, 아름답지 않읍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마치 가뭄에 마른 땅에서 자라는 곡식들과 같 이 그렇게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이 태어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사랑과 자비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사명,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명입니 까 예수님은 이런 아름다운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얼 마나 아름다움 모습입니까 그래서 천사들이 아기 예수님이 잉태됨을 그의 모친 마리아에게 알려 주 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천사장 가브리엘이 이 기쁨의 아름다 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천사가 그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천 사가 지어준 가장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또한 천사들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 찬양을 불렀습니다. 하늘의 천사들 의 찬양대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합창을 연주했습니다. 얼 마나 아름다운 장관입니까 또한 하늘에는 이상한 유성이 나타나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었 습니다. 저 하늘에 우주쑈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 중에 가장 유명한 아이로 태어 났습니다. 마리아의 거룩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거 룩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이렇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축 하를 했는데, 이 땅에서는 전혀 반대의 현상이 일어 났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날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의 모든 사람 은 다 호적을 하라고 해서, 사람들이 호적을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느라고, 사람들의 대 이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숙박시설이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이 여물을 먹는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그 추운 겨울에 말 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무슨 고운 모양이 있으며, 풍채가 있 으며,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이렇게 낮고 천한 몸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이 모습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가서 헤롯 왕에게 태어난 유 대인의 왕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자기 외에 다른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안해서, 그 땅에 있는 두살 아래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라고 했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어난 그 날 밤에 그날 몸을 푼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기어 그 추운 밤에 애굽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러한 박해속 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탄생시에 당한 이 박해와 위험 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이런 고난 중에 오신 예수님의 고난을 잊어 버린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2.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한 굴욕의 삶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시며,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셨습니다. 모든 권세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하늘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시간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습니다. 우리 인간과 똑 같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세자가 평민의 모습을 한 것 보다 훨씬 더 놀라운 사건입니다. 만왕의 왕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우리 인간들이 입고 있는 모든 연약함을 다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과 같이 질병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연약함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고통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활속에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연야함과 질병 과 고통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부모의 자녀로 태어 났습니다. 그는 부모로 부터 받은 유산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시는 동안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 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죽어서 장사될 무덤조차 없었읍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나추셨습니다. "그는 원래 하나님과 본체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나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6-8)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시던 그날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요 13:4-5)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제자들 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하셨 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바른 기독교인의 삶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렇게 굴욕 적인 삶을 사신 예수님의 삶을 절대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런 멸시와 천대를 받는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모습을 잊어 버린다면 어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삶을 언제나 기억하고, 그 삶대로 살려고 몸부린 쳤던 사 도 바울의 삶은 그래서 이 예수님을 이렇게 닮아 갔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 몇 해 되지 않은, A.D. 59년에 그는 자기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 침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 (고전15:9)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로부터 5년이 지난, A.D. 64 년에 바울은 스스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 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5년 만에 이렇게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일년이더 지난 A.D. 65년에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1년만에 이렇게 놀랍게 더욱더 겸손해졌 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을 잊지 않고 기억한 자가 살았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이런 예수님의 삶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다 그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드아이트 무디는 "짐을 가볍게 실은 배는 물에서 높이 뜨고, 짐을 무겁세 실은 배는 물에서 높이 뜨지 않 습니다. 은혜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고난주간에 이 땅에 오셔서 굴욕적인 겸손의 삶을 산 예수님을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더욱더 겸손해 지는 주간이 되시기 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이 비열하고 잔인한 허위진술을 당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그런 멸시와 천대를 다 당하 셨습니다. 예수님은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쓰고, 갖은 중상모략을 다 당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나라에 오셨습니다.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나라에 서 배척을 당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떤 배척을 받아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화란의 헤이그에 있는 평화의 궁전(Peace Palace) 밖에 매우 큰 예수님 의 상이 서 있습니다. 한번은 여행객이 안내자에게 왜 저 상을 궁전 안에 두지 않고, 밖에 두었으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안내자는 저 상은 너 무 크고, 입구는너무 좁아서 들어 갈 수가 없어서 밖에 두었다고 대답을 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 마음속에 꼭 모셔야 되는데도, 우리는 그 예수님 을 다 우리 마음문 밖에 모셔두고 있습니다. 마치 동냥하러 온 거지와 같 이 우리 문 밖에 세워두고 거기서 비도 맞고, 눈보라도 맞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런 수모를 다 당하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결멸과 중상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경멸하고 배척을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누 명을 씌웠습니다. 흠과 티가 없는 예수님을 부정한 자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술주정뱅 이라고 중상모략을 했습니다. 불한당이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불한당의 친구라고 중상모략을 했습니다. 죄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죄인들의 친구라고 중상모략을 했읍니다. 나중에는 아무 죄가 없는 그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의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중상모략을 당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영원한 죽음을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모든 억울한 멸시 와 천대를 다 당하셨습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멸시와 천대를 당하고, 중상모략을 당한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예수님 때문에 당하게 되는 모든 중상 모략을 다 참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런 중상 모략을 다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잊어 버린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 모습을 기억할 때 우리가 어떤 중상모략을 당한다고 한들 견디 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중상모략을 당하고, 누명을 씌면 예수님 만큼하겠습니까
4. 예수님은 항상 폭력에 노출된 생활을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루에도 몇번씩 무슨 일을 만날런지 알 수 없는 생활 이였습니다. 언제 어디서 총탄이 날라올지 알 수 없는 그런 위태한 생활 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할때,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보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큰 위험한 일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 가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으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선지 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은 일이 없었느니라하고 하시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을 했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를 듣고는 분하게 여겨서 그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 내어서 산 낭떠러지에 서 떨어 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눅4:29) 예수님은 이렇게 그의 공생애 를 시작하면서 부터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권세잡은 자들이 자주 예수님을 체포하여 학대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체포조가 늘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은 드디어 체포되어 빌라도와 헤롯 앞으로 끌려갔읍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과 인간의 적으로 탄핵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더 이상 이 땅에 살 가치가 없는 자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위태로운 삶 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이렇게 위태한 삶을 사신 예수님의 삶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어 버린다면 우리는 참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5. 예수님이 불같은 유혹을 당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불같은 시험을 했읍니다. 예수님은 그 불같은 시험을 견디느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 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광야로 데리고 가서 40일간 금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보고 돌들을 명하여 떡 덩이가 되게 하여 먹으라고 유혹을 했습니다. 30세의 젊은이가 40일간을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님께 먹는 것을 이야기하며 유혹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이 유혹을 물리치자 이번에는 성전 꼭대기 로 데리고가서 그 위에 세우고는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 내리 라. 하나님이 사자들을 명하여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 게 하리라"고 유혹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는 것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며,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화를 나게 만들 어서 예수님으로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도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다 보여 주면서 만일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 다고 유혹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자기 앞에 굴복하게 하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도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에서는 예수님이 꼭 십자가을 져야 하는데, 마귀 사단이 찾아 와서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냐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하여 십자가를 안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힘들고 여러운 길을 걸어 갔는데, 그 힘들고 어려운 길 을 가는 예수님을 마귀 사단은 잠시도 내버려두지 않고 그를 넘어 뜨리려고 유혹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불같은 시험과 유혹을 당하신 예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때문에 이런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잊어 버린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알고 죽어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에 걸려서 언제쯤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만은 자기의 죽는 시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죽음의 시간을 아는 것만큼 고통스런운 것은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분 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막연하게 자기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너무 나도 생생하게 자기의 죽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마셔야 할 잔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에는 듯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게 될 신음소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가 피로 범벅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개를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개를 잡으려고 끌고 가 니까, 그 개가 눈문을 흘리며 따라갑니다. 저는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아타까웠습니다. 저런 미물도 자기의 죽음을 직감하고 눈물을 흐리며 가는 구나 하고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잔인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바로 우리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 고난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이 죽음을 잊는 다면 우리는 다시 예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7.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기가 몰락할때, 자기를 배신하는 자 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총애하던 자가 자기가 몰락한다고 자기를 배신하는 것을 보면 더욱더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러한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다 버리고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 똑히 보면서 죽어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불치의 병을 고침을 받은 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 줘서 온전케 된 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살려준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을 했읍니다. 다른 제자들의 모습은 찾아 볼래야 볼 수 가없었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갈때 이렇게 예수님을 버리는 자들를 보면서 예수님 은 죽어 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의 아픔보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더욱더 아펐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위해 이러한 고통을 당한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배신당한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말고, 우리는 절대로 그러한 신앙의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당시 뉴욕에 살고 있는 한 농부에게 연합군에 입대하라는 징집 영장이 날라들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죽어서 그는 어린 아이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그의 자녀들에게는 그 외에는 부양해 줄 자가 없었다. 그 딱한 소식을 듣고는 동네에 결혼하지 않은 청년이 그 집에 와서는 자 기가 대신 군에 입대하겠다고 했다. 어린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그는 그 제의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마음씨 좋은 젊은이는 군에 입대를 했고, 그리고 첫번째 전투에서 총 에 맞아 전사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농부는 전쟁터에 달려가서 그 젊은이의 시신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는 교회 공원묘지에 묻어주었다. 그리고는 비석에다 이렇게 새겨넣었다. 그는 나를 위해 죽었다.(He died for me) 그리고 그가 살 아 있는 동안 그 젊은 일을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우리 예수님을 사랑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신 주님을 늘 기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형은 돈 많은 장사군의 딸과 결혼을 했고, 장인이 죽는 바람 에 장인의 엄청난 재산까지 카시므에게 돌아 왔습니다. 그래서 형 카시 므는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생 알리바바는 재산을 모두 날리고, 겨우 빼빼마른 나귀 3 마 리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리바바는 이 3마리의 나귀를 끌고 매일 산 으로 가서 나무를 해다가 연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산에서 나무를 하다가 40명의 도적 떼를 만났습니다. 그들을 엿보니 큰 바위 앞에 가서 "열려라 참깨"하니까 바위문이 저절로 열 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도둑이 들어가자, 바위문이 저절로 닫혔습니다. 알리바바는 그곳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에 40명의 도둑이 다 나왔습니다. 그리고 "닫혀라 참깨"하자 문이 저저로 닫혔습니다. 알리바바는 그 바위 앞에 가서 "열려라 참깨"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 자 돌 문 이 열렸습니다. 알리바바는 그 속에 들어가서 나귀 세 마리에 실을 만큼 보물을 잔뜩 싣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그 금은 보화를 일일이 셀수가 없어서 그리서 형네 집에 가서 저 울을 빌리다가 그 보물을 다 달아서 묻었습니다.
그런데 형수가 저울을 빌려 줄때, 무엇을 다나 보려고 저울 밑에다 찐득 거리는 기름을 발아 놓았 습니다. 그러나 알리바바는 그것도 모르고 보물을 다 달고는 저울을 형네 집에 갔다가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저울에는 금화 한 닢이 붙어 있었읍니다. 이 사실을 안 형 카시므가 알리바바를 찾아와서 어떻게 된 것이냐고 캐 물었습니다. 알리바바는 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이야기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카시므는 10마리의 나귀를 끌고 그 굴로 갔습니다. 그리고 "열려 라 참깨"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돌문이 저절로 열렸습니다. 카시므는 굴에 들어가서 정신 없이 보석들을 자루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보석들에 정신을 팔다보니 그만 돌문을 여는 주문을 잃어 버렸읍니다. 그는 아무리 "열려라 참외", 팥, 쌀, 콩, 다 해봤지만 "참깨"는 생각이 안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온 40인의 도적에 잡혀서 맞아 죽었읍니다. 욕심이 가장 귀한 것을 잊어 버리게 했고, 그것이 죽음을 가져 왔 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다가 보면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잊어버려야 할 것을 잊어 버리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리고 잊 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 버리지 않는 것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잊 어버려야 할 것을 잊어 버리지 못하는 것도 병이며, 잊어버리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 버리는 것도 병입니다. 어떤 사람이 우리가 꼭 잊어버려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다음과 같 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을 슬프게 만든 것들은 잊어 버려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여러분을 기쁘게 만든 것들은 꼭 기억해야만 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진실치 않은 자들로 판명난 친구들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너에 의하여 상처를 입은 자들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마라. 지나간 고난들은 잊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매일 매일 오는 축복들은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이렇게 살아가다가 보면 잊어버려야 할 것이 있고, 또한 잊어 버리지 말 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 른 것은 잊어 버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것만은 꼭 기억하라고 신신 당부를 했읍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유월절을 제자들과 같이 먹으실때,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눅22:19)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가지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 시면거 예수님을 기억할 것을 당부 하셨습니다. 이 떡을 떼고, 포도주 잔을 나누는 것은 성만찬입니다. 그래고 초대 교회는 이 성만찬을 예배 때 마다 항상 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버리신 몸과, 흘리신 피를 기념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라 잊어 버릴 수 있습니다. 또 잊어버리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입니다. 이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마치 카시므가 도둑의 굴의 바위문을 여는 주문을 잊 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우리를 위 하여 고난 당하신 예수님의 고난을 잊어 버린다고 하면 우리가 어찌 예수님 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고난 주간을 맞이해서,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우리 예수님의 고난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700년 전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속에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오셔서 어떤 대우를 받을 것인가 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고난을 마치 목격자와 같이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예수님의 고난을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살펴 보려고 합니다.
II. 본 론
1. 예수님이 박해와 위험속에서 탄생하신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렇게 묘사했 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곡식도 비가 와서 촉촉한 땅에서 자라는 것은 보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가뭄에 마른 땅에서 자라는 곡식들은 억세 보이고, 아름답지 않읍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마치 가뭄에 마른 땅에서 자라는 곡식들과 같 이 그렇게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이 태어 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로 부터 사랑과 자비의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사랑과 자비의 사명, 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명입니 까 예수님은 이런 아름다운 사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얼 마나 아름다움 모습입니까 그래서 천사들이 아기 예수님이 잉태됨을 그의 모친 마리아에게 알려 주 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천사장 가브리엘이 이 기쁨의 아름다 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천사가 그 이름까지 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천 사가 지어준 가장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또한 천사들은 예수님이 태어날 때 찬양을 불렀습니다. 하늘의 천사들 의 찬양대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찬양하는 합창을 연주했습니다. 얼 마나 아름다운 장관입니까 또한 하늘에는 이상한 유성이 나타나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려주었 습니다. 저 하늘에 우주쑈가 벌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아이들 중에 가장 유명한 아이로 태어 났습니다. 마리아의 거룩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의 거 룩한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는 이렇게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영화롭고 아름답게 축 하를 했는데, 이 땅에서는 전혀 반대의 현상이 일어 났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태어날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천하의 모든 사람 은 다 호적을 하라고 해서, 사람들이 호적을 하러 고향으로 돌아가느라고, 사람들의 대 이동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숙박시설이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이 여물을 먹는 말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그 추운 겨울에 말 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말구유에서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무슨 고운 모양이 있으며, 풍채가 있 으며,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있겠습니까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이렇게 낮고 천한 몸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이 모습을 잊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을 찾아가서 헤롯 왕에게 태어난 유 대인의 왕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자기 외에 다른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불안해서, 그 땅에 있는 두살 아래 모든 남자들을 다 죽이라고 했읍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태어난 그 날 밤에 그날 몸을 푼 어머니 마리아의 품에 안기어 그 추운 밤에 애굽으로 도망을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러한 박해속 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탄생시에 당한 이 박해와 위험 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이런 고난 중에 오신 예수님의 고난을 잊어 버린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2. 예수님이 이 땅에서 당한 굴욕의 삶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 왕의 왕이시며, 영원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셨습니다. 모든 권세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하늘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시간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의 모습을 입으셨습니다. 우리 인간과 똑 같이 되셨습니다. 이것은 세자가 평민의 모습을 한 것 보다 훨씬 더 놀라운 사건입니다. 만왕의 왕의 아들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우리 인간들이 입고 있는 모든 연약함을 다 입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과 같이 질병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연약함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고통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활속에서 우리 인간과 똑같은 연야함과 질병 과 고통이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가장 가난한 부모의 자녀로 태어 났습니다. 그는 부모로 부터 받은 유산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시는 동안 가지고 있는 재산이라 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죽어서 장사될 무덤조차 없었읍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나추셨습니다. "그는 원래 하나님과 본체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나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빌2:6-8)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라고 제자들에게 부탁하시던 그날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 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요 13:4-5)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제자들 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13:14)고 하셨 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에게 바른 기독교인의 삶을 보이시기 위하여 이렇게 굴욕 적인 삶을 사신 예수님의 삶을 절대적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런 멸시와 천대를 받는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모습을 잊어 버린다면 어찌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예수님의 삶을 언제나 기억하고, 그 삶대로 살려고 몸부린 쳤던 사 도 바울의 삶은 그래서 이 예수님을 이렇게 닮아 갔습니다. 바울이 회심한 후 몇 해 되지 않은, A.D. 59년에 그는 자기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사도라 침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 (고전15:9)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로부터 5년이 지난, A.D. 64 년에 바울은 스스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엡 3:8) 라고 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5년 만에 이렇게 겸손해졌습니다. 그리고 일년이더 지난 A.D. 65년에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딤전1:15) 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1년만에 이렇게 놀랍게 더욱더 겸손해졌 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삶을 잊지 않고 기억한 자가 살았던 삶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이런 예수님의 삶을 잊지 말고 기억하고 다 그러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드아이트 무디는 "짐을 가볍게 실은 배는 물에서 높이 뜨고, 짐을 무겁세 실은 배는 물에서 높이 뜨지 않 습니다. 은혜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겸손해집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고난주간에 이 땅에 오셔서 굴욕적인 겸손의 삶을 산 예수님을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도 더욱더 겸손해 지는 주간이 되시기 를 축원합니다.
3. 예수님이 비열하고 잔인한 허위진술을 당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그런 멸시와 천대를 다 당하 셨습니다. 예수님은 얼토당토않은 누명을 쓰고, 갖은 중상모략을 다 당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나라에 오셨습니다.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나라가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기 나라에 서 배척을 당했습니다. 자기 나라에서 배척을 받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어떤 배척을 받아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화란의 헤이그에 있는 평화의 궁전(Peace Palace) 밖에 매우 큰 예수님 의 상이 서 있습니다. 한번은 여행객이 안내자에게 왜 저 상을 궁전 안에 두지 않고, 밖에 두었으냐 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안내자는 저 상은 너 무 크고, 입구는너무 좁아서 들어 갈 수가 없어서 밖에 두었다고 대답을 했다. 예수님은 정말로 우리 마음속에 꼭 모셔야 되는데도, 우리는 그 예수님 을 다 우리 마음문 밖에 모셔두고 있습니다. 마치 동냥하러 온 거지와 같 이 우리 문 밖에 세워두고 거기서 비도 맞고, 눈보라도 맞게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이런 수모를 다 당하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욕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결멸과 중상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경멸하고 배척을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라고 누 명을 씌웠습니다. 흠과 티가 없는 예수님을 부정한 자로 여겼습니다. 예수님을 술주정뱅 이라고 중상모략을 했습니다. 불한당이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불한당의 친구라고 중상모략을 했습니다. 죄라고는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을 죄인들의 친구라고 중상모략을 했읍니다. 나중에는 아무 죄가 없는 그에게 사형에 해당하는 죄의 누명을 씌워서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살아있으면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중상모략을 당하는 것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영원한 죽음을 당한다면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모든 억울한 멸시 와 천대를 다 당하셨습니다. 다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하여 멸시와 천대를 당하고, 중상모략을 당한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예수님 때문에 당하게 되는 모든 중상 모략을 다 참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이런 중상 모략을 다 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잊어 버린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 모습을 기억할 때 우리가 어떤 중상모략을 당한다고 한들 견디 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중상모략을 당하고, 누명을 씌면 예수님 만큼하겠습니까
4. 예수님은 항상 폭력에 노출된 생활을 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루에도 몇번씩 무슨 일을 만날런지 알 수 없는 생활 이였습니다. 언제 어디서 총탄이 날라올지 알 수 없는 그런 위태한 생활 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할때, 마치 어린양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 같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예수님이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보고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큰 위험한 일을 당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고향에 가서 안식일에 회당에 가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지 않았으며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예수님을 업신여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선지 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을 받은 일이 없었느니라하고 하시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것을 지적을 했습니다. 그러자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를 듣고는 분하게 여겨서 그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 내어서 산 낭떠러지에 서 떨어 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눅4:29) 예수님은 이렇게 그의 공생애 를 시작하면서 부터 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권세잡은 자들이 자주 예수님을 체포하여 학대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체포조가 늘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은 드디어 체포되어 빌라도와 헤롯 앞으로 끌려갔읍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과 인간의 적으로 탄핵되어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더 이상 이 땅에 살 가치가 없는 자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렇게 위태로운 삶 을 사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이렇게 위태한 삶을 사신 예수님의 삶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잊어 버린다면 우리는 참 예수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5. 예수님이 불같은 유혹을 당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사시는 동안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잠시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불같은 시험을 했읍니다. 예수님은 그 불같은 시험을 견디느라고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 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마귀 사단은 예수님을 광야로 데리고 가서 40일간 금식하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 보고 돌들을 명하여 떡 덩이가 되게 하여 먹으라고 유혹을 했습니다. 30세의 젊은이가 40일간을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런데 그 예수님께 먹는 것을 이야기하며 유혹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이 유혹을 물리치자 이번에는 성전 꼭대기 로 데리고가서 그 위에 세우고는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면 뛰어 내리 라. 하나님이 사자들을 명하여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 게 하리라"고 유혹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되는 것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며, 네가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화를 나게 만들 어서 예수님으로 시험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시험도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다 보여 주면서 만일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 다고 유혹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으로 자기 앞에 굴복하게 하려는 유혹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도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생애에서는 예수님이 꼭 십자가을 져야 하는데, 마귀 사단이 찾아 와서는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냐 네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면서 예수님을 유혹하여 십자가를 안지게 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힘들고 여러운 길을 걸어 갔는데, 그 힘들고 어려운 길 을 가는 예수님을 마귀 사단은 잠시도 내버려두지 않고 그를 넘어 뜨리려고 유혹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불같은 시험과 유혹을 당하신 예수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때문에 이런 고난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잊어 버린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알고 죽어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 중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불치의 병에 걸려서 언제쯤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만은 자기의 죽는 시간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죽음의 시간을 아는 것만큼 고통스런운 것은 없기 때문 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분 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막연하게 자기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너무 나도 생생하게 자기의 죽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마셔야 할 잔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에는 듯한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을 잘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하게 될 신음소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달려 있는 십자가가 피로 범벅이 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집에서 개를 잡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개를 잡으려고 끌고 가 니까, 그 개가 눈문을 흘리며 따라갑니다. 저는그 모습을 보면서 너무나 아타까웠습니다. 저런 미물도 자기의 죽음을 직감하고 눈물을 흐리며 가는 구나 하고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잔인한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요 바로 우리들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 고난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이 죽음을 잊는 다면 우리는 다시 예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7.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자기가 몰락할때, 자기를 배신하는 자 들을 보는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총애하던 자가 자기가 몰락한다고 자기를 배신하는 것을 보면 더욱더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절대로 그 러한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그를 다 버리고 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 똑히 보면서 죽어갔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서 불치의 병을 고침을 받은 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 줘서 온전케 된 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예수님이 살려준 죽었다가 살아난 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갔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보는 앞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을 했읍니다. 다른 제자들의 모습은 찾아 볼래야 볼 수 가없었습니다.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갈때 이렇게 예수님을 버리는 자들를 보면서 예수님 은 죽어 갔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육신의 아픔보다 그의 마음이 얼마나 더욱더 아펐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위해 이러한 고통을 당한 예수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배신당한 예수님의 모습을 잊지말고, 우리는 절대로 그러한 신앙의 삶을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미국 남북 전쟁당시 뉴욕에 살고 있는 한 농부에게 연합군에 입대하라는 징집 영장이 날라들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죽어서 그는 어린 아이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그의 자녀들에게는 그 외에는 부양해 줄 자가 없었다. 그 딱한 소식을 듣고는 동네에 결혼하지 않은 청년이 그 집에 와서는 자 기가 대신 군에 입대하겠다고 했다. 어린 아이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그는 그 제의를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마음씨 좋은 젊은이는 군에 입대를 했고, 그리고 첫번째 전투에서 총 에 맞아 전사를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농부는 전쟁터에 달려가서 그 젊은이의 시신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는 교회 공원묘지에 묻어주었다. 그리고는 비석에다 이렇게 새겨넣었다. 그는 나를 위해 죽었다.(He died for me) 그리고 그가 살 아 있는 동안 그 젊은 일을 잊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위해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우리 예수님을 사랑하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때문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신 주님을 늘 기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