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자를 대하는 마음가짐 (사42:1-6)
본문
정치 이야기부터 좀 해볼까요 분위기상 이맘때가 되면 누가 새 대통령이 될 것인가에 대한 기대도 하게 되고 또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면서 펼치게 될 미래의 비전을 온 국민이 생각하면서 한참 흥분할 만한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느끼고 저도 느끼는 바입니다만 연일연야 좌절감만 안겨주는 이야기들로 신문지상이 가득 차고 있는 것을 우리가 봅니다. 어느 후보를 믿어야 될지, 어느 후보가 더 좋은지를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다 똑같다 하는 생각을 우리 모두가 지워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을 갈아치운다고 더 나아질 것 같지도 않고, 판을 바꾼다고 해서 정직한 사회가 될 것 같지도 않다는 절망감을 느낍니다. 민주화가 되고 그래도 OECD에 가입할 정도로 살 만한 나라가 되자 사치향락은 더 극에 달하고 뇌물과 탈법은 점점 더 심해지고 실종된 시민 의식이 온 세상을 어지럽히고 음란, 퇴폐, 극단적인 이기주의, 청소년에게까지 만연된 충동적인 폭력, 무책임한 환경 파괴, 도대체 어느 것을 보아도 막막하기만 합니다. 도대체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이 백성을 정신 차리게 하고 이 사회를 다시금 살맛 나게 만들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무슨 기대를 한다는 것 자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죽하면 '차범근 대통령', '박찬호 국무총리'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겠습니까 너무 답답하니까 축구나 야구에 미쳐서 그것으로 조금이라도 마음에 시원함을 한번 느껴보려고 안달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서글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역사와 경험을 통해서 배운 진리가 있습니다. 정치 지도자에게 기대를 하면 하는 것만큼 실망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국가에 대해서 이상주의를 펼치면 펼치는 것만큼 절망의 늪에 빠질 확률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역사책을 통해서 수없이 배웠고 또 우리 나라의 짧은 헌정사를 통해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속는 줄 알면서 다시 한번 믿어주고, 당할 줄 뻔히 알면서 또한번 기대를 가져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정치 중독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달리 뾰족한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숙명이요, 이 세상 국가의 운명입니다. 달리 대안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세상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훌륭한 정치가의 출현으로 우리 인생의 꿈이 성취될 수 있다고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는 것은 순진하기 보다 오히려 어리석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 국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라거나 이 세상의 장래사를 놓고 무조건 비관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연의 자세를 바로 잡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수없이 속으면서 또 속을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더 나아질 것도 없고 더 나빠질 것도 없습니다. 죄악으로 물든 세상은 원래가 그런 것입니다. 인생이란 원래 이런 세상에서 그저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슨 영원한 소망이 있는 것처럼 넋을 잃고 추종한다면 신기루를 따라가는 사람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우리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역사의 주인이신 만군의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절망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42장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 나오셨거나 성경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분들은 아마 제가 설교하는 내용 가운데 반도 못 알아들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한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고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이미 잘 다니고 계시는 분들도 본문 말씀을 똑바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이 사람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온 세상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 모든 사람이 소망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고 영원토록 통치하실 의의 왕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보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입니다. 뺀 자중의 뺀 자, 곧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신을 부어 주셨습니다.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성령님으로 감동시켜 주셨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님을 부어주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사야 11장으로 넘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시자 그는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총명한 자, 지혜자가 되었고 모략과 재능을 구비한 자가 되었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거룩함을 구비한 유일한 구원자, 우리의 왕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렇게 준비시키셨는데 이 세상에 그 누가 그와 비기겠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보라고 하시면서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42장 1절 끝 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방에 공의를 베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공의를 베푼다는 말은 3절과 4절에 또한번 나옵니다.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공의를 베풀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 만큼 강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공의를 베푼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법이 바로 서는 나라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한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면 공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율법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레위기 19장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판관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악을 선으로 바꾸고 선을 악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받아먹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한 것이 분명함에도 정에 끌려 가난한 사람 편을 들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의를 세우는 나라는 가난하냐 불쌍하냐를 따지면 안 됩니다. 법대로 악은 악이요, 선은 선으로 재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며." 라고 했습니다. 잘못이 명백하다면 그가 아무리 힘이 있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풀어준다든지 형을 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 나라의 공의는 공의로운 법 집행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법이 공의롭게 집행되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습니다. 선은 항상 선이요, 악은 항상 악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힘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법이 바로 서면 그 나라는 밝은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공의가 바로 서는 이런 나라가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 잘 보아왔지 않습니까 공의가 바로 서는 나라는 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그 나라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보면 거기는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한때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구별해 두고 간섭하시면서 공의가 바로 서는 나라를 세워보려고 했지만 실패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는 그런 나라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한 가지 대안을 내놓으셨습니다.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시고 그가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이요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가 세우는 그 나라를 공의로 다스릴 때 그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서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영원토록 다스릴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공의를 가지고 영원토록 다스리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이사야 1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공의로운 나라를 인간적인 표현을 가지고 설명을 하려다 보면 오히려 그 영광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을 그대로 보는 게 좋습니다. 4절 이하를 보십시오.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예수님의 다스리심은 거룩한 다스림이요, 의로운 다스림이기 때문에 악인은 악인대로 심판하시고 선인은 선인대로 하나님이 영광을 주신다는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6절 이하에 기가 막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할렐루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 백성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면 거기에서는 남을 해치는 일도 없고 상처 입는 법도 없고 억울한 일도 없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가 바로 주님이 공의를 베풀고, 공의로 다스리는 그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나라입니까 이런 말씀을 보기만 해도 우리가 황홀감에 젖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앞에 지금 준비하고 계시는 그 나라가 눈앞에 펼쳐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성경 구절을 보면 입술에서 찬송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할렐루야! "예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이 예수님을 소망하라. 이 예수님을 믿으라." 하는 말씀을 지금 42장에서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다스릴 공의로운 나라가 우리 앞에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이 세상에서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만큼 큰 불행은 없습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기회를 놓치는 것만큼 큰 손해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공의로운 그 나라가 우리 앞에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세상 나라나 세상적인 야망, 세상적인 행복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이렇게 분명히 경고하고 싶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수 없는 상처와 절망을 체험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는 사람만큼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까 그 나라가 지금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목전에 와 있는 그 나라를 보면서도 옆에 있는 형제나 이웃을 그 나라로 인도하고자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면 저는 그에게 정말 예수님을 믿고 있냐고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성령님으로 기름 부으신 그 종을 분명히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분이 다스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볼 때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더 좋은 나라가 있습니다. 대통령만 뽑으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아요 세상은 항상 그런 거요. 그러니까 그렇고 그런 나라에 뭐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입에 거품을 품고 욕을 하고 법석을 떱니까 그만두고 예수님을 믿고 그가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 나라로 함께 들어갑시다." 왜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까 안 믿으니까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가 자신 있게 바라보지 않으니까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믿는다면 왜 말을 못합니까 온유하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다스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는 전도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 복음을 전하실 때 예수님이 취하신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전도를 하실 때 세 가지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먼저 42장 2절을 보십시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한 마디로 말해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실 때 온유하게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하며" 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표현을 바꾸는 것은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가 어떠한 것인지는 세상 임금들이나 권력자들과 예수님을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 임금이 행차를 하는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고관대작들이 주위에 호위를 하고 앞에는 군인들이 가면서 악대를 울리며 온 세상 앞에 나팔을 불지 않습니까 그런 요란한 소리들로 자기의 권위를 백성들 앞에 드러내지 않습니까 자기 권위를 선전하는데 급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만날 때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소리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의 소리를 듣게 하려고 악을 쓰거나 나팔을 불지도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조차 다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분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침묵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면서도 자기의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겁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말씀하실 때도 가까이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오히려 자기의 그 영광을 초라한 인간, 초라한 노예의 모습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에게 부담 없이 다가오셨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사람들은 그를 보고 두려워하거나 옷깃을 여미고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초라한 종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부드럽게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드러운 말씀은 날카로운 화살 같아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꽂혔습니다. 그는 학자의 혀를 가지고 있어서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였고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사50:4).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씀하시지만 듣는 자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복종하는 놀라운 기적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비록 조용하게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조용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힘없는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절대 힘없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온유했지만은 그 온유는 무기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하셨지만 그 조용함은 사람을 잠자게 만드는 그런 고요가 아니었습니다. 온유함 속에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완력이나 허세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다가 갈 때 예수님의 온유함을 한시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온유하셨는데 종인 우리가 거만하게, 딱딱하게 위세를 부리면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설득하느라고 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설득해서 예수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드럽게 말해도 성령님은 역사 하십니다. 할렐루야! 부드럽게 말해도 성령님은 역사 하십니다. 은근히 자기 자랑을 앞세워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도록 만든다면 그는 예수님의 온유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만나도 화를 내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적하고, 멸시하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감정을 보이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 앞에서도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유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온유해야 됩니다. 대각성 전도 집회 때마다 남편에게 애교를 떨며 '꼭 가서 복음을 들어보자'고 온갖 정성을 다해 매달리는 부인들이 있잖아요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사정상 못 들어 줄 때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면서 "그래 좋았어. 내 천국 갈 때 너는 지옥에 가 있어라."며 악담을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온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의 온유함을 놓고 노예 도덕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요." 온유한 자가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불신자를 대할 때 온유하십시오. 소리를 지르고 나팔을 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두 번째 태도는 긍휼,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가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사야는 예수님이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신 분인가를 묘사하기 위해서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이 '상한 갈대'와 '등불'이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동사 앞에다가 놓았습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자,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자를 주님께서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 지를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대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갈대는 강가나 호숫가에서 자라는 풀의 일종으로 다른 풀에 비해서는 상당히 크고 강한 것 같지만 나무에 비해서는 몹시 약하고 또 꺾이기 쉽습니다. 조금만 힘을 가하면 꺾여 버리고 상해 버립니다. 짐승이 한번 지나가면 밟아 버리면 다 꺾여 버리고 맥없이 쓰러집니다. 그래서 갈대는 약한 자의 심벌처럼 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갈대가 그러하다면 상한 갈대야 오죽하겠습니까 연약하기는 꺼져 가는 등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잘 모르실 지 모르지만 아마 저 나이 정도 되시는 분들은 등불이 뭔지 대충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초등학교 다닐 때 시골에서는 등잔불을 켜 놓고 책을 읽기도 하고 또 식구들이 모여서 두런두런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했습니다. 이 등잔불은 기름이 충분하고 심지가 상당히 좋고 산소가 제대로 잘 유입이 되는 그런 방에서는 잘 탑니다. 그리고 환하게 주변을 밝혀줍니다. 그러나 기름이 다 되어 가면 심지 끝에 붙은 불이 가물가물 꺼지기 시작합니다. 또 기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심지가 좋지 않으면 이 불은 시커먼 연기를 내면서 자꾸 가물가물 꺼져갑니다. 또 공기가 잘 통하지 아니하면 가물가물 꺼져갑니다. 이와 같이 가물거리는 등불은 조금만 바람이 스쳐 지나가도 확 꺼져 버립니다. 너무나 힘없어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은 도대체 누구를 비유하는 것일까요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표준에서 볼 때는 이 세상 사람 전부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완전하신 하나님의 표준에 비추어 보면 인간이라는 것은 다 꺼져 가는 등불이요, 상한 갈대, 아니 그것보다도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이 그런 의미라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표준의 볼 때에도 특별히 상한 갈대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꺼져 가는 등불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이 약하고 아무 힘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해서 멸시받는 자들이나 병들어 버림받는 자들, 실패하여 그야말로 소망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들, 늙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서 고독하게 사는 사람들, 상한 갈대란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조금만 다치면 다 꺾이고 쓰러질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특별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소망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상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꺾이지 아니한 갈대를 보시듯이 그들에게도 구원받을 소망이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특별히 찾으셨고 생명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여서 상한 갈대와 같은 그들을 성전의 백향목 기둥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잣대로 재어 보면 우리 주변에도 꺼져 가는 등불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심의 불꽃이 거의 다 자지러진 것처럼 행동하는 악인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선한 구석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흉악한 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불행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 것입니다. 가물거리던 등불이 꺼져버리면 모든 천지가 어두워지듯이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서 다시는 그 어둠에서 해방될 기회를 얻지 못할 불행한 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리들이 그랬고, 특별히 죄인이라고 하는 딱지가 붙어 다니던 사람들이 그랬고, 창녀들이 그랬습니다. 제가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모두 가물가물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에게도 구원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주님은 보셨습니다. 꺼져 가는 불꽃이지만 아직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지금은 꺼져 가는 등불 같지만 그들이 구원받으면 대낮에 온 천지를 밝히는 중천의 태양처럼 변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죄인들이 주님 앞에 와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전도할 때 예수님의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주변에 상한 갈대와 같이 연약한 자가 있습니까 꺼져 가는 등불처럼 양심도 거의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자가 있습니까 이런 자를 보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그를 보아야 합니다. '비록 약하지만 예수님만 만나면 소망이 있다. 비록 흉악하지만 예수님만 만나면 소망이 있다.' 이런 눈으로 우리가 불신자들을 보고 또 대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발행된 '우리'지에서 '재판장과 사형수'라는 색다른 제목 아래 참 감동적인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여러분이 읽으셨을 줄 믿습니다. 11살의 어린 소녀를 납치해서 성폭행하고 살해한 흉악범입니다. 법으로 이야기하면 반드시 죽여야 될, 사형을 선고받아야 할 사람이요, 이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되어야 할 악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재판한 분이 우리 교회 다니시는 어떤 집사님이셨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지만 한사람의 생명을 끊어놓는 결단이기 때문에 판사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더욱이 믿음이 좋은 판사 같으면 더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살인죄를 범한 사람이나 그렇지 아니한 자기나 다를 바 없이 다 죄인인데 죄인이 죄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야 하는 그런 모순 때문에 마음의 고통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도 법에 따라서 사형을 선고하기는 했습니다만 그 사형수를 잊지 않고 지난 3년 동안 신앙 서적을 보내고 편지를 쓰고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꺼져 가는 등불처럼 소망이 없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그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결국 그의 정성은 결실을 맺어 그 사형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완전히 중생 받아 자기가 잘못한 죄를 철저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만 구원받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우니까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도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열심히 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를 재판했던 집사님께 보내온 편지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의 몇 통이 '우리'지에 소개된 것을 여러분이 읽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 내용을 읽으면서 참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판사님, 남들은 이 계절이 쓸쓸하다고들 하지요. 그것은 모든 사물이 시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계절이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하지만 주님의 아들이 된 저는 말씀과 찬송으로 외로움과 쓸쓸함보다는 새로운 힘과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신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어요 가물거리던 불꽃이 다시 확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 가운데 아무리 상한 갈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소망을 가지고 그들을 우리는 대해야 됩니다.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자세인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세 번째 태도는 포기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예수님이 전도하시다가 절망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복음을 듣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하늘 나라의 백성이면 그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보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 대해서 안 된다 고 하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스(Yes)입니다. 노우(No)가 아닙니다.
전도할 때 우리 역시 낙담이나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한번 전도해서 안 믿는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 있을 뿐이지 포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를 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전도하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일컬어서 어떤 사람은 '시속 3킬로미터의 하나님'이라는 별명을 붙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시내 광야를 여행하면서 그들이 아무리 빨리 여행을 해도 그 광야 모래밭을 무거운 짐을 지고 짐승을 끌고 여행을 했기 때문에 속도가 안 났습니다. 죽자고 여행을 해도 시속 2 킬로미터 내지 3 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가마." 그랬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시속 2 킬로미터로 걸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시속 2킬로미터로 걸으실 분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더디게 가니까 하나님도 함께 더디게 가시다가 보니 40년이 걸렸다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는다고 해서 에이 모르겠다 하고 포기하고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 믿기까지 10년이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10년을 함께 소망을 가지고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금방 안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절망한다든지 거칠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절대 포기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려주십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수년 동안 전도해도 아직 회개하지 않고 있는 가족이 있습니까 가까운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절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대각성 전도집회를 위해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심령들이 우리의 손에 끌려서 주님 앞으로 나아올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전도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 제4면을 보시면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자 하는 표어 밑에 97년 대각성 전도 집회 태신자 등록 현황이 나옵니다. 합계를 보면 10,841명이니까 꽤 되는 것 같지만 태신자를 마음에 두고 교회에 등록시키고 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대학생, 청년들까지 합해서 4,300명밖에 안됩니다. 우리 교회 대학생 이상 주일 출석하는 성도 수가 13,000명에서 14,000명 사이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 중에서 3분의 2정도가 아직 전도하는데 별로 관심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태신자를 등록시키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두고 전도해 보려고 애쓰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통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대망 하십니까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공의로운 나라라는 것을 여러분이 믿습니까 그 나라에만 소망이 있는 줄을 여러분이 확신합니까
그렇다면 그 나라를 나 혼자 들어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자세를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나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애간장을 태우면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와서 복음을 듣고 결신 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도 할 것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걸어온 그대로 또다시 걸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간에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함을 가지고 그들을 대합시다. 인간적인 힘이 들어가면 안됩니다. 우리가 온유할수록 성령님의 능력은 강하게 역사 합니다.
할렐루야!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다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약함이 강함이요 부드러움이 강직함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은 소경입니다. 죄의 종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덫에 걸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상한 갈대를 다루듯이 꺼져 가는 등불을 다루듯이 불쌍히 여기면서 조심하면서 다루어야 합니다. 완악하게 복음을 거역해도 그들에게는 아직 작은 불꽃이 남아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그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놓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나님에게 절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다림이 있을 뿐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이번 한 주간 동안 내 주변에 있는 믿지 아니하는 불쌍한 자들을 찾아가면 우리의 손을 통해 우리의 입술을 통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 절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번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안 믿는 자들을 찾아갈 수 있는 귀한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국가에 대해서 이상주의를 펼치면 펼치는 것만큼 절망의 늪에 빠질 확률이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역사책을 통해서 수없이 배웠고 또 우리 나라의 짧은 헌정사를 통해서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속는 줄 알면서 다시 한번 믿어주고, 당할 줄 뻔히 알면서 또한번 기대를 가져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정치 중독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달리 뾰족한 대안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 나라의 숙명이요, 이 세상 국가의 운명입니다. 달리 대안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세상 나라에 모든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직도 훌륭한 정치가의 출현으로 우리 인생의 꿈이 성취될 수 있다고 하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는 것은 순진하기 보다 오히려 어리석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 국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라거나 이 세상의 장래사를 놓고 무조건 비관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본연의 자세를 바로 잡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수없이 속으면서 또 속을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 세상은 그저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입니다. 더 나아질 것도 없고 더 나빠질 것도 없습니다. 죄악으로 물든 세상은 원래가 그런 것입니다. 인생이란 원래 이런 세상에서 그저 그렇게 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없고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무슨 영원한 소망이 있는 것처럼 넋을 잃고 추종한다면 신기루를 따라가는 사람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우리 현실이 이렇기 때문에 역사의 주인이신 만군의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절망하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놀라운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42장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은 쉬운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처음 나오셨거나 성경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분들은 아마 제가 설교하는 내용 가운데 반도 못 알아들을 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앉아서 한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고 마음에 와 닿는 말씀을 들려주실 것입니다. 교회를 이미 잘 다니고 계시는 분들도 본문 말씀을 똑바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 여기 있으니 이 사람을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온 세상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한 구원자, 모든 사람이 소망하는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고 영원토록 통치하실 의의 왕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을 보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입니다. 뺀 자중의 뺀 자, 곧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신을 부어 주셨습니다.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성령님으로 감동시켜 주셨다는 말입니다. 성령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님을 부어주셨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기 위해서는 이사야 11장으로 넘어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임하시자 그는 누구와도 비길 수 없는 총명한 자, 지혜자가 되었고 모략과 재능을 구비한 자가 되었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거룩함을 구비한 유일한 구원자, 우리의 왕이 되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렇게 준비시키셨는데 이 세상에 그 누가 그와 비기겠습니까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와 같이 선택하시고 우리에게 보라고 하시면서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42장 1절 끝 부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이방에 공의를 베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공의를 베푼다는 말은 3절과 4절에 또한번 나옵니다.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바로 공의를 베풀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 만큼 강조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공의를 베푼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법이 바로 서는 나라를 만든다는 뜻입니다. 한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면 공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율법으로 가르쳐주셨습니다. 레위기 19장 1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재판관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악을 선으로 바꾸고 선을 악으로 바꾸지 말라는 것입니다. 돈을 받아먹고 재판을 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 우리는 가난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한 것이 분명함에도 정에 끌려 가난한 사람 편을 들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것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의를 세우는 나라는 가난하냐 불쌍하냐를 따지면 안 됩니다. 법대로 악은 악이요, 선은 선으로 재판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 "세력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며." 라고 했습니다. 잘못이 명백하다면 그가 아무리 힘이 있는 사람이라도, 아무리 재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풀어준다든지 형을 집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 나라의 공의는 공의로운 법 집행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법이 공의롭게 집행되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습니다. 선은 항상 선이요, 악은 항상 악입니다.
그러므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힘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괴롭히고 핍박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법이 바로 서면 그 나라는 밝은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공의가 바로 서는 이런 나라가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 잘 보아왔지 않습니까 공의가 바로 서는 나라는 이 지상에서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선진국이라고 해도 그 나라의 보이지 않는 세계를 들여다보면 거기는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한때 이스라엘 백성을 특별히 구별해 두고 간섭하시면서 공의가 바로 서는 나라를 세워보려고 했지만 실패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에는 그런 나라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한 가지 대안을 내놓으셨습니다.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시고 그가 다스리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이요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가 세우는 그 나라를 공의로 다스릴 때 그나라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서 전도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영원토록 다스릴 수 있도록 하시겠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공의를 가지고 영원토록 다스리실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는 이사야 11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리는 공의로운 나라를 인간적인 표현을 가지고 설명을 하려다 보면 오히려 그 영광을 가리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을 그대로 보는 게 좋습니다. 4절 이하를 보십시오.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예수님의 다스리심은 거룩한 다스림이요, 의로운 다스림이기 때문에 악인은 악인대로 심판하시고 선인은 선인대로 하나님이 영광을 주신다는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워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 6절 이하에 기가 막힌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가 나와 있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할렐루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압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을 섬깁니다. 그런 백성이 가득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면 거기에서는 남을 해치는 일도 없고 상처 입는 법도 없고 억울한 일도 없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나라가 바로 주님이 공의를 베풀고, 공의로 다스리는 그 나라의 모습입니다. 이 얼마나 황홀한 나라입니까 이런 말씀을 보기만 해도 우리가 황홀감에 젖게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앞에 지금 준비하고 계시는 그 나라가 눈앞에 펼쳐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런 성경 구절을 보면 입술에서 찬송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동산 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할렐루야! "예수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이 예수님을 소망하라. 이 예수님을 믿으라." 하는 말씀을 지금 42장에서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다스릴 공의로운 나라가 우리 앞에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믿습니까 이 세상에서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만큼 큰 불행은 없습니다.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기회를 놓치는 것만큼 큰 손해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사람이라도 더 전도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공의로운 그 나라가 우리 앞에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세상 나라나 세상적인 야망, 세상적인 행복을 추구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이렇게 분명히 경고하고 싶습니다.
그는 크리스천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서 수 없는 상처와 절망을 체험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있는 사람만큼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까 그 나라가 지금 눈앞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왜 전도하지 않습니까 목전에 와 있는 그 나라를 보면서도 옆에 있는 형제나 이웃을 그 나라로 인도하고자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면 저는 그에게 정말 예수님을 믿고 있냐고 묻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성령님으로 기름 부으신 그 종을 분명히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그분이 다스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대망하고 계시는 분이라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 볼 때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더 좋은 나라가 있습니다. 대통령만 뽑으면 세상이 달라질 줄 알아요 세상은 항상 그런 거요. 그러니까 그렇고 그런 나라에 뭐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입에 거품을 품고 욕을 하고 법석을 떱니까 그만두고 예수님을 믿고 그가 다스리는 영원한 나라,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 나라로 함께 들어갑시다." 왜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까 안 믿으니까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자기가 자신 있게 바라보지 않으니까 말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믿는다면 왜 말을 못합니까 온유하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다스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살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기 위해서 그는 전도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또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그 복음을 전하실 때 예수님이 취하신 태도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전도를 하실 때 세 가지 태도를 취하셨습니다.
먼저 42장 2절을 보십시오.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한 마디로 말해 세상 사람들에게 전도하실 때 온유하게 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니하며" 라는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하면서 표현을 바꾸는 것은 예수님의 온유하심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온유가 어떠한 것인지는 세상 임금들이나 권력자들과 예수님을 비교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 임금이 행차를 하는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고관대작들이 주위에 호위를 하고 앞에는 군인들이 가면서 악대를 울리며 온 세상 앞에 나팔을 불지 않습니까 그런 요란한 소리들로 자기의 권위를 백성들 앞에 드러내지 않습니까 자기 권위를 선전하는데 급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만날 때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소리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의 소리를 듣게 하려고 악을 쓰거나 나팔을 불지도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를 대적하는 자들 앞에서조차 다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분은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같이 침묵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이면서도 자기의 권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겁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말씀하실 때도 가까이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오히려 자기의 그 영광을 초라한 인간, 초라한 노예의 모습으로 바꾸어서 사람들에게 부담 없이 다가오셨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사 53:2). 사람들은 그를 보고 두려워하거나 옷깃을 여미고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초라한 종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부드럽게 그리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드러운 말씀은 날카로운 화살 같아서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꽂혔습니다. 그는 학자의 혀를 가지고 있어서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였고 절망하는 자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사50:4). 부드럽고 조용하게 말씀하시지만 듣는 자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났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와 복종하는 놀라운 기적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서 비록 조용하게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조용한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힘없는 것처럼 말씀하셨지만 그것은 절대 힘없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온유했지만은 그 온유는 무기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용하셨지만 그 조용함은 사람을 잠자게 만드는 그런 고요가 아니었습니다. 온유함 속에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완력이나 허세로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의 터 위에 세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리를 예수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불신자들에게 전도하기 위해 다가 갈 때 예수님의 온유함을 한시도 잊으면 안됩니다.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이 온유하셨는데 종인 우리가 거만하게, 딱딱하게 위세를 부리면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설득하느라고 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설득해서 예수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드럽게 말해도 성령님은 역사 하십니다. 할렐루야! 부드럽게 말해도 성령님은 역사 하십니다. 은근히 자기 자랑을 앞세워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오히려 거리감을 느끼도록 만든다면 그는 예수님의 온유함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만나도 화를 내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화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적하고, 멸시하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들에게 감정을 보이면 안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 앞에서도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온유 위에 세워집니다.
그러므로 온유해야 됩니다. 대각성 전도 집회 때마다 남편에게 애교를 떨며 '꼭 가서 복음을 들어보자'고 온갖 정성을 다해 매달리는 부인들이 있잖아요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이 사정상 못 들어 줄 때가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눈을 부릅뜨고 화를 내면서 "그래 좋았어. 내 천국 갈 때 너는 지옥에 가 있어라."며 악담을 하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온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철학자 니체는 기독교의 온유함을 놓고 노예 도덕이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나 속지 마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차지할 것이요." 온유한 자가 승리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불신자를 대할 때 온유하십시오. 소리를 지르고 나팔을 불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불쌍히 여기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두 번째 태도는 긍휼,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가짐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이사야는 예수님이 얼마나 긍휼이 풍성하신 분인가를 묘사하기 위해서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원문을 보면 이 '상한 갈대'와 '등불'이라는 말을 특별히 강조하기 위해서 일부러 동사 앞에다가 놓았습니다. 상한 갈대와 같은 자,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자를 주님께서 얼마나 불쌍히 여기시는 지를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갈대가 어떤 것인지는 잘 아실 것입니다. 갈대는 강가나 호숫가에서 자라는 풀의 일종으로 다른 풀에 비해서는 상당히 크고 강한 것 같지만 나무에 비해서는 몹시 약하고 또 꺾이기 쉽습니다. 조금만 힘을 가하면 꺾여 버리고 상해 버립니다. 짐승이 한번 지나가면 밟아 버리면 다 꺾여 버리고 맥없이 쓰러집니다. 그래서 갈대는 약한 자의 심벌처럼 되어 있습니다. 온전한 갈대가 그러하다면 상한 갈대야 오죽하겠습니까 연약하기는 꺼져 가는 등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은 잘 모르실 지 모르지만 아마 저 나이 정도 되시는 분들은 등불이 뭔지 대충 아실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초등학교 다닐 때 시골에서는 등잔불을 켜 놓고 책을 읽기도 하고 또 식구들이 모여서 두런두런 서로 이야기도 나누고 했습니다. 이 등잔불은 기름이 충분하고 심지가 상당히 좋고 산소가 제대로 잘 유입이 되는 그런 방에서는 잘 탑니다. 그리고 환하게 주변을 밝혀줍니다. 그러나 기름이 다 되어 가면 심지 끝에 붙은 불이 가물가물 꺼지기 시작합니다. 또 기름이 있다고 하더라도 심지가 좋지 않으면 이 불은 시커먼 연기를 내면서 자꾸 가물가물 꺼져갑니다. 또 공기가 잘 통하지 아니하면 가물가물 꺼져갑니다. 이와 같이 가물거리는 등불은 조금만 바람이 스쳐 지나가도 확 꺼져 버립니다. 너무나 힘없어 보이는 모습입니다. 그러면 이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은 도대체 누구를 비유하는 것일까요 누구를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표준에서 볼 때는 이 세상 사람 전부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완전하신 하나님의 표준에 비추어 보면 인간이라는 것은 다 꺼져 가는 등불이요, 상한 갈대, 아니 그것보다도 못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이 그런 의미라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표준의 볼 때에도 특별히 상한 갈대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꺼져 가는 등불 같은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주변에는 건드리면 부러질 것 같이 약하고 아무 힘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난해서 멸시받는 자들이나 병들어 버림받는 자들, 실패하여 그야말로 소망을 잃어버리고 사는 자들, 늙어서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나서 고독하게 사는 사람들, 상한 갈대란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조금만 다치면 다 꺾이고 쓰러질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특별히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서 소망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상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꺾이지 아니한 갈대를 보시듯이 그들에게도 구원받을 소망이 있다고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특별히 찾으셨고 생명의 말씀을 그들에게 전하여서 상한 갈대와 같은 그들을 성전의 백향목 기둥처럼 만들어 주셨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보면 우리는 이러한 예들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잣대로 재어 보면 우리 주변에도 꺼져 가는 등불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양심의 불꽃이 거의 다 자지러진 것처럼 행동하는 악인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선한 구석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흉악한 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습니다. 가룟 유다처럼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의 불행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 것입니다. 가물거리던 등불이 꺼져버리면 모든 천지가 어두워지듯이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서 다시는 그 어둠에서 해방될 기회를 얻지 못할 불행한 자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세리들이 그랬고, 특별히 죄인이라고 하는 딱지가 붙어 다니던 사람들이 그랬고, 창녀들이 그랬습니다. 제가 볼 때 이런 사람들은 모두 가물가물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런 자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들에게도 구원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주님은 보셨습니다. 꺼져 가는 불꽃이지만 아직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셨습니다. 지금은 꺼져 가는 등불 같지만 그들이 구원받으면 대낮에 온 천지를 밝히는 중천의 태양처럼 변할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는 생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죄인들이 주님 앞에 와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전도할 때 예수님의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본 받아야 합니다. 주변에 상한 갈대와 같이 연약한 자가 있습니까 꺼져 가는 등불처럼 양심도 거의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자가 있습니까 이런 자를 보면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그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기대를 가지고 그를 보아야 합니다. '비록 약하지만 예수님만 만나면 소망이 있다. 비록 흉악하지만 예수님만 만나면 소망이 있다.' 이런 눈으로 우리가 불신자들을 보고 또 대해야 합니다. 지난주에 발행된 '우리'지에서 '재판장과 사형수'라는 색다른 제목 아래 참 감동적인 기사가 실려 있는 것을 여러분이 읽으셨을 줄 믿습니다. 11살의 어린 소녀를 납치해서 성폭행하고 살해한 흉악범입니다. 법으로 이야기하면 반드시 죽여야 될, 사형을 선고받아야 할 사람이요, 이 사회로부터 영원히 격리되어야 할 악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재판한 분이 우리 교회 다니시는 어떤 집사님이셨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수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것이지만 한사람의 생명을 끊어놓는 결단이기 때문에 판사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충분히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더욱이 믿음이 좋은 판사 같으면 더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면 살인죄를 범한 사람이나 그렇지 아니한 자기나 다를 바 없이 다 죄인인데 죄인이 죄인에게 사형 선고를 내려야 하는 그런 모순 때문에 마음의 고통이 이만저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도 법에 따라서 사형을 선고하기는 했습니다만 그 사형수를 잊지 않고 지난 3년 동안 신앙 서적을 보내고 편지를 쓰고 하면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꺼져 가는 등불처럼 소망이 없지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에 그에게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결국 그의 정성은 결실을 맺어 그 사형수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완전히 중생 받아 자기가 잘못한 죄를 철저한 회개하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만 구원받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우니까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주변의 사람들에게 전도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열심히 뛰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그를 재판했던 집사님께 보내온 편지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의 몇 통이 '우리'지에 소개된 것을 여러분이 읽으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 내용을 읽으면서 참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판사님, 남들은 이 계절이 쓸쓸하다고들 하지요. 그것은 모든 사물이 시들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계절이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하지만 주님의 아들이 된 저는 말씀과 찬송으로 외로움과 쓸쓸함보다는 새로운 힘과 믿음을 가지고 주님 안에서 신앙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어요 가물거리던 불꽃이 다시 확 타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 가운데 아무리 상한 갈대처럼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우리는 소망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소망을 가지고 그들을 우리는 대해야 됩니다. 그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자세인 것입니다. 포기하지 말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세 번째 태도는 포기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며." 이것은 예수님이 전도하시다가 절망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복음을 듣지 않아도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하늘 나라의 백성이면 그는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보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악해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에 대해서 안 된다 고 하는 법이 절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예스(Yes)입니다. 노우(No)가 아닙니다.
전도할 때 우리 역시 낙담이나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한번 전도해서 안 믿는다고 낙심하거나 포기하면 안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이 있을 뿐이지 포기는 있을 수 없습니다. 누구를 보아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는 전도하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일컬어서 어떤 사람은 '시속 3킬로미터의 하나님'이라는 별명을 붙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시내 광야를 여행하면서 그들이 아무리 빨리 여행을 해도 그 광야 모래밭을 무거운 짐을 지고 짐승을 끌고 여행을 했기 때문에 속도가 안 났습니다. 죽자고 여행을 해도 시속 2 킬로미터 내지 3 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밖에 내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느릿느릿하게 행진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놓고 하나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가마." 그랬습니다.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시속 2 킬로미터로 걸으셨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디 시속 2킬로미터로 걸으실 분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더디게 가니까 하나님도 함께 더디게 가시다가 보니 40년이 걸렸다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믿는다고 해서 에이 모르겠다 하고 포기하고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가 예수 믿기까지 10년이 더 걸릴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10년을 함께 소망을 가지고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금방 안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절망한다든지 거칠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절대 포기하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언제까지든지 기다려주십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수년 동안 전도해도 아직 회개하지 않고 있는 가족이 있습니까 가까운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절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대각성 전도집회를 위해 막바지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심령들이 우리의 손에 끌려서 주님 앞으로 나아올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가운데는 아직도 전도하는 일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보 제4면을 보시면 엎드려 기도하고 일어나 전도하자 하는 표어 밑에 97년 대각성 전도 집회 태신자 등록 현황이 나옵니다. 합계를 보면 10,841명이니까 꽤 되는 것 같지만 태신자를 마음에 두고 교회에 등록시키고 그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은 대학생, 청년들까지 합해서 4,300명밖에 안됩니다. 우리 교회 대학생 이상 주일 출석하는 성도 수가 13,000명에서 14,000명 사이인 것을 감안하면 우리 중에서 3분의 2정도가 아직 전도하는데 별로 관심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태신자를 등록시키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두고 전도해 보려고 애쓰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통계상으로 나타난 것을 보면 그렇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를 대망 하십니까 우리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믿음을 갖고 계십니까 그분이 다스리는 나라가 공의로운 나라라는 것을 여러분이 믿습니까 그 나라에만 소망이 있는 줄을 여러분이 확신합니까
그렇다면 그 나라를 나 혼자 들어가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서운 이기주의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한 주간 동안 우리는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자세를 가지고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쉽게 나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애간장을 태우면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나올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나와서 복음을 듣고 결신 하고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도 할 것입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걸어온 그대로 또다시 걸어나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던 간에 우리는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온유함을 가지고 그들을 대합시다. 인간적인 힘이 들어가면 안됩니다. 우리가 온유할수록 성령님의 능력은 강하게 역사 합니다.
할렐루야! 떠들 필요가 없습니다.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리를 지르거나 다툴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약함이 강함이요 부드러움이 강직함임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은 소경입니다. 죄의 종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덫에 걸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상한 갈대를 다루듯이 꺼져 가는 등불을 다루듯이 불쌍히 여기면서 조심하면서 다루어야 합니다. 완악하게 복음을 거역해도 그들에게는 아직 작은 불꽃이 남아있다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는 소망을 가지고 그들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놓고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도록 합시다. 하나님에게 절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기다림이 있을 뿐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지고 이번 한 주간 동안 내 주변에 있는 믿지 아니하는 불쌍한 자들을 찾아가면 우리의 손을 통해 우리의 입술을 통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입니다. 세상 나라에 절망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고 환호성을 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번 집회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도록 예수님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안 믿는 자들을 찾아갈 수 있는 귀한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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